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 전체녹취

로마서 특강-2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2장)

로마서 2장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이를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늘은 로마서 특강 두 번째 시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2장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면 어떤 논문을 찾아볼 이유도 없고 어떤 연구를 깊이 있게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면 나를 보면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살피면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인간의 전 존재, 욕망과 욕심과 위선과 거짓과 탐욕이 다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을 그대로 살피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얼굴 생긴 것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내 머리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거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외모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바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나를 정직하게 비추어 보고, 그 말씀 앞에 내 영혼을 제대로 세우고 벌거벗겨 보아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2장의 큰 주제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말씀 앞에 세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가 딱딱한 껍질을 가진 굉장히 난해한 내용들이 많은데, 그 껍질을 해체하고 분리하는 과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이 과정을 성실하게 잘 따라가면 그 안의 열매는 굉장히 달콤하고 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살리는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의 죄

1-1. 지속적으로 판단하는 자

이방인들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에 '판단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1절 끝에 보면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면서, "저 사람은 저런 죄를 짓고 저런 악한 일을 하는구나"라고 말해 놓고, 정작 판단하는 자기 자신이 똑같은 일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3절도 보겠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이런 일'이 무엇입니까? 이 대명사가 가리키는 바를 찾아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1장을 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할 때 하나님 진노의 심판 대상이 되는 세 가지 죄를 말했습니다. 18절을 보면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라고 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곧 위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자이며, 불의는 옆으로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죄를 범하는 자들입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아는데 행하지 않는 것이 더 악한 자들입니다. 23절에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이것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유대인들이 손가락질했습니다. 나쁘다고, 악하다고 무지하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3절에 보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한 단어를 헬라어로 봐야 하는데, '판단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크리논'(κρίνω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사형입니다. 헬라어 문법의 분사는 지속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크리노'(κρίνω)라는 말은 비난하다라는 뜻인데, 분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난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가 어떤 한 가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잘못을 가지고 질책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계속 지적질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어느 누군가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못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어떤 분에게 그 모습이 딱 걸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람을 보고 "당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배 시간에 바르게 앉아 있어야 되고, 전화 받으면 안 되고, 문자 보내면 안 되고, 설교 말씀드릴 때 제대로 보고 있어야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주에도 이 사람이 제대로 설교 듣는지, 제대로 하나님 말씀 듣는지, 예배 경건하게 드리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판단하고 감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 걸리면 그것으로 그냥 책망하고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크리논 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판단하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입니다.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판단하려면 시선이 어디에 가 있어야 됩니까? 시선이 그 사람의 행동과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 시선이 거기에 가 있다는 말은 내 마음도 거기에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 신앙생활과 내 영적 생활은 뒤로 하고, 그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그 한 사람 잡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그 사람을 크리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공동체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영성에 좋지 않습니다. 특히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고 신앙의 연륜이 있으면 있을수록,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판단하고 크리논 하는 것은 절대로 믿음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1-2. 자신을 살피라

방향을 바꿔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크리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봐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를 보고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사는지를 알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거울입니다. 말씀에 딱 비추어 보고 "내가 제대로 지금 살지 못하고 있구나" 자기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어긋난 길로 가고 있는 나를 보면, 그다음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판단해야 됩니다. 남을 판단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믿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지속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존재입니다. 방향을 바꾸어서 나를 관찰하고 나를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어떻게 하십니까? 기도란 사실 하나님께 우리가 막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도 주세요, 저것도 주세요, 이것도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를 막 청원하는데, 이 청원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살펴야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가지지 못하고 청원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내 욕심에 쓰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먼저 나를 살피는 것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그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잘못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입니다. 1장 18절, 21절, 23절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똑같은 잘못을 같은 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도 똑같은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도 예배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습니다. 눈은 목사님 보고, 눈은 성경 보고, 몸은 그 자리에 나와 있으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습니다.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계속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성품

2-1. 세 가지 성품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말합니까? 4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이 짧은 한 구절에 하나님의 성품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첫째 인자하심, 둘째 용납하심, 셋째 길이 참으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말 성경을 읽을 때 유의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우리 문화적으로 가지고 내려오는 이 용어 그대로 이해하시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펴보겠습니다.

