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 8강: 자유와 성령-1 (8장)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오늘은 로마서 8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로마서 8장은 내용이 상당히 방대하여 두 번에 나누어서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1절에서 17절까지 말씀을 살피고, 다음 시간에 18절부터 끝까지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을 오른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계속해서 오르막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은 거의 로마서의 정상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로마서는 성령에 대한 부분을 정점으로 삼아, 성령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 특유의 방식으로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며, 알 듯하면서도 잘 모를 듯하고, 계속해서 비유로 또다시 돌려 이야기하는 내용이 로마서 8장에 담겨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1-1. 예수 안에 거함의 의미
첫 번째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많이 익숙한 구절입니다. 저도 옛날에 교회학교 다닐 때 이 구절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때는 성경학교 가서 수련회 가서 이 구절을 안 외우면 밥을 안 준다고 해서 열심히 외웠는데, 사실 이 구절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그냥 외웠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무슨 말이 반복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같은 말이 반복된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말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면 "똑같은 말을 또 이야기하는구나, 한번 이야기했으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죽하시면 똑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하시겠습니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 안에 있는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 안에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을 갖고 계십니까?"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있다"라는 말은 "존재한다"라는 뜻이고, 조금 다른 말로 바꾸면 "그 안에 거주한다, 산다"라는 뜻입니다. "산다, 거주한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요한복음 15장 7절이 생각나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 "거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라는 뜻은 "거한다"는 것이요, "거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산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면 이 말을 다시 바꾸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1-2. 갈등의 존재
우리가 여기서 이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있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실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제가 이름 불러가면서 질문해 본다면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눈빛을 피하면서 어떤 분은 "살고 있습니다. 살걸요. 살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가정생활과 비추어 보시면 됩니다. 가정에 사는 것이 100% 행복하십니까? 집에서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수십 년 동안 그 가정에서 지지고 볶고 밥 먹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상처 주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데, 100% 완벽하게 행복하십니까? 저는 집에 가면 매일 혼납니다. 집에 가면 누룽지를 좋아하는데 누룽지 먹고 부스러기 흘린다고 혼나고, 땅콩 좋아하는데 땅콩 껍질 흘린다고 혼나고, 양말 뒤집어서 아무 데나 던져 놓는다고 혼나고, 매일같이 혼납니다. 혼나는 것이 일상입니다. 아침에 눈 떠서 집에 들어가서 계속해서 혼납니다.
그렇다고 집에 안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저녁에 집에 들어가야지요. 그리고 집에 가면 보기 좋은 자식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속상하게 하는 아이도 있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을 마치 무균실에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신앙생활을 우리는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너무 완벽하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천국 안에 사는 것 같지요? 천국에 가면 걱정도 없고 염려도 없고 고난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인생은 우리가 가정생활하는 것처럼 때로는 곤란한 일도, 때로는 물질적인 고통도, 때로는 사람 관계 때문에 힘든 것도 있습니다. 그런 데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집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 자식이 이쁘고, 그래도 내 식구가 좋고, 저녁이 되면 집에 왜 갑니까? 좋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가서 밥 먹고 "아, 그래도 내 집이 최고구나. 속 썩여도 내 자식이고, 잔소리해도 우리 가족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 갈등 없는 가정이 있습니까?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 안에서는 항상 충돌이 있고 갈등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갈등을 겪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갈등 없을 것 같지요? 갈등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항상 내 마음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하나, 정신 차리고 보면 죄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지 않는 것입니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사탄에게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 한번 지었다고 오늘 우리가 사탄에게 넘어가서 "내가 한번 잘못했다고 나는 오늘 예수 밖에 있었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내가 마음은 예수를 닮아서 행하고 싶으나 내 육신이 죄짓기도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생활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그런 일들을 겪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1-3. 정죄와 생명의 법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야, 너 예수 안에 있다면서 근데 왜 죄 지어? 