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2 - 하나님 나라 백성 (벧전 2장)
베드로전서 2장 1-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아멘.
오늘은 베드로전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고 그는 사실 경험한 것이 굉장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경험한 기적이 거듭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거듭남을 주는 것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고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 백성, 곧 거듭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썩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2장 말씀을 나눕니다.
1. 새로운 신분
1-1. 버려야 할 것과 사모해야 할 것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성도가 버려야 할 것과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읽은 말씀에 나오는데, 거듭난 성도라면 모름지기 가지고 가야 할 것이 있고 절대로 붙들고 있으면 안 되는 것,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합니다. 각각 그냥 툭툭 던진 말 같은데, 이것을 조합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조합해 보면 전부 다 상대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악독을 행하고, 누군가를 기만하고, 누군가에 대해서 외식하고, 누군가를 비방하는 말을 하고. 그래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행동, 이런 일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도가 이렇게 할까 싶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 이 중에 내가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악독이라고 하니까 좀 뭔가 꺼림칙하긴 한데, 비방하는 말 정도는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 상대방을 대해서 항상 이런 관계 가운데 얽히고설켜서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를 베드로가 지적합니다. 성도는, 적어도 거듭난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는 걸까요? 내가 거듭난 성도로 살고 싶고, 좀 품위 있게 살고 싶고, 좀 폼나게 살고 싶고, 격조 있게 살고 싶은데, 왜 자꾸 제삼자 누군가를 비방하고 마음속에 시기가 생기고, 그 시기가 조금 더 지나면 악한 마음이 생겨나는 걸까요? 내가 원래 글러먹어서 그런 겁니까? 나라는 인간이 원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겁니까? 그 뒤에 이제 유추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옵니다.
2절에 보니까 '갓난아이들같이'라고 합니다. 갓난아이 길러 보신 분들, 지금도 기르고 계신 분들 아시겠지만 갓난아이는 다른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잖아요. 별로가 아니라 오직 갓난아이가 신경 쓰는 것은 딱 한 가지, 엄마입니다. 엄마만 신경 쓰잖아요. 엄마가 젖을 주니까 엄마만 신경 쓰고, 갓난아이만큼 집중력이 뛰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목숨 걸고 젖을 물고, 목숨 걸고 자기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엄마를 바라보는지 몰라요. 우는 것도 우렁차게 울잖아요. 지금 제가 마이크 들고 하는 목소리보다 여기 이 본당 안에 갓난아이 하나가 그냥 살짝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울림이 크잖아요.
갓난아이가 그만큼 목청도 좋고 울림도 크고, 자기 전 존재를 다해서 엄마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들같이'라는 말은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어디에 집중하라? 뒤에 나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제 좀 배운 사람들이라 이 정도 되면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하고 순전한 젖이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순전한, 아돌로스(ἄδολος)는 '순수한', '오염되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것이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잖아요. 오염된다는 것은 어디에 오염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오염시킵니까? 사람이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서 가르치고 선포하는 목회자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염시킬 위험이 상당히 큽니다. 주로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냥 말씀 자체만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자기 사상과 자기 철학과 자기 욕심을 거기에 물타기 해서 전하면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오염시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정말 사모해야 할 것은 오염되지 않은 말씀, 순전한 말씀, 사람의 철학과 사람의 생각으로 물타기 된 말씀이 아니고 순도 100%의 진리의 말씀, 그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신령한'이라는 뜻이 나오는데, 우리가 신령하다라고 하면 뭔가 좀 구름 위에 한 단계 떠 있는 것을 상상하기 쉬운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를 보면 로기코스(λογικός)라고 되어 있어요. '합리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logic'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말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성경 말씀 읽어 보면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오염되지 않고 합리적인, 말이 되는 그런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즉, 앞의 말과 1절을 연결해서 보면,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뒤엉켜 살면서 남을 비방하고 시기하고 악독한 마음을 품고 그렇게 사는 이유는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닌 다른 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일에 자꾸. 그러다 보니까 자꾸 얽히고설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가장 관심 가져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관심 가져야 할 것.
