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산 소망을 가진 거룩한 백성 / 전체녹취

산 소망을 가진 거룩한 백성 (벧전 1장)

베드로전서 1장 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야고보서를 여섯 번에 걸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시작해서 여덟 번에 걸쳐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사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제자 아닙니까? 예수님도 그분을 잘 아시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아마 자부할 것입니다.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는데, 사실 마가라는 이름을 빌어서 마가복음이라고 썼지만, 그 마가복음은 베드로 복음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마가라는 사람이 복음서 형태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모든 상황을 보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로서 첫 번째 복음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베드로전후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흩어진 교회,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좋을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도 종말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그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지금 우리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전후서는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할 만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우리에게 종말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들려주는 아주 유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여덟 번에 걸쳐서 공부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함께 배우면 좋겠습니다.

먼저 1장의 주제를 "산 소망을 가진 거룩한 백성"이라고 잡았는데, 거룩이라는 말의 신약적인 의미를 조금 이따가 설명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래 베드로의 모습과는 조금 낯선 모습입니다. 굉장히 성숙하고 믿음이 깊어진 모습을 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는 좌충우돌이었습니다. 여기 한번 쳐봤고 저기 쳐봤고, 예수님께 혼나기도 하고, 굉장히 다혈질이구나 한 성격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베드로전후서를 읽어보면 그런 베드로는 다 사라지고 굉장히 깊이가 있고 성숙해진 모습, 신앙에 철이 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1. 사도로서의 정체성

베드로는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를 소개하는 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사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그런데 야고보서를 공부했으니까 기억이 아마 나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기를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인데 자기를 가리켜 종이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자신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라는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종이 훨씬 더 자기를 낮추는 표현이 아닌가, 사도라고 하니 베드로가 조금 아직 뻣뻣하고 교만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사도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금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가서,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고 세례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이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헬라어를 보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 마지막 우리 주님의 명령이 "너희는 가서"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고 세례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이 사명을 지금까지 잘 감당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이것을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는 표현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헤어질 때 승천하실 때 주님께서 주셨던 그 유언과 같은 말씀, 사도가 되라,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라. 보내심을 받은 자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보낸 자의 의도대로 살아야 합니다. 보낸 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 삼고 세례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그것이 사도입니다. 그 사도의 사명을 베드로는 지금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을 여기 이 짧은 1절에서 자기 정체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말하는 분도 있고, 후천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얻어진 것도 있습니다. 부모라는 이름도 있고, 직업인의 이름도 있고, 여러 이름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교회와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자의 이름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사명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를 항상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그것을 점검하지 않으면 그냥 원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자연인의 이름대로 그냥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름대로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라는 이름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영광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자녀들이 잘 나갈 때, 자녀들이 잘할 때, 자녀들이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고 돈 잘 벌고 효도하고, 그럴 때는 부모라는 이름이 굉장히 자랑스럽습니다. 또 정말 좋은 직장에 내가 몸담고 있을 때는 그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고 일을 주시고 사명 주신 그 사명자의 이름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데 그것이 희미해집니다. 그런 이름으로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런 이름으로 사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럽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 사도의 이름을 첫 번째 편지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랑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 무엇이라고 쓰시겠습니까? 그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2. 교회의 정체성

이어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씀을 그냥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지금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나타난 교회의 정체성을 살펴봅시다.

2-1. 흩어진 교회

첫째, 흩어진,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입니다. 당연히 그 당시에는 박해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 그리고 로마의 박해로 교회를 핍박하니까 그 박해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나라가 없고 로마 식민지 하에서 본토에 살기 어려우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흩어졌다는 것이 사실은 교회의 정체성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여서도 교회지만 흩어져야 또 다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모여서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 나누고 있는데, 모여서 교회는 모이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면으로 예배드리는 그 의미와 기쁨과 영광과 그 안에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혼자 예배드리면 약합니다. 혼자 예배드리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세 제대로 잡고 정말 예배에 집중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다 경험해 봐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흩어져도 또 교회입니다. 왜?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직장에 가서도 나는 교회이고, 가정에서도 교회이고, 동네에서도 나는 교회입니다. 내가 흩어져서 교회가 되지 않으면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내 삶이 교회의 삶이 되지 않고 성도의 삶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할 때 흩어진,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 첫 번째입니다. 만약에 모여서만 교회라고 한다면 사탄은 겁을 내지 않습니다. 수만 명 교회, 모이면 뭐합니까? 모여서만 교회인데, 자기들끼리만 큰 예배당 짓고 자기들끼리만 부어라 마시라 즐거워하고, 우리끼리 이렇게 위세 드러내고 이렇게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자랑하면 사탄은 겁을 하나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의 삶을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오늘 이 땅에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모이는 교회만 강조해서 그렇습니다. 흩어져서도 우리가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흩어져서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니까 힘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에 그냥 발목 잡히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힘이 없습니다. 흩어져도 교회여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흩어져서 너희들은 교회다, 비록 핍박이 있어도 너희는 거기에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2-2. 나그네 된 교회

