로마서 특강-13 : 예배자 그리스도인 (12장)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드디어 로마서 11장까지를 다 끝내고 로마서 12장을 만납니다. 로마서 11장까지가 교리에 대한 부분이고, 12장부터 끝까지가 성도들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 세상과의 관계, 그리고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문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그 첫 번째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라"는 내용으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크게 두 부분인데, 이제는 제2부의 첫 번째 장을 열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 성경을 읽는 두 가지 렌즈
1절에서 말하는 형제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성경을 읽을 때는 두 가지 렌즈를 한꺼번에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렌즈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형제들아"라고 했으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렌즈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항상 역사적 배경과 동시에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 이 두 가지 렌즈를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형제들아"하는 말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로마 교회 성도들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로마 교회 그 자리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이방인들로서 다시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남은 자 사상을 공부했는데, 남은 유대인들처럼 유대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돌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형제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크게 통칭적으로 보면 로마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형제들아"할 때는 "그러므로 로마 교회 성도들이여"하는 동시에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여러분들이여"하는 말씀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2. 하나님의 자비로 권하는 네 가지
"형제들아" 앞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권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을 무엇을 빌어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떠올리면 어떤 것들이 생각납니까?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등의 하나님의 사랑 많은 성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여러 성품이 있는데, 하나님 성품을 수십 가지, 수백 가지 말해도 그중에 줄이고 줄여서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그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쥐어짜면 마지막에 엑기스 한 방울이 딱 떨어지는데, 그 성경의 엑기스 마지막 한 방울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논할 수가 없습니다.
2-1. 본성과 속성
하나님의 성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성과 속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성은 뿌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을 말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속성은 변주곡입니다. 사랑의 변주곡으로서 사랑이 이렇게도 표현되고 저렇게도 표현되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 분노하시고 진노하시고 질투하시고 때로는 소멸하시는 불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이 모든 속성도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 본성의 변주곡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사랑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권하고 있을까요? 네 가지가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과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사랑으로 권하고 싶은 것이 네 가지나 있습니다.
2-2. 첫째,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1절을 봅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일단 원어를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경에 "영적 예배"라는 말을 찾아보면 거기에 숫자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 숫자를 따라가서 밑에 내려가 보면 "합당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로기켄(λογικήν)이라는 단어로, "적당한"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asonable'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육체는 배제하고 영혼이 막 뜨겁고 간절하고, 뭔가 방언도 있고 은사도 있고 하는 것을 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록된 "영적 예배"라는 뜻은 "합당한 예배를 드려라"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 합당한 예배인가 보니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을 강조하셨습니다.
왜 몸을 강조했을까요? 지금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로마 교회 성도들입니다. 로마 문화는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로마가 그리스와 좀 다르고 발전된 것이 있다면 법과 건축 두 가지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베껴왔습니다. 로마 신화를 보면 신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리스 신화와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냥 로마식으로 이름을 불렀을 뿐입니다. 제우스가 주피터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에 대한 인식도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로마 사람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나 로마 사람들은 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몸 자체를, 사람의 육체 자체를 좋은 것으로, 선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플라톤이 쓴 글을 보면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천상에서 영혼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천상에서 굉장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의 주인이 화가 나서 "너 잠깐 갔다 와라"하고 보낸 것이 육체라는 감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을 일생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 탈출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고 신을 노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탈출해야 합니까? 합법적인 방법으로 전쟁에 나가서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다"하고 독배를 마시고 죽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런 의식을 가지고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육체에서 해방되는 영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긴 부작용이 있습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 정도로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육체를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육체를 대하는 철학자들의 두 부류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부류가 스토아학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도 나옵니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육체를 한없이 괴롭힙니다. 한없이 육체를 괴롭히고 굶기고 채찍질하고, 어떻게 해서든 육체를 괴롭혀서 이 육체를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 극단에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입니다. 역시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쾌락주의자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차피 버린 몸, 어차피 타락한 육체, 어차피 이 몸은 영혼의 감옥인데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남들에게 무슨 상관이냐, 피해만 안 주며 살면 되지"하고 마음대로 죄를 짓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더러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몸에, 이렇게 육체의 감옥인 몸에, 그러면 그분도 천상에서 누군가에게, 하늘의 주인에게 죄를 지어서 육체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런 문화가 그리스 문화에서 로마 문화로 그대로 옮겨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를 대하는 관점이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라고 말합니다. 산 제물은 무엇일까요? 제단 위에 올려놓고 각을 뜨고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 제물 하면 이삭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단에 딱 묶었습니다. 꽁꽁 묶었습니다. 