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 암논과 다말, 그리고 압살롬 / 전체녹취

사무엘상하 특강 15 - 암논과 다말, 그리고 압살롬 (삼하 12-14장)

사무엘하 14장 24절 말씀입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함에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아멘.

오늘은 사무엘하 12장부터 14장까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의 치명적인 범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당시 그는 십계명 중에서 크게 세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첫째가 간음 죄요, 둘째가 살인 죄고, 셋째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한 계명을 어긴 죄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죄를 짓게 되는 것이, 따지고 보면 정말 큰 죄부터 저질러야지 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의 죄에서부터,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아니한 것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자리, 마땅히 거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 그 자체가 게으름이 되고, 거기서부터 사탄이 틈을 타고 비집고 들어오면 그 다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 교훈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11장 말미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행한 모든 일을 악하게 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실 다윗이 흥하게 된 것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죄 짓고 난 후에 그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 앞에서는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범죄가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계실까요? 하나님의 기대가 뭡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죄 지은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의 상황도 알고 계시고, 얼마나 악한 것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 다음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죄 지은 것은 이미 지나간 문제이고, 그 지나간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과 결산하기를 바라시는데, 다윗이 결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다음 하나님의 단계가 있겠지요. 그 다음 단계에서 나단이라는 사람을 보내십니다.

1. 나단의 책망

1-1. 조언의 전제 조건

12장 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 구절을 쉽게 읽지만, 보냄 받은 나단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다윗과 나단이 선지자와 왕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고, 다윗은 평상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아주 존중하고 잘 받아들이는 굉장히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나단이 이미 다 알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다윗에게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다리가 떨리지 않겠습니까?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금 다윗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완전 범죄라고 생각하고 그냥 묻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단이 가서 이것을 들추어 내면, 만약 다윗이 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는 백성들 앞에서 뭐가 됩니까? 왕실의 신하들 앞에서 뭐가 됩니까? 그래서 이를 인정하게 되면 그가 이제는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지금까지 그가 싸워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이고, 만약에 부정하게 되면 "나는 절대 그런 일 없다. 이가 어디서 미친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해버리면 나단의 목숨은 죽은 목숨이 됩니다. 다윗이 나단을 죽여야 자기가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 가는 것입니다.

가서 한 가지 비유를 하는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형식적으로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이런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지적할 때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평소에 관계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 형성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마음에 품었을 때 나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단은 왕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다윗 언약을 세우십니다. 나단에게 가서 다시 이야기를 전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과 나단, 다윗 사이는 평소에 영적으로 교감하고 교류하는 끈끈하고 양적인 관계가 계속해서 존속하고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정말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쓴소리를 해야 됩니다. 쓴소리를 할 때는 내가 정말 기도 많이 하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잘 하지 않습니다. 정말 가까운 사이인데 눈에 딱 거슬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 줍니다. "내가 집사님 생각해서 하는 건데, 내가 권사님 정말 사랑하니까, 나니까 이런 소리하는 거야."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예쁜 말로 그분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 줄까? 과연 내가 이 상황에서 그분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걸까?" 하고 잠깐 멈춰 서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데, 기도하지 않고 그냥 내 열심으로 그냥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어색해지고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 다들 한두 번씩 해 보셨지 않습니까?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아들을 나무랄 수 있습니다. 엄마가 딸을 나무랄 수 있습니다. 당연히 혈연관계니까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관계가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자식과 평소에 "밥 먹었냐, 공부 열심히 해라" 한마디, 이런 이야기만 10년 동안 하다가 갑자기 기분 나쁘다고 아들 불러놓고 온갖 소리 다하고 혼내고 손찌검하고 그러면, 앞으로 얼굴 안 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평소에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이 되고, 평소에 깊은 관계가 형성이 된 가운데, 그리고도 하나님께 몇 번 기도하고 엎드리고 "어떻게 말할까요" 하고, 그리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부모 자식 관계라도 함부로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단이 다윗에게 나가서 이야기하는 이 관계가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명령하고 부탁하신 것이고, 나단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몇 번이나 기도하고,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습니까?

