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광야에서(2) / 전체녹취

사무엘상하 특강 9 - 광야에서 (2) (삼상 23-26장)

사무엘상 24장 4절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오늘은 지난 시간 말씀에 이어서 사무엘상 23장 말미부터 26장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상하 특강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미 공부했듯이 다윗 일생의 하이라이트, 다윗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는 나중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 시절이 그러합니다. 광야에서 치열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위기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과정을 보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구원하신 주의 능력을 경험했던 그 시간이야말로 다윗 일생의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에 있어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영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실 광야 없이 영광을 얻기를, 광야 없이 왕관을 쓰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걸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훈련받아야 하고, 당연히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경험해야 그다음이 있는 법입니다. 훈련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길이 오늘 다윗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1. 좁혀지는 포위망

다윗이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광야로 자기 발로 간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왕궁에서 쫓겨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 내적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다윗이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이 나중에는 엄청난 화를 불러왔습니다. 둘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갔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습니다. 위기 상황을 겪고 겨우 미친 척하며 거기서 살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러고도 살아야 하나?'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 찾아다니지 말고, 사람 피해 다니지 말고, 이제 하나님께 피하라. 나에게 피하라.' 시편 34편에 다윗이 그 위기를 겪고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의 일생이 달라집니다. 광야 생활이 도망 다니고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던 생활에서 이제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삶으로 분기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둘람 굴에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여들었는데 한둘이 아니고 사백 명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보내주신 이유는 광야에 있지만 진짜 왕으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떻게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그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장차 내가 진짜 왕이 되면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야 할지를 마음에 미리 공부하고 새기는 것입니다. 돈으로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학습의 장입니다.

1-1. 십 사람들의 고발

하나님이 '그일라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블레셋이 그일라를 침공했는데 하나님이 도우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이 배신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다윗은 다시 목자의 심정을 느낍니다. 사실 다윗은 쫓겨 다녔는데 그일라를 구원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계속 물었습니다. 종의 정체성, 왕이지만 종의 정체성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런 광야에서 공부하고 배우고 있는 과정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장소를 고발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23장 19절을 보시면, 그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산 숲속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이다" 하니, 이런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사실 다윗 입장에서 십 사람들이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요? 원망스럽고 화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도 다윗에게 경험하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왕의 자리는 편 가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 백성이 따로 있고 남의 백성이 따로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때로는 나한테 좀 못되게 해도, 때로는 나에게 좀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해도 어쨌든 내 백성입니다. 품어야 하고, 돌봐야 하고,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편을 가른다면,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적과 아군을 나눈다면, 그건 통치자의 자격으로서 낙제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십 사람들을 찾아가서 죽여 버릴까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러면서 백성들의 속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의 속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권력 앞에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게 있습니까? 배운 게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권력 앞에서 그 권력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민초들의 고단한 인생을 다윗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워가고 넓혀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사실 이거 광야 아니면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지금까지 다윗은 왕의 군대 장관으로 가는 곳마다 지혜롭게 행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 박수 쳐줬습니다. 가는 곳마다 인정받았고, 여인들이 노래 불러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 다 높여 주었습니다. 맨날 칭송받고, 맨날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쫓겨난 상태이고, 백성들이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이 여기라고 고해 바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고발할 수밖에 없는 저들의 고단한 처지를 이해하면서 진짜 왕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하나하나 훈련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1-2. 사울의 명령

사울이 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립니까? 십 사람들이 일단 사울에게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줬습니다. 사울이 말합니다. 23장 21절,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사실 사울이 할 말은 아닙니다.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사실 하나님을 자꾸만 입에 올리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꾸 하나님을 고의로, 임의로, 자기 생각대로 끌고 옵니다. 자기가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서 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사기꾼들이 하나님을 자주 입에 올립니다. 지금 사울이 그런 상황입니다.

또 당부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하는 자라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이렇게 미션을 줍니다. 진짜 다윗을 찾으면 포상금도 주려고 했겠지요.

