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전체녹취

로마서 특강-14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13장)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

우리가 지금 로마서를 일주일에 한 장씩 공부하면서, 8장은 두 번에 걸쳐 다루었고 오늘 13장을 함께 공부할 순서입니다. 11장까지는 교리를 다루었고,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 바울이 상세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2장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도가 교회 안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두 가지이지 않습니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인 동시에, 우리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는 양자적이고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살 것인가를 13장 말씀에서 교훈합니다. 크게 세 꼭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국가 안에 있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국가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좋은 국가도 있지만 부당한 국가, 그리고 국가가 내리는 부당한 명령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이 국가와 어떤 관계성을 맺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가 첫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해서입니다. 여기서 이웃은 교회 안에 있는 이웃이라기보다 교회 밖에 있는 이웃,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 번째가 종말에 대해서입니다.

갑자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다루다가 종말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하면, 세상 가운데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의식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재림주로 보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냥 망각하고 마구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국가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믿지 않는 이웃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며,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주제가 오늘 13장의 주제입니다.

1. 국가에 대하여

1-1. 복종의 참 의미

먼저 국가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바울이 명령형으로 강하게 주장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명령형으로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명령입니다. 명령을 한다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아주 강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여러분은 이 1절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긍정적인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불편하고 기분이 나쁘십니까? 긍정적인 마음보다 기분 나쁘고 불편하다는 후자의 느낌이 조금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감적으로 별로 좋지 않게 받아들이는 단어인 '복종'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기서 복종이라는 단어를 "너희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라"라고 했으면 우리는 백 번 복종하겠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니까요. "너희는 그리스도가 주신 말씀에 복종하라"라고 하면 당연히 복종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시 찬찬히 보겠습니다. "각 사람은"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각 사람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너희 각 사람은"이라는 뜻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아이스 휘페레쿠사이스'(ἐξουσίαις ὑπερεχούσαις)는 지배권을 가진 정부라는 뜻입니다. 즉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는 말은 특정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칭적으로 권세 잡은 정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기관, 정부, 행정부를 전체적으로 통칭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각 사람은 이 땅에 권세를 가진 나라 정부에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이 '복종'이라는 말이 헬라어에서도 그대로 복종이라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복종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타세스도'(ὑποτασσέσθ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라는 원형의 명령법 중간태입니다. 중간태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신 분들이나 우리말 문법에도 능동태가 있고 수동태가 있습니다. '때린다' 하면 능동이고 '맞는다' 하면 수동입니다. 내가 동작을 당하는 것이니까요. 중간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영어문법에 보면 재귀적 명령이라는 문법이 있습니다. 재귀적, 즉 동작이 주어에게 그대로 돌아가는 문법이 중간태입니다.

헬라어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여기에 집어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성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능동적으로 대처하십시오." '복종하라'라는 말보다 훨씬 더 어감이 순화되지 않습니까?

조금 더 우리 식으로 바꾸어서 표현해 보면, 복종하라는 말은 내가 가만히 있는데 정부에서 명령을 자꾸 내리는 상황입니다. 열 가지 명령을 내리면 나는 하기 싫습니다. 그중에 아홉 가지도 하기 싫고 열 가지 다 하기 싫습니다. 그런데 안 하면 안 되니까 억지로 몇 가지를 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복종입니다. 그런데 '능동적으로 알아서 대처하라'라고 옮기면 우리가 정부에서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은 알아서 하십시오라는 의무입니다.

휴지를 줍지 않고 그냥 가면 벌금 냅니다. 길바닥에 침을 뱉으면 경찰이 보면 경범죄로 딱지도 떼고 벌금을 냅니다. 주차위반, 신호위반 다 벌금 냅니다. 그렇게 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알아서 능동적으로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가 여러분에게 선한 결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중간태는 주어가 한 동사의 행위가 주어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중간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면 그 선한 행위가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읽으면 이 말이 전혀 거북하지 않습니다.

