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특강 2 - 경건과 믿음에 대하여 (약 1:17-27)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오늘은 야고보서 공부 두 번째 시간입니다. 제목은 '경건과 믿음에 대하여'입니다. 경건과 믿음이라는 이 주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일단 나 자신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나는 경건한데', '나는 믿음이 그래도 꽤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도 경건과 믿음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할 때 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동적인 의미보다는 정적인 느낌입니다.
경건이라고 하면 가만히 앉아서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내가 믿음 있는 것을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도 저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내적인 것이고 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경건과 믿음을 정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야고보 사도가 이 야고보서를 쓸 때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이 굉장히 유사합니다. 제가 그 때문에 이번 학기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를 택했습니다. 당시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 편지를 쓸 때, 그때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 믿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나타내면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잡혀가면 사자굴에 던져질 수도 있고 모진 고문을 받기 쉬운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성경공부하고 예배드리고 말씀 공부하는 것, 여기까지가 신앙생활의 한계였습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들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삶이 그냥 듣고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나가서 실천하고 전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을 빛과 소금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굉장히 약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는 '살아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 믿는 것을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그러다가 죽어도 좋으니 그렇게 해서 천국을 살아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와 왜 닮아 있느냐 하면, 우리는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겪으면서 겨우 예배 정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이고, 그나마 실천하고 봉사하고 활동했던 것들도 끊어지고 숨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정도 해도 괜찮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를 읽으면서, 그 옛날 이 편지를 받았던 그 시절 살아갔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도전을 받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 편지를 받고 그대로 행동하면, 나가면 죽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경건과 믿음은 내적이고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외적이고 동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볼 것입니다.
1.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먼저 야고보 사도가 굉장히 조직적인 분인데, 17절에 보면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까? 온전한 선물, 온갖 좋은 것 받고 싶습니다. 일단은 선물세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을 안 해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출처가 어디에서부터 온다고 했습니까? 위에서부터입니다. 그 위는 누구입니까?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 선물을 받으려면 우리 시선이 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땅을 보고 있어서는 온갖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선이 땅만 보고 고개를 처박고 살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하늘을 보고 우리 시선을 위를 향해 있어야 하나님이 위에서 부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고보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흘러내려오는 하나의 시대적 정신입니다.
1-1.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
출애굽기 16장 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안 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하늘에서'라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몇 년 동안 먹었습니까? 40년을 먹었습니다. 자그마치 넉 달이 아니고 4년이 아니고 40년을 먹었는데, 그것을 매일 먹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두었으니까 어쨌든 40년 동안 매일 들판에 나가서 만나를 기다리고 거두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만나를 받으려면 하늘을 봐야 만나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40년 동안 지독하게 지겹게 반복시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준다는 것을 훈련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준다.' 단순합니다. 단순한데 인간이 미련해서 이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땅만 파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먹을 것을 바로가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하고 노예로 살면 바로가 먹을 것을 주고, 열심히 노동하면 저녁이 되면 먹을 것이 쌓여 있고, 그래서 먹을 것이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내 근육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내 수고와 내 노력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교정하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자그마치 그렇다고 이 40년 동안 교정해서 진짜 제대로 교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원위치가 되었습니다.
1-2. 위의 것을 찾으라
야고보가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온갖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을 찾으라,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은 그러면 맨날 하늘만 보고 삽니까? 땅에 우리 식구들도 있고 일터도 있고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우리 시선이 먼저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그다음 것이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나를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돌보시는 분, 복의 근원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시편 16편 2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이야기를 뒤에 합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로, 그 첫 번째 일성으로 하는 것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복의 근원이십니다. 다윗이 왕이 됩니다. 이 나라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일터는 땅에 있습니다. 가서 열심히 일합니다.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얼굴 맞대고 일하고 수고하고, 가정도 꾸려가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정도 주셨고 일터도 주셨다는 것,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복의 근원을 따져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3. 여호와는 나의 목자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부족함 없는 이유를 나열합니다.
첫째가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입니다. 먹고사는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살았더니, 목자만 보고 따라갔더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둘째,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영적인 문제도 풀어 주셨습니다. 셋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면제받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넷째,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원수를 갚아 주셨는데, 원수를 칼로 찔러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원수 앞에서 나를 선대하셨습니다. 나를 더 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위를 바라보면 이런 복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고 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복을 야고보가 이렇게 한 줄로 표현했습니다.
