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 5: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 (5장)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오늘은 로마서 특강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네 번의 시간을 통해서 로마서를 조금 맛볼 정도로 살펴보았는데, 사실 로마서를 보면 볼수록 '이것이 쉽지 않구나, 대충 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느끼게 됩니다. 세 번 정도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미리 예습을 한 번 하시고, 함께 공부하는 시간에 두 번째 보시고, 그리고 다시 복습하시고, 그렇게 세 번 보시면 충분히 이해하고 또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지난 시간 로마서 4장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브라함 이야기는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을 두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은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고, 다가올 미래와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까지를 함께 포괄하고 아우르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부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믿음, 그 부활 신앙이 아브라함 믿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행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아브라함처럼 먼 미래 이야기를 마치 지금 나에게 올 것처럼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이나, 사랑하는 내 아들을 여기서 내가 잡았는데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은 사실 어려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이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의 중심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5장은 4장에 이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특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 하면 딱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할례 받기 전입니까? 할례 받고 난 이후입니까? 할례 받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뭇별을 보여주시고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가 그대로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할례 받기 전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가를 로마서 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여기 '우리'라는 말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포함되어 있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따라가는 나 같은 존재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앞으로 다가올 먼 미래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 부활 신앙을 믿는 믿음,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어떤 특권을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1-1. 하나님과의 화평
그다음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특권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특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첫 번째 특권, 가장 중요한 특권이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우리가 화평이라고 하면 화평의 반대말도 있겠지요. 화평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반대말은 불화입니다. 그러면 언제 불화한 상태였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기 전의 상태는 화평이 아니라 불화한 상태입니다. 화평과는 전혀 정반대의 개념이 불화인데, 그 불화한 상태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 다른 말로 하면 죄의 권세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불화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냥 관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은데, 사실 마음에 확 와닿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원죄 사건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죄가 들어오고 나서 불화가 생겼습니다. 크게 네 가지 불화가 일어납니다.
첫 번째 불화는 하나님과 죄 지은 인간 사이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항상 때가 되면 에덴동산에 임재하셔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 전체를 산책하고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니까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말합니다. "제가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던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 뭔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 죄 때문에 일어난 첫 번째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책망합니다. "너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내가 금지한 선악과를" 아담이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더러 함께 살게 한 이 여자가 나에게 주므로 제가 먹었습니다." 언제는 아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러면서 여자를 기뻐하고 사랑하고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죄 때문에 불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세 번째 불화가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내면에 불화가 생깁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말하지 않습니까? 서로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해서 나뭇잎을 가져다가 치마를 엮었습니다. 서로 부끄러워서, 내 죄 지은 나의 내면을 내가 스스로 바라보고 스스로 살펴보기가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죄가 생김으로 인해서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네 번째 불화가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입니다. "열심히 땅을 갈아도 땅이 너에게 엉겅퀴를 낼 것이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네가 앞으로 먹고 살 것이다. 땅의 소산을 얻을 것이다." 죄 짓기 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먹고 마음껏 취하고 누리고 살았는데, 죄 짓고 나니까 자연이 소산을 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땅에서 엉겅퀴가 생겨납니다.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서 불화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결과들입니다. 이 죄로 인한 불화는 옛날에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 사이에, 그들 사이에, 그들의 내면에, 그들과 자연 사이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죄짓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기 멋대로 외치고 다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한 불화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책임을 전가합니다. 정치권을 보십시오. 죄가 관영한 세상에서 이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도 정치권은 하나 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가정 안에서도 죄가 들어오면 부부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책임 전가하기에 바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부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죄가 들어오면 서로 간에 갈등이 아주 심각해집니다. 그것을 어떻게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면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볼 때는 잘생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저 사람이 무슨 고민이 있을까? 저렇게 좋은 집에 살고 돈 많이 벌고 예쁘고 멋있고 가정이 원만해 보이는데.' 그런데 그의 내면은 썩어져 갑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마음이 문드러져 갑니다. 죄로 인해서 불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불화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 직장, 일터를 말합니다. 죄로 인해서 아무리 일해도 고통스럽습니다.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긍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삶의 행복을 일터에서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화한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이런 문제들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아브라함과 같은 그 믿음을 가지고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불화가 종식되고 하나님과 함께, 이런 모든 불화는 사라져버리고 화평을 누립니다. 놀라운 특권 아닙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특권, 여기서 1절 끝에 보면 '누리자'라는 말을 헬라어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누리다'라는 말은 에코멘(ἔχωμεν)이라는 발음을 가지고 있는 헬라어인데, 그 뜻은 '소유하다,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화평이 네 앞에 있으니 가져가라, 취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그 증거와 특징이 있는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화평, 나의 내면에 기쁨이 있고 행복해집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비록 물질의 많은 것들은 얻지 못해도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느낍니다. 그런 사람 보셨지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계십니까?