1-2. 양 한 마리 비유

비유를 한번 봅시다. 1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지라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더이다.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이 사람이 누굽니까? 비유로 다윗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옛날이야기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듣고 있습니다. "이 영감님이 오셔서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시는구나" 하고 그냥 듣고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 듣는 것처럼요.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움으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그 가난한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야입니다. 양 새끼가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지금 바로 다윗과 우리야와 밧세바 관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쯤 들으면 감이 딱 와야 됩니다. "아, 이게 내 이야기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듣고 "아, 이게 우리나라에서 현실로 일어나는 이야기구나. 이런 나쁜 놈이 있다니" 하면서 다윗이 막 열을 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5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1-3. 유체이탈 화법

이것을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들어보셨지요.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그냥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지적하는데 정말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화법을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그런 상황에 있게 된 것은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해결을 안 해서 그런 것입니다. 해결을 안 해서 지금 다윗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되어 버렸느냐 하면, 완전 범죄라고 생각하고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야를 죽인 일도, 밧세바를 빼앗은 것도, 그리고 자기가 심각한 죄를 범한 것도 완벽하게 봉인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문제를 끄집어 내서 자기 양심에 자꾸 걸림이 돼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어떡하면 좋을까요" 했다면, 나단이 딱 찾아오는 순간 감이 딱 오는 것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입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단이 겨우 말문을 열어서 말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딱 엎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면 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설교를 들을 때 성경 읽을 때 적용은 나에게 하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자꾸 적용을 해야 되는데,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으로 듣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꾸 "목사님, 오늘 말씀은 내 남편이 들어야 되는데, 오늘의 말씀은 우리 집 아이, 나무기 개가 들어야 되는데" 하는데, 그게 유체이탈이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말씀으로 듣는 게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데, 지금 다윗이 바로 그 꼴입니다.

신앙생활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 반성하지 않는 사람,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딴사람 이야기입니다. 이건 다윗 욕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내가 들으면 나에게 적용시키고 "어찌할꼬" 하고 가슴을 쥐어 뜯어야 되는데,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으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안 하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사람,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항상 말씀 앞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해집니다. 예민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 들으면 다 내 이야기입니다. 전부 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부담스럽고 힘들고 눈물 나고, 또는 기쁜 일이 있으면 즐겁고 힘 나고 위로받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이 상황은 영적으로 굉장히 어두운 시간입니다. 왕으로 살고, 모든 것 다 누리고, 정말 얻고 싶었던 밧세바를 빼앗아 가지고 자기 아내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저 밑바닥을 걷고 있습니다. 이 상태를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적 예민함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 그 말씀 듣고도 나에게 적용할 수 없는 사람, 가장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사람에게는 뭐가 필요할까요? 충격 요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7절 보십시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게 충격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 말이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이건 지금 하나님이 나단에게 하신 말씀을 옮겨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나단이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시고, '너'는 다윗입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세우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울의 손에서 건졌노라." 건진 사람이 누굽니까? 다윗이 잘나서 그 광야에서 살아남았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건지신 것입니다. 자기가 십수 년 동안 광야를 쫓겨 다니면서 내가 잘나서 숨고, 내가 잘나서 거기서 이기고, 내가 잘나서 사울을 살려 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지금 다윗이 즐거워하며 함께 생활하는 여인들 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다윗이 잘나서 열두 지파의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지금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하나님이 거두시면 다윗은 남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핀트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또 남의 것까지 빼앗아 간다면 하나님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에게 주는 말씀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면 "네가 잘나서 행복하겠지? 너의 집, 너의 가정, 자녀들, 너의 건강, 네가 타고 다니는 차, 이 모든 것 다 내가 너희에게 맡겨 주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필요하면 내가 네게 더 주었을 텐데, 왜 너는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힘든 사람 것을 또 빼앗아 가지고 그 사람들의 피눈물 나게 하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책망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은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다윗의 목자 정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생각날 때마다 하신 말씀이 뭡니까? "내가 너를 양을 치는 목장에서 불러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 이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신 것은 양치기 목자 자리에서 불러다가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는 위로는 목자장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양 된 백성들을 돌보고 먹이고 섬겨야 됩니다. 이게 다윗의 정체성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정체성을 다윗이 어겼습니다. 양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잡아먹었습니다. 그 양을 빼앗기 위해서 그 양을 돌보고 있는 사람까지 죽인 것 아닙니까? 양의 가정을 파괴한 것 아닙니까? 목자장의 허락도 없이 남편이 있는 여인을 빼앗아서 동침하고 그 남편을 죽여 버리고 자기 맘대로 양들의 인권을 유린했지 않습니까? 이건 목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양들을 늑대가 물어 가면 목숨 걸고 가서 늑대의 입에서, 사자의 발톱에서, 곰의 발톱에서 양 떼를 건져 와야 그게 목자가 해야 할 일인데, 자기는 게으르게 왕궁에서 낮잠 자고 있다가 일어나서 느지막이 일어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시험을 붙잡았습니다.

