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 토브와 샬롬 / 전체녹취

토브와 샬롬 (에스더 9-10장)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귀하게 되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에스더 10:3)

1. 에스더서의 핵심 교훈

에스더 이야기를 읽어보면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는 잔치였습니다. 잔치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잔치는 끝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갈수록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 마지막은 파괴적입니다. 모두가 다 불행하게 됩니다. 자기를 위한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의 잔치는 갈수록 좋아지는 잔치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복되고 은혜가 됩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잔치가 요한복음 2장의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고 그 잔치가 진실로 나중에 더 좋아지려면 그 중간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이 있으면 하나님 백성의 인생은 무조건 잔치가 되고 그 잔치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게 됩니다.

에스더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라고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그 사람 속에서 나를 봐야 합니다. 하만 속에 있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아주 작겠지만 모르드개 속에도 우리 모습이 있습니다. 에스더 속에서도 내 모습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같은 그런 인간을 통해서도 나를 바라보고,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특징과 그 사람이 잘한 것과 잘못된 것을 찾아낼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에스더서는 읽기에 좋습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기 때문입니다. 끝이 좋습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 되려면 그 가운데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도 그랬고 에스더도 그랬습니다. 에스더는 우리가 한 번인 줄 알았는데, 지난 시간에 살펴보니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두 번이나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체 에스더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이야기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두 조서 사이의 시간

2-1. 8개월 20일의 시차

오늘 우리가 읽고 함께 나눌 9장과 10장은 8장과 시차가 있습니다. 이전에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은 1만 달란트를 갖다 바치고 도장을 받았습니다. 제국의 2인자로 왕의 인장 반지를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조서에 도장을 찍고 전국 127도에 다 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다 붙입니다. 첫째 달 13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열둘째 달 13일에 모두가 다 죽게 되었으니, 아달월 13일에 다 죽게 되었으니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금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셋째 달 23일에 70일이 지난 후 다시 모르드개가 제국의 2인자가 되고, 모르드개를 통해서 두 번째 조서가 반포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왜 이렇게 날짜가 많이 나오고 숫자가 많이 나오는가 생각하면 게으른 것입니다. 적어도 이 중요한 날짜와 숫자들은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원래 첫 번째 조서가 반포된 것은 첫째 달 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조서가 반포된 것은 셋째 달 23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조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을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조서가 파기되고 두 번째 조서가 반포된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조서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은 저들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진격하면, 너희를 죽이려고 하면 방어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위권을 발동해서 그들을 죽여도 좋다는 것이 두 번째 조서입니다. 그것이 셋째 달 23일에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망의 열둘째 달 13일까지 며칠이 남았습니까? 셋째 달 23일부터 열둘째 달 13일까지 8개월 20일이 남았습니다. 에스더 8장과 9장 사이에는 8개월 20일이라는 시차가 있습니다.

2-2. 불안 속의 신앙

두 번째 조서가 반포되고 나서 대망의 아달월 13일, 첫 번째 조서와 두 번째 조서가 충돌하는 이날까지 유대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직까지 첫 번째 조서가 파기되지 않았습니다. 왕은 "나는 결단코 이 명령을 파기할 수 없다. 철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에스더가 "이 명령을 철회해 주옵소서" 했는데 왕이 "도장을 찍어서 내린 명령은 철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명령을 모르드개가 왕의 허락을 받고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대신 죽여도 좋다는 방어 명령입니다.

물론 왕은 하만을 죽였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하만은 이미 없습니다. 대신에 모르드개가 제국의 2인자가 됩니다. 왕은 그 사인을 백성들에게 줬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은, 유대인들은 소수민족 아닙니까? 소수민족이 8개월 20일 이후에 과연 안전할까? 괜찮을까? 이런 불안감이 없었을까요?

