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특강 4 - 믿음과 혀 그리고 지혜 (약 3장)
야고보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오늘은 야고보서 공부 네 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 3장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믿음과 혀 그리고 지혜'입니다. 언뜻 보면 믿음과 혀가 무슨 상관이 있고, 지혜는 또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혀와 믿음은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앞서고 행동이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믿음과 행함이 일체가 되지 않는 사람, 곧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혀를 앞세우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행함이란 곧 혀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혀로 뱉은 말은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도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선생이 되지 말라
1-1. 심판의 두려움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이죠.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아주 명확합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는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선생이 어떤 자들인가, 이 선생의 범위를 먼저 한정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생을 '디다스칼로이'(διδάσκαλοι)라고 했는데, 이는 랍비와 같이 공적인 가르침을 하는 자들, 설교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상 지식이나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설교자를 한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이루고 가르치는 설교자들, 랍비와 같이 공적인 가르침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이런 선생이 되고자 하는 야고보 같은 사람이죠.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야고보, 그래서 야고보가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가르치고 풀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많이 노력하지 말라. 왜냐하면 선생이 되면 심판의 첫 번째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회자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려고 너희들 많은 수가 그렇게 노력하지 말라, 심판받는 것이 우리 눈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두 가지 실수
왜 그런가 하면 2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실수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실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있죠.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이라고 했는데, 실수를 헬라어로 '프타이오'(πταίω)라고 썼습니다. 실족하다, 넘어지다라는 말인데 이 실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는 실수, 보통 설교자가 말할 때 설교자의 언어와 설교자의 삶의 실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지시하고 있는데 반대쪽으로 가르치는 것, 말씀을 자기가 오해해서 자기 말로 가르치는 사람은 심판받겠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쪽을 지향하고 있는데 말씀에 자기 생각을 담아서, 자기 의도를 담아서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하나님은 그런 설교자를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한 설교자의 유혹입니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면 평소에 본인이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둔갑시켜서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설교자에게 여기에 절제가 필요하고, 여기에 자기 부인이 필요하고, 여기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평소에 내가 하고 싶은 말, 마음에 담아둔 말, 그리고 저기 저 성도가 앉아 있으면 저분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거기에다 뒤집어씌워 가지고 말을 막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비단 설교자만이 저지르는 잘못이 아니고 부모들도 자녀에게 그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언제 그런가 하면, 가정 예배를 드리다 보면 자녀들이 앉아 있는데 그냥 하나님 말씀만 가지고 서로 나누어야 되는데, 평소에 이 아이에게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하고 싶은 말이 이만큼 올라오고 있었는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뒤집어씌워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아이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놀랍게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은 그 자체를 읽어주고 전하기만 해도 그 아이 마음속에 들어가면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부모가 자녀의 행동까지를 다 일일이 교정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나타나야 되는데, 부모가 적용까지 그냥 A부터 Z까지 다 해주어 버리기 때문에 아이들은 가정예배 드리자고 그러면 일단은 불쾌한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죠.
목회자가 말씀을 무기로 마이크를 잡았다는 이유로 강단에 서서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다 쏟아낸다면 그것은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 사이를 철저하게 구별하지 못할 것이면 그 자리에 서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 여기 실수라는 말을 실족하다, 넘어지다, 즉 실족하게 하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타동사로 쓰면 '누구누구를 실족하게 하다, 넘어지게 하다'는 뜻이 됩니다. 목회자의 말이, 앞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 누군가를 넘어지고 실족하게 할 때, 언제 그때가 가장 큰 때냐 하면 목회자는 설교해 놓고 자기는 그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해놓고 목회자가 평가를 하고 미워하고, '섬기라' 해놓고 자기는 섬기지 않고, '말석에 앉지 말라' 하고, '낮은 사람이 되라' 하고, '겸손하라' 해놓고 본인은 섬김을 받으려 하고 교만하면, 그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시험에 들겠습니까?
