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 / 전체녹취

베드로전후서 특강 5 -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 (벧전 5장)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오늘은 베드로전서 다섯 번째 시간으로 5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5장까지, 베드로후서는 3장까지 되어 있는데, 오늘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보통 책을 쓸 때도 그렇고 어떤 서신을 쓸 때도 그렇지만 마지막이 결론입니다. 베드로전서 마지막 결론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그것도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교회를 무척 사랑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고 부인했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나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배신감으로 따지자면 예수님이 느꼈을 그 배신감은 베드로가 더 컸을 것입니다. 수제자였고 3년 동안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인데 그 같은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맡겨주기 위해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신 같은 죄인에게 예수님이 이 교회를 맡겨주시고, 베드로의 원래 능력과 상관없이 교회가 막 성장했습니다. 한번 설교하니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고, 또 한번 설교하니 오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고, 날마다 떡을 떼고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고, 그런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부흥하면 겁이 납니다. 이게 어떻게 되려고 일어나는 것인가 싶습니다. 그런 교회를 베드로가 무척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확 닥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는 사건으로 그때부터 핍박이 닥치면서 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외에는 다 흩어집니다. 흩어졌는데 어디로 흩어졌느냐,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막 커졌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됐네' 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유무상통하고 떡을 떼며 즐거워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주신 비전은 권능을 받으면 흩어지고 나가라고 했는데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살짝 폭탄 작은 것을 하나 딱 떨어뜨리니까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것이 사마리아이고, 그리고 안디옥에 가서 개척했고,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서 땅끝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랬던 과정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무척 자기에게는 예수님의 분신 같은, 예수님의 유산 같은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전서 마지막 결론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대상으로 성도들은 이렇게 하고, 장로님들은 이렇게 하고, 젊은이들은 이렇게 하십시오 하는 권면을 마지막 결론으로 내리는 것입니다.

1. 장로에 대한 권면

1-1. 장로의 정의

먼저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에 보니까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의 언어를 읽을 때 오늘의 언어로 생각하시면 곤란하고 과거 그 당시 기록될 당시, 선포될 당시의 언어를 생각하고 읽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 2000년의 시차 때문에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그 베드로가 장로라고 표현했던 그 당시 장로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프레스비테루스(πρεσβύτερος)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적어두었느냐 하면, 그 당시 장로를 일컫는 말들이 그냥 연장자를 장로라고 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나이만 많으면 어떤 부락이나 부족 공동체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그냥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장로는 지도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나이만 많다고 장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당시 베드로 당시에 교회 장로는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말씀 사역, 또 하나는 교회 행정 즉 치리와 권징에 관련된 사역, 두 가지를 다 했습니다. 오늘날에 목회자와 장로의 차이는 두 가지 역할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 사역이고, 교회 장로님들은 치리와 권징과 행정의 역할로 이렇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부재한 교회 같으면 장로님들이 말씀도 전하기도 하고 성경 공부 인도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완전히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고 보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베드로가 장로들에게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와 교회 장로들을 동시에 대상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목사들이 '나하고 상관없네' 이렇게 읽으면 안 되고, 성도들도 '아, 이건 교회 지도자들을 통칭적으로 일컫는 말이구나, 목회자와 장로님들을' 그렇게 읽으셔야 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자기가 장로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말씀 전했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행정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치리도 하고 책망도 하고 교회 행정하고 권징하고 다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 두 가지를 베드로가 다 한 것입니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이 중간 권을 일단 한번 빼봅시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중간 것을 빼면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꿈꿉니다. 나타낼 영광이 무엇입니까? 장차 나타날 예수님의 재림, 저 천국의 영광, 이 영광에 참여할 자입니다. 교회 중직으로, 목회자로, 장로로 쓰임받고 훈련받고 성실하게 봉사하고 하는 그 이유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곧 중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입니다. 증인이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법정에서 자기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증인이 법정에서 가만히 한마디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 증인의 자리에 왜 있겠습니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증인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있다는 것은 증언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가 목회하고 있는 이 상황, 이런 초대교회의 이런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뻥끗했다가 잡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목회자들은, 장로와 목회자뿐만 아니고 교회 모든 성도들은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먼저 서두에 던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만 가져가겠다고요?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지 그것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습니까?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장로는 삶으로 살아내고 성도도 삶으로 살아내라, 그것이 이 5장 전체의 주제입니다.

