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특강 5 - 보아스와 룻 (룻기 4장)
본문: 룻기 4장 9-10절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오늘이 룻기 공부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러분, 룻기를 공부하시면서 느낀 점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원래 무엇을 공부하면 남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룻이 팔자 고쳤다더라, 멋진 남자 만나서 팔자 고쳤다" 이렇게만 생각하시면 룻기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룻기를 공부했다고 하면 그런 피상적이고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룻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몇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룻기의 핵심 메시지
1-1. 상호적 관계의 책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이야기를 보면, 첫째로 룻기는 관계에 대한 책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짧게 말씀드렸는데 한번 보십시오. 룻과 나오미, 그리고 나오미와 룻, 그리고 룻과 보아스, 보아스와 룻, 그리고 또 나오미와 보아스, 이 관계들이 계속 상호적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처음에는 룻이 나오미를 돕지 않습니까? 나오미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남편 죽고 아들 둘 다 죽고, 노인이 혼자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을 차마 룻이 혼자 시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쫓아갔습니다.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로 어머니를 떠나라 말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룻이 나오미를 도운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가서도 계속 돕습니다. 어떻게 돕습니까? 이삭을 주워다가 시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결정적인 순간, 나오미가 룻을 돕습니다. 결정적인 한 방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말합니다. "네가 타작 마당에 향 뿌리고 새 옷 입고 단장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조용히 들어가서 이불 밑에 누워 있거라. 그러면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런 지혜가 나오미에게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그래서 룻을 결정적으로 돕습니다.
룻과 보아스를 보십시오. 보아스가 룻을 돕습니다.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같이 먹자고 합니다. 일꾼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삭을 조금씩 뽑아서 흘려 버려라. 꾸짖지 마라.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라." 특혜를 줍니다. 도와준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이지만 기업도 물러 주고 다 해 줍니다.
그런데 룻은 보아스에게 해 준 것이 없습니까? 보아스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너의 처음 인애가 나중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처음 인애는 나오미를 도운 것이고, 나중 인애는 "네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젊은 자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를 선택해 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너는 집안의 대를 잇고 집안의 이름의 명맥을 이을 훌륭한 여인이다"라고 칭찬해 줍니다. 자기도 선택받았음에 대한 고마움을 룻에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룻과 보아스도 상호적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와 보아스는 어떤 관계입니까?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룻을 떠나보낼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첫날 그 밭에 와서 일하고 돌아갈 때 한 에바, 이십 리터나 들고 갔습니다. 그다음에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와서 새벽까지 누웠다가 일어나 갈 때는 여섯 번이나 되어서 보내주었습니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가 보아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며느리 룻을 지켜 주었습니다. 젊은 여인을 대를 잇게 해주고, 예수님 족보에 들게 해주고, 결론적으로 그래서 이것이 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를 보면, 보아스가 이 사람들에게 도움받을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보아스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부에 강한 사람, '이쉬 기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이라 했습니다. 다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움받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는 참 특별한 것이, 서로 돕는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세상은 일방적인데, 교회는 상호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학교 교사들, 교회에서 월급 받습니까? 한 푼도 받는 것 없습니다. 주일날 자기 시간 드리고 자기 열정 드리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주머니 다 털어서 먹이고 돌보고, 그리고 아이들 길러 가면서 시간 들이고 몸으로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십 년, 삼십 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중독된 것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중독인데, 내가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해 봐야 압니다. 그것을 하면서 내가 그 아이들에게서 받는 은혜가 더 크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족되고 채워지니까, 은혜가 되니까, 감사하니까 그냥 쏟아붓기만 하는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머니에서 돈 나가고 시간 들이고 몸으로 고생하는데, 그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바깥에서 주차 안내 봉사하시는 분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춥습니다. 