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15 진리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 (14장)
본문: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오늘은 로마서 특강 열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14장을 함께 공부할 차례입니다. 로마서가 처음 대할 때는 상당히 거대한 산성같이 느껴지고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을 텐데, 이번 로마서 특강 시간을 통해서 그래도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되셨다면 성공하신 것입니다. 다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세세하게 기억이 안 된다 하더라도, 은혜가 되고 한 번 더 도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가지셨다면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찬찬히 로마서를 1장부터 보시면, 다져지고 또 다져져서 나중에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 부분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도의 생활 그리고 로마 교회에 보내는 안부와 사랑의 인사 부분입니다. 12장은 성도들의 삶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고, 13장 말씀은 성도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14장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교회 안에 살건 교회 밖에 살건, 꼭 붙잡고 살아가야 할 것, 절대로 빼앗기지 말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질보다 비본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질은 그냥 내팽개치고 비본질 때문에 목숨 걸고 서로 다투며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들은 본질을 놓치지 마라. 교회 안에 일어나는 여러 다양한 분쟁들, 논쟁들, 말들, 행위들 다 집어치우고 한 가지 본질만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오늘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의 연약한 자
1-1. 음식 문제
바울은 로마 교회 편지를 쓰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 '믿음이 연약하다'는 말은 상당히 주관적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저 사람은 믿음이 연약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분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객관적 기준이 없습니다. 직분이 있으면 믿음이 좋고 직분이 없으면 믿음이 약하다는 것도 아니고, 교회 오래 다녔으면 믿음이 강하고 이제 막 교회 첫 발을 내딛었으면 믿음이 약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굉장히 재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일까요? 2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문제를 가지고 믿음의 여부를 따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절대 못 먹겠다며 채소만 먹겠다는 사람도 있다는 뜻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저 사람은 왜 저 고기를 안 먹을까 하며 손가락질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고기가 왜 문제가 되는가? 로마 교회는 이방 사회입니다. 로마에 가면 우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 우상을 로마에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우상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 지내고 제물을 바쳤으며, 그 바쳐진 고기가 시장에서 유통되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유통되었는데,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고기를 내가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장 가서 매번 물어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탄로 나니까 그것을 묻지도 못하고, 아예 안 먹겠다며 채소만 먹겠다고 선언해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그런 것 상관없이 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절대적인 믿음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울이 편의상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나눈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우상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귀신이라는 것은 하나님보다 열등하며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과거의 다니엘이 율법에 의거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논리에 의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상관하지 말고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먹지 못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 공동체에는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 그룹은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어떤 그룹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꺼려하고 먹지 않으려 했을까요? 유대인이었다가 개종한 사람들은 이방신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습니다. 율법에 오랫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그것 자체가 본능적으로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다가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은 그것이 뭐가 문제냐며 그냥 먹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무슨 뜻일까요? 먹어도 된다는 지식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만 가지고 계속 강조하면 이것은 교만하게 만들고, 못 먹는 사람도 품어주는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8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믿음이 약한 사람들, 이제 막 유대교에서 개종해서 교회 공동체에 첫 발을 딛는 사람이 볼 때, 바울 같은 교회 공동체의 리더급에 있는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마구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을 자유도 있고 권리도 있으나,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자유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장 13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안 먹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어도 되지만 형제들이, 믿음이 약한 형제가 혹시나 그것 보고 실족할까 봐 그래서 먹지 않겠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1-2. 날의 문제
5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로마 교회의 이슈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음식 문제, 두 번째 이슈가 날에 대한 문제입니다.
