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특강 1 - 나오미와 룻 (룻기 1장)
룻기 1장 16-17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아멘.
오늘은 첫 번째 시간입니다. '나오미와 룻'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사사시대의 배경
1-1. 왕이 없던 시대
교재 6쪽을 보시면 배경 이야기가 나오는데, 룻기의 배경이 언제인가 1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되니라." 그러면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라는 말이 됩니다. 사사시대 아시지요. 사사하면 유명한 사사들이 몇 명 쭉 생각이 나는데, 이 사사시대를 우리더러 정의해 보라,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냐라고 한다면, "어떤 시대지, 나는 삼손밖에 모르는데" 이렇게 얘기하면 곤란합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을 보시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이 없던 시대, 그런데 성경은 항상 그 중의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사사시대는 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왕이 누구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당연히 성경이 말하는 왕이 없다, 이 진짜 왕은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왕은 엄연히 계신데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런 시대, 그래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런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 이전 시대가 언제입니까? 언제부터 사사시대가 시작됐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고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고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두 지파가 땅 분배를 끝낸 후부터, 그때부터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1-2. 레위 지파의 사명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사시대 이전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정치 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별로 땅을 갈라서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셨는데, 사실은 열세 지파였습니다. 왜냐하면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뉘지 않습니까?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뉩니다. 에브라임 지파에도 땅을 주고 므낫세 지파에도 땅을 줬습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에게 땅을 줬다 그러면 한 지파는 뭉텅이 땅을 안 준 겁니다. 그 지파가 누굽니까?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덩어리 땅을 주지 않고 48개 성읍으로 전국에 레위 지파를 제비 뽑아서 다 흩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왕을 주지 않고 레위 지파에게 48개 성읍을 주시고 그 땅에서 레위 지파에게 행하라 하신 것은 단순합니다. 예배, 재판, 신앙교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레위 지파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예배를 인도해 드려라. 각 지역별로 재판을 해라.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참과 거짓, 옳음과 틀림을 분별해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재판을 해 주어라.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을 신앙교육 해라. 그것이 레위 지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셨던 방식은 왕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레위 지파를 통해서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정 정치를 하나님은 꿈꾸셨습니다.
그때 가나안 땅 정복하고 난 다음에 가장 큰 사명, 어깨에 짐을 짊어진 지파가 누굽니까? 레위 지파가 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그들이 타락하면 이 제도는 끝장나는 겁니다. 그들이 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이 말은 레위 지파가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를 읽어보면 레위 지파의 타락상을 두 가지 드라마 같은 사건을 통해서 보여 줍니다. 제가 여기 적어 두었는데,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들을 말해 보라 하면 첫 번째 사건이 에브라임 산지 미가와 단 지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17장과 18장을 읽어보면 되는데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1-3. 레위 지파의 타락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머니 돈도 훔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상도 섬기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자입니다. 돈은 많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레위인 한 사람이 흘러흘러 그 집에 들어왔습니다. 사사기 17장 8절과 9절, 9절과 10절을 보면 미가가 이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 이걸 잘 보셔야 됩니다 —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이라,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이 왜 거류할 곳을 찾습니까?
레위인이 있어야 될 곳, 하나님이 제비 뽑아서 있게 한 자리가 어딥니까? 유다 땅 베들레헴이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거류할 곳을 찾으러 막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부잣집에 왔습니다. 미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함으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유다 베들레헴은 작은 도시입니다. 좀 이따가 또 나오는데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시골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곳,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48개 성읍 가운데 레위인들이 제비 뽑아 가지고 누구는 어떤 자리, 어느 가문은 어떤 자리 갔는데, 어떤 집안은 대도시에 레위 지파가 들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사람처럼 유다 베들레헴 시골에 자리 잡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살기 싫은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재판과 말씀과 예배, 신앙교육인데 그것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도망가 버리는, 그 땅을 버리고 자기 위수 지역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부잣집을 만났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이분이 말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연봉을 내가 이렇게 줄 테니 우리 집의 제사장이 되어라. 요즘 말로 하면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가 교회를 버리고 부잣집의 가정 목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단 지파가 보낸 다섯 명의 정탐꾼이 그 집에 옵니다. 단 지파가 자기 지파가 머물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가다 보니 그 부잣집에 하루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집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부잣집에 있는 이 사람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길이 형통하겠느냐, 올라가서 땅을 찾고 올 수 있겠느냐?" 그러니 이 집에 있는 제사장이 그냥 좋은 말 해 준 것입니다.