그런데 왜 합니까? 잘못하면 욕도 먹고, 주차 잘못하면 막 화내고, 그런데 왜 합니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좋으니까 합니다. 서로 상호적인 것입니다. 서로 그 꼬맹이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필요 없는, 돈 많은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 심방을 갑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굉장히 고마워하십니다. 어르신들, 할머니들은 진짜 좋아하십니다. 심방 왔다고, 목사가 이 누추한 데 와 주었다고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가서 더 채워 받고 오는 것은 목사입니다. 더 많이 배우고 옵니다. 주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이라고는 말씀 읽고 같이 기도하고 이야기 들어 드리는 것밖에 없는데, 돌아오면 훨씬 더 많이 배워 옵니다. 그것이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지금 여기 룻과 보아스와 나오미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관계입니다. 이것이 정말 건강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섬기고 일하는 것, 거기에서 내가 얻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리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누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풍족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1-2. 율법의 현실화
둘째로 룻기는 율법이 현실화되어 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룻기의 배경이 사사시대 아닙니까? 사사시대는 지파들이 다 도망가버린 시대입니다. 전부 다 내버린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문화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있는데 현실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율법이 현실이 되려면 거기에 무엇인가가 첨가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들어가야 됩니까? 사랑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여기 토지 무르기 율법, 토지 무르기, 계대 결혼이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사시대에 율법이 다 박살나고 다 무너졌는데, 이 공동체만 이것이 살아 있습니다. 왜입니까? 사랑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왜 살아서 꿈틀대고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잃어버렸는가 생각해 보면, 그것이 희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손해 보는 것을 잘 안 하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도고 교회고 가정이고 마찬가지입니다. 희생하고 손해 보고,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덜 누리고 덜 가지고, 아니면 아예 다 쏟아붓고,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꿈틀대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부터 한번 보십시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손해 봅니까? 다 타산적으로 돌아가는데, 희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땅히 해야 될 것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 이래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지" 이 정도 될 때, 그것이 희생인 것입니다. 교회가 베풀 때는 아낌없이 베풀어 버려야 합니다. 땀 흘리며 베풀면 안 되고,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합니다. 나누고 베풀 때는 깜짝 놀랄 만큼 베풀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이 현실이 됩니다. 여기 고엘 제도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에만 나오는 옛날 이야기라고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1-3. 특별한 공동체
셋째로 베들레헴 공동체, 이것은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가 다 무너진 사사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도,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이런 시대도, 이런 공동체가 어디엔가 있을 텐데, 그것이 엘도라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여야 합니다. 그것이 이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러면 무엇을 희생할까, 나는 무엇을 내놓을까, 나는 어떤 부분에 희생을 할까, 이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1-4. 고엘 이야기
그리고 넷째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고엘 이야기입니다. 그 고엘에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그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의미들, 이야기들을 한번 잘 생각하고, 이것을 실천하는 공동체, 개인들이 되셔야 합니다.
2. 성문에서의 결정
2-1. 보아스의 지위
이제 성문으로 올라갑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제 아침이 밝았습니다. 보아스가 이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아스 씨께서 일을 합니다. 그러면 일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하고, 나오미와 룻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일절,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성문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보아스의 지위가 성문에 올라갈 만한 지위였던 것입니다. 성문이란 곳은 성문에 올라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지나갑니다. 사람이 성 밖으로, 성 밖 사람이 성 안으로 다 지나갑니다. 원래 높은 데 올라가는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높은 데 있습니다. 성문에는 그 성의 장로들, 재판하는 사람들이 올라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부에 강한 사람이고, 이 성의 지도자급이기 때문에 성문에 올라가서 딱 앉았습니다.