그런 두 가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1-3. 외식하는 자들
예수님도 이런 경우를 굉장히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것, 본인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 앞에 데리고 와서 가르치고 또 먹이고 하나님 말씀 일러 주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실이 다르고, 입으로 뱉은 말과 그의 행동이 다르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시험에 들겠습니까? 그러면 심판의 1순위가 됩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고 많이 노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생이 되고 싶어 하죠. 목회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중직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중직들은 자기 말의 책임을 져야 되는 존재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먹이고 목양하고 돌보지만, 중직들은 결정하는 사람 아닙니까? 결정하고 공예배 기도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은 그 기도 뱉은 대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굉장한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런 책임을 야고보 사도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보시면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 분별하며 여기까지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 말씀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것이고, 그 다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옳다 하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 그렇게 살아가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분별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라.
17절을 보면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이라는 것은 여기서 그들이란 말씀을 가르치기는 좋아하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악성종양이라 했습니다. 악성종양은 나도 죽이지만 공동체에 악성 종양이 들어오면 공동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가르치는 목회자와 중직들이 말씀대로 분별하고 그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공동체는 악성 종양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한 인간이 건강하려면 밥을 먹었으면 운동해 줘야 되고, 배웠으면 그대로 행동해야 되고, 그래야 건강합니다. 배우기만 하고 알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떻게 그 사람을 건강한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온전한 사람
그 다음,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의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는 완전한, 성숙한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가르치는 사람인데 철저하게 자기를 억제하고 하나님 말씀만 전하고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그리고 또 본인이 말씀 전한 대로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반쪽짜리 신앙 혹은 3분의 1짜리 신앙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전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목표로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고, 가정의 부모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신앙생활 수십 년 동안 오랫동안 했다면 처음 믿는 초신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믿음의 선배로서 보여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을 계속 하는 것이죠.
2. 혀의 능력과 위험
2-1. 혀의 비유
그 다음, 혀를 통제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은 어떤 유익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비유를 두 가지 썼습니다.
3절에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얼마나 덩치가 큽니까? 그런데 그 덩치 큰 말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딱 잡으면 방향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TV 다큐멘터리를 보면 몽골에서 이제 막 6살, 7살도 안 되는 아이들이 말을 타고 막 달리는데, 그 아이들이 그 덩치 큰 말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말의 입에 재갈 물려서 고삐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좌로 우로 뒤로 뛰고 걷고 서고 앉고, 이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비유로 들었습니다.
두 번째, 4절을 보시면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배가 덩치가 얼마나 큽니까? 큰 배를 방향키 하나를 사공이 조작함으로 배의 동서남북 방향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큰 덩치의 배가 작은 키 하나로 방향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2-2. 혀가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에 있는 것입니다. 5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고 했습니다. 혀가 우리 몸 중에 얼마나 작습니까? 혀가 입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혀를 내밀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혀가 큰 것을 자랑한다는 말은 우리 온 몸의 방향을 좌우한다는 뜻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말의 방향을 좌우하고, 배의 작은 키가 배 방향을 좌우하는 것처럼, 우리 혀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축복하는 말, 사랑하는 말, 긍정적인 말은 우리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끌어가고, 저주하는 말, 죽음을 부르는 말, 부정적인 말은 우리 인생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이것은 방향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서 지음 받은 존재이니까, 하나님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특징도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있는 존재이니까, 우리 말에는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권을 말씀으로 하셨지 않습니까? 