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자유와 죄 / 전체녹취

로마서 특강-7: 자유와 죄 (7장)

로마서 7장 24절 말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수요일 저녁 사경회로 로마서 특강을 함께 나누고 있는데, 오늘이 벌써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로마서 6장 말씀을 보았는데,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6장은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죄 아래 있어서 그 죄로 인해 고통받고 힘겨워하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씀드렸고, 오늘 7장 말씀은 그런 죄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의 삶을 살면서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만 됩니까? 해보셨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으로 되던가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8장에서 성령이 필요합니다. 6장은 죄 아래 사는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오늘 읽은 7장은 갈등 가운데 있는 인간을 다루며, 8장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것을 돌파하는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는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오늘 이 7장 말씀을 함께 보면서 갈등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이 갈등 안에서 누구를 붙잡아야 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함께 배우려고 합니다.

1. 법 아는 자들의 삶

첫 번째 문제입니다. 법 아는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괴로움을 겪습니까?

법 아는 자들은 법조인이나 법률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 아는 자들은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이 법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는 자들은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율법을 아는 자들은 칭의를 받고 성화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법 아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사람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칭의를 받은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는 그때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칭의만 받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출애굽을 해서 가는 과정에서 율법을 받습니다. 어디에서 받았습니까? 시내산에서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고 레위기의 율법도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칭의가 먼저 있고 그다음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1-1. 율법을 알면 불편하다

율법을 받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법이 없을 때, 율법이 없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 율법을 알고 나니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걸립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옛날에는 그런 법 없이 살 때는 자기 성질대로 마구 행동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면 가져와 버리고, 율법이 없으니까 마음에 거리낌도 없었지요. 그냥 자기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우상이 있으면 저기에 절한다 하면 절하고, 앞으로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면 거기 가서 넙죽 한 번 엎드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살 때는 율법 없이 살았으니까 마음대로 살았는데, 칭의를 받고 율법을 받으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법 아는 자들의 삶은 불편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그랬잖아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삶은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성질대로,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소리 지르고, 그냥 원하는 대로 마구 살았습니다. 자기 기질대로, 생겨 먹은 대로. 그런데 율법을 알고 나니까,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나니까 이것도 하면 안 된다, 저것도 하면 안 된다. 그래도 그냥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자꾸 나한테 불편한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율법을 안 지켜서 그런가, 성경대로 살지 않아서 그런가, 그런 마음의 자책과 한심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불편합니다. 율법을 알고 나니까 법 아는 자들은 불편합니다.

1-2. 갈등의 의미

두 번째 특징은 법 아는 자들은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행동은 안 따라주고, 머리로는 아는데 삶은 안 받쳐주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모를 때는 그냥 몰라서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머리가 굵어졌는데 행동은 그렇게 안 따라가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의 실존과 존재를 여기서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편하지요. 그리고 갈등하지요. 그런데 불편한 것과 갈등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 나쁜 것이 아니냐 하면,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 받았는지 성령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여깁니다. 목사님, 혹시 제가 성령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저한테 와서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진짜 성령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방언을 하거나 병 고침의 은사가 있거나 예언의 은사가 있거나 이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는 갈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내적 갈등이 있느냐. 말씀이 마음속에 주어질 때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은 안 따라줘서 지키고 싶으나 지키지 못한 갈등이 마음속에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으면 마음속에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안다 하는 것은 무조건 거추장스럽고 무조건 불편하고 무조건 갈등이 있어서 힘들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나에게 이런 은총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갈등이 의미 있는 갈등이 되기 위해서는 갈등하다가 최후에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이겨야지요, 갈등을. 그런데 자기 힘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그래서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음 주에 우리가 8장을 공부할 텐데, 도대체 성령은 어떤 영이기에 갈등하는 우리를 건져주시는가, 그것을 우리가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2. 율법의 한계와 자유

두 번째 문제입니다. 율법의 한계는 무엇이며,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까?

