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3: 하나님의 의(3장)
본문: 로마서 3장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오늘은 로마서 특강 세 번째 시간입니다. 주제는 '하나님의 의'이며,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로마서 1장과 2장을 아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눈 말씀을 듣고, 다시 혼자서 로마서 지난 말씀을 한번 꺼내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말씀의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곱씹어 보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맥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를 제대로 줄을 치고 살펴보신다면 로마서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 3장 21절을 읽었는데, 21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21절의 시작이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NIV 영어 성경에 보면 '그러나'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But now'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러나 이제는' 이런 말이 나오면 그 앞과 그 뒤가 정확하게 나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3장 21절 이전은 어떤 일이 있고, 21절을 기준으로 그다음은 어떤 세계가 펼쳐지느냐? 율법의 세계가 21절 이전이고, 21절부터는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새롭게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But now', 그러나 이제는 현재형을 쓰고 있기 때문에 21절 이전은 율법이면서 과거의 세계, 21절 이후는 하나님의 의이면서 현재이고 미래적인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1. 유대인의 특권과 의무
1-1. 말씀을 맡은 자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말 그대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먼저 선택받은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할례받은 민족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적용할 때 유대인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씀이 훨씬 더 우리에게 적용되고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일까요? 1절과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2)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보다 더 나은 것, 할례받은 자의 특권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선택해서 하나님 자녀 삼아 주셨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의 특권, 가장 중요한 특권은 '말씀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권은 말씀을 맡은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기 '맡았다'라는 단어, 헬라어(ἐπιστεύθησαν, 에피스튜데산)는 '위임받다'라는 뜻입니다. 위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행에 본인이 가지 않고 부인이 가든 남편이 가든 가족이 가든 제삼자가 가면 위임장을 써줍니다. 나를 대신해서 이 사람이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나를 본 것처럼 이 사람을 대우해 주십시오. 그것이 위임입니다. 그래서 여기 '맡았다'라는 말은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직접 전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이시는데,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먹일 사명을 하나님이 위임하셨다는 것, 그대로 전가하고 그대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1-2. 신뢰받은 자의 책임
그런데 '에피스튜데산'이라는 단어의 원형이 중요한데, 원형이 피스튜오(πιστεύω)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피스튜오라는 단어는 헬라어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피스토스(πίστος)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피스토스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피스튜오라는 단어는 '신뢰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맡겨주신 이유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신뢰하노니 내가 너희에게 말씀을 맡겨 주노라." 사실 유대인들이 신뢰받을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무조건 신뢰한다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신뢰를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뢰받은 존재는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타인들에게, 아직까지 말씀을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그러면 거기서 우리에게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신뢰하셔서 말씀을 맡겨주셨는데, 과연 나는 이웃들에게 신뢰를 주는 존재인가? 어떤 존재입니까?
말씀을 맡았다고 해서 꼭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나 교회학교 교사나 구역 지도자나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맡은 자는 하나님이 피스튜오, 신뢰하셔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신뢰를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서 신뢰를 주는 자가 될 수도 있고, 말씀을 보이고 살아내어서 신뢰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피스튜오, 신뢰를 주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신뢰를 깨뜨리는 자들입니까? "나는 저 사람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 나는 저 사람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눈빛 그것만 봐도 기분 나쁘다." 이런 마음을 준다면 우리는 절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런 교회 공동체, 성도들이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데, 교회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신뢰를 주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뢰를 베푸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특권과 의무가 함께 공존합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해서 말씀을 맡겼으니까 특권입니다. 특권만 받고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책망만 받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5남매 7남매 9남매 줄줄이 자녀들이 있으면 장남에게는 대단한 특권이 주어집니다. 생선을 굽더라도 가운데 토막 아버지 드리고 그다음 토막 장남에게 얹어주고 그다음은 뭐 먹든지 말든지 그냥 던져놓습니다. 장남은 그런 대접과 그런 대우를 받고 가정에서 자라고 성장합니다. 왜 그렇게 대우할까요? 특권입니다. 장남이니까. 그런데 그 장남이 잘 되어서 동생들 돌봐주고, 동생들 가정 건사하고 챙기고, 부모님 효도하고 섬기라고 장남을 그렇게 대우하고 돌봐주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문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정하고 부르셔서 위임하신 것이 말씀입니다. 신뢰하셔서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뢰를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
두 번째 질문입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유대인들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이 함부로 살고 막 산다면 어떻게 됩니까?