거듭난 성도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거기에 가장 먼저, 갓난아이들처럼,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면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주로 말씀이 없으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그 말씀에 대한 열심이 없으면 이런 일에 자꾸만 휩싸이고 부차적인 일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시끄러운 교회 보십시오. 분열되는 교회 보십시오. 말씀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성장하게 하는데, 그 성장의 끝이 무엇입니까? 구원에 이르도록. 구원에 이르도록. 이것은 우리가 1장에서 본 것과 똑같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은 썩지 아니할 말씀으로 된다고 했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을 가장 많이 곁에서 보고 경험한 제자이지만,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을 만하잖아요. 이런 수제자 베드로께서 말씀을 강조하고 계시니까 우리가 믿고 따를 만하잖아요.
3절 보시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맛보았으면. '맛보다'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규오마이(γεύομαι), '경험적으로 알다'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어린아이처럼 사모해서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경험해 보면 계속해서 그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정말 맛있는 맛집을 경험해 보면 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또 생각나잖아요. 가보고 싶잖아요. 또 좋은 사람 데리고 가고, 가족들 데리고 가고, 먹이고 싶고, 거기서 약속 잡고 싶고 그렇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하나님의 말씀을 딱 먹고 경험하고 내가 성장하고 자란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세상 그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능력은 비밀입니다. 비밀은 무엇입니까? 경험해 본 사람들끼리만 아는 비밀.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가 없어요.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집중해야 할 일은 말씀이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오죠.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가셨어요. 그런데 마르다가 무엇을 합니까? 음식을 막 준비하잖아요. 마르다를 책망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를 욕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다 이야기를 하면 항상 교회에서 열심히 주방에서 일하시는 권사님들이 항의하고, "마르다 없으면 교회 돌아가는지 아세요? 마르다가 일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까요?" 그렇게 말은 안 하지만 그런 눈빛으로 저를 보시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마르다가 잘못한 것이 있어요. 무엇일까요?
본문에도 나오긴 하지만 맥락 안에서 한번 살펴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 집에 방문하신 목적을 묻지를 않았어요. 왜 오셨는지, 우리 집에 왜 오신 건지. 식사하러 오셨으면 음식 준비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말씀 전하러 오셨으면 말씀 듣는 것이 맞잖아요. 그것이 우선이잖아요. "예수님 제가 음식을 준비할까요?" 물어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원래 내가 잘하니까, 이것이 내가 좋으니까, 그냥 밥 차리고 음식 하고 막 야단법석인데요. 우리 예수님 보니까, 정말 예수님이 시장해서 배가 고파서 오셨으면 주님도 배가 고파서 제자들하고 길 가다가 밀밭에서 밀을 긁어서 드셨잖아요. "밥 먹자" 하셨을 거예요. 그 집이 내외하는 집도 아니고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 집에. 마리아 앉혀 놓고 말씀 전하고 계시잖아요. 우리 예수님이. 마리아는 그 앞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 듣고 있는데, 마르다는 제멋대로 바깥으로 다니면서 막 상관없이 행동하고 있다고요. 그것이 제일 큰 잘못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가만히 앉아서 말씀 듣고 있는 마리아에게 분통이 나는 것입니다. 시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것처럼 시기가 생기면 조금 더 발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악한 마음이 여기서 올라오잖아요. 그러면 이 마음이 올라와서 어디까지 올라옵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오죠. 그 목구멍에서 입으로 탁 나오잖아요. "예수님 내 동생 마리아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비방하는 말. 그것이 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르다를 적용해서 살펴보면, 가장 해야 할 일을 마르다가 놓친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일을 어린아이처럼, 갓난아이처럼 그것을 안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왜 오셨는지를 못 물어본 것입니다. 안 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이 불쌍하게 여기셔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더라도 족하니라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전하러 그 집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왜 오십니까? 