너 예수 안에 있다면서 너 가정이 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 예수 안에 있다면서 왜 돈 그렇게 못 벌어? 예수 안에 있으면 부자 되어야 되고, 예수 안에 있으면 가정이 행복해야 되고, 무결점이어야 되고, 아무런 문제 없어야 되고, 너 아프지도 않아야 되고." 자꾸 그런 정죄를 받으면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은가? 내가 예수 잘못 믿었나? 뭐 좀 제대로 열심히 해볼까? 누가 은혜 집회 한다 그러면 거기 가서 머리 들이밀고 안수 한번 받아볼까? 금식이라도 한번 해볼까? 성경을 열독하면 좀 삶이 달라질까?" 사람들이 그런 갈등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꾸 이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다툼도 있고 갈등도 있고 싸움도 있고 서로 간에 문제도 있고 지지고 볶고 그러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우리를 계속 정죄하나 우리는 거기에 정죄받으면 안 됩니다. 사탄이 그렇게 우리를 정죄하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갈등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지." 우리는 애초부터 예수 안에 있어서 완벽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2절을 또 보시면 예수 안에 있으면 없는 것은 정죄함입니다. 정죄함은 없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법"을 "밥"으로 한번 바꾸어 읽어 보았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밥이 있다." 왜 "밥"으로 바꾸어 읽었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는 밥을 우리는 계속 먹어야 내 영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 10장 10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명도 근근이 이어가는 생명, 거의 숨만 붙어 있는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성령의 밥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곧 생명이고 그 말씀이 곧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밥을 계속 먹으려면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으면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처음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열 가지 중에 한 아홉 가지는 맨날 잘못해서 책망당하고 혼나고 하다가 한 가지 겨우 자라다가, 생명의 성령의 법인 생명의 양식이 되는 밥을 계속 받아먹고 계속해서 주어지는 말씀을 먹고 있으면, 그다음에는 열 가지 중에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자꾸만 거기서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4. 해방의 의미
그렇게 생명의 성령의 법 되는 말씀인 밥을 계속 먹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가 해방된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먹고 성장하면 해방이 됩니다. "해방된다"는 말을 여기 헬라어로 "엘류데로센(ἠλευθέρωσε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진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해방하다" 엘류데로센, 이 말은 신약성경에 딱 일곱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 이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자유롭게 하다"가 "해방되게 하다" 엘류데로센입니다. 이 단어가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해방하다"는 말,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과 세상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무엇으로 해방시켜 줍니까? 돈이 많으면 물질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저 북한 땅에 있는 북녘 동포에게는 자유가 있으면 정치적 억압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돈 벌어서 물질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정치적 억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전복이 일어나고 뒤집어지면 정치적인 해방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줄 수 있는 생명의 법은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까?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절대 해줄 수 없습니다. 엘류데로센,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정치적으로 사람을 해방시킨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사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적으로 오염되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물질 문명이 들어오고 세속화가 들어와서 "돈이라면 뭐든지 다 해결된다, 사람을 돈으로 해방시켜 준다" 하는 것은 예수의 사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해방시켜 주셨다"는 이 단어는 예수의 사역에만 딱 일곱 번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1-5. 양의 문 되신 예수님
기왕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을 보았으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요한복음 10장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10장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무엇이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는 양의 문이다"입니다.
그리고 10장 9절에 보면 이 양의 문을 이렇게 또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된다는 의미는 옛날 예수님 시절의 양치기에 의하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된다는 말은 목자들이 양을 데리고 나가서 밤에 야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목자들이 양을 데리고 밤에 들어와도 문 앞을 지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허술하거나 울타리가 별로 튼튼하지 않을 때, 그때 목자는 양 우리 앞에서 같이 누워 잠을 잡니다. 같이 야영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늑대가 와서 밤에 양을 물어 가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는 의미는 우리를 목자 되셔서 사탄의 무리에게서 지켜주신다는 첫 번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 생명의 성령의 법, 아까 제가 바꾸어 말씀드린 생명의 성령의 밥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양의 문이 되신다는 의미는 아침이 되어서 양을 방목할 때 양들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열고 "다 나가라" 하고 한꺼번에 확 풀어주지 않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내보냅니다. 그때 목자가 울타리를 열고 목자의 지팡이를 딱 걸어두면 그 아래로 양들이 훈련되었기 때문에 한 마리 한 마리 지나갑니다. 그러면 목자는 지나가는 양의 모습을 보고 이름을 불러줍니다. 목자가 이미 이름을 지어놓았습니다.
