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특강 3 - 믿음과 행함 (약 2장)
야고보서 2장 14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오늘은 야고보서 성경공부 세 번째 시간입니다. 1장을 2주에 걸쳐 공부했고, 오늘은 2장을 나눌 차례인데 제목이 '믿음과 행함'입니다.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도 있었고 또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2장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행함의 변증법적인 관계, 그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를 함께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실 이 야고보서를 보면 뭔가 거대한 말씀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거듭난 자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는데, 거듭난 자가 뭔가 위대한 능력을 행하고 바다를 가르고 물 위를 걸어가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건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것입니다. 잘 들어주고 말하는 걸 좀 참아주고 그리고 화내는 걸 좀 참아주는 것, 그게 거듭난 사람의 표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것을 거듭난 사람의 표시라고 말하고, 오늘도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아주 소소하고 작은 걸 얘기하는데, 왜 이 작은 걸 얘기하느냐 하면, 사실 믿음은 그 기초가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게 무너지면 그 위에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첫 시작이 중요하고, 우리 신앙생활도 뭔가 좀 큰 일을 하려고 사람들이 처음부터 생각을 하는데, 큰일을 하려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먹어야 되고 결심해야 되고 시작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조금씩 쉬었다 갈지라도 방향을 정했으면 계속해서 나아가야 되고, 그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라고 하는 게 뭔가 위대하고 거창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이런 게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별 볼 일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별 볼 일 없는 게 해보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 세끼 소식하고 하루에 충분한 운동을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 다 알지만 그렇게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저녁에 폭식하고 야식 먹고 늘어지게 자고, 잘 안 됩니다. 그런 것조차 잘 안 되는데, 믿음을 위해서 정말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아주 소소하고 작은 걸 지켜 나가는 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1. 차별하지 말라
이제 오늘 '믿음과 행함'을 한번 보겠습니다. 교재 14쪽을 보시면 '차별하지 말라'라는 주제가 나옵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여기까지만 보고 뒤를 가려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뒤를 내가 그냥 임의로 채운다고 생각해보면, 믿음을 가졌으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뭘까요?
우리는 좀 큰 걸 생각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가졌으니 뭔가 큰일을 해라. 순교해라. 믿음을 가졌으니 하나님 앞에 너의 목숨을 내놓아라. 믿음을 가졌으니 전 재산을 바쳐라." 이런 걸 막 요구할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가 초대교회이니까, 아직까지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그런 시대이니까, 예수 믿는 게 발각되면 목숨을 걸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그다음 보십시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런 말씀이 '믿음을 가졌으니' 이 뒤에 나오리라고는 별로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그냥 성경을 별 생각 없이 읽으니까 그런 것이지, '너희가 믿음을 가졌는데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을 차별하는 자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닌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요즘 차별금지법이 야단인데, 그걸 법으로 정할 이유가 없고, 이미 우리 성경에는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미 2000년 전부터 사도들이 이렇게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1-1. 차별의 의미
여기 '차별하다'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에서 보면 '프로소폴렘프시아(προσωποληψία)'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가 뭐냐면 '누군가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누군가의 얼굴을 들어 올린다. 이걸 차별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가 모여 있는 자리에 아주 멋진 옷을 입은 사람, 귀부인이 우리 앞에 이렇게 지나갑니다. 그러면 우리 얼굴이 이렇게 고개가 들려지고 그 사람이 따라가는 동선을 따라 계속 눈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아주 유명한 정치인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얼굴이 들려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따라가는 동선을 따라가고, 또 굉장한 재벌이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따라 우리 눈이 계속 움직일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왔을까? 여기 온 이유가 뭘까?' 그걸 차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 옷을 남루하게 입고 좀 못나 보이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얼굴을 들어 올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왔는가 보다, 가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사람이 100명이 왔다 지나가도 내 눈을 들 일이 별로 없고 얼굴을 들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를 보고 우리의 얼굴이 들려 올라가고 그리고 우리 눈이 계속 따라간다면 이걸 차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굉장히 포괄적입니다.