재미있는 비유를 했습니다. 율법의 한계, 그리고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2절과 3절을 읽겠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하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남자분들 굉장히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들리시지요. 남자가 죽어야, 남편이 죽어야 여인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무슨 부인을, 내 아내를 그렇게 얽매고 괴롭히고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바울은 이런 말을 썼느냐. 여기서 이 남편은 그냥 우리가 남편, 아내 할 때 그런 부부 관계가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남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율법입니다. 아내는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그러면 율법이 우리를 이렇게 갈등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율법이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한 것 아닙니까? 남편이 죽어 없어지면 아내가 그 남편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 나를 괴롭게 하는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율법이 죽어 없어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이 없어질 수 있나요,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결코 없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을 주셨고 모세오경도 주셨고 성경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을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율법이 없어집니까? 율법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서 자유롭게 되는 방법은 또 다른 방법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거기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율법이 죽지 못하니까 내가 죽으면 됩니다. 내가 죽어 없어지면 율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해되십니까? 바울은 이 이야기를 여기서 숨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했습니다. 그다음 생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니 율법이 없어지지는 않으니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된다. 이 말을 여기에 숨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됩니다.

2-1. 죽음의 방법

우리가 죽는 방법이 어떤 방법입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난 6장에서도 배웠는데,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4절에서 우리가 죽는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좀 복잡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만 세 구절을 떼어 놓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빠진 것이 있지요. 성경에 있는 것을 제가 빠뜨린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앞에 "너희도"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을 때는 6장 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지난주에 공부했던 6장 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같은 모양, 기억나십니까? 지난주에 제가 핏대 올려 가면서 설명했던 이 구절인데,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죽은 자가 되고 연합한 자가 되고 그랬잖아요.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가 같은 모양으로 죽어버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벌거벗겨서 돌아가셨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써서 피가 흘러 눈을 적시고 앞을 못 볼 정도로 피가 많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짐승의 뼈가 달려 있는 채찍에 맞아서 예수님의 척추가 으스러지고 예수님의 살점이 다 뜯겨 나갔습니다. 온몸에 피가 다 흘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그 몸무게에 못 이겨서 살점이 찢겨져 나갑니다. 옆구리에는 창이 들어왔습니다. 피는 다 흘렀고 물은 다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율법과 함께 죽는다는 뜻이 바로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그 정도로 애쓰고 그 정도로 투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그 정도로 노력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몸과 우리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기까지 애를 써 보았느냐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율법에 대하여 죽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그렇게 죽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내 자아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나를 찌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것처럼 내가 죽어버리면 말씀에 더 이상 찔릴 이유도 없고 갈등할 이유도 없고 내 육신의 자아와 영의 자아가 싸울 이유도 없습니다.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날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모습을 생각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죽자, 성질도 죽고 내 의지도 죽고 내 자아도 죽고 욕심도 죽고 정욕도 죽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리자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노력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노력으로만은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2-2. 죽음의 열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면, 죽고 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납니까? 그다음 4절에 중요한 구절이 있지요.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죽으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신비롭지요.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열매가 얼마나 많이 맺혔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 주셨기 때문에 거기서 많은 열매가 일어났지요. 그래서 우리도 율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정과 욕심과 자아와 정욕을 죽여 버리면 열매가 나더라, 선한 열매가. 예수 믿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어서 주변 사람들과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좋은 열매,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은 자아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욕심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죽이지 않으면 열매가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 따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10절을 한번 보실까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빛의 열매라 그랬지요. 전에는 어둠이었는데 이제는 빛이라 그랬고, 빛의 열매가 이러이러한 것이다 열거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금방 맺힙니까, 금방 달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빛의 열매라는 것은 빛으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내야 빛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자식이다가 나중에는 빛의 자녀가 되어서 그 빛의 자녀로 오랫동안 살아내고, 빛 가운데 거하면서 자아를 죽이고 영을 하나님 말씀에 복종시키며 살다 보면 열매가 맺힙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가면 금방 열매가 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한두 해, 하루 이틀 한다고 결코 열매가 맺히는 법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3. 새로운 삶의 방식

네 번째 문제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율법이 죽지 못하니까 내가 죽는다 그랬지요. 내가 죽어야 율법에서 벗어난다 그랬지요. 그런데 내가 죽는 방식은 십자가에 달려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힘쓰다가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된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자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방식이 6절에 나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두 가지를 규명해야 됩니다. 이제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살겠지요. 이 영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의미하지요.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이 우리의 새로운 삶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도 어떤 방식이 펼쳐질지 모릅니다. 성령은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니까요.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바울 같은 사람이 그렇게 위대한 역사적인 대사도가 될 줄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겁쟁이 베드로가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설교할 줄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니까,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쓰임 받을지 사용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혹은 배운 것이나 가진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지레 겁먹거나 포기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어떻게 한다 그랬습니까? 섬긴다 그랬습니다. 섬기는 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바울 시대에 섬기는 것은 종들이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율법에서 새로워지고 율법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는데, 영의 새로운 것으로 다시 종이 된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죄의 종입니까, 성령의 종입니까? 자발적으로 우리가 성령에 매인 바 되어서 하나님의 영으로 일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억지로, 율법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 없이. 그런데 이제 율법에 대해서 죽고 자아가 죽고 나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니까 이제는 내가 자발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기도하고 억지로 예배드리고 억지로 말씀 읽고 억지로 봉사하고 억지로 좋은 척하고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니까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그런 경험이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오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가 천국이지요. 그렇게 되면.