"너희 가는 길이 형통할 것이다. 문제 없을 것이다. 땅 잘 찾고 올 것이다." 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그리 마음 쓸 일이 있습니까? 그냥 좋은 말 던졌는데 정말 단 지파가 가서 좋은 땅을 찾아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생각은 저 집에 있는 제사장이 용하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을 데려갑니다. 그 말씀이 나옵니다. 18장 19절과 20절, "그들이" — 여기서 '그들'은 단 지파 사람들입니다 —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스카우트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스카우트하는 겁니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이것을 보면 이 제사장이 우상 숭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갈아탑니다. 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레위 지파가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레위인들에게 위수 지역을 다 나눠 주시고 그 땅에서 예배와 재판과 신앙교육을 부탁하셨는데, 그 땅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그냥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나도 다른 집안 사람처럼 좀 좋은 지역에 가서 살고 싶은데, 이게 뭐냐고, 그러다가 한 가정의 제사장이 되고 갈아타서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고, 이것을 사사기 17장 18장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더 가관입니다. 그렇게 그 사건은 끝이 나고 이제 19장을 보면 19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 즉 사사시대입니다 —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 — 이 사람도 레위인입니다 —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라." 제사장이 첩을 맞이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가 두 집 살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했습니다.
그 첩이 더 웃긴 것은, 이것이 막장 드라마인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제사장이 돌이키고 회개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 첩을 데리러 갑니다. 내가 너에게 서운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라 하고 바리바리 싸 가지고 데리러 갑니다. 그래서 잘 달래 가지고 데리고 옵니다. 오는 길에 날이 저물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사는 산지에서 하루 머무는데, 그 동네 불량배들이 이 여인을 데려다가 밤새도록 능욕하고 욕보입니다. 여인이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19장 29절 30절 보시면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시신을 데리고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토막을 낸 것입니다. 시체를,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왜 열두 덩이로 나눴을까요? 열두 지파에게 보낸 것입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각 지파의 대표자들에게 이 시신 열두 덩이를 다 보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받아본 지파의 대표들은 어떤 말을 해야 됩니까?
이놈을 잡아다가, 이 레위 지파를 잡아다가 목을 따든지 곤장을 치든지 저 멀리 사막에 보내서 굶어 죽게 하든지 그래야 되잖습니까. 그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데, 이 일이 베냐민 지파 지경에서 일어났으니 베냐민 지파를 대상으로 나머지 열한 지파가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 씨를 말려 버립니다. 그것이 사사기 19장과 20장 21장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런 시대에 왕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시대면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것이 레위 지파의 타락 때문 아닙니까? 레위 지파가 돈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니까 한 가정의 제사장 되었다가 지파의 제사장으로 갈아타고, 레위 지파가 정욕에 빠지니까 첩을 두고, 이런 식으로 전쟁하고 온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어 갔던 이 시대, 그것이 사사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희망이 있습니까? 이런 시대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하고 너무 비슷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의 권위, 그리고 교회 중직자들의 권위가 과거와 같지 않습니다.
