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베들레헴에서 / 전체녹취

룻기 특강 2 - 베들레헴에서 (룻 1:19-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룻기 2장 3절과 4절 말씀입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 2:3-4)

룻기 말씀을 우리가 지난주에 첫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룻기를 읽을 때는 그 배경을 봐야 한다고 했는데,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역, 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고 레위인들을 48개 성읍에 흩으시고, 거기에서 직분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사명과 그 지역을 버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좋은 지역으로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지역이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영적인 모든 질서가 무너진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그런 사사시대를 살아가는데 한 줄기 빛과 같은, 정말 보석 같은 한 가정,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룻이 있습니다. 그래서 룻의 일대기, 룻의 상황을 보면 '아,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탁월하고 특별한 믿음의 일꾼이 나올 수 있구나'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룻기 1장은 바로 그런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1장과 2장 초반부까지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룻이 지난 시간에 고백한 신앙고백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는데, 룻이 고백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이 고백은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신앙고백 한마디 때문에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사실 혈통상 이방인이지만,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단칼에 쳐버리고,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람을 죽여버리고, 뭐 이런 시대가 구약시대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성경은 하나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신앙고백이 바로 곧 은혜고 그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저 시골 구석에서 과부 둘이 서로 껴안고 울고 고백한 그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나님은 보시고, 이 여인을 다윗 왕가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예수님 족보에 이름을 올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이 첫 시간의 내용이었습니다.

1. 베들레헴 귀환

이제 오늘은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고 했습니다. 떡집 베들레헴을 우리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는 것은 곧 예수를 떠나는 것이고, 신앙을 버리고 떠나면 결국은 공허하고 빈 것이 되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고 고생만 하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것이 은혜 아닙니까? 돌아가겠다고 결단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그런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집니다.

1-1. 마을 사람들의 환대

베들레헴으로 나오미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룻과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이 마을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19절입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르매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여러분, 이게 어떤 느낌이세요? 그 시대 그 장소에 내가 만약 가 있다면 환영하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막 손가락질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우리가 이미 세상에 너무 많이 찌들어서 그래요. 아, 이게 손가락질한다고. 우리도 이미 '아, 나오미와 룻이 돌아오면, 아휴 그렇게 신나게 나가더니 호기롭게 나가더니 다 잃고 다 죽고 아무것도 없이 저렇게 이방 여인 하나 달고 들어오네.' 아, 그런 얘기하기 좋잖아요. 남 얘기하기 좋잖아요.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 베들레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합니다. 그래서 룻기를 교회론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로서 귀하고 진정한 교회, 공동체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근거가 어디 있느냐, 룻기 4장 14절과 17절 말씀을 보시면 이런 내용들이 나오죠.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을 이을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언제 이 여인들이 한 말입니까? 여인들은 베들레헴 여인들입니다. 나오미가 손자를 봤을 때,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때, 여인들이 이렇게 칭찬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기뻐해 준 것입니다.

