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특강 10 - 광야에서 (3) / 삼상 27-31장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삼상 27:1-2)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다윗 생애의 최고의 자리, 하이라이트의 자리는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사실 광야가 어떻게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용적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인생에서는 나중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 왕궁에 거하고 거기서 밧세바와의 죄를 짓는 것보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던 인생이 다윗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그저 우리가 피해야만 할 곳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광야가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광야이기만 하면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광야 1, 2, 3을 살펴보는데, 오늘 세 번째 광야에서는 다윗이 광야에서 죄 짓는 자리를 봅니다. 사실 광야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넘어지기 딱 좋습니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이 광야에서 왜 실패했는지, 그 실패의 원인을 알면 우리는 광야 생활을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1.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다
1-1. 생각에 빠진 다윗
사울을 피해 기약 없는 방랑 생활을 하던 다윗이 어떤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다윗은 일생의 아주 기념비적인 두 가지 결단을 합니다. 사울을 살려주지 않습니까?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그 이후, 또 그 이전 해서 사무엘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삼으면, 전에도 한 번 살려주고 후에도 한 번 살려주고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울은 자기의 목숨이 사실 다윗의 손에 달려 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질 것 아닙니까? 아무리 사울이라 하더라도 이제 그쯤 되면 좀 쉬어야 합니다. 이제 자기 왕궁에 돌아가서 생각도 좀 해보고, 다시 전열을 좀 가다듬고, 들판에서 야영하다가 다윗과 아비새에게 뚫려 버렸으니까 자기 군대의 대형도 한번 점검해보고, 이런 휴지기가 좀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사울이 다윗을 쫓아오다가 잠깐 쉬러 간 사이에, 이제 전열을 좀 정비하고 자기도 좀 돌아보는 그 사이에 다윗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탈색하기에는 좀 살 만합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듯이 사울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몰아치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항상 몰아치다가, 이제 조금 숨을 좀 돌릴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주 영악하고 사악해서, 시간이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딴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주를 찬양하면 참 좋은데, 시간이 있으니까 딴짓을 합니다. 지금 다윗이 딱 그 모습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27장 1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성경 읽을 때 이 '생각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그냥 지나가면 안 됩니다. 이 '생각하다'라는 말을 지금 히브리어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마르(אָמַ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원래 '아마르'는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말하다' 이렇게 되니까, 자기 마음에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혼잣말 하는 것 아닙니까?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이것을 '생각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다윗은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고 항상 누구에게 말해 왔습니까? 하나님께 말해 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 자기 속을 털어놓고 항상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있으니까, 사울도 이제 안 쫓아오고 여유가 좀 생기니까, 나도 좀 스스로 사색도 좀 하고 생각도 좀 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도 좀 돌아보는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필요하지요. 물론 보통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철학과를 나왔는데, 저희 선배들이 항상 저한테 한 말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딱 좋은 학문이고, 돈 없으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그랬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은 그래도 좀 먹고 살 만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사색하는 것이지요.
다윗이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니까 혼자 생각하다가 어디까지 가버렸느냐 하면, 보십시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이런 생각을 왜 합니까? 이때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돌봐주셔서 사울의 손에 붙잡히기는커녕 사울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가졌는데, 자기 손으로 사울을 풀어주고, 사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사울의 군대를 떨게 만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어이없지 않습니까?
거기서 또 좀 더 나아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미치겠습니다. 이제 사울의 손에 사로잡힐 것 같고, 이제는 우리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 들어가서 피하는 게 좋겠다니요! 그러면 그냥 거기서 생각이 막 그런 생각이 들면, 그때라도 생각을 딱 멈추고 "하나님, 이런 생각이 선한 생각입니까, 나쁜 생각입니까? 그렇게 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물어봐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잘한 게 하나님께 묻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묻는 게 다윗의 시그니처인데, 한 번 더 묻지도 않고 그냥 결정해 버립니다. 2절에 보니까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21장에서 한 번 갔었습니다. 아기스가 죽이라 그랬지요. 그래서 미친 척하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겨우 위기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은 시가 시편 34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기스에게 간 것은 그때와 지금이 굉장히 다릅니다. 상황이 왜 다르냐 하면, 지금 아기스는 다윗과 사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항상 이스라엘을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다윗이 굉장히 거물급 인사가 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혼자 오는 게 아닙니다. 육백 명을 거느리고 함께 정치적인 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드 왕 아기스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거대한, 지금 거물급 인사가 된 다윗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해서 지금 가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말씀 읽고,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래야 되는데, 말씀 없이, 기도 없이 그냥 생각만 하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혼자 공상하다가 생각하다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꼬리가 또 다른 꼬리를 물어서 실체도 없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아 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지금 딱 그 꼴입니다.
