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4: 아브라함의 믿음(4장)
로마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멘.
지난 시간까지 로마서 서론에 해당하는 1장, 2장, 3장을 공부했습니다. 한 주에 한 장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하시면 조금만 더 가면 나중에 큰 산이 되어서 그것을 다 해치고 다시 찾아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주에 한 장씩 미리 예습도 하시고 공부하시고 복습하시고, 전체의 얼개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면 그때그때 잘 정리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4장을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간 3장에서 공부한 것을 간단하게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율법을 100퍼센트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인간의 상태가 비참한 죄인인데, 인간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을 덧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속량은 '무엇무엇으로부터 풀어준다'는 뜻이고요, 풀어주는 두 가지가 죄로부터의 속량과 죽음으로부터의 속량입니다. 이것을 받으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3장에서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웠다가 화해하면 그 다음에는 앙금이 남지만,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운데 들어가시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 회복이 됩니다. 그다음은 이웃과의 나눔입니다. 화목제물의 제사는 그날 반드시 먹어야 하고, 아무리 미루어 두어도 서원제나 자원제는 그 이튿날까지는 먹어야 하며, 3일째까지는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3장에서 공부한 내용입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이제 오늘은 4장을 공부할 텐데 4장 이야기는 전부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왜 바울이 4장 전체를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할까요? 바울의 생각에도 1장, 2장, 3장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4장에 가서는 바울의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아브라함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납득하고 있으니까,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그 예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의 중요한 포인트는 시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샘내는 시기가 아니라 시점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시점과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시점, 이 시점 두 가지를 아주 중요하고 아주 명백하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것보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때가 훨씬 이전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의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4장을 통해서, 그리고 구약으로 돌아가서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를 넘겨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그랬는지를 함께 보려고 합니다.
1-1.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을까요?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행위가 그만큼 엉망진창이었습니까? 정말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는지, 그럼 도대체 그는 무엇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성경 보시는 분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라고 할 때 그 믿음에 표시가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 표시를 따라서 성경 아래 관주를 찾아 내려가 보면 창세기 15장 6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로 한번 돌아가서 진짜 아브라함의 행위가 엉망진창이었는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성경 공부는 성경을 앞뒤, 구약과 신약을 펼쳐가면서 살펴봐야 재미가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라함의 순종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했을까요? 거절했으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될 필요도 없습니다. 거절했으면 "하나님, 저 싫은데요" 그랬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말씀을 따라갔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순종하고 그렇게 갔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습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 땅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웰컴 아브라함" 하고 좋은 집 하나 지어 놓으셨다가 "여기에 네 식구들 살아라", 넓은 들판 준비하셨다가 "여기서 양 떼와 소 떼를 먹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일러줄 그 땅을 파보면 금과 은과 각종 보석이 있을 테니 그것 가지고 평생 동안 잘 살아라. 내가 너에게 준 땅이니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신 것은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훈련시켜서 진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린지라 기근이 들었으면 "이상한데요. 하나님, 하나님이 부르신 이 땅에 왜 기근이 옵니까?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묻고 묻고 또 물으면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훈련받으라고 하신 뜻을 깨닫고 어쨌든 거기서 버티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굶어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훈련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 버립니다.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의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위가 완전했다면 그 행위로 의로움을 얻었을 텐데,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보내신 가나안 땅을 박차고 나가서 그냥 이집트로 가버린 것입니다. 훈련받아야 하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위에 첫 번째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집트로 가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입니다. 이집트 왕 바로는 아내의 미모에 반해서 누이라 그러니까 이 여자를 데려오라, 자기 아내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후사를 준비하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급해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가만히 있다가 바로는 벼락 맞은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결혼하지 않은 누이라 해서 그녀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았을 뿐인데, 하나님이 이 여자의 일로 인해서 바로와 그 온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그래서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다가 책망합니다.
