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 유다 지파의 왕 / 전체녹취

사무엘상하 특강 11 - 유다 지파의 왕 (삼하 1-4장)

오늘은 사무엘상하 공부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사무엘상하로 나뉘는데, 사무엘상을 지난 시간까지 열 번에 걸쳐 공부했고, 오늘부터 사무엘하를 일곱 번에 걸쳐 공부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하는 총 열일곱 번 공부하면 끝이 납니다. 사무엘상을 열 번 공부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갔습니다. 사무엘상에는 사무엘이 나왔고, 그다음에 사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나왔습니다.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들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는데, 사무엘상에서는 광야에서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 광야 시간이 다윗에게는 아주 일생의 빛나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러면 너도 광야를 한번 살아봐라 하면 사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광야는 힘들고 어렵고 피곤하고 여러 가지 갈등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부터는 광야 생활이 청산됩니다. 그런데 더 복잡해집니다. 힘겨워지고, 오히려 광야 때가 훨씬 더 나았구나, 그때가 행복이었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한 것도 많고 어려운 것도 많고 신경 써야 될 것도 많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이 기름부음을 두 번 받습니다. 첫 번째는 유다 지파의 왕으로, 한 번은 5장 공부할 때 나오는데 그때 한 번 기름부음 받고, 두 번째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원했던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정점에서, 사람들이 볼 때 최고의 자리에서 죄를 짓습니다. 밧세바와의 문제입니다. 그 죄 짓고 나서 그때부터는 다윗이 몰락하는 과정입니다. 아주 위대한 다윗인데 밧세바 사건 이후로부터 하나님이 죄는 용서하셨지만, 당시 회개했으니까, 죄를 지은 이후에 죄의 책임은 지우시게 물어 가는 과정이 사무엘하 마지막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우리 가슴이 뛰고 굉장히 설레는 내용이라면, 사무엘하는 슬프고 또 비통하고, 우리 영웅 다윗이 이렇게 무너지고 흘러가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감동도 받았지만, 완벽한 사람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를 통해서 반면교사도 함께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전한 아말렉 사람

오늘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는 다윗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다윗을 찾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린 아말렉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지난 시간에 사울이 죽었습니다.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전투하다가 사울이 죽고 사울의 아들들도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반면 다윗은 어떻게 됐습니까? 가드 왕 아기스의 군대 장관으로 전면전 전쟁에 나갔지만, 하나님이 그를 쏙 빼서 건져주셨습니다. 곤란하지 않게, 거기서 진짜 어려운 일 겪지 않도록 건져주셨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까 자기 가족들이 다 아말렉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겨우 가서 가족들 다 구출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숨을 돌리고 자기 성읍 시글락에 돌아와서 보니 이 전쟁이 어떻게 됐는지를 모릅니다. 지금처럼 소셜미디어가 있는 시대도 아니고, 종군기자들이 다니면서 사진 찍고 보도하는 시절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전갈을 기다려야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전쟁의 상황이 굉장히 궁금한 것입니다.

1-1. 기회주의자의 거짓말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전쟁 상황을 다윗에게 알려주러 왔습니다. 사무엘하 1장 1절을 보시면 "사울이 죽은 후에"라고 했는데, 사울이 죽은 걸 지금 다윗은 모릅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이틀이 지나도록 전쟁의 상황을 모릅니다. 그런데 2절에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와서 다윗에게 이 상황을 알려주러 온 것입니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무엇을 알려주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여기까지는 사실입니다. 사울도 죽었고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이건 팩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분명 속셈이 있었습니다.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네 명의 기회주의자를 볼 것인데, 이 기회주의자들은 그 말로가 굉장히 비참합니다. 지금 여기까지만 말했어야 되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게 문제입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지금 이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사울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사울이 자기에게 그런 말을 했답니다. 거짓말입니다. 10절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심지어 증거물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울의 왕관과 사울의 팔찌, 그걸 다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울의 목숨을 끊었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아말렉 사람인 이 사람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사람은 아말렉 사람인데 이 아말렉 사람조차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대세의 흐름이 사울이 죽었으니까 당연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서 지금 이 소식을 내가 가서 전하고, 내가 사울을 죽였습니다, 내가 사울을 죽이고 그 전리품을 당신에게 가져왔습니다, 나에게 상 주시고 나를 칭찬해 주십시오 하고 지금 가지고 온 것입니다.

