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특강 6 - 견고한 믿음을 위하여 (벧후 1장)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오늘은 베드로후서 말씀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다 공부했고, 베드로전서 말씀도 공부했으며, 이제 베드로후서 1장, 2장, 3장 세 번에 걸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야고보서도 그렇고 베드로전후서도 그렇고, 워낙 우리 신약 성경이 바울 중심으로, 바울의 저작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야고보서나 베드로전후서를 읽으면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문체도 다르고 표현법도 다릅니다. 바울이 조금 어렵다면, 야고보나 베드로는 좀 직설적으로 강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훨씬 더 이해하기도 쉽고 또 우리 마음에 조금 더 강하게 부딪혀 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마지막 저작입니다. 베드로가 마가복음,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를 썼는데, 마가복음은 마가의 복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베드로 복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마가의 손을 빌어서 기록한 것이지, 사실은 베드로의 설교가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갈수록 베드로가 훨씬 더 성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철없는 베드로, 예수님 당시에 좌충우돌하고 들이받고 화내고, 칼 들고 말고의 귀를 베고, 예수님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던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더 깊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견고한 믿음을 위하여'입니다. 베드로가 견고한 믿음을 위해서 무엇을 주문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베드로의 성숙한 자기 소개
1-1. 종과 사도의 정체성
베드로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며, 그의 편지를 받는 성도를 어떻게 칭하고 있습니까? 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걸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소개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는 베드로가 자기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종'이 더 추가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사도로만 자기를 소개했고, 후서에 오니 '종'이고 '사도'입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이 앞에 있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사명, 사역, 일에 관련된 것입니다. 사도로서 일해야 합니다. 보냄을 받았으니 가서 전도하고 복음 전하고 영혼 구원하고 죽어가는 사람 살리고 교회 세우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은 무엇과 관계가 있습니까? 보다 더 본질적인 것, 곧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입니다. 사도가 일이라면 종은 본질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는데 순종하는 자세가 종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제 성장하고 성숙하여 베드로후서로 가니까 자기를 종된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 깊이 성장할수록, 성숙할수록 자기 자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그냥 종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종이 있으면 또 누가 있습니까? 주인이 있게 됩니다. 내가 종이면 누가 주인입니까? 주님이 주인이시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글을 쓰면서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따라다니던 그 3년간은 과연 종이었는가?' 종의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외치고 떠들고, 예수님이 무어라 하건 말건 자기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로는 책망도 하시고 나무라기도 하셨지만 3년 동안 주님은 참아주신 것입니다. 참아주시고 훈련시키시고, 그리고 나서 예수님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 받고, 그 후에도 베드로전서를 쓸 때까지도 종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인생 말년으로 올수록 '아, 내가 종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1-2. 종됨의 의미
우리가 신앙의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과연 내가 성장한다는 것, 여물어지고 성숙해지고 인생이 점점 더 깊어진다는 의미는 자기의 종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종은 순종하는 자입니다. 종은 말없이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다른 것이 종이 아니고 그냥 순종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 그것이 종입니다.
이 분의 성숙을 아주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종으로서 나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은혜를 줍니다.
