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 노년의 다윗 / 전체녹취

사무엘상하 특강 18 - 노년의 다윗 (삼하 21-24장)

사무엘하 22장 2-3절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오늘은 사무엘상하 성경공부 마지막 시간입니다. 열여덟 번째 시간으로, 사울 이전 사무엘부터 시작해서 사울 왕의 시대를 거쳐 다윗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다윗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까지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다윗 이야기를 보시면서 아마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영웅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었던 다윗,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다윗이 이렇게 초라하다니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인간은 다 똑같이 타락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죄인이라는 점이고, 그 회개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지금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윗을 통해서 깨닫고 느끼는 것, 그 말년의 다윗까지 살펴보면서 나와 크게 다를 바 없구나, 나도 역시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것을 살펴보시고,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새롭게 힘을 얻어 함께 전진하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고,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하고 돌아오니 세바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세바의 반란까지 다 진압을 했습니다. 이제 그러면 다윗의 말년이 좀 편해져야 되는데 과연 그의 말년이 편안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그의 말년에 끝까지 고생하고 징계받았고, 또 흐려진 판단력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끝까지 넘어가지 않으시고 징계하시고 다루십니다. 오늘은 21장부터 24장까지를 보겠습니다.

1. 기근과 기브온 사람들

1-1. 삼 년 기근의 원인

다윗의 땅에 찾아온 기근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21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함에"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흘려 읽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왕이잖아요. 왕인데 그냥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목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왕이잖아요. 그래서 목자 왕이신 하나님과 양들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의 눈은 항상 양들에게 가 있어야 되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어야 됩니다. 눈은 양 떼를 보고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근이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삼 년 동안 계속 지속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삼 년 동안 기근이 오니까 그제서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당대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 해 기근이 오면 왕이야 안 먹고 살겠습니까? 왕이야 왕이니까 누가 왕을 굶기겠습니까? 옛날 우리나라 왕들도 그랬잖아요. 백성들은 기우제를 지내고 먹고 못살고 굶어 죽어도 왕이야 뭐 진수성찬 회 수라상 받아먹고 하루 세 끼 먹고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면 안 되잖아요. 목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기근이 오면 백성들이 가장 괴롭지 않습니까? 첫 번째 기근이 왔을 때 예민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봤어야 됩니다. 간구해야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이 나라에 일어나는 겁니까?" 옛날 다윗 같으면,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 같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큰일을 겪고 그러면서 판단력이 갈수록 느려지고 흐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삼 년 동안 기근이 오니까 그제서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계속 경고를 주시고 징조를 주시고 문제의 싹들을 주시거든요. 그때 아주 작은 일이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 물어봐야 됩니다. 그때 해결해야 됩니다. 그 문제가 있을 때 그때 해결해야지, 이게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오 년이 되고 삼 년이 가고 사 년이 되고, 그제서야 간구하고 그제서야 기도하면 그때까지 삼 년 동안 고통을 다 겪어야 합니다. 마음 고생하고 몸이 고생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지금 다윗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1-2. 사울의 죄와 그 결과

물어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라 하시니라" 사울 때 일어났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지금 다윗 말년에 이것을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속한 것이니까 우리가 왈가왈부할 계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이렇게 간구하기만 하면 답을 주시고 응답하시는데, 다윗의 인생이 항상 그랬잖아요. 계속 그런 패턴이었잖아요. 그런데 삼 년 동안 아무 간구도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이유를 물어보니 하나님이 이 이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여 살려주었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우리는 이제 성경을 좀 배운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떠오르는 사건이 뭐냐면 여호수아 9장 사건이 떠올라야 됩니다.