인자하심은 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χρηστότης)입니다. 크레스토테스의 뜻은 '올바르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올바르심이라는 뜻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심이 바르게 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자라는 뜻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무조건 하나님이 우리를 다 감싸주시고, 내가 백만 번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다 없던 일로 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심은 올바르심, 중심과 기준을 정확하게 가지고 지키고 계심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용어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바울은 용어를 굉장히 엄밀하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하나 있는데,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여기서 '인자와 진실이 많다' 할 때의 인자가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인데, 헬라어의 크레스토테스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만 딱 떼서 읽으면 하나님이 다 용서하실 것 같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4장 6절이 기록된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 이후에 이 말씀이 기록되었느냐 하면,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거기에 절하고 뛰놀며 우상숭배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아론이 백성들의 청을 이기지 못해서 금붙이를 다 가지고 오라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이 금송아지가 너희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다" 이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내려가 봐라. 지금 산 아래에서 너희 백성들이 이 난리를 치고 있다." 모세가 갔습니다. 야단법석입니다. 모세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두 돌판을 다 깨버렸습니다. 다 부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가담 정도가 많은 사람 삼천 명을 다 죽입니다.

출애굽기 32장 28절을 보십시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그냥 못 본 것처럼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하는 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시고 심판하시고 넘어갔습니다. 삼천 명 가량이 죽었습니다. 레위 지파를 세우셔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출애굽기 34장 6절 이 말씀입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맥락을 통해서 읽고 흐름을 통해서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습니다. 이단들이 하는 짓처럼 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라면 어떤 인자하심입니까? 올바르심, 중심을 정확하게 지키고 계심, 옳고 그름을 분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인자 가운데는 분명히 그 기준이 있습니다. 기억하셔야 됩니다.

두 번째, 용납하심은 헬라어로 '아노케'(ἀνοχή)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원어적인 의미는 '오래 참음' 그리고 '휴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휴전이 어떤 뜻입니까? 휴전은 전쟁을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멈추면 그다음에 그 전쟁이 언젠가는 다시 시작되겠지요. 하나님이 용납한다는 말은 잠시 참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을 그냥 영원히 참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 참으시는 그 기준에 한계치가 있습니다. 임계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백만 번 참다가 백만 한 번째에 폭발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길이 참고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본인이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전할 때, 하나님은 아노케의 하나님이시다,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반드시 휴전 후에 그때가 있다,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불길 듯 일어날 때가 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길이 참으심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권리 포기'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힘이 없어서 그냥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권리가 있고,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기다리고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심판할 권리가 있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크로뒤미아, 그냥 하나님이 길이 참고 권리를 포기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세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세족식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을 팔아치운 유다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유다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리 포기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노케, 휴전하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분노의 임계점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2. 인간의 반응: 멸시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와 용납과 길이 참으심을 어떻게 대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4절 끝에 보시면 어떻게 나옵니까?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멸시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이 멸시한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너무 가슴 아프실 텐데,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해 버렸습니다. 멸시하다라는 단어가 재미있는데, 헬라어로 '카타프로네이스'(καταφρονεῖ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합성어인데, '프로네오'(φρονέω)라는 단어와 '카타'(κατά)라는 단어가 더해졌습니다. 카타는 '아래로, 밑으로'라는 뜻이 있고, 프로네오는 '판단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판단을 어떻게 합니까?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판단할 때 논리와 이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 아래로 판단한다는 말은 무시한다,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그냥 무시해 버린다,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라는 뜻입니다.

그 예가 창세기 19장 14절에 나옵니다. "롯이 나가서 그의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롯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돔 땅을 멸할 것이다. 유황과 불비로 멸할 것이다. 롯이 다급해졌습니다. 두 딸과 그의 약혼자들, 사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위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다는 말은 바로 상식 이하로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농담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해 버렸습니다. 그 농담으로 여긴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선 이하로 판단한 결과는 바로 그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말씀을 카타프로네오 하시면 안 됩니다. 상식선 이하로 판단해서 멸시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했다고 했는데 그건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자기 상식으로 판단해서 그 이하로 멸시해 버리고 집어던져 버리면, 그 결국은 영혼의 죽음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세상에 권세가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 이하로 카타프로네오 해 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이 이 땅에 오시면, 우리에게 오시면 세 가지를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해서, 두 번째는 의에 대해서, 세 번째는 심판에 대해서입니다. 이 심판에 대해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막 돌아가는 세상에서 바쁘게 살다 보면, 이 세상에 종말이 임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로 임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심판 날에 우리가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지, 이것을 믿음의 상식으로 판단하셔야 됩니다. 멸시하시면 안 됩니다.

