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룻과 보아스 / 전체녹취

룻기 특강 3 - 룻과 보아스 (룻 2:5-23)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 2:12)

지난 시간에 우리가 룻기 두 번째 공부를 했습니다. 룻기 말씀은 한 이름 모를 모압 여인 이야기인데,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이 여인이 어마어마하구나, 이 여인이 보통이 아니구나, 엄청나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인생에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그곳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고,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왔습니다. 이것을 과연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우연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는 것이 입증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고백해야 그게 믿음이 되는 것이고, 우리 속에 있는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로 바꾸고 발견할 수 있어야 그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신앙의 성장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오늘 이야기는 보아스와 룻이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보아스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좀 설레지 않습니까?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보는 사람이 두근거립니다. 우리는 결말을 다 아는데도 굉장히 설렙니다.

1-1. 특별한 첫인상

5절을 보시면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여러분 성경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셔야 됩니다. 보아스가 엄청난 부자이지 않습니까? 넓은 밭을 다 가지고 있고 엄청난 부자인데, 그곳에 일하는 사람이 한둘이었을까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일하는데, 그런데 왜 유독 룻 이야기만 묻겠습니까? 룻이 특별하고 탁월한 미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여인에 대해서만 질문을 할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질문표를 가지고 그다음을 봐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그 뒤에 답이 나옵니다. 6절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 아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라고 사환이 말했습니다.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모압'이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사환의 입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마음속에는 이 룻을 어떻게 보고 있는 것입니까? '이방 여인이다, 이방 여인이다'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입니다" 이렇게 딱 규정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1-2. 룻의 저돌적 행동

자 그런데 이제 그다음이 재미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그의 말이"라 했는데, 누구의 말입니까? 룻이 이 사환에게 와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했습니다. 자, 우리가 이제 이것을 좀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수하고 밀 수확하는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자세히 보시면 베는 자가 따로 있고 묶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느낌이 딱 오시죠. 베는 자는 주로 누굴까요? 남자들입니다. 저는 농사 안 지어봐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베는 자들입니다. 앞에 가면서 남자들이 보리와 밀을 쭉 베고 지나가면, 그다음에 소녀들이 뒤따라가면서 그 단을 묶습니다. 옮기기 좋은 크기로 한 단 한 단 단을 묶습니다. 그러면 이 곡식은 베는 자가 따로 있고 묶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룻은 베는 자로 와 있습니까? 묶는 자로 여기에 와 있습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삭 줍는 자로 와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베는 자도 아니고 묶는 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은 언제 줍습니까? 벨 때입니까? 벨 때 주워 가면 됩니까? 안 됩니다. 쫓겨나지요. 자, 그리고 묶고 있는데 이삭을, 묶고 있는데 이삭을 주워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두들겨 맞겠지요, 이제 혼나겠지요. 자, 그렇다면 베고 묶고 단을 이렇게 쌓아 놓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나중에 타작 마당에서 털려고 나르면 그러면 이삭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삭이 떨어지고, 저 귀퉁이에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아직까지 베지 않고 남겨 놓은 귀퉁이, 거기에 이제 이삭 줍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대담하게도 이런 부탁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번 더 "나로 베는 자를 따라" 즉 앞에 남자들을 따라서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들이 베고 있는데 뒤에 따라가면서 여자들이 단을 묶는데, 그 단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 달라?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사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신 나간 여자가 여기 와 가지고, 혼을 내 가지고 쫓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그다음에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다"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아스 눈에 보니까, 베는 자 있고 묶는 자 있는데 한 여인이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자루 하나 들고 그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막 주워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띌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 소녀가 누구냐?" 처음부터 무슨 짜고 치는 것처럼 그게 아니라 이 여인이 좀 독특하고 특별한 행동을 하니까 그게 눈에 띈 것입니다.

