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9: 자유와 성령 2 (8장)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오늘은 로마서 8장 두 번째 시간입니다. 로마서 8장을 두 번으로 나누어 살펴보는데, 지난주에 17절까지 보았고 오늘은 18절부터 그 이후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우리가 보다가 마지막에 다 못 하고 마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는 김에 성령의 사역 세 가지를 한 번 더 기억하고 정리한 뒤 넘어가겠습니다.
1. 성령의 세 가지 사역
1-1. 확증하는 사역
성령의 세 가지 사역 첫 번째는 확증하는 사역입니다. 확증이란 확실히 도장을 찍어준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가 확실하게 나의 자녀라고 인쳤다." 이렇게 도장 찍어주는 것이 확증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도장 찍어주고 확증해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찔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고 찔림이 있다면, "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되었구나. 도장을 지금 계속해서 받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1-2. 생명 사역
두 번째 성령의 사역은 생명 사역입니다. 생명 사역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영을 살리고 또 하나는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육만 살리고 영은 죽이는 것이 아니요, 영만 살리고 육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공히 살리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1-3. 양자 사역
세 번째 성령의 사역은 양자 사역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의붓자식으로, 남의 집 자식으로, 죄의 자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확정해 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습니다.
종의 영이란 희망이 없는 영을 말합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그냥 오늘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내일이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이 재산 너에게 다 주마. 내가 이 집 너에게 다 주마. 나만 믿고 따라와."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소망이 있고 미래에 대한 꿈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양자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사역이 아주 중요한데, 그중에 우리가 살펴보지 못한 것을 하겠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우리도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옛날 예수님 시대 때도 아람어 방언으로 유대인들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 "아빠"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말 발음이랑 예수님 시절에 아람어 방언이랑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하니까 꼬맹이들이 부르는 말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직접 사용했던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를 언제 사용하셨는가? 마가복음 14장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언제 어디에서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갈등 가운데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적인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기 싫습니다. 두렵습니다. "제가 과연 이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저는 십자가 지는 것이 몹시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습니다. 무서워서 아버지께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 못하겠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등하는 자리에서, 인생의 가장 깊은 고민과 고뇌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은 정말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때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아버지"라고 부르면, 우리에게는 권리가 주어지는 반면에 동시에 의무도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 양자 사역이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권리와 하나님의 모든 자원을 내가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권한과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함께 따라옵니다. 그 의무가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나의 부모,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함께 한 집에서 수십 년 동안 오랫동안 살면 부모의 영광만 누릴 수 있습니까? 부모의 허물도, 부모의 책임도, 부모가 혹시 인생을 잘못 살아서 뒤집어 쓰는 각종 모욕과 불명예도 자녀가 함께 져야 합니다. 사업하다가 부모가 실패하면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녀에게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녀가 "나는 이거 싫습니다. 나는 부자 아버지는 좋은데 가난한 아버지는 싫습니다. 나는 건강한 아버지는 좋은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싫습니다." 어찌 그를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영광도, 하나님의 자원도, 권리도 함께 누리는 것인 동시에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양자가 되면 같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러므로 우리를 양자 됨의 특권을 주시고, 성령의 사역이 양자 됨을 깨닫게 하시는데, 양자가 된다는 것은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셔야 됩니다. 영광도 고난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게 해 주시고 영광만 받게 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둘 다 하든지 둘 다 하지 않든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세트로 함께 옵니다. "전 이거 싫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얻은 것처럼, 십자가 없이 부활이 어떻게 있습니까? 십자가 없이 승천이 어떻게 있습니까? 고난이 있고 부활이 있고 그 이후에 승천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원래 지난주 마무리였습니다.