17절에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이 동네 여인들이 이 아이의 이름을 함께 지어주는 이 공동체가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공동체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룻기 1장부터 4장까지 다 읽어 봐도 룻이 이방 여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오미에게 "이 여인이 이방 여인인데 왜 데리고 왔느냐, 왜 달고 왔느냐, 이거 법대로 해보자, 구약의 율법대로 적용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환대해 줍니다. 그냥 맞이해 줍니다. 나오미가 그냥 왔는데 "이가 나오미냐" 이런 느낌이죠. 정말 나오미가 돌아왔단 말이야. 정말 그렇게 고생했던 나오미가 왔단 말이야. 남편도 죽었다며, 두 아들도 세상 떠났다며, 그런데 함께 온 저 여인은 며느리라며. 정말 나오미가 왔단 말이야. 그리고 사람들이 가서 막 환영하고 기뻐하고 떠들며 함께 축하하고 환대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당시 사사시대에는 교회가 다 무너진 시대 아닙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들이 다 떠나 버렸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전부 다 명예 쫓아, 돈 쫓아 떠났죠. 그들이 두 집 살림하죠. 음란해지죠. 그래서 그들이 전부 다 떠나가고 타락하는 시대에 교회가 온전하고 정상적인 교회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이 정상적이고 빛나는 공동체를 집중해서 조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룻 한 사람의 영웅적인 얘기가 아니라 룻을 살게 해준 베들레헴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로 한번 이것을 가져와 보세요. 오늘 우리 시대,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사람들은 다 어른이 없다고 말하잖아요. 정치에도 어른이 없고, 교회도 어른이 없고, 지도자가 없는 시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지도자가 다 타락하고 다 없는 시대, 믿을 만한 사람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빛나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하나님이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다 썩어져 가도, 세상이 전부 다 타락해 가도, 그래도 빛나는 하나의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 교회를 주목하고 보시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공동체 하나도 없어도, 이 공동체 한번 보십시오. 나오미가 돌아왔는데 "이가 나오미냐"—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룻에 대해서 한마디 입 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 룻과 보아스가 결혼을 합니다. 보아스가 유력한 사람이라 그랬어요. 뒤에 가면 나오는데, '이시 기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이라고 얘기했는데, 이 사람은 '부에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보아스가 그 동네에 유력한 사람 아닙니까?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다 우러러 보고 빛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의 아내가 됐어요. 룻이. "어디서 굴러들어온 여자가, 어디서 이방 여자가, 모압 여자가 굴러 들어와서 이 땅에, 우리 동네에 가장 빛나는 '부에 강한' 보아스를 낚아 채갔다"—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단 한 사람도 없고, 이 사람을 축복하고 기뻐하고, 그 집에 아기가 태어난 것을 즐거워하고, 그 아이를 함께 길러주는 그런 공동체가 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처럼 말 많은 데가 있어요. 교회처럼 뒤통수가 막 근질근질하고, 귀가 가렵고, 내가 오늘 무슨 옷 입고 왔는지 다 알고, 우리 집 애가 오늘 뭐 시내에서 뭐 했는지 온 교회 사람들이 다 알고. 왜 그래요? 말이 많으니까. 우리도 금방 이렇게 반응하잖아요. "떠들며 이르기를"—이것을 사람들이 다 뒷담화하고 트집 잡고. 우리가 이미 다 때가 묻어서, 우리가 그런 교회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천국 같은 교회는 그렇겠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요. 베들레헴이 바로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잘 돌아온 거죠. 그런데 이 좋은 공동체를 왜 나갔느냐 그거요. 왜 나오미가, 미쳤지. 자기 말로, 이 좋은 공동체를 자기 복을 걷어차고 자기가 나간 거예요. 배고파서. 먹고 살려고.

1-2. 나오미의 정직한 고백

그런데 보세요. 이제 돌아왔으니까 한마디 귀환의 변을 한번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돌아왔으니까 한마디 해야 되잖아요. 나오미가 이렇게 얘기해요. 20절에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환영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מָרָא)라 부르라." 나오미는 '기쁨', '희락'이라는 뜻이거든요.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를 마라, 괴로움이라고 불러라. "왜냐하면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자,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게, 지금 본인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남편, 두 아들 다 세상 떠났죠. 하나의 며느리는 다시 돌아갔죠—이 고통이 자기 죄로 인함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여기를 떠나서 일어난 일인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인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 고백이요.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 그리고 21절 보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내가'에 동그라미 한번 쳐보세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세요? 흉년이었잖아요. 나갈 때. 그런데 왜 이제 와서는 풍족하게 나갔다고 말하는 걸까요? 남편도 있었죠. 그때 아들도 둘 있었잖아요. 남편도 있고 아들도 둘이 있었어요. 그게 풍족했던 거예요. 그 사람으로, 가족이 있는 것이 풍족함이지,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건데, 이제야 깨닫는 거죠.

그러면 그때 그 풍족함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냥 가족 식구들이 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게 풍족함인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동네에 흉년이 왔다고 나가지 않았을 텐데, 이 좋은 공동체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서로 같이 조금씩 아껴먹고 살 것을. 그런데 이 풍족한 상태에서 내가 나갔다. 내가 나간 것을 자기가 고백하는 거예요. 자기 죄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그랬는데 그다음,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여호와께서' 동그라미 치고. 또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또 '여호와께서' 나오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그래요.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전능자가,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징벌하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나간 것은 누가 나갔어요? 내가. 비어 오게 하시고 징벌하고 괴롭게 하시는 분은 누굽니까? 여호와가.

1-3. 자유와 책임

자,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되는 게 있습니다. 죄 짓는 것은 내 자유예요.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것은 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선택한 사람을 징벌할 책임이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 뭡니까? 동물에게는 주지 않은, 식물에게는 주지 않은, 다른 피조물에게 절대 주지 않는, 인간에게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자유입니다. 자유. 우리는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이 자유는 양날의 검입니다. 잘 사용하면 동물과 차별화될 수 있는 인간만의 아주 탁월함이 있는데, 그런데 자유를 만용으로 바꿔 버리면, 자유를 남용해 버리면, 전능자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항상 분별력 있게 사용해야 됩니다.