1-4. 변함 없으신 하나님
다시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변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림자는 태양의 높이에 따라서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집니다. 정오의 내 그림자는 아주 짧은데 해 그늘에 내 그림자는 길게 늘어집니다.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절대적인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상대적입니다. 기분 좋을 때는 다 퍼줄 것 같다가, 무언가 좀 꼬이고 불편하고 기분 나쁜 것이 있으면 화도 나고, 저 사람 종잡을 수 없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주 일정하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라, 위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좋은 것과 온갖 다양한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하나님이 빈틈없이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기분에 따라서 줬다 뺏었다 하는 분이 아니시고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그 말을 야고보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남
그다음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18절을 보시면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어가 누굽니까? '그가'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사는 이 문장 마지막에 '낳으셨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셨습니다. 누구를 낳으셨습니까?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면 문장 뼈대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 딸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낳는 방식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어떻게 났습니까? 무엇으로 났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요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과 대화에 그 기준에 의하면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려면, 하나님의 진짜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진리의 말씀을 꼭 붙잡고 그 말씀 부여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서 믿음은 들으면서 나니까 말씀을 잘 듣고 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누구한테 안수기도 받는다고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거듭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그 말씀이 나를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말씀 한 절이 내 심령과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서 내가 거듭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1. 열매 맺는 존재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났으니까, 거듭난 우리는 썩어 없어질 열매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하나하나 찾아보고 이해하고 읽으면 굉장히 의미가 있고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으니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고,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으니까 우리는 거듭난 자가 되고, 거듭난 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로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것인가? 우리는 거듭났는데,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났는데, 진짜 내 열매, 내 나무에 열매가 있는가? 자랑할 만한 열매가 있고,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그 열매로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을 따져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고 비슷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9절 말씀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 하나님의 말씀으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했습니까?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줘서 고맙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전제가 필요합니다. 목회자가 진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됩니다. 자기 생각을 전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물타기를 하면 성도들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좋은 젖을 먹어야 잘 자라고 건강합니다. 배앓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인간의 생각을 타버리면 물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말씀을 성도들이 듣고 받으면 탈이 납니다. 문제가 생기고 영이 병듭니다. 그래서 이 전제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해야 되고, 전할 때는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것이 안 되고 무조건 전하면서 '이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 받으세요' 하면 그것은 죄책감만 줍니다.
2-3. 말씀의 역사
자, 그렇게 되면 전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사도행전 10장 4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은혜받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성령 충만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만 가감 없이 전하고, 본인이 깨끗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은혜받고 감동을 받습니다. 지금 이 베드로가 옛날 베드로 맞습니까? 사람은 똑같은데 완전히 바뀐 베드로 아닙니까? 거짓말했던 베드로, 비겁했던 베드로, 도망갔던 베드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회복된 베드로가 거룩한 영으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니까 이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3. 거듭난 자의 삶
자 이제 거듭남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1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거듭남을 경험했습니다. 자, 그런 사람의 표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딱 표가 납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면,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말씀 많이 듣긴 했는데, '거듭난 자의 삶의 표시'라는 말을 연결해서 듣는 것은 별로 익숙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 말씀 안에서 거듭난 자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3-1. 듣기는 속히
첫째,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입니다. 듣기를 속히 하라는 말은 우선순위입니다. 지금 듣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먼저 우선순위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세상 말 듣는 것, 사람 말 듣는 것, 이런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듣는 것도 포함입니다. 대화할 때 상대방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3-2. 말하기는 더디
둘째,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3-3. 성내기도 더디
셋째,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20절에서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3-4. 마음을 예비하라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받으려면 내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똑같은데 밭이 네 종류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밭입니다. 좋은 밭만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내 마음이 좋은 밭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염려도 뽑아내고, 걱정도 뽑아내고, 단단한 마음도 부드럽게 하고, 바쁜 것도 정리하고, 그래야 거기에 우리 인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래야 거듭난 자의 삶입니다.
4. 말씀을 행하는 자
그런데 이제 야고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야고보서 전체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22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아까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 예수 믿는 것이 들키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행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기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까? 자기를 속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4-1. 자기를 속이는 것
왜 그럴까요? 속인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기만 하면 내가 이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으로 끝내 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학생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수학 문제를 선생님이 칠판에다가 풀어주십니다. 한 열 문제 정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 풀 것 같습니다.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식에 딱 적용해서 넣어서 문제를 풀어 주니까 다 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 문제 정도 풀고 선생님이 "너 집에 가서 복습하고 이와 유사한 문제들을 풀어서 가지고 와라. 그러면 내일 시험을 보자. 20문제 시험 본다." 그런데 다 풀 것 같습니다. 보니까 다 할 것 같습니다. 집에 가서 가방 던져 놓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신나게요. 다 아니까, 나 다 안다고요. 그다음 날 시험 쳤습니다. 몇 점 나올까요? 잘해야 20점입니다. 하나도 안 해보면 잘해야 20점, 거의 다 20점 미만이겠지요. 일단은 시간을 정확하게 못 지키고, 그리고 정신없어서 간단한 수리 계산에 다 틀립니다. 눈으로는, 머리로는 할 것 같았는데 해보니까 안 됩니다. 그것이 수학입니다.