두 번째, 교회의 정체성은 나그네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9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어디에 거했다고 했습니까? 장막에. 좋은 벽돌집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이삭, 야곱과 함께 장막에 거했습니다. 나그네가 베드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베드로전후서에 나그네 이야기가 계속 반복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의 정체성 두 번째는 나그네입니다. 여러분, 나그네는 어떠해야 합니까? 진짜 나그네입니까? 나그네가 짐이 많으면 나그네라 할 수 있습니까? 짐 많은데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나그네로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봇짐 하나 메고 그냥 이쪽저쪽 다니면서 가볍게 다녀야 합니다. 짐이 많으면 나그네라 할 수 없습니다. 또 나그네는 외롭습니다. 혼자 있으면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교제하는 사람, 같이 다니는 길동무가 있으면 나그네 삶이 덜 외롭습니다. 같은 길을 가고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친구가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데 또 나그네라고 해도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평생 목적지 없이 그냥 다니면 그것은 나그네가 아니고 거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나그네와 거지가 다른 것은 목적지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4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나그네란 말도 나오고 본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향은 진짜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로 살지만 본향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나그네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인데, 교회가 짐이 좀 가벼워야 합니다. 교회가 짐이 가벼워야 된다는 말은 교회가 큰 건물 짓고 좋은 건물 짓고 이 땅에 너무너무 화려하게 교회를 지어 놓으면 그것은 나그네 정신에 합당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여서도 교회이고 흩어져도 교회라 했습니다. 나도 교회입니다. 짐이 너무 많으면, 이 땅에 세워놓고 이 땅에 뿌려놓고 이 땅에 만들어 놓고 세워놓은 것이 너무 많으면 아까워서 어떻게 천국 갑니까? 그것을 어떻게 질질 끌고 돌아다닙니까? 하나님이 떠나라 하면 그냥 가볍게 놓고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또 나그네가 친구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같은 길 걸어가는 길동무, 성도의 교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같은 방향을 가지고 함께 믿음 생활할 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영적인 동무들, 교제할 수 있는 분들, 단 몇 분이라도 내 이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도 토로하지만 아주 가까운 분들에게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분, 그런 분들이 몇 분 있으면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지 않으려면 본향,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천국을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가볍게 교제하고 천국을 지향하고, 그 이야기를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나그네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교회가 합당한 교회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는가? 또 우리는 개인으로서 흩어진 교회로서 우리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을 한번 점검해 봐야 되겠습니다. 제대로 한번 살펴보고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2-3. 미리 아심을 받은 교회

2절을 보시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가 또 나오는데, 세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것이 또 다른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줄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십 년 전만 해도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내가 손들어서, 내 발로 걸어와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 된 것도,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이 된 것도, 지역교회의 성도가 된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아주 거룩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신비로움 말미암아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는 "넌 왜 우리 교회에 왔냐? 너 같은 게." 이런 생각조차 하셔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힘들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공동체에서 "저분 때문에 나 참 힘들다"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신비입니다. 왜? 참, 저분이 하고 많은 교회 중에 저 옆 교회 안 가시고 우리 교회 오시게 된 것은 너무너무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 정말 신비롭습니다. 놀랍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이름을 찬양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으로 말미암아 잘 생각해 보면 그분의 그 별난 모습 때문에 내가 좀 연단되고 있습니다. 내가 좀 깎여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우리가 다 공동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날 일도 별로 없고 열받을 일도 별로 없고 그냥 감사한 일만 생기는 것입니다.

2-4.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교회

네 번째, 성령이 거룩하게 하시므로, 이것도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거룩해진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 왜 그렇게 세속적이니? 넌 왜 그렇게 세상적이야?" 그것은 아직까지 성령이 그분을 덜 만져서 그런 것인데, 기대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만지면 저분이 얼마나 거룩하게 될지, 성령이 그분을 뒤흔들어 놓으면 저분이 얼마나 위대한 성도가 될지를 우리는 기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이 각 사람, 각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때에 그것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저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을 내가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것이니까. "내가 저 인간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겠다."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그냥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고 우리는 그저 씨를 뿌리고 열심히 기도할 뿐인 것입니다.