그다음 잠언에서도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24장을 보시면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낯을 보다'는 '외모를 보다'라는 뜻입니다. 재판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는 건 옳지 못합니다. 또 28장 잠언 28장에 보면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1장 17절을 보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외모라는 걸 우리가 한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짜 외모입니다. 아주 잘생긴 사람, 아주 예쁜 사람, 그냥 말 그대로 외모를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외모가 재력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 그것도 외모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모가 권력도 그 안에 포함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외모라고 하는 건 진짜 외모, 우리가 말하는 외모, 그다음 재물, 권력, 이 세 가지를 다 외모라는 말로 통칭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1-2. 외모에 흔들리는 이유
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외모에 우리 고개가 들려지고 눈이 계속 따라가고 그런 사람을 더 존경하고 더 좋아하고 더 다르게 대하는 걸까요? 왜 그런 걸까요? 다시 우리가 1절 말씀으로 올라가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믿음을 가졌다는 말은 누구를 신뢰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굉장히 아름답고 굉장히 멋진 사람이 왔습니다. 그 사람을 내가 막 바라보고 눈이 따라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저 사람하고 나하고 어떤 모종의 은밀한 관계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입니다. 물질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우리 눈앞에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에는 저 사람과 어떻게 하면 관계를 맺어서 저 사람의 물질로 내가 조금이라도 이득을 볼까 하는 그런 기대감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우리 공동체에 왔다 갔다 하면 내가 저 사람의 권력으로 어떤 이득을 볼까 하는 그런 기대감입니다.
그러면 이게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입니까?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눈을 들고 고개를 들고 그런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그 사람을 향하여 내가 고개를 들리고 눈이 따라간다는 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그 사람의 외모가 예쁘건 잘생겼건 권력이 있건 재산이 있건 그런 거 별 상관없이 나는 그냥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꾸만 사람들의 외모에 흔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외모에, 그게 외모라는 건 아까 말씀드린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인데, 여기에 내가 자꾸 흔들리고 주눅 듭니다. 자꾸 그러면 그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태도가 결단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떠하든 그 사람에게 내가 덧볼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내가 뭔가 영향을 입을 일이 없고, 내가 그 사람과 은밀한 관계를 가질 기대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미 죄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외모를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가 이렇게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믿음을 가진 자는 순교하는 자다' 이것보다 이게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냥 눈이 그렇게 가는 것이고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인데,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는 이 마음을 지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키는 게 너무너무 중요하고 정말 잘 안 되는 것이고 힘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3. 교회 안의 차별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을 보면 야고보가 교회 안 차별의 예로 들고 있는 사건을 말해보십시오. 이 교회에 이런 사건들이 아마 있었나 봅니다. 예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지금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면, 일단은 이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입니다. 외모에 대해서 일단 재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대 시대 2000년 전에는 계급에 따라서,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입을 수 있는 옷의 색깔도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 색깔이 최고위층의 옷의 색깔을 가지고 왔다면 이 사람은 권력도 있고 재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외모는 여기 지금 표현을 안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교회 공동체에 왔습니다. 회당에 왔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굉장히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왔습니다. 어떻게 대하느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행동 자체가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결단코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었다고, 물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혹은 냄새가 난다고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여도 곤란하고, 이렇게 외모가 출중하다고 이런 사람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도 믿음이 있는 자가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 이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니까 야고보 사도가 이건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까? 양의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 염소의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이 묻습니다. "아니 제가 왜 이 자리에, 구원받는 양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랬더니 "네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옷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음식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염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 제가 왜 여기 심판받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반대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서 누가 들어오든지 간에, 우리 새 가족 중에 어떤 사람이 오든지 간에, 우린 그분들을 환대해야 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결국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양과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리가 양의 자리에 서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인이고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걸 우리가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글러먹은 일입니까?