우리가 성전에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회생활 하려고 오세요? 인간관계가 외로우니까, 집에 있으니까 혼자서 맨날 텔레비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니까, 사람 만나러, 교제하러, 사업하러, 명함 뿌리러, 정치인들처럼 당선되려고? 그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여기 오는 목적은 말씀대로 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제일 핵심 가치. 그것이 사라지면 그다음부터는 비방하는 말과 시기와 악독과 각종 기만, 이런 것이 계속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자기 점검을 할 때, 이런 마음이 생기고 비방하는 말이 자꾸 나오게 되면 그때는 자기 점검을 해 보십시오. 내가 갓난아이처럼 이전에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사모했는데 이것이 지금 무뎌졌고 떨어진 것은 아닌가? 이것을 사모하고 다시 회복하면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1-2. 보배로운 산돌
그다음,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무엇에 비유합니까? 4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가." 아주 독특한 표현입니다. 베드로만 이야기한 표현이에요.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어요? 돌로 표현했어요. 사실 우리가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야 넌 돌이야" 하면 기분 좋습니까, 나쁩니까? 나보고 머리 나쁘다고 하는 소리인가? 일단은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그 앞에 수식어가 예쁩니다. 산돌.
'Living Stone'입니다. 영어로 'Living Stone'. 돈으로 주고 산 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돌. 그리고 '보배로운'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요. 보배로운 산돌. 우리 한국 교회사에 이 산돌이라는 호를 쓰신 목사님이 계시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세요?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 호가 산돌입니다. 산돌 손양원. 어쨌든 예수님을 베드로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단 산돌,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고 돌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좀 해 보겠습니다. 시편 18편 2절을 보니까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등등 나오는데,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지금 돌이 2번 나왔습니다. 바위 그리고 반석. 하나님도 다윗이 하나님을 부를 때 돌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그냥 "예수님 당신은 돌멩이예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바위, 반석은 어떤 의미입니까? 변함이 없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오르신 그 산에도 흔들바위가 있었고, 아버지가 오르신 그 산에도 흔들바위는 있었고, 내가 수학여행 가서 밀어 본 그 산에도 흔들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그 반석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돌로 표현하는 것은 변함없다는 뜻입니다.
항상 그 자리, 변함없다. 또 마태복음 21장에 보니까요,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모퉁이의 머릿돌. 모퉁잇돌입니다. 모퉁잇돌 들어 보셨죠? 이것은 코너스톤(Cornerstone)이잖아요. 구석에 있는 돌. 이 건축자들의 모퉁잇돌은 한마디로 말하면 집을 지을 때 옛날에 돌집을 지었잖아요. 요즘 콘크리트 쳐서 짓는 집이 아니고 돌로 쌓아서 올린 집인데, 그때 이 돌은 첫 시작하는 아주 중요한 구석에 있는 돌, 모퉁잇돌입니다. 여기서부터 집 짓기가 시작되는 돌.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을 보니까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시작하는 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저 구석에 시작하는 돌. 무엇을 시작하는 돌이 되셨는가? "그의 안에서", 즉 예수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무엇이 되어 가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즉 예수님이 성전, 즉 교회를 시작하는 첫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닙니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표현을 한번 보세요. 바울이 이야기한 이 표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성전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주 안에 성전이 있습니까? 이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수학 시간에 포함 관계, 집합의 포함 관계를 보면 예수님이 훨씬 더 큰 개념이고요, 그 집합 안에 무엇이 있어요?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착각하죠. 교회 오면 예수님 계신다. 틀린 말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보다 더 큰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 교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고,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범위 안에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다닌다, 가방 들고 교회 다닌다, 그래서 성도가 아닙니다.