2-2. 기업 무를 자의 등장
그리고 마침, 룻기가 말하는 마침은 우연입니다만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마침 누가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보다 먼저, 우선순위에 있는 기업 무를 자가 성문 밑으로 지나갔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름을 적거나 혹은 적지 않거나, 이름을 적을 때 어떤 경우에 적을까요? 성경이 이름을 밝힐 때는 아주 악한 사람이거나 배울 만한 선한 사람이거나입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도 반면교사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당연히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고요. 그런데 이 아무개는 무엇입니까? 아무개입니다. 그냥 아무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참, 이 아무개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기한테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못 잡아서 아무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무개입니다. 그냥 돌아다니는 아무개입니다. 성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분 이름을 중립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악한 사람으로도 표현하지 않고, 따라가야 할 만한 선한 사람으로도 표현하지 않고, 길거리 돌아다니는 아무개로 표현했습니다. 중립적으로요. 그렇다고 진짜 도둑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개, 아무개라고 널린 아무개, 일반적인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기회를 놓친 것이, 이 사람이 이름을 얻을 수 있었는데 아무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리로 와서 앉으라" 했습니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았습니다. 성읍 장로 열 명을 왜 불렀을까요? 증인들입니다. 지금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고엘을 맡아줄 사람을 택하는 자리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나 못해요" 하면, 보아스가 "내가 하겠다" 그러려고 지금 이 자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당시 문화적인 관습에 의하면, 기업 무를 자를 택하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입니까, 공동체가 공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기업 무를 자를 택하고, 계대 결혼할 사람을 택하고 정하는 것은 공동체가 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자기들끼리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기업 무를 자가 기업을 "나는 못 무르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정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증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 명의 장로들이 거기에 증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2-3. 나오미의 토지
삼절,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말합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합니다. 엘리멜렉이 누굽니까? 나오미의 남편 아닙니까? 죽은 남편입니다. 그런데 그 소유지를 팔려 합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뉘앙스로 보면, 엘리멜렉이 남겨 놓은 땅을 나오미가 갖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왜 땅이 있으면 왜 남의 밭에 곡식 이삭 주우러 갑니까?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이 그 당시 문화적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셔야 하는데, 지금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기룐, 말론, 이 네 식구는 그 집에, 그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땅을 다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십 년 동안 그 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누군가가 농사를 지었거나, 누군가가 경작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팽겨쳤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거기에 곡식이 익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누군가가 농사를 짓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돌아와서 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 말씀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소유자에게요. 그래서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볼까요. 열왕기하 8장 1절에서 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천천히 읽겠습니다.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 칠 년이 다한 후에 여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돌아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갔더라"
무슨 말입니까? 엘리사와 관계가 있었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여인에게 엘리사가 말합니다. "지금 이 땅에 기근이 칠 년 동안 임할 것이다. 딴 데 좀 가 있다가 와라." 갔습니다. 블레셋 땅으로요. 칠 년이 지났습니다. 돌아왔습니다. 왔는데 그 땅을 누가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그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왕에게 나간 것입니다.
육절 말씀 보겠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음에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여러분, 이것이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지요. 이해가 안 됩니다. 당연합니다. 버리고 가 놓고서요. 그런데 그 당시 사회문화적인 법입니다.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가 지금 돌아와서 그 밭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판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나하고 상관없이 이 밭을 정리한다, 이 땅을 정리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을 대신 사서 나에게 생계를 유지하게 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즉 기업 물러줄 사람을 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참 뻔뻔하지요, 나오미도요. 그런데 이것이 그 당시 문화적인 관습이고, 이것을 공동체가 해결해 주는 것이 그 당시 관례였습니다. 인척들을 그래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이것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아들 둘 잃었습니다. 남편 없습니다. 이 사람 혼자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합니까? 그러니 이것을 누군가가 땅을 가져와서 거기서 나는 소출로 나오미를 봉양하고 먹여 살리고, 룻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산 값을 나오미에게 좀 줘서 집도 사고 세간살이도 좀 들여놓고 사람답게 좀 살도록 도와주라, 그 말입니다.
2-4. 아무개의 계산
"그러니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니 이 사람이 그 순간 계산이 막 돌아가겠지요. 계산이요. 이것이 나한테 얼마나 유익한가, 희생이 얼마 남았는가부터 계산이 막 돌아갈 것입니다.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라.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알려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이 순간 빠밤 된 것입니다. 이 순간, 만약에 그 자리에 나오미가 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룻이 있었다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르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계산으로 "내가 무르겠다"고 이 아무개가 결정한 것입니까? 그 자리에서요. 자기가 생각한 것입니다. 머리를 막 돌린 것입니다. 일단은 나오미가 아들이 없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다른 자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 땅을 사서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나오미와 룻만 잘 케어하고 봉양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죽으면 그 땅은 누구 것이 됩니까? 자기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나오미와 룻을 봉양하고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력, 종들, 인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하겠다" 계산한 것입니다, 이 아무개가요.
