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3 -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의 고난 (벧전 3장)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오늘은 베드로전서 세 번째 말씀으로, 주제는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의 고난'입니다. 성도의 가정생활과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면 분명한 연관성이 드러납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리는 성도들이 고난받고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가정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며, 세상에서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1. 성도의 가정생활
1-1. 아내에게 주는 권면
베드로는 아내의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절을 보면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지시어가 나오면 앞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와 같이'라는 말이 무엇과 같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베드로전서 2장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왕이 좋아서 혹은 이 나라가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믿는 백성으로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정생활을 얘기할 때도 "아내들아 이와 같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혼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 안에 결혼도 하나의 제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아 결혼 제도 안에서"라는 뜻이고, 그 제도 안에서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일단 아내들이 기분 나빠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하다'라는 말의 원어는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인데, 이것은 '자발적으로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말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기 싫은데 시키니까 내 자유 의지를 억누르고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는 시키기 전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 알아서 밥 차려 먹으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굉장히 조직적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일단 성도가 아닌 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성도라도 가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냥 무늬만 성도인 사람은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삽니다. 그런 남편이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구원 때문입니다. 이 남자의 영혼이 불쌍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시댁과의 관계도 있고 여러 가지 관계들이 있는데, 이 제도 안에서 시키기 전에 자발적으로 아내는 자기 할 일을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 때문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보니까 "말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늬만 성도인 남편 혹은 교회라면 정말 싫어하는 남편, 그런 남편과 말싸움을 해서 말로 이겨서 전도해 보셨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안 됩니다. 말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좋은 교회여야 하는데, 언론에 나오는 것, 신문에 나오는 교회, 어디서 듣고 온 이야기를 보면 성도인 우리가 봐도 도대체 교회가 왜 저런지, 목사들이 왜 저런지 한탄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에 부정적인 내 남편에게 말로 아무리 해본들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입니다. 그 행실이 남편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은 다 양보해도 됩니다. 구원 하나가 본질입니다. 내 남편의 영혼 구원이라는 이 하나가 본질이고 나머지는 전부 비본질입니다. 내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존심을 좀 숙이고, 속상한 것 좀 접어주고, 그냥 행실로 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도 중요합니다. 2절에 "너희의 두려워하며"라고 했는데,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까? 잘못 읽으면 남편에게 매 맞을까 봐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베오(φοβέω)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보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말로 하지 않고 행실로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 자발적으로 행하는 이유는 누구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판에 남편이 뭐가 두렵습니까? 시댁 식구가 뭐가 두렵습니까? 겁날 것 하나도 없는데, 왜 내 남편 영혼 구원 못하면 이게 하나님 앞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라고 했는데, 남편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남편에게 잘하는 것을 남편이 알고, 또 정결한 행실, 곧 바른 행실을 봅니다. 그러니 불신자 남편이나 무늬만 성도인 남편은 듣는 존재가 아니고 보는 존재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보는 존재입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들어야 하는 존재이고, 성도 이전의 사람들은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내 행실을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얘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아내는 나중 믿은 남편이나 아직 불신자인 남편에게 영혼 구원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아내는 어디에 신경을 더 써야 합니까? 3절을 보면 여자분들이 좋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단장은"이라고 했는데, 이 '단장'이라는 말이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코스모스는 우주, 질서라는 뜻인데, '코스메틱(cosmetic)', 곧 화장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화장품을 바르는 것은, 너희가 외모를 꾸미는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뒤에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셨을 겁니다. 성경 말씀에 금목걸이도 차고 금반지도 차고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단장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이라고 했는데, 마음에 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의 또 다른 자아, 인격입니다. 내 인격, 진짜 인격, 나의 신앙 인격을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인격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썩지 아니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공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여기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 즉 너희의 인격을 온유하고 안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화장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으로 단장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내면의 인격을 단장하라고 합니다. 아내들이 이것을 더 신경 쓰라는 뜻입니다.