연일 우리가 뉴스를 보면, 연일 방송을 보면, 신문 지상을 보면, 타락한 목사들, 타락한 교회, 타락한 종교 집단들이 벌이는, 이건 이단 사이비 집단보다 못한 이상한 행태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 이 사사시대에 이미 벌어졌던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그것이 룻기의 배경입니다. 자, 그러면 원래 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지 않습니까? 영적인 흐름도 목회자가 엉망으로 살면 그 교회 뻔합니다. 교회 중직들이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그 교회 뻔합니다. 그것 고치기 정말 힘듭니다. 가정의 부모가 엉망인데 자녀들이 제대로 성장한다는 것이 그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가정이 있다면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 그런데 지금 이런 영적 상태에서 나라는 엉망이고 영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2. 베들레헴을 떠난 가족
2-1. 떡집을 떠나다
그런 시대가 이제 7쪽을 보시면 사사시대에 흉년이 들었을 때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족이 어디로 이주했습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되니라." 이제는 아시겠지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하면 사사시대인데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라 그랬습니까? 왕이 없던 시절,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절, 영적 타락이 그냥 막 일어나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런데 유다 베들레헴의 한 사람이 그랬습니다. 여기 또 유다 베들레헴이 나오네요.
아까 우리가 사사기 17장에 봤던 유다 베들레헴의 그 레위인, 그 사람도 산으로 그냥 가 버렸잖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미가의 집에 들어가 버렸잖습니까. 흉년이 되니까 제사장도 그냥 버리고 가는데 평신도야 오죽하겠습니까? 같은 지역입니다. 그 좁은 동네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좁은 동네에 우리 동네를 위수 지역으로 지키고 있던 제사장이 아침에 눈 떠 보니 없습니다. 어디 갔냐 그러니까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도들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이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마음. 그러면 우리도 가지 뭐, 그냥 우리도 그냥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다 흩어져 버리지 뭐, 가는 것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의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제가 아까 떡집이라고 그랬잖습니까. 떡집, 말 그대로 그냥 떡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요한복음에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말씀으로 밝히신 바에 의하면 요한복음 6장 35절을 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베들레헴, 떡집, 예수님 출생지, 생명의 떡, 이것이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를 떠났습니다. 생명의 떡집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다 아시잖습니까. 이 내용들은 떠나고 나니까 무엇이 남습니까? 나중에 죽음만 남는 것입니다. 고통이 남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이야기를 나중에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복습하실 때 한번 상세하게 읽어보십시오. 굉장히 깁니다. 요한복음 6장 이야기는 오병이어 사건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적어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리가 먹고 사는 것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예수님 왕 삼으려 하고 미친 듯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매일같이 쇼를 보여 주는 그런 분이 아니잖습니까.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슨 선문답하는 소리 하지 마시고 그냥 계속 당신은 기적만 행하십시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같은 얘기를 반복하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는가 보다 하고 다 떠나버렸습니다. 떡을 안 주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사람들 그런 것 아닙니까? 베들레헴의 레위인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떡집을 떠나버렸고, 여기 나오미의 가족 네 식구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떡집을 떠나버렸고, 예수님 시절에 예수님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까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다 떠나고 제자들 열둘만 남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너희도 가려느냐." 만약 그때 예수님의 심정은, 만약 제자들이 "네, 우리도 가겠습니다" 하고 갔으면 예수님은 아마 다시 새 판 짜셨을 겁니다. 다시 제자들 불러야지.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기념비적인 신앙고백을 하잖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거기서 안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매일같이 주지 않아도, 매일같이 우리가 배부르게 먹지 못해도, 지금 당장 우리가 눈앞에서 본 이 놀라운 기적이 매일같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 주님 따라다니면 그분이 바로 떡집인 것을 안 것입니다. 내가 굶어 죽어도 이분과 함께 있어야 되겠다, 이것을 안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집이지, 예수님이 베푸는 기적이 떡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라" 그랬습니다. 