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특강 8 - 광야에서 (1)
사무엘상 21-23장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무엘상 22:1-2)
오늘은 사무엘서 공부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다윗 이야기의 절정으로 들어갑니다. 제목에서 보시다시피 '광야에서'라는 제목입니다.
다윗 이야기의 절정은 다윗이 왕이 되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하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광야에서 보낸 세월,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던 시간, 이 시간들이 다윗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우리 인생도 살펴보면 반전의 계기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들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단계마다 마디마다 화려했던 시간도 있고, 저 밑바닥에서 힘들었던 시간도 있습니다. 그중에서 힘겨웠지만 하나님과 함께함이 있었던 시간을 우리는 광야라고 부릅니다. 죄 지어서 힘든 것 말고, 하나님과 함께했던 어려웠던 시간이 광야입니다. 그 광야의 시간들이 오늘 우리를 있게 한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됩니다.
요셉 인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 자리가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서 채색 옷을 지어 입고 형제들 위에 군림했던 그 자리도 아닙니다. 그가 팔려서 노예로, 그리고 죄수로 살았던 그 시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요셉이 형통하였더라 했던 창세기 39장의 그 시간이 요셉 인생의 최고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이 십자가 없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보낸 최고의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빼고 어떻게 부활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윗을 공부하는 목적은 광야를 한번 되새겨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는 생각하기 싫습니다. 힘겨워서 눈물로 보냈던 시간들, 힘든데 하나님 한 분 붙잡고 기도하고 통곡했던 시간들, 돌아보면 힘겨웠고 생각하기 싫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수제비 먹기 싫어하셨습니다. 너무 힘겨워서 수제비만 먹었던 그 시절이 너무 힘들어서 수제비는 죽어도 안 먹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제비를 먹으면서도 기도하고 하나님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참 좋아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내는 이 시간들, 지금은 잘 먹고 잘 살고 걱정 없이 사는 분들이 계시지만 과거에 광야 시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기쁘고 그 설렘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윗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몰아넣으셨는데 훈련을 대충 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까지 몰아가시고 정말 힘들게 훈련시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귀하게 사용하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귀하게 사용하려면 광야 훈련이 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한 훈련을 받아야 근육이 생기고 내성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하다 말면 안 한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련시키시는 것이 그냥 훈련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굉장한 고난이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혼자 몸이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굉장한 책임감 있는 사람을 세우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훈련을 잘 받고 잘 통과하면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광야 1, 광야 2, 광야 3의 세 단원에 걸쳐서 공부하는데 오늘은 21장에서 23장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 성전으로 간 다윗
1-1. 다윗의 첫 피신처
왕궁에서 나온 다윗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어디였습니까? 쫓겨난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니 갈 데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21장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정말 답답하고 힘들 때 성전에 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다윗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정말 막막한 힘든 일을 만나면, 막다른 길에 딱 이르게 되면 제일 먼저 어디가 생각납니까? 교회에 와서 그냥 하나님께 엎드리고 기도해야 되겠다는 것, 그 생각밖에 나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면 사람 붙들고 울어봐야 아무 해결도 안 되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께 울며 통곡하고 토로해야 그래도 마음이나 편안해집니다.