1-2.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

삶을 살아내라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했습니다. 양 무리를 누구의 양 무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양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내 양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입니다. 내 양이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내버려 놔도 되고, 그냥 잡아먹어도 되고, 그냥 방임해도 되고, 잘 키워서 팔아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내 양이 아닙니다. 누구의 양입니까? 하나님의 양이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몹시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고요? '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이 '치라'라는 표현을 헬라어로 보면 포이마이노(ποιμαίνω)입니다. '목양하다'라는 뜻입니다. 목양이 무엇입니까? 목자로서 양 떼들을 이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목사 방을 목양실이라고 써놓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6절을 보면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여기 '치라'가 포이마이노입니다. '목양해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치라.' 여기도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양이 아니라 누구의 양, '내 양'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장로들, 즉 목회자와 오늘날의 목사들과 오늘날의 장로님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양 떼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목양하는 것입니다. 내 양이 아니라 신경 바짝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양을 잘못 인도하면 그러면 누구에게 책망 받습니까? 하나님께입니다. 정말로 잘 인도하면 누구에게 칭찬받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명이기도 하고 또 무거운 사명이기도 하고 무서운 사명이기도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3. 세 가지 권면

구체적으로 더 이야기하는데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무엇 무엇 하지 말고 무엇 무엇 하라' 요런 식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나 교회 중직 장로님이 억지로 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1차원적인 신앙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갔습니다. 그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하는 것은 고급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기쁨이 있으면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은 교회 목회자와 중직들은 구원의 기쁨이 확실한 자가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확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는 기쁩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냥 즐겁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즐겁고, 예배드리는 것도 기쁘고, 기도하는 것도 기쁘고, 교회 봉사하고 성도들 섬기는 것도 기쁩니다. 맨날 얼굴이 죽을 상해가지고 강단에 올라와서 "저 오늘 하기 싫어 죽겠는데 10분만 하고 마칠게요" 이거 맨날 해보십시오. 이것이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하는 사람도 힘들고 듣는 사람도 괴롭고 다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데 자기 방식대로 막 해버리면 교회가 엉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양이니까 무엇을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고, 뜻을 알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성경 읽어야 되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려면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살펴야 되고,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교회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교회 정책과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너무 자원하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까 자기 방식대로 막 일사천리로 일을 다 해버리고 나중에 보니까 기도를 안 했고 성경을 안 봤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곳곳에 자꾸만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게 되면 교회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즘 사람들이 교회에 크게 기대 안 하는 이유가 자기 생각한 대로 교회가 똑같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에 안 믿는 사람들도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지 모릅니다. 빠르게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 손해 보려고 합니까? 한 푼도 손해 안 봅니다. 절대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지, 저 교회가 손해 안 보겠지, 손해 보는 짓 하겠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교회가 돌아가는데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잘 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해야 세상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가는가 보다'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저 교회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저 사람들이 도대체?'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다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평범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갑니다. 평탄한 길, 좋은 길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좁은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측한 길과 반대의 길로 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른뺨 맞으면 양쪽 뺨 때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오른뺨 맞으면 왼쪽 뺨을 더 돌려야 되니까 놀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목회자들이, 장로님들이 양 무리를 칠 때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읽고 결정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교회가 되고 세상을 이끌고 가는 교회가 되라고, 거기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또 무엇을 하지 말라 했습니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했습니다. 기꺼이 하라는 말은 열정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이득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결정하는 자리에 있게 되면 목회자와 중직들 장로님들이 있게 되면 교회 재정을 결정합니다. 교회 재정의 씀씀이를 결정하는데 이 씀씀이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지 말고 기꺼이 열정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셋째, 3절에 보니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에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주장하다'라는 말을 좀 봐야 되는데요, 헬라어로 카타퀴리유오(κατακυριεύω)입니다. 여러분 '퀴리오스'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퀴리오스가 '주'라는 뜻입니다. '주님'입니다. 그런데 여기 퀴리유오라는 동사가 붙어서 '주님 행세하다, 주인 행세하다'입니다. 자기가 주님처럼, 교회 목회자가, 목사가, 교회 장로님들이 자기가 양 무리 위에 주님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지 말라 했습니다. 목사가 "나는 예수님의 대리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하나님 대하듯이 하세요"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인 행세하지 말고, 군림하지 말고, 그렇게 그 자리에서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요? 양 무리에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본이 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행동하고, 양은 항상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30cm 밖에 못 본다고 합니다. 양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두에서 못 가고, 그러니까 목자가 앞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섬기는 것도 보여줘야 합니다. 섬기는 것도 그래야 양들이 따라갑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해라' 이러면 안 하는 것입니다. 주인 행세하면서 '넌 하고 나는 가만히 있고, 너는 섬기고 나는 섬김 받고' 이래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해줘야 사랑의 방식을 압니다. 양들이 그것을 따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봉사도 장로님들이 교회 봉사하는 방식을 보여줘야 성도들이 본을 보고 따라 한다는 뜻입니다.

