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4 - 고난 그리고 사랑, 그리스도인 (벧전 4장)
본문: 베드로전서 4장 7-8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은 베드로전서 공부 네 번째 시간입니다.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들, 한마디로 말하면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만만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고난받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제적으로 조금 힘들거나 몸이 조금 힘든 그런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당장 목을 내어놓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의 고난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고난 가운데 사는 성도들, 그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을 보면, 고난 가운데에서도 가정은 계속 돌아가니까 그런 고난 가운데 가정에서 아내들은 어떻게 해야 하며, 남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또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다루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나누었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분, 완벽하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으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예수님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서신을 읽을 때는 앞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맥락과 흐름 가운데에서 오늘 1절이 시작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1.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으라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그냥 읽으면 "아, 그렇지. 예수님이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지. 창에 찔리고 못 박히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맥락 가운데 읽으면, 예수님이 받으신 육체의 고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예수님도 선을 행함으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같은 마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신의 깊은 곳까지, 즉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 동일한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도 예수님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으신 것처럼, 너희도 똑같이 예수님과 같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옳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1. 갑옷이 되는 이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하나 듭니다.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갑옷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갑옷은 방어하는 것입니다. 창이나 칼이나 화살로부터 심장도 방어하고 내 몸을 방어하는 것이 갑옷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어떻게 갑옷이 됩니까? 갑옷은 나를 보호하는 것인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내가 두드려 맞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고난받고 두드려 맞는데, 이것이 어떻게 나를 지키는 갑옷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합니다.
곧 답이 나옵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에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왜 갑옷이 되느냐 하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능동적인 것입니다.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 짓지 말아야지, 죄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죄 안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도 안 만나면 됩니다. 하루 종일 아무 데도 안 가고 누구도 안 만나고 자기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죄 안 짓습니까? 생각이 죄를 짓습니다. 생각으로 죄 짓고, 마음속에서 죄가 자꾸 꿈틀꿈틀 올라옵니다. 숨 쉬는 것이 다 죄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도 그랬고, 욥도 그랬고, 수많은 서신서의 기자들이 그랬습니다.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우리가 출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나의 존재 자체가 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동적으로 "죄 안 지어야지, 죄 짓지 말아야지" 하며 방어적으로 살다 보면, 그런다고 죄를 안 짓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죄 짓고, 혼자 고립되어서 저 남극 북극에 갖다 놓아도 하루에도 수백 번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를 안 짓습니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야 죄를 그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입니다. 열심히 살아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 그러면 죄를 피하게 된다.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된다고요? 나를 방어하고 나를 지키는 갑옷이 됩니다. 이것은 역설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리입니다.
1-2. 열심히 살 때가 행복하다
여러분, 신앙생활 쭉 해 오셨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그런데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심방을 다녀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뭣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십니다. 새벽에 새벽기도하고, 피곤한 줄 모르고 일터 가서 열심히 일하고, 시간 나면 전도하고, 교회 와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하고, 닥치는 대로 일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저녁에 녹초가 되어서 집에 들어가던 때. 열심히 일할 때, 교회에서 무엇을 한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서 교회 일에 전심전력하고, 세상일도 열심히 하고, 사탄이 틈 탈 틈을 주지 않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 좀 쉬어야 되겠다. 이제 좀 피곤하구나, 좀 쉬어야 되겠다" 하는 순간, 그때부터 죄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 시험이 들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못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것이 갑옷이 된다"고 한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갑옷입니다.