1-3. 하나님의 개입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립니다. 또 다윗 편도 있습니다. 소수지만 다윗 편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가서 고발하는 사람도 있고, 다윗 편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백성이나 저 백성이나 다 내 백성입니다. '이놈은 착한 놈이라서 나중에 내 편이고, 십 사람들은 내가 다 죽여버리고 몰살시키겠다'가 아닙니다. 다 품어 안고 배워가고 성장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갔습니다.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습니다. 독 안에 든 쥐가 됐습니다. 지금 산을 기준으로 이산저산, 다윗과 그의 사람들 육백 명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로 숨어 있는지 사울의 포위망 안에 딱 들어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망 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7절,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블레셋이 마침 이스라엘을 침노해서 사울이 왕이니까 가야 합니다. 사울은 사실 블레셋이 땅을 침공하건 말건 별 관심 없었습니다. 그일라도 구원하러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건져 줬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눈앞에 다윗을 보고도 사로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되는 사울이 된 것입니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곳을 셀라 하마 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이 상황을 경험하고 나서 다윗이 하나님께 지어서 올린 시가 있습니다. 시편 54편입니다. 시편을 보실 때 표제어가 중요합니다. 표제어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렇게 해서 다윗이 위기에 빠지고 나서 구원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짐 벗고 난 이후에 지은 시입니다.

3절입니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도우셨습니다. 블레셋이 마침 침공하게 하셔서 도우셨습니다.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1-4. 원수 시편의 의미

이 표현을 한번 잘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다윗이 이렇게 진짜 시를 지었을까 의아해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고." 다윗의 원수가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사울을 대놓고 하나님께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고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블레셋 치러 갔으니까 블레셋에게 짓밟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게 해달라고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성경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이제 마치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런 것입니다. 내 원수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날 괴롭혀서 죽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원수를 멸하시고, 저 원수를 짓밟아 주시고, 저 원수에게 하나님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악으로 갚아 달라"고 그렇게 기도해 본 적이 있으세요?

사실 우리가 기도라는 이 형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좋은 소리만 하려고 했지, 그렇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두 가지 방향으로 보면, 첫째는 우리가 너무 착해서 그럴 수 있는데 두 번째는 솔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솔직하지 못합니다. 친구들 만나서 나쁜 얘기 다 합니다. 뒷담화 다 하고, "그 인간이 옛날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돈 빌려가고 돈 안 갚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한다. 그러고 걔가 내 뒤통수에 다 대고 어떤 욕을 했는데..." 이렇게 다 쏟아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는데 하나님께는 왜 못합니까?

사람에게 하는 게 나을까요, 하나님께 하는 게 나을까요? 하나님께 하는 게 낫습니다.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이 말이 돌고 돌고 돌아서 결국은 나를 찌릅니다. 결국은 그 말이 독이 되고 그 말이 화살이 되어서 나를 찌릅니다. 하나님께 하면, "하나님 저 인간 좀 멸해 주시고, 저 인간에게 악으로 갚아 달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 다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네가 기도했다 그래서 정말 그 인간에게 악으로 갚을까?' 이러시지 않습니다. '너 참 많이 속상했구나, 너 참 많이 화났구나' 등 토닥여 주고 위로해주고 힘내라 하고 내 마음도 만져주고 도와주고 하시겠지요.

다윗의 시편 중에 '원수 시편'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이런 식의 시편을 원수 시편, 원수를 향한 저주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게 성경에 버젓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왜 사람에게는 하는데 하나님께는 못 하느냐, 사람에게는 입 닫고 하나님께 하셔야 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으면, 죽일 놈 살릴 놈 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십시오. 그럼 하나님이 풀어주고 위로하고 원수도 갚아주고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다윗이 우리에게 그런 지혜를 알려 줍니다.

사무엘상을 읽을 때는 시편하고 같이 보셔야 합니다. 이 사건 이후에 다윗이 지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린 시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또 다윗을 도와 주셨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제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정말 나는 사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나를 건져 주신 게 너무나 확실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광야라도 살만 하지 않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날 도와 주시고 지켜 주시는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영적 임재의 느낌이 강하게 들면 사람에게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호화로운 왕실, 넓은 집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힘듭니다. 그때 우리가 영적으로 공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지금 다윗은 비록 광야에 있으나 천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렇게 도우시니까,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울의 옷자락을 베다

유명한 내용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장면입니다. 엔게디 광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장 1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옴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 고자질쟁이들입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갑니다. 삼천 명 풀어 넣으면 바늘이라도 찾을 것입니다. 아마 사방에서 찾겠지요. 그런데 다윗과 함께 한 사람은 몇 명입니까? 육백 명입니다. 사백 명에서 이백 명 더 모여서 육백 명이 되었습니다. 다섯 배가 넘는 군대를 데리고 다윗을 찾으러 다닙니다.

