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거짓 선지자 / 전체녹취

베드로전후서 특강 7 - 거짓 선지자 (벧후 2장)

베드로후서 2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아멘.

오늘은 베드로후서 2장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베드로전후서는 다음 주면 마무리됩니다. 야고보서를 공부했고, 베드로전서 그리고 이제 베드로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사실 바울서신과는 다르게 직설적이기도 하고 힘이 있기도 하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는 그런 마음의 찔림이 굉장히 강력한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렇고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1. 교회 안의 거짓 교사

오늘 2장 이야기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내용인데, 베드로는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교회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요한복음 21장의 상태 그 상태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낙향해서 물고기 잡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이제는 나는 끝장난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나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고 예루살렘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나는 정말 가룟 유다하고 똑같은 인간인데, 더하면 됐지 덜한 인간이 아닌데, 그런데 예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것도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교회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목회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섬겼고, 그 교회가 초대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로만 끝나지 않고 교회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안디옥교회를 개척했고,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서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세계 선교의 기틀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사실 첫 번째 교회 초대교회의 목회자였으니까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마음의 빚진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베드로전후서를 쓰면서 특별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2장에 보면 교회 내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력들, 이단도 있고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교회를 뒤흔드는 세력들, 이런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이들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처음과 끝이 동일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2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2장을 읽을 때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사람은 이 장 말씀을 읽으면 함께 공감이 됩니다. 나도 교회를 사랑하니까요. 이것이 그냥 지역교회 이름을 붙인 하나의 교회가 아니고,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모든 교회를 우린 다 같이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1-1. 거짓 선생의 정체

첫 번째 질문을 보니까, 교회 가운데 있는 거짓 교사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절을 보니까,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을 조금 심각하게 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완벽하게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오면 사람들이 다 천사고, 다 착하고, 다 순하고, 사람들이 전부 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교회 현실을 베드로가 얘기했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림자를 내 그림자를 한번 비춰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 떨어질 때까지 해를 맞이하는 내 그림자가 아침과 해거름에는 길게 길어졌다가, 정오에는 굉장히 짧아졌다가, 그렇게 막 변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나일 수 없습니다. 햇빛에 따라서 해의 높낮이에 따라서 그림자의 길이가 계속 달라지니까요. 그런데 하루에 딱 두 번 내 키와 똑같아지는 지점이 나옵니다.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야 여기가 천국이구나, 여기가 진짜 천국이구나' 할 때가 몇 번 없습니다. 매번 그렇게 되면 좋은데 그리고 몇 번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수없이 많이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고 사람의 모습에 낙심하고, 길이가 계속 달라지니까, '아 이게 아닌데, 왜 그럴까? 이게 아닌데.'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교회를 고치고 개혁하고 함께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교회에 거짓 교사들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교회의 분쟁이 있는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단의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였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셨습니다. 무엇으로 사셨습니까? 피로 사셨습니다. 우리를 피로 사셨는데, 그런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생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1-2. 이단의 두 유형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단이란 과연 어떤 자들일까요?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그 당시 초대교회에 이단들의 종류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일서 2장 22절 23절을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거짓 선생들이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2절 자세히 보시면 그 당시 초대교회 이단의 첫 번째 유형이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냐? 그리스도. 이렇게 얘기하면 이게 곤란한 것입니다. 잘못 배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최초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예수님 당신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삼중직이 나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문장인데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당신은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이단이라는 말은 예수가 구원자임을 부인하는 자들, 그런 이단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 말입니다. 요즘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 때도 말씀드렸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등산을 이야기합니다. 등산로에 비유해서 A, B, C, D, E 코스 어디로 올라가든 정상에 가면 다 만나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편협하게 굳이 A코스만 고집하느냐, 예수를 통해서도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착하게만 살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고 있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초대교회 이단들 중에 예수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인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구원자가 아니면 누가 구원자입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마다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은 하지만 예수가 진짜 그리스도라고, 나의 완벽한 구원자라고 믿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아멘이라고 대답도 하는데, 사실은 예수님은 저 다음 순위가 되어 있고, 물질이 내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고 돈만 있으면, 예수 팔아서 돈 벌고 예수 팔아서 돈 많이 벌려고 권세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가 구원자가 아니라 돈이 구원자입니다. 맘몬이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마다 다 있습니다. 돈 버는 일에는 전심전력하는데 예수 잘 믿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이단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어디 저 옆에 신천지뿐이겠습니까? 그것도 이단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생들, 이단들이 더 무섭습니다. 돈 버는 것, 권력 가지는 것, 예수를 통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고 뭔가를 누리려고 하는 자들, 이단들입니다. 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그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이고 임박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매 순간 나를 점검해야 됩니다. 나는 진짜 예수님이 내 구원자임을 믿는가, 이것을 계속 우리는 매 순간 나를 점검해야 됩니다.