그래서 앞 장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절을 보시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데 사탄 마귀가 너희를 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너희가 주의 일을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하나님 일 열심히 하고, 선을 행하고 있는데, 악한 사탄 마귀가 들러붙을 틈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뒤로 물러서는 신앙이 아닙니다.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주를 섬기고, 나에게 건강이 주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뒤로 빠지고 안 하려고 하는 순간 갑옷이 사라집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나를 지키는 갑옷입니다. 축구에서 그러지 않습니까? "최선의 수비는 최선의 공격이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라고 합니다. 열심히 공격하셔야 됩니다. 선을 행하고 적극적으로 주의 일에 힘쓰고. 그 이야기를 베드로가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그 다음, 정욕을 따르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3절을 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하나하나 읽다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향락, 무법한 우상숭배.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나에게 걸리는 것이 있으면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이라."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으로 족하다고 했습니까? "지나간 때로 족하다." 여기서 '때'를 베드로가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크로노스(χρόνος)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때'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기회입니다. 그런데 크로노스(χρόνος)는 이방인의 뜻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결혼했으니까 아이 낳고, 아이 낳았으니까 키우고, 또 아이 키우면서 돈 필요하니까 돈을 벌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입니다. 태어났으니까 살고, 배고프니까 먹고,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었으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의 뜻을 따라 때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음란과 정욕과 방탕과 무법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가 없으니까, 그렇게 살다 보니까 허무합니다.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이제 돈도 있을 만큼 있고 건강한데 허무합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서 살다 보니 내 청춘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 돈 다 쓰고 죽어야지" 하다 보니까 그냥 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따라서 그냥 막 닥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님이 땅에서 33년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공생애 기간은 딱 3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딱 3년의 공생애가 얼마나 많은 성경을 남깁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전부 다 예수님 공생애 아닙니까? 그 예수님 공생애의 주석들이 복음서 이후의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입니다. 그리고 오실 예수님을 준비한 구약의 이야기들, 전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00년을 살면 무엇 합니까? 900년을 살고 천 년을 살면 무엇 합니까? 그냥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인생을 살면 그것뿐입니다.
2-1. 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의 뜻 가운데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인생을 살펴보면, 에베소서 5장 15절에서 17절까지 말씀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세월'이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아끼라'는 것은 '기회를 살라'는 뜻입니다. 즉 시간을, 기회를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왜입니까? 때가 악하니까, 지금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 악하니까, 공중에 권세 잡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인 흘러가는 시간대로 사는 것이 악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때를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세월을 아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기회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잡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꼭 잡아야 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우리에게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어떻습니까? 유한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오늘 이렇게 건강하다가도 내일 부고 문자가 날아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구원의 기회를 붙잡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그 구원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내가 젊어서, 나중에 두 다리의 힘 빠지고 눈에 힘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 가서 예수 믿을게요. 지금은 세상에 할 일이 많아서요." 그것은 구원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못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못 잡는 것입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붙잡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사무엘상 새벽기도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참 안타까운 인생 사울을 보지 않습니까? 사울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워 두셨으니까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를 지어도 기회를 주시고 돌이킬 시간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그런데 그 마지막 기회까지 놓쳤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가 아말렉 진멸 명령 아닙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 대가가 없어도 헬렘 명령을 수행하라.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네가 죄지은 것 다 감해 주고 용서해 주마." 구원의 기회입니다. 다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남깁니다. 자기 눈에 좋은 것 다 따로 남겨 가지고, 살찐 양과 좋은 염소를 다 남겨 놓고 거짓말합니다. 구원의 기회를 걷어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를 버리십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는 구원의 기회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구원의 기회를 붙잡은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직까지 구원의 기회를 못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계속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고 복음 전하고 가르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으니까요.