그런 심각한 죄를 범한 다윗, 하나님은 "네가 내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굉장히 모욕스럽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목사의 직분, 중직 장로님, 또 교회 집사님, 성도, 가정에서 부모, 우리에게 직분과 직책, 책임과 의무를 주셨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는 내 말을 업신여겼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될 때 하나님 앞에서 결단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우리 교회를 맡겨 주실 때 저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붙잡고 살아야 되는데, 그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 제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곧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 그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우리가 받들지 않으면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습니까? "아버지 업신여기냐, 아버지 무시하냐" 어떻게든 "내 하겠습니다" 하고 가서 해보다가 안 되면 "이렇게 했는데 잘 안 되는데요" 뭐 이렇게라도 해야지, 긍휼히 여김을 받지, 그렇지 않으면 경을 치지 않습니까? 어릴 때 우리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그 말씀 붙들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 앞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야를 쳐서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으니..." 그런데 성경은 정말 아주 정직한 책이거든요. 사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나중에 누굽니까? 처음 난 아들은 죽고, 그다음 난 아들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족보에 보면 이것을 아주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을 보시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참, 그냥 "밧세바에게서 낳고" 이래 주면 그냥 서로 좋겠는데, 예수님 족보에 밧세바를 이렇게 표현해 버렸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예수님 족보입니다. 예수님이 나시는 족보에 "그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렇게 시작했는데, 다윗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고 틀림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하나님의 책에, 우리의 행동이 기록되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냥 좀 눈감아 주시고 넘어가 주고, 그냥 하나님 우리가 좀 이렇게 해도 저렇게 적어 주시고 하면 좋을 텐데, 정확하게 기록하신다니까요.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는 알고 행한 죄가 무섭습니다. 알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족보에 "우리야의 아내"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야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신이 왕에 대한 충성과 동료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서 전장에서 휴진해 왔지만 자기 집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야영하다가 다시 갔습니다. 그래서 명령을 행하다가 죽었습니다. 그 우리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야의 아내"라고 쓰며 너무나 약은 다윗의 죄를 지적하는 동시에 죽은 우리야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점일획도 틀림 없는 분이시죠.

그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두려움이 되기도 해야 됩니다.

2. 다윗의 회개

2-1. 즉각적인 고백

이제 나단이 해야 할 일 다 했습니다. 나단이 하나님께 두려움 영광을 받았습니다. 전했습니다. 이제 공이 누구에게 넘어옵니까? 다윗에게 이제 다윗이 듣다가 "저놈을 당장 잡아 시켜라, 매우 쳐라, 목을 쳐라" 뭐 이렇게 되든지, 아니면 회개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 입장에서, 누가 보더라도, 만약 그 상황에서 왕궁의 신하들이 있었다면 신하들 입장에서 이것을 믿고 싶겠습니까? 우리의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우리의 왕이 정말 그랬다고 믿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합니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고백합니다. 순순히 고백합니다. 이게 다윗의 진짜 훌륭한 점입니다. 이렇게 죄의 지적을 받고 곧장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사회적 지위와 위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 "몰랐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제가 집안을 잘못 본 것 같아서, 저희 집사람이 그랬는데, 나중에 제가 보니까 그랬더라고요.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면 죄송합니다.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면 죄송합니다." 뭐 이런 소리나 하지, 정확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가장 최고의 자리인 왕이었는데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했습니다.

2-2. 시편 51편의 절절함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 있습니까?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윗이 이렇게 죄를 회개하고 인정하고, 지금 여기서는 이렇게 그냥 넘어가지만 시편에서는 절절하게 눈물을 흘립니다.

시편 51편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단에게 책망 받고 난 이후에 지은 시입니다. 죄악을 지워 달라고 부탁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매년 4월 며칠, 그날은 내 인생에서 깨끗이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다, 그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이제 정신 차리고 나니까, 2절도 볼게요. 2절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왜냐면 이제 정신 차리고 내가 내 죄를 측면해 보니까 추락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단이 그 손으로 "당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막 생각나면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고, 얼굴을 어디 둬야 될지를 모르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지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9절 보십시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 내 죄를 보고 있다는 것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하나님 내 죄를 들여다보지 마시고 제발 얼굴 좀 돌려주세요. 부끄럽습니다."