사실 국가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규제가 많습니다. 규제가 많으면 그 법이 많으면 사람들은 율법에 매여 삽니다. 요즘 우리가 신문지상을 보면 국회에서 법 통과시킨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법에 기대는 것보다 우리나라 국민들 일반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좋을 뻔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을 보면 차라리 법보다는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서 대처해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선한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국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될 일을 알아서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1-2. 권세의 기원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기분 나쁘게 왜 알아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역시 1절에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고 말합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그 옛날에 2차 세계대전의 장본인이었던 히틀러도 하나님이 그 권세를 정하셨는가? 북한의 3대 세습 정권도 하나님이 정하신 정권인가, 권세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맞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우리가 수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하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테타그메나이'(τεταγμέναι)입니다. '타소'(τάσσω)라는 동사 원형의 완료분사 수동태입니다. 즉 '임명받아서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김정은 정권, 저 3대 세습 정권은 자기가 하나님께 임명받아 세워진 정권이라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그들은 모르겠죠.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서 이어온 세속의 악한 권력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임명받아 세워진 권력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웠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권세들을 "내 종이다, 내가 임명하여 세웠다"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25장 9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지금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을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십니까? 느부갓네살이 어떤 인간입니까? 남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짓밟았던 왕입니다. 바벨론의 악한 왕 중에 악한 왕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1차, 2차, 3차 침공을 해서 포로를 잡아가고 남유다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불질렀습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그릇을 다 바벨론으로 옮겨갔습니다. 남녀노소,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그의 칼날에 죽어 나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았습니다. 왕이 보는 앞에서 왕자를 죽였습니다. 그런 악한 왕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한 왕을 하나님이 '내 종 느부갓네살'이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됩니까? 세상의 악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권력을 하나님이 세우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안에서 고통받고 힘겨워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 땅 백성들이 악을 행해서 악한 왕을 세워 진멸하기 위해서 악한 왕을 세우셨다고 쳐도, 그 땅 백성들 중에 선한 사람, 착한 사람,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난제로 남겨두어야 됩니다. 사실 성경을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 백성들의 악이 관영하고 너무너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을 자신의 종으로 들어다가 그 땅을 진멸시킨 것이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속의 권력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서 하나님께서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 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고레스 임금 같은 분입니다. 이사야 44장 28절을 보겠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고레스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표현하셨습니까? '내 목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왕을 목자라고 칭하신 사람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고레스 이전에는 다윗밖에 없는데 고레스에게 '내 목자라' 하셨습니다.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레스 임금이 누굽니까? 바사, 성경에는 바사라고 했고 세계사에는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의 황제, 페르시아의 첫 번째 황제가 고레스입니다. 고레스는 포로 해방의 칙령을 내렸습니다. 바벨론이 남유다를 패망시키고 포로들을 잡아갔습니다. 70년이 지났습니다. 포로로 잡아간 지가요.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세우시고 고레스를 통해서 포로를 다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보면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나라가 바벨론이고, 바벨론은 남유다를 멸망시켰고, 그 바벨론을 멸망시킨 나라가 페르시아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내 목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자라고 칭하는지도 모르고 행한 것입니다. 그냥 자기가 왕이 되고 나니까 그 옛날 바벨론이 포로로 잡아왔던 사람들이 자기 영토에 가득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정치적인 소신과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을 해방시켜서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의 목자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이방의 여러 나라 왕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임명되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1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고레스를 또 어떻게 부릅니까?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부릅니다. 아까는 '내 목자'라고 했죠. 지금은 고레스를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부릅니다. 이방의 왕인데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를 든 이유는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고 했고, 고레스를 '내 목자', '내가 기름 부어 세울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속의 권력들, 권세들을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사람은 싫어도, 그 사람은 미워도, 그가 하는 모든 행위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따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을 보고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면 우리가 양심에 따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그 여지가 나옵니다.

1-3. 국가의 두 얼굴

국가를 대하는 국민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딱 맞는 말씀입니다. 다스리는 자들, 국가권력입니다. 국가권력이 우리에게 두려울 때, 우리가 국가 공권력이 두려울 때 언제 두렵습니까? "선한 일에 대하여는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야 된다" 이 말은 내가 악을 행하면 공권력이 두렵다는 뜻입니다. 뺑소니 하면 공권력이 두렵죠. 교통신호 어기고 도망가면 공권력이 두렵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경찰차 지나가는 것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하면 국가 권력이 왜 두렵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능동적으로 알아서 너희가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국가권력과 네가 전혀 상관없이 살려느냐, 그러면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은 하나님 앞에 선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선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국가권력 하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오히려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만약에 이렇게 우리가 선을 행하고 국가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공권력이 국민을 억압한다면 그 국가권력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아합을 보십시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자,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오히려 국가권력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임명하셔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셔서 세우신 국가권력이기 때문에 그를 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 패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국가권력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바울은 국가권력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첫째, 국가권력, 여기서 '그'라고 표현된 것은 국가권력입니다. 이 국가권력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사역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국가권력에 대해서 굉장히 친근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역자'를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고 했습니다. 여성 명사입니다. 헬라어의 여성 명사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조력자, 돕는 자입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말은 때로는 따뜻하게 너희를 품어주고, 돌봐주고, 사회적 복지를 해주는 국가권력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두 번째로 바울이 정의하는 국가 권력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헬라어를 보시면 '하나님의 일꾼'은 '레이투르고이'(λειτουργοί)라고 해서 남성 명사를 씁니다. 헬라어에서 남성 명사는 굉장히 강인하고 강직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국가 권력을 하나는 여성 명사로, 하나는 남성 명사로 표현했습니다. 때로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품어주는 어머니 품 같은, 때로는 엄격하게 책망하고 나무라는 아버지의 회초리 같은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래 국가권력이 이래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울의 의미는 국가권력은 양자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정치하시는 분들이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될 텐데, 국가는 엄격한 법 집행이 있어야 되는 동시에 때로는 하나님의 사역자처럼, 어머니처럼 따뜻한 품이 있어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힘든 자,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을 품어주는 아량과 포용, 따뜻함도 있어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만약에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면 국가권력의 누수현상이 일어나겠죠. 국가권력은 두 가지 다 있어야 된다는 것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4. 세금 문제

