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왕국의 확장 / 전체녹취

사무엘상하 특강 13 - 왕국의 확장 (삼하 7-10장)

사무엘하 9장 1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아멘.

오늘은 사무엘상하 말씀 공부 열세 번째 시간입니다. '왕국의 확장'이라는 주제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7장부터 10장까지입니다.

다윗이 광야 시절을 끝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다스리고, 그리고 나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실 광야 시절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도 있었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는 참 죽을 것 같았는데 돌아보면 은혜의 시간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현실 정치 가운데 실제로 정치를 해야 하니 힘들지 않겠습니까? 사실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괜찮은데, 관계 문제 때문에 힘든 것은 우리를 굉장히 뼈 마르게 하고 피 마르게 하는 고통입니다. 다윗도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쨌든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이후에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400년 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여부스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자기의 성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자기 실력을 여러 형태로 보여줍니다. 나중에 다윗 마음속에 교만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다가 왕권 강화에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이용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벧스 웃사 사건을 통해서 웃사가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자기 뜻대로 모셔 오지 못합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이 그 집에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내려가서 다시 언약궤를 메어서 올려옵니다. 기쁨 가운데 춤추는데, 단 한 사람 미갈이 창밖으로 바라보다가 다윗을 비난합니다. 심중에 업신여깁니다. 자신은 열심히 참여하지 않으면서 평가만 하는 자 미갈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사건까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1. 성전건축과 다윗 언약

이제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외면적인 모습과 내적인 것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오늘 주제가 '성전건축을 계획하다'인데, '성전건축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만 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본질과 내용을 살펴봐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 다윗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사무엘하 7장 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실 때에"라고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광야 시절 끝났고,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찔렀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다윗성에 들어와 있고, 블레셋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는 왕은 편안하게 삽니다.

사람이란 참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평안하기 전에는 괴롭고 힘들 때는 "하나님, 저에게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잘 섬기고 봉사하고 하나님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다가, 막상 그런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다음 딴 생각을 합니다. 딴짓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평안해졌을 때 진짜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한 사람입니다.

2절을 보니까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행복하게 좋은 집, 왕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 하나님의 언약궤는 아직까지 천막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성막 시절이니까 건물로 된 성전이 만들어지기 전이니까, 그게 굉장히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읽어서 그렇지, 이게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중을 감찰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며, 진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피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말은 정말 번지르르하게 잘하고 예쁘게 잘하는데 그 마음 중심에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말은 잘 하지 못하고 좀 어눌한데 그 마음 중심이 깨끗하고 순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 마음 중심이 어떤지를 보십니다. 다윗의 마음 중심이 정말 순전한 마음이었습니다.

나단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나단도 기뻤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이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 성전건축 하시면 되지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세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1-1. 목자의 정체성

본격적인 세 가지 말씀 하시기 전에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본격적인 세 가지 말씀 하시기 전에 가장 중요한 말씀의 전제가 이것입니다. 과거를 일깨워 주십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목자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 과거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잘 사는데, 지금 이렇게 잘 되어 있는데, 과거에 너 어떤 존재였다는 것을 자꾸 누가 입에 올리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는 거듭나고 이제는 믿음 생활 잘하고 제대로 생활하는데, "야, 저 사람은 옛날에 술고래였어, 저 사람은 옛날에 옆에 가면 담배 냄새가... 저 사람은 옛날에 말버릇이..." 이런 이야기가 사람 입에 자꾸 오르내리면 싫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인간적인 예의와 도리가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며, 우리는 가끔 과거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깨워 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오늘을 감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는 술고래였는데 이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성령이 내 마음속에 거하게 되고, 과거에 나는 잡지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게 되고, 과거에 나는 사람을 항상 쫓아내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존재로 살면서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일깨워 보는 것은 오늘을 더 풍요롭고 풍성하게 사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끔 과거를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 듣기 싫어하면 안 됩니다. 기도할 때 자꾸 내 옛날의 모습을 하나님이 들쑤셔 내시면, "아, 하나님 오늘도 나더러 겸손하라고 하시는구나." 과거에 내가, 우리 집 가족도 아무도 모르는 내 과거를 하나님이 자꾸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오늘 좀 조심하라고 하시는구나."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금 평안히 살고 있는 이때, 모든 것이 완벽한 이때, "너는 옛날에 양을 치던 목자였다"고 일깨우는 것은 "이제 너는 그때처럼 목자장인 내 말을 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부르실 때도 목자 정체성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목자는 목자장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양 떼인 백성들을 돌보는 중간자적인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그때부터는 타락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윗 언약을 하기 전에 아주 중요한 정체성을 한 번 더 각인시키시는 것입니다.

