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특강 14 - 치명적 범죄 (삼하 11장)
사무엘하 11장 1절 말씀입니다.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딸린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오늘은 사무엘상하 공부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열여덟 번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벌써 오늘이 열네 번째입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빨리 흐르는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매력적인 책이 되는 이유는 사람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 믿음의 위인들, 그런 분들도 사실 흠이 있고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하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좌절하지 않고, "이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 나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다윗의 치명적인 범죄를 살펴볼 것입니다. '범죄' 앞에 '치명적'이란 말을 붙였는데, 이렇게 되면 다윗이 처음부터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의 범죄는 치명적인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윗은 광야에서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인생의 진짜 어려운 고비들을 광야에서 십수 년을 고생하면서 잘 극복하고 넘겼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정말 하나님 뜻대로 왕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고, 첫 번째는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또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그를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십니다.
왕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400년 동안 여부스 족속의 땅이었던 예루살렘을 다윗 성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옵니다. 명실상부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음속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다는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심을 보시고, 아직 설계도도 나오지 않고 첫 삽도 뜨기 전인데 다윗에게 세 가지 축복을 하시죠. 다윗 언약입니다.
그때부터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영토 확장을 엄청나게 합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 왕들이 다윗 앞에서는 꼼짝도 못합니다. 외면적인 영토 확장을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내적인 영토 확장도 합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복권시켜 줍니다. 사실 잠재적인 위협 세력이 될 사람인데, 그 사람을 불러다가 할아버지 때의 땅을 다 돌려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적인 영토도 외적인 영토도 확보한 정말 위대한 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래서 다윗은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맺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다윗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됩니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범죄로 치닫는, 가장 부끄럽고 가장 하나님 앞에서 감추고 싶은 것들이 등장합니다.
1. 게으름의 죄
1-1. 있어야 할 자리
1절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것, 그해가 돌아왔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나라들과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등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이 먹고사는 수단이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농사 짓든지, 목축을 하든지. 이집트는 나일강이라는 풍부한 수원지가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것이 없는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이른 비가 내려야 되고 늦은 비가 내려야 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먹고 살죠. 그래서 농번기가 있고 농한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국경 분쟁은 나라들마다 항상 있습니다. 지금처럼 국경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크고 작은 분쟁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을 동원해서 전쟁을 하면 농사는 어떻게 됩니까? 백성들이 너무 피폐해지고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왕들이 크고 작은 문제들을 농한기로 미루어놓는 것입니다. 외교적으로 풀지 못하면 백성들이 힘들지 않을 때, 나라 전체의 군인들을 다 동원할 수 있을 때, 그때 가서 전쟁으로 한판 붙어서 끝내자는 것입니다.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면 여기 명분은 왕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야 되는 전쟁입니다. 지금 어느 나라와 국경 분쟁인가 하면 암몬 자손입니다. 암몬의 왕은 나온 건데, 다윗은 나가질 않습니다. "다윗이 요압과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온 이스라엘 군대를 다 보냈습니다. 군인들을 다 소집해서 주력부대를 다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 갔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왜 안 갔을까요? 이제 다윗은 거기 갈 정도의 위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주변 국가를 다 복속한, 주변의 최고의 왕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윗이 안 가도 요압이 "왕이시여, 이 정도는 제가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셔야지, 혹시 가서 화살에 조금이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왕이 돌아가시면 이 나라는 누가 돌봅니까?" 이런 식의 사탕발림들을 밑에서 막 했겠죠. 그러니까 다윗이 "그런가?" 하고 우쭐해지고 안 간 것입니다.
국제 정세로 보나 다윗의 위상으로 보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나 안 가도 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보면 다윗이 가야 됩니까, 안 가도 됩니까? 왜 가야 됩니까? 목자니까요. 다윗의 정체성은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전쟁터에 가는데 목자가 안 가는 게 말이 됩니까? 양들 전체가, 온 이스라엘 군대가 다 전쟁터에 가는데 목자가 그냥 왕궁에 머물러서 잘 먹고 잘 살고 그냥 뒤에 있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온 후에 앞서 가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앞서 가면 누가 앞서 간다는 말입니까? 목자가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의 위치는 양들보다 앞서 있는 위치입니다. 목자는 "너희들 먼저 가봐. 앞에 위험이 있으면 너희가 빠져줘, 그러면 나는 후퇴할 테니까" 하고 먼저 보내고, 위험지역에 양들을 보내고 자기는 뒤에 있는 게 아닙니다. 목자가 앞서 가는 존재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니까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 삼을 때 "너는 목자다" 하셨습니다. 목자장은 하나님이시고 백성들은 양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정체성입니다. 다윗은 항상 중간적인 입장에서 목자장 대신 하나님께 묻고, 양들을 잘 섬기고 인도하고,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야 했는데, 안 간 것입니다.