바울은 세금 문제를 어떻게 정리합니까?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죠. 국민이 국가에 대해서 행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옛날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국민의 사대 의무에 대해서 배우셨죠. 여러 가지 의무가 있는데, 국방의 의무도 있고,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도 있습니다. 그 중에 납세, 즉 세금의 의무가 중요합니다. 세금을 내야 국가 재정이 돌아가니까요.

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서 '조세'와 '관세'라고 표현된 헬라어를 보시면 '포로스'(φόρος)와 '텔로스'(τέλος)라고 되어 있습니다. 포로스와 텔로스를 오늘 우리의 언어로 옮기면 포로스는 직접세이고, 텔로스는 간접세입니다. 우리나라 세법에 의하면 직접세가 어떤 것입니까? 즉 세금을 내는 사람이 직접 세금의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이런 것이 직접세가 되겠죠. 상속을 내가 받았는데 세금을 내야 되니까요. 법인이 법인세를 내야 되고,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 되니까요.

그런데 간접세는 내가 뭔가를 내는 것이 아니고 그 세금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는 것입니다. 부가가치세는 기업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에 대한 부가가치세는 구입하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증권거래세는 증권장에서 증권, 주식을 사고파는데 세금이 붙고, 그 세금을 사고파는 사람이 내는 것입니다. 어쨌든 직접세와 간접세, 조세와 관세, 포로스와 텔로스로 바울이 세금을 나눴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은 우리가 세법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니까 세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자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조세도 내고 관세도 내라는 것입니다. 즉 국가가 정한 세금은 내라는 것입니다. 그냥 아까 우리가 1절에서 본 것처럼 능동적으로 대처하라, 세금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모범을 보여라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금에 대해서 조세 저항을 해야 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당한 세금, 정상적인 세금은 내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인 납세에 대한 문제를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인 납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비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인 세금납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든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80% 이상이 세금을 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될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왈가왈부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 세금 문제 때문에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이 조세 저항하는 것처럼 보여서 복음 전파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능동적으로 알아서 대처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교회가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역자들은 근로소득세를 다 냅니다. 그렇게 기억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 땅에 있는 교회 목회자들이 소득세를 다 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형교회 교역자뿐만 아니고 일정 부분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을 다 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세금이든지 국가가 정한 세금이면 조세 저항하지 말고, 복음에 걸림돌이 되지 말고, 알아서 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 불의한 권력 앞에서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양심을 따라 하라' 여기서 양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타고난 양심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복음적 양심에 따라서 하라는 뜻입니다. 국가에 대해서 즉, 바울이 여기서 이제 여지를 하나 주는 것이죠. 불의한 권력, 아무리 봐도 이 권력은 너무 불의하지 않습니까? 아합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엘리야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엘리야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권력에 대해서 자기는 끝까지 항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보면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는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양심을 따라 행동하라, 이것은 여지를 준 것입니다. 우리가 저항할 것이 있으면 저항하고, 아니라고 말할 것이 있으면 아니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일제시대 때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정복했습니다. 교회 문을 닫아 걸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신사참배해야 됩니까? 불의한 권력이, 선한 양심에 따라서 우리가 비추어 보면, 그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공산당을 섬기고 공산당 강령에 의하면 예배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성도들을 미워하고 오히려 그들을 고발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의 여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웃에 대하여