2. 베들레헴 공동체의 품성

2-1. 은혜가 먼저인 교회

자, 그렇다면 이 공동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베들레헴 공동체, 지난 시간에도 공부했지요. 베들레헴 공동체가 어떤 곳입니까? 굉장히 품이 넓은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수용해 주는 것입니다. "하라고, 그렇게 해보라고." 왜 그렇게 허락해 줬을까요? 다 아니까, 형편을 알고 처지를 알고, 이제 모압 지방에서 와서 뭣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또 절박한 것을 아니까, 이 여인의 사정을 아니까요. 시어머니 봉양해야 되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집에 남자들 다 죽고, 되레 이삭 줍는 사람들하고 같은 선상에서 같이 줄 서 가지고 하면 그것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양식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베들레헴 공동체가 이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공부했을 때 베들레헴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 같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 가장 먼저 뭘 배웁니까? 교회 오면 우리 초신자들이 교회 오면 뭘 배울 것 같습니까?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배웁니다. "이것 교회 가면 그런 것 하면 안 돼." 그리고 또 해야 되는 것도 배웁니다. 해야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해야 되는 것 중에 제1번이 뭘까요? 헌금하라고 가르칩니다. 헌금, 일단은 빳빳한 새돈 준비해 가지고 봉투에 담아 가지고 바구니가 돌면 부끄럽지 않게 그냥 지나치면 안 되니까 거기에 넣든지 아니면 들어올 때 헌금함에 넣든지, 그리고 나야 어깨 펴고 밥 먹을 수 있다. 뭐 이제 이런 것을 배웁니다. 해야 되는 것.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것도 배웁니다.

그런데 은혜는 언제 배웁니까? 하나님은 언제 만나고, 은혜는 언제 배우고, 예수님은 언제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언제 느끼고?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배우고 해야 되는 것부터 배우면 그게 학교지 교회입니까? 학교입니다. 학교 가면은 선생님에게는 이렇게 하고 친구하고는 이렇게 하고. 그런데 교회는 학교가 아니고 사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가서 신앙 공동체에 갔는데 은혜는 하나도 못 배우고 말씀은 하나도 못 듣고, "아 오늘 내가 혹시 실수한 것 없나, 혹시 오늘 내가 잘못한 것 없나" 이것만 생각하고 죄책감과 자책감 다 가지고 그렇게 평생 사는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교회입니까?

이 베들레헴 교회 공동체는 그런 데가 아니었습니다. 좀 규정에 어긋나고 엉뚱해요, 이 여자가. 그것 남의 집 추수 망치는 것인데, 그런데 허락해 줬습니다. "하라고, 그냥." 그랬더니 그것도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주워요. 열심히 열심히.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얼마나 무리했는지, 그때 내가 뭘 얼마나 몰랐는지, 아 이게 은혜였고 나를 용납해 줬구나 이 공동체가' 그것 깨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조금 눈감아주는 것도 필요하고, 이해해 주는 것도 필요하고, 별난 사람 튀는 사람 독특한 사람 희한한 사람 이상한 사람, 그런데 그분에게 은혜가 먼저 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게 순서입니다. 그래서 가르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2-2. 열심히 하는 초신자

또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될 것은 룻을 보세요. 얼마나 저돌적입니까? 시어머니 봉양해야 되는데 보통 해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것 주워도 되고 안 주워도 되고, 남들이 가 가지고 똑같이 같은 선상에 서서 가지고 점잖게 점잔 빼고 뒤에 앉아 가지고, 그냥 하라고 할 때만 땅땅 해 가지고 되겠습니까? "나는 이것 처음 해 보는데." 그러니까 그냥 가서 해 보는 것입니다. 부딪쳐 보는 것입니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그냥 가서 부탁해 보는 것입니다.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은혜 받으려면요. 뜻이 되고 은혜를 구하고 사람도 만나고, 여기에도 들어가 보고 저기에도 봉사도 해보고, 은혜가 있다는 곳에 가 보기도 하고, 나랑 맞네 안 맞네 이런 것 따지기 전에 뭐라도 한번 해 보고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야 룻은 베들레헴 교회 초신자, 그런데 초신자가 열심을 내고, 교회는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이 초신자는 먹고 살려고,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을 내고, 이게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둘 중에 하나라도 안 되면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려고 열심도 내야 되고, 또 열심내는 사람을 이뻐해 줄 수도 있어야 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따위 소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그래 너 열심히 잘한다, 열심히 해라" 그렇게 자꾸 격려하고 가르쳐 주고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서 보통의 사람들로 하나님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제 여기서 또 아침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한 성실함도 배웁니다.