3절을 봅시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
여기 '어떤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 그중에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오. 무엇을 믿지 아니하였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신실하시고, 하나님은 원래 선하시고, 하나님은 원래 뜻이 좋은 분이신데, 우리가 함부로 막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훼손당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막 사는 것과 별개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미쁘심과 신실하심은 그대로 공존하고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2-1.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히브리어 발음은 샤마(שָׁמַע), '듣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원래 시몬이었다. 너의 원래 이름인 시몬, 샤마라는 이름대로 내 말씀을 듣고 잘 따라오기만 하면 너는 장차 게바, 페트라(πέτρα), 반석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는 영문도 모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주신 신실하심을 따라 평생 동안 한 번도 오르내림 없이 계속해서 꾸준하게 믿음이 성장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처음에는 부인하고, 그다음에는 저주하며 부인하고, 그다음에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이나.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이렇게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미쁘심이 손상을 입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을 한번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이 말씀은 이런 배경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습니다. 세 번 부인하고 났는데 예수님이 고개를 딱 돌렸더니 베드로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상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눈빛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주님의 눈빛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요? 주님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경멸, 조소, 조롱, 책망 이런 눈빛일까요? 아니면 "내가 너 다 이해한다. 내가 너 약함을 다 이해한다." 원래 한결같았던 우리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이었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미쁘심과 예수님의 말씀에 신실하심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짓을 하건 말건. 우리가 다음 주에 4장에서 살펴볼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실 텐데, 아브라함이 신앙의 부침을 엄청나게 많이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계속해서 살아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속 썩였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고 하나님 눈에 피눈물 나게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 미쁘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2-2. 인간의 궤변
먼저 선택받은 자가 아무리 함부로 행동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시하는 인간은 어떤 궤변을 늘어놓습니까? 궤변을 막 늘어놓습니다.
5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오"(롬 3:5)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롬 3:7)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즉 이런 것입니다. "내가 거짓말하고 내가 죄인인데, 내가 죄 짓고 거짓말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참되심과 신실하심이 더 드러나게 되면, 그건 내가 잘한 것 아닌가?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더 영광받았으니까."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인간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가정에 말 안 듣는, 함부로 행동하는,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자식이 있습니다.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자식인데 품어주고 기다려주고 또 기다려줍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압니다. "야, 저 부모 정말 예수님 같다. 저 부모 정말 하나님 같다. 어떻게 저런 자식을 자식이라고 믿고 계속해서 품어주나." 그런데 그 자식이 와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머니, 나한테 감사해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막 살아서 오히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않습니까?" 그것을 말이라고 합니까? 입을 찢어버려야지. 말도 안 되는 그런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성경에 바로가 나옵니다. 구약의 출애굽 시절에 바로.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받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습니다. 그러면 바로가 자기 입장에서 이 궤변의 논리대로라면 "내가 말 안 듣고 내가 함부로 하고 열 가지 재앙에 다 버텼기 때문에 성경에 열 가지 재앙이 기록되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더 나타났지 않느냐. 나는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가룟 유다가 만약 "내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죄가 없다." 그것을 바울은 궤변이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이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8)
그렇게 말하는 인간들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설득하려고 애쓰거나 성경의 논리를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어떻게든 이야기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벌받을 것이다. 정죄받을 것이다. 바울이 얼마나 논리적인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런 류의 궤변에는 바울이 말하지 않으려고 하고, 단정적으로 "그들은 정죄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3-1. 의인은 없다
9절과 10절에서 말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9-10)
의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다 죄 아래 있어서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3장 10절을 오늘 읽었는데, 지난주에 2장 13절을 보실 때 3장 10절을 말하기 위해서 2장 13절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이 말에 의하면 율법을 다 100퍼센트 행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10절 말씀, 율법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 율법을 100퍼센트 행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류의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근거를 시편 14편 1절과 53편 1절에서 가지고 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율법이 정하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의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나중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그때는 의인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율법을 100퍼센트 행한다는 의미에서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안에서도 의인이라는 기준이 굉장히 다르게 쓰입니다. 잘 이해하시고 따라오셔야 됩니다.
3-2. 죄인의 모습
이제 바울은 죄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의인이 아닌가? 인간은 어떤 식의 죄를 짓는가? 인간이 영혼으로도 죄를 짓고 육체로도 죄를 짓습니다.