2-1. 사랑의 빚

이로써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제 이웃에 대해서입니다.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성도가 이웃에 대하여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저 사람에게 내가 이런 도움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가?" 괜찮다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내가 사랑의 빚 이외에는 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금전 거래 같은 것도 다 들어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그에게 뭔가를 공여하고 부탁하는 것, 그런 것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빚만 지라, 호의적인 빚만 감당하고 지라는 뜻입니다. 이권이 개입된 것, 그것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얽히고설켜서 거기에서 죄악된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공하고 출세하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 그들 방식의 일을 따르느라 말씀을 어기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사랑의 빚만 져라, 그것 이외에 지나치는 것 아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 잘 섬기고 사느라 땅 한 평이 없었습니다. 땅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내를 어디다 장례를 지냅니까? 그런데 그때 헷 족속이 와서 "아브라함이여,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운 지도자이시니 당신 눈에 보이는 어떤 땅이든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당신의 아내를 어디에 매장하든지 우리 중에 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절대 받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시가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땅을 삽니다. 그리고 그 땅에 굴을 하나 택해서 그 막벨라 굴에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시신을 안장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깨끗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2-2. 사랑과 율법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것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다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잘 알고 있는데, 십계명은 돌판이 두 개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1계명에서 4계명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 돌판은 5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두 번째 돌판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특징이요, '뭐뭐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우리는 이런 계명을 소극적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계명은 '하라' 계명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계명을 소극적인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10절에 보니까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하지 않는 것도 소극적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도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이 말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여기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나는 행위로서 간음만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다. 나는 행위로서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했을지언정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마태복음 5장 22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은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언어로 풀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 '라가'는 '바보' 이런 뜻입니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다 살인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극적 계명에 그치지 말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계명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루 살면서 형제를 욕하고 마음으로 저주하고 책망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자리에 누워서 하루를 쭉 반추해 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언행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믿지 않는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소극적인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주문하고 계십니다.

간음에 대해서도 봅시다. 마태복음 5장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음욕을 품고, 이미 마음속에 음욕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행하지 않았을 뿐 이미 너는 간음한 자니라. 예수님의 계명에 의하면 이 법망에서, 예수님 말씀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계명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이고 더 능동적인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장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이 시작되기 전에 바로 그 전 장의 마지막 절인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이 중요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입니다. 은사를 계속해서 바울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믿음의 은사 등등 수십 가지 은사를 다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나서 13장 사랑장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 가져야 될 자세는 사랑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저 인간들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정치인들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이웃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마음을 기본으로 깔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바라볼 때는 사랑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보라. 그러면 이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저들은 저런 인생을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한 번 더 기도해 줘야 됩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그 이야기를 바울이 계속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종말에 대하여

3-1. 카이로스의 시간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서 사는 단계에서 바울이 뜬금없이 웬 종말을 얘기하느냐?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세상에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종말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얼마나 바쁩니까. 직장생활 하느라 얼마나 힘듭니까. 처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바쁘고, 중년은 돈 버느라 바쁘고, 노년은 손주 돌보느라 바쁘고,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전부 다 바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종말이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 없이 살다가, 덜컥 내가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정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거나 하면 급격한 우울증이 옵니다. 그때 갑자기 종말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종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로마서 13장 11절에서 14절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이 성경 읽다가 이 구절을 읽다가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에 대한 구절입니다. 어거스틴이 여기서 갑자기 깨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유명한 어거스틴이 깨지면 뭐합니까? 내가 안 깨지는데, 내가 회심하지 않는데, 나하고 관계 있어야지, 어거스틴이 회심한 것과 이 말씀은 나하고는 별 관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기억하셔야 됩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지금 여기 '시기' 그리고 '때'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시기'는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카이론'(καιρόν)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형은 카이로스입니다. 그리고 '때'는 '호라'(ὥρα)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를 얘기하려면 크로노스(χρόνος)를 얘기해야 됩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설명드리면, 아마 자주 들어서 기억하시는 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들을 때마다 알겠는데 듣고 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또 그렇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어떤 인간이 태어났죠. 청년이 되죠.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고 그리고 늙어 죽습니다. 그것이 크로노스입니다. 태어나서 쭉 흘러가는 시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쭉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냥 물결같이 흘러가는 흐름의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크로노스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뭐냐? 결단의 시간입니다. 기회, 결단의 시간입니다.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의미 없는 인생을 살다가, 타락하게 마구 막 살다가, 갑자기 어떤 계기로 딱 깨닫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이 크로노스의 방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생아도 낳고 그렇게 방탕한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살다가, 이 성경 말씀을 읽다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그때가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바울이 의미 없는 나쁜 짓을 하며 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다가 옥에 넘기고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 핍박하고 막 살았던 시간,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기회의 시간, 결단의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말은 흘러가는 때 가운데 이 시기를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크로노스의 시간은 잠든 시간이었다,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깰 때가 되었다. '호라', 정해진 시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이다. 반드시 일어날 때가 되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인간은요, 성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 동안 돈을 벌지 않습니까? 직업의 현장에서 직장 생활하고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자식 위해서 쓰고, 가족 위해서 쓰고, 내 노후를 위해서 저축합니다. 그렇게 살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돈벌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물질을 이제는 내가 뜻깊게 써야 되겠다는 결단이 딱 생깁니다. 그때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내 자식 위해서 쓰고, 내 노후 위해서 썼지만, 이제는 내가 이 물질을 하나님 위해서 한번 써 봐야 되겠다. 그리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나에게 도래한 것입니다.