빛이 있으라 빛이 있었고, 하늘에 해 달 별도, 바다의 고기도,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다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 창조의 방향성을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그대로 부여받은 한 인격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우리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대로 순종하고 그 방향을 제대로 가정하기만 하면 우리 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말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단지 말만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행동하면 그 말과 행동의 역사가 배가되고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방향을 얘기하는데, 그 방향을 우리가 잘 잡아 주어야 됩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이 어떤지, 그것은 누가 가장 잘 압니까? 말하는 사람 나는 잘 모르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 제일 잘 알지 않겠습니까? 언어 습관이 어떤지, 부정적인지, 말을 시작할 때 일단은 큰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지, 날카롭게 얘기하는지, 일단 상대방 말을 가로막고 부정적으로 "그건 아니야"라고 부정하고 보는지, 이런 것은 상대방이 가장 잘 알잖아요. 그래서 그런 피드백을 받고 우리의 언어 습관을 좋은 방향으로 가져가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 방향대로 따라 움직이고, 그 방향대로 우리도 창조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2-3. 작은 불의 위력
그런데 다시 5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면요, 혀에서 나온 작은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서 숲을 다 태워 버립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말의 위험성, 말이 굉장히 위험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말 한마디가 큰 나무를 태우고 숲을 태운 예들이 굉장히 많은데, 민수기 14장을 보면 아주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다 아실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 가데스바네아 사건은 정탐꾼 사건입니다. 이른바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다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을 40일 동안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하고, 갈렙과 여호수아 두 명이 보고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가 그들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부정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적과 하나님의 기사를 깡그리 다 무시한 보고였습니다. 작은 말 한마디인데 그 말을 들었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 타버렸습니다. 그냥 전부 다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밤새도록 울고 밤새도록 곡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어디까지,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서 죽이고 우리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온 숲을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가, 그들의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작은 지체인 이 혀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심판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런데 우리는 말할 때 어떤 식으로 말합니까? "그런 것 같아, 그런 것 같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이 아마 그럴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 한 다리만 건너면 "확실해"라고 되잖아요. "그랬어, 누가 봤대." 그러면 그 말이 한 가정을 파괴하기도 하고, 한 교회를 불태우기도 하고, 한 사람의 믿음을 뒤집어 놓기도 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말입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3. 혀의 파괴력
3-1. 삶의 수레바퀴
혀의 파괴적인 잠재력에 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6절을 보세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삶에 수레바퀴가 있습니다. 굴러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혀에서 나오는 불이 다른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중단돼 버립니다. 그 사람의 삶은 그대로 정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잘 걷고 있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아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정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삶의 수레바퀴가 가나안 땅까지 굴러서 들어가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정탐꾼 10명의 말이, 그들의 부정적인 보고가 이스라엘 공동체 삶의 수레바퀴를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거기서 폭삭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아주 작은 말이라도 이 말이,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태울 수도 있다는 것, 교회 공동체 삶의 수레바퀴를 다 불사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2. 이사야의 고백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깨달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들이 막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을 자기가 봤습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움에 고백한 첫 말이 이 말입니다.
이사야 6장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왜 망하게 되었다 했을까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첫 시간, 가장 찔렸던 것이 자기 입입니다. 입, 자기 입술. 이사야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 순간 그가 가장 불편했던 것이, 내가 입으로 범죄했고 거짓말도 했고 교만했고 불같은 이 혀를 놀려 가지고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제단에서 핀 숯불을 가져와서 입에다 댑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다 사라졌으니 입조심하라는 것이고, 이제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 행위를 아주 상징적으로 보고 매일같이 내 입술을 제단 숯불에 갖다 대어야 됩니다. 제단 숯불에. 그래서 저녁이 되면 오늘 혹시 내가 말로 다른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태운 것은 없는지, 오늘 혹시 내가 말로 어떤 공동체를 힘들게 한 것은 없는지 이것을 계속 살펴야 됩니다.