잠언 31장 30절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라고 했습니다. 곱고 아름다운 것이 왜 거짓되고 헛됩니까?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영원합니까? 그냥 순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되고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내들에게 요구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장 중요한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순종하라, 자발적으로 행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으로 너희를 화장하라, 말씀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단장하라는 말을 각자가 자신에게 맞게 적용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씀으로 따박따박 남편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들어가면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입력은 말씀을 내가 들어서 나에게 입력되는데, 나오는 것은 행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못 배운 사람들은 들어온 그대로 뱉어냅니다. 오늘 여기서 공부했으면 이것이 행실로 나와야 하는데, 집에 가서 입으로 나옵니다. 남편이 텔레비전 보는데 텔레비전 끄고 앉아보라고 해서 입으로 나오면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귀찮고 짜증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신앙 인격을 화장하는 방법입니다. 나를 화장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들, 불신자들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항상 말씀을 먹었으면 그것을 삶으로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1-2. 남편에게 주는 권면
이제 부인들에게만 이렇게 하면 억울하니까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7절을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와 같이'가 나옵니다. 아까 아내들에게도 '이와 같이'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라는 뜻이었습니다. 결혼 제도를 충실히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는데,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첫째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어떤 지식입니까?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어떤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까?
첫째, 남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곧 결혼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나이가 되었으니까, 집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라고 하니까 그냥 내 눈에 좋은 사람 데리고 와서 결혼하고 살면 중간에 얼마나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까?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식을 따라 동거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의 원리를 이미 성경 말씀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기본적인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에덴에서 창설하셨습니다. 한 남자 한 여자, 창세기 2장 22절에서 25절까지 보면 결혼의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시니." 여기서 나오는 결혼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한 몸의 원리입니다. 여자를 남자에게서 취하셨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 몸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 사람도 배고프고, 내가 더우면 이 사람도 더운 것입니다. 서로 한 몸입니다. 나만 옷 쫙 빼입고 나만 배부르게 먹고, 너는 굶든지 말든지 생활비도 안 주면 큰일 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한 몸의 원리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것이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고백의 원리입니다. 고백을 해야 합니다. 사랑 고백을 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 사귀고 연애할 때 좋은 말로만 고백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면 내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있는 고민도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나누고 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서로 남남처럼 살면 안 되고, 서로 얘기하다가 날밤도 꼴딱 샐 정도로 얘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백의 원리입니다. 그것이 지식을 따라 동거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고백하지 않고 부인에게 얘기하지 않고, 부인은 남편 걱정할까 봐 가정에서 일어나는 자녀들 얘기를 하지 않고, 친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걱정거리들을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고, 남편도 자기 직장에서 일어나는 얘기를 하지 않고, 서로 고백하지 않으면 벽이 생깁니다. 서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의 원리가 결혼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것은 떠남의 원리입니다. 결혼했으면 떠나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완전히 찾아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독립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거리가 있고 고민할 게 있으면 바로 엄마한테 전화합니다. 그런 남자 믿고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이 떠남의 원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마 하나님도 남자와 여자의 속성을 너무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여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말하지 않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이 잘 못 떠나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투명의 원리입니다. 다 보여주어도 됩니다. 내 속을 다 뒤집어서 전부 다 보여주어도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핸드폰 비밀번호 장치를 왜 걸어둡니까? 그냥 던져놔도 되지 않습니까? 보든지 말든지 그래야 서로가 믿을 수 있습니다. 서로 비밀이 자꾸 많이 생기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위험도가 자꾸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입니다.
지식을 따라 동거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결혼의 원리가 한 몸의 원리, 고백의 원리, 떠남의 원리, 투명의 원리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의 샘플만 얘기했는데, 과연 우리는 이 원리를 따라서 아내와 동거하고 있습니까? 남편들이여, 이 원리를 따라서 너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고 같이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 말을 베드로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성경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 읽고 다시 말씀 앞에서 이 원리대로 가정생활을 제대로 종말의 때에 해 가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부인에 대한 지식입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입니다. 40년 50년을 살았는데 내 아내가 짬뽕을 좋아하는지 짜장면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맨날 중국집 가면 자기 좋아하는 것만 시키면 안 됩니다. 내 아내가 봄을 좋아하는지 가을을 좋아하는지 아무 생각 없으면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백날 떠들고 백날 얘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살수록 관심을 가지고, 기억력이 나쁘면 적어두고,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소한 기쁨이 그 안에서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이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굉장히 무거운 것입니다. 남편들이 공부해야 합니다. 부인들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20대의 내 아내와 30대에 자녀를 낳고 키우고 40대에, 나중에 중년 노년이 되어 가면서 아내가 변합니다. 옛날에 좋아했던 것이 지금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신 과일도 잘 먹었는데 이제는 신 것 보면 싫어 죽겠는데 맨날 그것만 사 옵니다. 