두 번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절과 2절을 보면 두 번째 그 초대교회 당시에 이단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왔다 했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단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가 이단입니다.

이것은 제가 2주 전에 베드로전서 5장 하면서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 당시 초대교회 당시에 육체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이 사람들은 육체를 굉장히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면 이 육체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영의 해방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 육체를 소중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이 육체는 영혼이 갇히는 감옥이니까 사람들은 육체를 함부로 방임하며 살았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생겼는데, 하나는 쾌락주의자들 에피쿠로스, 두 번째는 스토아주의자들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쾌락주의자들은 어차피 버린 몸이니까 함부로 육체를 막 방임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이 육체가 더럽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더럽고 행동하는 것이 더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이 더러운 육체를 입고 올 수 있겠느냐, 그래서 예수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면서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가짜로 나타나셨다, 육체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진짜 육체가 아니다, 나 같은 진짜 육체를 입고 오셨을 리가 없다, 이 더러운 육체를 말입니다.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피곤해서 주무시기도 하시고, 그 육체의 고통이 두려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도 육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를 부정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몸을 함부로 죄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도 있고, 금욕주의로 막 사는 것입니다. 금식 몇 번 하고 뭐 열심히 하고 그런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성전,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이 몸 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건강하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몸 관리를 건강하게 잘 해야 우리는 주의 일에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2. 거짓 교사의 영향

초대교회 이단 두 종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교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까? 당연히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습니다.

2-1. 탐심으로 지어낸 말

2절 보니까,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호색이라고 하면 음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 호색은 조금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는 것을 다 호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호세아 선지자가 특히 그랬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고 진리를 떠나는 것이 호색인데, 이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절,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이단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문제가 됩니다. 말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말인데 그 말의 대부분, 잘못된 말의 대부분은 탐심 때문에 지어낸 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탐심이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목적, 탐하는 마음이 탐심입니다. 무엇을 탐하는 것일까요? 물질을 탐하는 것도 있고, 자리를 탐하는 것도 있고, 인기를 탐하는 것도 있고, 등등의 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지어낸 말들이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2-2. 고라의 반역

예를 제가 들어 뒀는데 민수기 16장에 예를 들어줬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고라 일당의 반역 들어보셨습니다. 고라가 자기 사람을 모은 것입니다. 핵심 인물 4명이 주동자가 되고, 그 다음에 2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릅니다. 지휘관 250명을 모았습니다. 대단한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고라가 레위 자손입니다.