옛날에 이랬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에서 34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한 일들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다 알고 묻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들이 잠잠하니" 말을 못합니다. 왜 말을 못 하느냐?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자기들끼리 막 싸운 것입니다. 길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크냐, 그냥 우리 열둘 중에 누가 대장이냐' 하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인데,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어머니를 예수님이 가는 길에다가 딱 대기시켜 놓고, "어머니, 우리가 이날 이때 이 시쯤에 이쪽으로 지나갑니다. 대기하고 있다가 예수님한테 청탁 좀 해 보십시오" 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 딱 붙들고 청탁합니다. "주의 영광의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해줄 수 있는데, 너희가 과연 내가 마시는 잔을 알고 있느냐? 지금 이 말의 뜻을 알고 말하는 거냐?" 하시니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마실 수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이 십자가 가는 길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일러주고 가르쳐 주셨는데, 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싸움하고, 그 열둘 중에 예수님이 반드시 왕이 될 텐데 그때 내가 1등, 너는 2등 하는 식으로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돌아보면 이 분이, 지금 베드로가 이 마지막 서신을 쓰면서 자기들이 한 짓거리들을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럽고 우습겠습니까? '그래, 그런 적도 있었지' 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교회 안에서 막 자존심 싸움하고 기분 나빠하고, 그 말 한마디 가지고 교회 안 나온다 그러고, 누가 크냐 다투고, 직분 때문에 다투고, 목사님이 누구한테 먼저 전화했냐 그것 때문에 삐지고. 그냥 생각나서 그냥 전화한 것인데, "내가 먼저 전화 못 받았다. 너는 몇 시에 전화 받았냐? 나는 몇 분에 전화 받았다" 그것 가지고 다툽니다. 그냥 다 우리도 다 똑같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나중에 하나님 나라 갈 때 되니까 '아, 종이었구나' 하고 내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너무 시간이 많이 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안 주십니다. 순종하고 싶은데, 이제는 종인 거 알겠는데, 이제 순종 좀 해서 이제 좀 시켜 주기만 하면 열심히 하고 싶은데 일을 안 주십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제 아무도 안 시켜줍니다. 일은 안 주십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지금부터 '아, 나는 종이구나' 이것을 깨닫고 말씀대로 열심히 순종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순종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주의 일에 순종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종이니까 우리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2. 은혜와 평강의 전제
2-1. 하나님과 예수를 앎
은혜와 평강을 더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것도 베드로가 좀 성장한 것입니다. 성숙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보면 거기도 끝에 이렇게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앞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후서에 오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뜻을 우리가 좀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베드로도 자주 말하는 것이고 바울도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려면 무엇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한번 따져보겠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에서부터 막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면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막 부어지고 있습니다. '야, 은혜 많이 받네. 저 사람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막 부어 주시네.'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것이 은혜라고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성실해서 이렇게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공부하고 배우면 배울수록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만큼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환란도 은혜고, 그때 나에게 주셨던 고난도 은혜고, 내가 사기꾼에게 사기당한 것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보니까 그마저도 은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니까 그렇습니다. 모르면 그것이 재수 없는 것이고 열 받는 것이고, 그 사람을 가서 때려 죽이고 싶은 것인데, 하나님을 아니까 '아, 이것이 은혜'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입니다.
2-2. 풍랑 속의 평강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상태가 평강할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조건적인 평강입니다. 환경이 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아, 평화롭다' 합니다. 돈도 좀 있을 만큼 있고, 건강도 있고, 자녀들을 걱정 없이 시집장가 보내고 취직 다 잘해 있고, 그래야 평안하다, 평강하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잡혀 죽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평강을 논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아니까 평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경험한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4장 37절에서 39절을 보면 이 경험을 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호수에서 배 타고 예수님 모시고 제자들이 배 타고 가는데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풍랑이 일어나건 말건 주님 그냥 주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막 일어나서 예수님 깨우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좀 해결 좀 하시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할 때는 '내가 경험한 예수님, 내 인생의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풍랑이 일고 배가 뒤집어질 것 같아도 문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나는 평안하다는 이 고백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훨씬 더 성숙해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연세가 들고 신앙생활이 연륜이 오래되면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다 평안합니다. 사람이 안정감이 있습니다.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예수님 모시고 사니까, 예수님을 많이 경험하고 많이 알았으니까, 경험해서 알고 공부해서 알고 배워서 알고 깨달아서 아니까, 주님 모시고 있는 나는 절대로 난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지금 이 1절과 2절의 짧은 말씀은 베드로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3. 믿음과 앎의 결합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람, 완벽한 사람,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온전한 사람이 됩니까?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은 뜨거운 열정입니다. 가슴입니다. 아는 것은 배우고 경험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내가 많이 공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합이 되어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내 뜨거운 열정으로만 신앙생활하고 교회 생활하면 그것이 반푼이입니다. 온전하지 않으니까,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열정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오래 갑니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래가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없이 자기 열심으로만 막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힘듭니다. 그런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니까, 반쪽짜리 신앙인 아닙니까? 거기에다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해져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참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맥락에서 바울이 말하는 참된 것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래야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뜨거운 열정, 가슴과 냉철한 지성이 하나가 되어야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성장합니까?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3. 알고 참여하고 얻는 것
3-1. 생명과 경건의 선물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1장 3절과 4절은 조금 복잡합니다. 이것을 좀 잘 봐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이 좀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봅시다.
3절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받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이것을 우리가 받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받는 것입니까?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어떻게 해야 우리가 받는 것입니까?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받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도 됩니다.
