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 재림을 확신하다 / 전체녹취

베드로전후서 특강 8 - 재림을 확신하다 (벧후 3장)

본문: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오늘은 베드로후서 3장을 끝으로 이번 학기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 열네 번의 시간을 마감합니다.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을 통해서 첫 번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우셨고, 그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경험하게 하시고, 핍박받고 교회가 흩어지는 것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자들이 그냥 흩어지지 않고 복음을 들고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 베드로와 야고보가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옛날 이천 년 전의 교회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도 거의 비슷하게 가지고 있고, 본질이 같고 문제가 비슷하다면 해결책도 성경에 거의 비슷하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끝으로 베드로전후서를 마감하게 되는데, 베드로가 남긴 여운을 계속 마음에 간직하고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마지막에 베드로는 재림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성장을 말합니다.

1. 기억나게 하는 사역

1-1. 깨달음과 기억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를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둘째 편지는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 끝 장에 가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1장에서도 보았듯이 베드로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것, 베드로후서에서 아주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생각나게 하고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아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생각나게 하는 것은 목사에게, 그리고 영적 지도자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모르는 것, 전혀 몰랐던 지식을 집어넣어 줄 때 받는 사람이 "아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거였구나!" 하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가 확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첫 번째 깨닫게 하고 "아하!" 했던 경험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가르침은 예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계속 예수님이 주신 지식과 지혜와 성경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또 뒤에 나오지요,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첫 번째 경험입니다. 깨달음입니다. 그다음은 사도들의 역할입니다. "기억나게 하려 하노라" 사도들의 역할은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고, "예수님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느냐" 이렇게 자꾸 일러주는 것입니다.

1-2. 몸으로 기억하라

여러분, 기억나게 하는 것과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머리로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그런 걸 배웠었지." 그런데 머리로 기억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진짜 기억이 오래가는 것은 몸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수학 문제를 풀어 주지 않습니까?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고" 공식을 가르쳐 주고 공식에 대입해서 문제들을 쭉 풀어 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있을 때는 다 알 것 같습니다. 깨달습니다. "이렇게 푸는구나, 이 어려운 문제가 이 공식에 대입하니까 이렇게 쉽게 풀리는구나" 다 압니다. 자기는 이미 그때는 시험 백 점입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방 던져 놓고 신나게 놀다가 시험 치면 빵점 맞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생각나게 하는 훈련을 안 해서 그런 것입니다. 집에 와서 연습장 펴놓고 복습하고 써보고, 비슷한 유형의 문제 가져다가 또 풀고 또 풀고, 계속해서 내 몸이 이 문제를 보면 즉각적으로 어떻게 풀어야 되는지를 기억하게 한다면 당연히 시험 치면 백 점 맞습니다. 틀리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잘 풀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은 내 몸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리가 두 군데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공동체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세상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일을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하지 않으면 내 몸이 기억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사입니다. 발 씻어 주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먼 길을 온 손님이 집에 오면, 그 집에 있는 종이 주인의 친구분이 오셨다고 대야에 물 받고 허리춤에 수건 끼워서 무릎 꿇고 앉아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리고 수건으로 감싸 드렸습니다. 그것이 종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너무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물을 가져다가 발을 씻어 주십니다.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거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깨달음입니다.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 하셨습니다. 너희도 서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그다음에 베드로가 설교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을 기억나게 할 것 아닙니까? 자기 공동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입니다. 그러면 발만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니까 속이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 앞에 내가 무릎을 꿇고 섬기고, 허리를 숙이고 섬겨 주고,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안 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내 삶에서 실천해 보고, 섬겨 주고, 서로 발 씻어 주고, 그것을 해봐야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억이 오래 가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을 하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설교 듣는 것 많고 성경 공부하는 것 많고 배우는 것은 많아서 들어가 있는 지식은 굉장히 많은데, 기억나게 하는 훈련이 없는 것입니다. 안 섬기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도 섬기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도 말씀과 삶이 따로 분리되어 살고 있습니다.

듣기만 하면 편하지요. 말 안 해도 되고, 그냥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것도 합니다 저것도 합니다 하면 벌써부터 난리입니다. 전부 다 일꾼이 부족해서 난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억나게 하는 훈련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기억나게 하는 훈련을 열심히 내 몸으로 하고 기억하고 섬겨 주어야, 그래야 이것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니까 평생 말씀은 남의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일깨워 기억나게 한다, 생각나게 한다. 제발 하나님 말씀 듣고 해보라, 실천하고 살아 보라는 말씀입니다.