광야에서 정신없이 사울이 그를 몰아칠 때는 순간순간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시간 없을 때 기도하고, 바쁠 때 기도하고, 그런데 시간이 있고 여유가 조금 생기니까 딴짓하는 것은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런 척하지 마십시오. 정말 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어떻게서든 다른 생각하고 죄 짓고, 그렇게 사는 것이 광야에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1-2. 현실적 판단의 함정
다윗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이 있습니다. 3절을 보니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다윗과 함께 한 400명 때는 원통한 자, 빚진 자, 또 억울한 일 당한 자, 뭐 이런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런 사람들 400명이 모였을 때, 그때하고 지금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400명에 200명이 더해져서 600명이 됐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니면서 저마다 가족을 꾸린 것입니다. 다윗도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가족이 생겼습니다. 결혼하면 자녀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600명만 끌고 다니는 리더가 아니라, 이들의 가족들의 안전까지 함께 고려하고 생각해야 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판단도 여기에 한몫을 한 것입니다.
3절,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하였더니." 아내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됐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4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함에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외면적으로 보면, 겉으로 보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않으니까, 이제 좀 한숨 돌리고, 이제 좀 평화가 왔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훗날 시간이 지나보면, 우리가 창세기 말씀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이집트에 내려갔는데, 기근이 해결됐습니다. 은금 패물 노예까지 다 얻어서 다시 돌아옵니다. 부자 되어서 돌아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가난해서 내려갔는데 부자 되어 올라왔습니다.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왔습니다. 롯의 믿음을 잃었고, 두 번째는 하갈이 거기서 함께 따라왔습니다. 해결된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실제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항상 거기에 꼬리가 따라 붙습니다. 문제가 그 안에 항상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동기와 과정이 다 선해야 됩니다. 그래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1-3. 시글락에서의 16개월
다윗은 아기스에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아기스에게 부탁합니다. 5절,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으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지방 성읍 가운데 한 성을 달라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입니다. 아기스와 함께 사는 것이요. 그리고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지금 다윗이 이 정도를 요구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된 것입니다.
아기스가 허락해 줍니다. 6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시글락은 가드에서 약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읍입니다.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읍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어서 거기 가서 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7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수는 일 년 넉 달이러라." 1년 4개월, 곧 16개월입니다. 16개월 동안 편안했습니다. 지금 광야에 쫓겨난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세월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16개월 동안 사울의 손에서 안전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다윗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가 그때 생각 잘했지, 내가 그때 결정 잘했지." 이런 마음이 들 것 아닙니까? 그런데 참 신비로운 것은, 다윗의 시편이 굉장히 많은데 16개월 동안에 지은 시편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다윗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영성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성, 시편 23편이 목가적인 시입니다. 그런데 그 시편이 다윗이 한창 치열하게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 34편도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그 놀라운 시편, 그 위대한 시편도 다윗이 한창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힘들 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그때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1년 4개월 동안, 16개월 동안 다윗은 지금 아비가일과 신혼 생활 신나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배부른 한량 생활을. 이럴 때는 그의 영성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고, 하나님과 교통이 없습니다. 지금 이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1-4. 아기스에게 바칠 전리품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란 게 원래 뒤통수가 좀 뜨끈뜨끈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다윗이 지금 가드 왕 아기스에게 일단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읍 또 하나 얻었습니다. 그런데 눈치가 좀 보이는 것입니다. 바깥 일 좀 해야 되겠다는 것이지요. 시글락이라는 성읍 또 얻어서 거기서 가족들과 함께, 600명 처자식과 함께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나를 사울의 손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사람이 내 주군인 가드 왕 아기스인데, 이 사람에게 바깥 일 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눈치도 좀 주었겠지요. 지금 여기서 위로 시키면서 "너희들은 뭐 하느냐" 이런 눈치가 좀 있었겠지요.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이제 일을 벌입니다. 8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시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즉 사막에 있는 여러 소수 민족들을 치는 것입니다. 전리품을 수거해 오는 것이지요. 9절,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니." 아기스에게 상납하는 것입니다. 전리품을요.