그런데 모아서 어떤 말을 했느냐, 3절 잘 보십시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럴듯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 설득력이 있느냐 하면, 분수에 지나치다, 회중들이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회중들 안에 있는데 왜 너희가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사람들의 마음을 막 자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그 사람에게 붙어서 이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서 담판을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절 보니까, "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어라" 9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모세의 말 속에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고라는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 사람은 제사장과 제사장, 레위 사람 중에 뽑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사이에는 직분의, 직무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이것은 제사장, 아론 같은 제사장, 그리고 모세같이 지도자로 인정함을 받은 사람,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독대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은 자기 가문별로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가문은 이동할 때 성막을 어깨에 매고 이동해야 됩니다. 성막의 각종 그릇과 기명을 다 깨끗하게 싸고 일해야 됩니다.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고라는 왜 똑같은 레위 자손인데 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직접 독대하고 백성들에게 명령하는 자리에서 있고, 나는 나는 무거운 것 들고 옮기고 그릇 닦는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왜 이래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사이에 계신데 네가 뭐라고 왜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 하느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입니다. 모세가 총회 위에 군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말씀 듣고 그 말씀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진짜와 가짜가 교묘하게 섞여 있습니다. 백성들이 각각 거룩한 것, 그건 진짜입니다. 각각 거룩합니다. 다 여호와께서 백성들 사이에 계신 것도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런데 거짓말이 섞여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위에 군림한다는 것, 그건 거짓말입니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할 때 10가지가 다 거짓말이면 누가 믿겠습니까? 진실을 가지고 약간씩 거짓말을 보태서 진리를 호도하고 진실을 호도하고 탐심으로 말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250명의 지휘관이 함께 부화뇌동해서 같이 지금 우르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이 나와서 죽고, 땅이 갈라져서 땅이 그대로 다 삼켜버렸습니다.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자기 직무에 성실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사실 이 고라가 탐심을 가진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이 아닙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탐심입니다. 그런데 그 높아지려고 한다는 마음 자체가 틀려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높고 낮음이 어디 있습니까?

2-3.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 중직들은 높은 자리고 직분을 받지 못한 성도는 낮은 자리다, 제가 자주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교회 다닌 지 지금 20년이 됐는데 장로 언제 따냐?"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제를 계급으로 생각하니까요. "너 장로 따고 나서 몇 년 있으면 목사냐?" 그런 이야기도 제가 들어 봤습니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젊은데 언제 장로하고 언제 이렇게 목사가 되냐?"고 저한테 그런 이야기 하신 분들 계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로서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 이것을 계급으로 생각하니까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양쪽이 다 문제입니다. 계급처럼 어깨에 힘주고 다닌 목사와 장로들이 먼저 원인 제공을 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보고 나도 여기서 계급으로 올라가야 되겠고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문제이고, 다 문제입니다. 사실 교회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정말 낮아짐의 모습을 보였다면, '야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저렇게 못 낮아지는데,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저렇게 못 섬기는데, 나는 생업이 바쁘고 일이 바빠서 교회 일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없는데' 사람들이 다 장로 되는 것 겁을 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다 교회 직분 받고 권사 되고 중직 되는 것을 다 겁을 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에 대해서 경각심이 좀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대로 못 살아냈으니까 교회 중직들이 지금까지, 그러니 이런 탐심으로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먼저 된 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먼저 중직된 자들이 제대로 섬기고 제대로 일하고, 교회에서 담임 목사라고 교회에서 중직들이라고 대접 받으려고만 하고 좋은 방 좋은 자리 차지하고 앉아 가지고 행세하고 있고, 이러니 사람들 마음에, 순진한 사람들 마음에 탐심을 부채질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이런 것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판

그 다음,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자들을 어떻게 심판하셨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도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심판하셨습니까?

3-1. 천사의 심판

4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유다서 1장 6절, 그 아래 내려가면 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자기 지위입니다. 자기 지위. 지위가 무엇입니까? 직분입니다. 자기 직분, 내가 해야 될 일,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고라 일당 보십시오. 우리가 앞서 본 고라일당, 레위인의 직무를 받았습니다. 성전의 그릇과 성전의 성막을 옮기는 일과 여러 가지 일을. 그 일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다른 데 탐심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각자로서 우리에게 맡은 바 직무가 있습니다. 목사인 저는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으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직무를 받았는데 그 지위를 떠나고 그 직무를 떠나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냥 심판입니다. 당연히 심판 받겠습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 전하는 사명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 자리를 영화롭게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중직이 되었다는 것, 우리가 집사가 되고 교회 직분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기 지위와 직무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도 심판하셨는데, 심판 때까지 하나님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가두어 버렸는데, 우리는 그 직무를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3-2. 노아 시대의 심판

5절,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그랬습니다.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갔습니다. 마지막이 어떻게 됩니까? 멸망입니다. 홍수 심판입니다. 떠나가면 심판입니다. 떠나가면요.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견디고 지켰습니다. 구원입니다. 단순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심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3-3. 롯의 구원과 전가된 의

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고" 7절,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그런데 우리가 여기 딱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걸립니까? 롯 앞에 '의로운'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굉장히 불편합니다. 어떻게 롯이 의로우냐, 롯이 의롭지 않은데 어떻게 의로우냐.