영혼으로 죄를 짓는 모습을 한번 보겠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무엇을 깨닫습니까?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깨닫지도 않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17절도 보십시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7)
영혼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영혼이 그렇게 된 까닭, 육체의 죄가 나옵니다.
13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동그라미를 쳐 봅시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순서대로입니다. 목구멍에서 어디로? 혀로. 혀에서 어디로? 입술로. 입술에서 입으로, 입에서 행동으로, 발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은 굉장히 정교하게 잘 기록했습니다. 우리 육체가 죄를 짓는 것은 이런 순서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목구멍에서부터 시작되어서 겉으로 겉으로 겉으로 올라와서 결국은 행동으로까지 옮겨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가지, 목구멍 아래는 무엇이 있습니까? 목구멍보다 더 깊이 있는 곳, 심장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은 영혼입니다. 결국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육체가 죄를 짓는데 영혼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이미 그쪽으로 갔기 때문에 행동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이미 100퍼센트 넘어갔기 때문에 육체의 행동이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만 가지고 문제를 삼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왜 저런 사악한 짓을 할까? 남들이 저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저분의 영혼 근저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 영혼이 다시 돌아갑니다. 11절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7)
영혼 자체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행동이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3-3. 영혼과 육체의 결합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흙으로 인간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던져놓은 게 아니고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육체에다가 하나님의 생기, 이것이 창조입니다.
죽음은 먼저 영혼이 빠져나가겠지요. 육체만 남습니다. 창조가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결합, 만남이라면,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그 생기는 하나님께로, 인간이 원래 재료로 가지고 왔던 흙은 다시 땅으로, 분리가 바로 죽음입니다. 결합이 창조요 분리가 죽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은 흙과 영혼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삶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삶과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체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매일같이 좋은 음식 먹는다고 행복합니까? 가장 넓은 집에 산다고 행복합니까? 좋은 스포츠카 타고 다닌다고 행복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주신 우리 영혼이 만족을 누려야, 그래야 행복합니다. 내 영혼이 평안을 누려야,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를 누리고 살게 됩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육체라고 이 육체가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이는 육체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 사시면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육체를 위해서는 많은 것 하셨습니다. 화장도 하고, 밥도 먹고, 다칠까 봐 조심도 하고, 햇볕에 나가면 타니까 선크림도 바르고. 그런데 여러분 영혼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영혼이 아사 상태에서 전혀 숨 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죄가 우리를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성을 빼앗는 용사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런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위대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절에 다니는 사람은 불경 외우고 참선하고 벽 보고 면벽 수련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스릴까요? 나는 절대 나로서는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야 합니다. 우선은 비워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굳어있는 마음,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기도해서 비우고 말씀 듣고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채우는 그 자리에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알고 평강으로 충만하게 되고, 목구멍, 입술, 혀, 발 이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해보십시오. 기도와 말씀 두 가지를 확실하게 지키는 자는 어떤 사탄의 유혹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3-4. 하나님을 두려워함
죄인의 모습에 결론이 나옵니다. 영혼과 육체로 죄를 지은 인간의 결론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8)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너무 재미있는 말입니다. 왜 재미있느냐? 곱씹어 보면 정말 재밌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질문해 보십시오. 여러분 눈앞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너희 눈앞에 하나님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그것 상관없다.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너희 눈앞에 실존하고 계시니 너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못 본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절대 아니다. 너희가 못 보고 못 느낀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너희 눈앞의 하나님을 무시하지 마라. 너희 눈앞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일까요? 옛날에 한 세대 두 세대 전에 아버지들은 집에서 몇 마디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요즘이야 뭐 아버지들이 아이들 키우면서 엄마보다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아이들하고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옛날 아버지들은 무뚝뚝하고 말도 안 하고 그냥 자기 할 일만 하고 식사만 하시고 일하러 가셨다가 저녁에 오면 주무시고. 그게 그냥 아버지입니다. 옛날 아버지. 그런데 그 아버지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기가 다리가 떨려 가지고 아버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큰형이 아버지한테 한 대 맞는 날이면 집안은 전부 다 얼음입니다. 그게 두려움입니다. 나는 언제나 저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나, 나는 언제나 저 아버지 품을 좀 벗어나나. 그런데 그 아버지 밑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치지 않고 사춘기 시절 잘 보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려웠기 때문에, 아버지 무서운 줄 알았기 때문에, 부모 무서운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좋으신 하나님만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쏟아낼 모든 진노를 자기 아들에게 쏟으신 것을 한번 보십시오.