즉,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알기만 하면 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면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4절이 필요한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로써"라고 했습니다. '이로써'라는 말은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써'라는 뜻입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중간에 다 빼고, 제가 중요한 것만 4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로써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렇게 읽으면 됩니다.
번호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3절과 4절을 가지고 다시 보십시오.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첫째,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1번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아는 것, 즉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 4절에 나오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라고 되어 있는데, 교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제하는 것은 동참하는 것입니다. 친구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여한다, 교제한다, 동참한다 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도 같이 받고 좋은 일도 같이 경험하고 또 행복한 일도 같이 겪고, 그것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2번입니다.
셋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1번, 참여하는 것이 2번, 그렇게 할 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정리가 되십니까? 아는 것으로만은 안 됩니다. 알고 참여하고 그리고 받는 것입니다. 알고 참여하고 받는 것. 즉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바울 식으로 이야기하면 생각으로만 '나 믿어요'가 아니고 행동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선물로 얻을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해 놓은 것입니다. 1번 알고, 2번 참여하고, 3번 얻고. 이해가 되십니까?
3-2.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성장
그것이 이해가 되시면 이제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5절에서 7절까지인데요.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장해야 합니까? 여기 성장한다는 것을 참여한다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아까 우리가 1번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알고. 2번이 무엇입니까? 참여하고, 행동하고. 3번이 얻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행동하는 것, 참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5절에서 7절까지 설명해 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알고 나면 그다음 무엇을 해야 됩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그리고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하나하나 설명해 보겠습니다.
믿음에 무엇을 더하라 했습니까? 덕입니다. 여러분, 덕은 나 혼자 쌓는 것입니까? 누구에 대해서 쌓는 것입니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쌓습니다. '아, 저 사람 참 덕스럽네.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네.' 내가 나더러 '나 덕스럽다' 말하는 것은 그것은 웃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아, 너 참 덕스럽구나'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덕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덕에 그다음 무어라 했습니까?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누구에 대한 지식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다음 지식에 무엇입니까? 절제입니다. 절제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절제해야 됩니까? 타인이 해야 됩니까?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역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누구와 관계된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경건이 곧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다음 경건에 무엇입니까? 형제 우애입니다. 형제 우애는 누구와 관계된 것입니까? 이웃과 관계된 것입니다.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구와 관계된 것입니까? 세 가지 다 관계된 것입니다. 볼까요? 먼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네 자신을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사랑은 나를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하고, 그 다음 누구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다 들어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들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들어 있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3-3. 신앙 성장의 세 요소
신앙 성장은 "나는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무도 저 건들지 마세요. 아무도 저한테 터치하지 마세요. 저는 예수 잘 믿고 있으니까 전화도 하지 마세요. 주일날 교회 잘 다니고, 저는 주일날 예배 생활 잘하고 하니까 아무도 저 찾지 마세요. 안 건드려도 잘합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무엇에만 속해 있는 것입니까? 덕이 거기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다. 절제, 인내 정도만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타인과의 관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말입니다. 참 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깎이고 훈련받고 그리고 나도 그 안에서 성장하고, 그 사람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 모습을 보고, 그러면서 내 덕을 쌓아가고 그렇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도 합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또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무엇보다 나를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하셨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성장의 세 가지 필수 요소입니다. 나, 이웃, 하나님. 이 세 가지를 베드로는 이런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3절부터 7절까지를 한번 정리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는 것, 둘째 참여하는 것인데 그 참여는 세 가지 다 참여해야 합니다. 어떻게 참여합니까? 나, 이웃, 하나님에 대해 참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받습니까? 생명을 받고,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3절에서 7절까지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4. 힘써 부르심을 굳게 함
4-1. 알기에 게으르지 않기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이렇게 보면 베드로가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3년 동안 모시고 다니면서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험을 못 했습니다. 직접 살을 부대끼고 같이 밥 먹고 같이 혼나고 칭찬받고 이렇게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경험해야 됩니까? 베드로가 전해주는 편지를 통해, 설교를 통해, 혹은 기도하면서 직접적인 은혜를 받으면서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려면 성경 열심히 읽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그리고 설교 열심히 들어야 되고, 그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힘써야 합니까? 8절에 보면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또 나옵니다.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그리스도를 알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그리스도를 알아야 열매가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지금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부르셨고 너희를 택하셨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이같이 하면 11절에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4-2. 구원의 세 차원
지금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울의 언어로 옮기면 빌립보서 2장 12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입니다. 바울 신학에서 진짜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루라" 했습니다.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을 바울 신학적으로 정리해 보면, 구원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칭의의 차원이 있고, 성화의 차원이 있고, 그리고 영화의 차원이 있습니다.