여호수아 9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시면 이렇습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군해서 들어왔죠. 첫 번째 성 여리고성 전투를 승리했습니다. 두 번째 아이성 전투 한 번 실패했지만 두 번째 다시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가나안 칠족속이 다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 족속, 기브온 족속이 가나안 칠족속에 연합되었다가 이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거짓으로 자기를 꾸밉니다.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오고 다 헤어진 신발을 신고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이스라엘 진영을 찾아옵니다. "우리는 멀리서 왔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얘기를 듣고 당신들과 조약을 맺고 화친하려고 왔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면 자기들도 소문을 다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가면 가나안 칠족속과 화친하지 말고 무조건 다 쳐서 멸하라, 그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온 척하고 "우리는 원래 가나안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9장 14절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기도 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하고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조약을 맺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사실은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속인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조약이 무효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조약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조약이 오백 년 동안 유지되어 흘러온 것입니다. 그 조약이 오백 년 동안, 조선 왕조 오백 년인데, 오백 년 동안이나 이 조약이 계속해서 흘러와서 기브온 사람들이 그 땅에서 그냥 잘 먹고 잘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민족주의자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열심이 있으니까 사울은 민족주의자입니다. 마음속에 뜨거운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경내에 저런 이방인들이 들어와 있을 수가 없다,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여호수아가, 과거의 자기 조상들이 그 어떤 조약을 맺어 두었는지 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을 싹 청소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문제 해결을 다윗의 시대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삼 년 동안 기근을 허락하신 것이고, 이제 다윗이 문제를 알았잖아요.

1-3. 기브온의 요구와 해결

다윗이 남아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서 묻는 것입니다. 상의하는 것입니다. "돈을 줄까? 금을 줄까? 보상을 해줄까?" 사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 사무치는 것입니다. 가슴에 칼 스미듯 한이 너무너무 사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은과 금으로 지금 논쟁할 생각이 아닙니다. 사울의 자손 중에 일곱 명을 내주시면 그들을 달아 죽이면 우리 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들어줍니다. 사울의 자손 중에 일곱 명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내줍니다. 결국 그 일곱 명의 피 값으로, 그들이 죽임으로 인해서 그 이스라엘 나라의 기근이 끝이 납니다.

사실 다윗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자기 땅 백성들 아닙니까? 사울의 후손들이고 결국 요나단의 친지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을 달아 죽임으로 나라의 기근을 그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 입장에서는 그 일곱 명의 시신을 잘 수습해서 요나단과 사울과 함께 그 묘에 안장해 줍니다.

21장 13-14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옴에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그 후에야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교훈들이 많이 있는데, 첫 번째는 지도자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삼 년을 미룬 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많이 겪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소수 민족들, 약한 사람들, 그들과 맺은 모든 언약에 신실하게, 진실하게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철저하게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약속을 했다, 누구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우리는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신실하게 갚고 성실하게 지켜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무시한 죄로 그 후손들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2. 다윗의 감사 찬양

2-1. 나의 하나님

사무엘하 22장은 시편 18편과 똑같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똑같습니다.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22장이 똑같습니다. 물론 중간에 조금 단어가 다른 것이 있긴 하나 거의 같습니다.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시던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니라" 이 말은 인생 말년에 이제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모든 것이 다 평안해졌을 때의 이런 말입니다.

사실 다윗의 일생, 그의 인생 말년에 돌아보면 후회가 많겠습니까, 자부심이 많겠습니까? 양자가 공존할 텐데, 아마 우리도 그렇잖아요.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이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잘한 것은 뭐 그냥 흘러가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잘못 살아서 인생이 이렇게 되어진 것들, 특히 밧세바 사건이 다윗에게는 일생에 가장 큰 오점이었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흘러오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윗은 그런 것 하나님 앞에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너무 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얘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노래로 사무엘하 22장과 시편 18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아까 우리가 시작에서 읽었는데, 여러분 중요한 것들이 이런 것입니다. 반석,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반석의 하나님,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등등의 물체들, 사물들, 상징들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상징물, 대명사 앞에 나와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의"라는 말입니다. "나의" 보세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반석의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전부 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잖아요.