다윗이 갈 데가 없었습니다. 쫓겨나니 곳곳에서 다윗을 다 알아봅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고 가는 곳마다 지혜롭게 행해서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그가 누구에게 가서 부탁하고 누구에게 가서 숨을 수 있겠습니까? 성전에 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그랬더니 제사장이 다윗을 영접합니다. 아히멜렉이 영접했다는 말을 보면 교회가 이래야 되겠구나 싶습니다. 누가 오든지 간에 영접하고 맞아들이고, 목회자는 누구든지 어서 오시라고 환영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1-2. 다윗의 거짓말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약함을 봅니다.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하였나이다" 다윗이 함께한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왕의 비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내가 지금 수배 중입니다, 쫓겨났습니다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 작은 거짓말이 나중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3절,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배가 너무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밥 얻어먹을 데도 없고 입을 축일 것도 없어서 떡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또 8절을 보시면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다윗은 왕의 군대 장관 아닙니까? 그런데 무기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왕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이 칼도 없고 창도 없고 무기도 없이 그냥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 와서 칼이나 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1-3. 진설병을 준 제사장
아히멜렉은 뭔가 석연치 않고 불편했습니다. 옛날 다윗, 이전의 다윗과 다른 모습입니다. 쫓기는 것 같고 불안한 것 같고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평안하게 하고 다윗을 잘 대접해 줍니다. 4절,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거룩한 떡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떡, 우리가 레위기에서 배운 진설병입니다. 거기에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 낸 떡밖에 없었습니다. 이 떡은 더운 떡을 들이는 날에 물러 낸 것이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이 먹어도 됩니까? 레위기 24장을 보십시오.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아론과 그의 자손들, 제사장들만 먹도록 법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부하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예수님께서 평가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2장 25절에서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의 뉘앙스는 어떤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아히멜렉 제사장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맥락이냐 하면,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프니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을 손으로 훑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비벼서 밀을 털어 입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밀을 손으로 긁은 것이 타작이고, 이것을 비벼서 입에 넣은 것이 일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노동하면 안 되는데 자기를 위하여 밀을 긁어서 손으로 비벼서 입에 넣어 먹었으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다윗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설병까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주었는데, 안식일에 배고픈 자가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그것 한 번 훑어서 입에 넣은 것이 왜 죄가 되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아히멜렉 제사장의 무죄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율법이 있습니다. 그 당시 구약시대의 레위기 법전이 법 아닙니까? 그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맞아 죽을 수도 있고 목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히멜렉 제사장은 배고픈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성전에서 물려낸 진설병을 그대로 주었습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 뭔가 쫓기는 것 같고 불안해하니 이상하다고 해서 안심시켜 놓고 간첩 신고한 것이 아니라 일단 먹을 것을 준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수많은 규정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규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의 핵심은 사람을 살리는 법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신앙생활 하도록 돕는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법 조문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법이 되고, 사람을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법이 된다면 그 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법이 아닙니다.
세례나 입교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교회 등록한 지 6개월 이상 되어야 한다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등록한 지 5개월 20일이 되는 사람은 세례 입교 신청하면 됩니까? 하루가 모자라거나 일주일이 모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즘 중고등학생들의 마음은 하루에도 갈대같이 수십 번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엄마, 나 입교하고 싶어" 해서 신청을 했는데, 그 가정이 교회 등록한 지 6개월이 안 되어서 다음번에 하라고 한다면, 6개월 뒤에 이 친구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때 교회가 거절했으니 "난 하고 싶었는데 교회가 하지 말라 그랬으니 나는 영원히 입교하지 않겠다" 하면 그 영혼은 누가 책임집니까? 이런 일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날짜나 기준, 그런 큰 틀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틀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그 기간 동안 이분들의 신앙 상태를 교육자가 잘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잘 살펴서 이분의 신앙이 확실하고 신앙 고백이 분명하면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바로 세례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난 당신을 모르니 6개월 뒤에 봅시다" 하고 성경이 그렇게 했습니까? 그 정도로 성경이 꽉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자유로우셨고, 예수님은 굉장히 유연하셨고, 심지어 구약의 아히멜렉 제사장조차 이렇게 유연했는데 교회가 왜 이렇게 됐습니까? 그래서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큰 틀에서는 법을 정해놓되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을 예수님도 변호하셨으니 이분은 죄가 없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21장 9절도 보십시오.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골리앗의 칼을 주었습니다. 무기가 없으니 마침 그곳에 골리앗의 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도엑의 고발
2-1. 사울의 목자장 도엑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아히멜렉 제사장을 사울은 어떻게 대합니까? 사울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다윗이 그곳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사실 왕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과거나 지금이나 권력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정보입니다. 정보력입니다. 누가 어디에 있더라, 내가 찾는 사람이 지금 어디를 통과해서 어디로 가고 있더라, 이 정보를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곳에 갔다는 이야기를요. 그래서 그곳에 심어놓은 한 사람, 사울의 사람이 있습니다.