에스더서는 굉장히 복음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우리는 지금 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오셨습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33년 사시고 공생애 3년의 삶을 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내가 승천한 이 모습 그대로 내가 다시 오겠다" 하시고 예수님은 초림의 상태에서 승리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언젠가 오실 것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와 시는 우리가 알 수 없어도, 그때와 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 아는 것이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결국은 마지막 종말의 때 우리는 다 승리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안합니까? 마지막 종말의 때 승리할 것을 믿고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 유대인들처럼, 마지막 종말의 때 사탄의 세력과 영의 세력, 하나님의 세력끼리 서로 충돌할 것입니다. 그때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최후 승리, 최후 전쟁, 계시록에 보면 아마겟돈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그 대환란의 시기를 우리가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가 항상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의 마지막 결론이 어떻습니까? 오늘 제목처럼 토브(טוֹב)와 샬롬(שָׁלוֹם)입니다. 토브가 무엇입니까? '좋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의 '좋았다'는 말입니다. 샬롬이 무엇입니까? 평강, 평화라는 뜻입니다. 결국은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는 상당히 복음적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교회 시대의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8개월 20일의 불안한 인생을, 아직까지 왕의 첫 번째 명령이 철회되지 않은 이 상태에서 과연 두 번째 명령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저 악당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지 않을까? 내 재산을 탐내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내가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이 불안감, 그것입니다.

마지막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 백성들의 최후 전투입니다. 결국 마지막 최후 전투에서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깁니다. 에스더서는 그런 대서사시입니다. 계시록까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3. 아달월 13일의 전투

3-1. 수산성의 승리

바로 9장이 시작됩니다. "아달월 곧 열두째 달 13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에스더 9:1). 왕의 어명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서의 어명입니다. 유대인들을 다 죽이라는 하만에게 조정받아서 도장 찍어준 그 어명입니다.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에스더 9:1), 유다인의 대적들은 유다인들을 다 제거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에스더 9:1), 이것은 두 번째 조서입니다.

불안해하면서 8개월 20일을 기다렸는데 막상 그날이 되었습니다. 진짜 그날이 되니까 모든 지방관들이 다 유대인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왕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첫 번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두 번째 명령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9장 4절을 보십시오.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함에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보셔야 합니다. '왕궁에서 존귀하여'라고 했습니다. 모르드개의 명성이 왕궁에서 존귀해서 어디까지 퍼졌습니까? 각 지방에 퍼졌습니다. 페르시아의 각 지방이 몇 군데입니까? 127도입니다. 인도에서부터 구스까지입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티오피아입니다. 왕궁에서만 모르드개가 존귀한 자가 아니고 전 세계 모든 제국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127도까지 널리 퍼져갔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단어가 '점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갈수록 좋아지는 인생입니다. 하만의 인생을 보십시오. 갈수록 나빠지는 인생 아닙니까? 최고의 자리에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몰락하고, 모르드개를 달려고 했던 그 나무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이렇게 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그것을 지킨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가 한 것은 목숨 걸고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지킨 것입니다. 하만에게 마치 신전에서 엎드려 경배하는 것처럼 예를 갖추라고 하니까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그 원칙을 지킨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죽을지라도 그 목숨을 걸고 자기는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궁에서부터 전국으로 점점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고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고 강성하게 된 것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르드개를 통해서 각 지방의 관리들이 유대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왕이 이 사람을 이렇게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영향력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여러 주변 사람들이 다 함께 누리고 복 받고 은혜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정도 되면 사실 유다인들을 대적하는 사람이 없어야 정상 아닙니까? 왕이 모르드개를 그만큼 높여줬고 두 번째 명령이 나갔는데 그런데도 꼭 엉뚱하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존재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초림의 상태에서 사탄 권세를 죽이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랬으면 끝나버려야 되는데 여전히 악의 잔당들, 사탄들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500명을 죽이고 진멸하고"(에스더 9:6). 잘 기억하셔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미쳐서 칼 들고 나가서 수산에서 사람들을 500명을 죽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번째 조서 명령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방어입니다. 자위권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맞서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도성 수산에서 500명이나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멀쩡하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이 도성 수산에서 말입니다.

"또 함무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에스더 9:10). 하만의 10명의 아들들은 아직까지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사람이 좋은 것입니까? 하만만 죽었지 그 아들들을 처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죽었을까요? 설치니까 죽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안 하니까, 까부니까, 뭣도 모르고 설치니까 죽는 것입니다. 하만의 열 아들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아마 주변 사람들의 세력을 규합해서 유대인들을 무찌르고 죽이고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다시 되찾아오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공격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악이라는 것은 진멸하고 진멸해도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잡초처럼 지속적으로 그 밑에 쓴 뿌리가 있어서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우리가 한 번 죄를 이겼다고 해서 그 죄가 영원히 끝납니까? 탐심이라는 것이 마음에 있는데, 탐심을 한번 제거했다고 해서 그다음에는 탐심이 영원히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마음, 오늘 한번 내가 극복했다고 해서 내일 다시는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악의 정체입니다.