사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성경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면서 평생 동안 성경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다윗의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요셉의 하나님, 사무엘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제자들의 하나님, 누구 누구의 그리스도, 다 성경에 나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는 객관적인 그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야 되거든요. 내가 경험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았더니 정말 다윗의 하나님, 그 구원의 하나님이 나에게도 구원을 주셨더라, 높은 망대 하나님 나를 높은 망대로 들어 올리시고 나를 천한 곳에서 높은 곳으로 건져 올리셨더라, 이렇게 우리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인생 말년에 신앙생활을 사십 년, 오십 년 하고 이제 하나님 나라 가기 직전에 그쯤 되어가지고 우리 인생을 한번 돌아볼 때쯤 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객관적인 타인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 사람의 아름다운 결과물이거든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성경의 하나님을 내가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내가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체험하고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내가 다윗이 아니고 내가 요셉이 아닌데요. 그런데 성경은 다윗의 길을 보여주고 있고, 요셉의 길을 보여주고 있고, 성경 위인들의 길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힌트를 주고 제시하고 있잖아요. 그 길을 따라가면 우리도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요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살았는데 "나의 뭐뭐"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면, 전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고 내 부모의 하나님이고 성경에 나오는 다른 위인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 정말 허전한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 가방만 들고, 성경책에 먼지만 묻히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기적으로 한번 해보십시오. 주기적이라는 말은 일 년 끝날 때쯤 되면 우리 교회에서 기도 카드 쓰잖아요. 기도 카드 들여다가 내년도 기도제목 두 장씩 써서 하나는 가지고 있고 하나는 교회에 내고 하잖아요. 그때 일 년 동안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한번 써보세요. 내 인생에 올 한 해는 내가 이런 하나님을 느꼈다. 일 년 동안 막내 송년회 쫓아다니지 말고, 송년회 쫓아다니고 친구들하고 밥 먹으러 다니고 뭐 이런 것 하지 말고, 한 일주일 정도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십이 월 말 되면 특별새벽기도회도 하잖아요. 그때 기도하면서 일 년 동안 나의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었는지를 한번 써보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되면 내가 큰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넘어가지 않고 징계하신 하나님, 뭐 그런 하나님도 나올 수 있겠지요.

다윗이 일생 동안 자기를 돌아보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아니기 때문에 다윗이 왜 높은 망대라고 표현하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요. 사연이 있겠죠. 이렇게 말하는 사연이 있겠죠. 이유가 있겠죠.

2-2. 부르짖는 자의 삶

다윗이 경험한 구원의 순간을 어떻게 노래합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5절을 보니까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שְׁאוֹל)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내가 영웅적으로 뭐 이렇게 했다"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아뢰며 아뢰었더니" 이것이 다윗의 아주 전형적인 삶이거든요.

다윗이 성공했던 비결은 이것입니다. 아뢰고 아뢰었으니, 기도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가 뭐 힘이 있고 영적인 능력이 있어서 이런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아뢰고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이르렀도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솔직한 고백 아닙니까?

다윗이 이럴 때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실패했을 때는 기도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을 때 "생각했다"고 그랬잖아요. 생각 많이 하다가 기도하지 않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잖아요. 밧세바 사건 때 기도했다는 얘기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아뢰고 아뢰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고, 아뢰고 아뢰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8절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이 말은 앞에 말을 다 받습니다. 환난이 있어서 기도했더니, 환난이 있어서 기도했더니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17절 "그가 위에서 손을 내밀사 나를 붙드시며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자기 일생 동안 이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을 나도 경험하려면 아뢰고 아뢰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아주 단순하죠. 다윗의 일생은 복잡한데 단순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7절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7절이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요. 깨끗한 자가 누구고 사악한 자가 누굽니까? 깨끗한 자가 다윗이고 사악한 자가 사울입니까? 깨끗한 자가 다윗이고 사악한 자가 압살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22장에서 고백하는 것은 순전히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자기 일생의 고백입니다. 깨끗한 자도 다윗이고 사악한 자도 다윗입니다. 깨끗할 때도 있었고 사악했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깨끗했을 때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셨죠. 사악했을 때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그렇게 하셨잖아요. 그가 밧세바 사건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거슬러서 그를 얼마나 세게 치셨습니까? 경험했잖아요. 그래서 이 세 가지 구절은 다윗이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복과 저주가 원래 "너는 복받을 놈이야, 넌 원래 저주받을 놈이야" 이렇게 딱 갈려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앞에 갈림길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갈림길 가운데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주의 뜻에 따르는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 나에게 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요. 그런데 다른 길로 가면 거기에는 가시밭길입니다. 인생의 고난 길입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넓은 대로라서 갔는데 거기에는 사악한 짐승들이 많고 악한 자들이 많고 너무너무 힘든 길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똑같은 나인데 나한테 다중 인격이 있다니까요. 깨끗할 때도 있고 사악할 때도 있고,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할 때도 있고 기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할 때도 있고, 다윗이 일생을 살아 보니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의 분별력을 가져야 됩니다. 잠깐 멈추고 기도하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되는지, 내가 이 말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내가 이 행동을 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이것 정말 중요합니다. 만약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을 뱉어버리면 그냥 그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선악과가 있습니다. 선악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그렇게 얘기하죠. "선악과를 하나님이 왜 만들어 두셨는데" 자꾸 하나님 탓을 하죠. 그런데 선악과, 이것 말고 거기 눈길 안 주면 되잖아요. 안 먹으면 되잖아요. "거기 왜 그것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자꾸 쳐다보는 것입니까? 그러다가 그것 따서 먹고 죄가 들어와서 쫓겨나잖아요. 시험이 있는데 시험을 붙잡지 말라 그랬죠. 항상 우리 앞에 시험이 흘러다니는데, 시험을 흘려보내면 나는 깨끗한 자가 되고, 붙잡으면 사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너 선악과 따먹을 놈이야" 그렇게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운명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운명론으로 내모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이렇게 잘못된 것이지, 다윗이 선택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지, 운명론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선의 길이 있고 악의 길이 있고, 깨끗한 자의 길이 있고 사악한 자의 길이 있습니다. 매 순간 순간 순간 우리는 그 선택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흐르는 삶 속에서 선과 악의 선택, 옳음과 그름의 선택 가운데 좋은 길을 선택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 말입니다.