2-2. 일할 기회를 붙잡으라
두 번째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붙잡는다는 의미는 일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또 주신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좋은 환경도 주시고 달란트도 주시고 기회를 주셨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으로 딱 끊습니다. 구원받고 감사합니다. 은혜가 넘치고 고맙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표현해야지요. 섬김으로 표현하고, 일하고,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서 주의 전에서 섬기고 자기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붙잡는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할 기회를 붙잡지 않고 달란트를 묻어두면 어떻게 됩니까? 책망받습니다. 나중에 한 달란트 그냥 파묻어 뒀다가 그것 빼앗기고, 있는 자에게 다 나눠 주고, 자기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달란트를 받았으면 일할 기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열심히 사는 것, 이것이 나에게 갑옷이 된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가 계속 마음속에서 갈등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세상에서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게 하는 육체의 소욕과,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떨어져서 성령이 자라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이것과 갈등하게 합니다. 우리는 결국 성령의 사람이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이기게 되는 비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은 영적인 기본 생활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찬양하고, 말씀 듣고, 예배 열심히 드리면 성령 충만해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권능과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종말의 때에 해야 할 일
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의 달음질에 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여기서 '그들'이 누구입니까? 비방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불신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니, 왜 쟤들은 우리처럼 살지 않지? 왜 쟤들은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방탕하게 살지 않지? 돈이 저렇게 있는데 왜 돈을 자꾸 교회만 갖다 주지? 자기를 위해서 쓰고 맛있는 것 먹고 방탕하게 정욕을 위해서 쓰고 그렇게 살지? 왜 자꾸 이상하게 살지?" 하면서 하나님 없는 자들이 우리를 자꾸 비방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5절에서 "그들이, 즉 불신자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로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 "사실대로 고하리라." 사실대로 고할 날이 올 것입니다. 즉 종말의 날에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할 그날이 곧 올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여기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입니다. 영이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도 계속 복음이 전파될 것 아닙니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전할 것 아닙니까?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의 영혼이 불쌍해서 그의 영이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고 계속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구원을 위한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3-1. 종말이 임박했다
이제 4장의 핵심이 나옵니다. 정욕을 따르는 종말의 시대에 성도가 가장 우선순위로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여기서 '가까이 오다'라는 헬라어가 '엔기조'(ἐγγίζω), '임박하다'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은 다른 말로 하면 종말입니다.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베드로 시절에 종말이 가까이 온 것이지, 이때부터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면 큰일납니다. 왜냐하면 말세가 언제입니까?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가 다 말세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다음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이가 말세입니다. 그 사이가 이 시대의 종말의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시대도 말세인 것이고, 지금도 말세인 것이고, 당장 이 말세가 오늘 밤 끝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시면 내일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림이 지연되면서 2000년 동안 말세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2000년 전 베드로가 전한 말씀으로 그 당시에도 유효하고,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말씀입니다.
3-2. 정신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가 해야 할 것, 나 자신에게 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정신을 차리고, 둘째 근신하고, 셋째 기도하라. 이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말세 때 내가 해야 할 것,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것은 영의 분별입니다. 이것을 앞의 말씀과 연결하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지 말라, 세상 풍조를 좇아서 그냥 사는 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너는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밥을 먹어도 왜 밥을 먹는지, 일을 해도 왜 일을 하는지 정신을 차려라.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붙잡고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저한테 항상 하셨던 말씀이 "정신 퍼뜩 차려라"였습니다. 옛날에 그때는 정말 듣기 싫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사는데 맨날 뭐 정신 바짝 차리라고." 그런데 이것이 참 복음적이더군요. 이런 시대에 정신 제대로 안 차리면 까딱 잘못하면 그냥 흘러가 버립니다. 교회도 세상 풍조 따라서 얼마나 많이 흘러갑니까? 교회가 기업처럼 되고, 교회가 이윤을 남기려고 하고, 교회가 세상 따라서 따라가기 시작하면 정신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며 세속화되는 것 중에 아주 대표적인 것이 우리 성도를 고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월마트라는 큰 유통회사가 있습니다. 월마트의 사훈 첫 번째가 "고객은 무조건 옳다"입니다. 두 번째는 "1번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다시 1번을 보라"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고객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다시 1번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교회가 가져왔습니다. 미국의 교회들이 그 월마트의 사훈을 그대로 가져와서 "성도는 무조건 옳다. 성도가 틀리다고 생각하면 다시 1번을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의 슬로건입니다.
교회 성장학에서 성도가 무조건 옳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모세에게 원망하고 돌 던지려고 하고, 광야에서 난리치며 40년 동안 원망하던 그 자들이 무조건 옳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은 것입니다. 목사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당회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성도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우리는 다 틀린 존재이고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니까, 그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말씀 따라가는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데 고객 만족을 교회가 따라가기 시작하니까, 이것이 정신 못 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종말의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 예수님 재림하실지 모르니까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합니다.