1-2. 은혜에 들어감
두 번째 특권입니다. 2절을 봅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두 번째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다'라는 특권입니다.
은혜에 들어간다. 여기 '들어간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들어가다'라는 동사는 프로사고겐(προσαγωγήν)이라는 발음의 헬라어입니다. 원래 의미는 '항구에 정박하다'라는 뜻입니다. 은혜에 들어가는 것을 바울은 표현하기를 프로사고겐, 항구에 정박하다고 했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사실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배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오대양 육대주를 망망대해를 오랫동안 항해하던 배가 몇 년 혹은 몇 달을 항해하다가 항구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 승객들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드디어 집에 돌아가는구나. 드디어 이 배가 정박할 항구가 저기로구나.'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전에는 죄의 파도를 넘실넘실 넘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저 바다 끝에서 고생하며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고 에워싸고 있었고, 그 파도를 항해하며 믿음으로 투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항해가 다 끝나고 항구가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프로사고겐,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특권을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간다'하는 말은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리가 있어야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데 영화관에 자리가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내가 지금 열심히 가고 있는데 자리가 있을까?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당신 자리 맡아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라, 시간에 맞춰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마음이 넉넉해지지 않습니까?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가면 되니까. 자리가 있을까 없을까 걱정하지 말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바울이 여기서 은혜에 들어간다는 말을 프로사고겐, 항구에 배가 정박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은 '네가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함을 받은 자, 배가 항구에 정박할 그 배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함을 얻은 자, 천국에 너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만 하면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주님의 자리인 것처럼 너의 자리가 천국에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1-3. 소망 안에서의 자랑
세 번째 특권입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은 헬라어를 조금 의역해 놓은 것입니다. 사실 원어에 보면 '카우코메다 에피 엘피디'(καυχώμεθα ἐπ᾽ ἐλπίδι)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문 같지요? 하나하나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에피(ἐπί)라는 단어는 전치사입니다. '어디 어디 안에서'라는 뜻이고, 엘피디(ἐλπίδι)라는 단어는 전치사에 의해서 어미가 변하는 명사,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엘피스(ἐλπίς)라는 원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전치사를 만나서 어미가 변했습니다. 카우코메다(καυχώμεθα)라는 단어는 '자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소망 안에서 자랑하다'입니다.