좀 몸이 있는 양은 뚱땡이라고 부를 것이고, 날씬한 양은 날씬이라고 부를 것이고, 점이 있는 양은 점박이라고 부를 것이고, 특징을 가지고 양의 이름을 불러서 다 내보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밤새도록 양 우리에 있다가 자기들끼리 차고 집어 뜯고 그래서 다친 양도 있을 테고, 밤새도록 양 우리에서 상태가 좀 좋지 않은 양도 있을 테고, 그런 양을 목자가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밖에서 풀 뜯어 먹고 놀다가 다시 우리로 들일 때도 목자가 지팡이를 걸어놓으면 한 마리 한 마리 들어옵니다. 역시 양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양은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고 나가고 들어오면서 꼴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시기 때문에 양은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나가고 들어오면서 생명을 부지하고 먹고 마시고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걸어두신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율법을 상징하고 말씀을 상징합니다. 지팡이가 이쪽으로 가라 하면 양들은 이리로 가야 할 것입니다. 지팡이가 멈추라 하면 양들은 멈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생명을 얻으려면 목자의 지팡이가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가야 되고, 지팡이가 걸려 있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해야 합니다.
그 말을 요한복음 말씀과 로마서가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율법의 요구를 이루심
2-1. 하나님이 하신 일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무슨 말인지 알고 읽으셨습니까? 읽으면서 이것이 들어오십니까? 잘 안 들어오면 다시 보셔야 합니다. 보시면서 곱씹어 보십시오.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나를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육신을 입고 있어서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이 율법을 100% 다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이 율법이, 계명이 정한 바를 다 순종하고 다 그대로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로마서 2장, 3장, 4장에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통하여 하십니까?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보내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은 못하는 것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면서 "네가 해라. 저 인간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원래부터 날 때부터 원죄 때문에, 죄성 때문에 못 하니까 네가 해라"하셨습니다. 절대로 우리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로마서 공부하기 전까지 로마서 주제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율법은 아무 상관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 로마서를 우리가 그렇게 이해했다면 오해하신 것입니다.
로마서는 율법이 율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셨고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율법을 이루신 것입니다.
나는 못하는데 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누구의 죄로 말미암아입니까? 무엇이 생략되었습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입니다. 좀 더 현실감 있게 읽으려면 자기 이름을 넣으십시오. "나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데 그 육신에 하나님께서 내 죄를 뒤집어 씌우신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 죄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가 아들의 육신에 다 뒤집어 씌워진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으면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사망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고 동시에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기도 하기 때문에 아들의 육신에 우리 육신의 죄를 다 뒤집어 씌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2-2. 성령을 따라 행함
4절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 은혜를 알고도 육신을 따라 살면 우리는 인간입니까? 인간만도 못한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무엇을 따라 행해야 합니까?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영"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성령과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조금 이따가 그 이유를 설명할 텐데, 이제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는 율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육신으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었는데,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율법을 준수하고 말씀을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영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의 구조가 참 재미있는 것이, 처음에 인간의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죄가 많은 인간의 상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무조건적으로 부어지고, 부어진 인간이 칭의받은 인간입니다. 칭의받은 인간이 그다음 단계가 성화입니다. 성화의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도움의 역할을 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제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도무지 할 수 없었던 일을, 성령을 받고 나면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이, 성령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시고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왕성하게 역사하실 때는 지나가다가 불쌍한 사람,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해서 뭔가를 해줘야 될 것 같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려야 될 것 같고, 내가 뭔가를 베풀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전까지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전혀 내가 도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 식구, 내 가족이 아닌데 거기에 왜 마음이 쓰입니까?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나면 저 아프리카에 물 못 먹어서 고통받는 아이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그들 때문에 가슴이 아파 오는 것입니다. 나와 한 번도 얼굴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주머니를 털어서 헌금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이 놀라운 역사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그래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성령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잘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누가 보낸다는 것입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누구를 보내십니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는 조금 이따가 성령의 사역 이야기할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3. 율법을 이루러 오심
