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특강 3 - 사무엘과 사울 (삼상7-9장)
사무엘상 9장 1-2절 말씀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오늘은 사무엘서 말씀 공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사무엘과 사울'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상 7장에서 9장까지입니다.
1. 사무엘의 첫 메시지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고,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지경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다곤 신상을 치시니 다곤의 목이 부러지고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백성에게는 독종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냅니다.
벧세메스로 돌려보냈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에 들여다보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언약궤가 방치되다시피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사람들이 언약궤를 불길하게 여깁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 중심이 아닌 저 구석 어느 시골 마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전격적으로 등장합니다.
1-1. 마음을 다하라
언약궤가 돌아온 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사무엘이 등장하는 이 자리에는 엘리도 없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없습니다. 제사장 가문이 한순간에 모두 멸절당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지은 죄 때문에 그들이 다 죽고 멸절당했지만, 사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굉장한 부담입니다.
사무엘은 아직 연소한데, 엘리가 실로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노인이고 어른이니까 그래도 마음의 위로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죽었습니다. 그 집안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사무엘에게도 부담이고, 지켜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굉장히 불안한 일입니다.
게다가 언약궤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은 실로의 성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 위대한 모세 시절을 거쳐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가나안 땅의 모든 성읍들을 하나하나 정복했습니다. 그때부터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실로에 모셔놓고 사사시대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지금 없습니다. 실로의 성소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4천 명이 먼저 죽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회개하지 않고 그다음 나가서 3만 명이 또 죽었습니다. 3만 4천 명의 성인 남자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과부가 얼마나 생겼겠습니까? 아버지 잃은 자녀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완전히 초상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 상황에 사무엘이라면, 제가 그 상황에 영적 지도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완전히 초토화되고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렇게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위로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가정을 잃고 아버지가 없어지고 이 나라가 다 초토화되었는데, "우리 힘내서 한번 잘해보자" 하고 위로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의 첫 번째 메시지가 이랬습니다. 7장 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똑같은 말이 표현만 바뀌어서 두 번 반복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전심으로"라는 말이 있고 "마음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너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들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고 그저 겉모습으로만 실로의 성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거기 가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물을 받는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도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엘리도 자녀들을 책망하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공동체는 저 위의 대제사장 집안부터 다 영적으로 무너져 있으니, 그들에게 신앙 교육이란 있을 수 없었고 전부 다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첫 번째 메시지는 "마음을 세워라, 마음을 하나님께 합하여 돌아오라, 너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살펴야 하는데, 이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생각 따로, 말 따로 그렇게 가면 신앙이 이중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1-2. 우상을 버리라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이방 신들, 아스다롯, 이 가나안 땅에서 원래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들, 바알과 아스다롯, 이방 신들로 대표되는 이것들은 풍요의 신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농경의 신, 풍요의 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껏 계속해서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보면 지금까지 그들은 실로의 성소에 가서 하나님께 예물 드리고 예배도 드렸는데, 이방 신도 같이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의 실패 이유입니다. 결국 우상 숭배입니다. 이제 너희들이 제대로 다시 서려면, 블레셋을 물리치고 제대로 하나님 앞에 서려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우상을 버려라. 이 두 가지 메시지를 분명히 주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우리가 다시 가서 실로의 성소를 재건하자"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실로의 성소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왜 의미가 없습니까? 성막의 가장 핵심이 무엇입니까?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야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언약궤가 블레셋 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저 시골 구석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서 모셔오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그렇게 하고 남을 만합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지도자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가 저기 방치되어 있다. 레위 지파들이여, 가서 어깨에 메고 하나님 언약궤를 다시 실로의 성소에 모시고 오자"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습니까? 전쟁에서 패한 이유가 언약궤가 마치 우상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나가면 무조건 이길 줄 알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언약궤를 모셔온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 없이 언약궤 그것 갖다 놓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무엘은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은 지금 절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우선순위는 눈에 보이는 것 번듯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건물 짓고, 멋지게 차려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없어졌다고 그것부터 갖다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 마음의 문제, 우상을 제거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롭게 다시 일어서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첫 번째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2. 미스바의 회개운동
그리고 나서 이어서 계속 말합니다. 7장 5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여기 "온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다 모으라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들 그리고 성인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미스바가 어디에 있습니까? 실로와 미스바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미스바입니까? 왜 미스바에서 백성들이 모여서 회개운동을 했습니까? 실로에 가도 되는데 왜 미스바였습니까?