진짜 성도는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성도인데,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자잖아요. 그 사람이 진짜 교인입니다. 교회는 가방 들고 다녔는데 예수님 말씀 밖에 있는 사람을 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기치고 나쁜 짓 하고 말과 행실이 다르고. 교인 아닙니다. 그냥 교적은 있겠죠. 거기 사회생활하려고 그냥 교회 다니니까. 그런데 그 사람을 진짜 성도라고 말할 수 있나요? 말할 수 없잖아요. 지금 이 개념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 이제 '살아 있는'이라는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산돌. 다니엘서 2장 32-34절 볼게요.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의 일부는 쇠요 일부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이것 자세히 보세요. 무슨 말입니까? 우리 구약 공부할 때 했는데, 느부갓네살 왕의 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루는 큰 신상을 보았는데 그 꿈을 도무지 해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해석을 해 줍니다. 그 신상의 머리, 우상의 머리 순금, 가슴과 두 팔 은, 배와 넓적다리 놋, 종아리의 일부는 쇠, 발의 일부는 쇠 일부는 진흙. 이것이 무엇입니까?
나중에 해석을 해 주는데요, 이것이 세계사의 큰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순금으로 표현되어 있는 우상의 머리는 바벨론 제국이고요, 바벨론 제국 뒤에 그보다 좀 못한 나라가 나타나는데 그 나라가 페르시아입니다. 은. 페르시아 뒤에 그보다 조금 더 못한 나라가 나타나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알렉산더 제국. 그리고 그다음에 쇠와 같이 아주 단단한 나라가 나타나는데 그 나라가 로마. 그런데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지잖아요. 그래서 일부는 쇠고 일부는 진흙.
그런데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왔어요. 손대지 아니한 돌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누가 돌을 집어서 던져야지 돌이 날아가지요. 그런데 이 돌이 그러면 무슨 돌이에요? Living Stone이죠. 산돌이죠. 산돌.
그 돌이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렸다. 발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쇠. 로마라 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돌로 신상의 발, 즉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신상은 온데간데 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완전히 사라지고 그 돌이 큰 산을 이루었다. 그것이 다니엘의 해몽입니다.
45절, 우리 교재에 있어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손대지 아니한 돌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Living Stone 산돌입니다. 다니엘서에 있는 것입니다.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놀랍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이 꿈을 해몽한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대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법에 의해서 빌라도에 의해서 처형되고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잖아요. 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로마 제국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그 로마 제국은 망합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다 망하고 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지금 로마는 하나의 도시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까? 관광지로만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대지 아니한 살아 있는 돌이 일어나서 만들어낸 역사를 보세요. 지금 우리가 그 역사의 산증인 아닙니까?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그 역사를 지금 우리 입으로, 우리 몸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세워지고 전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그것이 산돌입니다.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한 것이죠. 베드로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냥 자기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돌은 다윗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고요, 시편에서. 산돌은 다니엘의 환상에서, 다니엘의 해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3.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그런데요, 이 돌은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돌입니다. 보세요. 산돌이신 그리스도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각각 다르게 역사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보배로운 산돌. 사실 우리 인생에도 산과 같이 거대한 우상들, 답답한 일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배로운 산돌이, 누가 만지지 않았는데 뜨인 돌이 일어나서 그 우상을 박살내는 것처럼 우리 앞에 있는 크고 무서운 문제들, 산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때려 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잖아요. 우상의 권세에서도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 인생의 산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도 산돌이 다 깨부수고 다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까?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6절,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시온이 어디입니까? 시온. 성전이 있는 곳이 시온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성전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이 말이 중요합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무엇입니까? 보배잖아요. 왜? 내 인생의 문제를 그 돌이 일어나서 박살내 주니까요. 로마도 깨부수는 돌인데 얼마나 보배입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보배입니다. 가장 큰 보배 아닙니까? 다이아몬드가 보배가 아닙니다. 이것이 진짜 보배잖아요. 그 보배로운 산돌이죠. 사실은.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냥 돌멩이일 뿐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예수의 이름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만 보배로운 산돌인 것입니다. 너무너무 신기하지 않으세요? 성경에는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28-30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믿느냐고 물으셨어요.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이것이 진짜 무서운 말입니다. 여기서 내 믿음이 탄로 나는 것 아닙니까? 믿는다고 했는데 안 떠지면 어떡합니까? 그것이 믿는다고 했는데 눈이 안 떠지면요. 그 눈들이 밝아집니다.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믿은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자에게는, 거기 있는 맹인들은 진짜 전심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배로운 산돌이 된 것입니다. 그 뜨인 돌이 일어나서 자기 앞에 있는 앞 못 보는 장벽을 다 때려 부순 것 아닙니까? 다.