날에 대한 문제도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절기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세 가지 절기 가운데 사람들은 더 낫게 여기는 절기도 있고 덜 낫게 여기는 절기도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 공동체에는 두 그룹이 있었는데, 유대인이었다가 개종한 그룹은 세 가지 절기 중에 어떤 절기를 최고로 쳤을까요? 당연히 유월절입니다. 출애굽의 가장 핵심이 되고 모세가 유월절의 주인공이니까, 모세오경을 금과옥조로 생명처럼 여겼던 사람들에게 유월절이 절기 중의 절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유월절이나 초막절보다 칠칠절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왜냐하면 칠칠절은 다른 말로 오순절이기 때문입니다. 왜 칠칠절이냐 하면, 유월절이 지나고 일주일이 7일이고, 일주일 7일이 7주가 지나면 49일입니다. 그 다음 날이 오순인데, 순(旬) 자가 숫자로 10을 나타내므로 오순은 10이 5개, 곧 50일입니다. 칠칠절이나 오순절은 똑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순절 곧 칠칠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태동했고, 예루살렘 교회가 개척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거기서부터 복음이 전 세계로 다 퍼져나갔기 때문에,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오순절 곧 칠칠절이 훨씬 더 친숙합니다.
교회 한 공동체 안에서도 유대인이었다가 개종한 사람들은 "우리는 유월절이 최고야", 이방인이었다가 예수 믿은 사람은 "우린 오순절이 최고야" 하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 예산을 배정할 때 "오순절 행사에 예산을 많이 배정합시다", "아닙니다. 유월절 행사가 절기 중에 최고니까 여기에 예산을 많이 배정합시다" 하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보고 '그게 뭐가 중요하냐? 네 마음대로 정하라. 네 마음에 어떤 절기가 더 은혜가 되든지 그 절기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합니다. 절기가 원래부터 더 좋고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두 번째 날에 대한 이슈는 안식일과 평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안식일을 더 중요한 날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룹은 당연히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방인이었다가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은 그만큼 안식일에 대해서 헌신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가 개종해서 로마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너무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이방인 출신들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혼내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랑이 식고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똑같이, 어떤 날을 소중히 여기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날입니다. 모여서 예배 드리면 주일이고, 흩어져서 삶의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날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그것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1-3. 본질에 집중하라
이 두 가지 이슈, 로마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고기 먹는 문제와 날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비본질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나 어떤 논리를 갖다 대도, 교회의 본질인 영혼 구원과 십자가와 하나님 사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을 하지 못하는 교회가 존재 가치가 있습니까?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나누어주는 것도, 사랑을 베푸는 것도, 교회가 공존하고 기도하는 것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이 복음 전파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기에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이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할 최종 가치입니다.
목사는 영혼 구원을 위해서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말씀을 잘 전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요. 그러면 여기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나가서 전도를 할 것이고, 어쩌다 지나가다가 십자가 보고 처음 들어오신 분이 '아,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이 말씀 들으라고 보내셨구나!' 할 정도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의 사명은 밖에 나가서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야 복음 전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십자가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성도들과 얼굴 붉힌 일들, 함께 믿음의 공동체 성도들과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언쟁한 일들이 과연 영혼 구원을 위해서였습니까? 한 영혼을 어떻게 구원했으면 좋겠다는 문제 가지고 우리가 그토록 긴 밤을 토론하고 다투고 싸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문제, 정말 티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 가지고 손가락질하고 서로 핏대 세우고 서로 목소리 높이고 싸우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마음 상해서 교회 나가버리고, 그래서 믿음 잃어버리고 그런 적은 없었습니까?
제가 예전에 교육전도사 할 때 교사회를 해보면, 아이들한테 간식을 500원짜리 줄 거냐 450원짜리 줄 거냐 가지고 2시간을 싸워도 결론이 안 났습니다. 그 다음 주 또 싸우고, 그 다음 주 또 싸우고, 그 문제 가지고 부서에서 결정이 안 나서 교육위원회를 했습니다. 또 일주일 내내 싸우고, 교육위원회에서도 결론이 안 나고, 나중에 담임 목사님한테 여쭤봤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런 것 가지고 우리가 싸우고 핏대 세우는 일이 교회 공동체에서 한두 건이 아닙니다.