실로는 이미 실패한 곳입니다. 그리고 미스바는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입니다. 넓은 곳이고 많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미스바는 굉장히 실용적인 곳입니다. 어떤 상징성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미스바가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자리는 창세기 31장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 라반의 집에 갔다가 부자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때 라반에게 "저 이제 가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야반도주합니다. 자녀들과 아내들과 모든 가축들 다 데리고 야반도주합니다. 라반이 알았습니다. 뒤쫓아옵니다. 다시 데리고 가려고. 그런데 하나님이 라반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선악간 야곱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래서 라반과 야곱이 만나서 거기서 헤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미스바였습니다. 갈르엣이라고도 하고 미스바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 미스바는 어떤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 같은 장소는 굉장한 장소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했고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그런 장소도 아니고 그냥 특별한 역사성이 없는 미스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동체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그 미스바로 사무엘이 이스라엘 공동체 지도자들을 다 모아들인 것입니다.
2-1. 물을 붓고 금식함
그래서 그 미스바에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어떤 일을 합니까? 7장 6절을 보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며"라고 합니다.
물을 길어서 여호와 앞에 붓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왜 물을 길어서 부었습니까?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금식은 왜 했습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풍요의 신 아스다롯과 바알을 섬겼습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는 굶어도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으로 물을 붓고 금식했습니다.
2-2. 여호와께 범죄함을 고백함
그다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거기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입니다. 물을 붓고 금식했고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미스바는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지금 언약궤가 없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섬겼던 실로, 성소가 있는 실로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넓은 광장 같은 미스바에 모여서 그곳에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했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우상을 정리하고 이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밑바닥부터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서부터 새롭게 이스라엘 공동체가 집을 짓고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까? 이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려고 우리 마음속에 풍요의 우상을 섬겼던 것 다 제거하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겠습니다 하고 결단하고, 그리고 회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영적으로 무장되어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너진 건물 새롭게 세우고 잃었던 것 새롭게 가져오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3. 블레셋과의 전쟁
그런데 이렇게 영적으로 새롭게 무장하고 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합니다. 하나님께로 제대로 돌아갔으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그런데 복은커녕 블레셋이 또 쳐들어옵니다.
3-1. 온전한 번제
7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항상 첩자들을 여기에 두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공동체가 미스바에 뭔가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들이 이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쟁을 하려 하는구나 오해한 것입니다. 먼저 치려고 방백들이 모여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우리는 왜 이럴까? 하나님 앞에 모여서 회개하고 금식하고 우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하겠다고 했고 이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겠다고 결단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 믿음 생활할 때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 내가 칭찬받을 일인데, 잘했는데, 정말 제대로 살고 잘했는데 자꾸 어려운 일이 닥치면 힘 빠지고 마음이 상합니다.
7장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않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합니다. 이제 이들이 믿을 이는 사무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전과 좀 달라진 것이 보입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언약궤를 먼저 찾았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메고 왔습니다. 만약에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고 첫 번째 일성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실로로 다시 모셔오자" 그랬다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다시 언약궤 메고 나가자고 했을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눈에 보이는 우상 같은 것들, 언약궤, 이미 의미가 퇴색해 버린 것,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못 전해진 것을 사무엘은 모셔오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고 하나님 한 분만 기대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7장 9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온전한 번제, 번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헌신입니다. 다 태워서 드리는 것이니까 전부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블레셋이 전쟁하러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제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징집하고 전쟁하러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저들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지금 우리가 모였으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온전한 희생의 예배를, 헌신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3-2. 하나님의 개입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이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걱정입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집니까? 7장 10절,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온지라."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불안해 죽겠습니다. 사무엘은 전쟁 신경 안 쓰고 그냥 번제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배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포위망을 좁혀오고 북 치고 소리 지르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땅이 울립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니라." 이스라엘이 창 들고 칼 들고 활 들고 나가서 싸웠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 싸워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싸워주신 것입니다. 언약궤 없이 이겼습니다. 언약궤 모시고 오지 않아도 이겼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얻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언약궤가 결국 우상이었구나. 믿음 없는 언약궤 그것 모시고 나간 것, 그것이 우상에 다를 바 없었구나. 우리가 바알과 아스다롯만 섬긴 것이 아니고, 그것만이 우상이 아니고, 믿음 없이 그저 가방 들고 교회 왔다 갔다 한 것,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것이 우상이었구나. 헌금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 돌보시고 우리 가정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이 우상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 그것 다 우상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자리에서 명확하게 본 것입니다. 전심을 다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온전한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이 다 정리하시고 해결하셨습니다.