1-2. 다윗 언약 세 가지

그리고 세 가지 중 첫째입니다. 9절에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우리가 다윗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다윗 언약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윗에게 이름을 위대하게. 그래서 우리가 매번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위대하게 만들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12절에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절에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즉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언약 두 번째, 네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16절을 보시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인간은 한정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16절 말씀에서 '영원히'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쓰십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의 세 번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이 말씀,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앞으로 너의 혈통을 통해서 왕 중의 왕이신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인간 왕 다윗은 약합니다. 죄도 짓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수한이 다하면 죽습니다. 솔로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그 왕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세우실 영원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조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42대에 걸친 조상들이 있는데, 그중에 단 두 분만, 아주 대표적인 두 분만 언급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이야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렇다 하고, 다윗이 거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조상 유다도 아니고,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서 나오는데, 그런데 그중에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다윗 언약은 세 가지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네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너의 자손이 영원토록 견고히 하리라, 영원토록 왕 노릇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다윗 언약을 하나님이 왜 다윗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까? 그것은 다윗의 마음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전건축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이렇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성전건축을 결단했더니 하나님이 복 주셨다." 이렇게 적용하면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순전한 마음을 가지면,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가 뭐라도 하려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 지금 다윗은 성전건축을 계획하고 설계도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아직까지 일꾼도 불러 온 적이 없습니다. 아직까지 삽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치 성전건축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그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것처럼, 다윗에게 복을 마음껏 부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왜 그렇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은 많은 분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이것을 가지고 예화를 삼고 설교를 하시는데, 그것은 성경을 정말 값어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이 성전건축일 수도 있고,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가지고 있는 이 얼마 안 되는 소득이나 수입으로 난 정말 누군가를 돕고 싶어요, 그 마음이 진짜 내 중심이에요, 내 진심이에요. 그러면 그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진심을 받으시고 이렇게 약속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하셔야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는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속았습니다. 엘리압의 그 풍채와 잘생김과 키를 보고 기름을 부으려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첫 번째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이유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다윗이 부름 받은 것인데, 그 중심이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 되었습니다. 지금 자기 처지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돈만 조금 생기면, 이전과 달리 조금만 권세가 생기면, 사람 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인데, 그래서 다윗이 복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실 때도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전심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고, 네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전건축 같은 것은 하나님께 별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막에 계시든, 하나님이 건물에 계시든, 하나님이 온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 것인데 무엇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중요하겠습니까? 그것은 네 아들에게 맡기고, 난 너의 중심을 받겠다.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는 우리 마음을 진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위대한 축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1-4. 거절을 수용하는 자세

이제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8절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이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나에게 한량없는 은혜와 복을 주십니까? 감동이 북받쳐 오르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돌아보면 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만 그냥 진심이었는데.

29절에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온즉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아멘.

자 우리가 이것을 보면, 여기서 객관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지금 다윗은 기도 응답의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성전 짓고 싶었습니다.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넌 안 되고, 네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지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다윗은 성전건축을 하나님께 원했는데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위대한 다윗조차 내가 원하는 기도 응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내 의지가 아무리 선해도, 내가 아무리 선한 계획을 가져도, 하나님이 그것을 미루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대에서 내가 뭐든지 다 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있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역대기에 보면 다윗에게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막으신 이유를 피를 많이 흘려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뭐 명분 없는 전쟁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막으시면 두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거절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이것은 우리 믿음과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다윗은 여기서 이 위대한 다윗 언약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하 7장은 우리에게 아주 귀하고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2. 왕국의 영토 확장

이제 왕국이 확장됩니다. 다윗의 외부 정복 활동을 살펴보겠습니다. 8장 1절을 보시면 "그 후에"라고 나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시작되는 말들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 후에', 어떤 일 후입니까? 다윗 언약 이후입니다. 다윗 언약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이 쳐서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하셨던 그 말대로 이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블레셋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골칫덩어리 아니었습니까? 항상 발목 잡고 항상 괴롭히고 항상 힘들었던 존재인데, 다윗이 이제 블레셋을 완전히 제압을 한 것입니다.