정말 교회는 우리가 이 지역사회 영혼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장로님들이 모여서 당회가 그것을 위해서 의논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고기 먹는 문제는 안 먹으면 되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으면 배려하면 됩니다. 날 문제,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안식일 평일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정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이 중요합니다. 본질이 사라진 교회,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헛껍데기에 목숨을 많이 겁니다. 치장하는 데 목숨 걸고, 쓸데없는 데 돈 쓰고. 가만히 보십시오. 이게 영혼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 일이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 영혼 구원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안 해야 합니다. 그런 일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10년 20년 30년 계속 했으니까 해야 한다? 이것은 논리가 안 맞는 말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구원과 하나님 사랑 전파, 여기에 초점과 포커스를 맞춰야 합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2. 주를 위하여 사는 삶
2-1. 주를 위하여
교회 안에서 음식과 날이 왜 문제가 됩니까? 바울은 음식과 날 문제의 결론을 어떻게 내립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다 '주를 위하여'가 계속 나옵니다. 포커스를 음식을 먹는 것도 주를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영혼이 믿음을 잃을까 봐 평생 동안 고기 먹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고 바울이 결단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적어도 우리가 결단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주를 위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도 아니고, 너를 위하여도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면 주님을 위하여 과감하게 결단하시는 것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것'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주를 위한다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리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실까요? 헌금 많이 드리면 될까요?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런 것 별로 안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죄짓고 영원히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영혼 구원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가장 행복해 하시고 가장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위한다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해서 교회에서 이만큼 봉사했습니다. 이만큼 헌금했습니다" 이런 것보다, 정말 주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수고와 어떤 애씀과 어떤 노력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2. 바울의 본을 따라
바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기는 자유인인데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인기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케 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20절과 21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며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속도 빼고 쓸개도 빼주었다는 말입니다.
20절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이 여기서 얻고자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유대인, 또 율법 아래에 있는 자, 또 율법 없는 자. 이런 사람들을 다 합치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만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율법이 있는 자나 율법이 없는 자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22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이 이렇게 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사람의 모습이 된 것은, 바울은 본질을 복음으로 딱 붙들고 있었습니다. 본질, 복음, 절대로 변하지 않는 복음, 십자가 구원 이 구원이라는 본질을 이 사람에게 주고자 하기 위해서 자기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모든 만나는 사람에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본질을 얻고자 비본질은 다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한 일입니다. 주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평생 살아가면서 꿋꿋하게, 한 번도 내 소신 굽히지 않고, 한 번도 내 주관 꺾지 않고, "따라오든지 말든지, 누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러다 말겠지" 하고 그냥 갑니다.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그것이 소신 있고 멋있게 보인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한 영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내 소신을 굽힐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본질 때문에, 비본질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것을 못 합니까? 사과해야 되면 사과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소신도, 40년 50년 가져왔던 소신도 포기하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해도, 이 자존심이 그 영혼보다 더 소중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중직들, 그리고 교회 목회자들은 믿음이 어린 분들, 믿음이 연약하고 이제 막 신앙생활 시작해서 파릇파릇 싹이 트는 분들에게 오히려 훨씬 더 부드럽게, 더 자유롭게, 더 소신 굽히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예를 들어서 그런 이야기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2-3.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은 양,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 세 번째는 탕자 비유입니다. 양 100마리가 있었는데,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99마리는 그대로 있는데 양 한 마리가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목자가 99마리를 안전한 곳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서 헤매고 다녔습니다.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그 그림 생각나시죠? 목자가 양을 둘러메고 돌아오는 그림 말입니다. 돌아와서 벗과 친구들 이웃들 불러놓고 잔치합니다.
여인이 열 드라크마가 있었는데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뒤져서 찾았습니다. 한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같으니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그것 찾았다고 벗과 친구들, 동네 사람 다 불러놓고 잔치했습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 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하게 세상에서 다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나중에 죽기 직전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먼 데서 아들 기다리다가 달려가서 끌어안고 잔치를 열어줍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동네 사람 이웃들 다 불러서 잔치했습니다.