2. 피조물의 현실과 소망
오늘 본문으로 넘어갑니다. 피조물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2-1. 생각하건대의 의미
18절에 보면 "생각하건대"라는 말이 서두에 나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건대"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이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냥 생각하고 흘려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론짓다라는 뜻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론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하다"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말하면 타동사입니다. 목적어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다"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했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제가 조금 전에 정리했던, 지난 시간에 했던 성령의 세 가지 사역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역을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 이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세 가지 사역이 무엇입니까? 첫째, 확증하는 사역입니다. 우리 안에 갈등이 있으면 "넌 하나님의 자녀야" 확증하는 사역입니다. 둘째, 생명 사역입니다. 영혼도 살리고 육체도 살리는 사역입니다. 셋째, 양자 됨의 사역입니다. 양자는 영광도 얻고 고난도 받는 그 사역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보니까,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니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내려졌다는 뜻입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것을 생각해 보니까, 세 가지 성령의 사역을 생각해 보니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니까 미래에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맞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정해 주시고, 내 영혼과 육체를 살려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고난을 함께 받으면 영광도 주신다고 양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이것을 생각하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고 견딜 수 있는 인내가 생깁니다. 그것을 견딜 수 있고 참을 수 있는 참을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2-2. 견디는 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견딥니다. 특기입니다.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야, 넌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을 참느냐. 이걸 어떻게 견디느냐."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우리가 진짜 예수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면 견딥니다. 견디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갔습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막 내려가는데, 피난 가면서 교인들이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짜 성도들이 저 평양에서부터 내려와서 서울로, 서울에서 내려가면서 대구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피난 가면서 한 것이 교회 세운 일입니다. 그 전쟁통에 그렇게 해서 전쟁 때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가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 먹이고 살리고, 양손에 아기들 우는 것 손잡고 피난 가야 되고, 하늘에서는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고, 내가 언제 죽을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교회 짓고 있었습니다. 피난 가면서!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제가 주일에 설교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초대 교회 때 복음이 한창 흥왕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데 고난이 닥쳤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고 죽었습니다. 고난이 닥쳤는데, 고난 닥친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한 일이 양손에 복음 들고 가서 교회 세운 일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래서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인내하게 하시고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하나님 말씀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십 일 동안 환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다음 학기에 공부할 텐데, "십 일"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9일 다음에 오는 10일이 아니고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의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 이 고난은 흘러가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입고 이 고난을 견디고 인내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 성령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참을성이 잘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자라나는 모습을 한번 잘 관찰해 보십시오. 이 아이들이 언제 성령 충만해지고, 언제 거듭나고, 언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 어릴 때는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여기서 어렸다는 말은 나이가 어리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어렸을 때, 아직까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지 못했을 때, 그때는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이것 한번 해보다가 안 되면 집어치우고 또 저것 하고, 성격적으로 그런 사람도 있지만 변덕스럽고 오래 참지 못하고 쉽게 화내고 사람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속에 내주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임재하고 나면 미래에 대한 소망 때문에 현재를 붙들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자라서 믿음이 다 커지고 나면 잘 참습니다. 견딥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하실 것입니다.
2-3. 피조물의 세 가지 소망
피조물인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바라고 있는 소망을 세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9절과 21절과 23절입니다.
19절부터 보겠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여기 피조물은 다른 것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나"라는 뜻입니다. 내가 고대하는 바는, 나 아무개가 소망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을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3명 4명 5명 해서 그룹으로 나타난다는 뜻인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미루어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 말은 다시 생각하면 내가 기대하는 바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고 싶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런 소망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 영적 소망이 없으십니까? 나의 소원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거짓말하지 않고 살고 죄짓지 않고 살고 싶다. 이것이 첫 번째 소망입니다.
이어지는 21절을 보겠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역시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피조물이 나 아닙니까? 나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나도 좀 죄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도 죄의 권세에서, 속박에서 풀려나고 싶다. 이것이 두 번째 소망입니다. 죄짓는 데서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런 소망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죄짓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그렇게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소망을 우리는 가집니다.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우리"는 나 자신입니다.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몸이 죄짓지 않고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 항상 죄짓는 도구 아닙니까? 손으로 죄짓고, 발로 죄짓고, 눈으로 죄짓고, 생각으로 죄짓고, 내 몸뚱아리는 다 죄짓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바울이 여기서 바라는 소망 세 가지를 각각 다르게 써두었지만 한마디로 얘기하면 "죄짓지 않고 살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우리 다 그런 소원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나 돈 많이 벌고 싶어요" 하면 너무 세속적입니다. "나 한 200살까지 안 아프고 살고 싶어요" 하면 너무 세속적인 욕망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 말고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화의 삶을 사는, 죄짓지 않고 몸이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욕망, 거룩한 욕심입니다.