자꾸 변하니까 공부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라고 했습니다. 여성을 그릇으로 표현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릇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깨어집니다. 잘 깨어집니다. 조심조심 만지지 않으면 깨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뜻도 되고 정서적으로 예민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 눈빛 하나에도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여성들은 다 느낍니다. 말투, 말꼬리 하나 가지고도 이 남자가 오늘 나에게 어떤 감정인지 다 느낍니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깨어지기 쉬운 그릇이니 예민하게 잘 다루고 잘 섬겨주고 잘 대접하라고 합니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자녀를 주십니다. 내 아이를 낳을 여인이고 낳은 여인이고 키운 여인이고 지금까지 이 아이를 이렇게 장성하게 길러낸 부인입니다. 그러니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정말 존귀하게 남편이 아내를 존귀하게 여겨야 아이들도 엄마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무시하기 시작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엄마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남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고입니다. 여기서 '막히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엔콥토(ἐγκόπτω)입니다. 이것은 '끼이다'라는 뜻인데, 베드로가 살았던 시절에는 로마가 최고였습니다. 로마는 도로망이 전 세계적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도로가 지금처럼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돌로 깐 도로였습니다. 전쟁을 할 때 마차가 지나가기 좋도록 돌로 다 잘 깔아놓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풍화가 되면서 돌과 돌 사이가 틈이 벌어집니다. 틈이 벌어질 때 거기에 수레가 지나가면 딱 끼어 가지고 나가지도 못하고 빠지지도 못하는 상태, 그것이 엔콥토(ἐγκόπτω)입니다. 그래서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너희 기도가 앞으로도 한 발짝도 못 나가고 뒤로도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남편들이 부인에게 잘못하면 기도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이 기도가 안 될 때 가장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인에게 잘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막혀 있는 것입니다. 딱 끼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갑니다.
바울도 가정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가정생활을 해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인에게도 남편들에게도 이런 상세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교회 공동체의 자세
이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성도들이 서로에게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도들끼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8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말은 이제 말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의 때를 기대하며 말한다는 뜻입니다. 이 종말의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잘 읽어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가 꾸미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같이 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음을 같이 해서 동정하고, 마음을 같이 해서 형제를 사랑하고, 마음을 같이 해서 불쌍히 여기고, 마음을 같이 해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가 다 꾸며주고 있습니다. 곧 이 말은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한마음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질 바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누어지지 말고 같은 마음으로 일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탄이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이 잘하는 것은 사람들을 이간질 시켜서 편 나누고 편 가르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본능적으로, 여기서 본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악된 본능입니다. 죄악된 본능적으로 편이 갈리면 우리 편을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뭉칩니다. 예를 들어 7대 3으로 나뉘었다면 7이 3을 압도하기 위해서 다수결로 해버리자고 합니다. 그냥 밀어버리자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하는 아주 중요한 예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서 47절을 보면 초대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기 재산 팔아서 다 나눠주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46절에 비결이 나옵니다. 어떻게 합니까? 마음을 같이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숫자가 많았습니까?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면 3천 명, 또 한 번 설교하면 5천 명, 8천 명, 거기다가 또 사람들이 모이니까 적어도 만 명 이상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46절을 다시 봅시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곧 예배도 어떻게 합니까? 마음을 같이 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이것도 마음을 같이 해서입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모여도 마음을 같이 하고 흩어져도 마음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부흥하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마음을 같이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한마음이 되면 서로 한마음이 되어서 예배드리고 한마음이 되어서 교제하고 떡을 떼니까 자연스럽게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같은 마음이 되면 큰일 납니다. 방향이 옳다면, 이 일이 진짜 옳다면 한마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한마음이 되었으면 같이 뛰어주고 같이 움직여주고 같이 일해주고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됩니다. 정말 옳은데, 이 방향이 옳고 이 방법이 옳은데 마음을 같이하지 않고 분열시키면 그것은 사탄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고라 일당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야 무엇이 되어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3. 세상에서의 삶의 원리
이제 세상을 향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지금 베드로가 아주 조직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 가정생활을 얘기했고, 그다음 교회를 얘기했고, 그다음 세상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얘기합니다.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악은 더 큰 악으로 갚아주고 죄는 더 큰 죄로 갚아주어야 속이 좀 시원합니다. 그런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것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복 받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내가 복 받는 것입니다. 결국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그들에게 복을 빌면, 그 사람이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내 마음을 막 휘젓고 화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서 확 갚아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가 복을 못 받습니다. 내 자식이 복을 못 받습니다. 복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복 받으려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면 나도 악해져야 합니다. 악한 자를 이기려면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더 악하면 됩니다. 내가 더 지독하게 그 사람을 짓밟으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누가 손해입니까? 그러면 나만 손해입니다. 