21장 7절,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즉 성전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사울의 목자장, 무슨 말입니까? 사울의 개인 양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사울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이 마침 아히멜렉 제사장의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와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을 도엑이 들은 것입니다. 보니 이상합니다. 느낌이요. 도엑이 사울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사울이 행차합니다. 와서 아히멜렉을 심문합니다. 22장 9절과 10절,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도엑이 세 가지 죄를 고발합니다. 첫째, 여호와께 물었다는 것, 즉 기도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주었다는 것이 첫 번째 고발입니다. 두 번째 죄는 그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것, 진설병 준 것입니다. 세 번째는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는 것입니다.
2-2. 사울의 살해 명령
13절,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피해의식이 상당합니다. 이렇게 하니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합니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이것은 아히멜렉 개인의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여론입니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 여자들이 노래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밑바닥 정서였고 여론이었던 것처럼, 아히멜렉이 말한 이 말이 개인의 말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제사장의 입을 통해서 사울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듣고 "그렇구나,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하며 돌이켜야 하는데, 거기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합니다.
16절 17절을 보십시오.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간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사장을 죽이라 했습니다. 이제 진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을 왕이 죽일 수 있습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와 제사가 분리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원래 사무엘은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정치를 이끌고 가는 것, 두 가지를 사무엘이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한 나머지 왕을 세우고 나서는 사무엘이 "나는 기도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명만 가져오고 정치는 왕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면 왕과 제사장이 이것을 서로 나누어서 권력을 견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사장이 받아서 왕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제사장이 가지고 있는데, 왕이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사장을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살해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통합니까?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두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 첫째, 이 사람들이 그 당시 정치적인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만큼 사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합당치 않은 명령을 내리니 아무리 왕이라도 합당치 않은 명령을 내리는데 어떻게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니 왕이 도엑에게 이릅니다.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함에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끔찍한 살인행위를 한 것입니다. 도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칼잡이가 되었습니다. 이 이름이 지금 우리가 도엑이라는 사람을 읽고 있듯이 수천 년이 지나도 성경에 기록되어서 잊히지 않습니다. 또 사울은 여기서 이제는 더 심각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는 제사장들을 이만큼이나 죽이고 말았습니다.
2-3. 다윗의 자책
그런데 이 일을 촉발한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다윗의 거짓말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사정을 솔직하게 제사장에게만 알렸더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고 제사장을 일대일로 만나서 자기 속사정을 그대로 알렸더라면, 그리고 나에게 이것을 주시고 피하라고 말했더라면, 이렇게 끔찍한 살육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들 하나가 살아남았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자기를 탓하는 것입니다. 도엑이 의심스러웠다면 더구나 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살짝 가서 자기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3. 두려움에 사로잡힌 다윗
3-1. 가드 왕 아기스에게
다윗이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주변에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혹시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이 사람 아히멜렉도 왕에게 고발하지는 않을까? 두려우면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할 때는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고 했고, 두려움은 사울이 많이 가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지금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려워해서 첫 번째 잘못한 것이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또 두려워서 그다음 또 잘못된 스텝을 밟습니다.
다윗이 놉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받은 후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떡을 먹고 배가 좀 불렀습니다. 눈이 이제 좀 떠집니다.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골리앗의 칼을 받았습니다. 무기도 생겼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21장 10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여기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서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가드 왕 아기스, 가드가 누구의 고향입니까?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자기가 죽인 골리앗의 고향으로 자기가 걸어 들어갑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사리 분별이 잘 안 됩니다.