4-2. 실천의 어려움
그런데 지금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설교 시간에 들었습니다.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으니까요. 예배드리고 집에 가면서 목사님한테 "저 은혜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요. 한 번도 사랑하게 살아보지도 않았고, 한 번도 사랑을 실천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는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말씀을 붙잡고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해 봐야지. 집에 갔습니다. 웬수 같은 남편이 라면 끓여 오라고 합니다. "네가 끓여 먹어라. 네가 네 손 있잖아." 당장 그때부터, 그때부터 사랑하라는 말씀은 딱 뒤집어엎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꼴 보기 싫고 미워 죽겠고, 그냥 옷 입고 다니는 것, 뒤통수만 봐도 밉고, 발뒤꿈치만 봐도 밉고, 다 미운데 애는 또 뭐 학원 간다고 돈 달라고 합니다. 갑자기 막 열이 뻗칩니다. "너 가져간 만큼 성적이 얼마 나왔어?" 미워 죽겠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사랑이 안 되는데요. 사랑하라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절망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 이것 실천해 봐야지' 하고 실천하려고 가지고 나오자마자 뒤집어엎고, 그리고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 절망감을 가지고 그다음 주일날 나와서 참회의 기도 시간에 "하나님 저 절망하고 왔습니다." 이래야, 이래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4-3. 말씀과 씨름하라
그런데 일주일 동안 말씀 붙들고 한 번도 안 살아 봤습니다. 한 번도요. 그러면 주일날 참회 기도에 참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회할 것이 없으면 참회 기도 30초 시간에 무엇을 생각할까요? 오르간 연주곡, 피아노 연주곡이 "저번에 아는 건데", 그리고 "집에 가서 뭘 먹지, 점심 뭘 먹지", 뭐 이런 것 생각하고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말씀 붙들고 살다가 그 말씀대로 성공하지 못해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씀 가지고 들고 가서 살아보려고 부딪치고, 애쓰고, 실패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이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해보니까 안 되더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안 해보면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지금 야고보가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너희 살아봤느냐고, 그 말씀대로 해 봤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이 수요일인데 지난 주일 예배 설교 말씀 제목이 기억이 나십니까? 이름 불러서 물어볼까요? 기억이 안 나지요. 살아봐야 기억이 납니다. 반복되는 죄 짓지 마라, 신앙생활 똑바로 하고, 경건 생활하고, 말씀해 봐라, 나를 비춰 봐라,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나의 때를 맞추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에 나를 맞추기는커녕 당장 이번 주일날 약속 잡혀서 예배도 못 지키게 생겼는데, 그것을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면 절대 말씀 붙들고 못 삽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설교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지만 전국에, 전 세계에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님 설교 다 듣고 있습니다. 들으면 뭐합니까? 한 말씀도 가지고 살아보지 않았는데요.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요? 그랬다고 착각하니까요.
4-4. 거울의 비유
그것을 바울도 그렇게 표현했고, 지금 야고보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3-24절을 보면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문화로 생각하면 잘 납득이 안 되는데, 그 당시는 거울이 청동거울입니다. 지금처럼 말끔한 거울이 아니고 청동거울이라서 희미합니다. 그래서 그 거울을 보고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했는데, 희미하니까 자기 얼굴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으니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4-5. 행함의 복
말씀을 행해 보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25절을 보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복 받는다고 했습니다. 살아보는 사람이 복 받습니다. 성공한 자가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 사랑하려고 했는데 안 됐습니다, 그런 자가 복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 번 해보고, 20번 해보고, 100번 하다 보면 요만큼씩 희망이 보이고, 요만큼씩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되는 순간 희열을 느낍니다. "아 하나님 말씀대로 제가 오늘 한 번 살아냈습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그러면 평생 동안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살고, 그런 기쁨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느니라'는 그 말씀에 합당하게 사는 존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4-6. 듣고 지키는 복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한 사람이 크게 은혜를 받았나 봅니다. 11장 2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당신의 어머니는 참 복이 많은 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하시고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해 주시니 당신의 어머니는 진짜 복 많은 여인입니다. 부럽습니다. 나도 이런 아이를 하나 낳고 싶은데요." 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진짜 복 있는 자는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
4-7. 테레오의 의미
여기서 '지킨다'는 말을 계시록 1장 3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지키라'는 말은 테레오(τηρέω)라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테레오는 '시선을 계속 두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시선을 계속 둔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시선을 둔다는 말일까요? 말씀에 시선을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킨다'는 말을 그대로 해야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대로 해야 된다는 것으로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대로 하는 것이 처음부터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테레오하라, 시선을 말씀에서 떼지 마라'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예를 들었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시선을 떼지 않고 내 삶을 계속 말씀에 비추어서 대입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 그대로 하는 것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너무 좋지만 우리는 연약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주님이 잘 아시니까, 시선을 떼지 마라, 테레오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너의 시선을 두고, 그 말씀을 머릿속에 두고, 염두에 두고, 네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법적으로 변주해 가면서 계속해서 지키도록 애쓰고 노력해 가라, 그러면 복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실패해도 좋으니까, 하다 안 돼도 좋으니까, 성질이 급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내 말이 앞서고, 그런데 "하나님 제가 이번에도 또 실수했습니다" 하면서 다시 또 나를 돌아보고, 그 말씀에서 내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사람, 그 사람이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100퍼센트 완벽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5. 참된 경건
참된 경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세 가지가 나옵니다.