18절, 19절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여러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왜냐하면 불신자 바로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아브라함이 책망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인 제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끌려가서 "당신 목회하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거짓말하고 이중인격으로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이런 책망을 면전에서 듣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위가 얼마나 변변치 않았으면,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가증했으면 믿지 않는 불신자 앞에 끌려가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행위로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그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 자체가 엉망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은 미스터리고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런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어쨌든 그를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주셨고, 아브라함이 그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를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1-3. 의로 여겨진 믿음
15장 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을 바울이 로마서 4장 3절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무엇을 믿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도대체 그 이야기를 15장에서 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1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후에', 여러분들 성경 읽으실 때 이런 말에 아주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 후에', 도대체 무슨 일 이후라는 말인가? 그런데 이것이 15장 1절이니까, 이 후의 일을 알려면 14장으로 올라가 봐야 합니다.
창세기 14장에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 가서 잘 먹고 잘 살면 좋을 텐데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서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고 친족이고 조카이며 아들처럼 기른 아이인데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밤에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사람 318명을 데리고 가서 조카 롯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멜기세덱을 만나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그 일 이후'라는 뜻입니다.
그 일 이후에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을까요? 두렵습니다. 자기는 거기 이방인으로 와 있는데, 그 동네 도시 국가의 왕들을 기습 공격해서 조카를 끄집어내 오느라 그 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아브라함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쨌든 조카를 구원해 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두렵고 마음이 떨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는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셨습니다. 왜 방패라고 하셨느냐? 걱정하지 말라, 이 일로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너를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상급입니다. 이 상급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과 아주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크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에 대한 약속, 처음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땅과 자녀에 대한 약속, 그것을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잊을 만하면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땅도 주마, 너에게 자식도 주마" 하셨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 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식이 없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발끈했습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자기 집에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똒똑합니다. 말 잘 듣습니다. 일 잘합니다. 건강합니다. 자식이 없고, 조카 롯 하나밖에 없는데 그 롯은 자신을 배신하고 소돔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거기서 그냥 잘 살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져왔지만 그는 남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굉장히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급이라 그러니까 "하나님,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우리 집에서 기르는 이 사람 다메섹 엘리에셀을 내 후사로 세워서 쓰겠습니다." 이렇게 그냥 하나님께 확 질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야기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이야기하셨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시청각 교육을 시킵니다. 들판에 데리고 나갑니다. "하늘을 보라" 하십니다.
5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는 미세먼지도 없습니다. 초미세먼지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밤에 하늘을 보면 별빛이 쏟아져 내립니다. 엄청나게 많은 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밤중에 별을 보게 하시고 "네 자손이 저 별과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만약 저 같으면 "하나 하나 주시고 이야기하시지, 저렇게 많은 저 하늘의 별들, 나하고 아무런 상관없는 별들, 그런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저 별을 내가 따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따다 줄 것도 아니면서. 그냥 하나님, 나는 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아들 하나 필요합니다. 그 하나, 그 하나도 안 주면서 왜 저렇게 많은 뭇별을 이야기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 같으면 하나님께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만 달라고, 그냥 다 필요 없으니까, 열도 스물도 뭇별도 다 필요 없으니까 하나만 달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의로움으로 나타나는 성경의 첫 번째 장면, 첫 번째 사건입니다.
1-4. 스케일이 큰 믿음
우리는 현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다음 생 필요 없습니다. 내 자식의 자식은 의미 없습니다. 저에게 아들 하나만 주십시오. 우리 자식이 잘 사는 것, 뭐가 필요합니까? 100년 뒤에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제가 잘 되는 것, 제가 잘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현세적인 믿음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의 것을 구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래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올해가 지금 석 달 조금 더 남았지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이것 꼭 응답해 주십시오." 우리는 현세적입니다.
