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 전체녹취

로마서 특강-6: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6장)

로마서 6장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오늘은 로마서를 드디어 5장을 끝내고 6장을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구절 한 구절의 은혜도 받고, 로마서가 이런 말씀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왠지 모르게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에는 은혜가 되는데, 큰 얼개와 숲을 보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6장에 들어가기 전에 1장에서 5장까지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앞의 1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1. 로마서 1-5장 요약

바울이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가장 주된 핵심이 무엇입니까? 1장은 인간의 상태를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인간의 상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에 비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서 좀 더 나은 것 같아 보여도,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1장 이야기는 죄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죄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2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당연히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분인데, 죄 짓도록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심판받아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 앞에 처해 있는 인간의 운명, 이것이 2장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죄를 미워하셔서 인간을 심판하기는 해야 하지만 또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하나님은 어떻게 확정하셨습니까? 3장은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3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다른 말로 옮기면 그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이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장에서 중요한 개념이 등장했는데 속량이라는 개념입니다. 속량은 어디로부터 풀어주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풀려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죄요 두 번째는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죄로부터 풀어주시고 죽음으로부터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화목제물을 언급했습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예수님 화목제물로 인해서 완전히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우리는 아주 긴급하게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3장의 내용입니다.

4장으로 가면 한 분의 예가 등장합니다. 그 한 분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을 우리는 두 가지 배웠습니다. 먼저 먼 미래까지를 함께 포괄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고 "너의 자손이 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지금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이 내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마치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처럼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신앙입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는데, "내가 돌아오리라"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두 가지 믿음으로 확증됩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시기가 중요한데, 할례받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칭의의 믿음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4장이 5장으로 넘어가면 현실이 나옵니다. 칭의는 받았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칭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현실은 밑바닥입니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악한 사람이 있고, 여전히 죄가 나를 유혹하는 현실이 있고, 나는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과 함께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은혜가 들어오고 구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지난 5장에서 드렸습니다.

여기까지가 1장에서 5장까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로마서의 전체 흐름과 얼개를 아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틈나면 메모지에 메모도 해 보십시오. 1장은 인간의 상태 곧 죄, 2장은 피할 수 없는 심판, 3장은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와 속량과 화목제물,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칭의, 5장은 인간의 현실 곧 칭의 받은 인간의 아주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한 사람 아담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암송하시고 암기하시고 외우시면 좋겠습니다.

2. 성화의 삶과 죄

이제 오늘부터 살펴볼 6장, 7장, 8장 이야기는 성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칭의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4장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로마서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성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풍성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6장에서 8장까지는 성화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6장은 이런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방해하는 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화된 삶을 살고 싶은데, 이 성화를 방해하는 적이 있습니다. 그 적이 바로 죄입니다. 아까 우리가 1장에서 인간의 상태가 죄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죄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 칭의하심을 입은 자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데도 죄가 여전히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6장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을 오늘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7장은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죄 때문에 성화의 과정을 가는 사람이 너무 지쳤습니다. 고단해 죽을 것 같습니다.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까"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이유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죄가 자신을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8장에서 해결했습니다. 이 곤고한 인생을 해결한 8장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성화의 삶을 이기게 하시고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성령이 바로 8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6장, 7장, 8장 전체는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6장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아주 무시무시한 죄, 7장은 지친 인생, 8장은 성화의 삶을 승리하게 하시는 성령,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2-1. 구원의 세 단계

칭의와 성화를 이야기하니까 빼놓지 않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세 가지 단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과 성화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칭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하나님이 무조건 "너 의롭다"라고 해 주신 것입니다. 그냥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있는데 "너는 그냥 의롭다"라고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까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 이것이 칭의 차원의 의로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한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래 너 의로워"라고 하셨다면, 진짜 그 사람의 행동과 마음과 생각까지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그를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 차원의 구원을 가장 잘 이야기하고 있는 말씀이 빌립보서 2장 12절인데,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해하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되어 있으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구원을 우리더러 이루라고 하느냐고 생각합니다.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화의 차원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화로 훈련시켜 나가는데, 그 훈련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훈련에 직면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훈련시켜 가면 성화되고 연단됩니다. 훈련 받으십시오. 이 말씀입니다.