"근신하라"는 것은 내 몸에 관한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살고, 그 다음 몸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몸을 함부로 죄짓는 데 방임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영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을 함부로 사용하면 내 영혼도 병듭니다. 먹는 것도 적당히 먹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거룩한 성전이니까 내 몸을 관리 잘하고, 죄짓는 데 방임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몸을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하라"는 말은 방향입니다. 우리가 기도는 누구에게 합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방향을 항상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하나님, 제가 지금 이렇게 결정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데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항상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의 때에 우리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정신 차리고, 몸으로 죄짓지 말고,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고, 언제 예수님 재림하실지 모르니까. 베드로가 이 세 가지를 아주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4. 서로 사랑하라
그 다음 종말의 때에 내가 해야 할 것을 했으면, 이제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서 '뜨겁게'라는 말은 불타 죽을 만큼이라는 뜻이 아니라, '에크테네스'(ἐκτενής) 즉 '쉬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멈추지 않고'입니다. 즉 서로 사랑하되 멈추지 않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 사랑은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번 확 불타오르고 다 태워버리고 "이제 끝"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힘듭니다. 멈추지 않고 한 사람을 한번 사랑해 보셨습니까? 멈추지 않고 사랑하기에는 저 사람이 너무 나를 열 받게 합니다. 나도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싶은데, 내 자식인데, 참 그것이 너무 안 됩니다. 그런데 종말의 때에 사랑의 관계에서는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덮어 주고, 이해해 주고, 용납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4-1. 서로 발을 씻어 주라
요한복음 13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발 씻어 주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세족식을 하시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발을 씻어 줄 때 어떻게 발 씻어 주라 하셨습니까? 서로 발을 씻어 주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받아 가지고 무릎을 꿇고 허리춤에 수건을 차고 제자들 앞에 딱 꿇어앉으셨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 "안 됩니다. 이건 못합니다" 하며 막 이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서신을 기록한 베드로가. 그러니 예수님이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 이 성격 급한 베드로가 중간이 없습니다 — 베드로가 옷을 막 벗으면서 "저 목욕시켜 달라"고 합니다. 사람이 좀 중간이 있어야 하는데 중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번 목욕한 자는 두 번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한번 크게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회개하고 돌이킨 자는 두 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발은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 씻어 주시며 "서로 발 씻어 주라" 하신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루 지나고 나면 우리가 죄짓고 발에 먼지가 앉고 발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공동체 관계에서 살다 보면 서로 허물이 생깁니다. 그것을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허물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발 씻는 것 언제 합니까? 한 달에 한 번 합니까? 매일 합니다. 매일. 그래서 가족끼리, 특히 정말 가까운 가족끼리는 하루가 지나고 나면 발 씻고 잠드는 것처럼 허물을 그냥 다 씻고 잠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간밤에 그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실지 어떻게 압니까? 그 사소한 오해, 사소한 기분 나쁜 것 때문에 서로 이렇게 하고 발 씻어 주지 않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 세상 떠나셨습니다. 그 한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가슴 아픈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 성도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고, 수요일도 만나고, 가끔 만납니다. 그런데 서로 불편한 일이 있어도 서로 발 씻어 주고, 서로 털고 끝내야 합니다. 그 다음 주일날 교회 나타나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중환자실에 계시고, 그 다음 달에 세상 떠나셨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 일생에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말의 때에 서로 관계에서 해야 할 일은 서로 발 씻어 주라, 서로 덮어 주고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 씻어 주시면서 "너희도 서로 발 씻어 주라"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살면서 해야 할 일들을 보면, 무슨 큰일 때문에 서로 삐지고 화나고 "저 사람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 일들입니다. 나는 막 화가 나는데 그것을 제삼자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제삼자가 "별거 아니구만" 이런 반응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러면 서로 발 씻어 주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4-2. 서로 대접하고 봉사하라