2-1. 하나님만 의지하겠다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압도 정복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하닷에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왕입니다. 지금 다윗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때 자기 지경을 회복하려고 전쟁을 걸어 온 것입니다.

그에게서 4절에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뒷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합니다. 아깝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말이라고 하면 이길러 내기가 힘듭니다. 말 한 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금으로 치면 전차 한 대 정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의 힘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다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렸는데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것, 자기가 갖고 싶은 거 다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의 힘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말을 못 쓰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이 결단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데, 전쟁에서 사로잡고 전리품으로 얻었는데, 말의 힘줄을 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딱 필요한 만큼의 말만 남겼습니다.

그다음 6절에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친지라." 블레셋, 모압, 하닷에셀, 그리고 아람까지 다 정리했습니다. 그다음 14절을 보시면,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에돔까지 다 복속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지경이 갈수록 갈수록 넓어지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 이 위대함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 끝에 보니까,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입니다. 결국 다윗이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전쟁의 주인 되시고 개입해 주셔서 다윗으로 승리케 하셨더라는 이야기입니다.

2-2. 다윗의 두 가지 원칙

결국 다윗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한 가지입니다. 다윗은 목자 정체성을 계속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목자는 위로는 목자장에게 항상 순종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맘대로 하면 안 됩니다. 또 목자는 양들을 잘 돌봐야 됩니다. 목자장이신 하나님께 묻고 여쭙니다. 전쟁할까요? 말까요?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하나님이 전쟁의 방법과 계략까지,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까지 다 알려 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백성들을 사랑하니까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도 다윗처럼 목자 정체성을 가지면 됩니다. 목자장에게 묻고, 내가 돌보는 양 떼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겠지요.

이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정복 활동으로 지경을 확장시켜 나가는 다윗의 원칙을 살펴보십시오.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원리 원칙이 없으면 멋대로 흔들립니다.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귀가 얇아서 여기에 흔들리고, 어딘가에 좋은 게 있으면 그쪽으로 쏠려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 따르는 사람은 피곤하고 힘듭니다. 원칙 없는 사람 따라가는 사람은 굉장히 힘듭니다. 즉흥적이니까요. 그런데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으면 편안하고 쉽습니다.

다윗의 원리 원칙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1절에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과"라고 나옵니다.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은금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드렸습니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의 원칙 첫 번째, 물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그러면 백성들 위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리품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은금을 얻어 오면 외국의 용병을 은금으로 사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거 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왕이 거기에 손을 뗐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제사장, 금고 맡은 자에게 다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에 쓰려고요? 자기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건축에 쓰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아서 그것을 못 했지만, 그것을 위한 기반을 닦아 두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영광받고 싶지, 내 대에서 내가 영광받고 싶지, 그다음 대에 영광이 넘어가는 것을 원하는 정치인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나라가 대통령이 5년에 한 번 바뀌고, 국회의원 4년에 한 번씩 선출하는데, 그때마다 뭔가 자기 업적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고 문제가 자꾸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늘 놀이공원에 다녀왔는데, 자기가 자리 잡고 있을 때 뭔가를 하려고 계속 문제가 일어납니다.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정치인들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자기 대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은금을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원칙, 절대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12절에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린지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물질에 내가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자기가 목자로서 목자장에게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목자 정체성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목자는 두 방향이라고. 하나는 위에 계신 목자장이신 하나님, 또 하나의 방향은 양들입니다. 이제 양들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 원칙이 나옵니다. 15절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그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라고 합니다.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물질을 다 드렸고, 아래로는 백성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렸습니다. 두 번째 원칙, 백성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렸습니다.

2-3. 체다카와 미쉬파트

여기 정의와 공의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 히브리어에 보면 정의와 공의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체다카(צְדָקָה)'와 '미쉬파트(מִשְׁפָּט)'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 우리말 성경 번역에서 어떨 때는 정의를 체다카로, 어떨 때는 정의를 미쉬파트로 번역해서 좀 헷갈리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에 이 개념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지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체다카'와 '미쉬파트'입니다. 체다카는 관계적이고 회복적인 정의이고, 미쉬파트는 율법적인 정의입니다.