4. 율법의 본질과 죄의 전략

그다음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바울이 이렇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 자체는 어떤 것일까요? 율법은 전적으로 악한 것일까요, 아니면 선한 것일까요, 아니면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은 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율법 자체는 10절을 보십시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원래는 계명이 어떤 계명이라고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 계명은, 율법은 좋은 것이지요. 그러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까. 12절을 볼까요?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좋은 말은 여기 다 써 놓았지요. 그래서 율법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좋은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죄도 아니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었습니다. 율법은 원래 좋은 것이었는데, 사탄이 율법을 가지고 사람에게 장난질을 칩니다.

4-1. 죄가 타는 기회

두 번째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8절과 11절에 보면 똑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11절도 읽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죄라는 놈이 율법을 이용해 먹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8절과 11절에 똑같이 나오는 말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이 말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여기 기회라는 말이 의미하는 헬라어가 아포르메(ἀφορμή)라는 발음의 이 기회인데, 이것은 출발점 혹은 작전기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기회는 출발점, 작전기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죄가 율법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죄가 율법을 작전기지로 삼아 사람을 죄에 빠뜨려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 전에 우리가 보았잖아요.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좋은 것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죄에 의해서 이렇게 뒤바뀌어지고 농락될 수 있을까요?

4-2. 안식일 논쟁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시절을 보면,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장난질을 쳤는지 모릅니다. 특히 안식일 계명을 가지고. 마가복음 3장 1절과 2절을 한번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뒤틀려서 말려서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드러내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손을 헝겊으로 혹은 천으로 둘둘 말아 가지고 가슴 품에 이렇게 숨겨 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들어오니까 사람들은 한 가지를 주목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평소 성향과 예수님이 하신 일로 봐서는 지금이 안식일이건 어떤 날이건 상관없이 그 사람의 한쪽 손 마른 것을 보면 고쳐 줄 것이다.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 랍비들이 정한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당장 고발하려고, 하기만 해 보아라, 이 사람 고쳐 주기만 해 보아라, 그러면 고발하려고 딱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계명이 원래는 십계명에서 왔잖아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 아닙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 계명은 첫째 돌판, 두 번째 돌판 가운데 첫 번째 돌판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에 속해 있는 계명입니다. 안식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사랑해서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신 것이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에 가장 해야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일이니까 하지 말라, 그것을 죄라고 여기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사탄이 작전기지로 삼아서, 여기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죄짓게 하고 결국 그런 죄에 빠지게 해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잖아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눈 뜨고 보고 계십니까? 주님은 절대로 그렇게 보고 계시지 않지요. 마가복음 3장 5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이 노하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왜 노하셨을까요? 어디에 노하셨을까요? 물론 그 당시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노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리고 또 노하신 것이, 주님은 이 유대인들 뒤에 숨어서 율법을 가지고 장난질 치고 있는 사탄의 은밀한 세력들에게 노하신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 죄의 근원에 대해서 주님은 노하신 것입니다.

죄가 율법을 출발점 삼아서, 죄가 율법을 작전기지 삼아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죽음으로 끌고 가고 죄짓게 하는 것에 주님은 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노하시고, 이제는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말라 하시고 손을 내밀라 하시고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율법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신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4-3. 나사로의 부활

복음서에 보면 이런 일이 한두 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무덤 앞에 서 가지고 돌문을 굴려 놓으라 하시니까 굴려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죽음을 다시 생명으로 주님께서 되돌려 놓으신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 앞에서 엎드려서 주님이라고 하고 야단법석이 나야 될 텐데,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그 생명에 역행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참 신비로운 것이, 율법은 좋은 것이라 그랬습니다. 선한 것을 사탄은 이렇게 교묘하게 바꿔 가지고 죄짓는 도구로 만들고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4-4. 가인과 아벨

성경에 보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창세기 4장의 제목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가인과 아벨의 살인 사건이지요.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이잖아요.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인 사건의 발화점이 무엇입니까? 무엇 하다가 그랬습니까? 서로 무엇 먹는 것을 먹고 뺏다가 싸우다가 그랬습니까? 아니면 부모 유산 상속 때문에 그랬습니까? 더 많이 가지려고 그랬습니까?