3. 보아스의 환대

3-1. 보호와 돌봄

이제 보아스가 말합니다. 8절에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베는 자들은 소년들이고, 묶는 자들은 소녀들 아닙니까? "함께 있어라. 다른 데 가면 이것 허락 잘 안 해 주니까 우리 교회 있으라고. 그냥 여기서 너 은혜 받도록 내가 다 열어 줄 테니 있으라고. 여기서 하라고."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그 소년들은 누굽니까? 베는 자들. 이제 이해가 잘 되시죠.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런 일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옛날에 그 넓은 들판에서 이런 일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건들지 마라" 절대 하고 주인이 주의를 준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이것 참 안 되거든요. 사실 다 먹으라 하고 마시라고 갖다 놔도 "내가 염치가 있지" 그것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물을 마시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그냥 재미로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될 게 있는데, 이 물이 어디에서 길어온 물일까요? 지금 이 사람들이 온 곳이 베들레헴 아닙니까? 이 밭은 베들레헴 근교에 있는 밭입니다. 거기서 추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물은 소년들이 베들레헴 성 내에서 길어온 물입니다. 기억나십니까? 다윗이 베들레헴 성 안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 했다는 것 기억나세요? 다윗 고향이 어딥니까? 베들레헴입니다. 다윗 고향이 거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딥니까?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룻이 베들레헴에서 이 우물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3장 15절, 16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전쟁하다 보니까 그 물이 너무너무 마시고 싶은 것이지요. "세 용사가" 다윗의 측근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용사의 피다, 이것 내가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이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이 물을 나에게 왔구나.' 다윗이 그토록 마시고 싶어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 다윗이 어린 시절 먹고 마셨던 그 물을 그의 먼 선대에는 룻이 마십니다. 참 신비롭고 놀랍지요. 이런 일이 성경에서 이렇게 이렇게 연결된다는 사실도 알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3-2. 호의의 근거

그다음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니까 룻이 말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나는 이방 여인입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여인입니다. 모압 여인입니다. 저 사환이 나에게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처럼 나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이게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보아스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11절에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보아스가 이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소문이 보아스에게 다 난 것이지요. 여러분, 이 소문 누가 냈을까요? 시어머니에게 한 일, 오르바는 돌아갔는데 룻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붙들더라. "나로 어머니를 떠나라 떠나라 말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시어머니 나오미하고 둘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문 누가 낸 것입니까? 시어머니가 낸 것이지요. 시어머니 나오미가 온 동네방네 막 다 돌아다니면서 "이 며느리가 착하다고, 내 며느리가 귀하다고" 왜냐하면 남들이 흠 잡을까 봐, 모압 여인이라고 흠 잡을까 봐 그 이야기를 막 하고 하고 하고 해가지고 이 미담이 막 전해지고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아스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 고향 나라, 자기 신들을 다 떠나서 이곳으로 왔으니 그래서 룻을 '여자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룻은 진짜 아무것도 없이 남편도 죽었는데 그냥 자기 시어머니 따라서 길 떠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보다 믿음이 훨씬 더 좋은 사람 아닙니까? 여자 아브라함.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보면요, 룻은 자기 입으로 자기 삶의 행적을 칭찬하거나 자랑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누가 한 것입니까? 나오미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자기 이야기를 해 줘야 이게 미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자꾸 하면 그것 참 꼴보기 싫습니다. 듣기 싫습니다. 남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서 쭉쭉 돌아가지고 이것저것 다 돌아가지고 사방팔방 갔다가 나에게 들려야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항상 소문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잘한 일은 소문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나쁜 일은 더 빨리 퍼집니다. 살아보니까 그렇지요. 나쁜 일, 죄는 진짜 더 빨리 금방 소문나고, 착한 일은 그보다 조금 더 느리게 소문나지요. 그런데 지금 나오미가 작정하고 온 동네방네 소문낸 것입니다. 내 며느리 착하다고 귀하다고.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보아스가 이것 때문에 이 여인을 긍휼히 여긴 게 아닙니다. 그다음 보세요.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가 참 좋지 않습니까? 날개 아래에 보호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평온하고 사랑 받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 날개 아래 보호라는 말은 히브리어 단어로 '카나프(כָּנָף)'인데, 시편 91편 4절에 나오는 그 표현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지요? 찬양에도 많이 있습니다. '주의 날개 밑 내가 편히 쉬네' 이런 찬양도 있습니다. 아마 이 표현이 구약에서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이 룻기의 표현입니다. 보아스가 그것을 축복해 준 것이지요.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려고 온 너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지금 보아스에게 룻의 신앙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는 이 사람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의 믿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 봉양을 잘해서 그렇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여인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그 품으로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이 보아스에게 보였기 때문에 보아스가 신앙의 동지를 찾아낸 것입니다. 이 신앙의 동지가 무엇으로 시작됩니까? 교회에서 많은 모임도 하고 많은 공동체도 있는데 그 공동체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가장 깊은 사귐이 될까요? 신앙을 기반으로 해야 됩니다. 믿음을 기반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빌레몬서 6절에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믿음의 교제, 사귐을 하려면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됩니다.