성도는 보배로운 산돌을 가진 자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그런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편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순간 그 돌이 일어나서 내 앞에 있는 장벽과 내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과 문제들을 다 박살내고 깨부수고 내 앞에 열린 대로를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고난 중에 있잖아요. 이 성도들이 죽음의 위협 앞에 있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보배로운 산돌이 네 인생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1-4. 성도의 정체성
그다음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셨습니다.
먼저,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즉 이것이 이어지는 것인데요, 믿음을 가진 자,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자들이냐? 택하신 족속이다. 내가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내가 손들어서 내가 이 그룹에 들어가겠습니다 한 것이 아니고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 했잖아요. 성도는. 성도의 정체성, 택함받은 존재.
두 번째,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어요. 우리 성도는 왜 제사장이라고 표현했는가? 옛날에 제사장은 지성소에 자기 혼자 1년에 딱 한 번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수직으로 그냥 쫙 찢어졌죠. 그리고 나서는 누구나 나아가서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죄를. 이전에는 제사장이 필요했어요. 지금도 저 옆 동네는 항상 고해성사를 하지만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고해성사할 이유가 없잖아요. 휘장이 그냥 찢어졌는데 그냥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제사장이라 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존귀한 제사장.
성도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택함받은 존재로서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요구하고, 요청하고, 회개하고, 소통하고, 기도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거룩한 나라. 지난 시간에 거룩의 개념을 신약적 개념으로 배웠죠. 하기오스(ἅγιος). 이 단어는 몰라도 되는데 그 뜻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봉헌된', '헌금된', '드려진'이라는 뜻이라 했잖아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제 내가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다는 말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 뜻대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냥. 왜? 봉헌되었기 때문에. 헌금하고 나서 그것 못 돌려받는다 했잖아요. 봉헌했는데.
그래서 그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거룩한 백성이니까. 봉헌되었으니까 나는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더라고요.
교회에서 안수받아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중직들이 되시잖아요. 뭐 서리 집사님까지야 그렇다 치고, 중직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왜냐하면 봉헌되었으니까요. "못하겠다" 그래요? 그냥 못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봉헌된 것이 아니잖아요. 그의 소유된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 나는 내 소유잖아요. 그냥 내 멋대로 살겠다는데, 직분을 왜 받습니까?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봉헌되고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맡겨 준 일을 그냥 아멘하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는데 무슨 거룩한 백성이고 그의 소유입니까?
난 아직 내 것입니다. 아직 멀었죠. 아직. 그래서 이 성도의 정체성은 굉장히 무거운 자리입니다.
자, 그리고 이제 이런 사람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성도가 되었으면 무엇을 해야 된다고요? 선포해야 됩니다. 성도는 선포하는 자다.
선포는 두 가지로 합니다. 첫째, 내 입으로 하고, 둘째,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고, 전도하고, "예수 믿으세요" 하고 입으로 막 하고, 그다음에 행동으로도, 삶으로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은 엉망인데 입만 살아서 해도 안 되고, 삶은 사는데 입이 너무 닫혀 있어도 안 되고, 입과 행실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선포하게.