율법이 참 중요합니다. 얼마만큼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근저에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복음서를 읽다 보면 "율법을 이루려 하심이라,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하는 말씀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여럿 고치시고 마태복음 기자가 이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구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다 보다 보면 "이런 말씀을 친히 이루려 하심이었더라"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 새끼 타고 입성하실 때도 그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도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고 율법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가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하는 말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곧 성령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따로 성령 받는 것 따로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 잘 믿으면 당연히 성령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 받으러 어디 기도원 가자, 성령 받으러 산에 가자" 이것은 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성령은 자연히 따라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3-1. 생각의 의미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의 차이를 말해 보십시오. 5절에서 8절까지를 보면 "생각"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 "생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생각이 조금 했다고 무슨 사망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면 도대체 이 생각도 무서워서 제대로 못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이냐 하면, 헬라어로 "프로네오(φρονέω)"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그냥 스치듯이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몰두하다, 생각을 거기에 집중하다, 몹시 마음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NIV 영어 성경에 보면 "have their minds set 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거기에 놓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홈쇼핑에서 가을이고 겨울이 되는데 코트 광고하는 것을 봤습니다. 하루 종일 거기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그 위에 있어서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도 않고 하나도 생각나지도 않고 온종일 그 생각만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 프로네오,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젊은 처녀 총각이 아주 멋진 남자, 아주 예쁜 아가씨를 봤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서 전화번호라도 받아봐야 될 것 같고, 만나서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여기 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5절에서 8절까지 말하는 생각은 두 가지 생각입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 하나는 영의 생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했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했고, 영의 생각은 생명이라 했습니다.
영의 생각은 무엇이고 육신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육신의 생각일까요? 자기 주도적인 생각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생각대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말로 하면 기도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각도 기도지 뭐." 생각도 기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아닐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다 보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 상상의 나라를 마구 펼칩니다.
그런데 기도는 어떻습니까? 주님이라고 부르고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부르짖고 간구합니다.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도 주님께 토로하고 눈물도 납니다. 그러면서 어찌할 수 없는 갈등 가운데 나를 이해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나를 고쳐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기도와 생각은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3-2. 다윗의 교훈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아주 위대하신 왕, 아주 유명하신 분 다윗 이야기를 한번 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27장 이야기를 한번 볼 텐데, 제가 내용을 한번 설명드리고 한 구절 한 구절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7장 이전까지는 다윗이 광야 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났지 않습니까? 광야를 열심히 전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광야에서 결혼을 합니다. 광야에서 가정을 꾸립니다. 나발이 죽고 나발의 아내 되었던 여인이 다윗과 결혼을 합니다. 가정이 꾸려졌습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아둘람 굴에 있었던 군사들, 처음에 400명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꾸 자꾸 늘어나서 600명이 되었습니다. 억울한 자, 원통한 자, 마음이 상한 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광야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까 사막에서 광야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늘어납니다. 이제는 기동력이 떨어집니다.
어떤 걱정이 생길까요? 우리끼리 있다가 사울에게 습격을 받으면 내 목숨, 나 하나 죽는 것은 걱정이 아닙니다. 처자식이 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400명이었다가 600명이 되고 그들이 식솔들을 다 거느리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면 기도해야 되는데 우리 다윗 왕께서는, 왕 되기 전이지요, 이분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무엘상 27장 1절입니다.