그런데 왜 사람은 왜 죽였을까요? 지금 이게 전면전, 전쟁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다윗과 함께 싸우는 게 아닙니다. 전리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약탈의 경제이니까요. 지금 이걸 빼앗아 와서 갖다 바치려고 빼앗는 건데, 사람은 왜 죽이는 것일까요? 평소의 다윗이 아닙니다. 지금 왜 죽이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10절,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아기스가 궁금하구요. "도대체 누구를 침노하고 이 전리품을 빼앗아서 왔느냐?" 다윗이 말합니다.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네겝'은 남쪽 마른 땅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중요한 게 '유다 네겝'입니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다윗이 아기스에게 잘 보이려고 유다 땅을 침노해서 빼앗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내가 침노해서 거기서 전리품을 갖고 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제가 지금 내 동족의 땅을 쳐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서 전리품을 빼앗아 왕에게 진상하오니 나를 믿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을 살려두면 들통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 맞습니까? 1년 4개월 동안 여기 있으면서 영성은 바닥을 치고, 거기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잘 보이려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윗이 여기서 노린 것은 일타이피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침노하고 그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말렉은 사실 이스라엘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인기 관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고 그 전리품들을 빼앗아 옴으로써, 가드 왕 아기스에게도 잘 보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인기 관리하고, 언젠가 내가 다시 이스라엘에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고 말겠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선한 일입니까, 악한 일입니까? 악하지요. 당연히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1-5. 정체가 탄로 나다
이제 이렇게 1년 4개월을 보낸 이후에 정체가 탄로 날 때가 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가드 왕 아기스도 무엇을 했습니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1절에 보면 생각을 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탄들도,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도 다 생각은 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사탄의 궤계와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고 이기고 나가려면, 우리가 그대로, 똑같이 생각만 해서는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사고를 해야 되는데, 그들보다 한 단계 더 높아지려면 그건 기도하고 말씀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생각해서는, 그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블레셋과의 전쟁
2-1. 다윗의 진퇴양난
가드 왕 아기스도 자기 나름의 계획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었느냐 하면, 결정적일 때 쓰자는 것이지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아기스가 다윗에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자 블레셋하고 이스라엘은 철천지원수 아닙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심심하면 싸우지 않습니까? 때로는 국지전, 때로는 전면전, 지금 전면전을 벌일 때가 온 것입니다. 전면전을 벌이면 블레셋은 5부족 연합체입니다. 각 부족마다 대장이 있는데 그걸 방백이라고 부릅니다. 그 5방백이 다 모여서 전쟁에 나가면 그건 전면전입니다. 지금 이렇게 전쟁할 때가 온 것이지요.
28장 1절,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때가 온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누구의 용병으로 뛰어야 됩니까? 아기스의 용병으로, 가드 왕 아기스의 용병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는데, 왕 될 사람이 자기 동족을 향하여 칼을 겨누게 됐습니다.
2절,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나의 군대 장관으로 삼겠다, 나와 함께 전쟁에 나가자. 나갔습니다. 끌려나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윗이 자기 병사 600명하고 나아갔습니다.
지금 거기서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싸우든지, 자기 동족을 향하여 칼질을 하고 사울의 목을 따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 돌이켜서 블레셋 사람과 결사 항전하다 죽든지,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2-2. 하나님의 개입
그런데 하나님이 위기에 빠진 다윗을 건져주십니다.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빠지지도 못하는 다윗을, 하나님이 일단은 건져놓고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다윗을 일단은 살려두고 보십니다.