그 다음, 말세의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이제 성도들 사이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9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이 9절에도 나오고 10절에도 나옵니다. 대접하라 — 어떻게요? — 서로 대접하라. 봉사하라 — 어떻게요? — 서로 봉사하라.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교회 성도들이 모이면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호의로 정말 우리 가정에 좋은 일이 있어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저 가정에도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대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원망이 생깁니다. 기분 나쁩니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데, 저 사람은 봉사 받기만 합니다. 달란트도 있고 시간도 있고 할 만한 능력도 있는데 안 합니다. 아무것도. 그냥 몇 말 나눴다가 싹 빠져나갑니다. 그러면 시험에 듭니다. 마음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공동체에서는 대접도 서로 하고 봉사도 서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내년이 되면 저기 건물을 짓고 식당을 운영할 것 아닙니까? 식당을 운영하는데, 가만히 지난 시간에 식당을 운영할 때 어려웠던 점들,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니까 설거지가 참 힘들었습니다. 구역별로 이렇게 설거지를 돌리면, 이것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닙니다. 다 해야 되는 일인데, 정말 모두가 열심히 해야 되는 일인데, 그런데 누구의 일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교집합이 있습니다. 집합에서. 그런데 이것은 한 사람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면 되는 일인데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펑크가 나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구역별로 설거지를 많이 하세요 하면 하는 사람만 하는 것입니다. 안 하는 사람 절대 안 합니다. 그러니까 원망이 생깁니다. 불평이 생깁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 잘 드리고 은혜 열심히 받고, 그리고 밥 먹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기분 나빠서 씩씩거리고 집에 가면 받은 은혜 다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내년부터는 한 달 전에 설거지 표를 이렇게 빈칸을 적어 놓고 필요한 만큼 설거지 봉사자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거기에 다 적어야 합니다. 그냥 밥을 먹었으니까 밥 먹고 설거지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집에서 요즘 아버지라고 밥 먹고 설거지 안 하고 싱크대 그릇 안 담가 놓으면 혼나지 않습니까? 밥 먹었으면 설거지해야지요. 당연히 1년에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해줘야지요. 이름 적을 것입니다. 이름 적어서 그것이 다 차면 그달 밥을 줄 것이고, 설거지 봉사자가 없으면 밥 안 할 것입니다. 설거지할 사람이 없는데 밥을 어떻게 줍니까? 쌓아 놓고 갑니까? 그것을 누가 합니까? 그것을 제가 할까요? 끝나고 4부 예배까지 다 마치고?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서로 봉사해야지요. 밥하는 분들이 있으면 설거지하는 분들도 있고,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하고 가고, 그렇게 해야지요. 누구나. 그것이 교회지요. 그것이 종말에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지요. 밥값도 안 들고 좋지요. 진짜 그렇게 하나 안 하나 한번 보십시오.
이제 서로 봉사하고 서로 열심히 하고 서로 교회를 세워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들 중에는 너무 큰 대형교회들은 케이터링 업체, 위탁 업체들을 불러서 밥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까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우리 성도들이 재미있게 밥도 하고 설거지하고 서로 교제하고 할 수 있는데, 서로 조금씩만 힘내고 조금씩만 서로 봉사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힘내고 서로 격려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4-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11절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 서로 봉사하는 것, 누가 영광 받는다고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고요. 우리가 맨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 받아 달라"고. 그러면 우리가 서로 대접하고 서로 조금씩 힘을 내서 설거지도 하고 교회 봉사하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면 서로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5. 고난과 고생의 구별
종말의 때 이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베드로가 했습니다. 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고난을 주지 마시지. 고난 없이 그냥 피해 가게 하시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그것은 "태어나지 말게 하시지"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났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길러 가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 가시는데, 그때 꼭 필요한 것이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연단시키고 만들어 가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법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서 고난을 잘 극복하고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이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다윗이 믿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자기는 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양이기 때문에 목자가 나를 골짜기로 인도하건 험한 산골짜기로 데리고 가건 나는 염려 없습니다, 걱정 없습니다, 그냥 따라가겠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담대하게 받겠습니다라는 마음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면서, 예수 믿는 것 발각되고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고난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 훈련을 통해서 너희는 새롭게 될 것이고, 너희는 성장하고 성숙할 것이다. 그러니 잘 견뎌라. 이것을 통해서 너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5-1. 악인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그런데 이 고난을 받을 때 화나는 일이 있습니다. 왜 화가 나느냐 하면, 나는 진짜 힘들게 고난받고 어려움을 겪는데, 옆 사람을 보니까 내가 친한 사람, 다른 사람을 보니까 저 사람은 요리조리 잘 피해 나갑니다. 악인인데 돈도 잘 법니다. 투자해서 수익이 날 때 투자하고 또 망할 때 빠져나옵니다. 나는 반대로 합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나는 잘 안 됩니다. 이것이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불평이 나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편 37편이 그 고백인데, 1절과 2절을 보면 다윗이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때'라는 말입니다. 그들도 한때입니다.