예배드리다가 그런 것 아닙니까. 예배드리다가. 예배드리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화가 난 것이지요, 가인이.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예배 드리라 그랬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될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영적인 의무입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드리다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니까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예배에서 파생되었다는 것. 사탄이 예배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기회로 삼아서 작전기지로 삼아서 죄짓게 하고 사망으로 가게 하고.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배드리다가 부부싸움 한 적 없는지, 예배 드리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한 것은 없는지, 예배 드리는 것 때문에 사탄이 거기에 틈탄 것은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서로 가족 간의 분란이 일어난 적은 없는지. 정말 좋은 일인데 이 좋은 일 때문에 거기에 죄가 들어오고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파괴되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오고 사람이 떨어져 나간 일이 없는지.

봉사하는 것, 좋은 일이잖아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성도는 당연히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봉사해야지요. 그런데 봉사하다가 꼭 문제가 생기잖아요. 서로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나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안 온다 그러고, 상처받았다 그러고, 시험에 들었다 그러고. 봉사하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까요. 사탄이 봉사를 전진기지로 삼고 기회로 삼고 출발점으로 삼아서 거기에서부터 사람을 죄로, 사망으로, 죽음으로 끌고 가 버린다니까요.

성경 공부하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깨어 기도하라. 바울이 하신 말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예배 드리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니까 다 잘 되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탄이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예배 드리는 자들에게 살인 충동도 준다니까요. 사탄이 봉사를 방해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갈등을 준다니까요. 교회에서 하는 수많은 일들이 정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들인데, 거기를 사탄이 죄악의 전진기지로 삼아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기도부터 해야 됩니다. 전도하다가 싸움 벌어지고요. 교회 건축,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건축하다가 교인들 믿음 다 떨어지고요. 기도해야지요. 깨어서 기도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래서 바울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는 어떤 경로를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정신 차리셔야 됩니다.

4-5. 율법의 기능

세 번째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한다. 죄가 죄 되는 것, 죄로 심히 죄되게 한다. 말장난 같지요?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죄가 죄인지 모르는 사람이 진짜 많습니다. 자기가 죄 짓고도 태연하게 그냥 사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보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죄가 죄 되고 죄가 심히 죄 되는 것은요, 이것은 말씀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특권입니다. 말씀 붙들고 살아야 "죄구나, 내가 오늘도 죄지었구나, 내가 오늘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지 뭐, 이 정도면 나는 할 만큼 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지" 이러면 투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 붙들고 살아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괜찮다고 여깁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그런데 죄가 죄되고 죄가 심히 죄 되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말씀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 이것도 진짜 성도만 이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비추고 성찰하는 자가 느끼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자는 평생 가도 이것을 못 느낍니다. 어떻게 느낍니까? 칭의 받고 성화의 삶을 사는데 말씀을 붙들고 살면서 말씀이 나를 계속해서 찔러 쪼개는 이것을 느끼는 것은 말씀 앞에 사는 자만 느끼는 것입니다.

5. 인간 실존의 갈등

그다음 문제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원초적 실존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바울은 인간의 원초적 실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 15절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강력한 표현을 썼지요, 바울이. 죄 아래 자기가 팔렸다 그랬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 바울의 이 말을 이대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아 바울이 무슨 큰 죄를 지었구나, 죄 아래 팔려 가지고 바울이 이제 큰일 났구나, 이제 바울이 타락해서 이제 죽을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바울이 여기에 말하는 것은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의 욕심 가운데서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느끼는 까닭은 자기 내면을 계속해서 성실하게 성찰하기 때문에 이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찰하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깨닫습니까? 바울 정도만 되면 잘 산다고 느끼지요. 그런데 바울이 자기가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살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1. 죄의 실체