아들이 오죽하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완전히 버림받으심을 100퍼센트 느끼셨으니까 오죽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무서운 분입니다. 그 무서운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죄 짓습니까? 어떻게 함부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는 짓을 그렇게 함부로 뻔뻔하게 하고 다닙니까? 우리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우리가 영안이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못 봐서 그렇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지금도 우리 앞에 계십니다. 예배 드릴 때나 밥 먹을 때나 내 입에서 나쁜 말을 할 때나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할 때나. 바울은 그 이야기를 이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눈앞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출애굽기 1장 15절에서 17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를 살린지라"(출 1:15-17)
중요한 것은 여기에 바로 왕이 나오고 하나님이 나옵니다. 히브리 산파는 누구를 두려워했습니까?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바로 왕을 두려워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까? 보이는 왕을 두려워한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마치 보는 것처럼 호라오(ὁράω)의 신전(神前)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야 죄짓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짓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막 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항상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4. 율법의 기능과 한계
율법의 기능과 한계는 무엇입니까?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로 보시면 '디카이오데세타이(δικαιωθήσεται)'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게 중요합니다. 의롭다 하시면, 나 스스로 의롭게 됩니까? 안 됩니다.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의롭게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내 입장에서 수동적인 의미라서 수동태를 썼고, 미래형이라는 말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과거만 담당하지, 율법은 의롭게 하는 미래를 절대 담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은 절대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과거만 담당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율법의 효능도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 '깨달음이니라'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피'라는 접두어는 '확실히'라는 뜻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의미의 '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확실히 내 죄를 아는 것입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면, 말씀에 비추어서 내 과거를 돌아보면 확실하게 알겠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그래서 율법은 과거의 내 죄를 확실하게 알게 만듭니다. 그런데 현재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거기까지입니다. 바울은 이 시제를 정확하게 쓰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율법의 기능은 현재나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
5. 그러나 이제는
5-1. 하나님의 의
이제 아주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21절에서 말하는 '이제는'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여기 '이제는', 우리 헬라어 성경에도 그냥 '이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제는'이라는 말이 '그러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성경 NIV에서는 'But now'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 것을 단절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과거의 기능만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현재부터는 율법은 종식되고, 율법은 과거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 끝내고,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그 새로운 세상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한 의다.
하나님의 한 의를 구체적으로 22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의 의가 누구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율법은 과거의 기능을, 현재와 미래는 누가 담당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신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 아래에 있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이 도식을 꼭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이런 구조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제의 흐름에 따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5-2.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바울이라고 생각하면, 율법의 시간을 과거로 이야기했고, '그러나 이제' 그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바울이 그다음 무엇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예수님의 전기를 설명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요, 아버지는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고 나사렛에서 자랐고 뭐 어쩌고저쩌고." 어린 시절을 쭉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재미는 있어요.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래 버리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무색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두 가지를 아주 중요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6. 속량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첫 번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예수님은 첫째, 속량하시는 분이시다. 속량이 무엇일까요? 헬라어로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포(ἀπό)'라는 접두어와 '뤼트론(λύτρον)'이라는 명사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아포'는 '~로부터', '뤼트론'은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첫 주에 했습니다. 첫 주에. 속량하다, 풀어주다. 무엇으로부터 풀어줍니까? 어디에 매여 있으니까 푸는 것 아닙니까? 인간이 어디에 매여 있었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아무리 풀래야 풀 수 없는 두 가지 문제. 첫째는 죄, 두 번째는 죽음. 죄와 죽음으로부터 예수는 우리를 풀어주는 존재, 속량해 주시는 존재입니다.
6-1. 죄로부터의 속량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거기에서 첨부한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첫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 풀어준다. 이 말은 출애굽 사건의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우리가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어떤 사악한 죄인이든지 양을 잡아서 피만 바르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갑니다. 예수의 피 아래에 있으면 내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내가 율법은 하나도 몰라도, 예수의 피 아래에만 있기만 하면 우리를 건져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6-2. 죽음으로부터의 속량
두 번째,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출애굽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다가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불뱀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었습니다. 다 죽어갑니다. 그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합니다. 모세가 긴 장대를 만들어서 그 꼭대기에 놋뱀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높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자마다 살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 하셨습니다.