1-2.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그때 다윗은 이 사람을 어떻게 했을까요? 철저하게 기회주의자고 거짓말한 것 아닙니까? 13절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14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절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함에 그가 치매 곧 죽은지라" 어이없이 죽어 버렸습니다.

자, 이 사람은 왜 죽었습니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여서요?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은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을 안 댔습니다. 그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이고 내가 그 왕 자리에 올라가면 그건 나 스스로 왕이 되는 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걸 다윗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지금 다윗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생명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왕을 죽였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였다, 그래서 다윗은 이 청년을 죽인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그 생명을 존중한다는 건 곧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걸 하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조가

그런데 어쨌든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조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17절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활 노래, 활은 용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무기입니다. 즉 용사를 위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활 노래가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살의 책은 의인들의 책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재는 이 책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조가를 지어 불렀는데, 이 원문 전체가 야살의 책, 의인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었고, 이건 곧 용사들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그 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1. 사울을 위한 노래

그중에 한 부분입니다. 23절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그다음 잘 보십시오. 24절 "이스라엘 딸들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왜 슬퍼하며 울라고 했을까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울 덕분에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적도 있고 금 노리개를 가졌던 적도 있지 않느냐, 그의 공과 과가 있는데 그의 공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 덕분에 너희가 한때 행복하게 지냈던 적이 있었지 않느냐, 그래서 슬피 울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다윗의 굉장히 넓고 큰 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다윗은 사울이 상가치러 가면 좋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사람이 살아 있어서 너무 힘든 것입니다. 십수 년을 지금 쫓겨 다녔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이 힘들었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뛰어 춤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하며 춤추며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죽음인데, 그래서 다윗은 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태도입니다.

가끔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엉뚱한 데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1년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이 방사능이 유출됐습니다. 진도 9.2였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런 지진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일부 목사님들과 일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심판하셨다고, 하나님이 저 우상의 나라 일본을 심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이야기입니다.

사실 일본과 우리가 감정은 안 좋습니다. 과거사도 있고 불편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나라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지 우린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저 그 지진으로 인해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죄 없이 죽어간 어린아이들부터 임산부까지, 방사능 유출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주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주고, 도와줄 건 도와주고, 그다음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감정 그걸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여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다고 하니, 그래서 요즘 기독교가 배타적인 기독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얘기입니다. 그런 생각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함부로 어떻게 재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자기 평생에 철천지 원수 사울, 그가 죽었는데 그의 업적을 노래하라 했습니다.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이걸 보면 다윗이 진짜 왕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다윗의 포용의 왕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습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서 원통한 자, 빚진 자, 불평 많은 자, 이런 사람들을 다 모아가지고 400명, 그 사람들 사연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람들 형편과 처지 다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 400명이 나중에 600명이 됐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다 모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너는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너는 이렇게 힘들었구나' 그러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사정이 있고 사연이 있다는 걸 다윗은 이해하게 됩니다.

꼭 왕은 무엇입니까? 왕은 어떤 자리입니까? 편 가르는 사람이 왕이 아닙니다. 내 편만 내 백성이고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과, 혹은 사울을 따르고 있는 백성들까지도 다 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을 위해서 조가를 지어 부르면 이건 다윗의 인품이 더 높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편 가르기 하고 쳐내기 시작하면 그만큼 자기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걸 다윗은 광야에서 배운 것입니다. 고생하면서 아둘람 굴에서 훈련받으면서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하고 잘 안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저 사람하고 나는 맞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람 있습니다. 제발 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함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장점은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지금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 덕분에 너희가 좋은 옷도 입고 금 노리개로 치장도 했지 않느냐고, 그걸 찬양하고 그걸 기뻐하라고, 그렇게 해서 슬퍼해주라고 얘기합니다.