2. 말세의 조롱하는 자들

2-1. 재림을 부인하다

그다음 말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3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누구를 조롱합니까? 이 사람들이 성도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성도도 예수 잘 믿는 성도를 조롱합니다.

어떻게 조롱합니까? 이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를 조롱합니다. 조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4절에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재림하신다는 말 거짓말이다, 예수님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이 그 당시에 유행했을까요? 조롱하는 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올 것이다." 천사들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때 어떤 믿음이 있었느냐 하면 임박한 재림 사상이 있었습니다. 자기들 눈으로 보는데 예수님이 승천해 가셨고, "너희가 본 모습 그대로 오시리라" 했으니까 당장 내일 올 것 같습니다. 당장 지금이라도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 년 이 년 몇십 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으니까, 이제 예수님 강림하지 않는다, 재림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정욕대로 살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절제합니다. 정욕에 자기를 내던지지 않습니다.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합니다. 그러니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바보처럼 보이고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2-2. 창세기의 교훈

그런데 이런 자들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세기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19장 4절과 5절을 보면,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동성 간 성폭행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롯의 집에 두 천사가 왔는데, 이 천사를 보고 소돔 성 사람들이 성폭행을 할 테니 끌어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정욕대로 막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성에 예고된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알려줘도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14절입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곳에서 떠나라 했는데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조롱하는 것입니다. "장인어른,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믿지 않습니다. 종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종말이 믿어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종말이 믿어지고, 역사의 종말도 믿어지고, 개인의 종말이 믿어진다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이 역사의 종말은 정말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손 치더라도, 개인의 종말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압니까? 당장 오늘 밤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찾아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눈으로 봅니다. 그저께까지 멀쩡했던 분이 세상 떠나는 것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종말을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적 같습니다. 왜 이것을 믿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렇게 정욕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 밤 하나님이 내 영혼을 데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함부로 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함부로 자기를 정욕에 방임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급한데,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되는데, 책망 받기 딱 좋은데, 지금 가면 "하나님 지금은 아니에요" 이런다고 유예되는 것도 아닌데, 준비하고 살아야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사건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백이십 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 유예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배 공동체 사람들을 뜻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을 뜻합니다. 예배 공동체 사람들이 예배 공동체를 파괴하고 박차고 나와서 가인의 후손과 혼인관계를 맺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가 텅 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의 심판을 유예하시고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얼마 동안? 백이십 년 동안입니다.

그런데 이 백이십 년의 기간은 노아가 방주 만드는 기간입니다. 노아의 방주 만드는 그 행위가 전도입니다. 방주 열심히 짓는 행위가 전도입니다. 열심히 방주 만들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얼른 나와 같이 방주 만들고 여기 들어오십시다" 하는 것,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종말을 안 믿습니다. "노인네 미쳤다"고 하지요. "이렇게 맑은 하늘에 무슨 홍수가 나오고, 무슨 다 떠내려간다는 이야기냐"고 안 믿습니다.

창세기 7장 4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여기 칠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칠 일은 백이십 년이 지난 플러스 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굉장히 무서운 하나님, 잔인한 난폭하신 하나님이라고 오해합니다.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릴 만큼 난폭하다고요.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이 백이십 년을 기다려 준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백이십 년 동안 기다리고, 노아가 그렇게 방주 지으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도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단 한 사람도요.

그런데 하나님이 방주 문 닫기 전에 칠 일 동안 또 기다렸습니다. 백이십 년 플러스 칠 일, 얼마나 오래 기다린 것입니까?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린 것입니까? 오늘 뒤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의식이 없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쓸려 내려가고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에게 종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너희를 조롱하는 자들, "교회 가서 지금 못하는 짓이냐" 이렇게 말하는 자들, 그들은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다. 창세기에 노아 홍수 사건도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있었는데, 그들처럼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염려하지 마라, 화낼 필요도 없다, 열받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하다가 멸망당할 것이니 종말 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왜 잘못되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그때의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물이 넘침으로 멸망했다, 창세기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까? 노아 홍수 사건입니다. 창세기 6장 7장에 나옵니다.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불사르다, 창세기에 불로 심판은 어느 사건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건입니다. 창세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심판이 다 나옵니다. 물 심판, 불 심판이 다 나옵니다. 종말의 때는 불 심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엔진입니다. 창조가 있고, 인간의 타락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도 물 심판이 있고 불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자세히 잘 읽어보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 성경 전체가 그 안에 축약되어서 들어 있는 성경 전체의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에 물 심판, 불 심판이 다 들어 있습니다. 두 가지 유형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우리 눈앞에, 코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을 못하면 곤란합니다.