칭의는 무엇입니까? 출애굽 식으로 이야기하면 아직 죄인이었는데 문설주와 인방에 피만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무조건 의롭다 한 것입니다. 의미도 모르고 뜻도 모르고 그냥 말씀대로 행하고 문설주 인방에 양 잡아 가지고 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냥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것을 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롭지 않은데 그냥 피 발라 놓고 의롭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고백하고 "예수님 믿겠습니다" 하면 "그래, 너는 의로와라"고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 다음 성화가 있습니다. 홍해 건너게 하고 광야에서 40년 뺑뺑이 돌고 훈련합니다. 열심히 훈련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 성화의 차원에서 사람들이 무너지고 넘어지고 실족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야단법석하는데, 진짜 그 속사람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훈련시키고 성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마지막 최종 종착지를 영화의 차원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에는 이것을 양자됨이라고 표현했는데, 여러분 양자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만약 고아라고 합시다. 고아입니다. 부모 없이 고아로 막 살았습니다. 아무리 막 살았어도 상처도 있을 것입니다. 고아로서 받았던 상처도 있고, 또 자기 생활 방식과 행동 방식이 고아로서 자기 멋대로 막 살았던 그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멋진 신사 숙녀분이 정말 좋은 인격을 가진 분이 저를 불쌍히 여겨서 자기 집에 양자로 입양을 했습니다. 제 속을 모르고 제 꼬라지를 모르고 멋대로 산 나를 모르고, 일단 호적으로 그 집에 입양이 됐으니까 저는 그 집에 아들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살면서 그 집 아들로서 진짜 훈련받고 성장해야 합니다. 좋은 집에서 채워주는데 그 집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냥 나는 그냥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친구 데려다가 싸움박질하고 욕지거리하고 그냥 막 사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이 싫어서 몇 번 뛰쳐나가고 또 잡혀오고 또 잡혀오고, 그러면서 그 집 아들로서 성장해 나가는 세월이 수십 년, 이것이 성화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의 멋대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성화의 과정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아까 그랬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이 과정을 이루어서 사랑까지 이루어 나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베드로나 말하는 맥락이 다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로 다 통하기 때문입니다.
5. 생각나게 하는 사역
5-1. 기억을 끄집어 올림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 그것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나게 하다'가 헬라어로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휘포밈네스코(ὑπομιμνῄσκ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의 원래 뜻은 깊은 곳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 올리는 것입니다. 기억의 저기 깊은 곳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 올리는 것, 그것이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 위에 서 있는데 그것을 저 깊은 곳에 까먹고 있었던 것,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 이것을 끄집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 자기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13절에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베드로가 말하는 장막은 육체입니다. 이 육체, 아직까지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또 나옵니다. 내가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너희를 생각나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의 역할입니다. 선생은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첫째,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둘째,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의 역할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몇 개 있습니까? 아이들 유치원 갈 때 다 가르칩니다. 이미 전부 다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20살이 넘어서 독립할 때까지 그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골고루 먹어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좋은 친구 사귀어라. 손발 깨끗이 닦아라. 돈 아껴 써라. 신앙생활 열심히 해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계속 생각나게 하는 사역이 내 사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무슨 말입니까?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장막, 육체의 장막을 벗어날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즉 내가 천국에 간 후에라도 생각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남겨두면 너희가 읽으면 생각이 날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5-2. 베드로의 통곡과 회심
베드로가 왜 자꾸 이 '생각난다'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마태복음 26장 75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생각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사건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 부인하고 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오늘 밤 내가 잡히고 고난 받고 십자가 진다." 그때 베드로가 당당하게 그랬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이 잡혀가는 꼴은 못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딱 그 전에 얼마 전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예수님 잡혀가시고 베드로 도망가고, 먼 발치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불 쬐는데 같이 앉아 있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다, 나사렛 사람과 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인하고, 그 다음에 맹세하며 부인하고, 그 다음에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닭이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기억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끄집어 올려서 생각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베드로가 돌아보고 돌아보니까 '야, 그때 생각난 것이 은혜로구나' 한 것입니다.