이것을 우리가 좀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되는데, 지금 이것을 제가 설명을 하면, 이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전가, 아시죠? 전해졌다, 부여받았다, 나로 인한 의가 아니라 전가된 의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전가받은 의입니다. 롯이 의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전가된 의의 중간 자석 역할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롯의 행실이 이루었다거나 그가 진짜 의로운 짓을 했다거나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목숨을 걸고 눈물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그냥 여겨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고, 눈물 어린 그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이 전가해 주신 의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9장 15절 16절 한번 보십시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소돔성이 멸망하는 그날 아침입니다. 동틀 때입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누구 때문에 자비를 더한 것입니까?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 전가된 의를 받은 존재입니다. 구약시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의로워서 그들에게 죽음의 사자가 패스오버(passover),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어린양의 피가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그런데 여기 우리가 진짜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전가된 의를 받은 사람은 그 의를 붙잡고 살아 내야 됩니다. 그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전가된 의를 나에게 전가됐습니다. 나는 아무 의로운 일을 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강권적으로 그 소돔성에서 그 한 가정만 딱 건져내서 성 밖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대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롯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멀리 도망가라고 그랬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저 산으로 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9장 19절 20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롯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소알성에 가는 것입니다. 왜? 거기 가서 진짜 소돔성이 망하나 망하지 않나 보려고, 양다리 걸치는 것입니다. 전가된 의를 자기의 의로 못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칭의의 차원의 구원은 얻었으나 성화의 차원에서 실패한 인간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의 중보를 통해서 그에게 부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4. 불의한 자의 특징

그다음 불의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9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이건 당연합니다.

4-1. 육체적 방종

그 다음 10절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교회 안에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있다 그랬습니다. 아까 우리가 이단들 공부할 때 살펴볼 때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 육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를 정결하게 생각하지 않고 에피쿠로스적으로 쾌락주의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왜? 어차피 이 몸은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예수님이 이 더러운 육체에 오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고 이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야 어차피 우리 몸은 더러운 몸이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이 몸에 오시질 않아, 가짜로 그냥 나타난 가현설일 뿐이야' 이렇게 계속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사느냐 보십시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주관하는 자,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영적 지도자, 이런 자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함부로 탐닉하고 죄짓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또 어떻게 생활합니까? 당돌합니다. 자기 죄를 잘 모르니까 당돌합니다. 그것이 어때서, 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왜 당돌한 것입니까? 자긍하며, 스스로 긍지를 또 느낍니다. 자긍하며, 또 떨지 않습니다. 죄의식이 없으니까요. 영광이 있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도 비방합니다.

사람이 왜 그런 것이 있습니다. 너무 당당하면 그 앞에서 좀 주눅이 듭니다. 우리가 저 사람 분명히 잘못했는데, 잘못한 사람이 너무 당당하면 사실 좀 살짝 기가 좀 질리기도 합니다. 그런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 그런 자들이 멸망의 길을 가는데요.

4-2.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자

12절 보십시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베드로가 교회 안에 있는 이런 사람을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이성이 없는 짐승이면 본능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본능에 따라서 자기 육체를 함부로 방임하고, 그래서 교회 안에 자꾸만 악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야 세상 사람들 다 이렇게 사는데 너희는 왜 자꾸 이렇게 육체를 이렇게 함부로 방임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사느냐'고.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사람들은 말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는 척하고 막 비방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성경도 모르면서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 척하면서 비방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자들입니다.