자, 보세요.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 망해 버린 대표적인 사람이 아담과 하와 아닙니까? 선악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뱀이 와서 유혹합니다. 이거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거다. 분별해야 되죠. 따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했어요. 뱀은 먹으라고 해요. 분별해야 되잖아요. 그것을 분별해야 됩니다. 분별 못 하고 먹은 순간 하나님이 징벌하시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자, 흉년이 왔습니다. 베들레헴 은혜의 집, 떡집에서 나갈 수 있는 자유도 자기 선택이고요. 가난하지만 거기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의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겁니다. 머무른 영광도 내가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아주 분별력 있게 선택해야 됩니다. 덥썩 잡아버리면 안 됩니다. 말이 앞서면 안 됩니다.

사탄은 얼마나 말꼬리를 잘 잡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얘기할 때 약속 잘하는 분들 있죠. 말이 앞서는 분들. 말이 앞서면 그 말의 꼬리가 잡힙니다. 그러면 나중에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말이 앞서지 말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신중하고, 행동도 앞서지 말고 분별하고 신중하고. 말하는 것도 내 자유지만 그 말이 나중에 주워담을 수 없는 재난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옵니다. 발걸음이 앞서면 그것이 주워담을 수 없는 재난으로 나에게 큰 쓰나미처럼 다가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해결할 수 없잖아요.

자, 또 한 가지 이 본문에서 20절, 21절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나오미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나오미, 굉장히 정직하죠. 왜 정직하냐? "나 지금 괴로운 상태야. 나는 지금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야. 내가 나갔어." 자, 지금 보세요. 남편 죽었어요. 두 아들 죽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반대로 증언해 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야, 나는 여기 있으려 그랬지. 너희들하고 같이. 영감이 죽은 엘리멜렉이 저 모압에 가면은 먹을 것도 있고 살 것도 있고 참 많은 게 있다 그래 가지고 나를 꼬드겨 가지고 가더니 벌 받아서 죽었잖아"—죽고 말이 없는데 남편한테 뒤집어 씌운들 그것을 누가 압니까? 그렇지 않아요? 남편한테 뒤집어 씌우지 않고, 아들 원망도 하지 않고. "여기서 먹고 살 게 없어서 두 아들 밥이라도 먹이려고 모압 땅에 가면 풍족하다 하니까 그것 때문에 갔는데 결국 걔들이 거기서 죽었다"—그런데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아요. 그냥 내가 나갔다고. 내가. 이것이 정직한 겁니다. 정직한 것.

그리고 이것이 룻기에 보면 20절, 21절이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시로. 이것을 '룻기의 애가(哀歌)'라고 부르는데, '나오미의 애가' 슬픈 노래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전능자가. 너무 정직하잖아요.

그래서 룻기를 어떤 학자는 그렇게 말했어요. "정직한 나오미와 헌신적인 룻의 절묘한 결합이다"라고 얘기했어요. 룻은 헌신적이고, 나오미는 정직해요. 정직하니까 돌아오죠. 자기 고백 정직하게 하잖아요.

저는 이것을 통해서,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게 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상황에 대해서 정직해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정치인들은 자주 속입니다. 많이 속여요. 학력도 속이고 과거의 행적도 속이고 자꾸 숨기고 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속이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정직해야 됩니다.

자기 감정에 있어서도 솔직해야 됩니다. 슬프잖아요. 지금 괴롭잖아요. 여기 돌아오니까 남편 생각나죠. 자식들 생각나죠. 그래서 괴롭다고 말하는 거예요. 자,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프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내 가족이 돌아가셨습니다. 슬프죠. 그런데 "아, 저는 천국 소망을 믿기 때문에 하나도 슬프지 않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왜 안 슬퍼요? 슬퍼해야 됩니다. 그것을 슬퍼해야 그래야 그 슬픔이 진짜 위로가 되고 그다음 회복이 됩니다. 슬퍼하고 울고 함께 탄식하고, 그 슬픔을 공동체가 함께 안아 주고 같이 손잡아 주고, 그래야 됩니다.

아니, 맞으면 아프죠. 아프다고 해야 되죠. 돈을 잃고 망하면 슬프죠. 억울하죠. 원통하죠. 다윗이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슬프니까.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슬퍼하고 애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니까.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거기 쫓겨난 아버지지만 아들이 죽었는데 슬프지 않은 아버지가 있습니까?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감정 숨기지 말고, 감정을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억누르지 말고, 그것을 슬프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강한 겁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는 환대하고 안아 주는 거예요. 위로해 주고. "저 사람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 적어 가지고 저것도 못 견디고"—입장 바꿔놔 보세요. 그게 견뎌지는 거예요? 병원 가서 암 선고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기쁜 나 초나, 나 괜찮아. 나 천국 소망 믿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우는 것이 정상이에요. 큰 병에 걸리고 아프면, 그러면 공동체는 그분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고. 지금 이 공동체가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그거거든요.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그 사람들이 "야, 저거 집 나갔다 오더니 믿음 다 잃었네"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아무도. 아무도. 인간의 감정에 솔직할 때 그것을 감싸 주고 위로하고 환대해 주는 공동체가 이 좋은 공동체입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 좋은 겁니다.