예수가 떡이지 예수님이 주는 그 무엇인가가 떡이 아닌 것을 베드로는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안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 잘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중요한 베들레헴 떡집을 지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있어야지 그 부산물, 먹고 사는 문제, 물질 문제, 이것 때문에 신앙의 등락이 있고 오르내림이 있고 떠나고 오고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우리 영원히 죽는 겁니다. 살다 보면 망할 때도 있고, 살다 보면 돈이 없을 때도 있고, 살다 보면 통장이 텅텅 빌 때도 있고, 이럴 때 저럴 때 있잖습니까. 다 인생길 가다 보면 험난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꼭 붙잡아야 될 것은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붙잡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것은 떠나도 영생의 말씀이 예수인데 그것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떡집 떠나면 안 됩니다.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처럼, 이 사람들처럼. 그런데 가 버렸습니다. 이름을 얘기합니다. 2절 보니까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한 번 더 밝힙니다. 원래 이 사람들의 출신이 떡집 사람들이더라. 그런데 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이것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성경에 기근이 오고 떠난 사람들 이야기, 고난이 오고 떠난 사람들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 아닙니까? 여기 나옵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이 어느 땅입니까? 그 땅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니까 그냥 내려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의 기근을 버티고 견디고, 그 땅 자체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니까 그 땅에서 살았어야 되는데 애굽으로 갔습니다. 애굽에 가서 고생하잖습니까. 아내 잃을 뻔하고,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까. 다윗 이야기도 또 나옵니다. 사무엘상 22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아둘람 굴에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아둘람 굴에 400명이 모였는데요.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 사람들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이 유다 땅에서 사울에게 쫓겨서 당장 잡히면 다 죽은 목숨인데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모압 땅으로 가 버렸습니다. 모압 왕에게 사실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가서 400명과 부모님을 거기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 보십시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숲에 이르니라." 선지자 갓 누가 보냈을까요?
자기 마음대로 왔을까요?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유다 땅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은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훈련하고 있는데 훈련소에서 탈영한 것 아닙니까? 이것 훈련소 탈영한 사람 잡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갓 시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훈련시키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기근을 주셨는데, 그런데 애굽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거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거기도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기근이 당연히 옵니다. 고난이 우리 인생에 옵니다. 그런데 예수 떠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떡집이고 그 자체가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예수님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2-2. 모압에서의 비극
이제 이 집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말론과 기룐, 네 식구가 길을 떠났는데 모압 땅에 갔는데 그런데 남편이 죽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른이니까요. 그런데 4절,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자, 이제 그 땅에 사니까 그 땅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제 나오미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땅에서 죽었는데 그 땅의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제 여기 모압 땅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그냥 살겠다는 뜻입니다. 두 아들이 이방 결혼했습니다. 이방 결혼,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 아닙니까? 철저하게 못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까? 남편 죽고 두 아들을 이방 결혼시켰는데 돌아갈 수 없잖습니까. 이제 돌아가지 않겠다, 그냥 여기서 살겠다, 그리고 두 아들도 그냥 이방 사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방 결혼하지 말라고 그랬잖습니까. 그 당시 부랴 율법에 의하면 철저하게 그것 못하게 했잖습니까. 민수기 21장 29절 한번 보세요. 밑에 적어 두었지요.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 그모스는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6절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이것 금한 것 아닙니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했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다시 4절을 보면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약 십 년이 되었더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두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죽고 남았더라. 모압 땅으로 갈 때 기근이 있어서 갔습니다.