2-4. 현실의 허무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런 소원이 있으나 현실은 이렇습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20절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현실은 어떻습니까? 피조물, 나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이 어디에 굴복합니까? 허무한 데 굴복한다고 했습니다. 허무가 무엇입니까? 언제 허무를 느껴보셨습니까? 쫓아갔는데 잡은 줄로 알았는데 손에서 모래알갱이가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도 없을 때, 돈 많이 번 줄 알았는데 눈 뜨고 나니까 하루아침에 물질이 다 사라지고 없을 때, 이것이 허무 아닙니까? 인생이 이렇습니다. 내가 다 잡은 줄로 여겼는데 있다가 사라지는 것, 허무합니다.
물질을 붙잡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물질은 손에 남았으나 행복이 없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면 사랑을 내가 쟁취할 줄 알았는데 저 사람은 내 옆에 있으나 사랑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허무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만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생각했는데 그것을 가졌으나 아직까지 내 마음은 목마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허무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은 아까 말했던 것을 원하나 현실은 나는 아직까지 허무함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 허무한 것을 쫓으려고, 그것 잡으려고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나의 현실입니다. 내 이상은 하늘 꼭대기에 있으나 현실은 밑바닥 시궁창에 처박혀있는 내 현실, 그것을 바울이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양극단에 서 있는 우리 피조물의 현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다시 20절을 보시면 "자기 뜻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허무에 굴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것을 잘못 읽으면,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나 하나님이 이렇게 살게 하시니 이렇게 산다"며 모든 죄를 하나님께 전가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이것은 로마서 1장에서 읽었던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허무한 데 굴복해서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임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데 그냥 버려두는 것입니다. 유기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내 소원은 하늘 꼭대기에 있으나 현실은 계속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나의 이 어찌할 수 없는 자아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피조물은 우리입니다. "다 이때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 피조물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고, 나 때문에 고통받는 온 세상 자연 만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짐승이 고통받고, 식물이 고통받고, 지구가 고통받고, 우리 자식이 고통받고, 다 함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 안 느껴보셨습니까? 못 느껴보셨습니까?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믿음대로 잘 살아지십니까? "나는 오늘 죄짓지 않고 살겠다" 결단하고 아랫니를 꽉 깨물고 그리고 하루를 시작했건만, 한 시간도 못 되어 가지고 마음속에는 죄의 욕망이 일어나서 형제를 저주하고 욕하고 마음속에 뒤죽박죽이 되고 엉망진창이 되고, 오후쯤 되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사탄에게 놀아났구나." 그러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계속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 아닙니까? 바울이 그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의 도우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겪는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3-1. 참음으로 기다림
25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바라고 바랍니다. 우리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 이것을 바랍니다. 이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견디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견디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생략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릴 때" 내 인간적인 힘으로 참아집니까? 내 인간적인 힘으로 견딜 수 있습니까? 내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됩니까? 나를 참게 하고, 나를 인내하게 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오늘을 견디게 하고 내일을 꿈꾸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여기서 "성령은 과연 미래적인 것만 보고 오늘을 무조건 참으라고 하느냐"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늘을 살아가게끔 하는, 보람 있게 살아가게끔 하는 힘이 되십니다. 사실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야 그 하루가 모여서 이틀이 되고, 이틀이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참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늘의 이 현실을 완전히 저당 잡혀서 미래에만 투자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굶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그러면서 자기가 벌어서 누리지 못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는 손가락질합니다. 어리석다고. 기본적인 생활은 하라고 합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힘을 우리에게 매일같이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게끔 해주시고 이기게 해 주시고 보람 있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3-2.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이제 성령께서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우시는지 내용이 나옵니다.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연약함"이라 했습니다. 이 연약함은 좀 전에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빠져있는 우리, 그것이 연약함 아닙니까? 그 연약함을 헬라어에서는 "아스데네이아"(ἀσθένεια)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그냥 약한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고 무기력한 상태, 완전히 무기력증에 빠져서 축 처진 사람, 얼마나 무겁습니까? 처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연약하다" 하면 가냘프고 호리호리하고 내가 좀 돌봐줘야 될 모습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런 연약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연약하다 하는 것은 완전히 축 처져버린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환자 같은 모습입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앞의 말을 비추어서 말하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가운데서 갈등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어서 완전히 포기해버린 나,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럴 때 없습니까? "나는 안 되는가 보다. 나 같은 인간은 아예 안 되는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맨날 죄와의 싸움에서 지고 맨날 쓰러지는데, 그래서 그냥 영적으로 완전히 다운되어버린 그 상태, 그 연약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연약함을 어떻게 한다고요?