이것이 끝나고 나면 나중에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 그날이 바로 천국 백성이 되는 날이고 영화 차원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아주 상징적으로 그리고 사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구원한 것이 칭의 차원의 구원이고, 그들을 광야에서 진짜 하나님 백성답게 훈련시켜가는 40년의 여정이 성화 차원의 구원이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영화 차원의 구원입니다.

다윗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이새의 집에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선지자가 가서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그분은 그때부터 무엇이 됩니까? 왕입니다. 당연히 왕입니다. 왕에게 기름을 부으니까 다윗은 왕입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왕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왕입니까? 왕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은 받았지만 왕으로 선택받았지만 아직 왕이 아닌 상태입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완성된 구원이 아닌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주시고 진짜 왕으로 그를 훈련시켜 가십니다. 사울의 궁전에서 광야에서 쫓겨 다니면서 그를 어마어마하게 훈련시킵니다. 성화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다음 진짜 왕이 되게 하십니다. 영화 차원의 구원입니다.

2-2. 죄를 다스리는 방법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화의 삶을 자꾸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 자꾸 포기하게끔 만드는 것, 성화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6장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6장은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죄에 직면하는데,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나는 죄를 떠나고 싶습니다. 인간의 무시무시한 죄의 장막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데, 죄가 나를 괴롭힙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3절과 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3절과 4절 두 절을 읽었는데, 여기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어떤 말이 반복됩니까? "합하여"라는 말입니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4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합하여"라는 말에 밑줄을 치십시오. "합하여"는 헬라어로 '에이스'(εἰς)인데, 영어의 'in, to'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소속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소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하여"라는 말 앞에 두 번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합하여"를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이 합하여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그다음에 어떻게 설명합니까?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한 것이다" 예수와 합하는 것이요, 예수의 죽으심과 합한 것입니다. 합하다, 에이스(εἰς), 인투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예수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4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똑같이 죽으심이 나옵니다. 같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죽음의 의미가 어떤 말입니까?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살고 있습니다.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죽는다는 말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신을 죄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는 악한 자아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3-1. 세례의 의미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방식을 아주 특이하게 설명합니다. 3절에도 보면 세례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또 나옵니다. "세례를 받은 줄" 4절에도 보면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도 똑같이 세 번이 나옵니다. 바울은 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죽는 것을 세례받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시절의 세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것이 명확해집니다. 예수님 시절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들어가서 받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 줄 때,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베푸셨는데, 강물이 흘러내립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강물이 흘러내리는데 거기에 사람이 들어갑니다. 거기서 첫 번째 세례의 의미가 나옵니다. 첫 번째 세례의 의미는 흐르는 강물에 나의 옛 모습을 다 떠나보낸다는 뜻입니다. 세례의 첫 번째 의미는 떠나보냄입니다. 강물이 한 번 흘러가면 다시 똑같은 강물이 흘러옵니까? 흘러오지 않습니다. 똑같은 강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위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서 저 밑으로 흘러가서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버리면 같은 강물은 흘러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강물 그 지점에 발을 담그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강물은 새로운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옵니다. 세례받음의 첫 번째 의미는 떠나보냄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세례받을 때 물속에 푹 잠기는 것입니다. 요즘 세례할 때는 상징적으로 물을 살짝 뿌리게 하지만, 과거에는 사람을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꾹 누르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숨이 끊어집니다. 그만큼 누르지 않고 다시 끄집어 올립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옛 자아는 저 물에 수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옛 모습을 떠나보내고 나는 죽었습니다. 다시 건져 올린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자아입니다.