그런데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갔습니다. 왕이 굴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굴이 굉장히 컸나 봅니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굴 안에 먼저 들어가 있는 사람은 이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동공이 확장되어서 잘 보입니다. 그런데 굴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공이 확장되지 않아서 굴 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굴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동태를 잘 살필 수 있고 잘 압니다. 딱 보니까 사울이 들어왔습니다. 용변 보러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이 될까요? 무방비 상태입니다. 지금 어떤 마음이 들까요? 죽여버리자, 죽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누구에게나 들지 않겠습니까? 너무 괴로우니까요. 이미 굴 속에 있던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2-1. 상황 논리의 유혹

4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주변 사람들이 이제 난리가 난 것입니다. 서로 싸근거리며 부추깁니다. "기회가 됐어, 기회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사람들은 뻔하면 여호와를 끌고 옵니다. 진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거 분별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황상 그렇기 때문입니다. 정황상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지금 일단 다윗은 죄가 없습니다. 두 번째 다윗은 지금 쫓겨 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울이 자기 발로 기어 들어왔습니다. 비무장 상태로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하기 딱 좋습니다. 정황상 우리가 이 정황의 논리, 상황의 논리에 얼마나 많이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이건 사울이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울이 그랬지요. 십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막 끌고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너희를 통해서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시니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 주실 거라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끌고 들어갑니다. 다윗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끌고 들어갑니다. 사울도 정황상, 상황상 하나님이 내 왕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이 배반자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은 이렇게 우리에게 아주 입맛에 맞게 딱딱 떨어지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까? 우리가 여기서 판단이나 분별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상황과 정황의 논리에 끌려 들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적인 기본을 딱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이유 없이 함부로 죽여서 됩니까? 그것도 비무장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잠자고 있는 사람을, 혹은 용변 보고 있는 사람을, 길가는 사람을 뒤에서 몰래 그냥 때려서 쓰러뜨리고, 그렇게 해도 됩니까? 비겁한 것입니다. 전장에서 다윗과 골리앗처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그 사람을 죽인 것과는 다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데, 이건 지금 하나님의 기본적인 하나님 성품에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몸입니다. 왕으로서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왕이 되려면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합니까?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다윗이 사울을 자기 손으로 찔러 죽이고 없애버리면 자기 스스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기본적인 기본의 자리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성품의 자리로 돌아가고 자기 정체성 곧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울이 상황 논리에 얼마나 많이 흘렀습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과 약속했습니다. 사무엘이 오겠다고 했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오지 않으므로 내가 하나님께 범죄 드리고 그냥 전쟁 하러 나간다"고, 상황상 어쩔 수 없어서 나갔다고 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을 때도 역시 상황 논리를 핑계 댔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이 정황과 상황과 자기 입장을 핑계 대는 것입니다. 상황상은 죽여도 됩니다. 그런데 기본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2-2. 마음에 찔림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옷자락을 벴습니다. 옷자락을 베니 다윗의 마음이 어땠습니까?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왜 마음이 찔렸을까요? 옷자락만 벴는데 살인의 충동을 느낀 것입니다. 다윗이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옷자락을 베는 순간까지 고민한 것입니다. 그게 마음이 찔리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예민함인 것입니다. 지금 영적인 예민함은 성령이 마음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 그냥 일반적인 사람은 양심의 필터만 갖고 있습니다. 양심의 필터만 갖고 있어서는 이거 옷자락 벤 걸로는 마음에 찔리지 않습니다. 양심의 필터만 가지고 있어서는 그냥 찔러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시니까, 내가 살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에 찔려서 회개가 나오고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수준 높은 사람으로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사람으로, 성령의 필터가 매일같이 작동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자가 누굽니까? 사무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무엘은 그냥 도구로 사용됐을 뿐입니다. 물론 지금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위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끌어 내리기 전입니다. 그런데 끌어내린 것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끌어내리는 분도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 부으셔서, 나를 왕으로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세우셔야 하는데, 그걸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조차 마음에 가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하셔야 될 것입니다. 상황 논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기본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 성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이걸 기뻐하실까, 내가 기뻐하는 것 말고요, '어쩔 수 없이 내가 했다,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이거 말고요, 빠른 길로 가려고 하고 넓은 길로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거, 옷자락을 베고 그를 찔러 죽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갑니까? 좁은 길로 가야 되고, 손해 봐야 되고. 그런데 그 좁은 길로 가고, 손해보고, 오랫동안 기다려야 되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상황을 따라 선택할 게 아니라 진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해야 될 길입니다. 그래서 이건 바보 같은 선택일 수 있는데,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입니다.