"다윗이 그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생각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가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하다가 결론이 어디로 갔습니까? 블레셋 사람의 영토로 망명하겠다고 간 것입니다. 옛날 망명 초기에 다윗이 한 번 블레셋 왕에게 가서 미친 척 해서 겨우 한 번 탈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이제 망명 후반에 가서 다시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니까 우리 위대한 왕 다윗께서도 이런 실수와 이런 잘못을 하는데, 하물며 우리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생각하면 반드시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공식 같습니다.
생각해서 긍정적인 생각이 막 샘솟고 기쁨이 샘솟고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것은 어린아이들 때밖에 없습니다. 철없는 철부지 어린아이들 그런 아이들 말입니다. 그런데 철 들고 걱정거리가 많고 식솔들이 있고 먹고 살 걱정이 있으면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정말 비신앙적인 결론으로 치닫게 됩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결론 내립니까? "망명해야 되겠다" 결론하고 행동합니다.
2절입니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가버렸습니다. 생각하고 부정적인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실까요? 원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블레셋 왕에게 다윗이 망명하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생각이 이렇게 육신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가버렸습니다.
3-3. 사탄의 확증
그런데 사탄은 이때 "생각이 옳았어"라고 우리에게 맞장구를 한번 쳐줍니다. 7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몇 개월입니까? 16개월입니다. 16개월 동안이나 이제는 사울의 추격에서 안전했습니다.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들, 600명의 식구들이 다 안전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때 내가 그렇게 생각하길 잘했지. 그때 내가 그렇게 결론내고 여기로 망명하기를 잘했지." 사탄이 거기에서 힘을 한번 실어줍니다.
우리가 생각해서 잘못 갔을 때 바로 하나님께서 딱 치면 제일 좋은데, 그것이 아니고 사탄이 그 생각에 계속 젖어 있게 만들어 줍니다. 1년 6개월을 가드 왕 아기스의 경내에서 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 봅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성을 주었습니다. 시글락이라는 성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600명과 자녀들까지 하면 거의 몇 천 명입니다. 그 사람들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거기에서 밥값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밥값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또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밥값을 하기 위해서 다윗이 멀리 가서 사람들을 약탈해 가지고 옵니다. 누구에게 가느냐 하면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을 약탈해서 옵니다. 여러 족속들, 소수민족들, 소수 부족들을 칩니다. 다윗이 얼마나 전쟁에 능한 사람입니까? 그들에게서 먹을 것 가지고 오고 자기도 먹고 그리고 아기스에게 상납합니다.
10절입니다.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매일같이 갖다 바치니까 아기스가 이렇게 묻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게비니이다 하였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 네겝", 거짓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적어도 자기 동족 유다인들의 터전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다시 발각될까 봐 위험하고, 또 한 가지는 적어도 자기 동족인데 어떻게 그들의 것을 약탈해 옵니까? 다윗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가드 왕 아기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안심시키고 "나는 당신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우리를 안전하게 거하게 해주니까 나는 동족의 물건을 빼앗아 오고 동족의 터전을 빼앗아 올 만큼 나는 이제 당신 사람입니다. 저는 다시는 유다인으로 유다 땅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확증시켜 준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 맞습니까? 이 사람이 생각이 여기까지 갑니다.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멀리 가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니까 부정적으로 가고, 그 부정적인 것은 망명하게 하고, 망명하고 나서 사탄이 확신을 주니까 1년 6개월이 지난 이후에 그다음에는 밥값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밥값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아기스가 확실히 믿겠지요. "내 사람이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 아기스가 어떻게 됩니까? 블레셋은 심심하면 유다와 싸웁니다. 이스라엘과 싸웁니다. 블레셋은 다섯 부족 연합체입니다. 여기 아기스도 다섯 부족 중에 한 방백의 대장입니다. 나중에 블레셋 전체가 다섯 방백이 다 모여서 이스라엘과 싸울 때 그때 아기스가 어떤 생각을 할까요?