한밤중에 까만 밤중에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시골길을 가다가 갑자기 귀신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날아다니는 비닐봉지 보고 귀신이라고 혼비백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려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사리분별을 못 하는 것입니다. 대낮에는 "저게 비닐봉지가 날아다니네" 하고 마는데, 사람이 두려움을 가지면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지금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갈 처지가 아닙니다. 그것도 골리앗의 칼 들고, 자기가 골리앗 죽인 지 얼마나 됐다고 환영할 거라고 생각하고 갑니까? 자기 발로 사자굴에 들어간 것 아닙니까? 어쨌든 지금 너무 사울이 두려우니 일단 사울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고 간 곳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간 것입니다.
3-2. 미친 척한 다윗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떻게 위기를 빠져나왔습니까? 11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신하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이는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니이까" 이래야 정상인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이방인들이 더 잘 압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이 실질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압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잘 알고 멀리서 달려와서 무릎을 딱 꿇지 않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압니다. 누가 왕인지, 껍데기만 왕인지, 누가 진짜 왕인지를요.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우리가 이것을 보면 사탄이 얼마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사탄은 분석도 잘하고 우리에 대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공격합니다. 내 약점이 어딘지를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탄의 공격에 대항해서 이기려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약한지를요. 지금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왕이라고 말하는데 다윗은 왕의 정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워해서 거짓말하고, 두려워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고, 이게 무슨 왕입니까? 자기가 자신을 모르는데 그래서 어떻게 싸움에서 이깁니까? 두 번째로 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탄도 이렇게 적을 잘 아는데 우리가 사탄을 모르면 됩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 다윗이 그것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아, 이들이 나를 죽이겠구나. 나를 왕이라고 말하네. 나를 죽이겠구나." 12절,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입니까? 함께하는 상태입니다.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데도 두려움이 이렇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데 두렵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데 두렵다, 이것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정상은 아닌데 그렇다고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인가?" 해서 낙심했는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고 있는 다윗도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거기서 위로를 좀 받는 것입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상황이 너무 무서우니 쫓겨나서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니 거짓말하고, 분별력 없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고, 아기스가 자기를 죽이려 하니 또 두려워하고, 그런데 다윗이 이 두려움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건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다윗이 이렇게 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합니다. 위기는 모면하고 거기서 쫓겨났습니다. 어쨌든 살아나왔습니다.
3-3. 반전의 계기
그런데 어떤 마음이 들까요? 모멸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이 생명을 부지해야 되는가? 자괴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저 밑바닥까지 내려간 자괴감. 그래서 다윗은 거기서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고 기도합니다. 자기를 돌아봅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렇게 됐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지혜롭게 행하던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사람이었고,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 때문에 제사장 팔십오 명이 죽었고, 내가 분별력 없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고, 거기서 생명을 부지하려고 미친 척까지 해야 되는 나를, 하나님 어떻게 내가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겠습니까?"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를 읽을 때는 시편하고 같이 봐야 합니다. 시편에 다윗의 노래가 굉장히 많습니다. 시편 34편을 한번 보십시오. 표제어를 잘 보셔야 합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여기서 아비멜렉이라는 것은 가드 왕 아기스를 일컫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기스가 자기 별명을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 해서 자기가 왕인 척하고 계속 자기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면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를 돌아보고 시를 지은 것이 시편 34편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구절 1절, 6절, 8절만 보시면, 1절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며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왜 찬양할까요? 기도하고 응답받고 나서, 응답받았으니 찬양하는 것입니다.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왜 곤고하다 할까요? 미친 척까지 해가면서 위기를 벗어나야 했으니 곤고한 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이 자기를 살려준 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바 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피하는 자마다 복이 있습니까?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다가 미친 척하고 겨우 목숨 부지하고 나와서, 그리고 나서 자기를 돌아보고 고백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피해야 되는구나.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해서 이것이 복이 아니구나. 가드 왕 아기스가 나를 살려줄 수 없구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거짓말한다고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야, 그래야 내가 살아나는구나. 그러면서 그가 다시 회복했습니다.