2-3. 사울에게 외치다

얼마 후에 사울이 자기 옷자락이 잘린 지도 모르고 볼일 다 보시고 굴에서 나갔습니다. 멀리 갔습니다. 다윗이 굴에서 나와서, 멀리 있으니까 그 옆 군대를 향해서 소리칩니다. 24장 10절을 보십시오.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라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어떤 효과를 가져왔을까요?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첫째, 지금 사울을 따르는 군대가 몇 명입니까? 삼천 명입니다. 그 삼천 명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아,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구나.' 그 삼천 명이 이 다윗의 이 변론을 들으면서, 다윗의 이 호소를 들으면서 그 마음에 다윗을 따르고 싶고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생깁니다. 지금 비록 내가 사울의 군대 일원으로 이 자리에 있으나 정말 저 분이야말로 왕이 되실 분이고, 저 분이야말로 훌륭한 분이구나. 지금 사울의 군영을 흔들어 놓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 다윗과 함께 한 육백 명의 사람들, 항상 수세에 몰리고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다. 오르막 정도를 가는 내 지도자를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고생하나 기쁨이 생기고 따르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효과가 한꺼번에 생긴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24장 16절,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웁니다. 이 정도 되면 거의 정신병이라고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나니까 자기 자신의 제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십시오. 2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아는데 왜 멈추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데 왜 계속 다윗을 따라다니고 죽이려고 합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멈출 수 없습니다. '나 지금 죄 짓는 거 알아요. 잘못한 거 알아요. 안 되는 거 알아요. 그런데 멈추지 않아요. 멈출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습니까. 그래서 성령이 떠나는 건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면 마음의 찔림이 생겨서 죄 짓다가도 멈추게 되고, 제멋대로 하다가도 멈추게 되고, 선을 넘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가끔 언론에 특히 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이 포토라인에 서서 얼굴 마스크 벗고 인터뷰할 때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나를 멈추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체포된 게 감사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멈출 수 없었는데 멈출 수 있어서 감사하다." 저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걸 알지요. 자기도 알았지요. 멈춰야 하지요.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니까 죄인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진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 지금 사울이 바로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탁합니다. 21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부탁까지 합니다. 왕이 되면 자기 후손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요.

3. 사무엘의 죽음

광야에서 두 번째 분기점입니다. 사무엘이 죽습니다. 이 사건은 굉장한 분기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될 핵심입니다. 25장 1절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다윗에게 어떤 소식이 들려왔습니까?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뭐 늙어서 죽었겠지요. 나이가 되니까요. 사람이 죽고 사는 거야 다반사니까요. 그런데 사무엘이 죽은 건 다윗에게는 세상의 전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3-1. 최후의 보루

지금 다윗이 이 광야를 전전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용기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 자기 인생의 최후의 보루, 믿는 구석이 사무엘이었습니다. 왜요? 자기에게 기름 부어준 사람 아닙니까? 사무엘의 영향력은 이스라엘 전체를 들어서 최고입니다. 최고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기름 부을 때 백성들 앞에 부었습니까, 아니면 자기 가족들에게만 부었습니까? 가족만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는 피신 가 있습니다. 다윗이 직접 모압 왕에게 피난시켜 줬습니다. 형제들은 질투심도 있습니다. 막내아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울이 지금 서슬 퍼렇게 설치고 있는데 다윗이 기름 부어졌다고 형들이 증언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증언해도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울이 언젠가는 죽고 다윗이 왕이 되려면 사무엘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다윗이 이제는 두 번째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어야 된다." 이걸 증언해줘야 될 사람 아닙니까? 사실 그거 믿는 구석 하나, 뭐 믿고 다윗이 지금 광야를 전전하고 다니며 살고 있는데 죽어 버렸습니다. 믿는 구석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다윗은 어떤 마음일까요? 여러분 믿는 구석이 있지요. 다들 사람을 믿건 돈을 믿건, 하다 되면 플랜 A, 플랜 B, 플랜 C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 둘, 셋 다 끝나고 나면 그다음 어떤 마음이 드세요?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합니다. '몰라 이제 난 야 망하는 거지 뭐.' 두 번째는 이제 독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독하게. 독기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나는 그래도 마음 다잡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부터는 나는 그냥 대충 살고 싶은 거예요. 일단 살아남아야 되니까.' 다윗은 그 후자를 선택합니다. 마음에 독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3-2. 나발의 모욕