좀 설명을 드리면, 관계적 회복적 정의라는 게 무엇일까요?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100이라는 재정이 있으면, 정말 우리 가운데 더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50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관계적이고 회복적인 정의입니다. 나머지는 좀 살만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안 줘도 되지 않습니까? 진짜 힘들어서 먹고살기 힘든 사람에게 절반을 뚝 떼서 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냥 기계적으로 n분의 1로 나누는 것, 그것은 관계적이고 회복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데,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주는 게 그게 체다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정의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또 미쉬파트는 무엇입니까? 율법적인 정의입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정한 대로 아주 추상같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나님의 십계명을 어긴 자, 적절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지만, 가슴 아프지만, 돌로 치기도 합니다. 목을 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백성을 체다카와 미쉬파트로 다스렸다' 이 말은 가난하고 힘든 자들에게는 사랑을 돌봐서 관계적으로 회복적으로 그들을 돌봐 주기도 하고, 정말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눈물이 나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들에게 법을 적용해서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고, 이것이 다윗이 백성들에게 한 일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서 다윗은 목자로서 양들을 다스릴 때도 이 두 가지에서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여기서 균형을 잃으면 안 됩니다. 지도자가 여기서 균형을 잃으면, 체다카에만 치우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관계적이고 회복적 정의에만 치우쳐 가지고, 그저 마음이 약해 가지고, 율법적 정의는 저 뒤로 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율법적 정의에만 매여 가지고 따뜻함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목자인데, 자녀를 이 두 가지 균형으로 잘 다스려야 가정이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목회자도 마찬가지이고, 지도자들은 이런 것들을 잘 적절하게 해야 공동체가 유지가 됩니다. 다윗의 원칙, 자기는 목자로서 위로는 하나님께 물질을 다 드렸고, 목자로서 아래는 양 떼를 체다카와 미쉬파트로 다스렸습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이것이 다윗의 원칙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원칙대로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이 원칙대로 우리가 경험하는 지도자들을 한번 대입시켜 보십시오. 얼마나 성경적인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지도자를 세워 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체다카와 미쉬파트를 잘 알고 적용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워 주십시오." 우리가 능력껏 보고 그런 사람을 뽑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따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다윗은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칙대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3. 내면의 영토 확장

지금까지는 다윗의 영토가 눈에 보이는 영토가 확장되어 간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다윗 언약의 첫 번째였습니다. 영토 확장으로 눈에 보이는 영토가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대한 왕들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조선의 위대한 왕들, 세계사에 위대한 왕들 중에 눈에 보이는 영토는 확장해 갔으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영토, 내면의 영토는 간장 종지보다 좁은 영토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 많습니다. 질투에 매여 있었던 사람도 많고, 아랫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을 키우지 못하고, 자기와 정적이 될 만한 사람은 다 죽여 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제 여기서부터는 내면의 영토를 넓혀 간 모습입니다.

3-1. 므비보셋을 찾다

므비보셋을 찾습니다. 9장 1절에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이 이제 외부의 영토를 만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요나단이 생각난 것입니다. 요나단 집안의 후손 중에 한 사람을 찾아보자. 그런데 힘든 것입니다. 찾기가 힘듭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울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몰락한 사울의 집안, 만약에 살아남아 있더라도 버젓이 자기를 드러내고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과거에는, 요즘도 사실 그런데, 과거에 절대 왕정의 시대에는, 만약에 몰락한 사울의 집안 사람이 어디서 산다 그러면, 다윗에게 충성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헛된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이 가서 목을 쳐 가지고 또 다윗에게 와서 "제가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에게 상 주십시오" 이런 짓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숨어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9장 2절에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입니다. 그를 다윗이 이제 앞에 불러 옵니다. 4절에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께 아뢰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왕이 "대체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합니다.

시바가 옛날의 사울의 종이었는데, 그 집안의 집사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다리 저는 사람. 그래서 데려오라 합니다. 4절, 5절을 보십시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온지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왕의 전갈을 받고 왕에게 끌려 나오는, 왕에게 부름받아 나오는 므비보셋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쁠까요? 왕이 나를 불러 주니까? 아마 끌려 나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요? 내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잘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나를 알고 나를 찾아서 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구나. 지금까지 잘 숨어 있었는데 나는 죽은 목숨이구나. 물론 왕과 자기 아버지의 영원한 언약 관계를 알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한 정치 현실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지금 이 므비보셋이 얼마나 두려워하며 나왔을까요?