2. 룻의 이삭 줍기

2-1. 돌아오는 용기

자, 돌아오는 용기가 중요하다 그랬죠. 우리 지난 시간에 살펴 봤는데요. 누가복음 15장 17절에서 20절 보면,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이것이 회개하는 거죠, 그죠. 스스로 돌이켜. 탕자 이야기입니다. 18절에 "내가 일어나"—일어났다 그랬어요. 내가 일어나. 그리고 20절 보니까 "이에 일어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다 공부한 내용인데, 탕자가,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왜 기뻐했죠? 살진 송아지 잡고 제일 좋은 옷 입히고 가락지 끼우고 신발 신기고 잔치 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사탄의 억누름을 극복했기 때문에. 사탄이 계속 참소하잖아요. 너 돌아가 봐야 안 돼.

에베소서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나옵니다. 거기에 의의 호심경이라는 게 있고 구원의 투구라는 게 있습니다. 호심경이 뭡니까? 심장. 심장을 보호하는 장치. 방패 거울이라는 뜻이에요. 의의 호심경. 내 심장이 의로움으로 보호받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신갑주. 왜 심장이 하나님의 의로 보호받아야 됩니까? 내 의가 아닙니다. 내 의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에 의로운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의로울 수 없고 의롭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의로운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아래 있을 때 그때 우리가 의로운 것이지, 내가 어떻게 의롭겠습니까? 그래서 돌아가면 사탄이 계속 속삭이죠. 너 의롭지 않잖아. 너 죄 지었잖아. 아버지 돈 갖고 와 가지고 사고 쳤잖아. 너 돌아가면 반드시 두들겨 맞는다. 쫓겨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내가 마음을 무장하고 있으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용기 내서 갈 수 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못 가게 막는 것이 사탄의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어떤 죄를 저질렀던 간에 돌아가면 맞아 주신다는 용기, 그 확신이 의의 호심경입니다. 구원의 투구는 뭡니까? 사람들은 항상 그래요. 이렇게 사고치고 나면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헷갈려요. 내가 구원 못 받아서 이런 짓을 하는구나. 그런데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그리고 나서 죄 짓고 다시 돌아가면 하나님이 회개한 자를 받아 주신다는 믿음, 그것을 투구 쓰라는 얘기예요. 헷갈리지 말고. 돌아갈 용기가 있다는 것은 나는 아직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돌이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나오미는 그런 용기를 낸 사람이니까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2-2. 보리추수 때 귀환

자, 자 이제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시기가 언제인가.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보리추수. 유대인들이 보리추수 시작할 때는 4월 말입니다. 태양력으로 지금 우리 달력으로 4월 말에 시작합니다. 그런데 보리추수 끝나고 이어서 밀 추수까지 가거든요. 보리추수와 밀 추수가 한 7주 정도 진행됩니다. 그래서 4월 말에 시작하면 6월 초중까지 보리와 밀 추수가 쭉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뭘까요? 보리추수 시작할 때 돌아왔다.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때 왔다. 이런 얘기죠. 여기에 이제 먹을거리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베들레헴에. 그때 돌아온 겁니다. 좋은 시기에 온 거죠.

나갈 때는 어땠습니까? 룻기 1장 1절 보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흉년이어서 나간 거예요. 흉년이.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까, 나중에 나오미가 생각하니까, 남편 있고 두 아들 있을 때 그때가 풍족했던 때라고 고백하죠. 그죠? 그래서 우리도 그런 거예요. 집에 돈이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이 건강하고 가족들이 다 함께 살면 그것이 행복하고 그것이 풍족한 거예요. 그거는 뭐 얼마나 돈 벌어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래요? 가족들 건강하고 그냥 적당하게 먹고 살고 있으면 그것이 풍족한 거예요. 그 풍족함을 사탄이 자꾸 속삭이는 풍족함에 속으면 안 됩니다. 가족 건강하고 같이 행복하면 그것이 풍족한 겁니다.

2-3. 보아스의 소개

자, 이제 2장으로 갑니다. 보아스가 나오는데요. 성경은 보아스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2장 1절에 "나오미의 남편"—죽은 남편이지—"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라." 유력하다. 유력한 자. 여러분, 유력한 자를 이 성경이 어떻게 히브리어로 쓰고 있느냐 하면 '기보르 하일(גִּבּוֹר חַיִל)'이라 그랬어요. 기보르 하일. 발음도 좀 있어 보이죠, 그죠? 기보르 하일 이러니까. 그런데 뜻이 더 참 마음에 들어요. '부에 강한 사람.' 이런 사람 만나 보셨습니까? 아, 부에 강한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말하면 아주 부자란 말이죠. 그런데 표현이 참 멋지죠. 부에 강하다. 이 '기보르 하일', 부에 강한 사람, 이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룻기 2장 2절,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이제 시어머니한테 허락받는 겁니다—"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랬습니다."