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합니다. 여기 "도운다"는 말이 헬라어로 "쉬난틸람바네타이"(συναντιλαμβάνεται)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옆에서 잠깐 힘을 돕는다, 이런 뜻이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말과 함께 연결해서 말하면, "연약함을 돕는다"는 말은 무기력증에 빠져서 축 처진 사람을 일으켜서 업고 간다는 뜻입니다. 헌신적으로 업고 간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아주 놀라운 사역을 얘기하는데요. 그러면 이 연약함을 바울은 이렇게 그 다음에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여러분 이럴 때 없습니까? 연약해져서 내가 이제 세상과의 갈등 가운데 맨날 지기 때문에 기도도 안 나옵니다. 이제는 면목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기도도 못하겠습니다. 기도도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완전히 다운되었을 때, 그 연약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도도 못할 그때, 성령이 어떻게 도우시는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우리 대신에 기도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성령이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나는 느끼지 못하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연약해져서 이 갈등 가운데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도 못하고 그냥 번아웃돼서 쓰러져 있는데, 성령께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친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3-3. 칭의와 성화
이제 로마서를 앞으로, 이제 4장 3장으로 돌아가서 제가 다시 정리해 드리면, 로마서는 칭의를 얘기했습니다. 나는 아무 공로 없는데 하나님이 그냥 의롭다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집안에 들어가 있을 때 죽음의 사자가 건너가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때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칭의의 차원에서 구원입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성화를 이루어 가시는데, 성화의 차원에서 구원은 광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요. 그런데 행실이 안 따라줍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도 그것을 압니다. 나는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 원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데 행실이 안 따라줘서 항상 갈등합니다. 그 갈등 가운데 있는데, 그래서 아예 포기해버리자, "나는 안 되는가 보다" 그러고 있는데, 내가 포기했는데 성령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속에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령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
그런 것 한번 느껴보셨습니까? 사실은 우리는 이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다운돼 버리면 영적인 예민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내 속에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이렇게 우리에게 직접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아, 나는 정말 완전히 탈진해서 기도하지 못할 때라도 성령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구나."
그런데 제가 예전에 청년들 사이에 갔을 때 로마서 이 이야기를 하니까 청년들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저 기도 안 해도 성령님이 알아서 다 기도하시니까 새벽 기도 안 해도 되고, 알아서 기도 안 해도 되고, 그럼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더군요. 그런데 이것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서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하나 매일같이 넘어지고 무너지는 자기 안의 갈등, 이 갈등을 겪다가 넘어져 버렸을 때 그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대 1로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제는 아합과 이세벨이 나에게 굴복할 것이다" 생각했는데 웬걸요,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네 생명을 죽일 때까지는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 이세벨이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엘리야는 이제는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낙심되어서 그가 40일 40밤을 밤새도록, 그리고 해가 있는데도 걸어가서 혼자 쓰러져 버립니다.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저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죽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서 그를 먹이시고 물도 먹이시고 여러 가지를 주시고, 그리고 나서 그에게 새로운 능력과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 뜻대로 살다가 탈진했을 때, 그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3-4. 성령의 간구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이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령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 성령은 우리 마음에 있는 성령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있는 성령의 생각을 안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까 서로 소통하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성도는 나입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완전히 탈진해서 쓰러져 있어서 기도도 못 하고 있는 상태인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서로 자기들끼리 소통하고 자기들끼리 기도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 "야,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야 너희들에게 유익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올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너희에게는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성령이 나에게 오니까 내 마음속에 내주하셔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시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역사적인 일입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성령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그냥 지나가서 잘 기억이 안 나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십시오. "영원토록 너희 속에 있겠다" 했습니다. 한 번 임한 성령은 영원토록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 속에 거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진리의 영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진리의 영이 내 마음속에 직접 계시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성령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이고, 우리가 이 성령을 붙들고 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칭의의 차원에서 영화까지 가지 못한 단계입니다. 광야 40년 여정을 걷고 있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쳐있을 때 성령이 하나님께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어서 요한복음 14장 26절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여 계시면 우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생각도 나게 하십니다.