살아있는 제물을 번제단에 묶으면 그 제물이 꼼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꼼짝할 수 없습니다. 꼼짝달싹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너희 몸을 너희가 주장하지 말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주장하시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 몸을 우리가 주장합니까? 하나님이 주장하십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놀고 싶은 데 가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산다면 이것은 그냥 주일날 와서, 수요 사경회에 와서, 금요일 날 와서, 새벽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육체를 주장하고 산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몸을 주장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내 몸을 내어드린다면, 하나님은 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으실 것 같습니까? 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실 것 같습니까? 한번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저는 산 제물입니다. 저는 제단 위에 그냥 벌거벗겨져서 딱 묶여있는 제물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 육체를."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 영적 예배라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우리가 이 몸을 그렇게 내어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욕망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어서 건강을 해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도록 또 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1년에 두 번 대청소하지 않습니까?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육체를 주장하신다면 이 몸으로 교회 구석구석을 쓸고 닦도록 하는 데 쓰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몸으로 교회 곳곳에 더러운 것, 쓰레기 줍고 버리는 데 이 육체를 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몸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이 몸이 의의 병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으면 누군가가 내 몸을 주장하는데 그 누군가가 사탄이 됩니다. 사탄이 내 몸을 주장하면 우리는 속절없이 끌려다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어떻게 했는지. 사탄이 내 육체를 가지고 죄 짓는 도구로 씁니다. 말로, 눈빛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발로 내 온몸이 죄 짓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성도들의 삶으로서 너희 몸을 꽁꽁 묶어서 하나님이 너희 몸을 주장하시도록 하라, 이것이 합당한 예배라고 합니다. 강력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2-3. 둘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2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 "본받다"라는 말은 쉬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동형으로 "무엇과 같은 모양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이 원형의 명사가 스케마(σχῆμα)라는 명사인데 "외형, 껍데기"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 "이 세대의 외형을 닮아가지 마라, 이 세대의 껍데기를 쫓아가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의 껍데기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권력이 있어도 그럴듯하게 보이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스케마가 뭔가 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허세를 좋아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가지지 못했는데 가진 척하려고 하고, 잘 모르는데 자꾸 아는 척하려고 하고, 있는 척하려고 하고, 행세하려고 합니다. 그런 허세를 따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스케마를 가지고 살려고 하는데 그런 것 절대 따라다니지 말라,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것 따라다니다가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2-4. 셋째, 변화를 받으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여기 "변화를 받다"라는 단어를 헬라어에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현재 수동형인데 "같이 변화되다"라는 뜻입니다. 명사의 원형이 모르페(μορφή)라는 단어인데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모르페는 본질이고, 스케마는 외형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는 것은 "스케마를 따르지 말고 모르페를 따르라, 외형을 따르지 말고 본질을 쫓아라"는 뜻입니다. 본질은 보이지 않고, 외형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본질보다 보이는 스케마를 따라 삽니다.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이면서도 스케마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스케마를 자꾸 따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스케마가 아닌 모르페를 보여주고 가르치며, 이것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교회가 멋진 건물 짓고 좋은 땅 사고 감사 예배드리고 기뻐하고, 교회가 스케마를 가지고 세상에 "어떤 교회들보다 우리 교회가 더 탁월합니다"라고 선전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을 다 배려 놓았습니다. 교회가 자꾸 스케마를 좋아하니까 성도들도 신앙 안에서 자꾸 스케마를 따르게 됩니다. 이런 이중적인 위선과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는 스케마를 절대 따르면 안 됩니다. 성도는 모르페를 따라가야지 스케마를 따라가면 큰일 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니엘 1장 8절을 봅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지금 남유다 말기에 귀족의 자제입니다. 귀족의 청년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 그런데 말이 포로지 포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포로는 쇠사슬에 끌려가서 질질 끌려가서 거기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때 데려간 포로는 그런 식의 포로가 아니고, 바벨론은 전쟁을 하면서 자기 나라의 인재가 부족하니까 그들이 정복하는 나라마다 탁월한 인재, 실력 있는 젊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 왕궁에서 가르쳤습니다. 바벨론 사람의 학식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법도를 가르치고 왕실의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대접했습니다. 그들을 바벨론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다니엘 입장에서는 망하는 유다에 있는 것보다 지금 떠오르고 있는 신흥강국 바벨론 제국의 시민이 되고 그 제국의 신하가 되어서 거기서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어쩌면 선택받은 일일지 모릅니다. 우리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닌 척하지 마시고, 우리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나를 바벨론의 시민 되게 하셨구나. 여기서 내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시는구나. 내가 여기서 이제 출세해서 대단한 직책을 가져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모르페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스케마를 따르는 삶입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그 당시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 숭배한 음식을 물려받은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먹겠습니까? 다니엘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 당시 다니엘과 함께 왔던 유다의 청년들은 한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출세하는 자리니까요. 그러나 다니엘과 믿음의 친구들은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불편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스케마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저는 모르페를 쫓아가겠습니다" 하면서 다니엘이 용기를 냈습니다. 환관장에게 구했습니다. 입을 떼는 것이 쉽습니까?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데, "저는 이거 못 먹겠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8절의 주어는 다니엘이고, 9절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환관장으로 하여금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페를 따르겠습니다. 저는 본질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외형 스케마를 따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때부터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일해서 출세하는 것이 쉽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쉽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다니엘 1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플러스 알파의 덤의 축복을 더해주셨습니다. 모르페를 따르니까, 스케마를 따르지 않으니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절대로 너희는 스케마를 따르지 마라, 모르페를 따라가라"고 말합니다.