아, "내가"하는 말이 중요해요.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이삭을 주워 오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룻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요? 왜?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돌아오기는 돌아왔는데 아무도 지금 거기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이 없으니까.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먹고 살려고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다가. 그런데 "내가 가겠다" 그랬어요. 내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불확실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라 그랬어요. 어느 밭에 갈지도 몰라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 사람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자 갑시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형편이 너무너무 안 좋으니까 남의 집에 가서,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오겠다는 거거든요. 그 얘기예요. 그런데 룻이 정말 대단한 게 불확실하잖아요. 확실하지도 않은데 일단 나가서 시어머니 공양하려고 나가는 것, 이것이 너무 중요하죠.

뭔가 자기가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뭔가를. 하나님의 역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그것을 구별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해야만 되는 일도 있습니다. 내 형편과 상황이 이래서 내 자존심 다 꺾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해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건너뛰고, 그 작은 일 건너뛰고 큰일이 자기에게 주어지기를 바라지만, 결정해야 될 때가 오는데요. 내가 어머니를 따르고 어머니를 섬기겠다 했으면 지금 이것이 그 첫 번째 자리예요. 그 먹고 사는 문제 그것부터 해결해야 되잖아요. 아주 기초적인 문제.

2-4. 이삭 줍기의 율법

그런데 이삭을 줍겠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9절과 10절을 보면 율법이 이렇게 되어 있죠. "너희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밭이 모나다고 하면 귀퉁이 모퉁이 얼마 부분을 남겨두라는 얘기예요. 이삭도 다 줍지 말라 그랬어요—"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저는 이 말씀 보면서 하나님이 참 애매하시며 참 불친절하다, 정확하지 않으시다, 좀 정확한 사람이 보면 숨 넘어가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요. 내 밭에 귀퉁이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마라 그랬잖아요.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마라. 그러면 얼마를 남겨두라는 말입니까? 얼마를 남겨둬야 돼요? 얼마? 그런 생각 들지 않으세요?

자, 인심이 좋고 넉넉한 사람은 한 10분의 1쯤 남겨 둘 거고, 인심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요만큼 남겨 둘 거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이것이 진짜 문제가 돼요. 문제가 돼 가지고 랍비들 그리 토론이 붙습니다. 얼마를 남겨둬야 되냐 도대체 이것이. 그래서 자기들끼리 기준을 정해요. 60분의 1. 60분의 1을 왜 그런 기준을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60분의 1의 기준을 정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그 기준을 정한 사람들의 마음을 한번 보세요. 남겨두고 싶다는 말입니까? 두기 싫다는 말입니까? 남겨두기 싫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남겨두기 싫으니까 이것을 얼마의 기준을 정해야 돼. 옆집을 보니까 옆집은 10분의 1인데, 나는 10분의 1까지 도저히 남기기 싫어요. 아까워 죽을 것 같아. 저 사람은 돈도 많고, 저 사람은 마음도 넓고, 저 사람은 별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 저렇게 하지만, 나는 한 푼도 남기기 싫어. 그런데 저 사람도 좀 더 줄이고 나는 조금 더 쓰고, 기준을 정해 달라. 그것이 빗발치듯 사람들이 랍비에게 쫓아가니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회의해서 60분의 1을 정한 거예요.

자, 오늘 이 시대 목사에게 많이 묻는 십일조 질문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월급쟁이입니다. 세전으로 십일조 합니까? 세후로 합니까?" 믿음대로 하면 되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죠. 그게 뭐 세전 세후가. 하기 싫어서 그런 거 묻는 거죠. 하기 싫어서. 사업하시는 분들, 장사하시는 분들, "순수익에서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아,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돼요. 믿음대로. 믿음대로.

하기 싫어서 묻는 거 아니에요? 그 본질, 그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든 물질은 다 내 겁니까? 하나님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십일조 드리고 뭐 헌금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전부 다 신앙고백이잖아요. 신앙고백을 왜 기준을 정합니까? 왜 그것이 세전이면 어떻고 세후면 어떻고. 내 믿음이 어릴 때는 어린 대로,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한 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보실 때 내가 이 믿음대로 한번 해 보리라 하는 결단과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대로 하는 거지, 그것을 가지고 기준을 정하고 60분의 1 귀퉁이를 남기니 많이—이것 자체가 너무 율법 자체를 웃기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몰라서요? 다 압니다. 얼마나 네가 이 말씀의 진심이냐? 밭 모퉁이를 남겨 두라 했는데 너는 얼마의 모퉁이를 남겨 두는지, 너의 믿음의 분량이 어떤지, 하나님께서 거류민과 가난한 자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사랑의 폭과 넓이가 어떤지 하나님이 그것을 알아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60분의 1 기준을 정하고, "하 람, 내리고", "나는 하기 싫으니까 그 기준 정하고"—이게 웃기는 얘기예요. 이게.