2-3. 온유한 자의 복

36절 한번 보시겠습니까. "주께서 또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온유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 다윗은 온유하다는 표현을 다른 시편에서도 또 하셨습니다. 시편 37편 7절과 8절, 11절 한번 보세요. 세 절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이런 자 때문에 불평이 많죠.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는데 거기에다 대해서 우리도 악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11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 땅 차지한다 그랬죠. 다윗이 사울에게 십수 년 쫓겨 다니면서 옷자락 또 물 병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안 죽였습니다. 온유했습니다. 땅을 차지했잖아요. 이스라엘 온 영토가 다윗의 영토가 됐잖아요. 주의 온유함을 배웠으니까요. 하나님의 온유함을 배웠으니까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 나오는데, 세 번째 복이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그랬죠.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작은 일에 분을 내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큰 그림을 그리니까요. 온유한 자나 원형한 자나 작은 일에 자꾸만 화내고 분내고 트러블을 하고 싸우고 이렇게 되면 큰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내편이 누가 생기겠습니까? 작은 일 크고 작은 일 맨날 다투게 되면 나 혼자 고립되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사탄 마귀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위해서 우리 힘을 비축하고 온유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땅을 차지할 수 있다니까요. 땅 좋아하시죠. 다들 이 땅의 땅, 천국의 땅, 다 우리 것이 된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왜 온유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기 인생의 고백 가운데 "내가 온유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라 했습니다. 사울 온유했습니까? 결단코 온유하지 않습니다. 어떤 땅도 빼앗겼습니다. 온유하지 않는 자, 다윗이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그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능력으로

40절을 보세요.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띄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능력으로 띠를 띄었다, 이 말씀 중요합니다. 전쟁을 하려면 장수들이 허리 띠를 딱 차잖아요. 평소에는 헐렁하게 있고 있다가 허리띠를 딱 차잖아요. 그런데 장수의 허리 띠를 띤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띠를 띄었다 그랬습니다. 누구의 능력입니까? 다윗의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윗은 항상 전장하러 나갈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띠를 띠고 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요, 첫 단추를 잘 꿰어서 그렇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첫 단추가 잘못 되면 그다음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첫 번째를 굉장히 잘한 것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가 사울이 자기 군복을 입혀 줬잖아요. 웬만한 사람 그것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공명심이 좀 있고 허세가 있는 사람, 공명심 허세 없어도 왕이 하사한 하사품인데, 그것을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저라도요, 왕이 주시는데 이게 어떤 건데, 큰 영광인데요. 그런데 왕의 갑옷을 거절하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띠를 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울의 갑옷을 입고 나갔으면 이 골목 저 골목 돌다가 팔 다리 다 꺾여가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띠를 띠니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일생을 회고해 보니까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5. 감사와 찬양