2-2. 요나단을 위한 노래

그다음 요나단을 위한 노래입니다. 26절 "내 형 요나단이여" 요나단을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운 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사실 여담이긴 한데, 다윗이 지금 요나단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심히 아름답다,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다. 성경을 동성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구절을 가지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해석합니다. 참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음흉하게 보는 것입니다. 눈에 그것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걸 세상의 관점으로, 세속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런 것밖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레위기 율법에 동성애를 금지하셨습니다. 그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끊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셨겠습니까? 이건 다윗이 그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 숭고하고 더 아름다웠다는 걸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성경 해석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관점으로 전체적인 걸 같이 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을 이렇게 조가를 지어서 부르는 건 당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은혜를 입은 분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이렇게 조가를 지어 부르는 건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3.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의 행보를 말해 보십시오. 2장 1절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그 후가 언제입니까? 사울이 죽은 후입니다. 조가를 지어 부른 후입니다.

자,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각자가 다윗이라면, 사울이 죽었습니다.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왕이 될 만한 아들들은 다 죽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도 다 알고, 심지어 아말렉 사람조차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다음 이어서 왕이 될 걸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직접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겠습니다. 600명 그들을 쭉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가서 접수하겠습니다. 만약에 잔당들이 조금 저항을 하면 다 쳐내고 그리고 왕궁을 접수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죽었습니다. 조가를 지어서 위로했습니다. 그다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서 배웠을까요?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이게 원래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다가 가드의 아기스에게 갔었습니다. 기도 안 하고, 기도 안 하고 생각하고, 그 나라 그 지경에서 1년 4개월, 16개월을 보냈다가 나중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겨우 자녀들 부인 다 찾아서 데리고 왔지 않습니까? 그 후에는 이제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해야 되겠구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3-1. 헤브론으로 가라

어떻게 할까요? "이르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이르되 어디로 가리이까" 아마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이제 내가 너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맡길 테니까 그 중심으로 올라가라' 이걸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헤브론이 어디입니까? 유다 지파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열두 지파가 땅을 다 차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디로 갈까요 하니까 유다 지파의 수도인 헤브론으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즉 이 말은 너는 아직까지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릴 만한 왕이 될 때가 아니다, 그러니 다윗이 유다 지파 아닙니까, 너의 출신 지파 유다 지파의 왕으로부터 시작해라, 단계를 좀 밟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기가 막히겠습니다. '아, 하나님 왜 이러세요? 제가 훈련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지금 사실 저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제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왜 저를 막아 세우십니까?' 이렇게 불평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새" "또 자기와 함께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이제 유다 지파의 중심 헤브론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3-2. 때를 기다리는 다윗