그 구약의 율법에 따라서 지금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는 이 율법이 살아 있는 거예요. 자, 사사시대에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다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있어도 그 율법이 사문화되었겠죠. 그 율법이 다 죽은 법. 여기 베들레헴은 이 율법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룻이 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으면—누군가가 농사 짓고 지금 보리 추수하는 때인데 밭 모퉁이를 다 베지 않고 그것을 남겨두면, 이삭 줍다가 다 흘리고 가면, 그것을 내가 주워다가 시어머니하고 함께 먹고 살겠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면 나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복을 받고, 사람들도 다 같이 사는 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십일조 규정을 얘기한 게 있어요. 신명기 14장 28절, 29절.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3년마다 십일조를 하는 겁니다. 이제 3년 십일조를 3년 기준으로 하는데—"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십일조는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쓰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쓰임에 근거해서 교회가 나눔 창고 사역을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쓰임 가운데 객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이 분리되고 쓰임받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거기에서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서 60분의 1 할 건지 말 건지 이런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차한 얘기입니다.

잠언 19장 17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하나님이 돈 꿀 일 있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 창조주이시고 다 갖고 계신 분이 우리한테 돈 빌리러 오실 일 있습니까? 딱 한 가지, 가난한 자를 선대하고 구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돈 꿔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 일이거든요. 그 하나님 일을 내가 하잖아요. 그 하나님 일을 우리 교회가 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좋아하는 따따불 이자 쳐 가지고 갚아 주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손이 오그라 들어 가지고 그것을 베풀지 않고 그것을 나누지 않고 60분의 1의 기준 정하고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넌센스에요. 베풀고 나누고 십일조 그렇게 쓰고, 그것이 교회잖아요. 그것이 이 베들레헴 공동체가 떡집다운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살죠. 거기 가서.

3. 작은 일에 충성

자, 그런데 제가 여기 뜬금없이 사무엘상 말씀을 적어뒀어요. 일단 이것부터 한번 봅시다. 사무엘상 16장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자,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그죠?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으면 뭐가 된 겁니까? 왕. 왕이 된 거죠. 구약의 율법에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는 기름 부어서 세우잖아요.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어. 그러면 왕이 된 거예요. 그죠. 사무엘이 와서 기름 부었으니 왕이죠. 끝난 거죠.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첫 번째 한 일, 왕의 일에 첫 스타트 일이 뭔지 보세요. 사무엘상 16장 19절에서 23절을 보면, 그중에 21절 한번 볼게요.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서니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왕으로 기름부음 받고 처음 한 일이요. 사울에게 가서 무기 드는 사람이 된 거예요. 내가 당당히 왕으로 기름부어 받은 사람인데 저 미친 사울의 무기 드는 사람이 되다니.

23절에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현실 왕이 있다고요. 사울왕은, 사울이 현실의 왕이에요. 그런데 나는 기름부음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신 왕이 됐다고요.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처음 한 일이 사울의 무기 드는 사람이 되고, 사울에게 악령이 내렸는데 그 수금 타서 귀신 쫓아주는 일을 하고, 그 일을 했어요.

여러분, 이것이 얘기하는 바가 뭡니까? 하나님이 지금 다윗을 훈련시키는 거잖아요. 진짜 왕으로. 진짜 왕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킵니다. 이 굴욕을 네가 감당할 수 있느냐? 무기 드는 자. 너는 왕이지만 현실 왕의 무기를 드는 자로 여기서 설 수 있느냐? 이것을 달아보는 과정이에요. 작은 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일. 무기 들고 다니는 사람, 악기 연주하는 사람, 그것부터 시켜 놓은 거예요.

자, 마태복음 25장은 달란트 이야기예요. 마태복음 25장 21절, 23절, 자 보세요. 21절이랑 23절이에요. 눈으로 한번 쭉 보세요. 한 자라도 틀린 게 있는가? 한 자라도 틀린 게 있습니까? 단 한 자라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확인해 볼까요?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확인됐죠. 자, 21절은 다섯 달란트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이고요. 23절은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 훨씬 잘했죠? "예"하고 대답하면 혼내려고 그랬는데.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하나님 보실 때는 이것이 작은 일인 거예요. 작은 일에 충성한 거예요. 우리는 내가 남들보다 조금 잘났으면, 조금 더 능력이 있으면, 조금 더 실력이 있고 남들에게 칭찬받으면 우쭐거리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다 그런데, 그 일에 충성한 자,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중요한 거예요. 다윗이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잖아요.