4. 식탁 공동체의 의미

4-1. 배불리 먹고 남음

13절에 가면 룻의 반응이 또 나옵니다.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여종을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께 계속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앞으로도." 보아스가 참 좋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룻도 참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 당신께 계속해서 은혜를 입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항상 이것입니다. "주님 은혜 계속 입고 싶습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로 아래로 더 들어가야 됩니다. 은혜 입을 때 왜 거기 멀찍이 서 있습니까? 은혜 입을 때 가까이 가서 그냥 은혜를 푹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비 맞을 때 저 비가 무슨 비가 될지 모르는데 비를 피하면 어떡합니까? 은혜의 비가 오면 맞는 것이지요. 은혜를 계속 입기를 원합니다, 이게 우리의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14절에 보면요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그가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보아스가 밥 먹자 한 것입니다. 이리 와서 같이 먹자고. 이것이 그냥 밥 먹자 하는 게 아닙니다. 식탁 공동체로의 초대입니다. 모압 여인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조금 전에 사환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모압 여인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압 여인을 보아스가 초대했습니다. "이리 와라. 같이 밥 먹자." 그래서 떡 조각을 초에 찍어서 먹었습니다. 근동 사람들은 이 초에 떡을 찍어 먹는 것을 굉장히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삼겹살에 쌈 싸먹듯이 빠지지 않고 하나님 잘 먹었습니다. "그에게 볶은 곡식을 주매 그가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식탁의 기적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신약성경에 오병이어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오천 명을 먹인 것 아닙니까? 열두 바구니가 남지 않습니까? 여러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우연입니까? 열둘은 뭐입니까? 열두 지파입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 식탁에 온 이스라엘이 다 먹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 식탁에서 열두 바구니나 남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데 그 열두 바구니가 남은 사건이 오병이어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42절에서 44절까지 보시면 엘리사가 백 명을 먹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와서 첫 열매의 식물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매, 엘리사가 종에게 "이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시킵니다. 엘리사 종이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지금 백 명이 모여 있는데 그 보리떡 하나가 얼마나 큰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십 개밖에 안 되는데 이것을 백 명한테 먹이라고? 그런데 엘리사가 말합니다. "이 무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가 그것을 그들 앞에 베푸니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더라.

여호와께서 주시는 식탁의 기적입니다. 엘리사도 했고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룻이 보아스 밭의 타작 마당에서 이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사람들이 별 기대 없이 오는 분들 많거든요. 기대 없이 교회 공동체에 왔는데 배불리 먹고 남는 경험을 한다면 그게 기적 아닙니까? 그게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이 매일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 기적이 매주 매번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환대해야 됩니다. 항상 긍휼히 여기고 따뜻한 마음으로 풍성하게 대접하고 베푸는 마음.

15절에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이제 곡식 단 사이에서 주워라고, 계속 그렇게 유지하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아 이건 조금 심하지요. 이제 이제 좀 뽑아서 버려서 떨어뜨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꾸짖지 말라" 뭐라 하지 마라. 가르치고 꾸짖고 책망하지 말고 풍족하게 거두어 은혜를 입게 하라.

4-2. 므비보셋의 식탁

자 우리가 이것을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식탁 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는데, 사무엘하 9장 6절과 7절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한번 보세요.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아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내 상에서 떡을 먹어라."