그런데 그때 그 독한 마음을 자극하는 한 사건이 생깁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발은 부자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과 함께 한 육백 명이 뭘 먹고 살았을까요? 광야에서 도둑질해서 먹고 살았을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다윗이 그래도 명색이 기름부음 받은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다윗과 육백 명이 생업으로 삼았던 것은 이 부자들의 양떼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양떼를 치면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따라 움직이는 양떼들의 목자들이 있습니다. 그 대규모의 양들을 다윗과 육백 명이 보호해줍니다. 경호해 줍니다. 사막에는 도적떼들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한마디로 말하면 사설 경호업을 광야에서 한 것입니다. 사설 경호업, 그렇게 하면서 호구지책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발도 엄청난 부자입니다. 나발의 집에 양떼들을 다윗과 그 함께한 육백 명이 돌봐주고 먹고 살았습니다. 다윗의 고객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발의 집에서 양털 깎는 날이 도래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양털을 깎아줘야 합니다. 일 년에 몇 번씩 양털 깎는 날은 축제입니다. 양도 잡고 염소도 잡고 떡도 해먹고요. 그래서 다윗이 사람을 보냅니다. 먹을 걸 좀 갖고 오라고 다윗의 소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나발이 술에 취해 가지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말을 했느냐? 사무엘상 25장 9절에서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니, '이 모든 말'이 뭘까요? '먹을 것 좀 보내세요. 평소에 우리가 당신들의 양떼를 돌봐 줬으니까 오늘 잔치 날이니까 먹을 것 좀 보내라' 이 얘기를 전한 것입니다. 10절,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사울에게서 떠났다는 걸 빗대어서 비꼬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11절,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이 어떤 정신으로 했을까요? 술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해도 되는 말이 있는데 선을 넘어온 것입니다.

3-3. 다윗의 분노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래 뭐 할 수 없지 뭐. 술 취한 거니까 술 깨고 나면 다시 사람 보내서 다시 한번 얘기해 봐' 그러든지 아니면 '그 부인에게 가서 얘기해 봐' 그러든지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텐데, 다윗이 그걸 꼬투리를 잡은 것입니다.

모욕을 당한 다윗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13절,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을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머무니라. 육백 명 중에 사백 명이나 데리고 갑니다. 이백 명은 두고요. 뭘 어떻게 하려고요? 나발을 죽여버리려고요.

이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일단 모욕을 당한 빌미를 삼아서 나발을 응징하려는 것, 둘째는 이제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증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먹고살아야 됩니다. 이제 각자도생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왕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렇게 여긴 것입니다. 이제 광야에서 먹고 살려면 부잣집 한번 털어서 이 양떼들을 다 내가 거느리고 여기 있는 육백 명과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빌미를 나발이 제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빌미 삼아서 나발을 제거하고 나발의 모든 재산을 다 취하려고 출동한 것입니다. 사백 명이나 거느리고.

이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잘못한 선택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최후의 보루가 사라지고 나면, 사람이 코너에 몰리고 나면,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생에도 자포자기하고 이 생을 포기해 버리고 주저앉아 버리든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살든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로 두 가지 선택 다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인생 줄을 놓아서도 안 되고, 막무가내 마지막 선택을 해서도 안 되고,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도우실 거라는 그 믿음, 그 확신 가지고 사셔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궁지에서 건지시고 살려 주실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정신줄 놓고 가는 것입니다. 칼 차고 사백 명 거느리고 말입니다.

3-4. 아비가일의 중재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아 세우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막아 세우십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하인들을 통해서 그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떡을 만들고 요리하고 음식을 가지고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맹렬하게 달려가는 다윗 앞에 길을 막아 섭니다.