그런데 이건 굉장히 힘든 일인 게, 정말 영적으로 뛰어났다고 하는 사무엘도 이새의 집에 기름 부으러 갔다가 장남 엘리압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외모를 보고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영적이 뛰어나다고 하는 사무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심을 보는 훈련, 그리고 우리가 중심을 잘 못 보면 똑같이 대하면 됩니다. 그냥 똑같이. 똑같이 차갑게 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똑같이 환대하고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섬겨주고, 예수님처럼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다음 교재 15쪽 보시면 성도들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에 나오죠.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셨다고요?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는데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택한 자를 우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되게 웃깁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다고. 그런데 우리 논리는 뭡니까?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 나랏님도 가난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구제하라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품어주고 이해해주고 안아주고 그리고 환대해 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마음이 가난하니까 그 가난한 사람들이 믿음에는 더 부요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 헌금하는 사람들, 마가복음 말씀에 나오죠. 12장 41절에서 43절 보시면,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 때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부자는 많이 넣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그런데 여기 '여러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들이 많이 와 가지고 많이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부자는 많은데 과부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난한' 왜 그랬을까요? 다른 가난한 사람들은 성전에 감히 나와서 헌금할 용기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헌금 넣는 게 재미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막 봐주고 칭찬하고 하니까, 금전이 헌금함에 떨어질 때 묵직한 소리를 막 내니까, 사람들이 "와 대단하십니다" 하고 박수 쳐주고 인사하고 하니까.
예수님 말씀하시죠.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 뒤에 말씀하시죠.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결단코 차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결단코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자들을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 믿는 공동체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면 그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도 한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가난한 자'라 그랬습니다. 왜요?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택하셨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결단코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그냥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논리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걸 덧붙일 이유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2. 율법과 긍휼
2-1. 이웃 사랑의 의미
이제 율법에 대한 걸 한번 볼게요. 야고보서 2장 8절을 보시면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 말씀 우리가 많이 보셨죠. 이 말씀의 출처가 마태복음 22장인데요. 기록되어 있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건 우리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그냥 딱 정리하신 말씀입니다. 십계명이 10가지입니다. 10가지 중에 한 부분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5계명부터 십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입니다. 저희가 자주 그런 얘기 드립니다. 교회에서 십자가가 교회 상징인데, 십자가는 수직의 나무와 수평의 나무가 서로 교차되어 있는데, 이 수직의 나무는 위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우리 인간 사이에 연결의 나무라면, 수평의 나무는 이웃과 이웃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수직의 나무 하나만 있어서는 그걸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이 나무가 함께 있을 때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만 있으면 그건 그냥 나무 작대기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결코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두 팔, 발목 못이 박혀서 돌아가셨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등과 차별 없음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십자가의 정신이 아닙니까?
그러면 오늘 교회가 십자가를 걸고 있고, 우리 성도들이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고,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한다면, 수직과 수평과의 관계를 잘 이루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직의 관계는 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인의 신앙이니까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수평의 관계에서 이게 잘 안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의미가 뭘까요? 이 의미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좀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걸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고 돈 주고 그들을 가난하니까 먹을 것 주고 입을 옷 주고 이걸로 그냥 끝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물론 중요한데,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교회가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신앙을 잘 모르는 사람들, 교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문만 봐도 언론 보도만 봐도 시험에 막 듭니다. 그냥 얼마나 시험에 많이 들어요? 그런데 교회는 은혜를 줘야 됩니다. 사람들에게 "와 정말 대단하다. 교회니까. 나는 못할 일을 교회가 하는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나 같은 날라리는, 나는 교회 근처에도 한 번도 안 가봤으니까, 나는 그거 상상도 못하는데 교회니까 저렇게 하는구나" 이렇게 돼서 은혜를 줘야지, "아휴 교회가 걱정이다. 저 교회가, 아니 이렇게..." 돼 버리면 그건 수평의 관계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건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걸 포함하는 말입니다.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매야 합니다. 우리가 그건 아주 심각하고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지금 그 얘기를 야고보 사도가 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2-2. 율법의 한계
그다음 교재 한쪽 넘기시면 16쪽 보시면 율법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한계 얘기를 하는데요. 율법의 한계가 있죠. 거기 보시면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사람을 차별하면 범법자가 된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살인하는 거 범죄죠, 심각한 범죄죠. 간음하는 것, 도둑질하는 거, 부모 공경 안 하는 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 우상숭배하는 것 등등, 이거 다 큰 범죄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차별하는 것도 온 율법 중에 하나를 범하는 거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 뭐 차별하는 거, 그것까지야. 뭐 나는 살인도 하지 않았고 간음도 하지 않고 도둑질도 안 했는데 차별하는 거야 그냥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인데, 그거 별것 아닌 거 가지고."