기근이 있어서 갔는데, 갈 때에 나오미와 엘리멜렉과 말론 기룐, 자녀들은 어렸으니까 부모가 하는 대로 간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가졌던 포부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적어도 딱 한 가지만 보고 간 것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 땅에 기근이 있으니까. 그리고 또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지도자 레위인도 야반도주하고 없는데, 레위인도 야반도주하고 가는데 나 같은 평신도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목사가 나쁜 짓 한다고 나도 나쁜 짓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래서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하는 이 말씀이 진짜 진리의 말씀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이분의 믿음이 본받을 만한 믿음인지 그렇지 않은지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저 사람 따라간다고 나도 저 사람 따라가다가 같이 망합니다. 같이 망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을 버리고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가고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간 사람, 우리가 눈으로 볼 때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상과 드라빔을 들고 다니잖습니까. 우상 숭배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제사장이. 그런데 이 사람들도 영적 지도자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길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 여러분 이것 누가 책임집니까? 물론 베들레헴 땅에 살았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오미가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지금 이런 상황,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베들레헴에 있으면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면 죄책감은 없습니다. 나는 이 땅을 지켰으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했으니까. 나는 신앙을 버린 적이 없으니까. 나는 약속의 땅을 떠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약속의 땅을 떠나서 남편 죽고 두 아들 죽었습니다. 율법에 철저하게 금했던 이방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부추겼습니다. 그러면 엄마로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내가 내 아들 둘 다 죽였다는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결단을 할 때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그 중심이 하나님 말씀이어야 됩니다. 목사님이 저렇게 하니까, 장로님이 저렇게 하니까, 아무도 책임 안 져 줍니다.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결정하셔야 됩니다. 기도하고, 분별하고, 결단하고. 그래야 후회가 없습니다. 그래야 내 마음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결정하면 평생 후회하고 평생 거리끼고 평생 죄책감 느끼고 그 갈등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3. 돌아오는 결심
3-1. 회복의 소식
나오미의 심정은 그랬는데, 나오미의 마음이 아마 이랬을 겁니다. 제가 하박국 3장 2절을 적어 두었는데,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아마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진노 중에라도 나를 향한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 이렇게 지금 큰 어려움을 겪고 실의에 빠져 있는데, 멀리 베들레헴에서 바람결에 소식이 하나 들려옵니다. 6절,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베들레헴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 땅에 그 떡집이 과거에는 흉년이 왔는데 이제는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는 거기에 먹고 살만하게 되었다 하는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그랬습니다. 여러분 나오미가 어떻게 보이세요? 여러분들 눈에는 "지독하게 뻔뻔하네 이 여자가" 이렇게 보이세요? 그런데 나오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인을 본 것입니다. 흉년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면 거기에 은혜가 있구나.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돌아오겠다는 결심. 나가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결심은 웬만해서는 하기 어렵습니다. 돌아가는 결심이 왜 그렇습니까?
부자 되어서 돌아가면 몰라도 망해 버렸잖습니까. 완벽하게 망했잖습니까.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잖습니까. 두 아들 죽고 남편 죽고 이방 결혼했고 이제 가진 것은 하나도 없고, 더구나 두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자손이 없습니다. 이것은 본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심판이요 치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런데 돌아갈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 돌아갈 결심이 정말 위대한 결심입니다. 제가 여기 적어 두었는데, 일어나, 일어나 그랬습니다.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 히브리어 '쿰(קוּם)' — 일어나다. 쿰, 달리다, 쿰, 아시지요. 일어나다. 일어나는 것이 잘 안 됩니다.
3-2. 탕자의 결단
누가복음 15장 17절 18절 한번 보십시다. 탕자 비유인데요. 탕자가 돈 다 써 버리고 타국에 가서 이제 가난하게 되고 남의 집에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쳐다보고 있으면서, 먹고 있으면서 이런 결심을 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 스스로 돌이켜,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누가 돌이켜라 돌이켜라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결단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줄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 그랬지요, 일어나 —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는 것, 이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시는 것이지, 이 탕자가 재산 다 들고 가서 다 써 버린 것을 책망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 잘못한 것입니다. 그 대가와 그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9절 20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하겠다 결단하고, "이에 일어나서" — 또 일어나서 나옵니다 —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 이에 일어나서, 돌아가니. 나머지는 아버지가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살진 송아지 잡고, 손에 가락지 끼우고, 잔치 열고, 끌어안고, 신발 신기고, 새 옷 입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사탄이 못 돌아가게 막는 것입니다. 사탄이 어떤 생각을 줄까요? 나오미에게 "너 돌아가면 입방아에 못 견딜 거야. 너 돌아가면 너는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을 거야. 저주받은 여자라고 사람들이 너를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 뭐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게다가 이 두 며느리들, 물론 나오미가 못 오게 얘기하지만 따라간다 하면 같이 두 며느리들 데리고 어떻게 갑니까? 거기서 이방 여인들 데리고 돌아갈 수가 없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못 돌아갈 이유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회개하고 돌이키고 다시 믿음 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못하게 가로막는 요인들이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자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간 것, 그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사탄의 속삭임을 극복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끌어안아 준 겁니다. 