13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여기서 낮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해 떠 있는 낮이 아니고 일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건강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 일해야 됩니다. 생업을 위해서도 일을 하지만 주를 위해서도 일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 즐기며 노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야 시간이 어디 있어 교회 가서 매여 가지고 그런 일을 할 시간이' 막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여기서 연회는 성만찬입니다. 거룩한 성만찬을 막 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즐기고 놉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여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굳세지 못한 자들을 유혹합니다. 헷갈리는 사람들, 이제 교회 처음 와가지고 잘 모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유혹해 가지고 미혹하게 하는 자들, 이런 자들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베드로가 선을 딱 그어 버렸습니다.

5. 발람의 교훈

자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사람들은 구약의 인물 중에 이 사람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5-1. 발람의 죄

15절,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여러분 민수기에 보면 발람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발람은 사실 점술가입니다. 점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서 막 진군해 오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용하다고 불리는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요. 하나님이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꿈에 나타나서 하지 말라고요. 그런데 돈 많이 준다 그러니까 나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나귀의 눈에는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입니다. 그런데 발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서 있으니까 두려워서 서버렸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수기 22장 25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름에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나귀가 억울하게 맞았습니다. 나귀가 입을 열어 버렸습니다. 28절,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성경에 짐승이 말한 것이 두 번 나오는데요, 뱀이 한번 말했고 지금 이 나귀가 한번 말하는데, 짐승에게 책망받은 유일한 사람이 발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요. 발람은 짐승보다 못한 놈입니다. 어떤 사람이 짐승보다 못합니까? 돈 쫓아가는 사람, 하나님께서 금하셨는데 그 금한 일을 끝까지 하는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아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성이 없는 짐승 같다 그랬습니다. 그 예를 발람을 들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 '짐승보다 못한',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진짜 발람이 꼭 그랬습니다.

5-2. 발람의 전가된 의

그런데 이 발람이 한때, 이 일 이후입니다, 발람이 한때 성령으로 충만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발람이 이 모압 발락의 청을 듣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할 때마다 이것이 입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저주하려고 하는데 자꾸 축복이 나옵니다. 뭔가 모르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그 힘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느낀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민수기 24장에 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진 친 것을 보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점술을 쓰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영이 딱 임한 것입니다. 이것도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이 사람에게 전가됐습니다. 롯처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혜를 받았으니까 은혜를 붙들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이 그에게 임하니까 보십시오. 3절에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이후에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이야기가 막 나옵니다. 이렇게 잘 믿고 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5-3. 발람의 타락

그런데 발람은 전가된 의를 성화의 삶으로 끌고 가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 보십시오. 민수기 31장에 보니까 7절에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습니다.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발람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람,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던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왜 죽었을까요?

민수기 25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함에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 사건을 뒤에서 만들어낸 자가 발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다시 사건을 재구성해 봅시다. 모압 발락이 발람을 불러다가 저주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입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게 하니까요. 돈은 많이 줬습니다. 이미 돈값을 하라 그러는 것입니다. 발람에게 또 더 많은 돈을 준 것입니다. 1차 시도에 실패했으니까요. 그런데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돈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일을 꾸며줍니다. '내가 저주하는 것은 실패했는데 이제 나는 빠지고 너희들이 뭔가 해봐라, 저 사람들이 광야길을 오래 걸어왔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싯딤에, 모압에서 유명하고 예쁜 여인들을 거기다가 다 한번 만들어 놔봐라.'

그랬더니 진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 못 차리고 그냥 거기서 그 여인들과 함께 음행에 빠져 갑니다. 음행에 빠지고 그것으로 끝입니까? 여인들이 이 남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모압의 우상들에게, 거기서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고 그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굉장히 많이 죽습니다. 염병이 퍼져서 수없이 많이 죽습니다. 이 일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만들어 준 자가 발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발람을 죽인 것입니다.