이 얘기를 왜 드리느냐? 룻이요. 위대한 결단을 한 거 아닙니까? 모압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늙은 시어머니 따라서 왔어요. 생면부지 낯선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결단하고 왔습니다. 큰 은혜 받고 하나님께 신앙고백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래도 조그만 집이라도 좀 있고 밭뙈기도 하나 있고 그래서 거기서 남의 집에 이삭 주우러는 가지 않고 시어머니하고 알콩달콩 둘이 밥이라도 해 먹을 수 있는 뭔가가 좀 있어야지, 이건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남의 집에 이삭 주우러 가야 돼요. 그것을, 그것부터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부터.

룻이 보니까 기가 막히고 화가 나고. 내가 이러려고 여기 왔나? 어머니, 왜 이런 얘기 안 하셨어요? 왜 이런 것을 나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얘기 일절 없죠. "내가 밭에 가서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은혜를 입을지 받을지 모르잖아요. 지금껏 나오미가 있어서 괜찮았는데 나오미 없이 혼자 남의 밭에 가면 성추행을 당할지, 이방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지, 남 모르는 따돌림을 당할지 알 수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이삭 주워 오겠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 신앙은 바로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잖아요. 은혜 받았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하나님 만나고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면 공중에 붕 뜬 것 같아요. 그런데 그다음 날 눈 뜨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열 가지 재앙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았을 겁니다. 야, 저 콧대 높은 이집트 왕 바로가 굴복하는 거야. 자기 아들이 죽으니까. 홍해를 하나님이 가르셨어요. 마른 땅 같이 건너고 이집트 군대가 다 빠져 죽었어요. 얼마나 황홀합니까?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다음부터 현실입니다. 광야를 제 발로 걸어가야 돼요. 자기 발로. 하나님이 구름 딱 준비해 놓아서 1조 이 구름, 2조 이 구름 태워 가지고—딱 그런 거 없어요.

신앙은 현실입니다. 신앙은 치열한 현실이고, 남의 밭에 가서 거기에서 하나님 은혜를 우리가 절감하고 살아야 되고, 은혜 받아도 그 은혜를 내 삶의 밭에서 열심히 씨뿌리고 이삭 줍고 살아내는 겁니다. 내가 은혜 받았다고 마법이 일어나는 거 아니고 갑자기 마술이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떠난 신앙은 그것은 가짜입니다. 이단 사이비들, 기도원에 모아놓고 흰옷 입고 춤추면서 예수님 재림하실 거 기다리죠. 그것이 전부 가짜 아닙니까? 증명됐잖아요.

우리 현실에서 밭에 가서 일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살아내는 겁니다.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악한 왕 사울에게 무기 들고 살고 수금 타고 살고.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를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잖아요. 여러분, 이 원리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면 신앙은 항상 뜬구름 잡는 소리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웃긴 신앙인지 아세요? 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다 가짜입니다.

4. 우연과 마침의 섭리

이제 룻이 도착했어요. 3절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누군가를 따라갔죠. 인력시장 이렇게 나가 보면 "오세요"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룻도 이제 베는 자를 따라갔어요.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어요. 그런데 "우연히"—동그라미 쳐보세요—"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갔더니 아, '이시 기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 부에 강한 사람. 아니, 이 사람 밭에, 우연히 갔더니.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을 것 같은데. 갔더니 우연히 갔더니예요.

4절에 "마침"—또 마침. '마침' 동그라미 치세요. 이 보아스는 밭 주인인데, 이시 기보르 하일한, 부에 강한 사람이 자기 밭에 왜 옵니까? 거기 올 일이 없잖아요. 종들이 다 일하지. 거기 왜 와요? 그런데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왔어요. 밭이 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베들레헴에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마침 오는 날이어서 그때 마침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우연'과 '마침'이라는 말이 여기 반복돼서 나오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까? 우연히 가다 보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고, 어, 어쩌다 보니 다 때가 잘 맞아서 운이 좋아서 보아스가 거기에 시찰하러 온 겁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고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제가 그다음 페이지 보면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4절을 적어 뒀는데요. 자, 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호숫가에—"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배 두 척이 있다. 이것을 보셔야 돼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 갈릴리 바다, 여기 와 보니까 배 두 척이 있거든요. 두 개가 있었습니다. 배 두 척 잘 보세요.