그다음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왜 이런 기도를 할까요? 왜 "나를 쫓아 내지 말아 달라"고 하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일까요? 사울을 봤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죄 짓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봤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서 떠나니까 악령이 왔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사역이 뭡니까? 악기를 연주해서 악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미치광이가 되고, 나중에 결국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 신접한 여인에게까지 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를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내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여기 본문에서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시편 51편을 보면 여기서 절절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한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윗의 회개를 보려면 시편 51편 아니라곤 읽어보시고, 아, 정말 이 심정을 우리가 한번 느껴 보셔야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회개하셔야 됩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십니다.

자, 나단이 말합니다.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뭐 간단하죠. 구도, 사람도 죽이고, 간음 죄도 범하고, 십계명 세 가지 죄를 범했는데, 회개하고 용서하고 끝, 이렇게 해서 해피엔딩이 되어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러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뒤처리가 남아 있습니다.

3. 죄의 책임

3-1. 세 가지 책임

회개한 다윗이 용서는 받았지만 책임은 져야 합니다. 앞으로 다윗이 지고 가야 할 죄의 무게가 세 가지 있습니다.

10절,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으니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첫 번째,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의 집에 앞으로 칼질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이대로 됐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다윗의 형제들이 그 칼에 죽고 죽이고, 부모로써, 아버지로써, 가족으로서 그 집안에서 칼이 항상 나무란다는 사실은 얼마나 불안하고 염려 됩니까? 실제로 자녀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면, 이것은 부모로서 감당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11절, "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다윗은 은밀한 중에 밧세바를 빼앗아 동침했습니다. 그런데 네 이웃들은 네 아내를 백주에 빼앗아 동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됐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때 아들 압살롬이 예루살렘 성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급하게 도망간지라 후궁들을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후궁들이 왕궁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그때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가 압살롬에게 말합니다. "압살롬이시여, 정말 이 성을 당신이 차지했단 표징을 보여야 되는데, 왕의 후궁들과 동침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 성이 당신의 성이 됩니다." 그렇게 합니다. 이건 진짜 비극이고 부끄러운 일이고,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윗에게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세 번째,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에게서 나는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라." 밧세바가 다윗 가운데 임신했습니다. 그 아이가 죽을 것이다.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깁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죄를 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뒤끝 있게 하시는가? 왜 이렇게 하실까요?

3-2. 흔적을 남기시는 이유

죄는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그 사람이 지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흔적조차 다 없애 주어 버리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또 그런 죄를 짓습니다. 인간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의 흔적을 내 몸에 새겨 놓아야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용서받은 자로써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정탐꾼 사건이 나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부화뇌동해서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발 살려 달라"고. 하나님이 "사한다, 알겠다, 내가 이 기도를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용서는 하시죠. 그러나 40일 정탐 한 것을 하루를 일 년으로 삼아서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방황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40년 동안 그들이 짊어지고 가게 하셨다니까요.

우리가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너무 둔감합니다. 왜냐하면 죄 짓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니까요. 그런데 내가 죄를 지으면 죄는 내 몸에 짓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도 상처가 남습니다. 그 사람이 혹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있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상처받아서 괴로워한다면 그 책임은 내가 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내가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가르치기 전에 자녀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과 함께 책임도 함께 말씀하셔야 됩니다. 다윗이 얼마나 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평생 동안 괴로워했는가, 그의 가정이 얼마나 그것 때문에 풍파를 만났는가, 그것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무서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려면 짐승을 잡아야 되고, 짐승의 피가 흘러야 되고, 그 피를 흘렸다는 건 그들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회사나는 고통을 지게 하셨고, 땀 흘려 수거하는 고통을 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 몸에 새겨져야 되니까, 그래야 죄를 두려워 하니까요.

그래서 죄는 안 지어야 합니다. 절대로 지으면 안 됩니다. 죄 지었더라도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계속 진도 나가면 안 됩니다. 시험이 올 때 흘려보내야 합니다. 항상 교훈 삼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윗의 회개가 진심이었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4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아들을 낳음에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첫째 아들 죽고요, 다시 동침해서 둘째를 낳았는데 그가 솔로몬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징표입니다.

이제 다윗의 달라진 모습 보십시오. 29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것을 쳐서 점령하고..." 이제 자기가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게으르게 왕궁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는데 다윗이 나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일을 겪고 이제 다윗은 양들과 함께 있기로 다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들과 함께 나갔습니다. 이제 다시 목자 정체성을 회복한 것입니다.