그런데 그 별것 아닌 것 하나가 범법자가 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래야 외모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외모가 좋고 출중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자, 그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2-3. 긍휼의 원리
그다음 이제 율법의 한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12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기 긍휼이라는 말씀을 이 단락 끝에 하신 이유가 뭘까요?
차별하는 자 범법자 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긍휼을 얘기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이 한두 번 봐준다는 뜻입니다. 긍휼을 베풀어준다. 그 말은 우리도 긍휼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이건 지금 초대교회 공동체에 정말 용납하기 힘든 사람이 들어옵니다. 긍휼을 베풀어 줘야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죠. 정말 안아주기 힘든 사람이 들어옵니다. 아니 몸에 악취나는 사람이야 목욕시키면 되는데, 사람이 머리에 뿔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끊임없이 감싸주고 안아주고 품어주고 포용해 주고 긍휼을 베풀어 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 보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 중에 나오는 말씀이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왜요? 나도 그래야 긍휼히 여김을 받으니까. 우리가 성도를 긍휼히 여기고 모난 사람, 불난 사람,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잘 품어주고 용납하고 이해해주면 나라고 완전하겠습니까? 우리라고. 우리도 모난 부분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사람이 까다롭고 잘 못 받아들이고 자기 기준과 한계가 분명하고 명확하고 탁탁 쳐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이 "너도 그러면 긍휼히 뭘 못 받아, 나도 너를 쳐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이런 거. 그래서 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는 차별하지 말고 좀 품어주라는 그런 뜻입니다.
3. 믿음과 행함
3-1. 사적 믿음과 공적 행함
자 이제 믿음과 행함, 사실 야고보서 전체 주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시작할 때 읽었던 말씀인데요. 2장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과 행함을 지금 이렇게 설명하고 계시죠. 자 믿음과 행함을 얘기하고 제가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면 나무와 열매를 예로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에서 20절인데, 17절 읽어볼게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자 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해야 될까요? 이게 사실 고민이 많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명도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데, 어렵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저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 은밀한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행함은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기준이 되고, 행함이 밖으로 나와서 열매가 됩니다. 이 열매가 되는 순간 열매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 나무가 그냥 묘목으로 있으면 그냥 나무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죠. 열매를 맺죠. 그 열매 누가 먹습니까? 주인이 먹고 동네 사람들이 먹고 주인이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람들이 다 먹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주인과 나무의 관계지만 열매는 주인과 나무만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 믿음은 사적인 것이고 행함은 공적인 영역입니다. 행함은. 그래서 지금 야고보 사도는 사적인 영역의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서 공적인 영역까지 넘어가라는 뜻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3-2. 복음의 열매
한 가지 우리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OECD에도 가입한 나라가 됐고 대단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됐죠. 그런데 과거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한 150년 전 그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가난하고 미개했습니까? 구한말 너무너무 가난하고 미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왔는데 그 복음을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서 공중에 구름 타고 나타나셔서 "하나님 믿으라, 예수 믿으라, 교회 세워라"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누가 오신 겁니까?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선교사들이. 그런데 그 선교사들은 그 믿음이 자기 개인의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 믿음을 행동하는 믿음으로 옮겨낸 것입니다. 열매로 표현한 것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타나서 열매가 되어서 우리가 그걸 먹은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나는 그냥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이야"라고 했더라면 그 사람들이 여기 올 이유가 없죠. 그분들 중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북장로교, 호주 등등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다 왔습니다. 의사들이 왔습니다. 간호사들이 왔습니다. 대학교 교수들이 왔습니다. 그 나라에서 다 잘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거기 있으면 평생이 다 보장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미지의 나라, 그 당시 전 세계 최빈국에, 와보니까 사람들이 손도 안 씻고 먹습니다. 그냥 화장실하고 집하고의 구별도 없습니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런 나라에 왔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강대국의 열강에 싸움터가 돼 가지고 엉망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와 가지고 그분들의 믿음이 열매가 되어서 지금 우리가 부자가 됐습니다.