2-5. 택하심을 받은 교회

다섯 번째,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택한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택했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여기 보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입니다.

교회 정체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1절과 2절에서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흩어졌고, 나그네이고, 하나님이 미리 아셨고,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고, 택하셨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다 나에게 적용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면 "아, 교회는 이런 것이로구나." 사도 베드로가 교회를 정의할 때 이런 식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3. 성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

이제 본격적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살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왜 찬송하느냐?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그분이 긍휼하셨기 때문에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긍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긍휼하시다, 이 말씀 보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하시다 하면 내게 들어주면 긍휼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기도 들어주면 "아, 하나님 긍휼하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조금 수준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 했습니다. 그것을 산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소망, 소망은 엘피스(ἐλπίς)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세상 유업은 반대입니다. 썩고 쇠하고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인 산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이것이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하셨는데, 그 소망은 천국 소망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천국 소망을 계속 이야기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은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고, 출세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남들보다 더 잘 나가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썩고 쇠하고 더러운 것들입니다. 왜 더러운 것입니까? 남들보다 잘 나가려면 남들을 좀 짓밟고 올라가야 되는 처세술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깨끗한 물질만 있습니까? 거기에 때 묻은 물질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오히려 요즘은 산 소망이 아니라 죽은 소망을 가리킵니다. 산 소망이 아니라 "모두 부자 될지어다" 이러면 아멘 하고 난리가 납니다. 민망해서 어떻게 앉아 있습니까? 산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다르게 고귀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흐려서 되겠습니까? "야, 교회 와 봐. 돈 벌 거야." 이런 식으로 싸구려 복음을 전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산 소망이고 살아있는 유업입니다.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되는 것, 교회는 적어도 그런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고결한 가치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4.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의 믿음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대에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우리처럼 하루 세 끼 잘 먹고, 저녁이 되면 양산천변 걷고 운동하고, 아침이 되면 "가을이네, 멋지네" 하고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산책하는 팔자 좋은 성도들이 아닙니다. 이분들은 굉장한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으니까 잡히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도 있고, 가나안인 시몬처럼 산 채로 톱에 썰려서 죽을 수도 있고, 도마처럼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껍데기가 다 벗겨져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냥 생존 자체가 고난입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고난입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5절을 보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해주십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면 그것은 곧 구원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어렵게 말해 놓은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 보호하심 아래 있으면 결국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4-1. 믿음의 본질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합격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면 믿음입니까? 이 믿음이 무엇이냐, 아마 저는 생각하기를 베드로가 이 부분을 쓸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을 보시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잡혀서 똑같은 운명에 처할까 봐 무서워서 한 방에 모여 가지고 문 꽁꽁 닫고 불도 켜지 못하고 커튼 다 치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마 베드로가 한소리 했을 것입니다. "평강은 얼어 죽을 놈의 평강, 무서워 죽겠구먼." 사실 이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 제자들 공동체에 있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무서워 죽겠는데 평강은 무슨 평강입니까? 그 자리에서 순간이동 딱 시켜 가지고, 제자들 다 데리고 구름 태워 가지고 올라가 버리면 평강이 있겠지요. 그런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은 무슨 평강입니까? 하나도 평강하지 않은데.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20절을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제자들이 돈을 보고 기뻐했습니까? 무엇을 보고 기뻐했습니까? 주를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두려워 가지고 문 꽁꽁 걸어 닫고 무서워서 죽을 맛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까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쁨이 생긴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것이 믿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것, 고난 가운데 있는데 내 상황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고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 손도 만져봐, 내 옆구리도 만져봐" 보여주십니다. 그 주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생기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것을 다 일정 부분 경험한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경험하셨지 않습니까?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똑같은데, 그런데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생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지금 이 지경에, 지금 기뻐하니까."

예수님이 그다음 21-22절에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제는 진짜 평강이 생긴 것입니다. 주를 보고 기뻐했으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제는 두려워하지 마, 나가라 하는 것입니다. 보내노라.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무엇을 줘서 보냅니까?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아도 주를 보고 기뻐하고 성령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내 주먹을 믿는 사람도 있고 돈을 믿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 돈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까지 이 문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면 그것이 진짜 큰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를 보고 기뻐하고 용기 내고 성령 충만해서 당당하게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숨지 말고.