3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둘 중에 예수님께서 한 배를 택해서 올라간 거예요. 그런데 그 배가 하필 누구의 배였어요?—"그 배는 시몬의 배라."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입니까? 어쩌다 보니 베드로의 배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섭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택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자, 둘 중에 그 배에 오른 거예요. 그 배에.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고기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이 어부가 그물을 씻고 이제 집에 들어가서 자려고, 누워서 자려고 하는데,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예수라는 작자가 나타나 가지고 자기 배에 올라타고 거기서 설교하고 있네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몰려들어 가지고, 이 설교를 내가 거절하고 중단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두 척이 있었는데 재수 없기 그것이 내 배예요. 내 친구 배 올라갔으면 나는 그냥 집에 가서 두 다리 뻗고 자면 되는데 내 배에 오르니까 이 사람이 설교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거기 앉아서 들어야 되는 거예요. 용기가 좀 있으면 멱살 잡고 끌어 내리겠는데요. 그럴 용기도 없는 거예요. 못 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래서 속이 막 부글부글 타고 화가 나고.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전적인 계획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이었어요. 그 선택이 베드로를 시몬을 베드로로 만들었고, 그 선택이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만든 거예요.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방향을 주시잖아요.

여러분, 은혜를 받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마침도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입니다. 섭리입니다. 왜 내 친구가 아니라 내가 여기 와 있습니까? 어릴 때 우리 마을에서 자라났던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내가 은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됐습니까? 우연처럼 보이지만, 내 인생을 돌아보면 우연처럼 보이고 이것은 정말 그냥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배 두 척 가운데 하나의 배 우연처럼 올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 가운데 있었던 사실. 이것을 고백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기억하셔야 돼요. 우연과 마침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은혜가 아닙니다. 우연과 마침은 룻이 "내가 밭에 가서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이삭을 주어 오겠습니다" 갔기 때문에 은혜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것이 갔기 때문에. 자기 처지 원망하고 비관하고 누워서 시어머니 욕하고 "나 다시 모압으로 돌아갈래요" 그러면 우연도 없고 마침도 없고 이시 기보르 하일을 만나지도 못하고 끝난 거예요. 그냥. 그런데 내가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내가 할 일을 작은 일에 충성을 하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순간마다 보물을 숨겨 두시는 겁니다.

보물찾기. 보물찾기에 가장 비교육적인 것은 못 찾은 애한테 선생님이 가만히 주는 거예요. 그것이 진짜 비교육적인 겁니다. 안 줘야 돼요. 열심히 찾아야지. 그것을 왜 줍니까? 안 줘야 돼요. 아, 다음부터는 내가 찾아야 되겠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지. 다음 주에 한번 또 하면 되지. 찾아야 돼요. 자기가 심하고 열심히 할 때 우연도 숨겨진 보물처럼 다가오고 은혜도 나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다니엘서 1장 8절과 9절 보면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죠. 왕의 진미와 포도주 먹고 마시라고 하죠. 자기는 못할 것 같아요. 도저히 우상에게 바친 음식 못 먹어요. 신앙 양심이 허락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환관장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어떻게 해요? "아유, 하나님, 이것 그냥 지나가게 해 주세요. 갑자기 환관장이 미쳐서 이것 먹지 말라고 하게 해 주세요. 갑자기 전쟁 나게 해 주세요." 뭐 이런 기도하잖아요. 사람들, 학생들이 보통 그래요. 큰 시험 앞두고 "하나님, 갑자기 전쟁 나서 내일 시험 안 치게 해 주세요." 되먹지 않은 기도한다고 막 제가 그랬는데. 그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뜻을 정하고 입을 열어서 말해야 돼요.

그러면 9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그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나는 동역하는 겁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은 우연과 필연이라는 선물을 숨겨 두셔서 우리가 그것을 찾게 하고. 이것이 아름다운 동역인데, 내가 시동 걸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줍니까? 그냥 들어누워 있는데.

그래서 내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이삭을 주워야 됩니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그 자리로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줍니다. 룻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덧입기 원해서 이 자리에 나온 주의 백성들, 아름다운 공동체 베들레헴 공동체가 우리 교회 공동체 되기를 원합니다. 먼 길을 떠났다가 다 잃고 텅 빈 손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환대하고 축복했던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환대하고 사랑하고 끌어안아 주는 폭넓고 마음 넓은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까지 그곳에 율법이 살아 있어서 밭 귀퉁이를 남겨두고 이삭을 버려두고 가난한 자가 줍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 놀라운 공동체가 우리 교회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도 인색함을 떨치게 하시고, 편 손을 가지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해서 하나님께 꾸어주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믿음은 현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이 믿음의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 받은 자가 살아가야 할 광야 같은 현실에 우리가 열심히 이삭을 줍고 씨를 뿌리고 광야를 걸어가려 하오니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우연히, 마침에 은혜가 있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총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