2-5. 넷째,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분별하다"라는 뜻의 헬라어는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라는 단어인데, "불로써 순수성을 시험하다, 철저하게 가려내다"라는 뜻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성장은 분별로써 가름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다 좋아 보이거나 다 싫어 보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자랄수록 분별력이 생깁니다. 어떤 것은 내가 취해야 될 것인지, 어떤 것은 내가 취하지 말아야 될 것인지, 이런 자리는 내가 가야 될 자리인지, 이런 자리는 내가 사양해야 될 자리인지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력은 처음부터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 말한 것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드리고, 스케마를 따르지 않고 모르페를 쫓아가는 삶을 끊임없이 연습할 때 그때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지식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좋은 대학 나오고 학벌 좋고 학위를 가져도 분별력 없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받아도 될 돈, 받지 않아야 될 돈, 이것을 분별하지 못해서 감방에 가서 인생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이 못 배워서 그렇습니까? 많이 배웠습니다. 지위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가려내고 분별하는 것은 앞의 세 가지를 성실하게 이루어 낼 때, 믿음 생활에 연륜이 생기고 쌓이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내가 이 사람을 가까이 해야 될 사람인지, 아니면 책망해서 이 사람을 혼내고 믿음의 사람으로 바르게 세워야 될 사람인지, 아니면 격려해 주어야 될 사람인지, 사람에 대한 분별력도 이렇게 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거듭난 자들의 교회 생활
이제 2절까지 이렇게 길게 살펴보았고, 3절부터 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예배 공동체 거듭난 자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3절을 봅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 보니까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 각 사람은 누구일까요? 똑같습니다. 아까 우리가 1절에 읽었던 "형제들아"할 때 읽었던 로마 교회 성도들, 오늘 우리들입니다. 성경은 항상 두 가지 렌즈를 가지고 같이 보셔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예배 공동체에서 거듭난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성도는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여기서 네 가지로 아주 상세하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1. 첫째, 교만하지 말라
3절에서 읽었던 바 그대로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지 말아야 될 것도 있고 생각해야 될 것도 있고, 그것이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어를 보시면 "그 이상의 생각을 품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휘페르프로네오(ὑπερφρονέω)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높이 띄우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상의 생각을 품다, 스스로 높이 띄우다",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칭찬을 합니다. "집사님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집사님 어떻게 주일날 봉사를 그렇게 세 가지 네 가지를 하시고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십니까?" 이러다 보면 칭찬을 자꾸 받다 보면 스스로 자꾸 자기가 붕 뜨게 됩니다. 스스로 나를 띄우지 말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결단코 품지 말라, 성도는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의 첫 번째 덕목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 이야기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첫 번째 덕목으로 교만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까요?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에덴을 망친 죄가 교만의 죄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교만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을 봅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여자를 꾀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것이 교만 아닙니까? 여기에 혹하고 넘어가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 죄의 본질은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 바벨탑 사건도 인간의 교만 아닙니까? 탑을 높이 쌓아서 우리가 하늘에까지 닿으려는 것, 우리 이름을 내려는 것,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안 됩니다.