4. 암논과 다말

4-1. 복잡한 가족관계

이제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죄에 대한 책임 중 마지막 책임인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아이가 죽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두 개가 남았습니다. 하나는 칼, 두 번째는 백주대낮에 내 아내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침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일에 대한 서막이 열리는 것입니다.

암논과 다말 그리고 압살롬, 암논과 다말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 말씀드리기 전에 사무엘하 3장 2절에서 5절까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지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사람 이름까지 외울 필요는 없고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아비가일 아시지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이제 압살롬과 암논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걸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여기까지 보십시오. 엄마가 다 다릅니다. 아들이고, 엄마가 다 다릅니다.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여섯 명의 아들이 있는데, 여섯 명을 낳은 여인들이 다 다릅니다. 자, 이게 지금 화약고가 된 것입니다. 여섯 명의 아들이 있고, 그중에 사고로 친 아들이 첫째 아들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이거든요. 그런데 이들을 낳은 여인들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 아들들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엄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외척 세력들이 막 궁중 정치에 관여합니다. 누가 왕이 될까? 다윗의 뒤를 이어서.

지금 여기에 또 부가 더해집니다. 다윗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누구입니까? 우리야까지 죽여 가면서 쉽게 명령까지 범해 가면서 지키려 했던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밧세바 하나를 나았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 미갈, 그러니까 아내가 몇 명입니까? 여덟 명입니다. 거기다가 마지막에 다윗의 말년에, 진짜 말년에, 다윗이 몸이 차서 또 아비삭이라는 여인을 데려옵니다. 아비삭까지 아내로 치면 다윗의 아내가 몇 명입니까? 아홉 명입니다.

"누가 왕이 될까?" 관심사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형제들, 그 혈족들, 그 왕자들의 외할아버지, 외척들, 삼촌들, 이런 사람들이 거기에서 붙어서 기생하고 세력 다툼하고 암투하고 있는 것들이 그 안에서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한 남자와 한 여자, 한 가정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대로 살지 않으니까 항상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 생길 일을 우리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왜 이러냐"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 야곱이 아내가 네 명입니다. 아들이 열둘이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을 자초한 이는 바로 다윗입니다.

암논과 압살롬,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까지 지금 여기 이렇게 막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한번 보고 들어간 것입니다.

13장 1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어..." 압살롬은 셋째 아들이라 그랬습니다.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큰아들, 첫째입니다. "그를 사랑하니라."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것입니다. 지금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처녀인 고로 암논이 어찌할 수 없는 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우라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그 멈춰야 합니다. 그 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게 자기 관리인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4-2. 간교한 친구 요나답

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 잘 사귀어야 합니다.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심히 간교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답이라는 친구, 심히 간교한 자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나답이 꾀를 하나 알려 줍니다. "아픈 척 해라. 그리고 왕께 구해라. 큰아들이 아파서 죽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병문안 오시면, 다말이 와서 제게 과자를 만들어서 입에 넣어 주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한번 해 보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누가 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옆에 누가 있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심히 간교한 자"라, 유유상종이라고 서로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암논이 그를 가까이 했습니다. 요나답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나단이 있어서 그의 영혼을 살려 줬는데, 지금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는 간교한 자가 있어서 그의 인생을 사지로 몰아 가고 있습니다.

4-3. 분별력 없는 다윗

자, 그래서 진짜 다윗이 왔습니다. 6절,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귀싸대기를 때려 가지고 "정신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서 운동이나 하라"고 쫓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거짓 병이고, 누가 보더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7절, "다윗이 사람을 다말의 집으로 보내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하니라."

베드로전서 5장 8절 한 번 볼게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요, 우는 사자같이 배고파서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거기 다윗이 딱 걸려든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마귀는, 사탄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나를 그쪽으로 끌고 들어가서, 나를 악한 사람들의 자리로 물고 들어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이용당하면, 잘못하면, 이 악한 이에게, 다윗이 이용당했습니다. 악한 이에게. 그래서 왕명으로 다말을 명해서 갔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암논이 다말을 범해 버렸습니다. 이런 일에 다윗이 도구가 되어 준 것입니다. 이용당해 버린 것입니다. 왜요?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으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았고 분별력이 없었으니까요. 항상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해서 그냥 속절없이 이용당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가 왕명으로 다말을 보내 가지고 그 일을 당하고 겪게 만든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인데, 뻔한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다말을 범한 후에 달라진 암논의 모습. 15절,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아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마음보다,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니죠. 육체적으로만 탐했던 것입니다. 진짜 사랑했으면 함부로 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했다 손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 이것을 왕이 들었습니다.