므비보셋이 누굽니까? 요나단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이제 좀 평안해지고 나서 요나단과의 약속이 생각나지요. "너의 후손을 내가 거두겠다." 찾았습니다. 찾았더니 두 다리를 절고 있다네요. 왕들이 왕이 되고 나면 이전 왕조, 자기를 반대했던 왕조들 다 몰살시키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므비보셋이 숨어 있었는데, 찾아내니 이 아이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 하고, 두 다리를 저는 아이가 와서 두 다리를 절어요. 그냥 한 다리가 아니고요. 그런데 왕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게 절이 됩니까? 두 다리를 저는데 절보다 엎드린 것이지요. 그냥 배 깔고 납작 엎드린 것입니다. 고개도 못 들고. 그런데 그 아이에게 왕이 말합니다.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네게 다 주고, 너는 앞으로 내 상에서 먹자." 식탁 공동체로 초대한 것입니다. '내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내 친구의 아들이니 너는 나의 아들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변에 신하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되옵니다" 하고 뭐 상소가 빗발쳤겠지요. "불신은 처음부터 끊어야 되고 불행의 씨앗은 키우는 게 아닙니다" 등 뭐 온갖 이야기가 다 쏟아졌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식탁 공동체로 므비보셋을 초대했습니다. 이게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 아닙니까? 통념적으로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대했다고요. 그런데 한 교회 공동체에서 같이 밥 먹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 사람은 공동체에 끼면 안 됩니다"라고 해야 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학교에서 왕따도 나쁜 것이지만 교회에서 왕따는 하나님이 가만히 안 둘 것입니다. 그것 철저하게 환대하고 함께 끌어안고 같이 가는 것입니다. 같이. 싫으나 좋으나 미우나 고우나 공동체.

4-3. 예수님의 식탁

우리가 요한복음 21장 12절과 13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어떤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낙담한 제자들을 찾아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갔지,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하니까 요한도 따라오고 다 따라왔습니다. 여러 명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셨습니다. 거기서 밤새도록 고기 잡고 빈 그물로 오는데 예수님이 고기 잡고 배고파서 오는 제자들을 위해서 숯불을 피워 놓고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생선 몇 마리 못 잡았는데 방금 잡은 생선 좀 가져와라. 굽자, 굽고 와서 밥 먹자." 식탁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식탁 초대는 배신자들에 대한 식탁 초대입니다. 배신자들.

자,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배신합니까? 안 합니까? 해요, 안 해요? 사람 따라 다릅니다. 예,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논리로 "한번 배신한 사람 두 번 배신합니다. 저것 안됩니다. 저것 살리면 안됩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고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고 다윗도 이렇게 했습니다. 보아스도 이렇게 했고. 참 이 족보가 대단합니다. 룻과 보아스, 다윗, 다 예수님 족보 아닙니까?

자, 우리도 예수님 족보의 영적 족보의 혈통에 들려면 우리도 나와 반대되는 사람 끌어안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나하고 결을 달리하는 사람 끌어안고 식탁의 자리로 초대하고,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 제자고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혈통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예수님 영적 혈통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됩니다. 손도 내밀고 끌어안고 "같이 밥 먹자" 하고 같이 어깨 동무하고, 좀 싫어도 나중에 뒤통수 한 대 더 맞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으니까. 식탁으로 초대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방 여인이, 아 모압 여인입니다. "같이 밥 먹자." 이럴 수 있습니까? 보아스가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불편하지요. 싫지요. 그런데 대장이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그냥 보아스가 이렇게 하니까 이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돼 버린 것입니다.