1-4. 선한 목자의 본

예수님이 직접 이야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 15절을 보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습니다. 과격합니다. 선한 목자는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선하다라는 말이 착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착하다라고 하면 누가 이렇게 끌면 '네' 하고 따라가고, 또 저 사람이 이렇게 끌면 '네' 하고 따라가고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데, 선한 목자는 굉장히 과격합니다. 목숨을 버리는 분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양을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절에서 4절까지를 보면 그 목숨을 버리는 방식이 나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거는데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다 알아야 불러낼 것 아닙니까? 또 자기 양을 다 내온 후에 어떻게 합니까? '앞서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는 뒤에 가만히 있고 '그냥 너희들 가봐, 앞에 낭떠러지 있는지 가봐' 하고 발로 엉덩이 차고 막 가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 했습니다. 목자가 먼저 가는 것입니다. 그 목자가 해야 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하나하나 불러가지고 다 우리해서 불러내고, 그다음에 앞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 보이는 것입니다. 본보기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목숨을 거는 방식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하라고 말만 하셨습니까? 발 씻어 주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직접 무릎 딱 꿇고 씻어 주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사랑하라 한 삶의 사랑을, 삶으로 표현한 그 극치의 마지막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한 목숨을 버려 버렸습니다. 예수님 사랑을 입으로만 하지 않고 삶으로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나를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사나 장로나 그래서 중직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무거운 일입니다. 본도 보여야 되고 목숨도 걸어야 됩니다. 무겁고 또 무거운 일입니다.

1-5. 능력 있는 지도자의 기준

출애굽기 18장 21절을 보면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 부장과 십 부장을 삼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혼자 막 재판하고 있으니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와서 모세에게 동역자를 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생깁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 십 부장이 최초로 세워지는 장면인데 거기에 사람을 세우는 기준을 설명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세상이 말하는 능력 있는 사람은 학벌이 좋고, 돈이 많고, 언변이 좋고,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구약이 말하는 최초의 능력 있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면 두렵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잘해야 되니까요. 우리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둘째, 진실입니다. 진실은 성도들,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거짓이 없어야 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능력입니다.

셋째,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금전 관계입니다. 관계가 깨끗한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지도자를 세워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 십 부장을 세우라 한 것입니다. 구약의 기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본받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왜 본받았을까요? 예수님이 앞서 가셨으니까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 뒤따라가니까 바울은 그다음 무엇이라 합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앞서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각각 양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장로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목회자나 중직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이것이 어디 교회 목회자와 중직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까? 가정의 부모에게도 해당됩니다. 자녀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되는 것이고,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우리 정도 나이가 되는 사람들이 되면 이제 이렇게 다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지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가 돼서 자녀들의 걱정거리가 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쩔 줄 모르겠다'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좀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을, 내 인생을 내가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내가 듣고 산다면 그것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그냥 교회에서 단순하게 교회 중직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 각자 개인 개인이 진실로 바울처럼 그리고 또 베드로처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내가 앞서가겠다고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셔야 됩니다.