"생각난다"는 말이 참 중요한데요. 이런 경험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죄 지을 순간이 딱 됐습니다. 내가 여기서 한 단계만 딱 더 들어가면 죄를 딱 짓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 이건 죄다" 하는 것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그런 경험 해 보셨습니까?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요.
또 이런 경험도 있습니다. 전도해야 되는데 전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내가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그냥 갑자기 내가 누구에게 말씀을 전해야 되고 복음을 전해야 될 상황이 생겼습니다. 두렵습니다. 한 번도 내가 전도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성경 말씀이 떠오르고 생각나고, 설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고, 그래서 입에서 술술술술 복음이 나옵니다.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갑자기 내가 IQ가 150이 된 것입니까? IQ 110, 100 정도밖에 안 됐는데. 그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나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생각나게 하시면 우리는 막힘이 없습니다.
3-5.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제가 이것을 이렇게 한번 읽어볼게요. 제가 읽는 것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또 읽어볼게요. "우리가 알거니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왜 이렇게 읽었느냐?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리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같다는 뜻입니다. 동격입니다. 아직까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셔야 됩니다.
말씀드려 볼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굽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곧 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의심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나? 하나님이 나를 부른 것이 확실한가?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하나님이 나를 성도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는가?" 아직까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숨 넘어가는데 "권사님, 권사님, 하나님이 권사님 사랑하는 거 믿으시죠?" "글쎄요 목사님, 잘 모르겠어요." 어쩌라고요. 그럼 그때 돼가지고 숨 넘어갈 때가 됐는데 그때까지 모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답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으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하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 말고 어떻게 하나님을 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성령께서 나에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만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해서도 안 되고 의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보기에 좋은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가 선입니까? 악입니까? 우리에게는 선입니다. 왜요? 내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으니까요. 예수님 보실 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는데요. 예수님 보실 때는 악입니까? 선입니까? 예수님도 선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왜요? 합력해서 선을 이루니까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이것이 선이라면 선인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도, 내가 갈등하는 것도, 내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도요. "합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동역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동역해서 이것이 선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냥 나는 내가 생각할 때 선, 좋은 것은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무병하고 오래 살고 자식 잘 되고, 이런 것이 선인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만 선인 것이고, 하나님 보실 때 나와 하나님이 동역해서 이루는 선은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동역의 작품 아닙니까? 그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역하신 선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사람은 성화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동역합니다. 하나님과 동역하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냅니다. 지금은 이것이 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이것이 고통이고, 지금은 이것이 고난이고, 지금은 손해 보고, 지금은 짜증 나고, 지금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것이 하나님이 나와 동역하시는 거였구나" 그러면서 "하나님과 나의 동역이 선이 되는구나"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구원의 순서
그다음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순서를 말해 봅시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바울이 진짜 천재구나. 동시에 성령께서 바울에게 정말 놀랍게 역사하셨구나. 그러니까 이런 걸 깨달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29절과 30절, 너무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구원의 순서가 나옵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것을 볼까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이것을 한자어로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미리 안다." 예지라 합니다. 선지라고도 하고요. "미리 안다." 예지입니다. 그리고 "미리 정하셨다." 이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예정입니다. 미리 알고 미리 정하시고요.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어머니 태중에 나를 짓기 전부터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다고요. 예지, 예정 아닙니까? 예지 예정론 맞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30절을 보실까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불러서 명령하신 것, 무엇입니까? 소명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런 의지도 없는데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습니다. 칭의입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입니다.