지금 이것이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 인생길을 살아가다 보면 내 인생이 비루해질 때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 비루하고, 돈 없으면 사람 떠나고, 사람 떠나서 비참하고, 건강 잃어서 너무 힘들고,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두렵습니다. 두려우면 거짓말도 하게 되고, 가서는 안 될 곳에 가게 되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 만나게 되고, 또 거기서 그 위기를 탈출하려고 미친 척까지도 해야 되고, 저 밑바닥 인생에서 진흙탕에서 뒹굴게 됩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면서 정신 차려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이 비루한 인생에서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했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자니 내가 지키니까 나에게 피하라. 사람 의지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나에게 피하라."
그것 붙들고 다윗이 거기서부터 이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윗의 인생이 새롭게 반전되는 계기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다윗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할 때는, 잘 나갈 때는 좋았습니다. 왕의 군대 장관으로 가는 데마다 승리하고 이기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런데 광야로 딱 내몰리자마자 자기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밑바닥 드러났다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 그가 그것 붙잡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마다 복되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다윗의 탄탄대로, 광야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승리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이 포인트가 반전의 포인트입니다. 정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4. 아둘람 굴의 왕
4-1. 모여든 자들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 목숨을 건진 다윗이 어디로 갔으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22장 1절,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버지와 형제들이 왜 평상시의 삶을 살지 못하고 다윗에게 갔을까요? 사울이 가만히 두었을까요? 사울이 이새를 잡아다가 압박하고, 아들 어디 숨겼느냐고, 연좌제처럼 형제들을 괴롭히니 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막내라고 그토록 무시하고, 여덟 번째 아들, 사무엘이 오는데도 저 들판에서 양치라고 했던 아버지가 이제 다윗 밑에 자기 몸을 숨기러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어떤 자들이 모였습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환난 당한 자, 여기서 '환난'은 히브리어로 마초크(מָצוֹק)라고 합니다. 이 마초크의 히브리어 본뜻은 '좁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즉 좁은 길을 걷는 자입니다. 환난 당한 자들은 누구 때문에? 사울 때문에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정치인 사울, 잘못된 왕 사울 때문에 좁은 길을 걷고 고난당하는 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우리가 우리의 대장을 만났다" 하고 다윗에게 모여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떤 자들입니까? 빚진 모든 자입니다. '빚지다'는 나샤(נָשָׁא)라는 동사입니다. '강요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강요당합니까? 세금을 강요당합니다. 그러니 빚질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래서 너무 힘든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살기가. 그런 사람들이 아둘람 굴로 모여들었습니다.
세 번째 원통한 자입니다. '원통한'의 히브리어는 마르(מַר)입니다. 마라의 쓴 물 아시지요? 마라, 그때 그 말입니다. 형용사 '쓴', 쓴이란 뜻입니다. 인생이 쓴 사람들입니다. 좁은 길을 걷고 세금을 강요당하니 얼마나 인생이 쓰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자유 세계로.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4-2. 진짜 왕이 되는 훈련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다윗이 이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여기 유력한 자가 있습니까? 돈 많은 자가 있습니까? 아주 유능한 인재가 있습니까? 빚진 자, 환난 당한 자, 원통한 자들이 모였는데 한마디로 억울한 사람들만 모인 것입니다. 다윗을 건져 올려서 그를 다시 복권시켜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피했더니 다윗이라는 큰 나무 아래 사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부터 그가 왕이 될 만한 자질인지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냥 왕이 됐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출세한 사람 아닙니까? 아버지 집에서 막내였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자였는데 거기서 일약 스타가 됐습니다. 골리앗 죽여서. 그러면 저 밑바닥 서민들의 인생을 알 수가 없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의 그들의 속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왕은 모름지기 서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왜 빚을 졌는지, 그 사람들이 왜 환난 당했는지, 그 사람들이 왜 원통한지, 이 사백 명과 함께하면서 내가 앞으로 왕이 되면 어떤 정치를 해야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받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왕이 되겠습니까? 권력을 누리려고만 하지요.