베드로가 지금 흩어져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 지금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는 것 내가 다 안다. 그런데 숨지 마. 옛날에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너희도 두려워하지 마라. 주를 보고 기뻐하고 성령 충만해서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가라."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4-2.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제가 드린 말씀을 한번 생각하면서 6절부터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왜 기뻐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니까. 여러 가지 시험이 와서 근심이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니까 주를 보고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기쁨이 없으나 주를 보면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기쁨 이야기를 베드로가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이 믿음의 확실함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의 확실함은 주를 보니까 믿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믿음 가지고 있으면 칭찬받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 갖고 계셔서 다 칭찬받기 바랍니다. 이 믿음 갖고 있어야 칭찬받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있어야, 이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살아남는 믿음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칭찬받습니다.

9절에 "믿음의 결국" 결국은 텔로스(τέλος), 목적지, 종착지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목적지가 무엇입니까? 결국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는 이유가 내 영혼이 구원받으려고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한 모든 행위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까 믿음이 뭐라 했습니까?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를 보고 기뻐하게끔 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 그것을 교회가 해드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금요심야집회 해 가지고 "오늘 돈벼락이 여러분들에게 떨어지십시오" 이런 것이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을 세워주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각종 여러 가지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믿음을 세우는 것이 교회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향해야 될 목적입니다.

하나님 바라보게 하는 것, 주님 바라보게 하는 것.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다가 "아, 이것이 좀 잘못돼 간다"라고 느낄 때는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됩니다. 교회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언제 잘못돼 가느냐.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게 하는 것인데, 사람을 자꾸 바라보게 하는 느낌이 보이면 그것은 잘못돼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못돼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것, 어느 특정한 한 인물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뒤로 물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받는 교회, 주를 보고 기뻐하도록 세워가는 교회, 그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고, 우리는 그런 신앙생활을 꿈꾸고, 함께 만들어가고 빚어가야 합니다.

5. 구원에 대한 성경의 증언

그다음, 구원을 연구하고 전한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0절에 보니까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의 율법서를 쓰신 선지자들, 또 시편을 쓴 다윗 같은 분들, 이런 분들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엄청나게 많이 말씀들을 다 기록해 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은혜로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시편 22편 14-18절입니다. 누가 쓴 시편이냐 하면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시편 22편을 썼는데 아주 기가 막힙니다. 내용을 봅시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8절 보니까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것을 그냥 읽어보니까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정확하게 썼을까요? 다윗이 알았을까요? 다윗의 지혜로 이것이 나온 것일까요? 성령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기름 부으시고 역사하셔서 너희들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에 이미 다 기록해 두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성령께서 그 저자를 통해서 역사하셔서 쓰신 말씀입니다. 단 한 자도 인간의 말이 거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천사들은 이런 성경을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들보다 나은 분들이 이분들입니다.

6. 말씀을 받는 성도의 자세

자 이제 이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렇게 귀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받는 성도들의 태도가 어때야 되는가를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각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 그 말씀이 각 교회 성도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말씀은 너희는 어떻게 받아야 되느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성령이 감동해서 말씀을 계시로 주셨으므로 너희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말씀받을 때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허리를 동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서신서에 바울도 자주 쓰고 베드로도 여기 지금 쓰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 저 중동 지방 사람들이 평소에는 원피스 입고 다닙니다. 머리 이렇게 쑥 집어넣으면 허리까지 발까지 축 처지는 것을 입고 그냥 슬리퍼 신고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일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일할 때 허리를 줄로 딱 동입니다. 준비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을 때는 준비하라, 집중하라, 허리를 동이고 그 말씀을 받는 준비를 제대로 하라, 들을 준비를 하라. 뒤로 처져 있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마음을 제대로 새겨라.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바라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기 "바랄지어다"는 엘피사테(ἐλπίσατε), 기대, 확신, 소망의 동사형입니다. 기대와 확신과 소망을 가져라.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소망도 가지고.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확신, 그 믿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랄지어다.

그리고 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14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녀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말씀을 들을 때는 옛날에 너희가 말씀받기 전에 세상에서 살던 때처럼 세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는. 그리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

6-1. 거룩의 의미

거룩한, 무슨 뜻입니까? 하기오스(ἅγιος). 하기오스가 잘 보십시오. 거룩한, 봉헌된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카도쉬(קָדוֹשׁ)인데 이것은 구별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거룩한 하기오스는 봉헌된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는 자는 계시의 말씀을 받는 자는 봉헌된 마음으로 계시의 말씀을 받으라.