1-2. 태만의 시작
우리는 이 죄를 다윗의 첫 번째 죄라고 부르는데, 게으름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게으름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냥 할 일 없이 누워 자는 것도 게으름이라 할 수 있지만, 다윗이 범한 죄에서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게으름입니다.
마땅히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목자로서 목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양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앞에 가고 뒤따르고, 그것이 목자의 자리인데 목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양들만 내버려두고 자기는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죄가 출발합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간음했습니까? 처음부터 살인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처음에 게으름의 죄부터 시작합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 그것은 내가 너무 잘 압니다. 내 신앙 양심에 한번 비추어 보면 내가 정말 이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떠나야 할 자리인지 너무 잘 압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 훈련을 잘 받아왔기 때문에 너무 잘 압니다. 당연히 예배 자리에 있어야 되고, 봉사와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되고, 그런 건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애매한 자리에서도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여러 가지 핑계를 아무리 많이 댄다 하더라도 내 신앙 양심이 압니다. 떠나야 할 자리인지, 있어야 할 자리인지.
지금 다윗은 게으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거기서부터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아주 작은 틈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이 첫 번째 죄로부터 모든 죄의 문이 하나 열린다는 것을 보시고, 나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돌아보셔야 됩니다. 성도로서, 또 직분을 받은 사람으로서, 권사로서, 장로로서, 안수집사로서, 집사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그것을 돌아보셔야 됩니다.
2. 안목의 정욕
2절입니다. "저녁 때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아침이 아니고, 낮잠 주무시는 것입니다. 지금 양들은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목자는 침상에서 낮잠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옥상을 거닐고 있습니다.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보니'라는 말이 2번 반복됩니다.
창세기 3장 6절과 요한일서 2장 16절을 봅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여자는 하와이고, 그 나무는 선악과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너무 유명한 말씀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본즉', '보암직도 하다', '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3대 죄악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중에 안목의 정욕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3대 죄악 중에 안목의 정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게으름의 자리에 있으니까, 사탄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보는 것은 우리가 진짜 안전하게 보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습니다. "왜 보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거야, 기독교는? 하나님도 다 본다고 했는데?" 그런데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셔야 됩니다. 사람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을 보시는데, 우리 예수님도 보시는데, 예수님은 사람이 보는 관점과 달랐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여호와는 너의 중심을 본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모를 봅니다. 보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그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봅니까? 아닙니다. 육체의 관점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보이지 않죠. 그런데 그때 식욕만 왕성해졌습니다. 먹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 편애가 생긴 것입니다. 사냥 잘하는 에서를 편애하고, 집에서 어머니 치마폭에 있는 야곱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입맛만 좋아지고 고기 좋아하고, 영적인 감각은 무뎌지고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여기 다윗도 두 번째 죄, 안목의 정욕입니다. 게으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안목의 정욕. 무엇을 보는가,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3. 시험에 듦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알아보게 합니까? 왜 신원 조회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다윗의 두 가지 죄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게으름, 하나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게으름은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내 의지와 상관없습니다. 사탄이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도 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많은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눈앞에 지나갑니까? 지나가는 것을 잡아버리면 그것이 무엇이 됩니까? 죄가 됩니다. 그냥 흘려보내야 죄가 되지 않습니다. 떠나보내고 흘려보내야 되는데, 그것을 잡는 것을 우리는 "시험에 든다"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시험 거리가 와도 붙잡지 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자랑하지 못하게 수십 가지 시험들이 눈앞에 지나가는데, 이것을 잡아버리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오늘 몇 번이나 화 내셨습니까? 누가 나를 격동시키고 화나게 하는데, 눈 질끈 감고 흘려보내면 그것이 죄가 안 되는데, "그래, 오늘 한번 붙어볼까? 오늘 누군가 오면 한번 따져볼까? 내일 또 봐야지" 이렇게 되면 내가 이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시험 거리가 오면 그냥 흘려보내고 흘려보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알아봐,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봐"라고 합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조금만 더 예민했더라면, 옥상에 올라가서 걷는데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봤으면 "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니 사탄이 나를 시험하는구나. 지금이라도 가야 되겠다. 말을 채비하라" 하고 전장으로 나가야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돌이켜야죠. 그런데 거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시험 거리가 와도 "하나님 제가 붙잡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붙잡지 않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이 기도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 말씀처럼 게으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절 말씀 뒤에 보시면, "그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 유부녀인 겁니다.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이건 국제결혼입니다. 밧세바는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엘리암입니다. 엘리암은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데 다윗의 핵심 용사 중에 한 명입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헷 사람, 이방 사람인데 이 사람도 사무엘하 23장에 다윗의 핵심 측근 용사로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도 다윗의 측근이고 남편도 다윗의 측근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다윗에게 충성을 바쳤겠습니까? 다윗이 광야에서 뼈 빠지게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한 사람들입니다. 밥 굶으면 같이 굶고, 죽으면 같이 죽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딸이고 아내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취합니다.