세 비유의 공통점이 잔치입니다. 양 한 마리 찾은 것도 잔치, 한 드라크마 찾은 사람도 잔치, 잃은 아들 찾은 아버지도 잔치. 그런데 이 잔치는 손해가 막심한 잔치입니다. 양 한 마리 값이 이웃과 벗 다 불러 모아서 잔치하면 그 한 마리 값보다 몇 배는 더 할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그 돈 찾았다고 잔치해버리면 몇 배의 돈이 더 나갈 것입니다.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나가서 쓰고 온 돈이 얼마나 많은데 또 동네 사람 다 불러서 잔치합니까?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표현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잃은 자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주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여기서 '주를 위하여', '주를 위하여'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분투했는가? 혹시 내가 주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일을 한 적은 없는가? 가장 슬퍼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이 나하고 싸워서 그 사람이 믿음 잃어버리는 것, 실족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목에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던져지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제가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제 오는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으로 예정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다 구원받도록 이미 예정되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 지라고 했다면 과연 지셨을까요? 엉뚱한 상상이지만,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내가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나는 100만 명 200만 명 천만 명 이상이 안 되면 십자가 지지 않겠다. 적어도 그 정도 사람은 내가 구원할 수 있어야 십자가 지지, 내 목숨이 보통 목숨이냐?"고 하셨을까요? 저기 시골에 있는 한 촌부, 저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네가 죽으라 해도 예수님은 돌아가셨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복음서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났던 그 시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십자가지러 올라가는 길에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바쁘셨습니다. 너무너무 바쁘셨습니다. 빨리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리고성에서 삭개오를 만납니다. 원래 예수님은 삭개오 만나서 여리고성에서 하룻밤 유하거나 주무실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예수님은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삭개오야,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큰 십자가를 두고 한 영혼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룻밤 그 집에서 유하시면서 삭개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이 역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십자가 지러 올라가는 길에 만났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계속 소리 지릅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계속 크게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굉장히 바쁜 발걸음인데, 한낱 소경 거지가 목소리 높인다고 예수님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을 부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삭개오라는 세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해도, 거지가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해도, 예수님은 거대한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도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극진하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무엇 때문에? 구원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의 구원 때문에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던가, 이것을 돌이켜 보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심판대
3-1.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여기 중요한 두 단어가 나옵니다. 비판하다. 비판은 건전한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판은 헬라어로 크리노(κρίνω)라고 되어 있습니다. 크리노(κρίνω)는 구별하다, 딱 줄을 세우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내 맘에 드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애정을 퍼붓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미워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고 나머지 형제를 미워했던 것처럼, 그것이 비판입니다. 형제를 차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이 말은 헬라어로 엑수데네오(ἐξουθενέω)라고 되어 있는데, 업신여기다, 하찮게 여기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용된 용례를 신약성경에서 찾아보면 누가복음 23장 11절을 만납니다.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업신여겼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헤롯을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십자가 지시는 그 재판정에서 헤롯이 예수님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속으로 무시하고 드러내놓고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절대 구원의 자리에 들이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업신여기면,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인데, 교회 공동체의 어떤 사람들 면면을 보고 저 사람을 하찮게 여기면, 내가 하찮게 여기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영혼입니다. 내가 그를 업신여기면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 형제를 업신여기는구나. 저 눈빛은 내가 그 옛날 헤롯에게 받았던, 업신여기던 그 눈빛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느끼시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형제도, 어떤 자매도, 어떤 이웃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업신여겼다는 것, 하찮게 여겼다는 것은 그 옛날 헤롯이 예수님을 바라봤던 그 눈빛입니다.