세례의 두 가지 의미, 떠나보냄과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말을 세례와 함께 쓰는 이유는 떠나보냄과 죽음을 의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흐르는 강물에 나의 옛 자아를 흘려보내고, 그리고 나를 죽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죽여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매일같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예수 믿으면서 내가 세례받고 나는 죽겠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삶의 방식을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화려했던 삶을 죽여야 합니다. 과거에 물질을 많이 모아서 돈 많이 쓰고 물질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과거에 명예와 평판을 최종 가치로 여기고 살아갔는데, 그것을 떠나보내고 그것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과연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삶을 온전히 다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죽고 새로 산다는 것이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한다는 말은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은 사람, 도덕적으로 이 사람이 조금 더 선해지고 착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2. 홍해와 요단강

세례를 이야기하니까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홍해를 건너왔던 것을 세례받은 사건으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보셨습니까? 바다 가운데로 지날 때 구름과 바다 가운데서 세례를 받았다고 바울이 표현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양쪽의 벽처럼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처럼 건너갔습니다. 건너가면서 양쪽에 바닷물이 멈춰 서 있는 것을 그들은 경이로운 광경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세례받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왜 홍해 바닷속을 건너오는 것을 세례로 표현했습니까? 너희들이 조상 적부터 430년 동안 이집트에 살면서 이집트의 사고방식과 이집트의 가치관과 이집트의 우상숭배와 이집트의 죄성을 여기 이 바다에 다 묻어버리라, 여기 이 바다에 다 떠나보내라, 그리고 이 바다를 다 건너가면 이제는 광야길을 걸어갈 터인데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사람이 되라, 바울은 그런 의미로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출애굽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를 건널 때 이분들이 물을 한 번 건넜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물을 건넌 사건이 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길을 다 걷고 그다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바다를 건넌 것이 더 두려웠습니까? 아니면 요단강을 건넌 것이 더 두려웠습니까? 물을 무서워하는 분들은 바다건 강이건 다 무섭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은 바다보다 강이 더 무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해 바다는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상태에서 건너갔는데, 요단강은 흐르고 있는 강물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제사장들이 먼저 발을 딛고 나서야 강물이 멈춰 섰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언제 멈춘다고 했습니까? 제사장들의 발이 그곳에 닿으면 멈춘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닿아야 멈춥니다. 제사장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 3장 5절을 보시면 성결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요단 강물이 멈추고 강물을 멈춘 그 자리로 백성들이 건너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그들의 영적 성결이었습니다. 성결하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죄의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죄가 죽어야 성결할 것 아닙니까? 성결하고 죄가 죽고, 그리고 그 강물을 마른 땅같이 건너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귀한 선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이라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선물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죽어라"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너의 죄의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 죄의 자아가 죽으면 성화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이루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지도 않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놀랍고 가장 귀한 선물을 이미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죄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귀하고 값진 선물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아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3-3. 함께 장사됨