19절 보십시오.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사건의 전말을 들은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1절,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노하게만 했습니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하게만 했습니다. 분노만 했습니다.

"저놈을 매우 쳐라, 내쫓아라, 왕자의 권위를 빼앗아라, 왕자의 직책을 다 빼앗고 쫓아버려라" 이렇게 하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도 성범죄자니까요. 자기도 왕자들 앞에서, 자기도 아들들 앞에서 할 말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제대로 못 살았으니까요. 바로 엊그저께 돌아서서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 한 여인에게 눈이 멀어서 있어야 될 자리에 가지 않고, 전쟁하는 자리에 가지 않고, 그 여인을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할 말이 있습니까? 자식들한테.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야곱이 했던 행위하고 정말 비슷합니다. 창세기 34장 5절, 35장 22절 보십시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세겜, 세겜 추장의 아들이 야곱의 딸 디나를 더럽힙니다. 겁탈합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35장 22절,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이스라엘은 야곱입니다.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아들이 자기 침상에 올랐습니다. 자기 첩과 동침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 아닙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도 아들들에게 영적 권위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윗에게도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5. 압살롬의 복수

5-1. 다윗의 무기력

자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하고 넘어가셔야 될 게 있습니다. 사탄은요, 우리에게 "넌 뭐 그렇게 잘났냐, 난 네가 이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안다" 하면서 자꾸 우리의 약한 점을 공격합니다. 자꾸 합니다.

그런데 다윗 보십시오. 하나님과 다 해결했습니다. 회개했고, 하나님 용서하셨고, 죄에 대한 책임 받았습니다. 아들 죽었고, 앞으로 살면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다 받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를 여전히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면 왕으로서 하나님과 결산 끝났습니다. 그 다음은 담대하게 그 모든 일을 해 가야 합니다. 자기가 과거에 어떤 인간이 어땠는지, 그것하고 상관없이 하나님과 내 계산은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는 왕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살아서 됩니까? 당연히 엄격하게 다스리고, 당연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들이 이야기하겠지요. "아버지 뭐 잘났습니까?" 그 이야기 또 들어야 합니다. 들을 만하면 듣고, 치욕과 수치를 받을 만하면 받아야지요. 그러나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담대하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잡고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넌 뭐가 잘났는데, 너도 옛날에 그렇게 했잖아. 그러니까 그냥 입 다물고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네 과거에 한 일은 사람들이 캐묻지 않으니까. 그냥 그걸로 묻어 넘어가니까. 세월이 해결한다 하고 쉬쉬하고 있어라." 그렇게 해서 가만히 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는 그런 사탄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결탁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얼마나 영악한가.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욕먹더라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창피한데. "아버지 뭐 잘났습니까?" "그래, 나 못났다. 미안하다."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네가 한 일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그리고 멀리 내쫓아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말의 오라버니, 같은 배에서 난 셋째 아들 압살롬이 해결합니다. 아버지가 하지 않으니까요.

5-2. 2년의 침묵

그래서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22절,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압살롬이 아주 무서운 사람입니다. 얼마 동안입니까? 2년 후에. 2년 동안 입을 딱 다물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23절, "2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일이 있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양털 깎는 날은 잔치날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셋째 아들이니까 위로 형 둘과 아래로 동생 될 까지 다 청하는 것입니다. 왕도 청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나는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뭐 크게 가서 뭐 하냐, 그냥 형제들끼리 가서 재미있게 놀아라" 하고 보내줬습니다.

그랬더니 사고가 벌어집니다. 28절,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함에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암논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형제들에게 칼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집에 이제는 서막의 시작입니다. 암논이 죽었습니다. 누가 자초한 것입니까? 물론 암논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해결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사탄은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31절,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서 있는지라." 이렇게 하면 뭐합니까?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버렸는데.

37절,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이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년쯤 지나니까요, 다윗의 마음에 이제 죽은 아들 암논은 어쩔 수 없고, 멀리 간 압살롬이 그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끝났고, 그 마음을 요압이 눈치챈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한 여인, 드고아의 여인을 데려다가 연기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것을 알고 압살롬을 불러들이게 합니다.