3.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3-1. 심판의 이유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도 나왔습니다. 4절에 멸시하기 때문에 당연히 심판합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이를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여기 세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 첫째는 고집 때문에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스클레로테타'(σκληρότητα)라고 되어 있습니다. '굳음'이라는 뜻입니다. 콘크리트 바닥처럼 우리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어떤 말에도 어떤 말씀에도 절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흔들림 없는 단단한 마음, 그 고집을 이렇게 스클레로테타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대말이 뭘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이 고집의 반대말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기 위해서 내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굳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뭔가가 가득 차 있어야 됩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주로 쓰레기통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꾹꾹 눌러서 사용합니다. 버리기 싫어서, 비우기 싫어서 손으로 누르다가 나중에는 발로 누르다가, 계속 눌러 놓으면 나중에 그 쓰레기통을 비우려면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어서 흔들어도 잘 빠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쓰레기통 밑바닥에 음식물 찌꺼기나 고체가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 있으면, 쓰레기통을 버려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흔들어서 빼내기 위해서는 뒤를 때려야 됩니다. 쓰레기통 뒤를 손으로 탕탕탕 때리고, 뭔가 기구를 통해서 긁어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생각으로 가득 차서 단단하게 굳어서 콘크리트처럼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작정하고 "내가 이놈 마음을 한번 가난하게 만들어 보겠다"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흔들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데는 하나님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고난을 주면 됩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가정이나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일에 고난이 주어지면 마음은 금방 흔들립니다. 금이 갑니다. 그리고 이 굳어져 있는 것들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조각들이 다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빈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말씀이 들어갑니다.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마음의 쓰레기통을 비워야 됩니다. 계속해서 비우고 치우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 고집스러움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회개하지 아니한'은 헬라어가 재미있습니다. '아메타노에톤'(ἀμετανόητον)이라는 단어입니다. 세 단어가 합성되어 있습니다. '아'(ἀ-)라는 부정 접두어(헬라어의 아는 '~아니다'입니다), '메타'(μετά)라는 접두어는 '다르게'라는 뜻이고, '노에오'(νοέω)라는 말은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라는 단어를 빼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메타노에오'라고 하면 '다르게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말을 좀 더 깊이 말해 보면,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 즉 자기 방식만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옳다!" 공동체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이렇게 모이면 주장을 하는데, 처음에 자기 주장할 수 있습니다. 손 들고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는 또 다르게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합니다. 토론이 됩니다. 서로 토론이 되면 일정 부분 설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득이 되건 설득이 되지 않건, 누가 뭐라 하건 그것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 메타노에오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메타노에오, 절대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사람 만나면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공동체에서, 가정에서 그런 사람과 어떻게 대화하겠습니까? 말이 통해야 서로 기본적인 베이스를 가지고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소통하시는데, "너는 왜 네 방식만 고집하니?" 물질을 사용하는데 자기 방식대로만 수십 년째 똑같은 방식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때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취업을 준비할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사랑하셔서 막으시고 막으시면 실패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나는 왜 자꾸 실패하지? 나는 왜 자꾸 안 될까? 내 방식이 잘못됐나?"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이 사인을 주시니까요.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자기 방식이 아닌 하나님 방식으로 메타노에오 해야 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아메타노에오, 앞에 부정 접두어가 붙으면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계속 일방통행입니다. 영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일방통행하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용납하다가, 휴전하다가,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겠지요.