교재를 보시면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시 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요즘은 "장사되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장사 지내다, 장사되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쉬네타페멘'(συνετάφημεν)이라고 씁니다. '쉬네타페멘'이라는 말을 분해해 보면 '쉰'(σύν) 더하기 '탑토'(θάπτω)라는 단어인데, '쉰'은 전치사로서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탑토'는 매장하다, 묻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장사되다, 함께 묻어버리다, 누구와 함께입니까? 예수님과 내가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함께 매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수동으로 되어 있는데,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내가 장사되는 것이고,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그래서 너의 옛 자아를 완전히 묻어버리고 기억조차 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그것을 다시 살려내고, 다시는 그것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장사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4절 다시 보면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여기 "새 생명 가운데서" 헬라어로 보면 '엔 카이노테티 조에스'(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에'(ζωή)는 생명이고, '카이노테티'(καινότητι)는 새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엔'(ἐν)은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새로운 생명 안에서라는 뜻인데, 이 새로운이라는 원형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새로운이라는 원형이 '카이노테스'(καινότης)라는 원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에 보면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카이노테스'(καινότης)라는 말이 있고 '네오스'(νέος)라는 말이 있습니다. '카이노테스'와 '네오스'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말로 옮겨놓으면 새로운이라는 말로 똑같은데, 왜 다릅니까? '카이노테스'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합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완전히 새로운 분이십니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네오스'라는 새로운 것은 물컵이 더러워졌을 때 깨끗하게 닦으면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습니까? 안경에 얼룩이 묻었습니다. 그러면 안경을 닦고 세척하면 아주 반짝반짝해서 잘 보이는 새것처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오스'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카이노테스'는 대체할 수 없는 새로움을 의미하고, '네오스'는 대체 가능한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를 들어 구절을 적어두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 새 사람, 여기 새 사람은 완전한 새 사람입니다. 완전한 새 사람, '카이노테스'의 새 사람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변화된 나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여기에 새롭다라는 뜻도 '카이노테스', 완전히 새 사람, 전혀 다른 사람을 여기에 '카이노테스' 새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네오스'라는 단어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38절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 어제도 이 포도주 맛이 똑같은데 오늘 먹는 새 포도주, 새 부대, 떨어진 부대를 새로 꿰매도 새 부대, 그리고 바꿔 와도 새 부대, 대체 가능한 부대입니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여기 새것, 이것도 '네오스'를 쓰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고 그리고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은 완전한 새로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뜻은 "저 사람이 작년보다 좀 사람이 달라졌어" "저 사람이 그래도 과거보다는 좀 좋아졌잖아" 이런 의미가 아니고, 완전히 인격이 바뀐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카이노테스', 예수와 함께 죽어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4절 끝에 보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행하다"라는 말을 '페리파테소멘'(περιπατήσωμε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도 분해를 해보면 '페리'(περί) 더하기 '파테오'(πατέω)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페리'는 "주변의"라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파테오'는 걷다, 동행하다, 살아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합쳐보면 어떤 뜻입니까? 주위를 걷다, 주변을 맴돌다, 주변에서 누군가와 함께 동행하다라는 뜻입니다. 누구와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까?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죄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내가 죽고, 그러면 새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새롭게 부활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3-4. 같은 모양으로 연합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같은 모양으로 부활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 5절을 읽으시면서 가장 마음에 딱 와서 꽂히는 단어를 한번 찾아보십시오. 묵상해 보십시오. 저는 이 5절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단어는 "같은 모양"이라는 단어입니다. "같은 모양"이라는 말 앞에 어떤 말이 있습니까?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 "그의 죽으심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행복한 죽음입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비참한 죽음이 아닙니까? 채찍 맞으셨습니다. 채찍 끝에는 짐승의 뼈가 있어서 그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파고들면, 그리고 채찍을 찢어서 들어내면 예수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척추와 등뼈에 맞으면 뼈가 으스러집니다. 거기에서 피가 콸콸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시관 쓰셨습니다.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서 눈을 찌르고 눈을 타고 내립니다. 예수님이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서 그 몸무게를 다 이겨내도록 십자가에 그대로 세워놨습니다. 찢겨나가는 고통입니다. 옆구리에 창이 들어왔습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물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을 발가벗겼습니다. 우리가 십자가형을 다룬 영화나 그림을 보면 적어도 예수님의 몸에 하나의 천은 둘러두고 있지만, 실제로 십자가형을 할 때는 예수님의 온몸을 다 벌거벗겼습니다. 수치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된다는 의미는 바로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죽는다, 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죽는다,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바로 이런 의미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나를 처절하게 철저하게 죄에 대하여 파괴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죄의 인격,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죄의 소욕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습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모습 그대로, 우리는 그렇게 나를, 죄를 인하여 달려가는 나를 그렇게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투쟁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희는 아직까지 멀었다고, 죄에 대하여 투쟁하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투쟁해 보셨습니까? 죄가 나를 유혹하면 뽀로롱 달려가고, 죄가 나를 손짓하면 거기에 가서 고개 숙이고, 죄의 쾌락을 즐기기를 기뻐하고, 사람들이 죄짓기 즐겨 하는 그 무리에 끼어들고, 나도 한몫 얹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처절하게 버리고, 너 혼자 이 사회에서 유리되고 왕따 된다 할지라도 너는 죄의 쾌락을 누리지 마십시오. 예수의 모양과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죽으십시오.