어디서 우리에게 교만이 많이 들어올 것 같습니까? 사람들이 직분 때문에 교만이 많이 들어옵니다. 가끔 성도들이 질문을 하시는데, "목사님, 저는 권사 언제 될까요?" "목사님, 저는 장로 언제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치 구슬치기도 아니고 딱지치기도 아닙니다. 권사, 장로, 집사를 딴다는 표현 자체가 굉장히 거북합니다. 이것은 마치 계급처럼 자꾸만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나쁠까요?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교회가 나쁠까요? 일차적인 책임은 먼저 된 자들에게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입니다. 먼저 된 직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계급을 따질 수는 없지만, 가장 대접받아야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에 가장 처음 나왔으니 새 가족이 하늘 꼭대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교회 마크 없어도 교회 주차장에 차를 그냥 아무 데나 갖다 대도 됩니다. "나 오늘 여기 처음 나왔는데요." 그러면 그냥 통과입니다. 누구나 다 올 수 있습니다. 그분이 새 가족 훈련받고 교육받는 동안은 교회의 VIP입니다. 누구도 그분에게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예배당에 처음 나오신 분, 난생처음 교회 나오신 분, 예배 시간에 좀 졸려서 주무셔도 누가 그분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배 시간이 지루해서 나갔다 오셔도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 나오신 분이 한 시간 앉아있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서 나중에는 허리도 못 펴게 되어야 합니다. 감히 장로님이 어디에 허리를 펴겠습니까? 주일날 교인들에게 인사한다고 허리가 굽어져서 허리 펼 새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목회자가 "내가 목사랍시고, 내가 목사인데" 이런 생각을 가지는 순간 그 목회는 망한 목회입니다. 목회자가 왜 청소하면 안 됩니까? 목회자가 쓰레기 주우면 왜 안 됩니까? 목회자가 성도들 모시고 여기저기 다니면 왜 안 됩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는데 목사가 못한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다른 목회를 한다"는 선언과 똑같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갈수록 낮아지고 갈수록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직분 받으면 곤란합니다.
직분자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잘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 때문에 상처받고 직분 때문에 말이 많고 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섬기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이렇게 남들에게 허리 숙이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뭔가 잘못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절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타인들에게 반드시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주면 그 상처받은 사람이 실족합니다. 그러면 내가 내 목에 연자맷돌을 매어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요. 고린도전서 13장 4절을 보시면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자랑하지도 말라, 교만하지 말라, 이것이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교만하지 않는 것, 정말 중요한 덕목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3-2. 둘째, 지혜롭게 생각하라
역시 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다"라고 하니까 "나는 지혜가 없는데"라고 생각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시면 에이스 토 소프로네인(εἰς τὸ σωφρονεῖ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이스는 "들어가다"(into)라는 뜻이고, 소프로네인은 "맑은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 안으로 들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즉 "정상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부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분량대로 정상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믿음도 성장하고 자랍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정상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도, 교회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이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진 분들은 그 믿음의 분량대로 정상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정상적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활입니다.
가끔씩 가정에서 불일치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배우자 몰래 "목사님 이것을 선교 사업에 써주십시오"하고 생각보다 꽤 큰 헌금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의논하셨습니까? 남편분 혹은 아내와 의논하셨습니까?"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해야 하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사청문회를 보면 장관 후보가 될 사람들이 "그것은 아내가 한 일입니다. 저는 모릅니다"라고 합니다. 거액인데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거액을 투자하고 집을 사고 땅을 사고 하는 일에 남편 모르게 부인 혼자 할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정상적으로 생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도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적,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상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3-3. 셋째, 한 몸 의식을 가지라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모두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한 몸이라는 의식을 꼭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저는 항상 종이를 가까이 하니까 책장을 넘기다가 손끝이 종이에 잘 베입니다. 손끝이 종이에 베이면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물 넣기도 그렇고 뭘 해도 아프고, 피부가 벌어지면 벌어진 자리에 물이 들어오면 얼마나 쓰린지 정말 아픕니다. 그런데 손끝이 아프면 머리가 느낍니다. 온몸이 다 느낍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고통받고 누군가가 아프면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아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가 아프건 말건, 형제가 죽어나가건 말건, 그분의 마음이 아프건, 그분의 심령이 어떻건 관심 없다면 우리는 한 몸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모두가 다 한 몸입니다. 그 의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3-4. 넷째, 은사를 인정하라
6절을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절, 8절까지 쭉 가면 은사를 쭉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운전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환경 미화의 은사가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노래 찬양의 은사가 있는 사람, 다 다릅니다. 각자의 은사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누구는 이런 것 하고 누구는 저런 것 하고" 하면서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혹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교회 공동체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인정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라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살아가는 거듭난 사람들의 네 가지 자세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만하지 말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라, 한 몸 교회 공동체 지체 의식을 가지고 살아라, 그리고 서로의 은사를 인정하라, 기억하십시오.