그랬더니 유다 지파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4절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걸 다윗은 사실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자기 집에 와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그건 한 지파의 왕이 아닙니다. 전체 이스라엘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부하지 않습니다.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아마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내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헤브론으로 올라가라 하셨고 거기에 유다 지파의 장로들이 와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으니까, 나는 12지파 전체 가운데 12분의 1 유다 지파의 왕으로만 이제는 끝나는 것인가, 사울도 죽었는데 여기서 나의 커리어는 단절되고 끝나는 것인가' 하나님이 그다음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불안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기대감도 있었겠습니다. 기대감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갈피를 못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자리에서 의연하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야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다윗을 이렇게도 굴리고 저렇게도 굴리고 이렇게 저렇게 훈련시켰습니다.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를 분별하는 것, 천기를 분별하는 것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날이 궂으면 비가 오겠구나, 무릎이 좀 쑤시면 비가 오겠구나, 뭐 이렇게 천기는 분별할 수 있는데 자기 인생의 때를 분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동생들도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7장 2절, 3절, 6절을 읽겠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일러 이르되" 예수님 동생들입니다.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여기 당신의 행하는 일이 뭐냐면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정말 센세이션한 사건입니다. 위대한 사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5,000명,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야 기 했으면 몇만 명을 먹인 사건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시골 갈릴리에 머물러 있으니까 동생들이 말합니다. 이 초막절 잔치에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이니까, '형님 예루살렘에 좀 올라가셔서 뭔가를 좀 나타내십시오, 좀 지금이 때입니다, 지금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세요 그랬으니까, 지금입니다, 제발 정 가서 당신이 유명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초막절에 올라가서 당신을 나타내십시오' 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7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의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은 초막절 어린양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셔야 됩니다. 아직까지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건 무엇입니까? 너희는 때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항상 욕심을 따라 사니까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욕심을 따라서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면 이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내가 해야 될 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면 시야가 흐려서 분별을 못합니다. 그런데 욕심을 걷으면 하나님의 때가 보입니다. 지금 동생들은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서 유명하게 되면 자기들도 덩달아서 유명해지려고 그래서 예수님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기 욕심을 주장했더라면 쳐들어갔을 것입니다.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기 욕심을 따랐더라면 유다 지파의 왕으로 만족했겠습니까? 당장 자기 발로 차 버리고 그냥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이었을까요? 그다음 시간에 나오는데요, 장장 7년 6개월입니다. 7년이 견디기 쉬운 거 아닙니다. 절대요. 6개월도 아니고요. 7년 6개월입니다. 7년 반을 기다렸습니다. 거기서 유다 지파에 왕으로, 한 지파요.

3-3. 길르앗 야베스를 격려하다

그러면서 다윗은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5절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절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그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약속까지 했습니다. 선을 베풀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는 유다 지파 지경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은 한 지파의 왕이지만 마치 전체 통일 이스라엘의 왕처럼 이미 그는 행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대로 이 자리에서 그냥 통일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워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4. 아브넬과 요압의 대결

반면 사울이 죽었으니까 누군가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지 않으면 누군가는 왕이 돼야 할 것 아닙니까? 사무엘하 2장 8절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군인들이 판을 치게 돼 있습니다. 그건 어느 나라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11지파 연합체도 사울이 죽고 나서 사울의 아들 아무 힘도 없는 아들 이스보셋을 세웠습니다. 뭔가 좀 똑똑하고 할만한 아들은 전쟁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전쟁에 나가지도 못할 만큼 약하거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사울의 그다음 후왕으로 허수아비 왕으로 아브넬이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11지파 연합체의 실권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이스보셋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아브넬이 가지고 있습니다. 군대 장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지난 시간에 살펴봤는데 사울과 함께 다윗 쫓아다니다가 방어막이 뚫린 사람 아닙니까? 사울의 군대 장관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실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쪽의 11지파 연합체 실권은 아브넬이 가지고 있었고, 유다 지파 다윗에게 군대 장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이 요압입니다. 요압 이름을 잘 보셨습니다. 지금부터 요압의 이름을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북쪽의 11지파 연합체의 실권은 아브넬, 그리고 남쪽의 유다 지파의 군대 장관은 요압입니다.

4-1. 자존심 대결의 비극

그런데 둘 다 장군입니다. 두 사람 다 자존심이 굉장한 사람입니다. 캐릭터를 좀 얘기하면 아브넬은 좀 더 교활한 캐릭터인 반면에 무공도 좀 있고, 요압은 무식합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자기 감정 절제를 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공적인 일보다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을 자주 그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넬과 요압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자존심 대결을 합니다. 보십시오. 12절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 저는 못 저쪽이라" 못을 가운데로 두고 아브넬과 요압이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습니다. '우리 각각 12명씩 뽑아서 결투를 하자, 한번 힘을 겨뤄 보자' 장난처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입니다. 이 두 사람이 전면전을 원치 않습니다. 사실은 왜냐하면 다윗이 전면전을 원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아브넬도 다윗과 전면전 했다가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전면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장군이 붙어서 서로 자존심 대결을 합니다. 각각 12명의 전사들을 내어서 장난처럼 자존심 대결을 했는데, 그게 나중에 싸움이 맹렬해집니다. 다 죽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가 됩니다.