6. 압살롬의 귀환

6-1. 잘못된 사면

21절 보십시오. 14장 21절,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를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요, 자 이스라엘의 법전에 도피성 제도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 우리 새벽기도 때 민수기 되고 명기도 하는데,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세 군데, 요단 서편에 세 군데입니다. 도피성의 목적이 뭡니까? 부지중의 살인입니다. 산에 가서 도끼로 도끼질을 하다가 갑자기 도끼 날이 빠져서 날아가서 사람을 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를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가족, 형제, 친구들은 화가 나니까 이 죽인 사람을 앙갚음을 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고 피의 보복을 하려 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도피성을 만든 것이거든요.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 압살롬은 의도적인 살인입니다. 계획된 살인입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먼 나라 그술의 달매에게로 가가지고 거기서 3년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인다면, 왕이 법을 어겨서 됩니까? 이렇게 왕이라고 함부로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특별 사면을 내려서 사면을 하려거든 한 가지 확실하게 해야 할 게 있습니다.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를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고, 백성들 앞에서 회개하고, 왕이 그를 데려올 수 있는 철저한 명분을 가지고 불러와야 합니다. 그냥 아들이 그립다고, 애가 그냥 데려오라 해서 와서 됩니까?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 자체가 왕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데려오라 했습니다.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24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이건 또 뭡니까? 데려왔으면 만나야지요. 만나서 꿇어 앉혀 놓고 철저하게 회개를 받든지, 벌을 지적하든지, 죄를 지적하고 벌을 내리든지 그래야 되는데, 그냥 보내라 그랬습니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6-2. 분노만 키우다

얼마 동안입니까? 2년 동안. 이 2년 동안 압살롬은 뭘 느꼈을까요? 이 2년 동안 그 사람들 많은 수도 예루살렘에 살면서 그의 집에 살면서 수군거렸을 것 아닙니까? 백성들은 수군거릴 것 아닙니까? 왕에게 용서받지 못한 아들이라고, 도피성에도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여기 왔다고. 죄가 있으면 죄를 벌하고, 용서할 만하면 용서하고 해결해 버려야 되는데, 이 2년 동안 압살롬에게 화만 돋군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한번 봅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하는 게 나쁜 것입니다. 부모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되는데, 철저하게 죄를 지적하고, 나무랄 것 나무라고, 잘한 것 잘했다 하고, 사면해야 되면 해야 되고, 그런 절차대로 해야 되는데, 그것 하지 않고 그냥 애를 노엽게 만든 것입니다. 분노만 자꾸만 일으키게 만든 것입니다.

그 분노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왕위 찬탈로 이어지는 것 아닙니까? 압살롬이 똑똑한 아들이니까, 이게 화를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풀 것은 빨리 풀고, 나무랄 것은 빨리 나무라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빨리빨리 처리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다윗이 왜 그랬을까요? 이것도 밧세바 죄 때문입니다. "나는 뭐 그리 잘났냐, 내가 뭐 그리 잘났는데..." 다윗의 일생을 보면 뒤로 갈수록 결단력이 자꾸 희미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요.

자기를 만나 주지 않으니까 압살롬이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요압이 놀라서 달려오니까 "왜 왕을 만나게 해 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요압이 어쩔 수 없이 왕을 만나게 해 줍니다.

32절 보십시오.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하는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이것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합니까? 압살롬은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해결 생각이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만든 게 다윗입니다. 불러서 그 자리에서 나무랐어야지요. 그 자리에서 어쨌든 잘못된 방법으로 형을 죽였으니까, 의도된 살인을 했으니까, 법이 없겠습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됩니다. 재판을 하든지.

그런데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릅니다. 불렀습니다.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회개도 없고 용서도 없습니다. 압살롬은 회개하지 않았고, 다윗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형식뿐인 것입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이제 여기에서부터 심각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단을 통해 책망받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무섭게 물으셨습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가 죄 짓지 말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옵소서. 매 순간 깨어 있게 하시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악한 사탄 마귀의 밥이 되지 않도록 주의 오리에게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변에 나단 같은 훌륭하고 좋은 조력자들을 많이 두게 하시고, 악한 사탄이 우리의 과거와 연약한 부분을 지적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면 담대하게 우리 앞에 닥친 상황을 담대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결단도 용기도 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윗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 가정이나 일터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언제나 명확하고 명쾌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