1-6. 영광의 면류관

이제 베드로는 또 논리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순종한 장로들이 무엇을 얻는가를 이야기합니다. 4절에 "그리하면" 앞에 말 다 봤습니다. 전부 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목자장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인간 목자입니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이 말씀을 봤지만 당시 이 말씀을 받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굉장히 현실감 있게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드는 면류관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드는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스 때부터 출발해서 고대 사람들은 운동회를 가끔 했습니다. 마라톤 최고의 영광, 머리에 무엇을 씌워줍니까? 월계수입니다. 월계나무 이파리로 이렇게 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씌워줍니다. 그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데 그 이파리는 시간이 지나면 시듭니다. 마릅니다. 아무리 최고의 영광, 최고의 자리에 영화로운 1등 자리에 시상대 위에 서서 이 아름다운 면류관, 그 나라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뽑는 자리에서 1등을 해도 그 관을 그의 월계관을 써도 시들어 버렸는데, 하늘의 면류관은 시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말은 위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결단코 사라지지 않고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을 너희가 얻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대하면 할 만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잠깐인데 그래서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두고 천국의 가치를 두면 교회 목회자, 장로가 되고 그러면 이것은 굉장히 위대하고 귀중하고 무겁지만 소망할 만한 가치인 것입니다. 이 영광의 면류관을 내가 얻기 위해서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지금도 올림픽에서 1등 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인데 이것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최고의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2. 젊은 자들에 대한 권면

2-1. 순종과 겸손

장로들의 목양을 받는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무엇을 요청합니까? 베드로가 굉장히 논리적으로 쓰고 있는데 이제 장로님들 이야기했으면 이제 성도들 이야기 안 하면 좀 섭섭합니다. 5절에 "젊은 자들아" 여기 젊은 자들은 장로들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나이상으로 젊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장로들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 했습니다.

이 순종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앞에 장로님들이 이렇게 하셨을 때 순종할 만한 것입니다. 본을 보일 때 따라갈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본이 되지도 않고 그저 훈계만 하고, 그저 군림하려고만 하고, 자기가 주인 행세하려고 하고, 그러면서 "너 왜 순종 안 해?" 이러면 순종하겠습니까? 그냥 앞서 가고 본이 되면 뒤에서 그냥 따라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본을 보여서 가면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이 없어도 그냥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말이 엥콤보마이(ἐγκομβόομαι)인데 엥콤보마는 앞치마라는 뜻입니다. 앞치마를 언제 두릅니까? 요리할 때, 일할 때 두릅니다. 요리하고 일할 때입니다. 즉 이 말은 겸손으로 일하라는 뜻입니다. 젊은 자들이 장로님들이 이렇게 본을 보이면 너희들은 순종하고 겸손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 권위가 있다는 것,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나를 존경하고 나를 따르면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라는 것은 학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 있고 학벌이 있고 권력 있으면 그런 척합니다. 그 앞에서 돌아서서 다 욕합니다. 한마디씩 합니다. 재수 없다고 한마디씩 뒤에서 다 합니다. 그런데 진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과 순종을 하게 되는 것은 삶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 앞에 가면 우리가 존경하게 됩니다. 이렇게 허리가 좀 숙여지고, 참 고맙고, 이렇게 살아주니까 고맙고, 좀 변치 않고 계속 이렇게 살아주셨으면 좋겠고, 내가 앞으로 롤모델로 삼아갈 분이 이 분이었으면 좋겠고 막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먼저 앞서가고 본을 보이는 장로들 앞에서 겸손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겠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는 것이 좋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고 이런 가정이 좋은 가정 아닙니까? 우리 부모가 어떻게 살아온지를 자녀들이 제대로 아니까 부모님들이 무학이고 못 배우고 못 가져도 그 앞에서 목소리 높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그 앞에서 따르고 예우하고 순종하고 그렇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계속 젊은이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젊은 자들에게 순종과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라, 겸손해라, 장로들의 지도에 순종하고 겸손해라. 그러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신다고 했습니다.