3-2. 언약을 지키다

그런데 6절에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함에"라고 합니다. 그냥 읽어서는 안 됩니다. 상상을 하셔야 합니다.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런데 두 다리를 저는 사람입니다. 한 다리만 저는 사람이 아니고 두 다리를 다 절면 목발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엎드려 절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엎드릴 수 있겠습니까? 철퍼덕 그냥 그 앞에 그냥 눕는 것입니다. 그냥 배를 땅에 깔고 얼굴을 붙이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다시 느낀 것입니다. 이 아이가 두려워하고 있구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돌려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복원을 시키겠다는 말입니다. 사울의 땅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왕이었으니까요. 그 땅을 다 네게 후손에게 주고, 너는 내 상에서 함께 먹을 것이다. 완전히 복권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아무리 권세가 강했다 하더라도 이런 조치를 곁에서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겠지요. 왜요? 만약에 이 므비보셋을 살려 두면 화근이 되니까요. 사실 므비보셋은 양 다리를 다 저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으로서는 실력을 행사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강력하니까 문제가 없겠지요.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실정을 거듭하고 문제가 자꾸 생기고 왕의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윗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므비보셋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허수아비 왕 므비보셋을 옹립하고 다윗을 암살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의 후손이니까요. 요나단의 적게 아들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정치인들, 다윗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많이 반대했을까요? 이렇게 불러 오니 이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왕이 좋은 말로 그를 부르는구나, 불러서 가두든지 목을 쳐서 죽이든지 귀양을 보내든지 죽을 때까지 감시하든지 하겠지.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완전히 복원시켜 줍니다. 주변에서 깜짝 놀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말렸을지 모릅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러지 않았겠습니까?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합니다. 딱 정확한 표현입니다. 죽은 개 같은 나입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정말 하찮고 쓸 데 없는 나 같은 존재를 이렇게 극진히 돌봐 주십니까?

다윗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무엘상 20장 42절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다윗과 요나단이 약속한 게 있습니다. 내 자손과 네 자손. 그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3-3. 마음의 영토

지금 이것을 보면 다윗의 영토가 얼마나 많이 넓어졌습니까? 사실 눈에 보이는 영토는 힘이 있으면, 군사력 많이 쓰면, 지혜만 있으면,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의 영토는 자기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도 내 마음의 영토는 내가 넓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함께하셔도 성령과 함께하는 내 마음의 영토를 확장시키려면 내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될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이 다윗의 영토 확장 중에서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그런데 마음의 영토가 너무너무 좁습니다.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의 범위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수용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자꾸 멀리합니다. 나이 들수록 그렇게 됩니다. 많이 들수록 자꾸만 생각하기 싫어하고, 불편하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처럼 마음의 영토를 자꾸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얼마나 많은 영토가 확장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분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되지 않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살았더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두 발을 다 절더라'를 해 줍니다. 두 발을 다 저는, 정말 힘든 므비보셋을 다윗이 돌봐 줌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주었던 요나단에 대한 은혜를 갚은 것입니다. 얼마나 의리 있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전파될 것 아닙니까? 그 백성들이 왕을 얼마나 존경하겠습니까? 왕을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마음으로부터 왕에 대한 충성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백성들의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4. 분별력의 중요성

다윗이 암몬에게 어떤 모욕을 당했습니까? 가끔 보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지금 여기 암몬 왕 하눈이 그런 존재입니다.

10장 1절에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젊은 왕입니다. 그랬더니 왕이 조금 우쭐해진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주변에 암몬 왕이 죽었으니까 이제 조문객을 보내는 것입니다. 왕의 대신 사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조문 사절을.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합니다. 다윗이 사실 대국이자 이제 주변 모든 나라들을 통솔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옆 나라 암몬에 왕이 죽었으니까 극진히 좋은 사절단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절단을 기쁨으로 맞이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식의 일이 벌어졌는지 보십시오. 3절에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라고 합니다. 참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어리석은 존재들. 이렇게 신하들이 이야기하면 하눈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아는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고 일축해 버려야 되는데, 4절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라고 합니다.