아버지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는 그래서 아버지께 환영을 받은 겁니다. 아버지는 그딴 물질, 그것 몇 푼 썼다고 그것 가지고 책망하는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 그 집에 있는 큰아들의 관점과 다른데, 아버지의 관점은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네가 드디어 이기고 왔구나, 스스로 돌이켰구나, 일어났구나, 돌아왔구나, 그것 못 돌아오게 만드는 사탄의 계략이 얼마나 강하고 센데 그것을 네가 이겨냈구나,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죄감을 극복한다는 것만큼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계속해서 못 일어나게 합니다. 살다 보면 이런 죄 저런 죄 짓지요. 마음속에 생각으로도 죄를 짓고 내 손으로도 발로도 내 온몸으로 다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돌이키려고 하면 사탄이 나에게 자꾸 정죄감을 줍니다. 그것을 끊어내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 그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송아지 한 마리 그까짓 것이 뭐라고요. 그것 잡아 가지고 잔치하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전사인데. 탕자는 바로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탕자는 고개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와서 아버지께는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앞에 함께 잔칫상 받아 먹고, 먹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 룻의 위대한 고백
4-1. 돌아오는 길의 대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나눈 대화가 어떠합니까?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이 여인들 두 며느리 데리고 가려 하니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내가 이 여인들 데리고 와서 무슨 손가락질을 받아야 되나. 두 번째는 이 청춘이 불쌍한 것입니다. 며느리들 청춘이.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습니다. 돌아가면 되잖습니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돌아가라 그랬습니다. 이제 너희 집으로, 너희 고향으로.
자 그런데 룻이 얘기합니다.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오르바는 가만히 있습니다.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이 말을 왜 하는 걸까요? 옛날에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잖습니까. 그래서 나오미가 예를 들어 아들이 좀 4명 5명 이렇게 있었다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취해서 아이를 낳아 주고 그 아이는 죽은 형의 이름으로 입적시켜 주는, 이제 그런 제도가 있었는데 나오미에게는 더 이상 자식이 없으니까, 나는 이제 희망이 없으니 여기서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냥 돌아가라, 이 얘기입니다.
13절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여기서 나오미가 고백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죄책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 이 죄책감 가지고 계속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며 나오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14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 입 맞췄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별의 키스입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르바는 할 만큼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여기까지 따라왔고 자기는 할 만큼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오르바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오르바는 인간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자기 자리에서는 한 겁니다. 그런데 룻을 보세요.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히브리어 '다바크(דָּבַק)'라는 말인데요. 밀착하여 하나가 되다, 그런 뜻입니다. 이 다바크라는 단어가 또 어디에 쓰였냐면 창세기 2장 24절에 쓰였는데,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부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붙좇았더라, 절대로 시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라는 뜻입니다. 붙좇았더라. 멀찍이 떨어져 간 것이 아닙니다. 그냥 딱 붙어서 절대로 내가 어머니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하고 꼭 붙잡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4-2. 신앙고백의 절정
나오미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이 말이 뼈가 있습니다. 너의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그런데 룻이 말합니다. 이제 16절 17절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신앙고백 중에 제일 위대하고 제일 아름답지 않은가,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가 좀 외워야 되지 않은가, 외워서 내 것으로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여기까지는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휴머니티가 흘러넘치는 사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과 자비, 헤세드가 넘치는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그래도 내가 내 살 길을 좀 찾아야 되겠고, 룻은 이 노인네 혼자 돌려보내기가 너무 안타까워서 내가 어머니를 따라가겠습니다 — 여기까지는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여러분 이것이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율법에서 모압 사람이 어떻게 유대인이 됩니까? 받아줍니까? 누가? 안 받아 줍니다. 그런 설움과 그런 고통을 각오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인데 제가 어머니를 따르면서 제가 어머니의 백성을 내 백성으로 내가 섬길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길이 어렵고 고난의 길인데 제가 해 보겠습니다, 그 말입니다. 그들이 나를 배척해도 나는 그들을 어머니의 백성으로 섬기겠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이 위대한 고백입니다. 아마 나오미가 깜짝 놀랐을 겁니다.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이 집에 오르바와 룻, 두 며느리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르바는 그들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모스에게로. 그런데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겠다" 했습니다. 영접한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나오미가 영향력을 끼쳤는지, 돌아가신 시아버지인지, 아니면 그 남편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밝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룻이 신앙고백을 해 버렸다니까요. 룻이 여기서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넘어서서 이제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을 룻이 여기서 해 버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남자들은 여기까지는 잘 안 갑니다. 여자들이 좀 독해서, 나중에 우리가 살펴볼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런 말을 하는데, 남자들은 여기까지는 잘 안 합니다. 그냥 죽음까지는 잘. 그런데 여자들이 그래서 하나님이 룻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죽음 이외에는 나와 어머니를 갈라놓을 것이 없습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믿음. 그러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따라가자 그런 것입니다.