볼까요? 순서입니다.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실 수 있어야 됩니다. 빠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성화가 빠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얘기했던 성화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까먹었을까요? 빠트렸을까요? 그런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에 성화를 다른 용어로 숨겨뒀습니다.
예정 앞에 볼까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를 풀어 놓은 것입니다. 성화란 이런 것입니다. 너무너무 탁월한 해설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성화가 무엇입니까?" 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설명하십시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십시오.
성화는 여러분들 지금 성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도 성화의 삶을 살고 있고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 가기 전까지 다 성화되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지금 이 과정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상 가운데 무엇을 본받고 싶으십니까? 어떤 분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 어떤 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이시는 모습, 어떤 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영광의 생명의 주인이신 그 모습, 그런 것을 본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그 아들의 형상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비참한 모습을 본받아 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것 본받고 싶으십니까? 그 십자가에서 피투성이가 된 모습, 머리에 가시관 쓰고, 손과 발에 못이 찍히고 찔리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오고, 온몸이 채찍에 맞아서 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에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가고, 벌거벗김을 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수치와 모욕당하고, 이 형상을 본받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 성화 없이는 영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성화를 이렇게 풀어서 어디 앞에 넣어놨습니까? 예정 앞에 넣어놨습니다. 이 말은 성화를 전제를 하고 너를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예정하셨을 때는 성화를 건너뛰는 것이 아니고, 성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의 프로그램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건너뛰려고 해서 됩니까? 이것을 건너가려고 해서 됩니까? 이 성화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이미 예정하신 프로그램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투성이가 되는 십자가의 성화,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한 성화의 과정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성화의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세속적 욕망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등 가운데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아"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과 함께 잘 동행하고 살아가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선물로 주신 것 아닙니까?
부모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자식이 고난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그것을 대신 고난 받아주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나라의 권력과 물질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식의 고난을 딱 건너뛰어서 특혜와 특권을 준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그 분노하는 것이 진짜 의로운 분노입니까? 저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그것을 못 하니까, 나도 그것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요.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가 있으면, 내가 그 자리에 가 있으면, 이 중에 십중팔구는 그런 일을 할 것입니다. 안 한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권력이 있고 힘이 있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왜 안 하겠습니까? 보다 더 정교하게 하겠지요. 보다 더 은밀하게 하겠지요. 보다 더 남들에게 안 들키게 하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자녀의 인격에, 성화의 삶에 개입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아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가기 위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하시는데 거기 부모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는 더 많이 고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채색 옷 지어 입혀 가지고 성화의 삶을 방해하니까 하나님이 아예 아버지가 못 보는 곳으로, 채색 옷 벗기시고 이집트로 보내 가지고 아예 죽은 줄로 여기게 하고 그곳에서 성화를 마음껏 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요. 부모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 그렇게 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자식의 성화의 삶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냥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 자녀가 성화의 삶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십시오. 가슴 아프지만 그래서 우리가 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고 울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하나님, 우리 자녀가 성화의 삶에서 성령의 은혜로 잘 견디고 이겨내서 정말 영화에 이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물려주는 재산 가지고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그것을 건너뛰고 산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 큰 고난을 겪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예정하셨다면 예정의 프로그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투성이 십자가의 성화가 그 안에 이미 내재돼 있다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5. 성령 받은 자의 특권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특권이 무엇인가? 31절부터 4가지 특권입니다. 이 4가지 특권을 바울이 수사 의문문으로 표현했습니다. 수사 의문문은 답을 이미 정해 놓은 의문문입니다.
5-1. 대적할 자가 없음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대적할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대적할 인간이 없습니다. 성화의 삶을 누리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자유함을 주시는 자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대적할 사람이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해져서 역사하시는 자가 누리는 특권, 대적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대적자 있던데요. 세상에서 나 힘들게 하는 사람 있던데요. 왜 거짓말하십니까?"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1절부터 12절을 보시면 이 내용은 사울과 다윗 이야기인데, 사울이 다윗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데 사울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여기서 "그가 스스로 이르렀다"할 때 그는 사울 왕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의 심리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성령이 함께합니다. 여기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 사람을 대적하는 그 사람의 심리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모릅니다. "아, 이 인간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를 대적하는구나."