보십시오. 3절,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아기스를 제외한 4명의 방백들이 있습니다. 5부족이니까 아기스를 제외하면 4명이 남지요. 4명의 방백들이 아기스를 보고 막 책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왜 데리고 왔느냐고, 다윗을 왜 데리고 왔느냐."
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누구에게 노한 것입니까? 아기스에게 노한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노라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요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안 된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아기스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스가 다윗에게 사과하고 "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고 보내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이건 누가 개입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개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4명의 블레셋 방백들의,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다윗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당신의 하나님의 생명 주머니 속에 지키고 보호하신다고. 하나님이 다윗을 그의 생명 주머니 속에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아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29장 7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하지 말라." 그다음 때를 도모하는 것이지요. 아기스는 다윗을 100퍼센트 신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단은 돌려보내고, 나중에 다시 방백들을 설득해서 다윗을 용병으로 쓰려고, 설득해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슴이 쓸려내려 가고,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구나, 나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아마 생각했겠지요.
2-3. 죄의 대가
그런데 우리가 이걸 잘 아셔야 됩니다. 지금 다윗이 이렇게 된 건 하나님이 그를 위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공식이 여기까지 있는데, 자기 죄로 인해서 잘못되면 하나님이 일단은 건져주십니다. 건져주시고, 그 다음 죄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됩니까? 자기가 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다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인한 흔적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흔적까지 깨끗하게 다 지워버려 주시면 인간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그다음 똑같은 죄를 또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똑같은 죄 짓지 말라고 죄의 흔적을 남겨두시고 책임지게 하십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일단은 건져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책임이 남아있습니다.
3. 시글락의 참변
3-1. 아말렉의 침공
그 책임을 볼까요? 시글락에 돌아온 다윗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기가 찬 것을 봅니다.
30장 1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아말렉 사람들이 이를 갈았습니다. 다윗이 심심하면 올라와서 약탈하고 사람 죽이고 물건 빼앗아 가고 하니까, 다윗과 그와 함께 한 600명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와서 불 사지르고, 그리고 다 빼앗아 간 것입니다. 납치해 갑니다.
2절,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이제 어떻게 될까요? 600명,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다윗의 아내와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 다 사라졌습니다. 이게 자기가 져야 할 책임입니다.
30장 5절,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세상에, 이 600명과 다윗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혈맹의 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일이 이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가족들 지키려고 온 것 아닙니까? 가족들 지키려고, 함께 한 가족들의 안위, 그리고 자녀들 지키려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도 지켰습니까?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기서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광야가, 광야가 위험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곳이 위험한 곳입니다. 광야가 위험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지금 이 자리가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물질이 있어서 본으로 고대광실 좋은 집 짓고, 안전한 요새 짓고 거기서 사는 것, 그래서 내가 평안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해야 평안하고, 하나님과 함께해야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자녀들 지키려고, 부인 지키려고 갔는데, 결국은 하나도 뭐 지켰습니까?
3-2. 분열된 군대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사실 다윗에게 이게 뼈아픈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했던 600명이 다윗을 돌로 치려 하니까요. 그러면 이 600명이 1년 4개월 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것 아닙니까?
서로가 서로가, 하나님 안에서 정말 없는 살림에 힘들고 어렵게 살 때는 다윗의 말 한마디에 그들이 위험한 일도 다 감수했습니다. 다 그들이 목숨을 거는 일도 다 목숨을 걸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일로 다윗을 돌로 치려 합니다. 분열되고 마음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이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제 이렇게 되니까 6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제 다급하니까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이제 본연의 다윗으로 돌아옵니다.