3. 하나님의 시간

3-1.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8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시간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시간은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냥 눈 뜨고 하루 24시간 막 지나가고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그런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의미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삼십삼 년 동안 두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은 단 삼 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 년 동안 하신 일이 이 세상에 오고 올 모든 인류가 수만 년 동안 한 일보다 훨씬 더 크고 영원합니다.

3-2. 오래 참으심의 의미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안 오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왜 유예하십니까? 왜 미루십니까?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에 백이십 년을 기다리셨던 것처럼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4. 종말을 대하는 태도

4-1. 구별된 삶

참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첫째는 구별입니다. 영어로 하면 세퍼레이션(Separation)입니다. 성경적인 언어로 하면 거룩입니다. 거룩은 뭡니까? 구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구별되어 살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정욕대로 삽니다. 그런데 성도가 정욕대로 살면 세상과 구별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도가 자기들처럼 똑같이 살고 있는데 무슨 예수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정욕에 자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 살아야 합니다.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심판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입니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별되어 살고 있는가? 시선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 두 가지를 점검하면 됩니다.

4-2. 시선을 고정하라

창세기 13장 10절 그리고 14절을 보면 전혀 상반된 두 분이 나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눈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시선입니다. 롯의 시선이 어디를 봅니까?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지금 이집트에 갔다 오고 난 후입니다. 그때 롯의 시선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떠난 것입니다. 이미 눈이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비옥한 나일강 유역을 보고 와서 그의 눈이 이미 하나님 주신 땅을 떠나서 그 시선이 저쪽으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구별된 사람입니까? 롯이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까? 그러니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하나님이 눈을 들라 하셨습니다. 롯 떠나고 나서 코가 빠져나가 가지고 고개 푹 숙이고 그냥 집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으니까요. "눈을 들어" 무엇을 보라고요?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어디를요? 약속의 땅 가나안 땅 동서남북을 보라, 하나님을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누구를 보자고요?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를요.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시선은 항상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보면 내가 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 지으면 예수님 다시 십자가에 또 못 박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등지고, 십자가 등지고, 그냥 세상 바라보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바라보고, 물질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면 그것이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참된 종말 의식, 재림을 기대하고 사는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라,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또 바라본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엇을 바라본다고요? 그리스도를, 십자가를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사람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보고 있으면, 예수님 보고 있으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죄 짓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바라보고 있으면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 보고 있으면,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되어 있으면 됩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또 오래 참으심이 나옵니다.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주님이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자들 아닙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도 오래 참는 본성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그것은 사탄이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은 오래 참는 성품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개발해야 됩니다. 개발하고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런데 기간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십 년만 참아, 백 번만 참아" 횟수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래 참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장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으로 바꿔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바꿔 보십시오.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고, 예수님은 투기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 참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참고, 하나님께 그 성품을 달라고 해보십시오. 사탄에게 속지 마시고,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야" 이렇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계시록 3장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칭찬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하나도 없는 칭찬만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아주 약한 교회였습니다. 굉장히 연약한 교회입니다. 돈도 별로 없고 성도의 수도 별로 없고요. 그런데 이 교회가 칭찬받은 이유는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인내의 말씀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경에 엄청나게 많습니다. 내가 그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말씀 믿으니까 주세요" 그런데 당장 안 줍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내의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오랫동안 지킨 것입니다. 핍박도 견디고 지키고, 이겨내고 참아내고, 그렇게 견디고 또 견딘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찬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고 인내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5. 은혜와 지식의 성장

5-1. 성경 해석의 경계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는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16절입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러분, 성경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됩니다. 이단들이 "나는 성경을, 우리는 성경을 다 풀어 줍니다" 하면 백 퍼센트 이단입니다. 성경을 다 풀어준다는 말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가 성경에 계시로 주어졌지만 이것을 인간이 이해하고 풀어내는 것은 또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과거 수천 년 동안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주석하고 설교하고 역사적으로 풀어놓은 것들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또 묵상하고 기도해서 성도들에게 알려주지만,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이해 안 되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우리 안에 강박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나옵니다.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요. 우리가 성경을 백 퍼센트 이해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알려주겠다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비유 풀이 따라가고, 그렇게 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노력하고 연구하고 추구하되, 그러나 거기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17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이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사람들이 미혹해도 넘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5-2. 진정한 교회 성장

이제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성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자라가라" 하셨습니다. 자라가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성장하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성도의 성장을 소망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좀 멋진 말을 쓰고 싶을 것 아닙니까? 가장 마음에 담아둔 말을 쓸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마지막에 마음에 담아둔 말이 이 짧은 말인데, "자라가라" 성장입니다.