경멸했던 눈빛. 형제를 차별하고 형제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받습니다. 여기 나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낱낱이 우리의 지난 옛 과거를 하나하나 들추어 낼 것인데, "너 그때 아무개를 업신여겼지. 그 눈빛은 헤롯이 나를 업신여기는 눈빛과 똑같았지." 우리는 그때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절대로 형제를 차별하거나 형제를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3-2. 상처받는 자가 없도록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절대로 누구를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누구를 업신여긴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합니다. 그런 사람은 없는데 그런 느낌 받은 사람은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새 가족들이 교회 와서 목사한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져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요. 여전도회 가도 그렇고, 남선교회 가도 그렇고, 어디 모임 가도 그렇고, 굉장히 민망하고 그 자리가 부담스럽고 있는 그 시간이 불편해서 다시는 안 가려고 해요." 제가 물어봤습니다. "진짜 그랬냐?"고. 그런 적이 절대 없다고 합니다.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있습니다. 누가 잘못한 것입니까? 피해자가 피해 망상입니까? 아니면 가해자가 딱 잡아떼는 것입니까? 그런 느낌을 준 사람이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손 내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선교회, 여전도회에서 원래부터 봤으니까, 원래부터 너무 친했으니까 이름을 야자로 다 부릅니다. 처음 오신 분은 그것이 너무 낯설고 어색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식사하면서 맛있게 일상적으로 먹는데, 누구 하나 이분에게 "이것 한번 드셔보십시오. 어떠셨습니까?" 묻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자리가 불편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 자체가 잘못한 것입니다. 형제를 하찮게 여기고 형제를 차별한 것입니다. 대놓고 차별하거나 대놓고 업신여기지 않았더라도,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주는 공동체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더 마음 쓰고, 몇 번 더 신경 쓰고, 몇 번 더 회개하고 작정하고 그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교회 처음 온 사람이 그 공동체 그 자리에 있으면, 오늘 나는 내가 제일 친한 사람과 말도 안 섞어야지, 나는 그 사람과 눈빛도 교환하지 않아야지, 오늘 교회 처음 나온 저 사람과 옆에 앉아서 하루 종일 같이 이야기해야지, 이런 결단을 하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런 느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런 느낌을 이 자리에서 받았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 아닙니까? 제가 2016년 3월 첫 주에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 와서 첫 주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모든 것이 다 낯설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교회 건물도 공간도 그리고 이 강단도 그리고 이 강단에서 무엇을 하는 것도 예배 순서도, 그런데 그 어느 누구 하나가 저한테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처음부터 제가 이 교회 교인이 아닌데, 제가 그때 느꼈습니다. '내가 이 교회 담임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성도들은 오죽하겠나.'
그래서 작정하고 잘해야 합니다. 작정하고. 이것은 결단이 필요한 문제이고, 이것은 작정이 필요한 문제이고, 철저하게 내 눈빛과 마음과 생각과 입술까지 주장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여상하게 일상적으로 대하면, 상처받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교회 공동체는 분열되고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대놓고 차별해서, 대놓고 업신여겨서 그런 말이 아니고, 결단하고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그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를 영화 필름처럼 쭉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즐겁고 웃고 즐기고 행복하게 살아갔던 그 시간들 가운데에서, 나 때문에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면 그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꼭 있습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4. 하나님 나라
4-1.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피안의 세계도 하나님 나라이지만, 그것보다 교회 공동체와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성도들이 실천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13절에서 15절을 보면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교회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로 세운다는 것은, 교회에 오면 "여기가 진짜 하나님 나라 같구나!" 하는 것입니다. 교회 오면, 내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천국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천국을 가보면 이와 비슷할 것이다, 성도들이 이런 마음을 느끼도록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비판, 크리노(κρίνω)는 차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 좋은 옷을 입고 온 사람이나 허름한 옷을 입고 온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든 절대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좋은 대접해주고, 누구는 다른 데서 식사 대접해주고, 어떤 사람은 멸시하고, 절대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하시지 않습니까? 거지 나사로가 나중에 천국 가서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겨 있고, 부자는 저 지옥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서도 부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역시 13절입니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이 말은 아까 바울이 말했던 고기 같은 문제입니다. 형제들이 시험에 들 만한 거리를 형제 앞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교회가 완전하지 못한데, 우리 교회 처음 오신 분들이나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교회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이것이 나쁘고, 이 교회는 이것이 나쁘고"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물어보면, "당신도 어차피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니까 알 것은 미리 아는 게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정적인 면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개혁해야 합니다. 개혁하고 고치는 데 더 힘을 써야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오히려 시험에 들 거리들을 많이 만들어주는 것은 정말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래서 부딪칠 만한 것, 거칠 거리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 앞에는 두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15절입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거꾸로 말하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천국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차별하지 말라. 둘째,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 시험에 들 만한 것 두지 말라. 