8절,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렇게, 이걸 안 한 것입니다. 1년 4개월 동안, 16개월 동안 여기 있으면서 이게 원래 다윗 아닙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다급하니까 하나님께 묻습니다. 시간이 많을 때는 기도 안 하고, 말씀 안 보고, 생각만 하다가, 스스로 자기에게 말하다가, 이제 다급하고 급하니까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잊어 가지고 말도 안 할 텐데,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당신에게 말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십니까? 다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쫓아 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에 머물게 하였으며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하였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자 600명의 군대가 사실은 다윗과 함께 한 최정예 부대 아닙니까? 얼마나 훈련하지 않았던지 200명은 시내도 못 건넌다는 것입니다. 강도 못 건넙니다. 200명이 피곤해서 자기 처자가 다 사로잡혀 갔는데도 숨이 턱에 차서 못 가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이 600명이 1년 4개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군대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하면서 계속 공부했듯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군대입니다. 군대는, 군인은 훈련받는 자입니다. 끊임없이 훈련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됩니다. 훈련받는 이유는 쓰임 받으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훈련받지 않으니까 전쟁터에서, 자기 처자가 사로잡혀 갔는데도 나머지 200명은 강도 못 건너갈 정도의 허약한 군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은 나뉘어지고, 군인 정신은 사라지고. 세상에, 다윗이 자기 군대를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고 살았습니다.
3-3. 회복과 화합
할 수 없이 다윗이 나머지 400명을 데리고 도착합니다. 18절,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을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며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400명이 지금 다 찾아서 옵니다. 가족들, 자녀들, 전리품 다 끌고. 그런데 200명은 강을 못 건넜습니다. 이 400명이 어떤 얘기를 하냐면, 200명에게는 자녀들만 돌려주고 가족만 줍시다, 이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서 강을 건너지 않았으니 그들이 전리품을 찾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철저하게 분열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이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십시오. 30장 23절,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으니 이 일에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지도자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래 너희들이 갔으니 주지 말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이 200명은 영원히 다윗의 적이 됩니다. 다윗이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건 우리가 잘해서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니, 우리의 능력과 우리 힘으로 다시 도로 찾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 나누어 돌려줍니다. 찢겨진 그들의 마음을 다윗이 하나로 엮습니다.
이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잃어버렸던 지도자의 위엄을 다시 회복합니다. 지도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찢는 사람이 아니고,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나누고 그들에게 상처 주는 자가 아니고, 네 편 내 편 하는 자가 아니고, 함께 하는 자가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다윗이 그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사울의 최후
4-1.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
한편, 이제 사울은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면전에 용병으로 갔다가, 하나님이 그를 건져서 쏙 빼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와보니 가족을 다 잃었습니다. 다시 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면전을 해야 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 전면전은 누가 전장에 나와서 싸워야 됩니까? 사울이 해야 됩니다. 사울이 지금 그럴 능력이 있을까요? 능력이 없습니다.
사울의 상황을 보십시오. 28장 4절,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여기 블레셋 사람들은 그냥 한 부족 두 부족이 아닙니다. 5부족 연합체가 다 모인 것입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의 특징이 두려움이라 그랬습니다. 또 지금 사울은 항상 그토록 좋아했던 용병을 이제 부리지 못합니다. 왜 돈이 없으니까요. 재정이 없습니다. 맨날 다윗 쫓아다닌다고 국고가 텅텅 비고, 재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용병들이 있겠습니까? 두려운 것이지요. 블레셋 5부족 연합체가 딱 쳐들어와 있는데, 그들과 맞서 싸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이 왜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니까 급기야 사울이 누구를 찾아갑니까? 무당을 찾아갑니다. 신접한 여인을요.
7절,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자 슬프지요. 왜 슬픕니까? 우리가 여기서 사울의 일을 살펴봐야 되는데, 사울이 다윗 일로 제사장만 85명을 죽였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을 비롯한, 다윗에게 진설병 줬다고, 골리앗의 칼을 줬다고 찾아가서 도엑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리고 나니까 사울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 전쟁을 위해서 하나님께 물어봐 달라고 부탁할 제사장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곁에는 간신만 남아있는 것이지요.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하니까 신하들이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됩니다" 이래야 참된 신하인데, 그럴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전부 다 옆에 간신들만 남아서, 그래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오라 그러니까 신하들이 당장 얘기합니다.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이게 비극입니다. 내 곁에 누가 있나를 잘 봐야 됩니다. 내 곁에 평소에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따라서 내 곁에 좋은 사람이 남아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사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그걸 보면 나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나와 함께 한 사람, 지금 사울은 기도해 줄 사람 없지요. 직언해 줄 사람 없지요. 이렇게 다윗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누가 곁에 남아서 직언하겠습니까? "무당 찾아오라" 그러면 당장 찾아서 갖다 주면 되는데,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4-2. 귀신의 장난
여인에게 가서 "나를 위하여 한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합니다. 11절, 28장 11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리이까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사무엘이 너무 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립니다.