세 번째, '쌓는도다'는 헬라어로 '데사우리제이스'(θησαυρίζει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차곡차곡 쌓아가다'인데, 이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쌓아가고 있다!" 무엇을요?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장작을 계속 쌓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요? 하나님 진노와 분노의 임계점까지입니다. 그것이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현존의 현실입니다. 인간의 현실입니다. 지금 멀쩡한 것 같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메타노에오, 고집부리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돌이키지 않아서 진노의 장작을 계속 쌓아가고 있다가, 이것이 심판 날, 그날이 되면 펑 하고 폭발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임계점이 딱 한 가지가 남았는지, 이제는 폭발 바로 전날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때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릅니다. 빨리 돌이켜야 됩니다. 고집스러운 이 마음을 갈아엎어야 되고, 일방통행하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뒤집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런 존재가 아니십니까?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께 진노를 쌓아가고 계십니까? 한 달 정도 쌓았다가 매월 초에 지난달을 결산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 년을 쌓았다가 송구영신 예배 때 결산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이것을 허물어야 됩니다. 그래서 매일의 경건 생활이 중요합니다. 새벽 기도도 중요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옛날 성현들이 아이들, 칠 세 육 세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는 책을 소학이라고 했습니다. 소학에 보면 손을 씻고 밥 먹어야 되고, 세수해야 되고, 어른들에게 인사 잘해야 되고, 이런 것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배워야 될 것은 교회로 따지면 유치부에서 다 배웁니다. 세상으로 따지면 유치원에서 다 배웁니다. 교회학교 유치부에 오면 우리 유치부 전도사님, 선생님들이 무엇을 가르칩니까? 예배당에 들어오면 기도해야 된다, 헌금하고 조용히 해야 된다, 찬양을 크게 해라, 말씀 잘 들어라, 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또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 잠들기 전에 꼭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들어야 된다. 그것을 매일 하십니까? 우리 유치부 때 배운 것, 그것만 잘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매일매일 차곡차곡 쌓아 놓지 않습니다. 매일 그것을 허물어야 합니다.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해결하고 내일 새날, 해결하고 내일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만 잘해도 우리는 심판에서 피해 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2. 외모로 취하지 않으심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행한 대로'라는 말은 굉장히 오해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왜 우리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지 행함을 보시는 분이 아닌데,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행했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읽었던 1절에서 5절을 다 받는 것입니다. 1절에서 5절에서 어떤 것을 배웠습니까? 지속적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도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용납하심,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어떻게 합니까? 멸시합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 그것을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나 바울이 말하는 아주 논리적인 것을 읽을 때는 앞의 말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 말이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에 줄을 치고 기록해 놓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11절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외모가 그냥 잘생기고 못생기고, 키가 크고 키가 작고 이 말이 아니라,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이 말입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가진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런 것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분들에게 공정하고 공평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떤 자들이나, 하나님은 앞에 말씀하신 대로 지속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자, 굳어 있고 회개치 않고 진노를 쌓아가는 자, 하나님은 그들을 유대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라도,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마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 족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족보에 여성이 총 다섯 명이 나옵니다. 3절을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다말은 유다의 아내입니까? 유다의 며느리입니까? 며느리입니다.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운데, 어떻게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동침해서 자녀를 낳았고, 그 후손으로 예수님이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치욕스러운 족보를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하다니 마태가 제정신인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만 한번 봅시다. 다말의 행위는 잘한 행위입니까? 잘못한 행위입니까? 행위로서는 무조건 잘못한 행위입니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말이라는 여인의 무엇을 보시고 예수님 족보에 기록해 두었습니까? 이 여인이 언약의 흐름에서 끊어지지 않겠다는 열정입니다. 다말이 이 집안에 시집와 보니까 하나님 믿는 집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집안인데 자기가 결혼하고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동생, 시동생과 결혼했습니다. 그도 죽었습니다. 불길한 여자라고 해서 시아버지가 쫓아냈습니다. 그다음 시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지 않고, 법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는 이 언약에서 떨어지면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절박함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귀한 영적 소원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하나님은 예수님 족보에 기록해 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여인이 나옵니다. 라합과 룻입니다. 라합은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 믿음이 생겼습니다. 정탐 군대를 숨겨 주었습니다. 여리고 성 정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듣기만 하고 믿었습니다. 이방 여인이지만 족보에 기록될 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룻은 어떻습니까?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 룻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가 "너는 여기 그냥 있어라" 하는데 그녀를 따라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언약의 족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가 남편 없고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다. 하나님 언약의 백성으로 이 공동체에서 살고 싶다"라는 간절한 영적 소망, 그것이 이 여인을 예수님 족보에 기록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6절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밧세바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썼을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다윗의 죄를 한 번 더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렇게 해 버리면 우리아는 없어집니다. 우리아가 얼마나 가슴이 짠한 인물입니까? 그는 정말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나라에 충성했습니다. 왕이 자기 아내와 동침해서 자기 아내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전쟁터에서 그 나라와 왕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왕이 이 비행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자기 동족, 자기 친구들, 자기 전우들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는 편안하게 집에 가서 잠자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궁 앞에서 천막 치고 야영했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 오히려 그의 이름을 예수님 족보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밧세바, 물론 예수님의 조상으로 그 피를 함께 나눈 조상이었지만, 밧세바라는 여인의 이름 석 자를 감추어 두시고 오히려 우리아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밧세바는 예수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될 만큼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원래 성경을 보면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는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말하고 마리아가 훌륭한 결단을 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만약에 외모로 사람을 취하셨다면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이나 마리아가 예수님 족보에 기록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복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님 족보를 기억하면서 이 사람들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훌륭하고 고귀한 그들의 마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3-3. 영생과 심판