현세적이면 그 다음 반드시 연결되는 것이 기복입니다. 현세와 기복은 짝으로 같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현세 기복적인 믿음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고, 지금 당장 잘 살아야 하고, 내 때에 다 이루어야 하는 것, 이것이 현세 기복적입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가 몇 년입니까? 5년입니다. 국회의원 임기는 4년입니다. 대통령 5년 동안에 이룰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요? 그것도 정권이 바뀌면 진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대통령 선거할 때마다 공약을 보면 한 100년 정도 해야 될 일을 한꺼번에 다 한다고 합니다. 지역의 국회의원 뽑을 때도 보십시오. 기껏해야 4년밖에 못 할 국회의원을 이분이 한 100년 정도 할 것처럼 엄청난 공약을 남발합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혹은 5년 동안 그 공약을 이루기 위해서 나라 전체를 뒤집어 놓습니다. 정권 바뀌고 대통령 바뀌면 그 사람 한 것 그냥 다 쓸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강에 오래가 쓸려가듯이 국고가 낭비되고 예산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평생 동안 직업적으로 일하는 직업 공무원들은 복지부동합니다. 정권 바뀔 때마다 목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이 나라가 계속해서 아주 고질적인 정치적 병폐를 겪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현세 기복적인 모습입니다.
백년대계를 내다보고, 교육이라면 교육, 민생이라면 민생, 경제라면 경제, 100년 대계를 바라보고 5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은 그 안에 차곡차곡 차근차근 하고, 그 다음 정권은 그 전 정권이 나와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지라도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어서 다시 하고, 국가 연구기관은 정권의 눈치 보지 않고 연구하고 그리고 발표하고, 이런 식으로 가야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뿐만이 아니고 오늘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봐야 기껏 살아봐야 100년 남짓한 인생, 그리고 건강하게 경제생활을 하고 힘 있게 사회생활 하면서 힘껏 살 수 있는 세월 해봐야 불과 몇십 년 되겠습니까?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눈 침침해지고, 돈 떨어지고 사람들 눈치 봐야 되는 늘그막이 오기 전까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기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다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합니다. 다 이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당장에 아들 하나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뭇별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하시면, 하나는 주시겠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천 년이 가고 만 년이 가면 저 별과 같이 자손이 많아질 것 아닌가.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스케일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훈련받지 않고 탈영했습니다.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비인간적인 행동들,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들, 행위로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행동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신 것은 이 믿음의 스케일 때문입니다.
당대 믿음으로 그치지 않고 뭇별을 바라보며, 이것은 이번 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서 저 하늘에 올라가고 보좌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을 때 내 자손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들, 앞으로 수천 년 이후에 일어날 일임을 믿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믿음을 한번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속 좁은 믿음인가, 얼마나 단견의 믿음인가. 넓은 믿음과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탁월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그 영혼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때 이 믿음을 붙든 것이 진심인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진심인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즈음에 가서 다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믿음이 크냐 작으냐, 내 믿음이 현세 기복적이냐 아니면 스케일이 보다 큰 믿음이냐, 이것을 함께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그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그런 믿음으로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믿음의 씨앗을 뿌리셔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담임 목사인 제가 우리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있는 동안 뭔가 기념비적인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눈에 띄는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교인들이 피곤합니다. 어떻게 견디시겠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눈에 띄는 단견의 일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고 씨를 뿌리고 그 다음 세대를 위해서 꿈을 꾸고 하늘에 있는 저 별을 바라보고, 앞으로 오고 올 이 땅의 모든 인류와 이 땅 대한민국, 온 세계의 열방에 믿음의 백성들이 저렇게 하늘에 뭇별처럼 많아지기를 꿈꾸고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전심전력한다면, 그것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믿음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번 그런 믿음, 진심을 보이면, 우리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런 진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진심을 받고 절대로 하나님은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조금 실수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때로는 하나님 속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왜냐하면 진심으로 한번 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심이 이렇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거기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1-5.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송아지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것을 이름하여 제가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저주언약이라 합니다. 옛날 고대 근동의 왕들이 서로 약속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다가 반을 쪼개고 그것을 길가에 이렇게 다 놓아둡니다. 그리고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두 왕들이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이유는 "내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여기 쪼개진 짐승처럼 나를 쪼개시오. 나는 당신 칼에 두 조각이 나도 상관없습니다." 이 언약이 저주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맺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먼저 아브라함과 이 저주언약의 당사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 큰 믿음, 당대 믿음이 아니라 그다음 뭇별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큰 스케일, 큰 믿음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너는 나와 언약을 맺을 자격이 충분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1-6. 인간의 약함