건강, 지금까지는 내가 평생 동안 영원토록 100살 200살까지 오래 살려고 건강 유지하고 운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 읽다가 딱 깨달으니까, 이제는 이 건강 하나님 위해서 한번 불질러보겠다, 불태워보겠다, 이런 결단이 생기고 이 몸이 부서지더라도 열심히 복음 전도하고,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살겠다. 그러면 그때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카이로스의 결단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됩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대로 살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어떻게 말씀드리려고 그럽니까?

이것은 바울이 신약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이 전도서에서도 먼저 말해두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을 봅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때가 있다고 했죠. 천하만사가 때가 있다. 이 때가 바로 신약식으로 얘기하면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솔로몬이요, 평생 동안 태어나 보니 왕자입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다윗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귀영화 누렸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광야에서 수십 년을 보냈지만, 그는 광야에서 살아본 적도 없습니다. 평생 동안 부귀영화 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인생 말년에 전도서를 쓸 때 그때가 되어 보니까, 나는 지금까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았구나, 덧없이 의미 없이 이 물질 가지고 누리며 살았구나, 이제는 결단해야 될 때가 되었구나,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12장 1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여기 보시면 '너는 청년의 때에' 청년의 때가 뭡니까? 20대 30대 그것을 청년의 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청년의 때는 내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이 아직 너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곤고한 날은 뭡니까?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이 끝까지 다 흘러가서 마지막에 끝나버릴 때, 그렇게 해서 죽는 날이 오기 전에, 그때 아직까지 기회가 있을 때, 그때 너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살다 보면 돈 번다고 바쁘고, 먹고 사느라 바쁘고, 가정생활하느라 바쁘고, 이렇게 살다 보면 크로노스의 시간 가운데 흘러가다가 끝나버리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때를 기억하라, 하나님께 결단할 때가 있다. 이 결단할 때 반드시 결단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2. 빛의 갑옷

12절에서 14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을 읽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것은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볼까요? 밤과 낮, 이분법적이죠. 어둠의 일, 빛의 갑옷, 반대죠. 벗고, 입자, 반대죠.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밤, 어둠의 일, 그리고 그것을 계속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려고 결단한 사람은 이제 낮이 가까웠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신앙은 회색지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밤 아니면 낮이고, 빛의 갑옷 아니면 어둠의 옷이고, 벗는 것 아니면 입는 것입니다. 신앙은 대충 엉거주춤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바지 올릴 때 엉덩이까지만 바지 올리고 길에 나가는 사람 있습니까? 엉거주춤하게 옷을 입을 때, 그냥 위에 셔츠 입을 때 머리까지만 입고 밑에까지 다 내리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사람 없지 않습니까? 입든지 벗든지, 자든지 깨든지,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옷을 벗고 그렇게 살아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회색지대가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든지 아니면 결단하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들어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의 시대에 살고 있는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로마가 그 당시 세계 최강대국 아닙니까? 거기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종말을 기억하라, 크로노스의 시간의 끝은 반드시 온다고 말합니다.

13절, 14절을 읽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즉 빛의 갑옷을 입고 결단하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뜻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맺음말

오늘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바울이 말씀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오늘은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진리 가운데 살아가야 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말씀할 것입니다. 진리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세상 가운데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항상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14장에서 나눌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이 전한 로마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 진리와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국가권력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국가권력에 대처하도록 도우시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불의한 권력, 악한 권력에 대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때 복음을 잃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가치를 절대 잊지 않고 마음에 꼭 가지고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될 것은 여전히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기회를 붙잡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며, 결단한 대로 주의 말씀대로 능력 있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우리는 물질도 우리를 위하여 쓰고 건강도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들을 위하여 사용했지만, 이제는 결단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믿음의 백성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