이제 우리가 좀 본격적으로 살펴봐야 될 것이 죄인데요. 죄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17절과 20절인데요. 17절 한번 봅시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가 어디 안에 있다고 그랬습니까? 내 속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거 자가 한자로 살 거(居) 자 아닙니까. 살 거 자. 죄가 내 속에 산다 그랬습니다. 마치 사람처럼. 요한복음 15장 말씀에 보면 "주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로 인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잖아요. 주님도 내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고 죄도 내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누구를 모셔야 될까요? 당연히 주님을 모셔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죄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죄가 아예 집 짓고 살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넓은 집 짓고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영혼 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내쫓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것을 내쫓으려고 투쟁하지 않으니까 죄가 갈수록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인격의 주체가 원하지 않는 짓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죄가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는 능력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아, 나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나는 손찌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내 속에 죄가 거해서 넓은 집을 짓고 내 인격과 다른 인격이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미 심각한 상태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내 속에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나는 내 이름 석 자 가지고 있고 직업도 가지고 있고 하루 세 끼 먹고 사회 나가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사실은 나는 죄의 로봇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노릇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각하지 않습니까?

5-2. 죄를 다스리라

우리가 아까 전에 말했던 창세기 4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창세기 4장의 6절과 7절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잘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이 말이 중요합니다. 죄가 어떻게요? 문에 엎드려 있다 그랬습니다. 마치 무엇 같습니까? 짐승처럼. 거대한 커다란 짐승처럼 죄가 문 앞에서 엎드려서 그 문이 열리기만 어르렁거리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는 우리를 원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중요하지요.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죄가 문 앞에 엎드려져 있고 죄가 나를 원한다. 또 아까 로마서 말씀에서 죄가 우리 마음속에 거한다. 사람 같지 않으세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 죄는 인격입니다. 죄는 마치 사람처럼 자랍니다. 죄가 우리를 원하고 죄가 우리 마음속에 거하고 죄가 우리 문 앞에 엎드려져 있고.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가인한테 하신 말씀이거든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고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이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까, 없다는 뜻입니까? 없으면 이런 말씀 왜 하시겠습니까? 네 속에는 이미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내가 이미 주었다. 그런데 왜 시시각각 판판이 죄에게 지고 살고 있느냐? 너는 네 속에 있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서 죄를 쫓아내라, 죄를 몰아내라, 너의 문 앞에 엎드려서 너를 삼키려고 하고 있는 죄를 이겨내라. 이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5-3. 성령의 도움

어떻게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인데, 타종교도 마음속의 갈등을 이야기하거든요. 불교가 특히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마음속의 번뇌, 갈등, 여러 가지 세상의 욕심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하라 그럽니까? 뭐 여러 가지 고행을 통해서 다 비워내라 그러잖아요. 자기 힘으로. 자기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면벽 참선하고, 벽 보고 3년 동안 앉아 있고, 안 먹고 가부좌 틀고 앉아 있고.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니까 인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너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볼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임해야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5-4. 갈등의 실제

그다음 세 번째 문제입니다. 거듭난 인격이라 하더라도 죄와 갈등하며 투쟁합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우리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칭의 받은 인간은,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잖아요. 그래도 죄짓습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계속 갈등합니다. 마음속에 죄 욕심이 일어나서 계속 갈등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랬고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고 누구나 그랬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등하고 질 것이냐, 이길 것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갈등만 하고 져버리면 갈등했던 세월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이겨야지요. 그 이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다, 이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1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는 것, 소원이지요. 소원. 행함은 무엇입니까? 악을 행하는 것이지요. 소원은 선인데 행동 결과는 무엇입니까? 악이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은 굴뚝 같은데 행동은 항상 엉망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항상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행동은 항상 엉망으로 해 놓았습니다. 이 갈등을 바울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하지요. 혹시 내가 거듭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내가 버림받은 인간은 아닌가. 그때 이단이 우리를 찾아와 가지고 이야기하지요. 언제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거듭나셨습니까? 저 잘 모르는데요. 혹시 당신이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죄를 지으셨습니까? 네, 저는 오늘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뜨끔한 것입니다. 그래서 쪽지 하나 주고 가지요. 누구 씨가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에서 하는 집회에 오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듭난 존재가 항상 갈등 가운데, 마음은 원인데 행동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인간의 비참한 상태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실까요?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속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23절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가운데 갈등하고 있는 바울이지요.