평가를 이렇게 해놓고 있습니다. 민수기 31장 16절 보십시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발람의 꾀를 따라 그랬습니다. 여인들을 싯딤에 놔두라, 이게 발람의 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5-4. 처음과 끝의 동일

자 여러분 이것 보면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진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정말 따라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 믿음이 어린 우리는 믿음의 동역자 참 좋은 믿음의 선배들을 따르고 싶은데, 처음과 끝이 동일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임해서 전가된 의를 가졌는데 물질 때문에 이렇게 타락해 나가고 망해나간 발람 같은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사람 참 괜찮았는데 중직 직분을 받고 나니까 사람이 타락하고 변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난할 때는 믿음 생활 잘하고 괜찮았는데 사업에 성공하고 괜찮으니까, 먹고 살만 하니까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가 작을 때는 참 좋은 목회자였는데 교회가 성장하니까 아 사람이 이상해지는 목회자도 있고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3장 7절과 8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변하지 않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마디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그 사람의 행실의 결말을 어떻게 주의하여 봅니까? 죽을 때까지 어떻게 따라다닙니까? 다른 말로 여기 옮기면 사람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 믿지 말라. 예수님 이야기를 히브리서 기자가 왜 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예수님 믿고 따라가라.

교회 안에는 거짓 선지자도 있고, 탐심으로써 말을 지어내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육체를 자기 죄악에 방임하며 살면서 이단 노릇하면서도 오히려 더 당돌하고 자긍하고 당당하고 떨지도 않는 사람도 있고, 발람처럼 전가된 의를 받았지만 성화로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도 있고, 그런 자들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한 분 말씀 믿고 따라가라, 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5-5. 물 없는 샘

발람 같은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17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물 없는 샘, 쓸모 있습니까? 샘은 있는데 물이 없습니다. 사람을 실망시킵니다. 바람에,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괜찮았는데 언제 보니까 없습니다. 사라지고.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샘이 되면 물이 있어야 됩니다. 당연히 누군가가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왔는데 내어줄 것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그래도 목회자인데, 내가 그래도 교회 중직이고 집사인데,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왔는데 실망하고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따뜻하고 좋은 인품이라도 내가 보여줘야 되고, 그것이 없으면 밥이라도 한 그릇 사 줘야 되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실망시키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그들을 돌보고 대해주어야 합니다.

18절, "이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랬습니다. 말만 많은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에, 허탄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알맹이가 없다는 말 아닙니까?

6. 점점 힘을 잃어감

베드로후서 2장 20절,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여기 '지다(ἡττάομαι/헷타오마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지다, 점점 힘을 잃어 사라지다.

자 여기 우리가 이것을 다시 잘 읽어 봐야 되는데요.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시 얽매였습니다. 그리고 집니다. 그런데 이 지는 것이 한 번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적어뒀습니다. 점점 힘을 잃어 사라지다.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는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점점 점점 힘을 잃어 사라집니다.

왜 점점 힘을 잃어 사라질까요? 다시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고 힘을 얻고 살아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말씀과 기도를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은혜 입은 자는 말씀하고 기도, 이 두 가지를 꼭 붙잡아야 됩니다.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점점 점점 힘을 잃어 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놓아 버리고. 은혜를 입었는데, 충만한 은총을 입었는데 그 이후에 성화의 삶을 살면서 말씀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1년에 한 번 부족하고 큰일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부족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성화의 삶으로 계속 고양시키고 성장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점점점 힘을 잃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이렇게 설명해 준 것입니다.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은혜를 입은, 받은 자들이 끝까지 은혜를 쭉 기억하고 교회를 거룩하고 좋은 공동체로 만들어 가려면 말씀과 기도를 꼭 붙잡고 살아가라, 거짓 선지자와 이단을 쫓아내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력들에게서 잘 분별하라, 이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 공동체에 이르는 말씀 중에 교회에 거짓 선생들 이단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자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자들, 오늘 우리가 돈을 그리스도로 삼고 우리 육체를 함부로 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도 이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여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오니 우리가 이단성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참된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탐심으로 거짓을 지어내는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중직이라면 또한 성도라면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믿음의 자리에서 항상 교회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이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가된 의를 성화로 살아내도록 도우시고 롯처럼 발람처럼 살지 않도록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말씀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사오니 생명처럼 말씀을 붙잡고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고 매 순간 아버지께 기도하여 이 진리가 우리를 살리는 말씀임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