23절,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땅에 엎드렸다는 말, 목숨을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지금 다윗의 상태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25절, "원하건대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이게 참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사람이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보통 부부는 똑같습니다. '우리 남편이 잘했어, 우리 와이프가 잘했어' 그럽니다. 왜요? 무조건 자기 가족 편 드니까요. 남편이 잘못하면 혼낼 수도 있어야 되고, 부인이 잘못하면 나무랄 수도 있어야 되고, 서로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되는데 아비가일은 남편 편을 들지 않습니다.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28절,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며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다윗이 한 모든 일을 아비가일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나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구나. 사무엘이 죽었다고 해서 백성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존재가 아니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았더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다 각인되어 있고 그들이 나를 기억해 주고 있구나.'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니까요.

두 번째 합니다. 29절,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을 것이요." 지금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서 광야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십니다. 그걸 아비가일이 표현하기를 '생명 싸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어린아이를 강보에 담아서 싸서 보호하는 부모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하나님의 생명 싸개 속에 싸서 당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30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시고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이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이거, 장차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당신이 가는 이 길 즉 불량한 사람 나발을 죽이는 이 길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답지 않습니다. 여러분 청문회를 보십시오. 청문회에 장관들 세울 때 청문해 보면 옛날 30년 40년 전에 했던 일이 다 먼지 털 듯이 다 올라옵니다. 전부 다. 내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될 줄 모르고,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지 모르고, 이렇게 이 나라의 역사에 이름이 새겨질 사람이 될 줄 모르고 함부로 살았던, 막 살았던 내 과거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편법으로 일관했던 내 삶이 신문에 매일같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언론에 대서특필 되고 "나는 몰랐다. 미안하다. 진심이 아니었다." 이런 소리나 해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실 때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게 하려면 지금 이 길을 멈추어야 됩니다. "왕 되신 분이 왜 이런, 그럼 뭘, 그런 하셨습니까?" 절대로 이 길은 하시면 안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비가일의 혼자 생각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하신 걸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아비가일에게 용기 주시고, 그 순간 그 입에 하나님의 말을 넣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급하게 출동시켜서 다윗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3-5. 다윗의 결단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멈추는 건 누구의 몫입니까? 다윗의 몫입니다. 이 결정은 여기까진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기까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다음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마지막까지 발을 씻어 주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자기가 나와서 자기 발로 걸어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렸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32절,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다윗이 알아들은 것입니다. 가만히 듣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인 것입니다. 예사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못 듣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얘기하는 말, 주변 사람들이 정말 얼굴 붉힐 마음을 먹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못 듣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이 이 여인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셨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멈출 수 있는 용기, 칼 빼들고 갔지만 여인의 말을 듣고 돌아설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릴까요? "기껏 계집의 말을 듣고 너를 모욕한 나발의 목도 한 번 치지 못하는, 넌 남자냐?" 사실 그렇게 말하면 화도 나고 기분 나쁠 법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이제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3-6. 하나님이 갚으심

이제 나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술에서 깨보니 자기가 한 일이 어마어마한 일이고, 다윗이 그를 죽이러 왔다는 일, 아비가일이 그 길을 막아 세웠다는 이야기를 다 듣고 몸이 굳어서 죽어 버렸습니다. 38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이 직접 원수 갚지 않아도 하나님이 갚아주셨습니다. 다윗의 일생에 배운 게 그것입니다. 자기 칼에 피 묻히지 않아도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갈 길만 잘 걸어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종기에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자기 혀로, 내 입으로 남을 저주할 필요도 없고, 내 입으로 남을 책망할 필요도 없고, 내 손으로 내 칼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요? 종기 하니까요. '그건 나에게 맡겨라. 너는 네 갈 길만 가라.' 하나님이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얼마나 간단합니까?

아비가일은 과부가 됐습니다. 순식간에 다윗이 데려옵니다. 40절,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셨나이다" 하니. 42절,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재밌지요. 성경 읽는 거 재밌는 것입니다. 급히 일어나서 그냥 뭐 빼고 자시고 이런 거 없습니다.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아비가일은 왕 되기 전 다윗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다윗의 가능성, 그 가능성에 자신의 전부를 건 여인입니다. 훌륭한 여인입니다.

4. 사울을 두 번째 살려주다

이 사건이 분기점이라 그랬습니다. 이 사건이 사무엘이 죽은 것이 분기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이 사울을 두 번 살려줍니다. 사무엘이 죽기 전에 한 번, 겉옷 자락만 베고 살려줍니다. 사무엘이 죽고 나서 또 한 번 살려줍니다.

4-1. 다시 좁혀지는 포위망

십 사람들이 하길라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또 말합니다. 십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이 하길라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함에 사울이 일어나서 또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사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바닥 보듯이 다 보고 있습니다.