2-2. 염려를 주께 던지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맡기라'는 말이 교재에는 '던지라'로 되어 있는데 에피립토(ἐπιρίπτω)입니다. '힘껏 던지라'입니다. 염려를 어떻게 하라고요? 힘껏 던지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주께 힘껏 던지라는 것입니다. 힘껏 던지면 염려가, 공을 힘껏 던지면 얼마나 갑니까? 가볍게 던지면 조금 날아가고 힘껏 던지면 멀리 날아갑니다. 그러면 힘껏 던지면 주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께 힘껏 염려를 던졌는데 주님도 힘껏 나에게 염려를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하고 공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를 힘껏 던지면 주께서 받으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첫째는 순종, 둘째는 겸손을 말했습니다. 순종과 겸손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지도자, 지도자가 잘 하니까 그렇게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는 누구에게 던지라고 했습니까? 사람 만나가지고 내 염려 이야기하라 했습니까? 장로 만나가지고, 목회자 만나가지고 내 염려 이야기하라 했습니까? 주께 던지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해결 못 합니다. 사람 만나가지고 이것을 백날 이야기해 봐야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이 무엇입니까? 주께 던지는 과정, 기도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이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 모든 성도에게

3-1. 근신하라, 깨어라

이제 5장의 순서가 첫째는 장로님들에게, 둘째는 젊은 성도들에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 당부입니다. 일반적으로 장로님과 성도들 다 포함해서,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근신하는 것은 몸에 관련된 것이고, 깨는 것은 영혼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영혼을 동시에 이야기했습니다. 근신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육체를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그 당시 철학 사상을 우리가 좀 이해를 하시면 좋습니다.

그 당시 철학 사상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것이 1세기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철학 사상은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여기가 로마 시대라 하더라도 로마는 사상이 없는 나라입니다. 실용적인 것에 강한 나라입니다. 법, 건축 이런 것이 강한 나라입니다. 로마는 사상이 없으니까 로마 신화가 그리스 신화 그대로 가져와서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아프로디테가 비너스가 되고 뭐 이런 식으로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도 그리스 철학이 로마에 그대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인데, 이원론의 핵심은 무엇이냐면 저 천상에 완벽한 것이 있고, 이 땅에는 불완전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대충 들으면 이것이 기독교 신앙하고 비슷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 땅에 사과가 많습니다. 종류가 부사도 있고 홍옥도 있고, 잘생긴 것도 있고 못난 것도 있고, 신맛도 있고 단맛도 있고 다양한 종류의 사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상의 세계에는 완벽한 사과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동그라미가 큰 동그라미, 작은 동그라미 다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천상에는 완벽한 동그라미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우리 몸과 영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느냐면, 플라톤이 천상에서 영혼이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육체라는 감옥입니다. 그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전쟁이 많았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그 죽음이 최고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대 사람들 영웅전 같은 것을 보면 일리아드, 오디세이 같은 것을 보면 전쟁하러 막 나와 가지고 자기가 나가서 막 죽고 이렇습니다. 플라톤 사상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곧 육체라는 감옥에서 영혼이 해방되어서 천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한번 따져보시면 이 몸을 어떻게 본 것입니까? 사람들은 몸을 귀하게 본 것입니까, 악하게 본 것입니까? 육체를 감옥이니까 악한 것입니다. 그 사상이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를 입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이 감옥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런 철학적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까 '아니, 예수님이 죄 짓고 쫓겨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하나님한테 죄 짓고 쫓겨나서 저 감옥에 갇혔나? 그것도 천한 가난한 갈릴리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 육체가 더러우니까, 자기 꼴을 보면 압니다. 이 육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

두 가지 유형의 철학자들이 생겼는데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정확하게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 학파들이 있고 스토아라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어차피 버린 몸, 어차피 더러운 몸, 그냥 마음대로 쾌락을 즐기고 향락을 즐기고 맛있는 것 먹고 아내도 열 명씩 두고 그렇게 살자, 그렇게 살자 죽자. 극단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스토아 학파는 이 육체가 더러우니까 자기를 막 학대하는 것입니다. 밥도 굶고 결혼도 안 하고 몸에 피를 내고 막 그런 식으로 자기를 학대하면 이 더러운 육체 그것을 학대할수록 영혼이 고결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양극단으로 갔습니다. 양극단인데 뿌리는 똑같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그래서 초기 이단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안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 이야기하느냐 하면 가현설을 이야기합니다. 가현설이 무엇입니까? 가짜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가짜로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안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서 계속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이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이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도 사람들은 몸을 어떻게 했을까요? 에피쿠로스 학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철학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스토아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몸을 정결하게 하라, 몸을 정결하게 하라, 그리고 몸을 소중하게 여겨라.