5. 기업 무를 자

5-1. 하루 종일의 수확

17절, 하루 종일 일한 룻의 수입을 봅시다. 룻의 수입.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한 에바가 얼마나 될까요? 약 22리터 정도 됩니다. 여러분 옛날에 1리터짜리 콜라 기억나십니까? 1리터 콜라 22병. 자, 그러면 1리터짜리 콜라 22병에 보리가 들어 있다, 떨었다 그랬습니다. 떨었습니다. 떨어서 보리 알갱이가 1리터짜리 콜라 22병입니다. 그러면 두 여인이 얼마나 먹을까요? 하루 이틀 아니지요. 엄청나게 많이 먹지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가서 그냥 막 주워온 것입니다. 그냥 막 가서 뭐 막 흘려 주고 뭉텅이 막 빼서 빠뜨려 주고 이러니까 이것 어떻게 들고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아스가 그것도 좀 배려해서 건장한 소년들 집까지 배달도 시켜 줬겠지요. 뭐 어쨌든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제 18절 보세요. 하루 종일 일한 수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룻과 나오미가 어떤 대화를 나눕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며, 야 이것을 싸 갖고 왔네요. 볶은 곡식을 싸 갖고 왔습니다. 참 이 며느리 좋지요. 따뜻하고, 집에서 시어머니 '이것 먹고 있을까?' 생각하니까 이것 남아 돌아가는데 그래서 싸갖고 왔습니다. 싸서 갖고 와가지고 볶은 곡식을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나눠 먹는 것입니다. '나 혼자 먹는 게 미안해서.' 하루 종일 일하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여러분 이게 어떤 느낌이세요? 성가시지요. 귀찮지요. 시어머니 하루 종일 집에 있었으니까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하루 종일 일하고 왔습니다. 하루 종일 아침부터 나와 가지고 낯선 곳에 가가지고 저녁까지 일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쉬고 싶지요. "어머니 잠깐만요. 우리 좀 자고 내일 아침에 얘기합시다" 이게 아니라, 성가시게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따라붙고 얘기하고 말시키고 "오늘 있었던 얘기 해 봐라, 누구 만났느냐, 어떤 일이 있었느냐" 뭐 이런저런 얘기 계속 하는데 룻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구체적으로 얘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머니 말해도 몰라요. 뭘 자꾸 알라 그래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예, 구체적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른이 하는 일이 또 있거든요. 어른이 그다음 뭐라고 합니까?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에게 여호와의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이니라 하니라" 뭔가 여기서 열쇠 하나가 딱 열리는 느낌이지요. 이 할머니가 이제 이런 얘기를 딱 했습니다. 자, 얼마 동안 이삭을 주웠느냐.

5-2. 고엘 제도

아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며느리 룻의 입에서 보아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오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구나, 이제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습니다. 말해야 됩니다. 말, 자꾸 입 열고 말하면 대화가 있으면 거기서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은 집에 가면은 말, 입 닫고 말 안 하고 TV만 보다가 "뭘 자꾸 알라 그래" 이러고. 그런 남편도 붙잡아 태워서라도 계속 말하게 해야 됩니다. 말해야 됩니다. 서로 대화하고 말하고 이야기하고 서로 토론하고 그러다 보면, '보아스라!'

이제 기업을 무를 자가 나옵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피를 무를 자, 두 번째는 몸을 무를 자, 세 번째는 토지를 무를 자. 피를 무른다는 말은 뭐냐면 내 친척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피의 보복을 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레위기 율법이 그것을 '피를 무를 자'라고 얘기합니다. 두 번째, 돈이 없어서 노비로 팔렸습니다. 우리 집에 누군가가. 그러면 돈 있는 친척이 가서 돈을 지불하고 그 사람의 몸을 다시 사오는 것입니다. 그게 '몸을 무를 자.' 세 번째, 돈이 없어서 땅을 팔았습니다. 토지를. 그러면 친척이, 돈 있는 친척이 가서, 가장 가까운 친척 순서대로 가서 땅을 다시 되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찾아오면 무슨 소득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무 소득 없습니다. 다시 찾아서 자기 돈으로 찾아서 그냥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게 긍휼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세 가지.

자, 이 중에 오늘 여기 인용해 놓은 것은 토지 무를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레위기 25장 23절을 보시면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왜냐하면 토지는 다 내 것이기 때문에.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 땅 정복하고 나서 열두 지파에게 땅 분배 하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직접 분배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다 하나님 땅입니다. 모든 땅은 다 하나님 것입니다. "너희는 나그네요 동거하는 자다"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땅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입니다. 동거인입니다. 동거인이 땅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사는 날 동안만 거기에 잠깐 동거하는 것입니다. 머물렀다 가는 것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땅의 주인은 다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땅에 대한 토지에 대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한다" 그랬습니다. 토지 무른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원상 복구'라는 개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시 되돌린다. 레위기 25장 25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자기 돈으로 물러 주는 것입니다. 26절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돈이 없어서 땅을 팔아버렸는데 그런데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예를 들어 100만 원의 땅을 팔았습니다. 7년 뒤에 돈을 벌었습니다. 7년이 지났지요. 그러면 가서 한 30만 원 정도를 주고 그리고 그 땅을 다시 갖고오는 것입니다.