4절, "다윗이 전령들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에서 깨끗해졌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네 번째 죄, 간음입니다. 이 간음은 단순한 간음이 아닙니다. 남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4절에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이 있고, 출애굽기 20장 17절에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 범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명기 22장 22절 말씀도 보시면,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함을 보면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라" 유부녀와 동침한 남녀는 반드시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4. 죄를 덮으려는 죄
5절 이후입니다. "여자가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처음에는 비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이 언제 시집을 가고 언제 아이를 낳았는지 세면 다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윗이 죽을죄를 지은 것이 백성들에게 다 알려지게 됩니다. 이것을 숨기려면 우리아를 불러다가 집에 보내서 아내와 동침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모르게 됩니다.
6절,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내니" 전쟁터에서 다윗이 우리아를 부릅니다. 우리아가 소환장을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왕이 신하를 전쟁 중에 데려오는 경우가 네 가지 있습니다. 포상하거나, 새로운 명령을 내리거나, 문책하거나, 밀명을 주거나. 이 네 가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르니까, 우리아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7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니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으니라" 이런 것을 물을 거면 전령 보내서 물으면 되지, 왜 이 사람을 부릅니까? 목적이 있었습니다. 8절, "다윗이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감에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가니라"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가서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라고 집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충직한 장군이었습니다. 9절,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인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자니라" 왜 내려가지 않았을까요? 네 가지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니까요. 왕이 나를 어떤 이유로 불렀는지 신하의 도리이니까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왕이 나를 불렀는데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 네 가지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니까 나는 집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전쟁하는 전우들에 대한 예의가 있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11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 장막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이것은 우리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그 앞에서 회개하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5. 배신과 살인
5-1. 충신을 배신하다
다윗은 여기서 또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장군을 배신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4절, 5절을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말세에 이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배신하며" 4절에 말하기를 배신이 판을 친다고 합니다.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어쩌면 다윗에게 이렇게 꼭 맞는 말씀일까요? 배신했죠, 조급하고, 자만했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했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다윗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배신했습니다.
13절,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인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우리아가 왜 집에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왜 아내를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네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 말씀에 대한 충성, 왕에 대한 충성, 함께 전쟁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그것 때문에 집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이 사람을 배신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요압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14절,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라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5-2. 살인의 죄
이것이 여덟 번째 죄, 살인입니다. 여러분이 살인까지 오는 과정을 한번 보십시오. 첫 시작이 무엇입니까? 게으름부터 온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입니까? 게으름부터 시작해서 간음해서 살인으로, 이웃의 아내를 탐내고 범하는 것으로. 십계명 10가지 중에 세 가지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위대한 다윗이 작은 시작, 게으름으로부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떠난 그 죄로부터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16-17절,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계획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압이 어떤 사람입니까? 요압은 굉장히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동생이 죽었다고 해서 사신으로 온, 협상으로 온 아브넬을 찔러 죽인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지금 요압은 왕이 이렇게 누군가를 죽여야 할 만한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나, 그래서 요압이 이렇게 교묘한 말을 합니다.
18-19절,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하되" 전쟁하면 상황에 따라서 전령을 통해서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 전령에게 명령하기를, 20-21절,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 알지 못하였느냐" 왜 왕이 노할까요? 왕은 전쟁에 굉장히 능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에서 십수 년을 쫓겨 다녔기 때문에 전쟁에 굉장히 능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가까이, 성까지 접근해서 사람을 죽게 했느냐, 왜 아까운 병사를 그렇게 죽도록 만들었느냐, 이것 때문에 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거든" 21절 끝에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할지니라" 무서운 말입니다. "나는 왕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아를 죽일 목적이 없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이 이런 전술을 펼쳤다면 왕이 어떻게 했을까요? 그 피드백을 받았다면 왕이 요압을 문책했겠죠. "어떻게 전술을 그 따위로 써서 내 양들을 죽게 만들었느냐? 왜 근접전을 해서 성 밑까지 가까이 가서 사람을 그렇게 죽게 만드느냐?" 그것이 정상적인 다윗입니다. 요압이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질 것을 "우리아가 죽었다고 하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면, 내가 깨끗하지 못해서 나의 문제를 누군가가 알고 있다면 나중에 그 사람이 나한테 은밀한 거래를 청하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좋은 말로 정치적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그 밑에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뒤집고 보면 서로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깨끗하지 않으니까, 한 사람이 폭탄 터트리면 다 죽게 됩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죄와 악을 벗 삼고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군기를 문란하게 하고, 자기중심적인 요압에게 자기 친구를 보여준 것입니다. 나중에 요압이 왕의 이 부끄러움을 알고 나중에 돌아보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아는 죽었고, 그 아내가 밧세바가 왕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왕비가 되어 있습니다. 뻔한 것입니다. 요압이 이것을 가지고 나중에 어떻게 해먹겠습니까? 요압이 나중에 아무리 길길이 뛰어도, 아무리 왕 머리 꼭대기에서 뛰어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끗하지 않은데 어떻게 누군가를 함부로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부터 왕으로서의 권위는 추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왕권, 자기 스스로 먹칠을 하고 망친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영적 권위가 상실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 몰래 부끄러운 일을 행하면 부모의 권위가 없습니다. 교회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답지 않은데 강단에서 설교하면 그 설교가 먹힙니까? 목회자가 목회자답지 않은데 강단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아멘으로 화답이 됩니까? 안 됩니다. 어찌 내 삶이 깨끗하지 않은데, 내 인생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않은데 그것이 어떻게 말이 먹힙니까? 지금 다윗은 나라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 것입니다.