성장에 두 가지 요소를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은혜와 지식입니다. 은혜는 방향이 어떻게 됩니까? 위에서 아래입니다. 은혜는 누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까? 지식이 먼저 있었습니까? 전적인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기 잡다가 예수님의 선택을 주권적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 예수님 제자 할래요" 손들고 제자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 시간이 가면서 지식이 쌓여간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 먼저입니까? 지식이 먼저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지식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의 방향이 어떻습니까? 삐뚤어져 있으니까 사람 잡아다 옥에 넘기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다메섹 도상에서 은혜가 임했습니다. 불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지식은 성장에 아주 필수적인데, 어떤 사람은 은혜로부터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일 대, 처음 예수 믿는 신앙의 일 대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합니까? 은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부터 시작하면 체험도 많고요, 눈물도 많고, 눈물 골짜기 지나야 되고, 광야 지나야 되고, 시험도 많고, 쓰러지는 것도 많고, 좌충우돌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있는 분들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그때 내가 경험한 것들이 다 여기 이렇게 있구나" 그러면서 이제 은혜의 조각들이 지식으로 집대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신앙의 이 대 삼 대들, 모태신앙으로 성장한 저 같은 사람들, 지금 우리 교회 학교 아이들, 요즘 교회 학교 아이들은 부모가 다 신앙생활하면서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합니까? 지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식은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인데 장작입니다. 장작 쌓는 것입니다. 장작을 열심히 쌓아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쳐야 됩니다. 무조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에게요. 그러면 바울처럼 그것이 계속해서 장작처럼 쌓이고, 가르치다 보면 수련회를 통해서든지, 기도회를 통해서든지, 어떤 획기적인 인생의 전기를 통해서든지 그 지식에 불이 확 붙는 날이 옵니다.

그러면 부모는,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 저 많이 쌓아놓은 장작에 불 좀 붙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불 좀 붙여 주십시오"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있도록, 그때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기도만 할 뿐입니다. 불 붙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장작을 열심히 쌓아두는 것, 교회 학교 선생들 또 부모들이 해야 될 일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성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착각을 하느냐 하면 성장이라고 하면 교회의 건물이 커지고, 교회 숫자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재정이 좋아지고, 이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적인 성장, 몸집이 붙는 것이니까, 그러면 "나도 괜찮은 성도구나, 나도 성장하고 있구나" 착각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나도 좋은 성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것이 진짜 착각입니다.

교회도 외형만 성장시키고 숫자만 늘리고 재정만 늘릴 것이 아니고, 성도가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도록 계속해서 이끌어야 합니다. 진짜 교회가 해야 될 일이 이런 일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함께 가고, 기도는 뜨겁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고, 말씀 공부하고 지식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두 가지 날개를 함께 가지고 함께 가야 됩니다.

그리고 성도는 교회 외형이 성장한다고 내가 좋은 성도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야 됩니다. 큰일납니다. 그리고 내 아내가 신앙이 성장하고 좋아진다고 나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신앙 성장은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14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믿는 것, 뜨거운 열정이고, 아는 것, 차가운 지성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이것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장이니까요. 어디까지입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어린아이처럼요. 둘 다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지막에 자신을 여기다 대입한 것입니다. 나는 은혜에서 시작해서 지식으로 성장해 갔는데, 바울은 지식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성장해 갔는데, 너희들이 성장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교회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헌금 많이 해, 건물 지어" 그런 이야기 한 절도 한 적 없습니다. 성도의 성장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가 다 이렇게 성장하면 그것이 교회 성장입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 성장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성도가 되고, 성숙한 인격이 되고, 그런 성도들이 진짜 많아져서 미어 터져 나갈 때 그때 교회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 성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성장하고, 우리 자녀들이 성장하고, 우리 가정이 성장하고, 교회 공동체가 다 성장하기를 기도하셔야 됩니다. 헛된 성장 따위에 목숨 걸지 마시고, 이런 성장이 진짜 성장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야고보서 말씀과 베드로전후서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재림이 없다고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 정욕대로 사는 자들, 그들 때문에 속상해하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그 옛날 창세기 시절에도, 노아 홍수 시절에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또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 년을 살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록할 것 한 자도 없는 의미 없는 인생 더 이상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 앞에서 값지고 의미 있고 진실한 인생 살아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종말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별되어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며 살아가게 하옵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도 오래 참게 하시며, 은혜와 지식에서 끝없이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지식을 많이 쌓아 두도록 도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불을 붙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불을 주셔서 그들에게 은혜가 임하여 그 불꽃이 온 인류를 환하게 밝히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 자녀들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