내가 더 악해지면 사탄이 그것을 노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원래 하나의 흐름입니다.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도 이런 얘기, 예수님도 이런 말씀, 베드로도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마 베드로가 이 글을 쓰면서 자기가 옛날에 혈기를 못 이겨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린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에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러고 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자기가 도망갔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혈기 내는 것이, 이런다고 예수님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정체성을 어떤 목사님은 양서류라고 하더군요. 양서류 아십니까? 개구리처럼 물에도 살고 뭍에도 살고, 여기도 살고 저기도 삽니다. 이것이 참 오묘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살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삽니다. 잘못 살면 박쥐처럼 살게 됩니다. 여기서는 새라 하고 저기서는 짐승이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원리로 살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세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3-1. 혀를 지키라
10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꼭 지켜야 할 것으로, 혀를 지키는 것입니다.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할 때도 보았습니다. 악한 말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이 악한 말일까요? 쌍욕하는 것이 악한 말입니까? 어느 국밥집에 가면 욕쟁이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런 할머니는 진짜 악한 분들입니까? 사심 없이 그냥 하시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말이 악한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 영혼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못된 말, 자꾸 돌아가면 그 말이 생각나는 말,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비수처럼 날아와서 딱 꽂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하기 전에 지금 이 맥락에서 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를 항상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 그것이 진짜 악한 말입니다.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북돋아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형상을 덧입은 존재라서 우리 말에도 권세가 있습니다. 악한 말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3-2. 선을 행하라
13절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 이것이 두 번째 원리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원리는 손과 발입니다. 누구의 손과 발로 선을 행해야 합니까? 주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봉사활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십자 1만 시간 봉사해서 상패 받은 분도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하시는 분은 그냥 자기 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도답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성도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하시고 싶은 일에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하고 싶은 일에. 그래서 잘 보아야 합니다. 잘 살펴보시고 내가 성도인데 우리 교회 안에서 정말 우리 주님이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선을 행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합니다. 그것이 중직이든 초신자든 그냥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일꾼이 부족한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니까.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시고 이 세상에 영혼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우리가 주의 손과 발이 되어서 복음 전하고 전도지 나눠주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해야 합니다. 수요일에 우리 교회 전도대가 오전 오후 다 나가서 전도했는데 그 귀한 사명 감당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손과 발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들을 우리가 성실하게 감당해야 주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3-3. 마음을 거룩하게 하라
세 번째 원리입니다. 15절에 "너희 마음에"라고 했습니다. 이제 마음입니다. 첫째가 혀, 둘째가 손과 발, 셋째가 마음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상식적으로 혀, 곧 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할 때도 보았습니다. 손과 발도 어디에서부터 행동이 나갑니까?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교회 공동체를 오가면서 사는 양서류 같은 우리 존재는 항상 이 세상을 사는 원리가 혀, 손발, 마음인데 그 출발점이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거룩'이라는 말이 오늘 또 나옵니다. 하기오스(ἅγιος)입니다. 신약의 거룩의 의미는 '봉헌된'이라고 했습니다. 봉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바쳐진, 드려진,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인, 내 마음이 하나님께 봉헌되었습니다.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주인은 주님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거룩하게 하고, 곧 봉헌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넌 어쩜 그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넌 어쩜 그렇게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렇게 열심히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묻습니다. "나는 못하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주의 손과 발이 되고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하고 사람들 상처도 안 주고 그렇게 사니?" 그러면 그런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라고 했습니다. 대답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내 마음이 봉헌되었어. 내 마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야."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 합니까?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비근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들이 여러 명 있는데 시집 장가 갔는데 아직까지 손주 소식이 없습니다. 기다려집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너 언제 아이 낳을 거니?" 말할 수도 없고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내 친구가 손주 사진 막 보여주고 맨날 아침마다 눈 뜨자마자 카톡으로 동영상 막 보여주면 부아가 치밉니까, 안 치밉니까? 그런 경험을 한두 번씩 해보셨을 것입니다. 화가 납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혹시 상대방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항상. 그것이 섬김입니다.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식입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고, 세상에서도 열심히 주의 손과 발이 되어서 일하고,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넌 어떻게 그렇게 하니?" 그렇게 물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자기를 낮추라는 얘기입니다. 겸손하게. 그래서 자랑도 잘 해야 합니다. 정말 자랑하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자랑하고 싶습니다. 입이 간지러울 때 그러면 대나무 숲에 가십시오. 저한테 하시든지. 저한테 목사한테 와서 "목사님 저 오늘 자랑 좀 하게 2시간만 비워주세요." 실컷 자랑하십시오. 괜찮습니다. 목사야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성도가 잘 됐다고 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같이 축복하고 같이 좋습니다. 그래서 자랑하는 것, 이런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십시오.