그분들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분들이 직접 헌금했습니다. 자기 사재를 털었습니다. 그분들의 선교 편지를 받고 본국에서 감동받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헌납해 가지고 여기에 교회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믿음이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세상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안티 크리스천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분들은 진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왜 어리석냐, 지금 그들이 누리는 이 문명의 혜택과 우리나라의 번영은 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다 복음이, 만약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서 이렇게 믿음이 행함으로 열매를 맺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수천 년 동안 불교문화권에 있었습니다. 불교문화권에 미신과 불교가 성행했던 이 나라가 과연 그대로 있었으며,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믿음이 하나의 믿음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믿음이 자라서 열매가 되고 좋은 나무가 되고 이게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니까 나라가 변했습니다. 민족이 변했습니다.
3-3. 가정의 변화
가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예들이 너무 많죠. 한 가정에 며느리 하나가 시집을 갔는데 예수 믿는 며느리입니다. 가서 시집가 보니까 엉망진창입니다. 제사만 뭐 1년에 열 몇 번이 넘고 가정에 맨날 굿하고 부적 쓰고 쓸데없는 데 돈 지출이 너무 많고. 그때부터 이 며느리가 새벽기도 다니고 핍박 견디고 기도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병수발 다 하고 똥오줌 다 받아내고 그래서 그 가정 다 복음화시키고 구원 얻게 하고, 그래서 그 과정을 제대로 된 믿음의 가정으로 세우면 한 사람의 믿음이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가서 가정을 구원합니다. 그런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중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그냥 하나의 믿음으로 있으면, 행함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는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짜죠. 그냥 가짜. 씨앗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씨앗인데 이 씨앗을 심어 봐야 이 씨앗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옵니다.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가 돼야 이 씨앗이 진짜인데, 심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정말 내가 믿음이 있다면 내가 내 주변을 변화시키느냐, 한 사람이라도 내가 내 믿음으로 그들을 변화시켰느냐, 거창하게 나라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집안까지는 아니라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을 내가 붙잡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믿음이냐, 이게 진짜 믿음과 가짜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야고보 사도가 그런 거죠.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유익이 없습니다. 나라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가정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러면 너 혼자 믿어서 너 혼자 천국 가는데, 이 믿음은 정말 유익 없는 믿음입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그런 얘기를 지금 이런 어조로 하시는 것입니다.
4. 행함 없는 믿음
4-1. 가짜 믿음의 실체
가짜 믿음은 뭡니까? 가짜 믿음. 야고보서 2장 15절을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요한복음 9장 1절과 2절을 한번 볼게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가 이걸 여기 왜 인용하냐면,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맹인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 그러면 이런 분들은 경제활동을 어떻게 합니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집이 정말 대단한 부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걸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하게 힘들게.