그래서 몸은 정말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가서 손 보여주셨습니다. 도마에게 옆구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육체의 모습 그대로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내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내 육체를 소중하게 다뤄야 됩니다. 건강관리해야 되고, 소중하게 다루라고 해서 막 성형 막 열심히 하고 이런 말이 아니고, 생긴 대로 소중하게 다루고 주신 대로 그냥 소중하게 잘 관리하고 잘 다루고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아끼고 몸을 사랑하고. 그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도 '깨어라' 했습니다. 그래서 근신하고 깨어라, 육체와 영혼을 소중하게 다뤄라.

3-2. 마귀를 대적하라

왜 그렇게 하라고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로 미루어 보면 마귀가 틈타는 것은 어디에 틈탄다는 말입니까? 정신 차리지 않고 대충 살고, 내 영혼의 문제를 말씀과 기도로 항상 영혼을 깨워서, 영혼의 밥은 말씀입니다. 육체의 밥은 하루 세끼 먹는 것이고, 영혼의 밥 하루 세끼, 말씀 안 먹고 기도 안 하고 이러면 마귀가 내 영혼의 틈을 타는 것이고, 정신을, 내 육체로 죄를 지으면 육체를 통해서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근신하지 않으면 마귀가 그렇게 돌아다니며, '두루 다닌다'는 말은 마귀가 얼마나 부지런한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얼마나 부지런한데요. 다양한 방식으로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이 지금 육체가 저렇구나, 저 사람 좀 정신 상태가 저렇구나' 귀신같이 알고 쏙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니까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 맥락에서 보면 내 몸을 잘 정결하게 관리하고 깨어서 영혼의 말씀을 먹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 내가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 해서 맨날 교회 와서 사는 것, 그것만이 믿음 굳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하는 것도 믿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 관리 열심히 하고, 내 몸과 영혼의 균형을 이루는 것도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 두 가지를 굳건하게 해서 어떻게 하라고요? "그를 대적하라"입니다. 그가 마귀입니다. 사탄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몸에 십자가 달고 다니면서 "물러가라" 이런다고 대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3-3. 고난의 유익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드로가 교회 공동체 성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이것을 꼭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절에 보니까요, "모든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을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요. 그 뒤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너희를 부른 분입니다. 나를 부르셨다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내가 원해서 이 교회에 온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죄악 가운데서 부르셨고, 세상 가운데서 부르셨고, 죄 짓는 가운데에서도 부르신 분입니다.

또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니" 불러서 하나님 영광에 들어가게 하려고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불렀다고 다 영광에 들어갑니까? 그다음 무엇이 필요합니까? 뒤에 나옵니다.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잠깐'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잠깐.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보는 측면에서 잠깐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는 측면에서 잠깐입니다. 인간은 잠깐 하면 '하루만'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인간의 일생이 짧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년이 지나갑니다. 8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한테 물어보면 100% 다 그러십니다. "내가 옛날에 그때 뭐 8남매가 아버지 밑에 어머니 밑에 그럴 때가 엊그제 같다고, 눈 깜짝 놀랐어요, 지나갔다고." 그래서 고난도 그렇게 잠깐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그런데 고난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이것이 고난을 주신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기 전에 우리 상태는 무엇입니까?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반쪽짜리입니다. 삼분의 일짜리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이 고난이 나를 온전하게 했나, 내가 고난을 잘 통과했나, 이것은 고난이 지나가고 나서 입증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물질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물질에 고난을, 물질이 그냥 남이 쓸 만큼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질의 고난이 막 임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이 고난의 터널이 끝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물질의 고난을 겪으면서 이분이 온전하게 되려면, 고난을 잘 통과했다면 물질관이 바뀌어야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는, 이전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물질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관이 바뀌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왔구나,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구나' 그러면서 통과하고 난 이후에는 '이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때문에 고난 당합니다. 사람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 사람하고 엮여서 고난받는 것입니다. 엮여서는 안 될 사람하고 내 욕심 때문에 엮여서 사람 때문에 고생하고 고난받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지나고 나면 사람이 온전하게 되려면 그것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악한 사람과 벗하면 안 되겠구나, 함께 하지도 말라 그랬는데, 악인과는 같은 자리에 앉지도 말라 그랬는데, 내 욕심에 뭔가 하나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봐 그 인간하고 가까이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똑같으면 그것은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봐야 압니다. 그것이 온전하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온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주는 것입니다. 계속 계속 계속. 그것이 되지 않으면 평생 훈련받다가 볼일 다 보는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난 당하고 나면 고난에서 유익을 찾아야 됩니다. 그 배울 것을 찾고 거기서 온전하게 되고 고쳐야 되고 관점이 바뀌어야 됩니다.