본론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영생을 주십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자가 어떤 자라고 했습니까?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물으면 "플라스틱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지금 이 본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옷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전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것은 영혼입니다. 영혼, 우리 영적인 것,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자, 하나님은 그에게 영생을 선물하십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육체를 오래도록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여인들은 육체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톡스도 맞고,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화장품도 바르고, 온갖 일들을 다 합니다. 영혼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십니까?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마음을 쓰고 열정을 기울여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10절에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이 있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선물을 주시는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선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선은 그 기준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악한 것이 악입니다. 인간이 볼 때 "아, 저 사람 선하구나"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해야 그것이 선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노와 분노를 보이십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참 재미있습니다. 불의를 따르는 자는 혼자서는 따르지 않습니다. 당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악은 항상 연대를 구축합니다. 악은 항상 혼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세상의 악도 그렇고,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적하는 영적인 악도 그렇습니다. 항상 연대를 구축합니다.

사람은 어떠해야 됩니까? 선도 연대를 구축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선한 사람은 연대하지 않고, 악은 연대해 가지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가지고 선한 사람 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해서 달려오는데,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악한 일이 막 일어날 때, 교회가 분열될 때 잘 생각해 보시면 항상 사탄은 여러 사람들을 규합해서 당을 짓게 만듭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9절을 보면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 보실 때 악이 바로 악입니다. 사람이 볼 때 악이 아닙니다.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봤던 10절 구절에 보면 '각 사람'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 9절에도 각 사람, 10절에도 각 사람, 그리고 6절에도 각 사람, '개별적'이라는 뜻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면 내가 선한 일을 한 대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보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내가 악을 행해서 나 혼자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악은, 혹은 선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진리를 기억해야 됩니다. 보통 그런 사람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교회를 세 개나 지었습니다. 우리 조부모가 한국교회 복음이 들어올 때 그때 어떤 선교사님과 함께 이렇게 이렇게 활동했던 분입니다." 그것과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분의 선이 유전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을 따라 하나님이 복 주시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을 따라 하나님이 벌 주신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죄가 나에게 흘러가지 않으니 부모의 죄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잘못 살아서 나까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은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에는 가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확률상 그런 부모와 그런 조부모를 보고 살아가는 가정의 자녀는 그런 삶을 살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악을 행하는 가정의 분위기를 보고 자란 아이는 그런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위기 탓인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율법과 양심

4-1. 율법과 양심의 한계

율법 없이 범죄한 자와 율법을 가졌지만 범죄한 자는 어떤 결말을 맞이합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여러분, '율법 없이 범죄한 자' 할 때 율법이 없는 자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받은 율법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선을 행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무엇일까요? 양심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양심입니다.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양심입니다. 그다음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물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양심을 가지고 있어도 망하고, 율법을 가지고 있어도 망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양심은 죄를 감당할 능력이 없고, 율법은 100퍼센트를 다 행해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00퍼센트 다 하는 것,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죄성 때문입니다. 양심 그 자체는 워낙 연약해서 죄라는 커다란 파도를 감당하는 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율법과 양심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양심과 율법의 공통점은 일단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고 두 번째는 찔림이 있습니다. 양심에도 찔림이 있고, 율법을 읽어도 찔림이 있습니다. 찔림은 있는데 수동적입니다. 예를 들면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씀에는 양심에 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동적이니까요. 율법도 역시 그렇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것만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율법도 양심도 아닌 그 고차원적인 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령입니다. 성령이 아주 고차원적인, 양심과 율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로마서 8장에서 다룹니다. 아직까지 바울은 성령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양심을 가진 자, 양심은 너무 약해 죄를 이겨 내기 역부족이다. 율법, 너 율법 다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느냐? 인간의 죄성으로 그래서 안 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3절의 의미를 3장 10절과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1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만 딱 놓고 보면, 율법을 듣는 자는 의인이 아닌 것 맞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행하면 다 의롭다 함을 얻는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울이 3장을 말하기 위한 복선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는데, 여러분들 중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100퍼센트 다 지켜 행할 수 있다고 자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없고, 역사적으로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가지고 있는 죄성 때문에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왜 없습니까? 율법을 행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3장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이 양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율법 없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양심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14절을 보겠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은 못 배웠습니다. 이방인이라서요. 그런데 타고나게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타고난 선한 사람, 그런 사람은 양심이 좀 고차원적이고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이 없어도,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는 율법이 없는데 양심만 가지고 살아도 율법을 가진 사람의 수준에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5. 마음의 할례