27절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옵니까? 7년이 일곱 번 그렇지요.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면 그다음에 50년째가 희년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면 이 말은 토지는 50년 주기로 다시 다 원상 복구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자 희년은 매년 달라집니까? 그냥 50년 단위로 끊깁니다. 자, 희년이 작년에 지났습니다. 자, 그렇다면 희년 그 이듬해에 땅을 내가 샀습니다. 그러면 그 땅값은 비쌀까요? 쌀까요? 비싸지요. 50년 동안 내가 소유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2년 남았습니다. 2년 뒤가 희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샀습니다. 그럼 이 땅은 내가 2년 동안만 쓸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땅은 싸요? 비싸요? 싸지요. 아주 싸지요. 그런 개념이라고. 그러면 50년 단위로 모든 땅은 다 원상 복구됩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땅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은 항상 기업 무를 자가 와서 "달라" 그러면 줘야 됩니다. 돈 갖고 와서 달라고 하면 내 소유가 아닙니다. 땅을 내가 산다 판다 하는 것은 최장 기간 49년입니다. 49년. 50년째 되면 줘야 됩니다.

5-3. 우리의 구속자

자, 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가알(גָּאַל)'이라 불렀습니다. 가알이 뭡니까? 친족, 친척. 친척 중에 가알, 즉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 무를 자격이 있고요, 그것을 우리가 이런 기업 무를 자 제도를 '고엘(גֹּאֵל) 제도'라고 합니다. 들어보셨지요. 이 고엘을 영어로 'Redeemer'라고 부릅니다. 리디머. 영어 사전에 찾아보시면 '구속자'라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속자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내 몸이 팔렸습니다. 죄에게 내 몸이 팔렸다고요. 죄의 종노릇하는 나를 예수께서 오셔서 나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자기 몸으로 구속해 주셨습니다. 구속자가.

그래서 여기 룻기는 보아스가 모형론 쪽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돼서, 이 기업 무를 자는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자기 소득이 자기 손에 들어오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십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 누굽니까? 부모입니까? 형제입니까? 그보다 훨씬 더 가까운, 자기 피와 물을 다 쏟아내시는, 나를 구원하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 가알, 고엘, 리디머, 예수 그리스도. 그 표상이 구약에 보아스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 우리가 못 할 일이 뭐 있습니까? 룻이 얘기했습니다. "내가 당신께 은혜를 계속 입기 원합니다." 이렇게 이제 생각하니까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겠지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5-4. 나오미의 조언

룻이 보아스에게 은혜 입은 것을 안 나오미가 룻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22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뭔가 촉이 왔습니다. 이 할머니가 이제 이런 얘기를 딱 했습니다. 자, 얼마 동안 이삭을 주웠느냐.

23절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우리 지난주에 공부했지요. 보리 추수 시작해서 밀 추수 마치기까지 약 6주에서 7주 걸린다고. 그래서 이 기간 동안 거기에서 오랫동안, 아주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먹고 살고 또 여기서 은혜를 누립니다. 이제 그다음에 역사가 이제 일어납니다. 그다음이 보아스의 타작 마당인데, 밭에서의 역사가 아니고 타작 마당에서 이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고엘이 되시며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아무 소득 없는 나를 건지시고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연약한 모압 여인 같은 나를 주께서 건지시고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손에 못이 박혀서 그 몸이 다 찢어져 가시면서도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우리가 그지없이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그 은혜에 합당한 인생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 교회가 정말 베들레헴 교회처럼 좋은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연약한 자를 환대하는 공동체 되도록 도우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먼저 끼치는 교회 되도록 도우시고, 그들을 먼저 사랑으로 품는 보아스 같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얻는 것이라 하셨사오니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고 망설이지 않게 하시고 머뭇거리지 않게 하여 주시고, 믿음을 얻기 위하여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한 발짝 한 발짝 더 믿음으로 은혜로 헌신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되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