6. 위선의 죄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의 다음 행적이 어떠합니까? 이제 여덟 번째 살인죄까지 갔습니다. 이제 아홉 번째 죄가 나옵니다.
25절,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는 것이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우리아 사건이 아니었다면 다윗이 이렇게 말할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한결같지 않은 것입니다. 시편 102편 27절과 잠언 20장 10절을 봅시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습니까? 한결같습니다. 한번 사랑하시면 그 사랑이 영원합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을 보면,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저울추나 되는 다 똑같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예쁜 사람이나 내가 미운 사람이나 다 저울추가 똑같고 되가 똑같아야 됩니다. 기준이 똑같아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결정권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왕의 자리에 있는 다윗은 기준이 똑같아야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될 사람입니다.
평소 같으면 요압이 이렇게 행동했으면 길길이 뛸 다윗이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는 것이라, 더욱 힘써서 그 성을 정복하라" 말이 됩니까? 우리가 위정자들에게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편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다 공정하고 엄정하게 하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홉 번째 죄를 범한 것입니다. 위선입니다. 하나님은 위선한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26-27절, "우리아의 아내가 그의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슬피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전장에서 죽은 우리아의 아내를 왕이 거두어 주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왕이고 위대하신 왕이고 저렇게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왕이 없다고, 모르는 사람들은 다윗을 얼마나 추앙했겠습니까? 사실 다윗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가 그렇습니다. 므비보셋 같은 두 다리를 다 저는 사람을 복권시켜서 할아버지 때 땅을 다 돌려주었고, 자기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남편 잃은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보면 아주 상징적인 것입니다. 군인이 전쟁 하다가 전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시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왕이 직접 책임져 준다고 합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왕을 위해서 충성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참 의미 있는 표현을 합니다. 27절 마지막,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행동을, 중심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다윗의 집에 가서 왕을 세우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습니다. 중심을 보는 하나님께 발탁된 것이 다윗입니다.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 책망 받는 것도 또 다윗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본다는 말, 그 말에 위로가 되십니까?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을 보고, 하나님이 내 행동을 보고, 내 생각을 다 들여다보시는데, 사람은 멋지게 속일 수 있는데 하나님은 정말 속일 수 있습니까?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계획까지 하나님 앞에 정말 떳떳합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내 이름이 그 앞에 들어가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여호와 앞에서 악하였더라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윗은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았는데,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서 그때부터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추는 한결같으시고, 하나님의 되도 한결같으십니다. 절대로 사람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다윗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면 그때부터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서 우쭐댈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사무엘하 11장은 죄의 전체 압축판입니다. 어떻게 죄가 시작되고, 그 죄는 어떻게 진도를 나가고, 하나님은 이 죄를 어떻게 살펴보시는지. 그래서 11장을 내가 죄의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다시 꺼내 보셔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돌이키셔야 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 게으름으로부터 시작해서 간음과 살인까지 가버린 무서운 다윗의 죄가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이 진행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닫고 즉시 돌이켜야 됩니다. 통회하고 그래야 회복의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윗을 통해서 우리의 악한 모습과 약한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고, 다윗은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했을 때 그때부터 게으름의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는 간음으로, 그 죄는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윗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시작했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윗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음을 다 열어 보여 드려도 하나님 앞에 거칠 것이 없는지, 우리 속사람을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하옵시고,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하옵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눈앞에 우리가 다시 한번 쓰임 받도록 주여 우리를 살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미련하고 연약하여 게으름을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붙잡는 것을 또 다른 일탈이라고, 한순간의 일탈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직분의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시고,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시고, 성도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쓰임 받다가 하나님 부르시는 그 날에 천국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