옛날 고대에서 수염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사람을 잡아서 사로잡아서 노예로 삼을 때 수염부터 깎습니다. 굉장히 모욕적입니다. 수염의 절반을 깎았습니다. 의복의 반을 잘라서 중동 볼기 즉 엉덩이까지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속옷을 안 입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 원피스처럼 길게 치렁치렁하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엉덩이까지 보이게 자른 것입니다. 하체를 다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에 대한 모독이고 다윗에 대한 도전입니다.

4-1. 분별력 없는 자의 최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로써 암몬이 나중에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참 미련합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별력을 가져야 되는데, 분별력이라는 것은 잘 관찰만 하면 분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다윗을 곁에서 본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윗이 어떤 존재인지 보았습니다. 만약 다윗이 암몬을 마음먹고 침략해서 다 가져가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간첩 보내서 하겠습니까? 전면전을 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데요. 다윗은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다윗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고 제대로 다윗을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나한테 했다고 누가 나에게 전해 줍니다. 제3자가. 그것 믿고 막 길길이 뛰고 화내고 열받고 쌍심지 돋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 사람을 내가 알지 않습니까? 평소에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말 전해 준 사람이 나쁜 것입니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인격이라면 원래 그럴 인격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력을 잃고 누군가 나를 욕했다 그러면 야단법석입니다.

4-2. 하나님에 대한 분별력

사람이 돼서 그렇다 치고, 하나님에 대해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금까지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사랑이신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 주시고, 먹을 것 주시고, 입을 거 주시고, 나를 돌보시고, 내가 죄 지으면 따끔하게 혼내기도 하시고. 내가 죄짓고 혼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죄 안 지어야지요. 분별력이 있으면 내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언제든지 내가 기도하면 들어 주시지요. 그러면 기도해야지요. 그게 분별력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별력 없는 사람은 거꾸로 합니다. 기도하면 들어 주시는데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 싫어하시는데 원망하고, 하나님은 죄짓는 거 싫어하시는데 죄짓고. 그게 분별력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정말 분별력이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가지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7장 27-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평소에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면 이 여인을 예수님이 개 취급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여인의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 내가 지금까지 듣고 경험한 예수님은 이런 분이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에 뭔가 이 분의 뜻이 있구나. 평소에 내가 알던 예수님과 반대로 행동하신다면 거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그게 분별입니다.

만약 거기서 발끈해 가지고 기분 나빠 가지고 "아니 나를 어떻게 개 취급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일어나 가 버렸으면 끝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저는 딸을 살리고 싶은데, 저를 개 취급하셔도 좋고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은데 제 내지가 이만큼 간절합니다." 그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분별력 없는 사람은 망합니다. 망해도 쌉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고 거꾸로 행동하고. 여기 지금 암몬 왕 하눈이 분별력 없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니까 다윗은 이러고 나서 직접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가만히 두고 보고 있습니다. 가만히 두고 보고 있는데 암몬이 스스로 제발이 저리는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내가 사고 쳤구나. 그래서 주변 여러 나라 용병들을 모읍니다.

6절에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전쟁을 선포하여 다윗에게. 감히 자기들이 제발 저려 가지고 이제 다윗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7절에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요압이 갑니다." 13절에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도 망하고 아람이 그냥 내빼 버렸습니다. 용병들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다음 어떻게 될까요? 14절에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싱겁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또 암몬이 용병을 샀는데 아람이 갔습니다. 아람 사람들도 제발이 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람이 암몬의 전쟁에 동참했으니까 다윗이 반드시 우리를 치러 올 것이다. 그래서 아람이 자기들이 제발저려서 또다시 전쟁을 선포하고 나옵니다. 이들도 분별력 없는 인간들입니다.

15절에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였더니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먼저 전쟁을 선포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러면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8절에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은지라." 전쟁이 이렇게 끝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은 분별력입니다. 분위기 파악 잘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다윗을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는데, 함부로 설치고, 함부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함부로 다윗의 이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사람이 이렇게 크게 당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행하였습니다. 매사에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윗 언약을 통해서 크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토를 넓혀 주셨고, 눈에 보이는 영토를 하나님은 넓혀 주셨는데, 다윗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 자기 마음의 영토까지 넓혔습니다. 암몬 왕 하눈처럼 미련하고 분별력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을 분별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