여러분, 소망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사용할 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로 우리가 쓰는 말입니다. 허황된 소망을 자주 던집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청년이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우린 위로한다고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내년에는 반드시 붙을 거야." 허황된 소망 아닙니까? 사실 그 청년이 내년 시험에 다시 합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청년이 첫째는 의지가 있어야 되고,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아프지 말아야 되고, 최선을 다하는 전제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 없이 "야,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염려하지 마. 그것 아니라도 너 앞으로 성공할 거야." 우리가 자주 던지는 말들 중에 허황된 소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소망은 확실한 소망입니다. 허황된 소망이 아니고요. 여기서 '소망 안에 있다, 소망 안에서 기뻐하고 바란다' 이 말은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이 확실한 소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보장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쳐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한 소망입니다. 소망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특권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분명히 이 소망을 기억해야 됩니다. 세 가지 소망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불화한 관계가 아니라 화평을 누리는 것. 두 번째는 배가 항구에 정박하는 것처럼 은혜의 항구에 우리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들어가는 것. 확실한 소망 안에서 그 소망을 붙잡았기 때문에 자랑할 수 있는 것.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1-4. 환란 중의 즐거움
그런데 그다음을 보면 우리 현실이 딱 주어집니다. 현실을 볼까요?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구절 많이 외우고 계시지요? 그런데 맥락 안에서 외우셔야 됩니다. 우리가 3절을 보면서 당황스러운 단어가 있습니다. '환란'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당황스러울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세 가지 특권을 주님께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환란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하시고 인쳐주신 세 가지 특권을 나는 이미 받았는데, 여전히 내 현실은 환란입니다. 왜 환란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환란은 통과하고 이제는 영광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특권까지 부여받았는데 여전히 우리의 인생은 환란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이 극복해야 될 성화의 과정이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을 받은 자들은 환란이 있어도 환란을 환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환란 중에도 어떻게 한다고요?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은 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은 자의 특징은 환란이 닥치면 도망가 버립니다.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그것을 감내하고 극복하고 이겨낼 동력이 없습니다. 점쟁이 찾아갑니다. "저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올해 제가 피해야 될 게 뭡니까? 부적 하나 써주십시오." 뭐 그러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환란 중에도 기뻐합니다.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확신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연단'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 보면 연단을 'charact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글 성경은 '연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캐릭터는 성품 아닙니까? 인내가 계속해서 주어지면 성품이 만들어집니다. 아주 기질이 사나웠던 사람도 주님 안에서 온순해지고, 세상것 좋아하던 사람도 연단을 받고 인내를 받으면서 그 성품이 예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요? 마지막에 결국은 소망을 이룹니다. 우리가 소망 안에서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환란이 그 가운데 들어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건강하게 무병장수하는 것, 자식이 잘 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어려움 없이 그냥 무탈하게 잘 살아가는 것 등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짜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이 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 소망을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나를 도구로 써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 있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연단받고 인내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진짜 소망을 가지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1-5. 슬로브핫 딸들의 소망
항상 로마서를 볼 때는 구약의 사건에 비추어서 봐야 되는데, 이 진짜 소망을 가진 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민수기 27장을 보면 어떤 여인들 다섯 명이 나옵니다. 아마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다섯 명의 딸들입니다.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출애굽 과정에 있었습니다. 민수기 27장이니까 출애굽하는 과정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는데, 므낫세 지파에 속한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들이 없었습니다. 딸만 다섯이 있었습니다. 딸들이 나이가 어립니다. 아마 추정컨대 1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다섯 명의 딸들이 아버지가 죽고 나서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당돌하게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자식 없이, 아들 없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듣자 하니까 나중에 하나님 주실 그 땅에 들어가면 지파별로 땅을 분배한다고 하는데, 아들 계보를 통해서 땅을 주신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들 없이 죽었습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에 가담한 적도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살아온 것에 비하면 아들 없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땅을 분배하지 않는 건 불공정합니다. 우린 딸들이라도 땅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땅 주십시오. 약속하십시오."
모세에게 다섯 명의 딸들이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모세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민수기 27장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아들이 없어도 아버지의 형제를 찾아서 기업을 주고, 그 기업을 나중에 딸들이 성장하면 딸들에게 받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딸들이 모세를 찾아가서 정말 말을 잘해서, 혹은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해서 땅 약속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 때문에 땅 약속을 받은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논리정연해서 땅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분명한 미래에 대한 가치와 소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땅 약속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 모세 시절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입니다. 가나안 땅은 아직까지 저기 멀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나타나기도 전입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서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도 한참 전입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땅을 준다고 했는데 우리가 몇십 년째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땅이 있기는 한 걸까? 과연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올까?' 그런 의심과 불신 가운데 있을 때 슬로브핫의 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모세를 찾아가서 땅을 달라 했습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지금 걸어가는 이 광야길 한 걸음 한 걸음이 비록 고되고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지만 훗날 시간이 지나면 가나안 땅에 분명히 들어갈 것이고 그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아들이 없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딸들인 우리가 땅을 차지하고 싶다.