2. 거류민과 나그네
2-1. 집을 맴도는 자
그다음 두 번째 테마를 보면, 거류민과 나그네. 베드로는 이 성도를 자주 이렇게 표현합니다. 거류민, 나그네라고. 11절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나그네라는 말을 헬라어로 어떻게 썼습니까? 파로이코스(πάροικος). 파로이코스라는 말은 시험에 안 나오니까 안 외우셔도 됩니다. 의미가 중요한데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접두어 파라(παρα), 그리고 명사 오이코스(οἶκος)가 결합되었어요. 오이코스가 '집'이라는 뜻입니다. 집. 하우스. 우리 집. 그리고 파라는 '주변에'라는 뜻입니다. 주변에. 그러면 나그네는 파라오이코스의 결합어니까 무슨 뜻입니까? '집을 맴도는 자'라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100평짜리 집에 살아도 진짜 집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진짜 단칸방 판잣집에 살아도 그 집은 진짜 내 집이 아닌 것입니다. 진짜 내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천국 본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서 저 천국 본향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항상 나그네로 집을 맴도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맴도는 인생.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이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맴도는 자인데 마치 자기가 여기에 그냥 영구히 있을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짐이 많아요. 영원히 살 줄 알고.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예수님 비유에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잖아요. 그냥 우리는 진짜 본향을 맴도는 사람인데, 파라오이코스 하는 인간들인데요.
그러니 이런 파라오이코스 하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우리를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력들이 있어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 싸우는. 보세요. 스트라튜오(στρατεύω), '전쟁을 일으키다'. 우리의 정욕을 자극하고 육체를 거슬러 싸움을 일으키는,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누굽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 사탄마귀들 아닙니까? 그 사탄마귀들이 가장 많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파라오이코스, 집을 맴돌지 못하게 하고 그냥 한군데 눌러앉아라.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그냥 여기 눌러앉아라. 베드로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엘리야, 모세, 예수님을 보고 너무너무 황홀하고 환상적이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그냥 영원히 삽시다" 했습니다. 예수님 대꾸도 안 하셨어요. 말이 안 되니까요.
우리 예수님의 화법을 보면 말이 좀 되면 대꾸를 하시고 말이 안 되면 말씀을 안 하세요. 아예 입 아파서 그 말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우리 예수님은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 말에 대해서는. 그런 말 따위에 대해서는.
그래서 이것은 전쟁을 자꾸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기 이 땅 너무너무 좋다고 여기 계속 살라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어하라. 제어하다. 앞에 '케이스 사인'. 그런데 이것은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제가 중요한데요. 현재 시제를 썼는데 반복적인 의미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요. 즉 계속해서 이것을 하라는 뜻입니다.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을 계속 제어하라.
파라오이코스 하지 못하도록, 여기 머무르게 하려는 사탄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육체의 정욕을 계속해서 싸워 이기고 제어하라. 한 번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하라. 사람이 옛날에는 이것 잘하다가 중간쯤 타락하고 초심을 잃는 사람 많잖아요. 그렇죠? 왜 그럴까요? 지속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2-2. 선한 행실의 중요성
성도의 선한 행실이 왜 중요합니까? 아까 그랬죠? 성도는 선포하는 자라 했죠.
선포. 입으로도 하고 삶으로도 행동으로도 하고.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이방인 중에서'라는 말은 이방인들 가운데 살면서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세상 사람 가운데 섞여 살면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방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여기 보세요. 이방인들이 너희 선한 일을 '듣고'라고 했습니까, '보고'라고 했습니까? 이방인들은 눈이 발달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은요. 그런데 그 이방인이 성도가 되잖아요.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죠.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강조합니까? 들음을 강조하죠.
그래서 성도는 귀가 발달해 있어요.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예 복음 자체가 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별반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여 줘야 합니다. 보여주는 것. 무엇을 보여주라고요? 너의 선한 행실을 보여 주라.
우리는 듣는 자인데 믿지 않는 사람은 보는 자들입니다. 보는 것은 기억에 굉장히 오래 남고 빨리 기억됩니다. 잔상이 오래 남아요. 그래서 믿는 사람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하고, 전도지 주고 복음 전하고 사랑을 베풀고 하는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손에 좀 뭐라도 들고 가서 나누어 주고 베풀고 하는 것.