그 다음 3절에서 6절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난받는 우리, 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이것이 베드로가 말한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똑같습니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맡기라"고 했습니다. '맡기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던져 버리라'는 뜻입니다. 던지고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던져야 합니다. 새벽에 와서 하나님께 던졌는데, 다시 가서 그것 찾아 가지고 어깨에 메고 또 내려가고, 그 다음 날 와서 또 던지고 또 찾아가지고. 그것을 수십 년 무한 반복하는 것은 너무 미련한 것 아닙니까? 던져야 합니다. 그냥 던져 놓고 잊어버리십시오. 그래서 "여호와께 맡기라"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데, 이 고난을 이기려면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기도는 던지는 것인데, 던지고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7절, 10절, 11절을 봅니다. 다윗이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기다리면 어떻게 됩니까? 10절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왜입니까? 한때니까, 풀같이 쇠잔하니까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땅! 눈이 번쩍 뜨이지요. 이것을 잘 견디는 자들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해서 산상수훈 말씀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온유한 자. 이 땅에서 땅도 땅이지만, 천국의 땅이 내 땅이 되는 것 아닙니까? 고난을 당하고 잘 견디면 천국 영토가 내 영토가 되는 것이니까요.
5-2. 고난과 고생은 다르다
그런데 여러분, 고난과 고생은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것을 구별해 주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것은 고난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이것은 무엇입니까? 고생입니다. 자기가 자초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초해 놓고 "나 고난받는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켜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고난인데, 자기 발로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남을 간섭하고 남을 비방해 가지고 돌아오는 것, 그것은 고생입니다. 그런 고생은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시간 낭비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 식의 고생하지 말고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16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6. 결론
베드로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끝까지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이것이 베드로전서의 주제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랬지요.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겠느냐." 이 비슷한 이야기를 바울이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자기를 '괴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의인이 겨우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겨우'. 이 말은 아주 겸손한 표현인 동시에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본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같은 대사도가, 바울 같은 대사도가 "겨우 구원받는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계속해서 세우다 보면 요만한 잘못도 자꾸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항상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니까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 몸에 얼룩이 묻어 있는지 모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은 요만한 먼지도 계속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자기 스스로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 자신을 계속 살피셔야 합니다. 돌아보시고 돌이켜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적극적으로 고난받는 것이 우리 몸에 갑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주여, 우리가 진공 상태에 들어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세상 가운데서 부딪쳐 싸우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 뜻 안에서 고난받는 자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자신을 방임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구원의 기회를 붙잡도록 도우시고, 일할 기회를 붙잡아서 서로 대접하고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공동체에서 일할 시간을 주셨으니, 일할 환경을 주시고 일할 건강을 주셨으니, 열심히 일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고난을 피하는 미련한 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를 훈련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주셨사오니, 우리가 고난에 직접 맞서 싸우며 고난에 대처하며 고난과 함께 성숙하고 성장하며, 그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않도록 주여,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생과 고난을 구별하는 자 되도록 도우시고, 항상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추어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진실한 성도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