3. 계대 결혼 율법
3-1. 보아스의 추가 조건
그런데 거기서 보아스가 한 가지 더 조건을 첨부합니다. 무엇을 요구합니까? 오절,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라.
따지고 보면 무르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피 무르기, 사람 무르기, 기업 무르기, 땅 무르기요. 세 가지입니다. 지금 이것은 기업 무르기만 딱 이야기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대 결혼까지 같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룻을 취하는 것까지 같이 얹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이 남자가 하겠습니까?
보아스는 아침에 일어나서 성문에 올라갈 때 이것을 계산하고 올라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오케이, 그런데 룻을 여기다가 첨부하면, 플러스 알파를 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계산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룻과 이 남자가 결혼을 하면 자녀를 낳아 줘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잠자리를 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생겨서 아이가 나면,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입니까? 이 아무개의 아이입니까? 룻의 죽은 전 남편의 아이입니다. 전 남편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자라면 그 땅은 누구의 땅이 됩니까? 이 꼬맹이 아이의 이름으로, 이 아이가 저것을 상속하고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쥐어서 개 주는 것입니다. 내 종들 노동력을 다 부려 가지고, 붙여 가지고, 거기서 일 죽어라 시켜 가지고, 나오미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을 때까지 봉양하고, 거기서 아기 낳고, 그것 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계대 결혼까지요.
그런데 이 남자가 보아스에게 이것은 부당하다고 말을 못한 것입니다. 왜 못했을까요? 보아스가 '이쉬 기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이니까요. 거기서 제일 잘 나가니까 말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구하니까 "네가 이것을 할래?" 요구한 것입니다.
3-2. 신명기의 율법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계대 결혼의 근거가 되는 율법이 신명기 25장입니다. 여기 이제 적어 두었는데, 자세히 한번 보셔야 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은 이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셋째부터는 자기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은 그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세워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여러분, 이것은 누구를 위한 법입니까? 죽은 자를 위한 법입니까, 산 자를 위한 법입니까? 이것은 산 자를 위한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여성의 지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이 죽었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친정에 돌아갑니다. 친정에서 삽니까? 친정에서 받아줍니까?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이삭이나 줍지요.
그래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보호 장치입니다. 그래서 그 집의 형제들 중에 그다음 순서인 형제가 이 여인을 취해서 의무적으로 아들을 낳아주고, 그 아들이 나중에 이 엄마의 봉양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자식이 보험이었던 시대 아닙니까? 그때는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다 했습니다. 요즘이야 무자식이 상팔자 시대지만 옛날에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하나라도 있으면 이 여인의 장래에 보험이 되니까, 그리고 네가 그래도 먹고 살 만하니까 그 재산을 이 아이에게 상속해서 이 여인을 먹고 살게 해주라는 뜻입니다. 사회적 안전망이고 보호 장치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고,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굉장한 보호입니다, 이 계대 결혼 장치가요. 이 여인이 어디 가서 다시 결혼하고 어디 가서 다시 사람 대접받고 삽니까?
3-3. 거부권과 수치
그런데 보십시오. 칠절,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장로들에게요.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세우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일러바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성읍 장로들이 그를 불러"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형수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신을 벗깁니다. 재미있지요.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침 뱉음 한번 당하고 그리고 편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이요. 침 뱉음 한번 당하고요.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그 집에 문패를 딱 붙여 주는데, "이 집은 몇 년 몇 월 며칠에 신 벗김 당한 자의 집" 이렇게 이제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법입니다.