놋뱀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장대가 상징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마다 뱀에 물려서 온몸에 독이 퍼져가다가도 독이 멈추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냥 보지 않았더라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니까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의 속량입니다. 풀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와 죽음에 묶여 있었는데, 사탄이 이 두 가지만 붙들고 인간을 좌우하고 인간을 못살게 굴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풀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속량하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7.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
두 번째 바울이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두 번째 바울이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은 화목 제물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속량, 두 번째는 화목 제물.
7-1. 화목 제물의 의미
화목 제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24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여기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섯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이 다섯 가지. 그중에 화목제가 굉장히 중요한 제사인데, 화목 영어로 보면 화목제는 'Peace Offering'입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제사, 이런 의미에서 'Peace Offer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끼리 서로 싸우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랑 싸우면 중간에 누군가가 끼어들어서, 나도 알고 그 사람도 잘 아는 사람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야, 이제 화해하자. 우리 식사 한번 하고 이제 다시 화해하자. 옛날로 돌아가자" 하면 그 중간에 끼어있는 사람을 봐서 감정의 앙금은 남지만 그냥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신 화목 제물은 다릅니다.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던 일처럼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을 화목제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화목 제물을 드리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전에 죄로 인해서 단절되고 막혔던 관계가, 하나님은 이제는 "내가 너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 완전히 도말하고 없애주겠다" 하는 의미가 화목제입니다.
7-2. 쉘렘과 샬롬
왜냐하면, 여기 이 화목을 말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화목을 말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쉘렘(שֶׁלֶם)'입니다. 쉘렘. '온전하게 하다', '완전하게 하다', '종식시키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쉘렘,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계를 종식시키고, 온전하게 하고, 완벽하게 다시 재생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입니다.
여러분, 이 쉘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들어보니까 어떤 단어와 비슷한 발음이 생각나야 합니다.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샬롬(שָׁלוֹם)이 생각나야 합니다. 인사할 때 "샬롬, 샬롬" 하고 인사합니다. 이 샬롬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말하는 샬롬의 평화, 이것은 누가 죽어서 생긴 평화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오늘날 우리 한반도의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 있는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정전이 아니라 우리는 휴전입니다. 휴전 상태입니다. 전쟁이 종식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이 평화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죽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피 흘렸습니까? 지금 우리가 샬롬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누가 죽어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대충해서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쉘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 샬롬은 예수께서 죽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과거에는, 옛날 과거에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 드리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 쉘렘, 샬롬의 평화를 이야기했지만, 오늘날에는, 예수께서 오신 이후로는, 예수께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샬롬의 평화가 생긴 것입니다.
7-3. 십계명과 화목제
우리가 읽었던 출애굽기 20장 24절,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이 중요한데, 이 배경은 십계명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이 화목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있습니다. 시내산까지 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산꼭대기에 불러다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희들이 지금까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면서 너희 민족 대대로 지었던 죄들 내가 이 화목제를 받음으로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너희들이 과거에 어떤 인간이었건, 나는 기억조차 하지 않고 다 도말해버리겠다. 쉘렘, 완전해지겠다. 온전한 평화와 화평을 너희들과 함께 누리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마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지 마라. 내가 과거에 이랬는데 하는 그 죄에 발목 잡혀 살지 마라."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을 주시면서.
그러므로 화목제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께서 친히 들어가셔서 예수님께서 죽어주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옛날에 인간이 원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의 상태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7-4. 사탄의 참소
그런데요,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참소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피의 공로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의 쉘렘, 샬롬의 평화로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를 찔러댑니다. "너 과거에 이런 인간이었잖아." 괴로워 죽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과 말들이 있는데, "저 사람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다" 그런 말은 절대로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관계에서 하나님도 기억치 않겠다고 한 것을 예수께서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그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우리가 뭐라고 계속해서 정죄합니까? 그분이 회개하고 거듭나고 믿음생활 잘하고 있으면 축복하고 축하하고 격려해 주어야지, 과거의 행동으로, 과거의 예수 믿기 전에 혹은 하나님 만나기 전에 지었던 잘못으로 오늘의 현재를 재단하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저하게 과거를 단절시키라는 말씀입니다.