하나님은 여기서부터 그의 왕 됨을 훈련시켜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진짜 왕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사백 명을 거느리면서 진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해야 합니다. 만약에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보잘것없어서 한숨 쉬고, "난 너희들 꼴을 보니 한숨밖에 안 나온다. 너희 중에 나를 다시 세워서 저 중앙 무대로 보내줄 사람이 누구냐?" 이런 식으로 했더라면 다윗이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큰 나무가 되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진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일을 맡긴다 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이 다 보시고 큰일 맡기십니다. 교육 전도사님 할 때 그 교회 학교 아이들 잘 돌보는 분들을 하나님이 세워서 큰 그릇으로 빚어서 사용하십니다. "내가 나중에 큰 교회 맡으면 그때 충성하지" 하면 절대 하나님은 큰 교회 안 주십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한 영혼에게 목숨 걸지 않는데 어떻게 큰 교회를 맡기겠습니까? 한 영혼에게 목숨 걸어야 합니다. 이 원통한 자들, 환난 당한 자들, 빚진 자들, 이들의 마음을 알아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다음을 맡겨주십니다.
4-3. 부모를 섬긴 다윗
부모의 안전을 걱정한 다윗이 어디로 갔습니까? 3절,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다윗이 부모님을 극진히 사랑한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윗과 함께 광야를 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압에 가서 부모님을 부탁한 것입니다. 효심이 지극한 아들입니다. 자기는 아버지에게 무시당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잘 섬긴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5. 그일라 구원
5-1. 선지자 갓의 명령
그런데 여기 의미 있는 한 선지자가 나옵니다. 5절을 보시면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선지자 갓이 와서 다윗에게 말합니다. 다윗이 지금 혼자 몸이 아닙니다. 사백 명과 함께 다닙니다. 그러니 다윗이 이 사백 명과 함께 다니면 사울에게 꼬리 밟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모압 미스베로 가서 거기에 있으니 선지자가 다시 와서 유다 수풀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요새에 있지 말라.
왜 그랬을까요? 왜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다윗을 밀어 넣었을까요? 훈련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훈련받는 중에 요새에 숨어있으면 이것이 훈련이 됩니까?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보내셔서 "너 지금 훈련 중에 쉬지 마. 강하게 훈련받아야 되는데 왜 너는 요새에 숨어 있느냐. 들어가서 훈련 제대로 받아라.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 사백 명과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이 너를 지킬 것이니까 훈련받아라" 하고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훈련의 목적인 것입니다. 훈련하다가 절대 죽이지 않으십니다. 훈련시키다가 절대로 낙심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훈련을 통해서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고 그릇을 크게 늘려서 사용하십니다.
5-2. 목자의 정체성
그일라를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피신하던 중에 그일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일라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23장 1절,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나이다 하니" 저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다윗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지명수배자 아닙니까? 현상금이 잔뜩 걸린 지명수배자입니다. 잡히면 죽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다윗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요? 그일라에 블레셋 사람이 와서 그들의 타작 마당을 탈취하건 말건, 그들을 죽이건 말건, 그일라를 구원해야 할 의무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사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에게 안 가고 다윗에게 와서 이러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힘들어서. 단호하게 거절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2절,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오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넘칩니까? 네 꼴을 알아라 이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도 참 재미있으십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이렇게 되면 이런 마음이 왜 다윗에게 생길까요?
다윗의 정체성이 목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자이기 때문에 이 정체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목자 정체성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 떼를 위해서 목숨을 겁니다. 자기의 형편과 상황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6시에 퇴근했습니다. 전화하지 마세요." 이것이 목사입니까, 삯꾼입니까? 다윗은 지금 자기가 이런 상황에 있어서도 마음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도 한 술 더 떠서 "가서 구원하라" 하십니다. 목자 정체성입니다.