이 말씀대로 과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다음을 보십시오.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부활이었습니까? 영광의 부활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처럼 부활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피 흘리기까지 죄와 투쟁해서 내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버린 자가 되면 주님께서는 나를 살려서 완벽하고 완전한 영광의 부활로 나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이 오늘 성경에 기록된 약속입니다.

이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죄에 대하여 절대로 반응하지 마십시오.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죽은 자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의 부활의 날에 너를 일으켜 세워서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세워주실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자의 스케일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어서 돈 그깟 돈 좀 더 벌고, 예수 믿어서 90살 살 것 100살까지 살고, 예수 믿어서 자녀들이 조금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고, 이것은 복의 부스러기 중에 부스러기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최종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부활의 자리에 주님과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해서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어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그 정도 투쟁해 보셨습니까? 그렇게 투쟁하지 않고 우리가 어찌 영광의 부활에 영광을 얻으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뻔뻔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스케일이 큰 믿음입니다. 바울이 이런 것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긴 것입니다. 배설물처럼 여긴 것입니다. 유대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물질도 많은 사람이고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보니까 한낱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 다 버려도, 그것 다 없어도 나는 주님과 함께 죽으심과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해서 부활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정도의 큰 스케일을 가져야 우리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4. 연합한 자의 삶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예수님과 연합한 자 어떤 삶을 삽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또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6장의 핵심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죄를 이기는 방법인데, 그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똑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죽었으면 살 것을 믿는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것은 11절에서도 반복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성경을 읽으시면서 눈여겨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6장을 보면 1절에서 10절까지는 "우리가" "우리는"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11절부터는 "너희가" "너희는"이라는 단어로 바뀝니다. 확인해 봅시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5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6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8절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가" 반복됩니다. 그런데 11절부터 "너희는"이라고 바뀝니다. 11절 한번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렇게 바뀝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바뀌었습니까? 바울이 "우리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사도들 무리에 든 사람을 "우리"라고 표현한 것이고, "너희는" "너희도"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도 이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다시 살 줄을 믿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너희도 이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인데, 가르치는 자는 자기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도 목사입니다. 목사가 얼마나 말을 많이 합니까? 오늘도 한 시간 내내 저 혼자 말하고 있는데, 매 주일 설교합니다. 새벽기도 설교합니다. 수요 사경에 설교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데 삶을 따라주지 않습니다. 삶이 엉망입니다. 그러면 무슨 자격으로 성도들에게 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가, 사도가, 말씀을 전하는 자가, 교회 중직들이, 장로님들이, 항존직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 않고 성도들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먼저 살지 않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너희가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1절에서 10절까지 "우리가"라고 말한 것은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11절부터 "너희는"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제 너희에게 이것을 거룩하게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왜 요구합니까? 정치인들이 왜 욕을 먹습니까? 그들의 삶은 뒤집어보면 엉망인데 국민들에게만 의무를 부과하니까 사람들은 맥 빠지고 힘 빠지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중직으로서의 자격이 있으려면, 강단에서 말씀 전하는 목사로서의 자격이 있으려면 행하고 그리고 요구해야 합니다.