4. 하나님의 뜻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나오는 곳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여기에 하나 나왔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앞에서 얘기한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선을 행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 죽겠습니다. 이것을 자랑 못하는 것도 이것도 고난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상대방에게 선한 행동을 했는데 악이 돌아옵니다. 욕이 돌아옵니다. 뒤통수를 맞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게 내가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죽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즐겨 받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뜻 알려주세요. 지금 집값이 떨어지고 있는데 붙들고 있을까요? 팔까요?" 이런 저차원적인 질문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마십시오. 제발 그런 질문 가지고 목사한테 와서 "목사님이 하나님 뜻 좀 물어봐 주세요"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점쟁이에게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뜻은 이미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하나도 안 하면서 쓸데없는 하나님의 뜻만 자꾸 찾고 있습니다. 돈 필요하면 팔면 되고, 별로 지금 필요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으면 되고, 이사 가야 되면 아무리 손해 봐도 팔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왜 하나님의 뜻을 거기다 갖다 붙입니까?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뜻이 나왔으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하고 있습니까?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데 쉬지 말고, 감사하는데 범사에, 다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감사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 기뻐합니까? 항상 기뻐하지 않습니다. 조건적으로 기뻐합니다. 기도는 급할 때 기도합니다. 감사도 무엇을 받아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앞에 조건이 다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과 17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입니다. 이 세월은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입니다. 세월을 건져내라, 시간을 건져내라, 함부로 쓰지 말라, 함부로 시간을 막 흘려보내지 말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5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봉헌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은 가정을 지키는 거룩입니다. 가정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켜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이런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하나님의 뜻을 자꾸 구하고 있으면 "너 그러면 내가 이미 너에게 일러준 하나님의 뜻은 하고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것부터 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것부터.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을 잘 이해하고 그것부터 행하시기 바랍니다.
5. 그리스도의 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기까지 우리 주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18절에 이제 예시가 나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으신 분, 최고의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 전하기 위해서 오셨고 죄짐을 지고 있는 자를 건져내기 위해서 오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만큼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선을 행했는데 고난받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입니다.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의인인데 우리는 불의한 자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아까 우리가 얘기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참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것이 말씀이 굉장히 애매한 말씀인데 그냥 문맥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우리 예수님이 어디에 가셨느냐, 이제 초대교회 전승에서 베드로가 이런 표현을 지금 한 것입니다.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옥이 어디일까요? 과연 옥이 어디일까요?
그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노아의 아내, 세 아들, 며느리 3명, 8명입니다. 노아 시대 120년 동안 노아가 열심히 전도하고 망치질하고 배를 만들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8명뿐, 나머지 다 죽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노아 시대 지옥 간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오고 오는 모든 인류에서 이전까지,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인류,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으나 끝까지 노아 시대에 믿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복음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은 자들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옥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 그들이 지옥에 가기 전까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조롱했습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큰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는데,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고 심판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 내려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부활을 앞두고 이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였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놀라운 부활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놀라운 부활입니다. "왜 그때 내가 믿을 걸, 그때 내가 제대로 믿을 걸." 지옥에 가면 전부 다 '껄껄'한다고 합니다. 웃음소리 '껄껄'이 아니고 "뭐 할걸, 뭐 할걸" 후회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22절에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갈 것이니까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종말의 때에 가정, 교회 공동체, 성도가 세상 가운데 관계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이 쉽지 않은 말씀인데 한 번 더 복습해 보시고 읽어보시고 마음에 잘 새기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지식을 따라 동거하는 가정,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마음을 같이하여 어떤 일이든 행하는 교회가 되도록 도우시고,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알고 선을 행해도 고난받아도 전혀 가슴 아파하거나 약이 오르거나 힘들어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비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그런 넓은 마음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주의 뜻이 살아 숨쉬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마음으로부터 우리 손발, 우리 혀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주의 종 된 삶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