보십시오.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편에 12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12명이라" 17절 "그 날의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자존심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슬금슬금 일어난다, 그럼 이게 좋은 징조입니까? 나쁜 징조입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군가 내 자존심을 자꾸 흔든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자존심을 확 한 번 드러내야 됩니까? 그렇게 한번 하고 나면 잠시 후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후회'합니다. '가지 말걸, 그냥 피할 걸, 그냥 한번 접고 말 걸' 그런 마음이 듭니다. 자존심을 앞세워서 '아, 그때 참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사탄이 틈타는 것입니다.

4-2. 사탄의 시험을 피하라

사탄은 예수님의 자존심도 흔들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사탄이 예수님의 자존심도 흔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 그리고 6절 보십시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못 믿겠어, 네가 만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자존심이 확 긁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말입니다. "또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똑같이 얘기합니다.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사 시린이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거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논리대로 하면 돌을 떡으로 만들지 못하면 나는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 말에 올무에 걸릴 수 있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걸고 넘어지는 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부부끼리의 자존심 다툼, 부모 자식 사이에 자존심 다툼, 친구끼리 성도들끼리 구역 식구들끼리 목회자들끼리, 큰 싸움은 이런 자존심 다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아브넬과 요압의 자존심 다툼이 맹렬해져서 청년들이 다 죽어 나갑니다.

4-3. 요압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요압에게는 동생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막내동생이 아주 발이 빠른 동생입니다. 막내동생이 공을 세우려고 말을 달려가지고 아브넬을 뒤쫓아갑니다. 요압의 동생이 아브넬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전장에서 아주 노련한 장수 아닙니까? '나 따라오지 마라, 내가 너를 찌르고 죽이면 너 형 얼굴을 내가 어떻게 보냐, 그래서 전면전이 일어날까 두려우니까 따라오지 말라' 그런데 막내가 계속 쫓아갑니다.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안 죽으려고 찔러 죽입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요압의 막내동생이 죽습니다. 자존심 대결로 시작했다가 서로 그 자존심 싸움 세우려고 시작했다가 청년들이 죽어 나가고 요압의 동생이 죽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8절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로의 같이 빠르더라" 19절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다시 22절입니다. "아브넬이 길을 돌이키라 네 갈 길로 가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까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른이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자, 자존심 세워가지고 남는 게 뭐가 있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사탄이 예수님의 자존심을 이렇게 흔드는데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인용해서 그냥 말씀하고 마셨습니다. 직접 대응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탄은 그런 식으로 우릴 시험합니다. 그래서 사람 성질도 꾸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판을 뒤집었고, 문제를 생기게 만들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일이 있으면 피하고 봐야 됩니다. 절대로 대응하지 말고, 그게 곧 이기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자 이제요, 요압은 28절 보십시오.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서 곧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요압이 일단은 멈춰 섰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죽었습니다. 원한을 마음에 다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갚습니다. 조금 있다가 보겠습니다.

5. 기회주의자들의 최후

자 3장 1절 보십시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당연합니다. 서서히 서서히 하나님께서 정말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서서히 백성들의 마음이 자꾸만 자꾸만 다윗에게로 다윗에게로 돌아오게끔 돌아오게끔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쳐들어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강하게 하셔서 다윗을 자꾸만 진짜 왕이 되게끔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기간 7년 6개월을 유다 지파에 왕으로 버티고 견디고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5-1. 아브넬의 배신

자, 그런데 이제 11지파 연합체, 북쪽 이스라엘에게서 사단이 납니다. 자 보십시오. 3장 6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이스보셋은 허수아비 왕이었으니까 당연히 아브넬이 군사력을 갖고 있는 아브넬이 권세를 잡겠습니다.