4-1.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살아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 이것이 어떤 뜻입니까? 반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죄에 대하여, 죄는 인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우리를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성장합니다. 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오늘도 수없이 많이 듣고 계셨을 텐데, 죄가 나를 부릅니다. 나에게 죄 짓자고 자꾸만 유혹합니다. 마음속에서부터 혹은 가까운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문화를 통해서 공동체의 악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통해서 죄가 나를 불러댑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댈 때 반응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죽었으니까 들은 척도 하지 마십시오. 반응하지 마십시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그 사람 욕을 아무리 해보십시오. 일어나서 화를 냅니까? 반응하지 않습니다. 발로 차보십시오. 화를 냅니까? 반응하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부를 때 그렇게 대응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는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누어 주라, 그러면 나누어 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죽은 척합니다. 못 들은 척합니다.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내 마음을 두드리는데도 우리는 모르는 척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죄에 대해서는 반응합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성화의 삶을 거꾸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말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그 말씀 붙들고 살아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4-2. 몸을 의의 무기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인데, 바울이 또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 또 깊은 진리,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몸의 사욕, 동그라미 치십시오.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지체, 동그라미 치십시오. 몸이나 지체나 같은 말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지체, 동그라미 치십시오.

공통점이 있습니다. 12절, 13절, 19절에 몸, 지체가 반복됩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내 몸이라는 뜻입니다. 몸이 죄의 종 노릇 하는 도구가 됩니다. 몸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몸은 반대의 역할도 합니다. 13절에 보니까 그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13절 다시 보십시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또 끝에 보면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지체가 불의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지체가 의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로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습니다. 몸은 무엇이 움직입니까?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내 마음이 몸을 움직이고, 몸은 죄의 무기가 되기도 하고 의의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룻밤 딱 누워서 하루를 정리하실 때, 나는 오늘 내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렸는가, 내 손과 내 발과 내 눈과 내 온 몸뚱아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내 입술이 형제를 저주하는 불의한 입술이 되었는가, 내 눈이 형제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는 악의 눈으로 쓰임 받았는가, 우리 몸 전체를 한번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몸을 조심해야 합니다. 숨이 있는 사람은 몸가짐을 아주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이 불의의 병기가 될 수 있고 의의 병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의의 병기가 될 것이고, 죄악으로 충만하면 불의의 병기가 될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마음속을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8장에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4-3. 사망과 영생

죄의 종으로 사는 자의 특징을 말해보십시오. 불행하게도 이 몸을 죄가 주장하게 해서 불의의 병기로 계속해서 들이는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된다고 말했습니까? 2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라"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이 몸이 계속해서 불의의 병기로 죄의 종 노릇 하게 되면 결국은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은 육체의 사망이 아닙니다. 아주 무서운 사망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의 죽음입니다. 영이 죽는 것입니다. 이 몸이 계속해서 죄의 종 노릇 하는 인생을 살아서 죄와 불의의 병기의 노릇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이 몸이 담고 있는 내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영혼이 둘째 사망에 해를 당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한데,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는 아까 어떤 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고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고, 말씀이 지키고, 말씀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 그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얼마나 다행입니까? 말씀대로 적극적으로 말씀을 따르고 살아가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일일이 말씀 따라 적극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말씀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죄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생명이고 말씀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어둠이기 때문에 어둠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아까 죄의 종 노릇 한 사람의 마지막은 둘째 사망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의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원하십니까? 천국에서 영원토록 영화의 삶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아 숨 쉬기 바랍니다.

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이 몸을 죄의 병기로, 불의의 병기로 들이는지 의의 병기로 들이는지에 따라서 사망인지 영생인지 결정됩니다. 신앙에는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흑 아니면 백입니다. 죽음 아니면 생명, 사망 아니면 영생입니다.

5.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같이 죽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모습 그대로 피투성이가 되어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만큼 투쟁하고 그만큼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에 대하여는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고 살면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이제 로마서 16장까지 가운데 6장까지를 마쳤습니다. 1장에서 6장까지를 한번 쭉 정리해 보시고, 큰 얼개 그리고 큰 흐름을 가지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칭의의 삶을 허락해 주시고, 이제는 진실로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화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화의 삶이 고단하고 피곤하고 지칩니다. 특별히 죄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힘겹고 어렵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한 방법을 오늘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도 함께 죽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모습으로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 투쟁하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했는지,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애쓰고 힘썼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나의 옛 자아를 못 박을 때 그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자리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사오니,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말씀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고단한 성화의 삶을 말씀으로 승리하며 이겨내도록 도우시고, 결국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