그런데 이제 좀 이따가 제가 말씀드리겠지만, 이 사울이 본 게 진짜 사무엘인가, 이걸 우리가 심각하게 한번 고민해 보셔야 됩니다. 자 어쨌든 여인이 사무엘이라고 하는 영이 이렇게 말합니다.
28장 15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지금 여기서 보면 이 사울의 정신상태가 나옵니다.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나를 향하여", "나를",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나를." 전부 나만 얘기합니다. 지금 내가 급해서 지금 여기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은 이 나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삼키려고, 5부족 연합체가 전면전을 벌이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다급합니다", "내가 내가 죽을까 봐."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의 아주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끝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16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이것만 보면 진짜 사무엘 같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건 사무엘이 아닙니다. 귀신입니다.
왜 그런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셔야 되는데, 전도서 3장,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요 이렇게 나옵니다. 전도서 3장 21절,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생들, 사람의 혼이 위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 위가 어디냐,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끝나면 어디에 선다고요? 인생이 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자 공부 열심히 한 학생은 시험이 기다려질까요, 피하고 싶을까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그냥 상상을 한번 해보십시오. 완벽하게 내가 공부 열심히 하고 완벽하게 모든 걸 다 준비했다고 하면 시험이 기다려질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시험 쳐서 100점 맞아서 엄마한테 가서 보여주고 상 받아야 되니까요. 시험고사 끝났다고 빨리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도 공부 안 하고 팽팽 노는 친구는 시험이 끔찍한 것이지요.
우리 인생도 평생 동안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섬기면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너 참 잘했다" 빨리 이 말 듣고 싶으니까, 이 땅이 너무 힘드니까, 바로 사는 게 고되고 힘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너는 참 잘했다" 빨리 캐스팅 받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잘하고, 맨날 죄 짓고 살고, 맨날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두렵지요.
그러면 지옥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생하느냐 지옥에서 영생하느냐, 어쨌든 이 땅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천국에서 영생하든 지옥에서 영생하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무당 따위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존재를 불러 올리지 못합니다. 어디 감히 무당 따위가, 신접한 여인 따위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자를 감히 불러올린단 말입니까?
그러면 지금 여기 말하고 있는 이 자는 누구입니까? 사무엘처럼 행동하는 귀신이지요. 사탄이지요. 사탄이지요. 세상의 권세 잡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알았습니다. 멀리서부터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알고 쫓아서 예수님께 엎드려서 끌어안고 절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서 여기 계시지 말고 저와 상관없는 자인데 왜 여기 오셔서 저를 괴롭게 합니까?" 막 그랬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잘 압니다. 귀신도 사무엘을 알고, 귀신도 사울의 미래를 알고, 사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 압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까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약에 사울이 그 다음에 전쟁하다 죽어서, 그렇지 않고 죽었다면, 좀 더 살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은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우림으로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한번 이렇게 와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에게 와서 사무엘처럼 보이는 귀신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오지 않을까요? 답답하니 이러면 당연히 오겠지요. 최고의 고객이 되었겠지요. VIP가 되었겠지요. 여기 시마다 때마다 와가지고 돈 갖다주고 "나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사무엘 불러 올리라" 그래가지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귀신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점 보러 가고, 그래서 점술에 빠지는 것입니다. 장군이 신 모시고 있다는 얘기, 무당에게 가고,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약하고, 권사님들도 가시고, 장로님도 가시고, 목사님들도 가시고, 세상에 기가 차서. 교회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게 해서 사울은 이제는 진짜 갈 때까지 가버렸습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습니다. 이제는 타락의 끝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이제는 우리가 성경은 우리에게 분별하도록 합니다. 이건 사무엘이 아닙니다. 절대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천국에서 영거하시고 계신데, 무당 따위가 어떻게 사무엘을 불러올린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데요. 우리가 이걸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귀신은 없다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이,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 나한테 보인다, 이건 사탄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장난 아닙니까? 뭐 그런다고 어디 점술에 가지고 "조상님이 보이는데 이것은 길몽입니까 흉몽입니까" 이따위 소리 하고. 저한테도 묻는 사람 제가 봤습니다. 예. 자, 그러면 안 됩니다.