앞으로 생각하십시오. 내가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입어서 특권을 가진 자의 특징은 누구도 나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있어도 "저 사람 마음속에 나를 두려워하는구나. 저 사람이 나를 두려워하니까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한 절 더 볼까요? 사무엘상 18장 29절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어떻게 두려워했다고요? 더욱더욱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했으면 무릎을 꿇고 굴복해야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인간은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됐습니다. 힘이 있으니까, 권력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누리는 특권은 아무도 나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혹 대적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분의 마음, 심리 상태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5-2. 고발할 자가 없음
두 번째,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고발할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얘기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특권입니다. 나를 고발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고발한 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 사두개인들, 얼마나 많이 고발했습니까?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현실에는 고발하는 자가 있으나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고 계시니까요.
5-3. 정죄할 자가 없음
34절 또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할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는 정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죄 있다고 정죄하는 자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런데 그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주님도 정죄하지 않았는데 누가 정죄한다는 말입니까?
5-4.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음
네 번째,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끊을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말이 중요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뒤에 열거된 이것들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 나를 미워하시는 게 아닐까?" 인생에 고난의 파도가 자꾸 닥쳐오면 "하나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왜 드느냐 하면 사탄이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야, 생각해 봐.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벌어야지." 그런 말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세속적인 이야기가 교회에 너무 많이 들어와서 복음을 오염시켜서 그렇습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투성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치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의심하게 됩니다.
만약 그것을 의심했다면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27절입니다. 하나하나 천천히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 39대입니다. 39대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다섯 대를 다섯 번이 아니고요. 그럼 40대를 다섯 번 맞았으면 200대인데 거기에서 다섯 번이 빠지니까 195대를 맞은 것입니다. 바울이.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계속해서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위험도 많이 당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따지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버린 자식입니다. 완전히 버린 자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자랑합니다. 30절을 볼까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것을 자랑합니다. 왜요? 성화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피의 흔적이니까요. 성화의 과정에서 예수님과 같이 고난받는, 피투성이 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에게서 나타났으니까 그것을 자랑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여러분들 자랑할 때 "나 예수 믿어서 우리 애 대기업 취직했어. 나 예수 믿어서 우리 집 2채 샀어." 그런 것 자랑하지 마십시오. 부끄러운 줄 아셔야 됩니다. 그것은 그냥 복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곁가지로 따라오는 것뿐입니다. "나 예수 믿어서 말씀대로 제대로 살다가 사업 두 번 망했어." 그것이 자랑거리여야 됩니다. "나 예수 믿어서 우리 자식 하나님 말씀대로 길러보려고 하다가 우리 애 좋은 대학도 못 보내고 좋은 데 취직도 못하고, 그런데 우리 애들 하나님 말씀 잘 믿고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말씀대로 잘 살아." 그것이 자랑해야 될 거리입니다.
무엇이 자랑해야 될 거리인지 모르고 그냥 세상 복 자랑하고 살아가면 삼류 그리스도인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우리가 진짜 자랑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성화의 삶을 자랑해야 됩니다.
5-5. 끊을 수 없는 사랑
성령을 받은 자는 무엇을 확신합니까? 이제 내가 확신하는 것이 나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로마서 8장은 다 암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로마서 8장 39절까지밖에 안 됩니다. 이것을 마음먹고 하루에 5절씩 끊어가지고 암송하고 암송하고 해보세요. 이것을 계속해서 암송하시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붙들어야 될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 속에 남고, 또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성화의 삶을 한번 잘 살아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성령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죄짓지 않고 살고 싶은 욕심이 있으나 그러나 현실은 밑바닥이고 시궁창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셔서 미래를 꿈꾸게 하시고 현실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셨습니다.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기도하심을 힘입고 힘차게 나아감을 깨닫습니다.
성령과 함께 나아가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이미 예정된 성화의 프로그램을 달려가기 원하오니, 우리가 이제는 십자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십자가 흔적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당당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사오니, 우리가 지금까지 당하는 고난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자랑으로 여기고 성도들에게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