약속이 나중에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확실히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17장 3절과 4절 말씀입니다. 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다섯 명의 딸들이 있지요. 4절입니다.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또 갔습니다. 이전에는 수십 년 전에는 모세에게 갔다가 이제는 여호수아에게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 함에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기업을 주었으므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제 우리에게 확정해 달라고 가나안 정복이 다 끝난 다음에 여호수아를 찾아간 것입니다. 이 딸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그 소망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우리 가정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저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셔야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선한 꿈을 꾸고 선한 뜻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분투하십시오. 한국 교회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분투하고 기도하고, 우리 교회부터라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저기 있는데 믿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탐꾼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돌아와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우리가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에서 33절입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런 믿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소망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출애굽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민족의 대표자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슬로브핫의 다섯 명의 딸들, 그 어리고 어린 그 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땅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전혀 다른 믿음 아닙니까?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현실의 환란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신 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은혜의 항구에 배가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환란을 당해도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환란 중에도 기뻐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꿈꿀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위대한 특징들을 마음에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1-6. 성령의 역할
환란 가운데 인내하며 연단받고 소망을 가지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환란이 있지만 이것을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5절이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밑줄 치십시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8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게 되어서 견딜 수 있습니다.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출애굽기 14장에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는 것을 봤습니다. 뒤따르던 이집트의 군사들이 다 수장되는 것을 봤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모세와 미리암이 소구치며 춤춥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15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목이 말라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16장에 가면 고기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바로 뒤돌아서서 바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환란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아직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을 인정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아직까지 훈련받아야 되는 자들입니다.
1-7. 하나님 사랑의 시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언제 나타났으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6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먼저 6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세 개 다 밑줄 치셨지요? 그런데 6절, 8절, 10절에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다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6절로 다시 갑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예수께서 죽어주신 그 시점이 언제입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했을 때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또 죽으심으로 나옵니다.
6절은 연약할 때 죽으셨고, 8절은 죄인 되었을 때 죽으셨고, 10절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 시점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실 만하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죽으셨습니다. 내가 아직 연약하고 죄인 되고 원수 되었을 때. 로마서는 이 시점의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터치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4장에서 살펴보았을 때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은 시점이 언제냐, 할례 받기 전이냐 할례 받은 후냐 이것을 질문했습니다. 할례 받기 전입니다. 할례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겉과 속의 일치, 탈메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의로움이 내적인 의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외적인 할례로도 승화되어 가야 된다. 겉과 속이 하나도 다름없이 일치되어야 된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영원히 멸망의 구덩이에서 불쏘시개 노릇할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람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 로마서가 우리에게 주는 복음의 진정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한번 대입시켜 보십시오. 내가 연약할 때,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십자가의 원수 되었을 때 주님은 그보다 훨씬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해 놓으셨습니다. 구원을 향하여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 이야기가 주는 여러 가지 교훈이 있는데, 그중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제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으며 만일 누구를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곱절이나 갚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만약 오늘 우리 같으면, "그래 네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로, 그것도 이 큰 도시의 세리장으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겠느냐. 네가 오늘 한 그 고백을 내가 마음에 새기고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 십자가 지고 부활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도 네가 여전히 그렇게 성실하게 마음 변치 않고 살고 있다면 그때 내가 너에게 구원을 선포하겠다. 그때까지 마음 변하지 말고 잘 살아야 된다." 아마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삭개오가 고백하는 그 즉시 '오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행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가 그렇게 약속해놓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사는지 그런 것은 주님은 묻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여기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때를 이야기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모두는 자격 없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미 초대해 놓으신 죄인들이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2. 아담과 그리스도
2-1. 죄의 기원과 성장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은 누구 때문이며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한 사람, 아담입니다.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실 것은 죄가 어떻게 됩니까? 사망으로 성장합니다. 죄의 속성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인데, 죄는 성장하고 자랍니다. 마치 인격체 같아서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죄는 자랍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마치 밥 먹고 성장하고 뛰어놀면서 자라는 것처럼 죄도 반드시 자랍니다. 가만히 두면 죄가 자라서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죄는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죄의 특징은 인격처럼 잘 자랍니다. 그리고 죄가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러 가지 표정이 있지 않습니까? 우는 모습, 웃는 모습, 기뻐하는 모습, 찡그린 모습, 그리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 이런 등등의 모습이 있는데, 죄도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별을 해야 됩니다. 죄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에 죄는 인격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나서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계속 성장하고 자랍니다.