3-4. 사문화된 율법
그런데 이 율법을 정할 당시에 모세가 신명기 율법이 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율법대로 행하고 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제대로 지켜졌을까요? 이 율법이 지켜지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현실이 되려면요. 그런데 그 사랑은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희생 중에 제일 힘든 희생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것 말고, 돈이 제일 아까운 것입니다. 돈이요.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도 아까운데, 현재적 재산도 나가야 되고 미래적 재산까지 다 저당 잡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요. 그냥 율법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문화된 법입니다. 그 당시 사사시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지금 이 베들레헴 교회 공동체에요.
4. 아무개의 포기
4-1. 기업 손해의 두려움
그러니 육절 보십시오. 그 기업 무를 자 아무개가 말합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니" 당연하지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말을 바꾼 이유가 무엇입니까? 플러스 룻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룻 때문에요. 룻의 미모, 이런 것 아무 상관없습니다. 장차 일어날 일이 자기 기업에 큰 영향을 끼치니까 이것을 사전에 끊어내는 것입니다. 못한다고요. 그래서 아무개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요.
기회가 왔습니다. 아무개가 자기 이름이 성경에 기록될 기회가 왔습니다. 좋은 쪽으로요.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왜요? 희생하지 않아서, 헌신하지 않아서, 손해 보지 않아서입니다.
4-2. 바보들의 이야기
성경은 그런 것입니다. 성경 한번 보십시오. 손해 본 자의 역사, 바보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바보가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수치, 모욕 다 당하고, 찢기고, 죽고, 피 흘리고 그랬던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전부 바보 천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너무 똑똑하고 너무 잘나면 우리도 아무개입니다. 그냥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려면 좀 바보스러워야 합니다. 손해도 좀 보고, 못 찾아먹는 것도 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를 쓰고 찾아 먹으려고 그러고, 기를 쓰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그러고, 계산하고 앉아 있고 그러고 있으면, 하나님은 "넌 평생 아무개야, 너는 평생 아무개다" 하십니다. 아무개로 살려면 계산하고, 그렇지 않으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손해 보고요.
4-3. 신 벗는 관례
그러면서 이제 그다음 넘기겠습니다.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칠절 보십시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서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신 벗는 관례가 남아 있었습니다.
팔절,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스스로 벗어 줘 버렸습니다. 스스로요. 누가 와서 벗기지 않았고, 얼굴에 침 뱉지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신 벗어서 던져 줘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권리 포기, 의무를 포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신 벗는 것, 그것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요. 스스로 신 벗는 것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내가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가, 해야 할 의무, 영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영적인 의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생명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많습니다. 왜요? 왜 살려 두셨습니까? 왜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고, 왜 우리에게 직분 주셨고, 왜 우리에게 물질 주시고, 왜 우리에게 사명 주셨겠습니까? 그것을 스스로 벗어 버리면 큰일납니다. 끝까지 사명 감당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희생하고 헌신하고요.
이제 스스로 신 벗는 이 사람을 보면서 가장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이 나오미 아니고 룻 아니었겠습니까? 뭐 현장에 있었다면요.
5. 보아스의 선언
5-1. 고엘의 책임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구절 보십시오.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지금 성문 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여러분 여기서 보십시오. 엘리멜렉의 밭을 나오미가 팔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아스가 하는 말 보십시오.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소유를 다 사겠다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엘리멜렉의 것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 기룐, 말론의 몫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룻을 취하는 명분이 되니까요. 그래서 이것을 자기가 다 떠안겠다는 것입니다.
5-2. 사라진 이름, 오르바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세히 보셔야 되는 것이, 처음에 룻기 1장에 시작할 때 등장했던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나오미, 남편 누구입니까? 엘리멜렉, 아들은 말론과 기룐, 두 며느리가 오르바와 룻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다 나옵니다. 나오미도 나오고, 죽은 사람 이름 계속 나옵니다. 엘리멜렉, 기룐, 말론 나옵니다. 룻 당연히 나오고, 나오미 나오고, 한 사람 빠졌습니다. 한 사람, 누가 빠졌습니까? 오르바입니다. 오르바의 이름만 없습니다.