봉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헌금을 드리는 것을 봉헌이라 합니다. 받들어서 드리는 것. 그러면 우리 주머니에서 하나님께 헌금을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는데 "아, 그것 취소해요. 다시 돌려주세요."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인데 다시 무효입니까? 아닙니다. 다시 돌려주세요. 안 됩니다. 이 말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 드림받은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순종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너를 지배하고,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말씀이 너를 이끄는 대로 갈 각오를 하라. 너는 말씀을 듣는 자는 봉헌된 자다라는 뜻입니다. 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의 마음이나 너의 생각이나 너의 몸이 너의 것이 아니고 너는 이미 드려진 자다, 거룩한 자다. 그러니 말씀 듣고 나면 너는 너의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내가 말씀을 받았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굉장히 강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말씀 듣고 취사선택합니다. 좋은 것 취하고 아닌 것 버리고 잊어버리고, 딱딱 정리해서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남의 것, 이것은 내 남편이 좀 들어야 될 것, 이것은 우리 집 애가 좀 들어야 될 것, 이것은 김 집사가 들어야 될 것, 이것은 나는 아니고, 이렇게 우리가 말씀을 취사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6-2. 두려움으로 지내라

17절을 보시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짐이 가벼워야 되고, 동행자가 좀 있으면 좋고, 본향이 있어야 되고, 본향 없으면 거지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냥 나그네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향 찾는 나그네라 했습니다. 참된 유업,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 참된 가치를 찾아가는 나그네인데, 그 나그네로서의 삶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고 살아야지 너희 마음대로 함부로 살지 마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너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졌으니 또 너희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라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니 목사님, 하나님을 자꾸 무서워해서 돼요?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사랑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공의가, 정의가 그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회개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종국에는 심판하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경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짐도 마구 쌓아놓고 살고, 동역자도 자기가 좋은 동역자를 원하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역자를 원치 않습니다. 천국 본향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나는 천국보다 이 땅이 더 좋아요" 그러고 삽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나그네로 살 때 두려움으로 살아야 본향 찾는 나그네로 하나님이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7.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정의해 봅시다. 20-21절을 봅시다. "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셨으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어렵습니다. 분명히 우리말인데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더 쉽게 말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무엇입니까?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은 곧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을 곧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7-1. 말씀 순종과 형제 사랑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성경에 나오는 말은 다른 말로 좀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말이 진리인데, 진리는 변함없는 것입니다. 어제 이랬다가 오늘 이랬다가 내일도 달라지면 그것을 진리라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곧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진리라고 하면 말씀, 말씀은 곧 진리, 이렇게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말씀의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그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말씀의 순종함으로.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 "나는 사랑이 없다." 그 말은 내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보십시오. 옛적 선지자들이 성령으로 주신 그 말씀을 부여잡고, 내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을 통해 연구하고,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당연히 내가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 기도하게 됩니다. 당연히 말씀을 사랑하면.

7-2. 거듭남은 말씀으로

결론입니다. 이제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거듭남은 곧 무엇으로 됩니까? 말씀으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저는 이것이 너무너무 놀라운 말씀입니다. 왜? 베드로가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예수님과 3년을 항상 붙어 다닌 제자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베드로가 물 위도 걸었습니다.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만났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도 봤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이 분명히 죽었는데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막 나눠 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기적을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나병 환자 낫게 하신 예수님, 말씀 한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그런데 그 기적이 너희에게 거듭남을 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옛적 선지자들부터 주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는 것이지, 기적은 베드로가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가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기적을 경험했으나, 그러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간 사람이 베드로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에 진짜 기적은 말씀을 경험해서 말씀이 나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킨 것. 그래서 이 말씀이 세세토록 있도다. 이것이 1장의 핵심입니다. 이 핵심은 베드로전후서 끝까지 관통하는 말씀입니다. 잘 기억하시고, 사실 베드로전후서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한 번 더 읽어보고 숙지하시고 살펴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에 몸담고 있는지, 우리는 흩어진 자로서 한 개인으로서도 교회인데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우리는 나그네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아버지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소망의 교회 되게 하옵시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유업을 사모하는 정말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난 가운데 상황을 보지 않고 주를 보고 기뻐했던 제자들처럼, 베드로가 주신 이 말씀도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도 현장 가운데 고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으나, 우리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도 주를 보고 기뻐하며 주를 보고 용기 내고, 성령 받아서 세상 가운데로 용기 있게 나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우리에게 능력도 주시고 힘도 주셔서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세세토록 있는 그 말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하신 그 말씀을 부여잡고,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시는 그 말씀 한 절 한 절 소중히 여기고 가슴판에 새기고, 진리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