26장 5절,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 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7절, 다윗과 아비새가, 아비새는 다윗의 생질인데,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에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태평하게 누워 자는 것입니다. 설마 다윗이 이 주변에 있으리라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4-2. 두 번째 기회

두 번째 기회가 왔습니다. 죽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비새가 말합니다. 8절,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똑같습니다. 또 하나님 핑계입니다.

아비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당신보고 죽이라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직접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 하셨으니 제가 죽이겠습니다. 제 손에 피를 묻히겠습니다. 허락만 하십시오."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못하게 합니다. '하지 말라'입니다. 9절, 다윗이 아비새에게 죽이지 말라. 10절,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여호와께서 치시리니.

다윗은 이 확신을 어디서 가졌을까요? 나발의 죽음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나발의 죽음으로 원수를 내가 갚지 않아도 하나님이 갚으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진짜 이게 현실이 되지요. 사무엘상 31장 3절과 4절, 사울의 죽음입니다. 어떻게 죽느냐? 사울이 패전함에 활 쏘는 자가 따르며 사울이 그 활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니라. 사울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다윗의 말대로 그대로 됐습니다. 전장에서 죽을 거다, 그대로 됐습니다. 자기 손으로 왕을 죽이지 않아도 전장에서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4-3. 창과 물병만 가지고

죽이는 대신에 어떻게 합니까? 11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갔습니다.

멀리 서서 또 얘기합니다. 멀리 서서 지난날 엔게디 요새에서 말한 것처럼 말합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사울의 부관이지요? 사울의 군대 장관이니 너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서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내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느니라. 네가 행한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자기 손에 있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4-4. 용서의 힘

용서가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니까, 두 번이나 용서하니까, 사울 군영에 있던 군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존경하는 것이고요. 우리는 용서를 아주 약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용서가 칼보다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존경심을 자아내고, 그리고 사울의 군대를 뒤흔들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흔들리겠습니까? 두 번이나 살려 줬으니까요. 그리고 그 용맹함에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창과 물병을 가져가고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5. 최후의 보루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오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분기점은 사무엘의 죽음입니다. 사무엘의 죽음 전후로 사울을 살리는 사건이 각각 한 번씩 나옵니다. 사무엘의 죽음 이전에 사울을 살려 준 건, 사실 다윗이 자기가 왕 되고 싶은 마음이 좀 컸습니다. 아직 사무엘이 살아있으니까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요. 믿는 구석이 있는데 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되니까, 사무엘이 반대하고 싫어할 법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믿는 구석이 사라졌습니다. 정신이 나갔습니다. 될 대로 되라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들고 가다가 아비가일이 앞에 가로막혔습니다. 하나님이 아비가일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다시 깨닫습니다. '사무엘이 죽어도 최후의 보루가 사라져도 하나님이 내 마지막 보루가 되시는구나. 나는 지금까지 사무엘을 믿었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역사하시는구나.' 이걸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이제 두 번째 사울을 살리는 건 진짜 진심입니다. 어떤 거지요? 진짜 진심. 똑같은 행위인데 앞에 행위보다 이 두 번째 행위가 진심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는 게 다 꺾어져도 하나님이 우리 보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걸 증거를 보여주시고 증인들을 통해서 그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걸 우리가 경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걸 공부시키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광야에서 배우는 일,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인생을 뒤바꿔 놓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배워서 진짜 왕이 되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왕이 됩니다.

오늘 이거 꼭 기억하십시오. 다윗이 두려움을 극복한 계기는, 첫 번째가 기도하고 여호와께 피해야 하겠다, 그게 첫 번째 계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두 번째는 사무엘의 죽음 이후입니다. 최후의 보루는 사무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걸 깨달았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의 최후의 보루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지만 첫 번째 용서는 사무엘이 죽기 전에 왕이 되고 싶은 욕망 그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사무엘이 죽은 후에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 후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최후의 보루가 되심을 믿고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습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지혜와 은혜와 능력이 있게 하옵소서. 다윗처럼 타인의 말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신실한 마음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유랑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매 순간 매 순간 공부하고 배우고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속에 깨닫고 기억하고 간직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한 순간 한 순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도우시고, 매 순간을 승리하며, 매 순간을 배우며, 매 순간을 성장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뚝 서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광야를 벗어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손에 연단 되고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훌륭한 도구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