5-1. 유대인의 자부심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20절까지, 여러분들은 여기서 유대인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유대인들이라고 읽지 말고,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속으로 읽어 보십시오. 저도 제 이름을 넣어서 읽어 보니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17절에서 20절만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범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여기까지 좋습니다. 분위기가 바울이 유대인들을 한껏 띄워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좋은 사람이지, 이 정도면 훌륭한 신앙인이지, 나 정도 되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다고, 십일조 잘하지, 헌금 잘하지, 봉사 잘하지, 교회에서 시키는 것 꼬박꼬박 다 하지, 성경 잘 외우고 있지,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 합리화하고 미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스스로 자랑질하고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 그런 존재입니다.

5-2. 본모습의 드러남

본모습이 어떠한가, 21절에서 24절을 하나하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제가 이 말씀을 읽고 굉장히 찔렸습니다. 교회에서, 이 교회 안에서 말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저입니다. 저는 오늘도 하루 종일 저 혼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시간 내내 여러분들은 다 듣고 있습니다. 남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찌하여 너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남들에게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다 가르치고 지적질하고 선생질하고 있으면서 왜 너 행실은 그 모양 그 꼴이냐, 하나님이 저에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저에게 가끔 이야기합니다. "아빠는 아빠가 설교한 대로 다 해요?" 그러면 사실 뜨끔뜨끔합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이고 먼저 선택받은 자, 유대인 같은 존재인데, 가르치는 대로 하고 있는가?

"도둑질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계속 말하면서 사실은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탐심 자체가 도둑질이니까요.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성경에는 간음하지 말라 되어 있으나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이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이율배반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신문을 보시면,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가장 비꼬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며? 근데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렇게 사랑한다는 자가 그런 짓을 하느냐?"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우리는 부끄러워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고 욕보임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제가 주기도문 말씀드릴 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데 누구를 통해서 받습니까? 나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매개자인가, 아니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보임을 당하고 있는가, 먼저 믿은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이런 추악한 죄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5-3. 참된 할례

바울이 2장의 결론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겠습니다. 할례는 어떤 사람에게 유익합니까?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느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남자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 이후로 모든 유대인들은 다 할례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대인이다 하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할례는 잘라내는 것입니다. 자르는 것입니다. 육체만 잘라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할 때 행한다는 말은 100퍼센트 행하면이라는 뜻입니다. 100퍼센트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한 가지라도 범하면 내 할례는 무할례가 된다,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28절에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할례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할례입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는 잘라내는 행위인데, 성경적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말할 때 자르는 행위는 결단이라고 말합니다. 결단, '결' 묶고 '단' 자르다라는 뜻입니다. 생각이 복잡하게 퍼져 있는데 이것을 묶어서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생각이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한데, 그것을 한 손으로 딱 움켜쥐고 말씀으로 잘라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매일같이 그것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할례이지, 육체의 할례만 받았다고 해서 네가 유대인이냐? 유대인이 아닙니다. 결단하라, 생각만 결단하지 말고 마음을 다잡아서 잘라내고 결단하고 행동하라,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받을 때 살이 잘려 나가니 얼마나 아픕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할 때도 아픕니다. 욕심을 잘라내고 탐욕을 잘라내고, "조금만 있으면 이것이, 조금만 눈 감으면 이 돈이 내 것이 되는데, 조금만 내가 견디면 이것이 내 것이 되는데", 살을 자르는 심정으로 잘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할례가 무할례가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이 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로마서 2장 29절에도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육체의 할례, 그 육체의 할례는 전혀 의미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보여 주십시오.

결론

오늘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로마서 2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를 살펴보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로마서 2장을 한 번 더 복습하시고, 다음 주에는 3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3장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시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깊이 배우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인간은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존재였습니다. 굳은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었고, 회개치 않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장작을 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이런 존재를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임계점이 도달하기 전에 매일같이 우리를 비워내는 능력과 회개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한 유대인들처럼 이율배반적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칭찬하며 살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보면 탐욕스러운 존재였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항상 육체의 할례만 주장하는 존재였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마음의 할례를 진실로 행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힘입어서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대로 행하여 우리의 인간의 연약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를 떨쳐버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새로움을 덧입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