그다음 아달월 14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300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원래 아달월 13일 하루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4일에도 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왕에게 부탁해서 그다음 날도 이런 일이 있으면 이들을 진멸해도 되겠느냐고 했고, 왕이 뜻대로 하라 해서 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했다고 했습니다.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7만 5천 명을 도륙하되, 전국적으로 127도에서 7만 5천 명이나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에스더 9:16). 참 신기합니다. 이런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하만과 악한 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하만이 은 1만 달란트를 왕의 창고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은 1만 달란트를 행정 비용으로 쓰고 유대인들을 진멸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그것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방어적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재산에는 손도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3-2. 헤렘 명령의 실천

이것은 누가 명령 내린 것일까요? 에스더와 모르드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헤렘(חֵרֶם) 명령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6장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도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여리고성 전투할 때 전리품들을 한 사람도 나눠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창고에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은 가나안 땅 48개 성읍 중에 첫 번째 성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성에서 너희들이 가지는 것은 너희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의 창고에 다 집어넣어라, 이것이 헤렘 명령입니다. 철저하게 너희는 거기에서 이득을 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헤렘 명령을 첫 번째 실천한 분이 계십니다. 누굴까요? 하나님이 헤렘 명령을 한 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전리품을 자기가 하나도 가져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4장 21-23절을 보시면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신들메 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이 소돔 왕들의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것을 보고 구출하러 갑니다. 318명의 군인들을 데리고 야간 기습 작전을 해서 다 구출해 옵니다. 사람도 구출하고 전리품도 잔뜩 안고 돌아옵니다. 소돔 왕이 와서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백성들이니까 다 주고 전리품은 네가 당연히 가져가라, 우리는 못한 것을 네가 했으니까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도 가지지 않겠다, 나는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 돈으로 내가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이유가 없다 하고 다 내놓습니다. 그들과 함께 갔던 사람들의 급여 주는 것만 처리하고 다 돌려줘 버립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발적인 헤렘 명령이었습니다.

4. 전리품과 신앙

4-1. 순수한 헌신의 원리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런 못된 마음의 습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주의 일에 헌신하고 봉사했으니까 뭐 좀 떨어지는 것이 있겠지, 하나님 내가 하나님 일에 얼마나 20년 30년 열심히 일하고 했는데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하나님 저 복 주셔야죠,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시는 분 하나님이시고 부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안 주셔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가장 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천국을 보장받은 백성들입니다. 이 땅에서 눈 감으면 천국에서 눈 뜨는 것이 보장된 백성들입니다. 신앙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으로 이 땅에서 플러스 알파, 보너스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전리품을 요구합니다. 전쟁하고 나서 손에 드는 것, 주의 일 봉사하고 나서 가지는 것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전리품이 명예일 수 있습니다. 남들의 칭찬일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교회 봉사 이만큼 했는데 직분 받아야지, 직분이 나에게 전리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구했는데 하나님 우리 자녀가 뭐 좀 잘 되어야지, 내 자녀가 내 전리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내 전리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채워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원망하고, 지금까지 내가 헌신하고 수고한 모든 것을 다 깡그리 부정하고 하나님과 척지고 등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전리품을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다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다 내 창고에 들여라 하면, 너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면, 너 10년간 아무것도 없다 하면,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구원 받았잖아요. 이것이 신앙의 아주 수준 높은 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딱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가나안 48개 성읍 중에 여리고성이 제일 큽니다. 여리고성이 제일 크다는 말은 거기서 건질 것이 제일 많다는 것입니다. 건질 것이 제일 많은 성에서 아무것도 못 가져가게 하니까 속 뒤집어질 것입니다. 딱 들어가 보면 아는데 여기 은금과 패물이 많습니다. 이것 다 챙겨다가 정착 자금으로 써야지, 여기 가나안 땅에서 땅 사고 집 사고 밭 사고 논 사고 해야지 하는 것입니다. 다 잘 지켰는데 딱 한 놈이, 한 분도 아닙니다 한 놈입니다, 아간이라는 한 놈이 그것을 안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전리품 내놓으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내어주셨는데, 거기에다가 우리는 당당하게 더 무엇을 자꾸 달라고 합니까? 구원받은 은혜가 가장 값지고 가장 큰데 나머지는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굶기십니까? 옷 벗고 다니게 하십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 다 보면 하나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지금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이것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과 상대하는 영의 싸움이니 절대로 그들의 재산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4-2. 사울의 실패