반면에 성령도 똑같습니다. 속성이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도 성장합니다. 씨앗처럼 작은 성령이 성장하고 자랍니다. 성령 충만해집니다. 성령이 줄어들 때도 있습니다. 성령도 역시 다면적인 얼굴을 가집니다. 때로는 분노하시는 모습, 진노하시는 모습, 때로는 어머니처럼 안아주고 상냥하고 따뜻한 모습, 때로는 묵묵히 기다려 주시는 모습. 여러분은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와서 온 세상이 죄가 관영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들어오는 것,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경계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 하나님은 특별히 첫 번째 세운 공동체에 죄가 들어오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때문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쫓아내셨습니다. 한번 용서하고 '다음부터 그러지 마' 그렇게 하지 않고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출애굽 공동체, 얼마나 거룩한 공동체입니까? 그 공동체를 데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시는데 그 공동체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번째 성 여리고성 전투에서 누구를 통하여? 아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헤렘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 진멸하라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은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자기 장막 밑에 숨겼습니다. 하나님이 아간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를 반드시 밝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정도 죄로 죽일 것 같으면 이 세상에 남아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첫 번째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장만하신 첫 번째 거룩한 공동체에 죄가 들어오는 것 나는 용납하지 못하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간 이 아이를 반드시 죽이고 가야 되겠다. 출애굽 공동체의 아간을 하나님은 벌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대표적인 주자입니다. 교회가 처음 세워졌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인데, 그런데 그 교회 공동체에 성령을 속이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 정도 거짓말로 죽이십니까? 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누구로 인하여 들어오는 것을 굉장히 경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 때문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 그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2-2. 율법의 역할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13절입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없으면, 구약에 율법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없다고 죄인이 죄인이 아닌 것입니까? 모세오경이 없을 때에도 아담은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죄입니다. 모세오경이 없을 때도 율법이 없을 때도 죄는 죄고, 율법이 있어도 죄는 죄입니다.
2-3. 대표성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아까는 바울이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죄의 권세에서 속량 받게 되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속량입니까? 풀어주는 것을 속량이라고 했습니다. 죄로부터의 속량, 죽음으로부터의 속량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 때문에 은혜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아담 때문에 내가 지금 죄짓는다는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제가 이제는 죄 짓지 않고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로 중고생들, 따지기 좋아하는 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입니다. 진리입니다.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한번 보십시오. 가정에서 우리는 자식을 보고 그 자녀가 하는 못된 행동들을 보고 자녀를 꾸짖습니다. 그러면서 뒷말을 하지요. "저게 누구 닮아서 저런 짓을 하냐고." 그런데 곱씹어 보십시오. 돌아보십시오. 누구에게서 왔겠습니까? 아버지 아니면 엄마에게서 왔겠지요.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니까.
만약 부모가 매일같이 문제가 있으면 술을 먹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술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으면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 해결하려 하지 않고 술로 모든 문제를 다 풀어가려고 합니다. 자녀들은 술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아버지가 술 먹고 집에서 가재도구 부수고 엄마 때리고 가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 가정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들 너무 싫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죄가 아이들에게 내면화됩니다. 퍼센티지를 보십시오. 가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와 문제들이 불행한 가정에서 불행한 일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 세대가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 모를 것 같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 용하다는 점쟁이가 있는데 한 번만 가보자. 한 번만. 우리가 다 교회 나가고 집사지만 한 번만 가보자. 가서 이야기 들어보는 것 뭐 들어보고 안 하면 되니까. 한 번만 가보자. 그러면 나중에 자녀들도 "한 번만 가보자" 똑같이 합니다. 자녀들도 똑같이 부모가 했던 그대로. 그것이 대물림됩니다. 그대로 내려갑니다.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부모 세대가 그랬으니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내가 이를 깨물고 나는 고통스럽더라도 그 저주의 사슬을 끊고 내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방식과 하나님의 문화와 그리스도의 가치를 물려주겠다. 그것이 부모 세대의 결단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똑같은 구습과 똑같은 악습을 반복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회사에서도 그렇습니다. 문화가 있습니다. 회사의 문화, 회식 좋아하는 문화, 술자리 많이 만드는 문화, 그 부서의 문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문화를 만들고 그런 전통을 만들면 그 문화와 전통을 깨부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전 존재를 거기다 걸어야 되니까.