27장 12절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성경이 재미있지요? 아기스가 어떻겠습니까? "생각하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생각합니다. 안 믿는 사람도 아기스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이놈이 유다 땅을 침략했으니까 유다인들의 미움을 받겠구나. 영원히 내 부하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의 생각보다 위에 있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것 아닙니까? 기도하지 않고 생각만 하게 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생각만 하고 다투면 누가 이길까요? 세상에 권세 잡은 사람이 우리보다 앞섭니다.
3-4. 위기의 순간
그래서 아기스가 어떻게 하느냐? 28장 1절입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이런 날이 와버립니다. 이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다윗을 자기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쳐라. 네가 진짜 내 사람이라면 여기서 충성됨을 보여라."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윗이 지금까지의 살아온 세월이 거짓이었음을 밝혀야 됩니까? 그리고 거기서 참수당해야 됩니까? 아니면 야반도주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궁금하시면 사무엘상 27장, 28장, 29장, 30장까지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한번 혼납니다. 호되게 혼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 주십니다.
생각은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육체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절대로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갈 바를 알게 하시고 성령께서 이 어려운 시기를 돌파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런 길 저런 길을 안내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없이 기도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자기 생각대로 걱정하고 염려하다가 그냥 멋대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밖에 살 길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갈 길을 알려주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성령의 사역
4-1. 내적 사역
성령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성령의 사역 중에 내적인 사역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내적 사역, 즉 우리 속에 확증하시는 내적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확증하시는 내적 사역입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지요. 성령이 거하시면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으면 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압니까 모릅니까? 내 남편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그리스도의 사람인지 그냥 밖에서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처음에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또 지나면 그리스도의 사람, 내적인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확증하시는 내적 사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나는 압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렸지요. 성령께서 내 속에 계시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갈등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갈등합니까?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돈도 내 마음대로 쓰고 내 돈인데요.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마음대로 쓸 수도 없습니다. 내 돈인데 이 돈을 내가 이렇게 써도 되나,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이 성령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렇게 됩니다. 신기하지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는데, 성령께서 마음속에 내주하시면 스스로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내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권력을 함부로 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계셔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없으면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건 말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습니까? 성령을 어떻게 하면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으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에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완전히 그의 인생을 뒤집어 놓고 바울처럼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그런 식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마음속에 씨앗이 뿌려져서 그 씨앗이 처음에는 뿌려졌는지 뿌려지지 않았는지 그것도 모를 정도로 있다가 서서히 서서히 자라는 식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전자는 바울형으로 임하고 후자는 디모데형으로 임합니다. 우리가 교리학교 할 때 성령 공부할 때 다 했던 내용들입니다.
어떻게 하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임하시면 우리는 마음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압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4-2. 외적 사역
두 번째 성령의 사역은 10절부터 11절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이 말도 성령께서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성령께서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절과 11절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끝에 보면 "살아난다, 살린다"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0절은 영의 생명을 이야기하고요, 11절은 육의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즉 성령의 사역 중에 중요한 사역, 두 번째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아까 첫 번째 사역은 내적 사역이라 했지요.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것,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외적 사역은 생명을 살립니다. 첫째는 영혼을 살리고 두 번째는 육체를 살립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육체까지 살리시느냐? 성령은 곧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라 했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요.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니까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니까 지금도 치유의 능력 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보내시면 아픈 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시대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고 사도행전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고 지금도 성령께서는 죽은 이의 몸도 살리시고 영혼도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원히 살아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구약성경에서는 성령을 "생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7장을 보면 잘 나오는데요, 에스겔 3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생기"가 성령이지요. 성령께서 들어가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기가 들어가면,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생기가 들어가면 살아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해서 너무 신비로운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도 성령 입은 자로 다른 이의 영혼을 살아나게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육체도 소성케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원래 분위기는 전염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영이 기쁘고 마음이 기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기쁜 상태로 있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영향을 받습니다. 우울한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우울해지지 않습니까? 내 영이 기쁘고 찬양하고 영혼이 항상 맑은 상태로 있으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자꾸 흘러갑니다. 그래서 주변을 살릴 수 있습니다. 가정에 부모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자녀들이 거기서 영혼이 아주 맑아집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면 타인의 육체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배고픈 사람 밥 한 끼 사주면 됩니다. 뭐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육체를 살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 어려운 시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교회 주변의 사람들, 이분들에게 물질의 도움을 주면 됩니다. 그분의 육체가 살 것 아닙니까?