베드로하고 가룟 유다하고 누가 더 나쁩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누구한테 배신감을 더 느꼈을까요? 베드로입니다. 3년 동안 수제자라고 막 따라다니고 신앙고백도 멋진 고백을 두 번이나 하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원래 도둑놈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심을 위해서 예수님도 노력하셨지만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놈이 그런 짓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을 사람이 그런 짓 하는 것, 어떤 것이 더 배신감입니까? 후자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하고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생각나는 것의 차이입니다. 생각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베드로가 경험하고 통곡하고 뉘우쳤습니다. 통곡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님 찾아가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이나 용서해 주시고 사명 주시고 예루살렘 교회 맡겨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5-3. 생각나게 하는 사명
그러면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식들, 내 자녀들. 특히 싫어합니다. 신앙 이야기하면 열심히 조용히 성소하고, 특히 싫어합니다. 그런데 생각나게 해 줘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 부모의 사명입니다. 목사가 지옥 설교하면 싫어합니다, 교인들이. 그런데 한 번씩 해 줘야 됩니다. "아, 지옥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종말이 있구나" 이런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도록, 그것이 사명이니까요.
그래서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가 베드로에게는 사명입니다. 자기가 이 경험을 통해서 회심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지금 자기가 힘써 하겠다고, 이 편지를 써서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6. 변화산의 증거
6-1. 친히 본 자의 증언
그 다음 16절을 보시면 16절에서 1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내가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것이 언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 이야기가 좀 애매한데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이 두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 세례 받을 때와 두 번째가 변화산입니다. 둘 중에 어디일까요? 18절에 나옵니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그러니까 변화산 사건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난 것을 베드로가 들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것을 직접 경험한 베드로가 이야기해 주니까요. 요즘 애들 이야기로 '썰 푼다' 그러잖아요. 자기가 경험한 것을 다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초롱초롱하게, 베드로 편지를 읽고 또 직접 설교하면 그 설교 잘 들어지지 않겠습니까?
6-2.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
그 사건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2절에서 9절까지 있는데요. 2절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이렇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세 분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변화산에 이 세 분을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3절에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절에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세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입니까? 엘리야, 모세,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율법 그 자체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율법으로 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 자체가 법전입니다. 그냥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율법 그 자체를 주신 분입니다. 이분을 제자들이 봤습니다.
또 엘리야는 어떤 분입니까? 죽지 않고 불병거와 불말을 타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분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중에 최고입니다. 또 율법을 장식한 사람 모세, 또 모세와 엘리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무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다. 엘리야가 무덤이 없습니다. 혹시 떨어졌나 해서 사람들이 막 찾으러 다녔는데 못 찾았습니다. 예수님 무덤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천국의 비밀을 좀 깨달아야 되는데, 사람들이 이제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천국에 가면 먼저 가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알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100%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하고 요한과 야고보가 언제 모세와 엘리야 본 적이 있었습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통성명 시켜줬습니까? 지금 변화산에서 "자, 오른쪽에 계신 분은 모세시다. 인사드리거라. 왼쪽에 계신 분은 엘리야다. 절 올리거라"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딱 알아봤습니다. 영과 영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 먼저 가신 분, 누가 이런 표 안 달고 다녀도, 천국에 목걸이 안 걸고 다녀도 '저분은 아브라함이시구나' 알아봅니다. 아브라함 때 가가지고 "왜 그렇게 처가에 취하셔서"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이 그러시겠죠. "좀 그런 것 좀 묻지 말라고.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이 대답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다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모세도 알아보고 엘리야도 우리가 알아봤으니까, 제자들이 말입니다.
6-3.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가 좀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5절에 보면 이랬습니다.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너무 좋으니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너무 좋으니까 여기 살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였습니다.
자기들 집은 없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냥 세 분 집을 지어 드릴 테니까 여기서 살게만 해 주십시오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말 같으면 예수님이 대답을 하셨을 텐데 말 같지 않은 말입니다. 말 같지 않은 말은 예수님 대꾸 안 하십니다.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니까 7절에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발 네가 먼저 말하지 말라, 엘리야하고 모세 봤다고 그 본 것에 취해가지고 지금 무엇을 해야 될지 분간도 못하고 그렇게 설쳐대지 말라, 듣는 것이 우선이다, 듣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봤다고 세상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말씀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천국 갔던 모세와 엘리야를 내가 본다 한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정말 핵심은 예수님 말씀 듣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6-4. 기적보다 말씀 순종
우리가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은 분들이 기적을 너무 좋아합니다. 내 인생에 표적이 나타나고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엘리야 모세 그것 다 본들 아무 의미 없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주의 말씀 듣고 순종해라 그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의미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서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 초막셋을 짓거나 그런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기적 좋아하고, 시키지도 않은 것을 하려 하고 막 그렇습니다. 말 듣고 시키는 것 해야 되는데 시키는 것은 안 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막 하면 그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취미생활이지, 세상에 동아리입니다.