그런데 우리 인간의 약함을 한번 보십시오. 16장 3절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쪼개짐의 저주언약까지 맺어가시면서 "내가 너에게 자손을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랬으면 지켰으면 좋은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쯤 되니까. 중요한 말씀, 10년입니다. 여러분들 한 가지 기도 제목 가지고 10년 동안 기도해 본 적 있으십니까? 10년이 무엇입니까? 3년도 기도하지 못했을 텐데, 아브라함은 자손 문제 때문에 10년을 기도했습니다. 이제 주시겠지, 이제 주시겠지. 왜냐하면 이젠 내 기력의 끝이 보이니까, 남자로서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 기력의 끝이 다해가니까 조급해진 것입니다. 이제 여기가 한계로구나. 그리고 그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언약을 통해서 그렇게 약속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무효화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한 번 믿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신앙의 원리가 발견되는데,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 칭의받은 것입니다, 칭의받은 후에 구원받은 백성이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짓지 않습니까? 구원파는 죄를 지으면 그것은 가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라도 넘어지고 죄짓고 유혹받고 쓰러집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흔들리십니까?
16장 16절을 보십시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17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16장에서 17장으로 넘어가는 이 시차가 몇 년이나 존재합니까? 13년입니다. 자그마치. 그러면 우리가 16장과 17장 사이를, 이 막간을 이용해서 한번 글을 써보라 한다면, 그 사이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이 키우는 기쁨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뜻이로구나, 이런 방법으로라도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이러면서 그는 생각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13년 동안이나.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니까, 99세가 되니까, 아브라함의 남자의 기력이 다 사라지고 나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 히브리어로 완전하라는 말이 '타밈(תָּמִים)'이라는 말을 쓰는데 타밈은 겉과 속의 일치입니다. 이 겉과 속의 일치, 타밈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내면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에게 겉모습의 완전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겉모습의 완전, 행위로서의 완전.
그래서 하나님이 할례를 요구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가 그러므로 무엇입니까? 겉과 속의 일치, 완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할례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할례가 변이되고, 변질되고 또 변질되면서 할례만 받으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착각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착각을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말입니다.
1-7. 부활 신앙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이 천사와 함께 찾아오신 장면입니다.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이제 아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제 와서 99세에 왜 그랬을까요?
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이 이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남자의 기력이 다하고 여자로서의 기능이 다할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부활 신앙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의 몸이 죽은 몸과 같이 되었고, 네 아내의 몸도 죽은 여자의 몸과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에게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다. 자녀를 낳을 것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짜 낳았습니다. 진짜 낳았습니다.
나중에 22장으로 한번 가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힘으로 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라도 자기 힘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낳게 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 동안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이나 그에게 푹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기간 동안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신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신뢰하신다니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더 믿어주신다니까요.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이다.
22장을 보십시오. 22장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이라이트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이 자라니까 "너는 네 아들 이삭을 데려다가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 아브라함이 충격받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갔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푹 잤다는 말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결단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5절이 중요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중요한 말씀, "우리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내가 돌아오리라" 그러면 아들은 없고 나 혼자 올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돌아오리라", 반드시 아들과 함께 돌아오리라. 이 말은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아들과 함께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고 내 아내도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들을 낳게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달라 하면 다시 드려야 되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까 다시 살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 확신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정리하면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2. 믿음과 할례의 관계
다시 우리 로마서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겨진 시기가 언제입니까? 할례 받은 후입니까? 할례 받기 전입니까? 전입니다.
9절과 10절을 봅시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여기서 '그 믿음'에 줄을 좀 치십시오. 아브라함의 그 믿음, 우리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첫째는 스케일이 큰 믿음입니다. 현세 기복적 믿음이 아니라 그 다음, 뭇별을 셀 수 없을 것까지 수용하는 믿음. 그것이 그 믿음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부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아날 줄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들어 그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다급하게 불렀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의 정체 두 가지는 스케일이 큰 믿음, 그 다음까지 내다보는 믿음, 두 번째는 부활 신앙입니다.