교회가 멱살잡이하고 싸우는 것 자꾸 보여 줘 가지고, 이것이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됩니까? 교회가 웃고 행복하고 즐거워하고 이런 것. 그래서 우리는 항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둬야 되느냐 하면, 나는 저분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그 '보여진다'는 말이 좋은 옷을 입어라, 좋은 차를 타라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보여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는 그들에게 정말 보여질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는 것이 다이기 때문입니다. 다. 그것이 우리 제자 된 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3. 세속 권력에 대한 자세
그다음, 그리스도인은 세속 권력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3절,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 세상 권력에 대해서 순종하는데 누구를 위해서요? 주를 위하여. 그 뒤에 이유가 좀 나옵니다.
그다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요. 17절,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우리말 성경은 다 다른 동사로 표현되어 있어요. 모든 사람 어떻게 하라고요? 공경. 제일 끝에 왕은 존대.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헬라어 성경 원어를 보면 똑같아요. 티마오(τιμάω)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이 티마오라는 단어가 공경하다, 존대하다 똑같아요. 즉 원래 의미는 '가치를 두어서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누굽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이라는 말을 쓰면 우리가 접하는 불특정 다수의 모든 사람이잖아요. 내가 오늘 만나는, 나와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길 가다가 마주친 사람, 모든 사람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티마오하라. 가치를 두어서 대하라. 왕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티마오하라. 가치를 두어서 대하라.
그러면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나 왕이나 똑같이 대하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래요. 좋은 옷 입고 다니고 좋은 차 타고 다니고 권력 있는 사람은 굉장히 존경하고 굉장히 존대하죠. 그런데 나보다 조금 낮아 보이는 사람은 하대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내가 만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왕이든 그가 종이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다 티마오해라. 가치를 두어서 대하라.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제일 앞에 있고 왕이 제일 뒤에 있으니까 베드로가 타락해 가지고 이제 사람이 변해 가지고 이 왕을 굉장히 귀하게 여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막 화가 나잖아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요.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포베오(φοβέω)라는 동사를 썼어요. '경외하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신앙생활에 상당히 유익을 줍니다. 왜 유익을 줄까요? 하나님 두려워함이 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래야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좀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야 그래야 가정이 돌아가잖아요. 가정이.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긍정적인 의미에서 좋은 의미에서 두려움은 예배에 굉장히 유익이 됩니다.
또 주를 위하여 제도에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따라오느냐?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 교회를 공격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염병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날 때, 초창기 힘들 때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다 전환하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사실 교회가 예배를 정말 생명처럼 여기잖아요. 교회가.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는 교회가 감염의 온상이 되면 안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아주 어떤 분들 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더라도 예배드려야 된다, 예배당 문을 열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만 죽으면 상관없어요. 우리만 죽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직장생활도 하고 학교도 가고 아이들 유치원도 보내고. 그러면 그 사람들 다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교회가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행이잖아요. 그것이 선행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않고 "죽어도 예배당 문 열어야 된다, 하고 죽어도 이것 해야 된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회를 공격할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런 쓰레기 같은 집단이 있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회를 공격할 빌미를 주고, 그것이 복음 전도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거기에 있어서 우리는 진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에 일제강점기, 또 한국전쟁 시절에 내가 예수 믿어서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교회 와서 예배드리다가 나는 인민군의 총에 죽어도 좋다,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어요. 있어요. 목사님도 예배드리다가 총에 맞아 죽고 장로님들도 교회 지키다가 총에 맞아 죽고. 나 혼자 죽으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왜?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서 눈 뜰 것을 믿으니까요. 우리 성도들은.
그런데 감염병 시대는 그렇게 접근하면 곤란하잖아요. 아직까지 교회가 게을러서 전도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복음도 전하지 못했고, 그런데 그들이 나로 인해서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육체만 문제가 아니라 그 영혼도 우리가 죽이는 것입니다.