6. 희망의 고백

그래서 바울은 결국은 탄식합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 아닙니까?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갈등하고 갈등하고 또 갈등하고 갈등하다가 바울이 결국은 고백한 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6-1. 곤고함의 의미

여기서 곤고한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보십시오.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라는 단어인데, 이것의 원형을 이렇게 분리해서 표현해 보겠습니다. 틀라오(τλάω)라는 "참다"라는 말과 페이로(πεῖρα)라는 "찌르는 듯한 심문"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찌르는 듯한 심문, 무엇으로 찌르느냐? 쇠꼬챙이로 찌른다는 뜻입니다. 쇠꼬챙이로 제가 찔려 보지 않아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심문을 계속해서 몇 시간 동안 혹은 며칠 동안 받다 보면 사람이 퍼지잖아요. 그냥 곤고해지잖아요.

여기 이 곤고하다는 말이 "내가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땀 흘려 일했더니 몸이 노곤하네, 몸이 피곤하네" 그런 의미의 곤고함, 피곤함이 아닙니다. 쇠꼬챙이로 누군가가 나를 계속해서 찔러대는 것, 여기에서 내가 너무 고통스럽고 피곤해서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고 물이 다 빠져나가서 탈진한 상태, 그것을 곤고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곤고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는 율법을 붙들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율법을 붙들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 본 사람만이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붙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진짜 발버둥 쳐 보셨습니까? 그런 발버둥을 쳐 보지 않고는 이런 고백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러면서 마음속에 심한 갈등을 겪는 것이지요. 쇠꼬챙이로 나를 찌르는 듯한 갈등. 마음은 원인데 행동은 항상 함부로 가는 그런 갈등을 바울이 표현한 것입니다.

6-2. 건져내실 분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은 희망적으로 끝냅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건져내랴. 헬라어로 리세타이(ῥύσεται). 이것은 미래형입니다. "누가 나를 건져낼까, 건져낼 사람이 없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미래형으로 희망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건져낼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군가 나를 건져낼 것이다." 이렇게 던진 것입니다. 누가 건져낼까요? 누가? 성령께서 건지시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성질이 급해 가지고 바로 그 밑에 25절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전히 갈등하고 있지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지요.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건져낼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시면 나를 건져낼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로마서 7장은 계속해서 인간 실존의 갈등 상황을 계속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25절이 희망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내실 것이다.

6-3. 다윗의 고백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만 있는 사상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만 있지 않고 시편 기자, 우리는 시편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을 다윗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다윗도 고백했습니다. 시편 13편 1절과 2절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몇 번 나옵니까? 네 번. 짧은 이 구절에 다윗이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다윗이 계속 그것을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수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낙심하는 상황을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바뀌어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같은 시편에서 5절, 6절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주의 사랑을 의지한다 그랬지요. 어느 때까지이냐 계속해서 그 시간을 가지고 주님께 탄식하고 하나님께 여쭈었는데 바뀌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를 끝낼 즈음 되니까 주의 사랑을 의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6-4. 허무주의와 신앙

세상에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실존의 갈등을 이야기한 사람은 진짜 많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내면과 자기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이 인간의 위선적인 상황을, 그것으로 끝내면 허무주의로 가 버립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세상이 왜 나는 내 뜻대로 살지 못할까, 왜 나는 내 생각대로 살지 못할까,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일까, 나는 평생을 살아도 왜 이렇게 나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갈등하면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허무주의가 아닌 이유는 바울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이고 그가 주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위로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로마서 7장은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현 실존을 쭉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바울이 1절에서 그랬지요, 법을 아는 사람이라 그랬지요. 법 아는 사람. 법 아는 사람은 갈등도 하고 그리고 불편합니다.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롭습니다. 율법이 나를 찌릅니다. 율법을 죽일 수는 없고 내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죽어야 됩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바울은 계속 갈등했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성령을 요청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희망을 가짐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것, 죄와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았습니다. 죄가 율법을 자신의 출발지로, 작전기지로 삼으면 사람을 죽음으로,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있다 그랬지요. 이것은 율법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영적인 행위가 사탄에게 사로잡히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해야 된다고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오늘 7장을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로마서 7장을 다시 정독하시고 한 번 더 살피시고 복습하시기 바랍니다. 8장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8장은 로마서 전체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여러 번 읽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인간의 실존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은 죄의 법을 쫓아 살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자신의 인간 실존의 연약함을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고백하고, 결국은 나를 건지시는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시리가 예수님 한 분뿐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하여 믿음 생활, 신앙생활, 앞으로 믿음의 모든 경주를 달려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죄는 율법을 전진기지로 삼아서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죄는 믿음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전진기지로 삼아서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깨어서 죄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분별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죄가 어디쯤 가 있는지 우리 눈으로 보게 하여 주시고, 영적으로 깨닫는 믿음의 백성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