교회에서도 아주 나쁜 문화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사니까 다 좋다. 교회에서 하는 것은 100% 다 선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행하는 나쁜 문화들, 구습과 악습들, 철폐해야 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쉽게 없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그렇게 내려왔으니까, 전례가 있으니까. 전례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깨야 됩니다.
북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타락했습니까? 여로보암 1세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이 어떤 짓을 했습니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갖다 놨습니다. "이 금송아지가 너희를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다" 그랬습니다. 제사장이 갑자기 없으니까 아무나 세워서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절기를 함부로 변경했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여로보암 1세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그다음 왕, 그다음 왕, 나중에 아합까지, 또 그다음 왕까지. 성경을 보십시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죄가 한번 들어가면 그것을 끊어내기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아담의 죄, 이 죄의 관성을 막아 세우고 그것을 끊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몸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온몸으로 막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왔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가 들어왔다. 그 말씀이 오늘 이 말씀 아닙니까?
15절 다시 보십시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100명, 200명, 300명, 만 명, 2만 명? 아닙니다. 오고 오는 모든 인류, 우리가 감히 손으로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을 여기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14만 4천 명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십자가의 공로가 14만 4천 명으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선물이 오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미쳤습니다. 아담의 원죄가 수많은 사람에게 흘러갔는데, 예수님의 은혜가 그 은혜의 자리에 잠들고 그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속량의 은혜가 흘러 넘쳐갈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가장 귀한 선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한 범죄는 누구의 범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담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아담이라는 말은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흙, 티끌, 먼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원래 첫 번째 인류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흙으로 만들어진 나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 모든 대표적인 인간의 대표 명사가 아담입니다. 하와의 남편 아담, 아벨의 아버지 아담이기도 하지만 흙으로 빚어진 내가 아담인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됩니다.
한 범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처럼 내가 지은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가정이 초토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은혜가 들어간 것처럼 내가 우리 가정의 저주의 사슬을 끊고 이제부터 말씀대로 살겠다. 믿음으로 살겠다. 기도로 살겠다. 우리 자식들에게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가르치고 전수하겠다. 우리 교회에 세속적인 사고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교회로 만들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과정은 힘들더라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보십시오. 악한 이름의 주인공이 아니라 선한 이름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길이 남겨 보십시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라합 같은 사람들. 라합의 가문은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가문입니다. 여리고성의 기생입니다. 여관집 주인입니다. 라합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녀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어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라합 한 사람으로 인해서 라합의 온 집안이 구원받고, 라합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족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정도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2-5. 순종의 시각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삶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까? 19절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종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처럼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는 순종하셔야 됩니다. 어디에? 말씀에. 말씀에 순종하면 이제부터 나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이 나라 민족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2-6. 죄와 은혜의 관계
죄와 사망, 의와 은혜의 상관관계가 어떠합니까? 20절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죄 실컷 짓는 사람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있다며? 나는 죄를 많이 지으니까 은혜가 넘칠 것 아니냐?' 궤변입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죄를 깨뜨리고 단절시키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의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먼저 죽어주셨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돌이킴 없이 회개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할 수 있겠습니까?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나가며
5장 말씀, 오늘 읽은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특권, 특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환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러나 환란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확실한 소망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소망의 예를 슬로브핫의 다섯 명의 딸들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때는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의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가 들어왔습니다. 아담처럼 우리도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인데, 내가 죄 지어서 우리 가정을 초토화시키지 말고, 혹시 그런 잘못된 분위기와 습관과 가정의 관습 가운데 있다면 내가 예수님 닮은 자가 되어서 온몸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저주의 사슬을 끊어내시기 바랍니다.
5장 말씀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혹시 시간이 더 있으시다면 로마서 5장까지, 1장에서 5장까지를 한 번 더 복습하시고 마음을 되새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특권과 환란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는 비결, 소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왔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멈춰 세워지고 오히려 우리 안에 은혜가 들어왔음을 깨닫습니다. 아담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며 순종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미련하고 부족하고 연약하나 주님의 십자가 능력과 권능 안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크고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을 깨달아 오늘 우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이기를 원하오니 하나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