셋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 그러면 교회가 이 땅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하니까 교회가 천국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성도들은 잘 이해하고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4-2. 하나님 나라의 정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오해하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맨날 먹고 맨날 마시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냐? 로마서 14장 17절에도 있잖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랬잖아.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먹는 것 마시는 것 좀 그만해." 이렇게 말하면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맥락 없이 이해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맥락을 따라 이해하면, 지금까지 바울이 해온 논리를 따라 이해하면, 먹는 것 때문에 교회 공동체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이방신전에 바친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월절이 최고냐 오순절이 최고냐, 안식일이 최고냐 평일이 최고냐 이런 문제 말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대표된 것은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50원짜리 간식을 줄래 500원짜리 간식을 줄래,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5천 원짜리 주면 어떻고 5만 원짜리 주면 어떻습니까? 형편이 되면 잘 주면 됩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것 가지고 제발 시비하지 말고 그것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 세 가지 각각이 무엇이냐?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공통점은 우선 십자가가 그 기초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의도, 평강도, 희락도 말입니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십자가 아래에서 얻는 의로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너희는 어디에 있다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원래 우리는 죄인이라서 의롭지 못했습니다. 날 때부터 우리는 원죄를 타고났습니다. 생각하는 것부터 마음먹는 것부터 행동하는 것 전부 다 죄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보혈과 피 공로 아래 있으니까,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 아래 있어서 우리가 의로움을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비본질적인 것, 먹고 마시는 것, 이방신전에 제물로 바친 것을 먹느냐 마느냐 이런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해서 의를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는 평강입니다. 평강을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שָׁלוֹ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샬롬 샬롬 하며 인사하는데,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라, 샬롬(שָׁלוֹם) 곧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아주 큰 십자가 고난을 통과한 후에 얻는 평안,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 이것이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도, 그리고 죽음도, 무덤에서 3일의 무덤의 고통도 다 극복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강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서 평강을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한 평강입니다. 가짜 평강이 아닙니다.
셋째, 희락입니다. 희락은 헬라어로 카라(χαρά)입니다. 이것은 보물을 소유한 기쁨을 카라(χαρά)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보시면 잘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밭에 감추어진 보화,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꿀 수 없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모든 소유를 다 주고서라도 그 기쁨을 얻고 싶은, 그 놀라운 열망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구원 아닙니까?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 죄와 죽음의 문제가 십자가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 해결됨으로 인해서 얻는 영적인 기쁨, 그 기쁨은 돈을 억만금 가져도 얻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 이것은 그 기초에 십자가 고난이 깔려 있습니다. 죽음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진짜 하나님의 나라는 비본질적인 것 가지고 싸우고 다투는 것 다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 본질만 붙들고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3.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바울이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8절을 보겠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위로는 누구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래로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화평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면 사람에게 칭찬을 받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이 말은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무엇이라 하면 이쪽으로 넘어가고 누가 무엇이라 하면 저쪽으로 넘어가고, 귀가 얇은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 교회에 이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비본질에 흔들리지 말라, 먹는 것 때문에 날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 그런 것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라, 영혼 구원에 목숨을 걸라. 이런 이야기 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와서 거짓 교사들이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데" 이런 이야기하면, '다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가 보다' 하고 또 다 할례 받으러 쫓아가고, 이런 것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처음 받은 그 믿음과 말씀대로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깊어지고 거기서 더 넓어져 가라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갈라디아서를 쓸 때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거짓 교사들,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라,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 복음은 한 가지입니다. 유일한 복음, 그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 십자가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아니라 기타의 여타의 여러 가지 문제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성도를 가슴 아프게 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비본질인 먹는 것과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셨으니, 우리가 십자가에 근거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지며, 오직 교회 안에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선포되게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을 전하며, 우리가 형제를 차별하지 않으며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입술을 주장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