모르드개의 먼 조상이었던 사울,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이 헤렘 명령을 못 지켰습니다. 사무엘상 14장 5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한마디로 사울이 수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용병입니다. 용병이 그냥 옵니까? 다른 나라 용병이 우리나라 와서 일할 때 용병은 월급을 줘야 합니다. 특히 용병은 자기 목숨을 걸고 일합니다. 전쟁합니다. 급여가 셉니다. 사울이 이 짓을 했습니다. 전쟁할 때 용병을 많이 수집했습니다. 그러니 그 용병에게 나가야 될 급여들이 있고 그들에게 줘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사무엘상 14장 마지막 절입니다. 그리고 15장이 시작되는데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와서 명령합니다. 아말렉 진멸 명령, 아말렉을 진멸하는데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헤렘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 입장에서는 용병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시키고 나서 거기에서 얻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것도 못 가져오면 용병 월급은 누가 줍니까? 용병들은 누가 먹이고 누가 입힙니까? 그러니까 그 명령을 안 지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8-9절을 보십시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 영적 전쟁을 용병을 들여서 하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 이것을 남겨놨다가 용병 월급 줘야지 한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기가 막히니까 사무엘이 와서 책망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이래서 버림받는 것입니다.

전리품 챙기려고 하다가 버림받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할 때, 나 이만큼 했으니 주세요 라고 자꾸 했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본질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입니까? 이 영혼 구원 받았으면 그다음은 정말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은 아무 욕심 내시면 안 됩니다.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사울이 전리품 욕심내다가 버림받았습니다. 영혼 구원 받았으면 그 다음 것은 있어도 감사하고 없어도 감사하고, 있으면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없으면 속 편해서 감사하고, 그래도 밥은 다 먹고 사니까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이 죄짓지 않습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모르드개는 자기 조상 사울이 헤렘 명령에 실패한 것을 후손 모르드개가 절대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재산에는 일절 손대지 않습니다.

5. 부림절의 제정

5-1. 기억과 전승

이제 부림절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에스더 9장 20절,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막 앞에서 나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기록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기록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역사로 남기는 것, 후세에 남기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곧 7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70주년의 기록이 없으면 나중에 100년쯤 지나고 나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50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60주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드개는 기록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세를 위해서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7절과 아주 같습니다. 모세 할아버지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2세대들이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이렇게 부탁한 것입니다. 기억하라, 생각하라, 물으라. 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과거의 역사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그 의미를 계속 묻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의 전승이라는 것은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이런 어려움을 이렇게 극복했다고 계속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보면 교회 전반적으로, 좀 작게 보면 우리 교회 단위에서, 또 각 부서에서, 오래된 교사 선생님이 이제 막 들어온 교사 선생님에게, 형이 동생에게, 언니가 동생들에게 그렇게 일러주고 알려주는 것이 신앙의 전승입니다. 요즘은 그것을 꼰대라고 자꾸 싫어하는데, 그런데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 신앙의 전승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합니까? 젊은 사람들이 그것 듣기 싫어하니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왜 말하면 안 됩니까? 말해야지요. 옛날 권사님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했는지, 옛날 어른들이 어떻게 믿음 생활했는지 그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주고, 그렇게 시대가 바뀌어도 그 본질과 정신을 잊지 말라고 계속 얘기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림절, 이 날을 우리가 기억하자고 모르드개가 제안한 것입니다.