4. 선으로 악을 이기라
9절에서 21절까지는 윤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윤리입니다. 우리는 윤리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옛날에 고등학교 때 배웠던 윤리책 같은 것이 떠오릅니까? 윤리라고 하면 우리는 십계명을 떠올려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도 십계명의 틀 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이 없습니다. 이웃 사랑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윤리는 첫 번째 돌판 하나님 사랑, 두 번째 돌판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윤리는 위로는 하나님 사랑, 아래로는 이웃 사랑, 이것을 꼭 가지고 있는 윤리입니다.
먼저 9절을 봅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간단한 말씀입니다. 21절도 보겠습니다. 제일 마지막 절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9절이나 21절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바울이 왜 하고 있느냐 하면, 9절에서 21절은 하나의 틀 안에 있는 것입니다. 9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결국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9절과 21절 똑같은 말씀을 처음과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하는 방법을 10절에서 20절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조가 이해되십니까? 9절과 21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야기이고, 처음과 끝을 똑같은 결론을 내려놓고 그 가운데 10절에서 20절까지는 어떻게 하면 선으로 악을 이길까 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바울이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런데 바울은 이웃을 다시 두 갈래로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웃 성도, 교회 밖에 있는 이웃 세상 사람들로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10절에서 20절까지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다시 두 갈래로 교회 안에 있는 이웃 성도, 교회 밖에 있는 이웃 세상 사람들로 나뉩니다.
4-1. 이웃 사랑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성도와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이웃 성도, 교회 밖에 있는 이웃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여기 두 번 반복된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성도의 윤리는 상호성의 윤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이 10절은 성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상호성의 윤리입니다.
장로님들은 인사만 받는 사람이고 집사님은 인사만 하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인사해야 합니다. 목사는 인사받고 성도들은 인사만 하는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백성으로서 상호성이 있습니다. 서로 인사해야 합니다. 서로 반가워해야 합니다.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는 노예 제도가 살아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노예도 교회 왔고 주인도 교회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주인과 노예가 한 교회에서 서로 만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인사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성도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사람이 따로 있고 사랑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13절도 역시 성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나눔을 하라는 것입니다. 형편이 좀 넉넉한 분은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놓으라, 내놓고 베풀어라, 너희들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고 내놓고 베풀어라,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한 방법이다, 성도들에게 나누라, 이 말씀입니다.
14절은 세상을 대한 자세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박해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으니까요. 세상에 대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로 저주하지 말라, 축복하라, 세상 사람들을 축복해 주라, 그들에게 자꾸 악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교회가 비난을 받을 때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저주하시면 안 됩니다. 축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잘 섬기겠습니다" 하고 세상을 향하여 흘려보내고 축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15절은 성도와 세상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교회 안 성도들에게나 교회 밖 세상 사람들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둘 중에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까? 전자가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악한 본성상 장례식 가서 위로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시험에 떨어져서 위로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잘 되고 축복받을 일이 막 넘쳐나는데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자꾸, 속이 뒤틀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노력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도 세상에게도 그렇게 자꾸 연습해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4-2. 하나님 사랑
성도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다음에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방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막 악한 말을 합니다. 내가 화가 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참소하고 화가 납니다. 그러면 우리도 얼굴을 그쪽으로 돌려서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냅니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나는 두 대 때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못할 말 하면 나는 열 마디 쏘아 붙여주고, 그래야 속이 풀리니까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어떤 일이 있어도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던 일을 해라, 그냥 성도면, 집사면, 교회 직분자면 교회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겨라, 세상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하건 거기에 마음 두지 말고 골몰하지 말라, 그 일 때문에 너의 사명을 그르치지 말라, 그래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12절에 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억울함을 풀어야 합니다. 억울하니까요. 악한 일을 당하면 마음의 분노가 쌓이고 억울한데, 이것을 누구에게 하소연합니까? 어디 가서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것을 못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주님 앞에 와서 실컷 울고 나면 해소가 됩니다. 풀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신적 위로로, 하늘의 놀라운 위로로 우리 상한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16절은 중간 결론입니다. 가장 중요한 지침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한마디로 말하면 겸손하라는 뜻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웃 사랑은 성도 사랑과 세상 사람 사랑, 이 모든 것은 다 겸손해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기억하십시오.