그러니까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는 "아 저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거다. 그렇지 않고야 저렇게 구걸하고 날 때부터 맹인으로 고생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요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요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을 하시려고 하는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거 분명히 죄를 지었다. 그래서 망했다. 그리고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흘러가서 저렇게 살고 있는 거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도와주게 됩니다. 자기 죄가 있으니까. "죄 있는 놈은 벌받아야지. 부모의 죄가 내려와서 지금도 벌받고 있는 중이면 그 벌이 다 할 때까지 그 죗값을 치러야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논리죠. 그게 자기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야 안됐어, 평안히 가, 좀 따뜻하게 너 몸이 있고 그래도 좀 잘 먹어야지, 힘내야지" 그러고 한 푼도 안 줍니다. 따뜻한 밥도 한 그릇 안 주면서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얘기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하는 말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4-2. 죽은 믿음
야고보의 말이 좀 강해지죠. 행함이 없는 믿음이 유익이 없다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행함이 없고 믿음 하나만 있으면 수직만 있기 때문에 이건 유익이 없습니다. 주변 공동체에게. 그런데 그게 조금 더 나아가면 이건 죽었다 그랬습니다. 죽었다. 그러면 그 믿음 자체가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나타나지 않으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런데 왜 안 나타날까요? 어려워서요? 어려워서?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게 아닙니다. 신명기 30장 말씀 한번 보겠습니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신명기 말씀 다 하시고 이제 마지막 결론쯤 와서 이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멀지도 않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제 핑계를 하는 것입니다. 12절 13절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사람들은 "저 하늘 위에 있고 바다 건너 있어서 말씀 행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뭐 이런 말들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바다 건너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마음에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행함으로 가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이 없어서.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거 누가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이 행함으로 가지 않도록 내 마음에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행함으로 가면 가는 거는 당연한 건데, 그러면 이 마음에 성령께서 주장하고 계시고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주인 되어 계시면 믿음이 행함으로 나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행함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이 마음을 그리스도 아닌 성령 아닌 다른 게 지배하고 있으니까 믿음이 행함으로 안 가는 것입니다.
그냥 지난주에 우리 공부했습니다. 자꾸 듣다 보면 다 아는 걸로 착각한다고. 자꾸 듣다 보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요. 마음속에 성령께서 진짜 내주하고 계신지, 내 마음속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주장하고 계신지를 매일같이 묵상하고 살피고 돌이켜 봐야 됩니다. 마음이 안 된다는 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돈이 없는 게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게 아니고 마음이 없다는 거, "야 나 마음이 안 가"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불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3. 허탄한 사람
그런 사람을 야고보 사도는 허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8절에서 20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나타나다. 이 '허탄하다'는 말은 '케노스(κενός)'입니다.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텅 빈 것.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을 줬는데 기대하는 마음으로 선물 포장지를 다 겹겹이 다 풀었는데, 아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화가 확 나죠. 황당하다가 처음에는 분노가 막 생기고 "이게 나를 놀리나" 이런 마음이 듭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사람이 보낸 사람이 보냈는데 기분 나쁘죠.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풀어 보셨는데 텅 비었습니다. 케노스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불쾌하고 기분 나쁘겠습니까? 알맹이가 없는데.
'헛것'이라는 말을 보면 '아르고스(ἀργός)'라는 헬라어를 썼는데, 이건 '고용되지 않음', '열매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자, 우리는 누구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고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그 뿌리가 하나님께 뿌리박혀 있어야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헛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고용되지 않아서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열매가 없는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표현했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 바람에 나는 겨를 누구라고 말했습니까? 악인이라 그랬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바람에 나는 겨가 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방팔방 막 돌아다니는데 뿌리가 없으니까 열매가 없죠. 아르고스한 것입니다. 고용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다닙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게 헛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말씀 듣고 예배드리고 너무 많이 들어서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내 마음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아서 행함으로 나가지 못하면 그건 헛것이고 착각만 하고 있는 것이고 케노스이고 텅 빈 것입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그게.
4-4. 귀신도 믿는다
자 그다음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 시대 때 귀신들린 자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마가복음 5장 5절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6절 7절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귀신들린 자. 그런데 그 귀신이 예수를 알아보고요. 멀리서 달려왔습니다. 절까지 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귀신들린 자가 얼마나 예수님께 예의 바릅니까? 귀신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절합니다.
그런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딱 보고 압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몰랐는데, 대제사장도 모르고 서기관도 모르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다 예수님인 걸 몰랐는데 귀신은 딱 보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귀신입니다. 우리는 상관이 있습니다. 관계가 있습니다. 얽히고설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래서 예수님께 뿌리박아서 거기서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니까 열매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영을 받았습니까? 예수의 영을 받은 자들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상관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 매여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믿음이 행함으로 가서 열매를 맺죠.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면 열매 없고 그냥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 뭐 귀신 들렸다 귀신 들렸다 하는데, 달리 귀신 들린 게 아닙니다. 알기도 알죠. 열매가 없으니까.