5-2. 슬픔이 기쁨으로

에스더 9장 22절,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것이 부림절의 의미입니다. 첫 번째 조서가 반포될 때까지는 슬픔이었습니다. 애통이었습니다. 두 번째 조서가 반포되고 나서는 기쁨과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그날이 올까? 정말 그렇게 될까? 의심하고 불안했던 8개월 20일이 지나고 나서는 정말 이날이 길한 날이 되고 기쁜 날이 되었습니다.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에스더 9:22).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쁜 날이니까 자기들끼리만 예물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잔치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가장 잔치가 많이 열리는 곳입니다. 주일날 1년에 52주, 주일날 이날이 잔칫날 아닙니까? 주일이 어떤 날입니까? 주의 날입니다. 부활절입니다. 예수님 금요일 밤에 무덤에 들어가시고 3일째 되는 날 새벽에 부활하셨으니까 주일은 부활의 날입니다. 부활의 날은 잔칫날입니다. 잔칫날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식당에서 돈도 안 받고 다 밥 먹는 것이고, 다 그냥 먹는 것입니다. 잔칫날이니까요.

그래서 교회 오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잘 먹고 서로 나누어주고, 교회 와서 인심이 박하다고 느끼면 안 됩니다. 잔칫집에 가서 박하다고 느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잔칫집은 풍성해야 합니다.

5-3. 제비의 섭리

에스더 9장 26절,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부르(פּוּר)가 무엇입니까? 제비라는 뜻입니다. 뽑다 할 때 제비입니다. 부림(פּוּרִים)이라는 말은 제비의 복수형입니다. 제비 뽑아 된 날이 계속 이어진다 해서 부림, 제비의 복수형입니다.

잠언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열둘째 달 아달월 13일, 제비 뽑은 사람이 누굽니까? 하만이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열받아서 왕에게 가서 유대인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허락받고 날을 받았습니다. 그 절차가 어떤 절차였습니까? 제비 뽑는 절차입니다. 그때 그 제비 뽑은 날이 아달월 13일입니다. 제비를 누가 뽑았습니까? 하만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여기에 하만을 한번 넣어볼까요? 제비는 하만이 뽑았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더 3장 7절을 한번 보십시오. "아하수에로 왕 제12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누가 뽑았습니까? 하만이 뽑은 것입니다. 하만은 그것을 뽑았을 때 "아, 왜 이것이 아달월이냐? 11달이나 기다려야 되네" 하고 너무 화가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배웠듯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악당은 제비 뽑아서 사람을 멸할 것을 계획하고 자기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지금도 이 순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고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제비는 하만이 뽑았으나 그 제비의 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부림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그때 이후로 부림절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구나, 악한 사람 하만이 제비를 뽑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르드개를 통해서, 에스더를 통해서 일하셨구나, 이것을 떠올렸습니다.

부림절이 유다인의 전통이 된 과정이 여기 나옵니다. "아비하일의 딸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가 정권으로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이 둘째 편지를 굳게 지키게 하되 화평하고 진실한 말로 편지를 써서 아하수에로의 나라 127방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라. 에스더의 명령이 이 부림에 대한 일을 굳게 하였고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더라"(에스더 9:29-32).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많이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부림, 제비 뽑은 날, 이날은 슬픔이 바뀌어서 기쁨이 되고, 애통이 바뀌어서 즐거움이 된 날입니다. 그들이 금식 기도하고 기도에 응답받은 날입니다. 동시에 그날은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시고 일하신다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부림절의 정신을 우리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부림절을 1년에 이틀을 지킵니다. 마지막 달 14일과 15일에 지키면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는 잔치로 지키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6. 모르드개의 통치

6-1. 백성의 토브

이제 10장으로 갑니다. 모르드개가 제국의 2인자가 된 후 페르시아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본토와 바다 섬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에스더 10:1). 아하수에로가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참 무능하고 분별력이 없고 정치를 내팽개친 인간 아닙니까? 그런데 이 인간이 그의 섬들과 바다의 섬들과 여러 영토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라 한다고 바쳤을까요? 아하수에로가 하면 안 합니다. 모르드개가 들어가서, 모르드개가 왕을 잘 도와서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는 뜻입니다.

에스더 10장 2절, "왕의 능력과 권세의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라는 말입니다. 아하수에로가 잘한 것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높여 놓은 것입니다. 모르드개를 높여 놓으니까, 모르드개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존귀하게 해 놓으니까, 하나님은 아하수에로는 미워하셔도 모르드개는 이뻐하시니까, 하나님이 이 모르드개를 보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요셉에게," 여기서 '그'는 보디발입니다,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보디발이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그 집 사람에게 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정권을 요셉에게 주니까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그러므로 내가 요셉이 되지 못하거든, 내가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모르드개와 요셉을 발견할 수 있는 눈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좀 편하게 삽니다. 정권을 주면 됩니다. 그런 분이 우리나라의 정치가가 되고, 그런 분이 이 지역을 다스리고, 그런 하나님을 잘 믿는 정치인, 하나님을 잘 믿는 경제인, 하나님을 잘 믿는 여러 각계각층의 리더들이 세워지고, 그런 사람이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 중에서 자라나고 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야 그분을 세워놓고 높여 놓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한 사람을 보고 모든 것을 다 평안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 지혜가 있기 바랍니다.