4-3. 빛나는 믿음
이 신앙고백이요, 여러분 이것이 위대한 이유가요, 사사시대 아닙니까. 이것이 위대한 이유가,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방 여인입니다. 게다가 이 집은 떡집이 흉년이 들어서 베들레헴을 버리고 이방으로 도망 온 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룻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전적인 하나님 아닙니까? 전적인 하나님이 아닙니까?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레위인들이 타락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영적으로 지도자가 없다 하는 이 시대.
하나님께서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저 시골 구석에 지금도 룻과 같은 한 여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옛날 그 구석에서 과부 둘이, 오르바는 가 버리고, 두 과부가 손잡고 울면서 얘기한 것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듣고 계시고 성경에 기록해 두셨잖습니까. 하나님은 듣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백을 하든지 듣고 계시고, 어떤 원망을 해도 듣고 계시고, 불평을 해도 듣고 계시고. 말을 잘해야 됩니다.
말을, 신앙고백을. 룻이 이 신앙고백으로 팔자 고친 여인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어머니 따라가서 인생이 완전히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마태복음 1장 5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누구 낳았습니까? 다윗을 낳았습니다. 예수님 족보입니다. 이것이 무려, 자그마치 예수님 족보에 룻 이름을 올렸지 않습니까. 신앙고백 하나, "어머니를 붙좇았더라" 이것 하나로. 여러분 그래서 룻 같은 믿음은 정말 빛나는 믿음입니다. 환경 탓할 이유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하니까 뭐 어쩔 수 없지 뭐, 세상이 이렇게 악하니까 우리 애들도 어쩔 수 없지,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까 우리 신앙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이것은 전부 비겁한 변명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한데 룻 같은 사람을 통해서 빛나는 별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이어 가고 연결시키고 예수 그리스도, 다윗을 이 혈통에서 나게 하시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세상이 악할수록 소망을 품고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이 악하면 후보가 좀 적잖습니까. 그 후보 중에 내가 당당하게 룻처럼 될 수 있잖습니까. 그런 소망과 희망을 룻이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돈이 없다고, 남편 없다고, 가진 것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시골 구석에서 과부가 외치는 이 신앙고백도 듣고 기록해 두시고 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어 가셨습니다. 그 역사가 우리 인생에 있기 바랍니다.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해 가셨음을 봅니다. 이방인 룻이, 나오미, 오르바 함께 살았던 룻이 그곳에서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 고백,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봅니다. 사사시대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그 시대지만, 그러나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가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여, 지금 영적으로 무너진 이 시대를 탓하지 않게 하옵소서. 시대는 이렇게 악해져 가고 날이 갈수록 흉폭해지지만, 우리가 기댈 데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도 룻처럼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을 주님께서 지켜 보호하여 주시고, 약속의 땅 베들레헴, 예수님, 생명의 떡을 떠나지 않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혹시 떠났다면, 잘못되었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결단, 용기, 탕자의 용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