그래서 마지막에 어떻게 됩니까? 50절,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결국 자기 일생의 다윗의 마지막 방점이 무엇입니까? 딱 두 단어, 감사와 찬양입니다. 감사와 찬양.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이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일생의 다 마지막이야, "내가 통장에 얼마 남겨 놓았고 넌 뭐하고" 이런 좀 수준 낮은 얘기 하지 말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 일생을 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감사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러고 그냥 딱 하나님 나라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일생의 마지막이 다윗처럼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입니다. 징계받은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치고 징계하고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 고마운 것입니다.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를 가난하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힘들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광야 생활도 감사하고, 건져 주신 것도 감사하고, 감사하니까 찬양할 수밖에요. 그리스도인의 일생의 마지막은 딱 이것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은 뭐가 남겠습니까? 우리가, 사람들은 허무하다 하죠. 감사가 없으니까 허무한 것입니다. 찬양이 없으니까 허무하죠.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생 동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고, 나 같은 존재를 위해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여기까지 함께하셨으니까 허무하지 않습니다. 뻑차죠. 그 하나님 만나러 가는데 뻑차죠.

3. 다윗의 마지막 말

3-1. 다윗의 정체성

다윗이 이제 자기 마지막 말을 합니다. 23장 1절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며 높이 세우심을 받은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이 자기 정체성을 세 가지로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그 앞의 두 가지를 보세요. 높이 세우심을 받은 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 수동형입니다. 높이 선 자가 아닙니다. 높이 세워진 자입니다. 누구에 의해서요?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누구에 의해서요?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노래 잘하는 것, 그것은 자기 사랑을 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시도 잘 쓰고, 다윗이 이런 자기 정체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마지막에 돌아보니까 날을 세워 준 이는 하나님이셨고, 나를 기름 부어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셨거든요. 우리가 로마서 공부할 때 1장에서 공부했습니다. 바울이 그랬죠. 바울이 자기 정체성을 얘기할 때 "택정함을 입었다"고 그랬거든요. 자기 스스로 손들고 "제가 사도 되겠습니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것이거든요. 다 수동태입니다.

우리 인생, 하나님이 나를 택한 것이잖아요. 내가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 나를 택하셨는지 하나님 나를 택한 것입니다. 나는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정말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많고 많은 인류 가운데, 지금도 그리스도를 모르고 지금도 하나님을 모르고 허우적대는 수많은 영혼들 중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 그것 하나로도 우리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택함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높이 세워 주셨습니다. 모든 민족 위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게으르지 말라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살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불평이 많습니까? 이렇게 불만이 많고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고 기름 부어 주신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년의 고백입니다.

3-2.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이것은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즉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다윗 같은 나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에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와,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다윗이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이런 찬란한 빛 같고 생명력이 샘솟아 나는 풀과 같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6절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다윗이 말하는 사악한 자는 어떤 자일까요? 고통이 와도 아뢰지 않는 자, 기도하지 않는 자, 자기 멋대로 하는 자입니다. 사울 보셨잖아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자기 멋대로 번제 드리고 그냥 전쟁으로 가버렸잖아요. 아말렉에 대해 명령하시길 진멸하라 그랬죠.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용병들을 먹여야 되니까요. 자기 좋은 것 다 취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가 사악한 자입니다. 다윗도 한때 사악했죠. 하나님 말씀대로, 목자 정체성을 잊었으니까요.

3-3. 햇 사람 우리아

다윗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8절에 보니까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뭐 그리고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39절 한번 보시겠습니까? 다윗의 용사 중에 이 사람도 있습니다. "햇 사람 우리아이니 다 합하여 삼십칠 명이었더라" 성경은 햇 사람 우리아를 잊지 않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다윗은 햇 사람 우리아가 눈에 가시였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말 좀 듣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동침하고 그냥 좀 자주지, 그럼 내가 이렇게 두렵지 않을 텐데" 다윗은 그래서 우리아를 죽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절대로 우리아를 잊지 않습니다. 예수님 족보에도 우리아가 나오잖아요.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반드시 기록됩니다. 사람은 다 잊으려 하고, 사람들은 우리가 세운 공을 자기 공으로 취하는 사람도 있고요.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람도 있고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몰라주는 사람도 있고, 그것 때문에 속상하잖아요. 열심히 했는데 왜 몰라주느냐고요. 교회에서 목사님이 몰라주고 장로님이 몰라주느냐고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혹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햇 사람 우리아를 기억하고 있다니까요. 다윗의 용사 중에, 다윗은 "햇 사람 우리아" 이름만 나와도 화들짝 놀랄 텐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텐데, 가슴이 철렁 떨려가지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절대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충성된 종이었으니까요. 햇 사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충성했고 자기 백성들에게 충성했고 왕에게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단코 그 사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4. 인구조사와 징계