10절,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할례 받기 전에 큰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1. 믿음이 먼저, 할례는 인침
아브라함을 통해 볼 때 믿음과 할례는 어떤 관계입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할례가 먼저 옵니까 믿음이 먼저 옵니까?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 할례가 있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믿음으로 된 의를 인쳤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믿음에 도장을 꽉 찍어준 것이 할례라는 뜻입니다.
여기 '인친 것이니' 할 때 '인치다'라는 말, 헬라어로 '스프라기다(σφραγίζω)'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확증하다, 증명하다는 뜻입니다. 도장 찍다는 뜻입니다. 도장을 찍어서 이것은 확실한 것이라고 해주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가 창세기 17장을 볼 때 말씀드렸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하다는 단어 타밈. 타밈은 겉과 속의 일치입니다. 그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는 속만, 속마음만, 영혼만 의롭다 했는데, 할례는 외적인 겉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할례는 내 믿음의 내적인 것을 외적으로 도장을 꽉 찍어주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결혼하고 사랑합니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그런데 요즘은 서로가 만나서 사랑하고 누가 누군지 서로 알고, 그리고 마음을 다 열고, 그다음에 저 사람을 내가 평생의 배우자로 함께 존경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되겠다 결단하고 그리고 결혼식을 합니다. 서로가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이 믿음의 의로움이라면, 결혼식은 확증하고 도장을 꽉 찍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의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2-2.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과연 옳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저도 옛날에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행동은 엉망이라도 잘 몰라도 교회 나와서 6개월 지나면 무조건 세례 주고, 그리고 또 1년 지나면 입교시켜 주고, 그리고 신앙생활 꾸준하게 그냥 하는 것처럼 보이면 교회에서 이렇게 이렇게 세워서 중직자 세워주고, 그러면 "직분을 줘야 저 사람이 일한다"고 "직분을 주면 반드시 일꾼 되어서 일하게 되어 있다"고.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한데, 로마서 말씀에 의거해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 할례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지금 21세기를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할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세례가 할례일 수 있습니다. 외적인 표시니까요. 교회 다니면서 직분 받는 것이 할례일 수 있습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 직분 받는 것이.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칭의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현세 기복적인 믿음과 현세 기복적인 신앙을 떠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내 경륜으로, 내 이 좁은 소견으로라도 받아들이고,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직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 사람이 그런 경륜으로 믿음의 인침을 받았는지, 그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본인이. 직분을 욕심내고 자리를 탐내고 그 자리가 마치 사회에서 계급처럼, 사회에서 내가 그것을 따야 할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 그것은 굉장히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성도들 중에 그런 이야기 합니다. "넌 권사 언제 따냐", "넌 장로 언제 따냐", "넌 교회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아직 장로도 못 땄느냐?" 무슨 아이들 딱지치기 해가지고 딱지 따먹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계급으로 승진하고 진급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겉과 속의 일치로 도장 찍어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큰 믿음 가지고 믿음으로 크게 잘 살았구나. 이제는 직분받고, 이제는 세례받고, 이제는 할례 받아서 겉과 속이 완전해라. 타밈으로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받은 우리 백성은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전까지는 내 속마음만, 내 영혼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내 외적인 표시로 할례까지 받았기 때문에 내 행위도 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직분이란 것, 우리가 할례받은 것, 세례받은 것, 이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울은 그 절차와 그 시기와 그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3. 믿음의 자취를 따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할례가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12절을 봅시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자취가 중요합니다. 자취가 무엇일까요? 헬라어로 '이크네신(ἴχνεσιν)', 발자국이라는 뜻입니다. 하얗게 눈이 왔는데 누군가가 산길을 걸어간 발자국이 있으면 그 다음 사람도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산에서 길을 잃지 않겠지요. 아브라함이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국을 우리가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자취를 우리가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그렇게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가라고.