뼈대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척추가 똑바로 서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뼈대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한데 그 뼈대는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바로 서 있어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블레셋 아닌 더한 것들이 쳐들어와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문제입니다.
그래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기도하고 부르짖고 본질을 잘 지켜서 나가면 됩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교회가 본질을 다하면 그것은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도 교회는 성장하고 이런 상황에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온전한 번제 드리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나누라 했으니까 이웃을 열심히 섬기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이고 어려울 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도의 본질도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명도 블레셋 같은 어떤 일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 드리고 예배 잘 드리고 믿음의 중심, 마음의 중심을 잘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에벤에셀의 의미
이제 에벤에셀(אבן העזר)이 나옵니다. 에벤에셀, 너무 유명합니다. 지금 이 맥락에서 에벤에셀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4-1. 성지화를 경계함
7장 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אבן), 돌이라는 뜻입니다. 에셀(העזר),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도움의 돌, 도우심의 돌입니다. 돌이 얼마나 컸느냐, 돌이 어떻게 생겼느냐, 누가 조각하고 누가 깎았느냐, 이것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것을 기념하려고 돌을 하나 세우고 이 돌을 이름하여 에벤에셀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돌이 어디에 서 있습니까? 미스바에 서 있습니까? 센에 서 있습니까? 미스바와 센 사이에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미스바에 세우지 않았는가입니다. 미스바에서부터 지금 출발한 것 아닙니까? 미스바에서 회개, 각성 운동, 금식기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여서 거기서 하나님께 결단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한 분만 섬기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이 위대한 승리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고 미스바 땅 한가운데 큰 돌을 박아놓으면 기념이 될 만합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지금 우리로 치면 부산과 양산 사이 저 어디 어중간한 곳에, 말로 표현하기도 이상한 곳에, 찾아가 보기도 애매한 곳에 거기에 그냥 돌을 세워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우상 숭배의 기운이 사람들 마음속에 다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미스바를 성지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미스바에 그 돌을 세워놓았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성지순례를 열심히 오겠습니까? 그 돌이 닳아 빠져서 나중에는 흔적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그 돌가루 깨서 몸에 지니고 있으면 뭔가 영험한 기운이 일어나고 뭔가 좋은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 같다고 사람들이 난리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뭔가 형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그렇게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렇게 되었는데 미스바에 돌 세워 놓으면 백성들의 신앙 자체가 다시 병들 수 있습니다.
4-2. 인생 여정의 상징
두 번째 의미는 미스바와 센 사이는 우리 인생의 여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랬으니까 지금 우리는 미스바에서 센 사이 혹은 센에서 미스바까지 가는 여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구원받고 천국 가는 여정 중에 있습니다. 지금 길 위의 인생입니다. 매일같이 살아가는 길 위에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는 도움의 돌의 표시를 매일같이 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루 살면 또 하루 도움의 돌,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구나. 내가 천국 가는 여정까지 나를 오늘도 여기까지 도우셨구나. 매일같이 우리는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쌓아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무엘이 상징적으로 미스바와 센 사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 중간에 그냥 돌을 꽂아놓은 것입니다. 완성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 가는 여정 중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이에 세웠다"는 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7장 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돌보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우리 교회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우리 가정과 직장과 일터를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것, 사무엘 하나가 바로 서니까 이스라엘 공동체가 안전해집니다. 가정에 한 사람만 바로 서도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지키고 돌보십니다. 교회에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이 나라에 이런 교회가 몇 교회만 있으면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사무엘 같은 한 사람을 한나가 길렀습니다. 한나가 눈물로 에봇을 지어가면서.
7장 14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빼앗긴 땅 다 찾아왔습니다. 성소가 회복되어서 찾았습니까? 실로는 그냥 파괴되어 있는 채로 그대로 있습니다. 언약궤가 다시 돌아와서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이전의 패배와 지금의 승리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다른 것, 회개가 다릅니다. 그들은 4천 명 죽었을 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언약궤 가지고 와서 다시 전쟁하러 갔습니다. 이들은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자, 하나님은 전심으로 회개하면 받아주십니다.
또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입니다. 언약궤도 우상 숭배처럼 섬긴 것입니다. 여러 신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호와 앞에 물을 붓고 금식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 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정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위대한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에도 승리가 필요합니다. 매일같이 사탄에게 지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모델과 이 논리를 따라서 한번 살아보십시오. 매일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위대한 승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5. 왕을 요구함
이제 왕을 요구합니다.