전도도 하지 못하고 영혼도 죽이고, 그런데 기를 쓰고 예배당 문 열어야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선행이 아닙니다.
2-4. 가정 사환의 자세
가정 사환들은 어떤 자세로 주인을 섬겨야 합니까?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사환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오이케테스(οἰκέτης). 사환은 둘로스(δοῦλος)와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둘로스는 진짜 종입니다. 종. 그런데 사환은 함께 사는 친구 개념입니다. 우리 미국 영화 같은 것 보면 집안에 집사 있잖아요. 집사. 그런데 집사가 진짜 종처럼 그러지는 않잖아요. 같이 식사하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할 것 다 하잖아요. 살림살이 다 살아 주는 그런 사람도 집안에서 질서를 지켜야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뜻입니다.
2-5. 고난에 대한 자세
자, 성도는 고난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
지금 베드로의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 있는데, 성도는 고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했어요. 아름답다. "그러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사람들이 이것을 착각하더라고요. 자기 잘못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것을 고난으로 생각하더라고요.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 중에, 고생과 고난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생 앞에 아이들이 붙이는 접두어가 하나 있죠. 아이들이 붙이는 것인데 강단에서 쓰기는 좀 부적절한 언어인데, 그것은 진짜 고생입니다. 평생 술 먹고 평생 담배 핀 사람이 그것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하면 하나님도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한, 자기가 자기 인생을 잘못 산 문제로 인한 고생입니다. 하나님께 따질 수 없어요. 자기 탓이지.
고난은 이런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런, 내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요셉처럼, 욥처럼, 그것을 우리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래서 고난과 고생을 좀 구별해야 되고 아무 데나 고난당한다고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자기를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어요. "이를 위하여." '이를 위하여'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선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아유. 하나님 이것 때문에 저를 불렀대요.
돈 주려고 부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 불러 가지고 막 이름 멋지게 하고 이러려고 부른 것이 아니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 주려고 우리를 불렀대요. 미치겠죠. '이름은 부르지 말지, 내 이름 부르지 말지, 찾지 말지.' 그런데 왜 불렀을까요? 그것은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으면 그 뒤에 말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받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3일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부활의 주가 되셨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겁내지 마라.
2-6. 예수님의 고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22-24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이 중요하죠.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고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내가 죽어야 되잖아요. 의에 대하여만 살아야 되잖아요. 바울이 이야기한 것하고 똑같아요.
로마서 6장 4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지난주에 우리가 저녁 예배 때 세례식 했죠. 옛날 세례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흐르는 강물에서 세례받고 강 속에 사람을 집어넣잖아요. 집어넣어서 가만히 두면 죽어요. 죽기 전에 끌어올리죠. 그러면 세례는 곧 죽음입니다. 옛 자아의 죽음.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내가 세례받는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다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나를 자꾸 불러냅니다. 죄가. 사탄이 나를 불러내요. 그런데 죄에 대해 자꾸 반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직까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형식적 세례는 받았으나 영적 세례는 아직 받지 못한.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아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아라" 하면 "싫어요. 나는 그런 것 싫다고요"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살지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라는 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시고, 베드로 이야기가 쉽지 않아요. 베드로가 어부고 못 배운 사람 같아서 그냥 그런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시고 한 번 더 읽어 보시고, 또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갓난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제쳐 두고 마르다처럼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시끄럽게 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말씀의 가치를 가슴에 새기기 원하오니 아버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시고 살아 있는 돌이 되셔서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과 문제들을 지금도 깨부수시는 우리 예수님, 그 보배로운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간직하고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있는 험산준령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께서 해결하여 주시고,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우리가 주를 믿을 때 맹인들의 눈이 떠진 것처럼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도 해결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살아 계신 우리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한 행실을 믿지 않는 자가 본다고 하셨사오니 우리도 우리 삶을 보여 드리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봉헌된 자들이오니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하셨사오니, 그 뜻대로 살아가는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