4-1. 목자 정체성의 망각

24장 마지막 장입니다. 인구조사를 합니다. 다윗이요.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켜서, 그러면 다윗은 아무 죄가 없고 하나님이 격동시켜서 한 짓이니 다윗에게 왜 죄를 묻느냐 이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표현들, "하나님께서 뭐 누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더라,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더라" 등등의 이런 표현들을 우리가 이해하실 때는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고 이해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함께하셔서 우리가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아 이건 죄야, 이건 아니야" 분별력을 가지게 하시는데, 그런데 하나님 그냥 죄 가운데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고 울타리를 통해서 막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살다 그냥 갈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 욕심 가운데 그냥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것입니다.

조사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9절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더라" 백삼십만 명의 인구가 조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인구조사가 왜 죄가 되느냐, 성경의 인구조사가 딱 두 번 나오거든요. 민수기에 딱 두 번 나옵니다. 민수기에서 그것은 죄가 안 된 이유는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두 번 인구조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인구조사한 것은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목자 정체성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왕들이 인구조사를 할 때, 지금 여기 나오죠, "칼을 빼는 자가 백삼십만 명이라"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열한 지파에서 팔십만, 유다 지파에서 오십만 칼 빼는 자를, 왜 조사했을까요? 전쟁하려고 그랬죠. 하나님의 전쟁,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은 왕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자이니까요. 목자는 목자장의 명령을 듣고 양들을 전쟁터로 데리고 나가야 되잖아요. 목자장이 출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자기가 마음대로 데리고 나가면 양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습니까? 그것 목자로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셔야 전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쟁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그런데 자기가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자기 영토의 확장, 제국의 확장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됩니다. 심각한 죄가 되죠.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다윗이 목자 정체성을 망각하고 저지른 죄가 밧세바 사건 아닙니까? 심각하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아주 심각하게 다루셨잖아요. 지금 인생 말년에 또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2. 깨달음과 회개

그런데 다윗이 인구조사 해놓고 전쟁하러 가기 전에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큰 죄가 되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죠. 10절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오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전쟁한 적도 없습니다. 군인들 징집해가지고 갑옷 나눠주고 군사 훈련시키고 "아람을 치자, 모압을 치자, 에돔을 치자" 뭐 이렇게 출격 명령 내린 적도 없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만 딱 해놓고 그리고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없던 것으로 하면 되잖아요. 그냥 아무 일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하십니까?

12-13절을 보세요.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갑니다. "여호와께서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이제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보냈습니다. 세 가지 중에 세 가지를 고르라, 하나를 선택하라. 칠 년 동안 기근 너무 길지요. 석 달 동안 쫓겨 다니는 것 이젠 지겹습니다. 압살롬한테도 쫓겨 다녔고 사울에게 쫓겨 다녔고, 그것도 깁니다. 사흘 동안 전염병.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만큼 목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가 하면 된다, 생각조차 하지 마라, 생각조차 품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4-3. 칠만 명의 죽음

그래서 다윗이 세 번째를 선택합니다. 결국 얼마나 죽습니까? 칠만 명이 죽습니다. 15절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전쟁을 하면 이보다 더 죽겠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전쟁이니까요.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이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심각한 재앙이 됩니다. 지도자 하나 잘못 세우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4-4.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이제 전염병을 멈춰야 되잖아요. 그래서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렇게 얘기해 줍니다. 18절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함에" 아라우나는 오르난이라고도 합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오르난, 아라우나, 모음을 어디에 붙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모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갔습니다.