4-3. 사울의 죽음
자 이제 전쟁이 어떻게 됐을까요? 31장 1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왕이 이 꼴인데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당연히 전쟁에 지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요나단이 여기서 죽구요.
추격하여 사울은 어떻게 됐습니까? 3절, "사울이 패전함에 활 쏘는 자가 따라 잡으매 사울이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래서 그가 자기 무기 들고 다니는 자에게 얘기합니다. "나를 찔러라,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 죽는 건 원치 않는다"고. 그런데 무기 든 자가 왕을 어떻게 함부로 찌릅니까? 그래서 사울이 자기가 위에 자기가 엎드러져 죽습니다.
4절,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짐에." 6절,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이것이 사울의 객관적인 죽음의 팩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입니다.
4-4. 하나님의 평가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역대상 10장 13절과 14절을 함께 읽어야 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자, 뭐 때문에 죽었다고요?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블레셋 때문이라가 아니구요.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범죄 내용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그를 죽이신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을 지키지 않고, 둘째,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셋째,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이 세 가지 이유입니다.
저는 이걸 사울의 묘비명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묘비에 하나님이 직접 쓰신 사울의 묘비명입니다. 그가 왕이었으니까요, 묘비명은 얼마든지 멋지게 쓸 수 있지요. 사람들은 "사울 여기에 잠들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이러이러하며, 공의로 공정하게" 꼭 멋지게, 추도사도 쓰고, 조사도 쓰고 다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지키지 않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우리의 묘비명을 하나님이 쓰신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 것 같습니까? 내 인생을, 내 후손이 평가하면 좋은 걸만 쓰겠지요. 좋은 것으로만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 삶을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이 내 삶의 마지막에 "너의 인생 내가 딱 세 줄로 요약해 볼까?" 1번, 2번, 3번 하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그거 생각하면 우리는 두려워해야 됩니다. 그냥 함부로 막 살 순 없습니다. 매일같이 회개해야 되고,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에 나를 비춰봐야 되고,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 따라 믿음 생활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일평생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객관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가 왜 죽었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록해 둔 것입니다.
4-5. 길르앗 야베스의 의리
블레셋 사람들, 8절 보십시오.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려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 박음에." 시체까지 능욕당합니다. 죽어서까지요.
그런데 11절 보십시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벳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화장했습니다—"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의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사울이 왕이 되고 나서 첫 번째 전투에서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길르앗 야베스에 암몬 사람 나하스가 쳐들어 온 것 기억나십니까? 암몬 사람 나하스가 쳐들어왔는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힘이 없으니까 화친하자 그랬습니다. 그때 암몬 사람 나하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주면 너희와 화친할 생각이 있다." 화친할 생각이 없는 것이지요. 모욕하는 것이지요. 그때 왕이 된 이후의 첫 번째 사역으로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암몬 사람을 혼내줍니다. 다 쫓아내고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 대한 고마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고마움을 의리로 이렇게 갖고 지켜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사울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다윗도 이렇게 해서 광야 생활을 마감합니다.
결론
결과적으로 보면, 사울은 다윗이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손으로 죽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기 발로 죽음의 길로 기어 들어가 버렸습니다. 오늘 이 내용 잘 살펴보시고, 이제 다음 주부터는 열한 번째 시간인데 사무엘하를 시작합니다. 다윗이 본격적으로 왕업을 쌓아가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광야 생활을 보았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성공도 하고 승리도 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체험도 했지만,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는 말씀과 기도로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말씀 보며,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사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마지막 비참함을 기억하게 하옵시고,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도록 주여 우리를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워 복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