에베소서 4장 13절과 15절 말씀을 보시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 잘 보시면 믿는 것, 아는 것 하나가 된다 그랬죠.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믿는 게 하나가 돼야 된다 그랬죠. 그런데 믿음이라는 걸 야고보 사도의 논리에 의하면 행함과 믿음이 일치되어야 된다 그랬습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아가야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 그랬죠.
15절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야 믿음의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까지입니다. 아는 것까지. 알기는 알죠. 상관이 없죠. 믿고 행하지 않으니까.
5. 진짜 믿음의 본
이제 야고보가 2장을 마무리하면서 진짜 믿음을 가진 자로 두 분의 예를 들고 있는데요. 한 분은 아브라함, 또 한 분은 라합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진짜 믿음은 단순합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열매 맺는 것. 믿음은 개인적인 하나님과 나와의 사적인 건데 행함은 공적인 걸로 확대되는 거라 그랬습니다.
5-1. 아브라함의 믿음
자 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때 진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야고보 얘기는.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나니."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좀 부족했는데, 그전까지는 좀 모자랐는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걸 보면 뭔가 좀 헷갈리는 게 하나 생겨야 됩니다. 창세기 15장 6절 말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그랬죠. 이 창세기 15장 이야기는 아직 이삭을 바치기 전입니다. 이삭도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그런데 그냥 믿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이삭을 바칠 때 의로워졌다 그랬습니다. 이게 어떤 차이입니까? 도대체 뭘 가지고 얘기하는 겁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님을 믿을 때 이 믿음을 의로 여겼다는 말은 칭의의 차원의 구원, 의로움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렇게 칭의 차원의 구원이 있으면 그다음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5장 이후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이 훈련받습니까? 오랫동안 훈련받습니다. 그 훈련 받다가, 받다가, 받다가 나중에 결국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게 되죠.
그러면 뒤에 나오죠. 창세기 22장 12절 보세요.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제야. 이제 됐다는 것입니다. 너의 성화가, 이제 내가 너를 진짜 의롭다고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냥 선언적으로 칭의하신 것이고요. 이제는 훈련을 받아서 정말 의로워진 것입니다. 자기 행함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사실 이건 롯도 마찬가지인데, 롯도 훈련받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성화의 과정을 거치다가 롯은 자기가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못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성실하게 잘 따라가고 수행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말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2. 라합의 믿음
라합 이야기를 하는데요. 자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아서 이삭이 성장해서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려질 때까지 수십 년이죠. 수십 년 동안 훈련받았습니다. 칭의 차원에서 성화의 차원으로 넘어가는데 오랫동안 수십 년이 걸린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게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보세요. 그다음 페이지 보면 여호수아 2장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랬죠. 라합은 여리고 성의 여관 주인입니다. 여관 주인이다 보니까 오가는 소문을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 이야기도 듣고 광야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참 신이고 참 하나님인 걸 알았습니다.
10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이다."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칭의 차원의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다음 여기서 진짜 의롭다 하심은 어디로 나아가느냐, 보세요. 12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정탐꾼 두 명을 숨겨 줬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그게 행함입니다. 수직적인 믿음이, 듣고 생긴 믿음이 행함으로 나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자기 집안 전체를 다 걸었습니다. 이게 라합은 이게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고보 사도가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면서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예를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 쉬운 듯 하면서 쉽지 않은 말씀인데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차별이라는 게 사실은 아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 그리고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는 것. 믿음은 사적인 것이고 그리고 행함은 공적인 영역, 그 믿음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가서 나라를 변화시키고 민족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켰다는 것. 그래서 우리 믿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절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쓸모없습니다. 어디다 씁니까? 쓸모 있는 믿음이 돼야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되는 믿음이 되어야죠.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었은즉 사람의 외모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큰 믿음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저 잘 안다고 착각하는 자로 남지 않도록 도우시고 믿음을 가지고 행함으로 온전케 하는 믿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변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우시고 그 믿음이 이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칭의의 차원으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도우시고 그리고 성화로 나아가고 결국 그 성화가 우리 삶의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믿음, 지금은 연약하지만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자라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하신 아브라함을 칭찬하신 하나님의 칭찬 우리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