오르바의 이름이 왜 없습니까? 자기 길로 갔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모든 사람이 생각할 때 마땅히 그 길로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길입니다. 남편 죽었습니다. 시어머니 따라올 일 없습니다. 시어머니가 가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시어머니 버리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르바의 이름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헌신하고 희생하고 손해 보는 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요. 지나치게 자기 이익 내세우고 지나치게 계산적이면, 하나님도 그 사람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르바의 이름도 없고, 아무개도 그냥 아무개입니다. 죽은 자의 이름까지 있는데 산 자의 이름이 성경에 없습니다. 살아 있으나 그의 이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5-3. 죽은 자의 이름으로
십절 보십시오.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사람을 산다라는 표현이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데, 그런데 이것은 관용적 표현으로 그냥 이해하시면 됩니다.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죽은 자 말론, 말론 자의, 말론의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봐야 되는 것이 고엘, 구속자입니다. 지금 보아스가 이것을 고엘로서 자처하며 돈을 들여서 그 땅을 사서 "이것은 말론의 땅이야" 그의 이름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겠다, 그러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죽은 말론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것이 고엘입니다.
6. 고엘의 정신
6-1. 이름 지우기
여러분, 고엘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것이 왜 하기 힘드냐면,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과 반대로 가기 때문에 하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이름이 더 높아지고 싶어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이름을 온 나라에 알리고 싶어합니다. 자기 이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디 관광지, 명승지 가면 전부 다 "아무개 여기 왔다 감" 전부 낙서도 전부 자기 이름 다 적습니다. 어디 맛집 식당에 가면 거기 막 누구 이름 막, 아무개 하고 하트 막 써 놓고 막 전부 자기 이름, 자기 이름 남기기 정신없습니다. 다 이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엘은 이름 지우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업을 삼고, 죽은 자의 이름이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 자기 이름 지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계속해서 없애는 훈련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 주지 않아도, 누가 나를 높여 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누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나는 내 자리에서 그냥 성실하게 일하면, 그 사람이 고엘입니다. 이 고엘의 정신이 꼭 누구를 구속하고 건져준다, 이런 개념이 아니고, 고엘의 정신은 핵심이 두 가지였다고 했습니다. 공통점은 고엘은 이름 지우는 것입니다.
6-2. 예수님의 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의 이름은 지워지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이름을 계속해서 부인하고 지우는 훈련, 십자가가 자기 부인 아닙니까? 그런데 자꾸 자기 이름 드러내려고 하면 그때부터 갈등도 생기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엘의 정신은 바로 그 정신입니다.
6-3. 증인들의 축복
이렇게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십일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이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자리에 목격자가 된 것입니다. 증인이 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죽어 있는 말씀이 살아 꿈틀대는 것을 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증인이 된다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라헬과 레아, 우리가 창세기 공부 열심히 해서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유다 지파의 어머니가 레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의 어머니가요. 그래서 사실 따지고 보면 레아를 통해서 약속의 계보가 흘러오고, 지금 이 집안도 유다 지파의 자손들입니다. 나중에 오벳을 낳고, 다 유다 지파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라헬을 먼저 앞세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순서가 중요합니다. 라헬이 먼저 옵니다. 레아보다요. 왜 그럴까요? 에브라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브라다 나옵니다.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라다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에브라다와 베들레헴이 같은 곳입니다. 같은 곳, 다른 이름인데, 에브라다에서 라헬이 죽었습니다. 라헬이 거기에 장사되어 라헬의 무덤이 거기 있습니다. 창세기 35장 19절, 20절 말씀 보시면 "라헬이 죽으매 에브라다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그러면 베들레헴에, 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라헬이 먼저 이 사람들에게는 앞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리적 배경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것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이 설명은 창세기 38장 설교할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 석 달쯤 뒤에 이제 그 이야기를 좀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복잡합니다. 복잡하고 할 말이 되게 많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여기서 핵심은 그것입니다. 지금 유다 지파의 자손, 유다 지파의 자손임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성문에 있는 백성과 장로들이 이것을 마음껏 축복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푼 것, 그리고 자기 희생을 한 것, 사랑을 보여주고 율법을 현실로 나타나게 해 준 것, 이것을 축복했습니다.