22절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옵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나무에 대하여는 타작 기계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라우나가 부자였나 봅니다. 소도 있고 양도 있고 땔감도 있으니까요. "왕이 여기서 하나님께 사죄의 제사를 드리려고 하시니 마음껏 가져다 쓰십시오" 그랬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전심으로요.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금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타작마당을 다 샀습니다. 소도 샀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번제 의미가 무엇입니까? 희생이잖아요.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데 남의 등에 올라타서, 아라우나가 헌물한 것으로 거기에서 번제를 드린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희생이니까 철저하게 자기를 태워서, 다윗이 지금 자아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가 이렇게 늙어도 노욕이 남아서 인구조사하고 백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영토 확장을 하려고 큰 욕을 부리다가 칠만 명이나 죽어 나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를 다 태워서, 번제가 다 타서 하나님께 제사가 성립되는 것처럼 나를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는 제사로 번제로 나가는데, 그것을 어떻게 남의 등에 올라타서 드리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금 오십 세겔로 샀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4-5. 성전의 의미

그런데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과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한번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역대하 3장 1절, 창세기 22장 2절 한번 보세요. 역대하 3장 1절,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모리아 산 잘 보세요.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지금 여기 오르난의 타작마당,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 하나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했다 그랬죠. 우리는 모리아 산을 어디서 들어봤습니까?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모리아 산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막 복잡해지죠. 이제 이것 정리를 좀 해야 됩니다.

지금 여기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고, 그 옛날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 독자 이삭을 거기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왜냐하면 칼을 들어 찌르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급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말리셨잖아요. "여호와 이레" 번제 쓸 어린 양을 수풀에 걸린 채로 한 마리 거기 두셨잖아요.

그런데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그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이고,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 거기서요. 그것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입니다.

거기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거기에 솔로몬 성전이요. 그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다윗은 그곳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자기 죄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용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전이 어떤 곳이라는 의미입니까? 성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성전은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죄를 다 받아 주시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올라와서 회개하잖아요. 예배당에 나와가지고 회개도 하지 않고 사죄의 선언도 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산 죄를 하나님께 토설하지도 않고 그냥 돌아가면 그 예배 왜 드리는 겁니까? 주일 예배 올라와서 일주일 동안 내가 잘못 산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데, 그 예배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성전은 회개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는 용서가 있겠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곳이니까요. 성전은 내가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을 꽁꽁 묶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 와서 기도할 때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교회 와서 기도하면서 자기 욕심을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구하는지 몰라요. 자기 욕심을, 자기 욕망을, 기도라는 형식만 기도이지 이것은 욕망의 대잔치입니다. 기도가 잘 돌아보셔야 됩니다. 기도라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입 벌려가지고 그냥 "하나님" 하고 부르고 나서 다 던진다고 그것이 다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귀 막고 싶은 기도도 있다구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기도도 있다구요. 욕심을 묶는 곳이 성전이지, 풀어서 펼쳐버리는 곳이 성전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활시키고 그것을 하나님께 던지는 곳이 성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었던 모리아 산,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 다윗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번제 희생을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마당,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모리아 산. 이것으로 사무엘상하가 끝을 맺습니다.

결국 그 터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다윗의 일생에 다윗 전 생애는 자기 인생의 미완성이잖아요. 모티브이잖아요. 그런데 성전의 기초와 의미를 다윗이 다 다지고, 그리고 다윗의 하나님 나라가요.

사무엘상하를 통해서 아마 우리 각자가 받은 것이 다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사울에게 은혜받은 분 계실 테고, 사무엘에게, 다윗의 전성기에, 다윗의 재집권한 이후, 뭐 등등 다 다를 텐데, 한번 더 살펴보시고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돌이켜 보시고, 우리가 다윗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지 다시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통해 다윗을 통해 우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나의 무능을 보았고, 우리의 죄악을 보았고,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심의 덩어리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도록 도우시고,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말씀대로 변화되고 살아가고, 다윗처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주의 영광스러운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평생 신앙생활 해도 "나의 하나님" 한 조각도 고백할 수 없다면 그 신앙생활 다시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어지고 오래될수록 "나의 하나님"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이가 대로 늙어도 노욕이 남아서 여전히 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매일같이 신앙생활하고 나이가 들어가도 그럼에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인생의 죄악들과 욕망들을 떨치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성전을 세우시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죄의 용서를 허락해 주신다고 하셨고, 그곳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셨습니다. 주여, 우리의 정과 욕심 성전에서 못 박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 덩어리 성전에서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고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처럼 번제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게 하옵시고, 우리는 성전에서 사죄하고 용서받는 일이 있도록 도우시고, 성전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도 성전에서 있음을 깨닫고, 우리도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고 결국 부활의 영광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