5-1. 사무엘 아들들의 타락
사무엘 자녀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합니까? 사무엘도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 나이가 들어 늙습니다. 8장 1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기대가 됩니다. 사무엘 아들들이니까.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8장 3절에,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실 해석이야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해석보다는 상상일 뿐 성경은 어떤 더 이상의 이유와 정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이 정말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의 가정에 부끄러운 점을 성경이 가감 없이 그냥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 자녀들의 비행과 문제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것 없고 숨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처럼 위대한 사사가 그 자녀들에게서 계속 나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이렇게 되니까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5-2. 하나님을 버림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어떤 요구를 합니까? 8장 5절,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합리적입니다. 이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8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서 왕정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왕정이 아니라 지방분권입니다. 여호수아 21장 3절, 41절, 42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 여기 잘 보십시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목초지, 성읍들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레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41절,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요 또 그 목초지들이라. 이 각 성읍 주위에 목초지가 있었고 모든 성읍이 다 그러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12지파가 땅을 다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덩어리 땅을 준 적이 없습니다. 12지파 중심 성읍마다 48개 성읍으로 레위 지파를 다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레위 지파에게 세 가지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예배, 두 번째가 재판, 분쟁이 생기면 해결하는 것, 세 번째가 신앙 교육입니다. 예배와 재판과 신앙 교육, 이것을 레위 지파가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왕이 없이.
그래서 예를 들어 유다 지파 같으면 유다 지파에 파견받은 레위 자손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유다 지파 지경의 각 중요한 성읍들에 살면서 거기서 예배도 인도하고, 재판도 하고, 신앙 교육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하나님이 주신 이상적인 제도였고 이상적인 정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왕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왕을 백성들이 요구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말을 그들이 어겼으니까.
6. 왕정의 위험
8장 9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엄히 경고하라는 말은 만약에 왕이 세워지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위험성을 미리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6-1. 가져가고 거두어감
왕이 세워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신명기 율법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왕이 세워지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8장 11절에서 18절까지 보십시오. 11절,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설명을 합니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데려다가" 줄을 치십시오.
13절 보십시오.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또 "데려다가" 줄을 치십시오.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절,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가져다가" 줄을 치십시오.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절,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거두어" 줄을 치십시오. "자기의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6절,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끌어다가" 줄을 치십시오.
17절,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거두어 가리니" 줄을 치십시오.
지금까지 제가 줄 치라 한 것,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데려가고, 가져가고, 거두어 가고, 끌어가고.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왕이 세워지면 다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아들도 딸도 데려가고, 너희 재산도 다 가져가고, 왕에게 권력을 위임해 버렸으니, 모든 권력을 다 주어버렸으니, 그러니 악한 왕이 세워지면 그 왕들이 너희의 자녀들 데려가도 한마디도 못할 것이고, 너희 재산 다 가져가도 어떤 말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도 좋으냐는 것입니다.
왕의 제도가 세워지면 이렇게 될 터인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이 이렇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그랬습니다.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달라 그랬습니다. 주변 다른 나라 왕들이 이렇게 합니다. 아들 딸 데려가고, 곡식 거두어 가고, 가져가고, 끌어가고. 그래도 좋으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시는 것입니다.
6-2. 섬기는 왕의 모델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한 왕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여기 써 있는 대로 데려가고 데려가고 끌어가고 가져가면 악한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양들을 섬겨주고 도와주고 세워주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가서 골리앗과 싸울 때 나가는 출사표가 이랬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양들을 내가 보호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양들을 자기가 이렇게 생명을 걸고 보호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데려다가 정말 사람 양들을 돌보는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딱 한 번 잘못한 적이 있습니다.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밧세바 사건. 하나님이 그것을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양들을 돌보고 양을 섬겨주어야 하는데 밧세바를 취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다른 왕들처럼 하지 말라"고 세우셨는데 그렇게 행하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람 왕입니다. 왕 중의 왕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왕이신데 섬겨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바로 이런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에서 리더가 된다는 것, 특히 교회 공동체 리더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데려가고 가져가고 빼앗아 가고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섬겨주고 씻어주고 돌봐주고 신경 써주고 상처를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와 중직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학교 교사와 구역장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 하신 어른들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가 그것을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가져가고 빼앗아 가고 끌어가고 데려가고 약한 자들 압제하면 벌 받습니다.