그런데 선을 넘었습니다. 어떤 짓을 합니까?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죽은 사울에게 첩이 있었는데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 처첩, 죽은 왕 사울의 처첩, 아브넬이 동침을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이스보셋이 자기가 아무리 허수아비 왕이라 하더라도 이건 참을 수 없어서 따집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나를 무시하느냐' 그랬더니 오히려 오히려 아브넬이 야단입니다.

8절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허물이 없다, 이걸 명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넬이 무엇을 결심했을까요? 이제 열한 지파를 다윗의 손에 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전령을 보내서 내가 허수아비 왕 이스보셋 그냥 짓밟아 버리고 당신에게 11지파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윗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말 지금까지 살아온, 명분을 중요시하는 다윗이라면 그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받아야 됩니까? 받으면 안 됩니까? 저 같으면 받을 건데, 받으면 안 됩니다. 왜 받으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해서 그 나라를 받으면 이 나라의 다윗을 왕으로 세운 일등공신은 누가 됩니까? 아브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다윗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어서,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지금 7년 6개월 동안 계속 여기서 훈련시켜 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데, 여기 지금 사탄이 시험을 해서 아브넬이 살짝 끼어든 것입니다. 그럼 다윗은 이걸 받으면 안 되고 거절해야 됩니다. 정당한 전쟁을 하든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아브넬을 치실 때를 기다리든지 해야 됩니다.

5-2. 다윗의 실수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덥석 물어 버립니다. 13절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래야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의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 내용 가운데 아브넬의 안전을 보장하고 아브넬을 군대 장관으로 기용한다 뭐 등등이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조약의 첫 번째 내용으로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했습니다. 미갈하고 헤어진 사이입니다. 그런데 미갈을 왜 데려오라 했을까요? 미갈을 다윗이 어떻게 해서 얻었습니까? 블레셋 사람의 백 명을 죽이고 얻었습니다. 자기 소유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광야를 전전하는 동안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미갈을 다시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당신이 사울 왕가의 정통성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울의 사위였다, 그걸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다윗도 지금 정치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 아브넬과 조약을 맺는데 미갈을 데리고 와서 나는 사울의 사위였다, 그래서 내가 11지파 연합체 왕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갈이 그립기도 했겠습니다.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왜 잘못한 것이냐 하면 다윗은 왕이 될 사람 아닙니까? 왕이 되고 나면 자녀들이 많고 부인이 많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미 부인이 둘입니다. 부인 둘의 이름을 성경이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미갈까지 들어옵니다. 나중에 밧세바까지 들어옵니다. 왕자들이 전쟁하고 나중에 난립합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런 원인 제공을 다윗이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섭리로 한 가정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라 하셨습니다. 그 섭리대로 살아야 되지, 하나님의 섭리를 어기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는 지금 다윗이 여기서 판단을 잘못하고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빠져 있는 게 있습니다. 아브넬이 전갈을 보냈을 때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다윗이 항상 했던 것, 하나님께 여쭈는 것, 기도하는 것, 안 했습니다. 안 하고 그거 덥석 물어 버렸습니다. 이건 참 문제가 생깁니다.

5-3. 아브넬의 죽음

자, 아브넬은 사후 정리를 합니다. 17절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왕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해두고 자기가 가는 것입니다.

조약을 맺으러 말입니다. 20절 "아브넬이 부하 20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베설하였더라" 21절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이렇게 되면 다윗을 왕 세운 분은 하나님입니까? 아브넬입니까? 아브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니까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막으시는데 기가 막힌 방법으로 막으십니다. 요압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막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자기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복수심에 불타서 일을 벌이는데 어쨌든 그건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24절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브넬이 자기 동생을 죽인 원수 아닙니까? 왕도 그걸 알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아브넬이 여기 왔는데 그냥 보내십니까? 이거 보면 요압은 참 단순하고 무식합니다. 지금 다윗이 정치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요압은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 사사로운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신기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요압이 사고를 칩니다. 26절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더라" 왕이 다시 너를 부른다 했겠습니다.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7절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라"