그러면 그 순서를 따라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할례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직분 받고 먼저 계급장 따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선시되고, 그 다음 "너는 완전하라" 타밈으로서의 도장 찍는 할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아브라함과 후손들이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세상의 상속자라고 그러니까 돈 버는 뭐 세속적인 상속 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바울이 말씀하신 세상의 상속자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상급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땅과 자손에 대한 축복. 이것을 우리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상급처럼 우리에게도 주신 하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1. 언약의 의미
여기 언약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두 단어를 적어놓겠습니다. 하나는 '에팡겔리아(ἐπαγγελία)'요, 또 하나는 '휘포스케시스(ὑπόσχεσις)'입니다. 이 두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똑같이 언약이지만 휘포스케시스는 상대적인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상대적인 약속. 그리고 가변적인 약속을 말합니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에게 밥을 한번 사주면 다음번에 밥 얻어먹은 사람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다음에 내가 살게." 그다음에 이 사람이 나에게 밥을 삽니다. 서로 내가 잘해주는 만큼 저 사람도 나에게 잘해주고, 내가 선을 베푸는 만큼 나에게도 선이 돌아오고, 그것이 휘포스케시스입니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악을 행하면 악으로 돌아오고 선을 행하면 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언약은 에팡겔리아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 약속입니다. 무조건적 언약. 하나님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저주언약. "네가 현세 당대 믿음, 현세 기복적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졌구나. 뭇별을 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졌구나. 그럼 내가 너와 언약을 맺으마. 네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아도 나는 기다릴 수 있다. 13년 동안이나 이스마엘에게 빠져서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너를 기다려주마." 그것이 에팡겔리아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기다림의 때가 되어서, 이제 아브라함의 남자의 기력과 사라의 여성의 모든 기력이 다 끝나고 났을 때, 그때 언약을 맺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에팡겔리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에팡겔리아를 받으려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수용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크게 가지십시오. 현세적인 믿음, 눈앞에 보이는 것 보지 마시고, 그 다음을 보시는 믿음을.
3-2. 믿음에 속한 자의 특징
아브라함은 어떤 의미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을 가지면 우리에게도 이런 언약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만 특별하게 특수하게 맺어진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도 맺어가시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만 특수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나 또한 믿음의 또 다른 조상으로, 새로운 뿌리의 한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입니까? 17절부터 21절까지 4가지가 나오는데요, 한번 보겠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입니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뭇별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큰 믿음. 스케일이 큰 믿음입니다. "이는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믿음으로 오히려 아브라함은 견고해졌습니다. 믿음으로 견고해졌다는 말씀입니다.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것을 17절에서 21절까지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부활입니다. 부활. 그리고 두 가지로 이야기하라 하면 스케일이 큰 믿음과 부활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3-3. 아브라함 믿음의 핵심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 번 더 정리합니다.
23절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부활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부활을 믿었습니다. 자기 몸이 죽은 자 같은 육신이었는데 그 몸이 다시 살아나서 자녀를 낳을 줄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 하셨는데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로 믿는 부활 신앙을 가져야 우리가 아브라함을 진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할례받았다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활 신앙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신앙 가지기가 왜 어렵습니까?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2천 년 전 이야기겠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고, 이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25절은 5장을 이야기하기 위한 복선입니다. 그래서 5장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4장이 했습니다. 아브라함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그래서 5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25절에 복선을 하나 던지고 밑밥을 깔아주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로마서 4장 이야기를 아브라함 이야기와 함께 비추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 꼭 기억하시고, 다시 로마서 4장을 복습하실 때 창세기 12장부터 같이 보시면서 복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에는 할례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지만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도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에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도 보다 큰 믿음 가지게 하여 주시고, 스케일이 큰 믿음, 그 다음 세상을 내다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육체 기력이 떨어지고 사라도 자녀를 생산할 수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셨을 때도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으며 이삭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결단했습니다.
부활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도 본받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되도록 주께서 축복해 주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할례로 인치심을 받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