7. 복음의 성취
7-1. 오벳의 탄생
그러니까 이제 결혼하지요. 보아스와 룻이 난리났습니다. 이제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러분, 여호와께서 중요합니다. 룻은 모압에서 더 젊었을 때 더 젊은 남자랑 결혼해서 십 년의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았습니다. 누가 하신 일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게 하셨는데, 이것이 보아스에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보아스가 표정 관리를 어떻게 했을까요? "아이, 낳고야 말았네. 딸도 아니고 아들이네, 큰일났네" 이랬을까요? 아니면 진심으로 기뻤을까요? 저는 진심으로 기뻤다, 한 표입니다. 왜냐면 그 이유가 이제 뒤에 나오는데, 보아스는 그런 째째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막 열받고 화내고 "내 기업이 이제 이놈 이름으로 가겠구나" 이런 정도의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7-2. 베들레헴 여인들의 찬송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릅니다. 이 여인들은 베들레헴 여인들입니다. 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 첫마디가 중요합니다. 무엇이든지 첫마디가요. 왜냐하면 첫마디에 진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 보십시오. 그분들이 말하고 나서 그것이 여론에 막 반대를 겪으면 그다음에 사과합니다. 진심이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진짜 진심은 첫마디에, 그것이 진짜 진심입니다. 그냥 불쑥불쑥 나오는 말이요.
그런데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첫마디, 아들을 낳고 나서 찾아와서 한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찬송할지로다!" 베들레헴 사람들의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야, 너 팔자 고쳤네. 도대체 비결이 뭐야? 룻에게, 네가 며느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한 거야? 도대체 비결 좀 알자" 이런 이야기, 이런 정도의 수준 떨어지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찬송할지로다!" 누구를요? 여호와를! 이 모든 것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교회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가 기쁜 일이 있습니다. 축하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서 꼬치꼬치 캐묻지 마십시오. 그랬다면 이런 것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찬송할지로다"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자, 하나님이 하셨네, 하나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 "이제 시작인데" 이런 이야기 하지 말고요. 찬송하십시오.
7-3.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기업 무를 자 고엘 아닙니까?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여러분, 이것 중요합니다.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며느리, 이것이 동네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룻을 평가하는 말입니다. 칠이라는 숫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완전수 아닙니까? 아들이 일곱 있다 그러면 그 집 그 엄마는 편한 인생입니다. 그냥요. 그런데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그 정도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룻이요.
룻이, 우리가 살면서 이 정도의 평가를 좀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야, 너는 뭐뭐뭐 열 명보다 더 낫다" 이런 정도로요. "아이고, 너 하나가, 너 하나가 우리 집안을 쑥대밭을 만드네" 이런 이야기 자꾸 들으면, 그렇게 살면 곤란합니다.
7-4. 룻의 율법 성취
십육절,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 보면요, 율법이 성취되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룻을 통해서도 율법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룻은 어떤 말씀을 붙잡았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룻이 그래도 믿음 있는, 하나님 믿는 사람 집안의 며느리로 십 년을 살았습니다. 모압 땅에서요.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현실이 되게 살려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희생이 있어야 된다고요. 사랑이 있어야 하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 말씀 한 절 딱 붙잡았다고 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 말씀대로 살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입술로는 공경하지요. 입술로는요. 그런데 룻처럼 우리가 이렇게 내 모든 것을 다 걸고 부모 공경할 수 있습니까? 주머니에 있는 돈 나가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요. 그런데 룻은 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희생을 통해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모 공경이 현실이 되고, 나오미가 노년에 손자를, 아이를 받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현실이 되는 것은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보아스를 통해서 고엘이라는 죽어 있는 율법이 살아서 꿈틀대고, 룻을 통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율법이 살아서 꿈틀대고요. 그러면 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가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습니까?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살아 꿈틀대면 내가 희생을 해야 된다고요. 그 이야기입니다.