4. 바벨론에 있는 교회

4-1. 은혜 가운데 굳게 서라

그다음 12절에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실루아노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은혜, 은혜가 무엇입니까? 앞의 말로 미루어 보면 고난 당하는 것에 깨어내라는 말입니다.

13절에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마가가 베드로의 진짜 아들이 아니고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입니다. 마가는 사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복음서라고도 말해지는데 마가가 베드로 설교를 쭉 듣고 그 공동체에서 정리해서 내놓은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마가는 베드로의 대필자라고 보셔도 됩니다.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로서 베드로의 대필자입니다.

4-2. 바벨론에 있는 교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13절에 교회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 당시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써서 편지 받는 교회를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구약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악입니다.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바벨론이 유다 백성들을 어떻게 합니까? 포로로 다 잡아갑니다. 포로로 잡아가서 바벨론에서 70년 포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유다 백성들이 잡혀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있는 성도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에 바벨론은 어느 나라입니까? 로마입니다. 거대한 로마라는 거대한 악 가운데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로마 법에 의해서 교회가 다스려집니다. 로마법에 의해서 예수님 잡아 죽인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입니다. 교회는 어떤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교회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흡수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 옛날 노아 홍수 시대 때 죄악이 관영하고 사람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술 마시고 장가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그것이 바벨론입니다. 거기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성도 8명, 노아네 가족만 8명만 그 교회의 명맥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다 멸망시키고 8명만 방주에 태웠습니다.

4-3. 눈물로 씨를 뿌리라

그래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직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 나 하나다, 그러면 그 바벨론에 나 하나가 교회인 것입니다. 시집갔는데 아무도 안 믿는 집에 나 하나 성도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있는 교회입니다. 내가,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시편 126편 1절 2절, 포로 귀환 이후에 기록한 시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바벨론 포로로 70년 있다가 해방되었으니까 꿈꾸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이런 찬양을. 이 70년 포로 기간에 잘 견딘 그 결과입니다. 어떻게 견뎠을까요?

5절 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성도들이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고, 눈물 흘리고 씨를 뿌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오늘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자기 몸을 근신하고, 영혼은 깨어서 분별력이 있게 살아가고, 그렇게 하다 보면 거대한 로마라는 바벨론 가운데에서도 교회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가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다 망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씨를 뿌려야 됩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씨 뿌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는 몸을 근신하고, 또 깨어 있고, 말씀 분별하고 살고, 그러면 나중에 꿈꾸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비전입니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바벨론이 망하지 교회가 망했습니까? 바벨론 망했고, 페르시아 망했고, 알렉산더 제국 망했고, 로마 망했습니다. 그 위대한 제국 로마가 지금은 한 도시가 되고 관광지로 전락했습니다. 교회가 망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당시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들이여 낙심하지 마라, 고난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니까 잘 견뎌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메시지를 주는 것이니까 힘내고 잘 견뎌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장로들은 어떠해야 되는지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데 우리는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몸을 방임하고 영은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나약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몸과 영혼 정신을 굳세게 하게 도와주시고, 언제나 우리 몸을 제대로 살피고 우리 영혼을 제대로 살펴서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 있는 믿음의 자녀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에 굳게 서라 하신 이 말씀 붙잡고 나아가도록 도우시고, 바벨론에 있는 교회 그 교회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바벨론의 권세가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게 하시고 울며 씨를 뿌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거둘 때 꿈꾸는 것 같은 큰 기쁨 주여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