지금 이렇게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8장 19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21절,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하나님이 백성들의 말이 옳아서 왕을 세워주셨습니까? 아니면 인격적으로 대우해서 이렇게 세워준 것입니까? 옳아서 세워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과 거짓을 앞에 두고 계십니다. 거짓을 무조건 치우고 정답만 두는 분이 아니고, 이렇게 선택하려고 하면 "아니야, 다시 생각해 봐.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부리고 이 길로 가면 그다음은 패가망신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왕이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사울을 한번 겪어봐야, 사울이 어떤 인간인지 한번 겪어봐야 그래야 "우리가 잘못했구나"를 압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래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짜 분별력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금 이 왕을 세우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은 신명기 법전에 있습니다. 그 신명기 법전에 있는 말씀을 사무엘이 가지고 와서 다시 그대로 말해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부했습니다. 그 신명기는 모세 오경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그토록 사랑하는 모세 할아버지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조차 무시해 버리고 우리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하니, 사울을 한번 겪어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7. 사울의 등장
이제 사울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울은 인간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그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 세워놓아도 저 사람은 왕입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볼 때 훌륭하면 무엇 합니까? 하나님 볼 때 꽝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인데요.
7-1. 외모와 가문
오늘은 이 사울의 인간적인 면이 나옵니다.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사무엘상 9장 1-2절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집안의 아들입니다. "유력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유력한 집안의 아들입니다.
2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잘생겼다는 뜻입니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저는 그 정도가 어느 세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키가 굉장히 크고 사람보다 어깨 위. 굉장합니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집안 좋고. 일단 다 사위 삼고 싶은 청년입니다.
7-2. 성품과 태도
그런데 이 청년이 마음씨까지 좋습니다. 9장 3절,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함에."
일단 귀찮은 일입니다. 아버지가 시키는 것은 일단 기분 나쁘고 귀찮습니다. 내 아버지하고 일어나 하는 아이는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9장 4절에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그냥 다닌 것이 아닙니다. "두루 다녀 보았다" 그랬습니다. 그럼 가야지요. 집에 "아버지 없어요" 하고 가야지요. 그런데 "사할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곳에는 없었고." 또 가서 두루 다녀 보았습니다. 여기 갔는데 없고 저기 갔는데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두루 다녀 보았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지금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사울의 성품이 어떤 것입니까? 일단 성실합니다. 순종적입니다. 아버지가 보지 않는데 사환하고 가서 저 뒷산에 가서 드러누워서 놀다가 그냥 가는 아이가 아닙니다. 굉장히 성실하고 굉장히 순종적입니다. 보지 않는 데서도 성실했습니다. 괜찮은 청년입니다.
그런데 또 없으니까 사환이 이렇게 말합니다. 9장 8절,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은전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이 암나귀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물어봅시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환이 귀찮은 일이지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사울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아랫사람에게도 "감히 종 따위가? 이놈 귀찮은 것 왜 자꾸 시키냐? 집에 가자" 이것이 아니라 "네 말이 옳다" 들어줍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인물 좋고, 집안 좋고, 착하고, 성실하고, 순종적이고, 소통 잘하고. 이 정도면 끝난 것 아닙니까? 굉장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제 그래서 찾아간 하나님의 사람이 누굽니까?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9장 15절,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려 이르시되." 미리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9장 20절을 보십시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사무엘의 말입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막내 지파이니까요.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겸손한 것인지 그냥 남들에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사울의 인간적인 매력이 굉장합니다. 잘생겼고, 집안 좋고, 아버지 말 잘 듣고, 성실하고, 순종적이고, 아랫사람과 소통 잘하고,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하고. 이런 인간적인 면으로 완벽한 사람을 하나님이 딱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볼 때 "대단하구나, 우리의 왕이 될 만한 사람이구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사고를 칩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 보면 사울이 초기에 사울의 어떤 활약상도 나오고 그리고 사울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는가, 살펴볼 내용입니다. 오늘 공부한 것도 잘 한번 복습해 보시고 다음번 보실 것도 성경을 읽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 통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약궤 없이도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는데, 그들이 마음을 다하고 겸손하게 회개하고 금식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위대한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온전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믿음과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섬기되 제대로 섬기게 하옵시고 믿음의 중심을 바로잡고 나아가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말씀을 알고 읽고 묵상하고 깨달아서 분별력을 가지도록 도우시고,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한 것 행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