5-1. 혀를 재갈 물리라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라고 부정적으로 말했는데, 이것을 긍정으로 바꾸면 '참된 경건은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사람'입니다. 경건하다 하면서 말이 앞서고, 듣는 것보다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자꾸 말을 많이 하면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을 잘해야 됩니다. 듣는 것,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참된 경건은 혀를 재갈 물려야 합니다. 꼭 참으라는 뜻입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고 먼저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5-2.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이라고 하면서 이제 두 번째가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자꾸 고아와 과부를 이야기할까요? 지겹습니다. 하나님도 고아와 과부, 예수님도 고아와 과부입니다. 왜 고아와 과부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에게 돌아올 것이 없는 사람이 고아와 과부이기 때문입니다. 나하고 이해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도와준다고 뭐 해결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밥 한 끼 사준다고 인생이 확 달라집니까? 안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내가 넣어준 만큼 결과물로 나에게 돌아옵니까? 안 돌아옵니다.
'대접하고 대접받으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참된 경건은 그래서, 이 말은 좀 경건한 사람은 어리숙하게 살아라, 좀 바보같이 살아라, 자꾸 준 만큼 받으려고 하지 말고, 너무 영악하게 살지 말고, 베풀고 돌려받을 생각하지 마라, 나누어 주고 잊어버려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좀 이래야 됩니다. 사실은 좀 미련해야 됩니다. 교회가요. 교회가 너무 계산이 빠르면 그것은 주식회사 예수그리스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주식회사는 손해 보면 파산시키고 끝내 버립니다. 그런데 교회는 주식회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논리, 자본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그냥 좀 미련하고 어리숙하고 그래야 교회다운 것입니다.
5-3. 세속에 물들지 말라
그래서 세 번째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못 지키고 세속에 물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아니 자기를 못 지키고 세속에 물드는 것이 왜 우상숭배입니까?"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 시대 때 요즘 우리 새벽에 사사기를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했다는 것, 그것을 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나는 뭐 그런 형상 만들어 놓고 거기 절하는 것이 아니니까 난 우상숭배자가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포괄적으로 생각하셔야 됩니다. 세상의 논리에 물들어가 버리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세상 사람들 말하는 대로 그냥 따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명확한 자기 기준이 있으면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명확한 자기 기준이 있으면 절대로 세상의 논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가르치라, 레위인들에게도 신앙교육 철저하게 하라, 예배 중심으로 살라고 말씀하신 것은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없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그냥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으니까 다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수가 "동성애가 대세야" 그러니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 반대하면 요즘 이상한 사람 취급받아. 그냥 너는 반대하더라도 모른 척해." 그냥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기준을 제대로 세우고, 하나님 말씀에 기준이 서 있으면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대로 사는 사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야 저렇게도 사네, 저렇게 사는 것이 괜찮네, 매력 있네, 재밌네" 그리고 와야 됩니다. 그 사람들이요. 그것이 전도 아닙니까? "아 저 교회 정말 매력적이네" 그리고 와야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기준이 없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기준이 없으니까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기 기준이 철저하게 서 있는 사람입니다.
나가며
경건한 사람은 지금 참된 경건 세 가지를 야고보가 설명했습니다. 이제 야고보서 1장을 가지고 우리가 두 번을 나누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1장을 한번 집에 가셔서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또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울 것 같은데 어렵지 않고, 그래서 볼만한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야고보서 말씀을 함께 나누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는데,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거듭난 자는 이렇게 살라 하셨는데,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여 우리를 돌아봅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마치 다 행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우리를 돌아봅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에 시선을 맞추고 계속해서 말씀과 내 삶을 살펴보고 전진하고 걸어가라고 하신 그 말씀 기억하고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경건을 말씀하셨으니 그 경건을 지키며 살고, 진실로 경건한 자로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