7-5. 오벳, 섬기는 자
십칠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참 희한하지요. 이름을 동네 사람들이 지어 주었습니다. 동네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마을이, 베들레헴이 이 아이를 키웠다는 뜻입니다.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키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 할아버지가 태어났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벳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동사가 '아바드'(עָבַד)인데, 섬기다, 예배드리다 뜻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되라. 하나님을 잘 섬긴 너의 어머니 룻이, 하나님을 잘 섬긴 너의 아버지 보아스가 너에게 모범을 보여 줬지 않느냐?"
여러분, 룻기는 이방 여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방 여인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요. 이방 여인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말씀의 주인공이 됩니다.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지 않으면 말씀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개, 유대인 아닙니까? 이 아무개가 자기에게 온 기회,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냥 아무개가 되었는데, 룻은 모압 여인이고 이방 여인인데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은 예수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7-6. 보아스의 이름이 남다
보아스와 룻 이장 이후에 구속사의 족보를 보겠습니다. 족보를 제가 왜 적어 놨냐 하면, 잘 보십시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 합시다. 그런데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보아스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좀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 족보대로 하면 이런 것입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말론은 오벳을 낳았고" 이래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에 의하면 맞습니다. 아까 그랬습니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업을 세우겠다, 죽은 자의 이름이 성문에서 이어지도록 하고 내 조상들과 내 가문에서, 이 세계에서 없어지지 아니하도록 하겠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고엘의 정신 아닙니까?
고엘의 정신은 자기 이름 지우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 완벽하게 지우고, 자기는 사라지고 없어지고 무명이 되고, 죽은 자의 이름과 그 가문을 세워주고, 여인을 세워주고, 그 아들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기록하신 족보에 이름을 다시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원래 유대인 족보에 의하면 이런 족보는 없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는 이것이 진짜 족보입니다.
7-7. 예수님 족보의 보아스
예수님 족보도 한번 볼까요? 마태복음 1장 5절과 6절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에게서 누구를 낳았다고요? 오벳을 낳고요. "말론은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가 아닙니다. 보아스 이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요.
8.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
그래서 룻기 마지막은 진짜 복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내 이름이 영원히 오래갑니다. 진짜 내 이름을 사랑하신다면, 내 이름 석 자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없어져 버려야 합니다. 내 이름이 그래야 합니다. 진짜 내 이름이 하나님 머릿속에, 하나님 손바닥에 새겨지기를 원하신다면, 잘 죽어야 합니다.
보아스가 그런 마음으로 했습니다. 이것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을 때 보아스가 기뻐했을까요? 진심으로 기뻐했으면 이름이 여기 기록된 것입니다. 진심으로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이름 지우기 정말 어려운데, 한번 해 봅시다.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 드러내지 않고, 나서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이 나 몰라 준다고 그것 때문에 속상하거나 그것 때문에 상처받거나 상처 주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해 주시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손만대, 예수님 족보에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입니까?
그래서 룻기의 마지막은 이런 복음의 정신으로 끝납니다. 룻기 우리가 오 주 동안 공부했는데, 그냥 옛날 이야기로 끝내면 곤란합니다. 율법이 옛날에 기록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 꿈틀댄 것처럼, 오늘 우리가 룻이 되고, 오늘 우리가 보아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고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믿음 생활 해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세우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룻기를 통해서 율법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고 희생할 때 율법이 살아서 오늘에게도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 베들레헴 공동체를 배웠습니다. 자기 이름을 지우는 고엘을 배웠습니다. 자기 이름을 지우고 진정 헌신하고 희생할 때 하나님은 그 이름을 기억해 주십니다.
주여, 우리가 이렇게 살기 원합니다. 바보처럼 살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바보가 아니고,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라도 예수님 보시기에 가장 지혜로운 자이며, 무명한 자같이 살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유명한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인생이 보아스와 같은 고엘이 되도록 도우시고, 룻처럼 하나님의 말씀 꼭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서 결국 언약을 성취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