교회 와서도 자기 좋아하는 것만 막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문화센터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호회에 많고 동아리 많습니다. 거기 가서 하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주의 말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지, 자기 하고 싶은 것 냅다 지르고 하는 것, 그것은 자기 취미 생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신앙생활 하는지 취미생활을 하는지 말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막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교회도, 그것 못하게 하면 화내고, 이제 좀 직분 받았으니까 자기 좋아하는 것 하지 말고 주님 시키는 것 하라고 하면 삐지고 막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은 말 같지 않으니까 대꾸도 안 하셨습니다.
6-5. 산 아래의 사역
그리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산 아래에 귀신 들려 가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한 아들을 아버지가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못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세 분의 제자 데리고 갔으니까 제자들 9명 남았습니다. 거기서 못 고치는 것입니다.
17절을 한번 보실까요.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산 아래에 할 일이 이렇게 많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할 일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곳에 있지 말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이렇게 산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 힘들어 하는 사람, 이들에게 귀신 쫓아내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 감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역 감당하는 것이지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내가 좋은 곳에 앉아 가지고 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것만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행정하는 이런 것 말고 말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것만 하면 좋겠습니다. 설교하고 성경 공부하고, 다른 것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부 다 목양입니다. 전부 다 성도들 만나고 심방하고 골치 아픈 일 처리하고, 우선으로 처리해야 될 것 해야 되고, 그런 것입니다. 다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에,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 힘들어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이고 그것이 좁은 길인데,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앉아 있으면 예수님은 말대꾸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7. 말씀의 확실한 증거
7-1. 더 확실한 예언
베드로는 자기가 경험한 변화산보다 더 확실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19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여기서 예언은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변화산에서 본 엘리야와 모세를 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으니까요. '나는 그때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여기서 초막셋을 짓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여기 머물러 있자 했지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으니까 그의 말씀, 예언, 그 말씀이 확실한 말씀'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자기 멋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그래서 성경 말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7-2. 성경 해석의 원리
몇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될 것이, 성경은 통일성이 있어야 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통일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이 원칙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대부분 다 해결이 됩니다.
예를 들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좀 박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냥 읽으면 '아니, 예수님이 왜 이렇게 야박하시지? 예수님 사랑이라고 그랬는데'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것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이 논리를 가지고 이 성경을 다시 보면 그 안에 새로운 진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것을 절대 의심하면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해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 인생의 해석 안 되는 것이 있을까요? 지금은 해석이 안 돼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석이 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마음대로 풀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으로 풀고 해석해야 됩니다. 혼자서 해석하기 힘들고 혼자서 이해하기 힘들면 목회자의 도움을 받고 또 책의 도움도 받고, 이렇게 우리가 성경 공부하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만 따로 떼서 해석하는 저 이단 사이비 집단들에게 미혹됩니다. 큰일납니다.
7-3. 더하거나 빼지 말라
경고도 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말씀을 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무섭습니다. "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무섭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있는 그대로 읽고 그대로 해석하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이제 베드로후서 1장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 베드로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이렇게 깊이가 있어졌구나, 이렇게 성숙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자임을 깨닫고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갔어야 했는데, 종임을 망각하고 살다가 늦은 나이에 이제 종인 줄 아나이다 말씀하여 주옵소서.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속히 깨닫고 하나님의 종의 사명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사오니 알고 함께 동행하고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훈련받고 성화의 과정에서 나와 이웃과 하나님의 이 세 가지 관계를 성실하게 잘 이행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깊숙한 곳에 있었던 기억들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생각나게 하는 은혜가 그를 회심시켜 주셨던 것처럼,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매 순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그 생각 생각이 나를 건져내는 놀라운 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먼저 말하기 전에 듣게 하옵시고, 기적을 사랑하기 전에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시고, 내가 원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전심전력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