성령께서 우리 교인들을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역사하시면 성령은 흘러나가서 병들고 가난한 자들, 실직해서 이제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물질이 흘러나가서 그들의 육체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사역이 방언하고 예언하고 안수하고 이것만이 성령 사역이 아닙니다. 좋은 분위기로 영혼도 살리고, 우리가 물질을 줘서 밥 한 끼 사줘서 배고픈 자 위로하고 실직한 자들에게 물질을 제공해서 그들에게 살게 하는 것, 이것 다 성령 사역입니다. 성령의 외적인 사역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3. 자녀의 정체성
세 번째 14절에서 17절까지 성령 사역을 말하는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의 세 번째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정리하면, 성령은 첫째 내적 사역을 한다고 했습니다. 나만 아는 갈등하는 것 말입니다. 성령은 외적 사역을 한다고 했습니다. 영도 살리고 육체도 살리는 것 말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은 나에게 자녀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종의 정체성이 아니라 아들 정체성, 딸의 정체성, 자녀 정체성입니다.
종과 아들이 무엇이 다릅니까? 종과 자녀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종은 미래가 없습니다. 종의 미래가 어디 있습니까? 주인이 종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 보셨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미래를 요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아들은 미래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받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내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비록 이렇게 산다 하더라도 내일은 다른 인생을 살 것이라는 소망과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 즉 예수 안에 있지 못한 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입니다. 그냥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인생입니다.
종의 영을 받은 자는 그런 자는 소망 없이 하루하루 사는데, 그런데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집니다.
성령의 사역 세 가지, 바울이 이야기하는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이 세 가지 사역 무척 중요합니다. 내적인 사역은 나만 아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 외적인 사역은 드러나는 것이지요, 영혼도 살리고 육체도 살리는 것, 세 번째는 나의 정체성, 나는 종이 아니라 소망과 희망을 품고 있는 자녀 정체성을 성령께서 가지게 합니다.
이 세 가지에 자기를 한번 대입해 보십시오. 우선 내적으로 갈등이 있습니까? 두 번째 나와 함께하면 사람들이 행복해합니까? 나로 인해서 사람들의 영혼이 살아납니까? 동시에 내가 주변에 병든 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를 보면 베풀어서 그들의 육체를 살게 합니까? 세 번째 나는 소망을 가진 자녀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를 내가 가지고 있다면 누가 뭐래도 나는 성령을 함께 마음에 품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다음 16절, 17절부터는 다음 시간에 로마서 8장 성령 그다음을 이어서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마치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으면 갈등도 없고 절대로 죄짓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도 갈등이 있고 성령 안에서 갈등하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 주님이 아니고 율법을 이루기 위해 오신 주님, 우리가 그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도 이제는 자발적으로 율법을 성취시키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생각에 잠겨서 죄짓는 자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말씀하셨사오니 이제는 영의 생각, 기도하는 자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이 생각하다가 부정적인 생각하다가 결국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도록 우리의 영혼을 주께서 붙잡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기도하여 주님 앞에 깨어 있는 영혼 되도록 저희를 붙잡아 주시고 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은 우리에게 내적 갈등을 주며 영혼을 소성케 하며 육체를 살리는 영이며 자녀 정체성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우리가 이 성령을 가졌으니 앞으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승리하며 나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