6-2. 종족의 샬롬

이제 마지막 3절을 보십시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에스더 10:3), 제국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유다인 중에 크게 존귀하게 되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단어가 나옵니다. '백성의 이익'이라는 말, 그리고 '안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익과 안위. 이익은 히브리어를 보면 토브(טוֹב)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종족을 안위하였다가 샬롬(שָׁלוֹם)입니다.

창세기 1장 25절과 31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토브했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여기도 토브라는 말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셨던 말씀이 토브입니다. 좋았더라, 너무 행복했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 토브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르드개가 한 것을 보십시오.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모르드개가 한 것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끔 그가 정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부국강병하게 해주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주거나,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백성들이 그냥 편하게 살게끔 큰 집을 지어주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토브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모르드개가 정말 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서는 에스더서가 아니라 모르드개서입니다. 사실은 모르드개가 주인공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진짜 리더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까? 그가 잘못된 길로 가면 책망해야 합니다. 그가 죄 지으면 그것이 죄라고 일러줘야 합니다. 그저 돈만 주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이 그냥 세금만 깎아주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일러주고, 제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창조의 원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토브하게 백성의 이익을 도모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토브입니다.

우리가 부모 아닙니까? 교회 또 우리가 직분자들 아닙니까? 나를 보고 믿고 따르는 내 자녀들이 있고 우리 후배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 구역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분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이익을 도모해 주셔야 합니다. 토브하게 만들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책망도 필요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샬롬입니다. 샬롬이 평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인사처럼 "샬롬, 샬롬"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을 보십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의 고난과 수난을 예고한 시입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이때 평화가 샬롬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샬롬은 예수님의 징계의 결과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 나음이 라파(רָפָא)입니다. 여호와 라파, 치유하시는 하나님. 내가 치유받은 것은 그가 맞아서 내가 치유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진정한 샬롬과 평화라는 것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6·25전쟁 74주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유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은 그냥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의 피, 그들의 죽음, 그리고 연합군,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왔던 저 타국에서 멀리까지 와서 죽어갔던 그들의 젊음의 희생, 그 대가를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 평화에 속으면 안 됩니다. 진짜 평화는 피 흘린 이후에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대가가 오늘 우리의 샬롬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처음 찾아가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이 구약식으로는 샬롬이고, 신약식으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헬라어 에이레네, 이것이 평강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에이레네, 평강을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 흘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환경이 변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기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것은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나서 평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모르드개가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샬롬을 주었더라, 이 말은 무엇입니까? 그가 죽을 만큼 수고하고 피 흘릴 만큼 고생했다는 뜻입니다. 모르드개가 왕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위에는 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백성들의 샬롬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토브와 샬롬의 열매입니다.

결론: 토브와 샬롬을 위하여

우리가 여기서 또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 뒤에서 제국의 2인자가 됩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제국의 2인자의 자리와 왕후의 자리를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셉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는데 이집트의 총리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좀 주셨으면 그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으면, 저에게는 목사라는 직분을, 중직이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직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토브와 샬롬을 위해서 일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인생은 그것을 잘 기억하시고 에스더서를 마무리합니다.

에스더서는 아주 무거운 책이고, 재미있으면서 복음적인 책이었습니다. 사실은 모르드개서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8개월 20일의 불안한 시간을 초림과 재림의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빗대어 봅니다. 불안하면서 믿고 믿으면서 불안한 우리의 이 종말의 시대이지만 결국 최후 승리는 우리에게 주심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그 길을 이끌어 가시고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분은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선물들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르드개가 사람들의 토브와 샬롬을 위해서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것처럼 주여 우리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좋음과 토브와 그들의 평강 샬롬을 위해서 일하고 성실하게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기를 믿으며, 오늘 이 말씀 통해서 깨달아 알고 기억한 것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