7-5. 화목제의 나눔
이 화목 제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해당되지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도 해당됩니다. 레위기 7장 15절에서 18절을 보십시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 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나머지는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 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으실 것이 아니라"(레 7:15-18)
화목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감사로 드리는 화목 제물의 고기는 그날 다 먹어야 합니다. 감사제 말고 서원제,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사흘째는 먹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소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화목 제물로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자기 식구 혼자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 식구가 한 열 명이라 하더라도 소 꼬리까지 다 고아 가지고 꼬리곰탕까지 해서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소 한 마리 먹으려면 동네방네 다 나눠줘야 합니다. 그리고 부탁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이 소를 잡았으니까 절대로 남기지 말고 오늘 저녁까지 다 먹어주십시오." 부탁해야 합니다. 서원제, 자원제로 드리는 화목 제물의 고기, "내일까지는 반드시 먹어주십시오." 부탁해야 합니다. 다 나누고 부탁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서원제, 자원제, 감사제를 드리는 사람과 마음이 상한 이웃이 있어서 그냥 던져놓고 안 먹으면, 그러면 그 예배, 그 화목제는 무효가 됩니다. 가증한 것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공동체 전체에게 나누어서 다 먹어 줘야 화목제가 성립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화목 제물이 예수님이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긴급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만에 전해라. 적어도 이튿날까지는 전해라. 사흘까지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남겨두지 마라. 너만 구원받고, 너만 은혜 받고, 너만 하나님 나라 가는 자로 살지 마라. 화목 제물 대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긴급하게 전달하라.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나 혼자 구원받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구원하시겠지, 나는 몰라" 그것은 화목 제물의 의미와 성격을 모르는 분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화목 제물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 전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라고 복음 전하는 것이 사방에 다 막혀 있다고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방법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나,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유익한 길인가, 교회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을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않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웃들이 그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8. 로마서 3장의 결론
정리합니다. 바울이 율법을 과거로, '그러나 이제는' 현재부터 미래까지는 하나님의 한 의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 첫째는 속량으로, 속량은 죄로부터 속량, 죽음으로부터의 속량. 두 번째는 화목 제물로, 화목 제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또 나와 이웃과의 관계.
바울이 3장의 결론으로 제시하는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8-1. 믿음으로 의롭다 함
첫 번째, 2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 말은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론은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요? 인간은 율법을 100퍼센트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23절도 한번 보실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 헬라어 단어가 나옵니다. '휘스테룬타이(ὑστεροῦνται)', '모자라다'라는 뜻입니다. 죄를 범하여서 무언가 부족하다. 그러면 그 부족한 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부족하니까, 우리는 율법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한 의가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속량하시고, 나를 하나님과 쉘렘의 평화로 완벽하게 하나 되게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8-2.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
두 번째, 29절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하나님은 유대인, 이방인 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8-3. 믿음은 율법을 세운다
세 번째, 3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믿음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웁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지금 1장 2장 3장에서 말하는 도식을 자세히 보시면, 바울이 여기 하나님의 의까지 오기까지 이렇게 접근합니다. 먼저 인간의 상태를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상태. 1장 보십시오. 인간이 죄 지어 가지고 하나님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내버려 둔다고 그랬습니다. 팔아치운다고 그랬습니다. 그냥 던져둔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인간의 비참한 상태.
이런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하나님은 그냥 던져두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강권적인 역사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로. 순서가 중요합니다. 인간을 먼저 살피고 인간의 상태를 보고 그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내가 느끼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일어납니다.
감사가 일어나면 그다음에 율법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내가 그래야, 지켜서 지켜야 하는구나.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고 하나님 기뻐하실 줄로.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리에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먼저 지키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자는 역사상 단 한 존재도 없었습니다.
내 인간의 비참함, 거기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역사, 감사, 그다음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3장까지 우리가 살펴봤는데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오늘 많이 드렸습니다. 기억하시고 3장을 다시 읽어보시고,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과 강의도 다시 한번 들어보시고,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로마서 1장 2장 3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면 한 번 더 다짐이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의 상태가 악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선택받은 자로 말씀을 받은 자로 하나님께 신뢰받은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완악한 존재였습니다.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악한 말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했지만, 선한 일을 행하는 자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 율법이 되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친히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화목 제물 되어주신 예수님 굳게 붙잡고 우리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화목 제물 대신 예수님을 전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제대로 순서를 지키며 믿음생활하도록 주께서 축복해 주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근원이 주의 말씀 좇아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