5. 원수 사랑의 실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최고의 단계는 원수 사랑입니다. 바울은 원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라고 가르칩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원수 사랑 아닙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면 졸업해도 됩니다. 이제 하산하셔도 됩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원수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도모하라"는 말이 헬라어 원뜻을 찾아보면 "미리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미리 생각하라, 계획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선한 생각이 나오지 않습니다. 화가 막 나면, 갑자기 화날 때 선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혹시 배신당하면 나는 이렇게 해야지, 오늘 혹시 내가 운전하고 가다가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접촉사고 내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갑자기 나가서 실컷 욕하고 나서 "아차, 내가 교회 권사인데 저분이 날 알아봤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끝났습니다. 이미 그때는 늦습니다.
그래서 "도모하라", "미리 생각해 두라"입니다.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이런 상상의 나래를 자꾸 펼치셔서 "나는 원수 갚지 않아야 되겠다,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의 계획을 꼭 가지고 계십시오.
18절, 또 원수 사랑을 어떻게 하라 했느냐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두 가지를 봐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참 안 되지, 너희들. 그런데 할 수 있거든 한번 해보려무나"하는 바울의 따뜻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화목하라"를 살펴야 하는데, 이전에 로마서 2장, 3장, 4장을 공부할 때 화목제물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화목제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화목제물은 바로 희생입니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여기 "화목하라"는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네가 죽어라"는 뜻입니다. 너의 자아를 죽여라, 너의 욕심을 죽여라, 너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손해 의식을 죽여라, 네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불신을 죽여라, 그래야 너는 화목할 수 있다, 이웃과. 이 말씀입니다.
19절, 또 원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되는가 봅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원수 갚으려고 하면 밤잠 못 잡니다. 화가 나서 할 일도 못합니다. 분노 때문에요. 시편 23편 5절을 한번 볼까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이 원수 갚는 방법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 갚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너 죽고 나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수 갚으면 전부 다 파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수 갚아주시는 방법은 특별합니다. 원수 앞에서 나를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내가 더 잘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야 원수가 배 아파서 죽을 것 아닙니까? 원수가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할 것 아닙니까? 원수도 다시 한번 그것을 보고 돌이키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잘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가끔씩 화가 나면 한 번씩 저주는 좀 하셔도 하나님은 이해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원수 갚으려고 그렇게 애쓰거나 노력하지 마십시오.
20절을 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숯불 쌓아놓으면 타 죽겠습니까? 이것은 고대의 사고방식, 고대의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 25장 21절과 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이니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잠언 말씀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면 숯불을 머리 위에 쌓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 여러 주석들, 여러 해석들이 있는데, 그중에 믿을 만한 것 두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숯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 얼굴이 벌개집니다.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그것처럼 원수에게 우리가 먹을 것도 주고 마실 물도 주고 잘 대해주면 민망해서, 부끄러워서, 마치 숯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도록 그렇게 섬겨주어라 하는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은 고대의 문화를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인데, 숯불이 고대에는 귀했습니다. 숯 자체가, 불씨 자체가 귀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불씨를 꺼트렸습니다. 그 귀한 불씨를 원수가 우리 집에 구하러 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얼어 죽든 말든 눈 딱 감아야 합니까?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고대 문화에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숯불을 주었다고 하면 이 사람의 이름을 찬양하면서 머리에 숯을 이고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찬양하면서요. 그래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을 베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이 됐건 중요한 것은 원수에게 베풀라는 뜻입니다. 뭐라도 원수에게 뭐라도 베풀어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바울이 교회 공동체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굉장히 무겁습니다. 오늘 제가 많은 이야기를 드렸는데, 이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우리가 오늘 지키고 있는가, 오늘 이 시대의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는 대부분 지키지 못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부터 우리는 잘 안 됩니다. 몸 자체를 컨트롤하는 것부터 힘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로마서 12장 말씀을 다시 한번 잘 읽어보시면서 다시 한번 돌이켜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진리의 말씀으로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 생활은 이렇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우리 몸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몸을 내가 주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제물로 드리기 원하오니 하나님 뜻대로 우리 몸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성도로서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교만하며 살고 자랑하며 살고 으스대며 살고, 직분 받았다고 자랑하며 살았던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져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의 책무를 이루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원수 사랑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