요압이 이러합니다. 요압은 이렇게 때를 기다리다가 자기 원수를 갚아 버렸습니다. 자기가 모시는 주 다윗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금 어떤 큰 그림을 그리는지 그런 거 관심일 자로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아주 단순하고 무식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아브넬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회개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다윗이 알 리가 있습니까? 가만히 떨어져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돌이켜보고 묵상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향한 그 깊고 놀라운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냥 억울한 것입니다. 그냥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다고 그냥 억울한 것입니다. 미칠 것 같은 것입니다. 자기 잘못은 모르고 다 자신이 거기서 한 단계 딱 미끄러져 나간 것은 모르고 요압이 밉고 죽겠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32절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진짜 아브넬의 죽음이 슬퍼서 울었을까요? '아, 내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어' 그랬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38절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절 "내가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보십시오. 아직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요압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없음과 나약함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한순간도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루의 시간을 정하셔야 됩니다. 새벽기도를 하시든 밤 기도를 하시든, 하루 중에 아주 중요한 시간, 가장 하나님과 은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떼어서 나를 돌아보셔야 됩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한순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지금 다윗이 아브넬의 청을 덥석 물어 버리는 건 한순간 아닙니까? 이렇게 돼서 아브넬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최고 권력자가 돼 버리면 다윗이 진짜 왕다운 왕이 될 수 있습니까? 제대로 된 정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넬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를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를 원하시는데, 왜 자꾸 사람을 통해서 하려고 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에게도 주는 교훈이 굉장합니다.

5-4. 이스보셋의 죽음

이제 오늘 기회주의자를 본다 그랬습니다. 첫 번째 아말렉 사람, 사울을 자기가 죽였다고 와서 기회주의자로 다윗에게 새 출발 하려다가 죽었습니다. 두 번째 아브넬도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기회를 엿보다가 다윗에게 갈아타는 기회주의자,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요압에게 말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또 기회주의자들이 나옵니다.

자 이제 아브넬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저 북쪽에 이스보셋을 누가 돌봐 줍니까? 이제 그 끈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4장 2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 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부터가 불길합니다.

이 두 인간이 어떤 짓을 하느냐, 5절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쯤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이스보셋의 집에 오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6절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8절 보십시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서 온 것입니다. 목을 베어서 말입니다. 아브넬 죽은 거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허수아비 왕 빨리 죽여서 우리가 다윗에게 가서 공을 자처하자, 그리고 목을 베어서 온 것입니다. 그럼 다윗이 좋아할 줄 알고 말입니다. "왕의 생명을 찾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대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을 잘 팔아먹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얘기합니까? 11절 보십시오.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를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절 "다윗이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이 기회주의자 두 사람도 역시 목숨을 잃습니다.

나가는 말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의 병환, 누군가의 죽음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야, 누구 집에 큰일이 일어났대, 주일날 빼먹고 어디 놀러 가더니 그래서 난 거야' 이런 얘기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른 나라의 병환도, 누군가의 죽음도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과 과를 따라 잘한 일은 칭찬하고, 그리고 슬퍼하고 같이 통곡하고 애도하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인생을 사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울을 피해 다녔던 십수 년의 세월이 끝났으나, 그러나 여전히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를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7년 6개월의 시간을 그는 견디고 또 견뎠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너무 지나쳐 한순간 사탄의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건지시고, 아브넬을 통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원치 않으시고, 사람을 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능력을 보았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매일같이 경건 생활하고 매순간 하나님 앞에 살아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미끄러지지 않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매순간 돌아보지 않으면, 매일 경건 생활을 하고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지 않으면, 한순간 넘어져서 쓰러져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사오니, 주여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주여, 사탄은 항상 우리의 자존심을 걸고 넘어집니다. 피하게 하여 주옵소서.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에게 자존심을 문제 삼은 사탄, 그러나 주님은 피하시고 말씀으로 대하셨던 우리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두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