5-3. 종의 정체성
그런데 혼자 가서 구원합니까? 사백 명 거느리고 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에게. 그러니 뭐라고 할까요? 3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어떤 느낌으로 읽어야 합니까? "보소서" 한숨 쉬면서, 정신 차리세요,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늘" 지금 요새를 빠져나와서 유다에 들어왔습니다. 선지자 갓이 훈련받으라고 그래서.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리이까 한지라"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잠깐만" 하고 다시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4절,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우리가 여기서 두 번째 다윗의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첫 번째 어떤 사람들이 알려줬을 때도 물었고, 다윗의 사람들이 거절했을 때도 또 물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두 번째 정체성이 나오는데 종의 정체성입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고 합니다. 주인에게 자꾸 묻습니다. 다윗이 지금, 다윗은 이때부터 왕이 되고 나서도 맨날 물었습니다. "하나님 올라가리이까? 전쟁하리이까? 하면 이기겠나이까? 어떤 방식으로 할까요?" 계속 묻습니다. 종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은 이 두 가지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 정체성과 종의 정체성.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목자 정체성, 그 영혼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데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꾸 웁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립니다. 데리고 가서 차도 한 잔 사주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고 기도해주고. 나하고 상관없는데, "귀찮게 엮이면, 주일날 나도 바빠 죽겠는데" 이러면 목자 정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종의 정체성, 자꾸 기도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물으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또 이야기하시지요.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사백 명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단다. 가자." 갔습니다.
5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누가 왕입니까? 사울이 왕입니까, 다윗이 왕입니까? 사울은 왕이 아닙니다. 이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껍데기만 왕이지, 왕관 쓰고 있다고 왕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고 다윗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헤매고 다니는 것이 그게 무슨 왕입니까? 자리만 보전하고 있다고 그것이 무슨 왕입니까? 헤매고 다녀도, 쫓겨 다녀도 백성을 구원해야 진짜 왕입니다.
5-4. 그일라의 배신
그런데요, 그일라 사람들을 구한 결과 다윗에게 큰 시련이 옵니다. 7절,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이 어떤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착각입니다. 원래 하나님 뜻대로 안 하는 인간들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입만 열면 하나님 뜻 운운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좀 의심해 보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사기꾼들이 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사기 칠 때 자주 하시는 말씀들이 "하나님이 뭐 어쩌고 저쩌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과 소통하는 분들은 그렇게 대놓고 말씀 잘 하지 않습니다. 두려우니까요.
사울이 그럽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하나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것입니다.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합니다.
다윗이 지금 위기에 빠졌습니다.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난 하나님 뜻대로 했는데, 두 번이나 물어봤는데, 하나님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나?" 사백 명의 원성은 어떨까요? "우리가 다 죽게 됐구나."
10절,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를 에워싸고 그일라 백성들이 다윗을 내놓지 않으면 그일라를 다 불태워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물어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일라 백성들이 나를 배신할까요? 사울이 진짜 내려올까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하나님 좀 너무하십니다. 사울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도대체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이 가라 하셨으면, 구원하라 하셨으면, 이것은 막아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지켜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벼랑 끝까지 몰아가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전서 말씀을 좀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절, 17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에 이것을 한번 대입해 보십시오. 다윗이 선을 행했습니까? 고난 받았습니까? 그것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선을 행하면 복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희한하게도 "선을 행함으로 복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이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내 믿는 대로 복음을 함부로 바꾸어서 생각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있는 말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을 행했습니다. 고난 받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됐구나. 아멘!" 이래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어줬는데 저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칩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로구나. 말씀이 참 용하네" 이러고 아멘 해야 합니다. 아멘이 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오해한 것이 정말 많습니다.
성경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고난은 받을지언정 하나님이 너를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를 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받는 이 고난,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넘기리라" 그러나 너는 결단코 거기서 끝장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키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요.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으나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살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속 터져 죽습니다. 우리는 그것 보면요. 그런데 이 광야가 다윗에게는 인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이것 꼭 기억하시고 한 번 더 살펴보시고 복습하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난 당하는 다윗,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였지만 그는 두려웠고,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했고, 가서는 안 될 곳에 갔고, 그곳에서 인생의 저 밑바닥의 비루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정답임을 깨닫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의 왕이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다윗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우리 인생도 이런 인생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광야를 불평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시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으니 앞으로 고난 받는 것에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