특히 저 같은 사람은 여기에서 굉장히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말씀 전하죠. 심방하죠. 사람 많이 만나죠. 정신줄 놓고 있으면 그냥 내가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 혹시 그 말이 저분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이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조심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장 27절에 보면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혀를 계속 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편 52편 2절에 보면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삭도, 끊어 버리는 것이죠. 상대방의 삶을 절단 내버리는 것입니다. 혀가, 이 말이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친하니까, 가까우니까, "이 정도야", 부부끼리니까, 내가 부모니까, 내가 자식이니까, "엄마가 이 정도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친한 사람 매일 봐야 되잖아요. 남편 매일 만나야 되고 가족 매일 만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말이 마음에 상처가 딱 되면 그것 치유하기가 평생을 가도 잘 안 됩니다. 평생을 가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정말 가깝고 친한 사이일수록 말에 대한 선을 지키는 것, 말에 대해서 선을 넘지 않는 것, 좋은 말하고 좋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4. 혀의 본래 특징
4-1. 길들여지지 않는 혀
그 다음, 혀는 원래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원래'라는 말을 제가 썼는데요, 이 원래라는 말을 의미적으로 보면 '거듭나기 전'이라고 보셔야 됩니다. 즉 세례 받기 전, 성령으로 세례 받기 전 우리 혀는 원래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8절에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라고 했습니다. '쉬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아카타스타토스'(ἀκατάστατο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야생동물이 포박에 맞서 맹렬히 반항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즉 혀가 길들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악한 말을 내뱉는 행위, 야생동물이 날뛰는 행위,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혀는요, 이런 상태였습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4-2. 죽이는 독
죽이는 독이라는 말을 썼는데, 제가 두 가지 예를 적어뒀습니다. 에돔 사람 도엑과 이세벨과 나봇을 적어뒀는데, 도엑이 누굽니까? 도엑이 다윗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나서 가장 먼저 간 곳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배가 고프니까 진설병을 달라 했습니다. 제사장이 주었습니다. "너와 함께한 사람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면 이것을 주겠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에돔 사람 도엑이 이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나중에 출세하려고 사울에게 그대로 일러바칩니다. 사울이 그래서 놉의 제사장들을 다 몰살해 버립니다. 그 혀가 죽이는 독이 된 것이죠. 제사장들을 몰살시키는 죽이는 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 어떤 인간들입니까?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서 아합이 병이 걸려서 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갖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 되니까, 이세벨이 "왕이시여 그 땅 가지고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거짓말로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나봇을 죽여 버립니다. 죽이는 독입니다. 입이라는 것,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특히 권력자가 가지는 말, 이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4-3. 혀의 이중성
또 혀의 원래 특징, 9절을 보시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도다"고 했습니다. 혀의 이중성입니다.
10절에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속사람이 거듭났는지, 우리는 저 사람의 속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고, 찬양 열심히 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면 "아 저 사람이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구나" 하죠.
그런데 한 입으로는 그렇게 하고 또 한 입으로는 저주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독 같은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그 속이,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샘이 단물과 쓴물을 함께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4-4. 마라의 쓴 물
자연계의 법칙도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바뀌어진 사건이 나오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모세가 마라라는 곳에 갔는데,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 백성들이 물을 마셨는데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 원망하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모세가 기도하니까 저기 나뭇가지 하나를 가리키며 물에 던져라, 던졌습니다. 쓴 물이 단물이 됩니다.
그 나뭇가지가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쓴물 같은 우리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인생에 들어오면, 내가 그 십자가를 의지하면, 내 인생이 단물 같은 인생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미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내 혀가, 내 입술이 쓴물을 내고 사람들을 죽이는 악과 독을 뿜어낸다 하더라도, 십자가로 내가 거듭나고 나면, 진짜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면, 그때부터 나는 단물을 뿜어내는 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구원받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지금 얘기하는 것이죠.
4-5.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를 한번 보세요.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니까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다가 또 한 입으로 맹세하고 저주하고 부인하여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때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이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기 전이죠.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기 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왔다 갔다 합니다. 우리도 내 입에서 찬송도 나오고 내 입에서 저주도 나오고, 내 입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말도 나오고, 내 입에서 죽겠다는 말도 나오고 살겠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온전히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 인생이 진실로 하나님께 사로잡힌 인생이 되어서, 너의 입으로, 너의 혀로, 네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입증하고 증명하고 살아내라는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죠.
4-6. 마음의 문제
그 다음 10절을 보시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샘이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한 입으로 좋은 말을 하고 또 나쁜 말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마가복음을 보세요. 마가복음 7장 20절,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3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나온다,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즉 우리 마음이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바로 딱 사로잡혀 있으면, 내 마음에 성령께서 딱 들어오셔서 좌정하고 계시면, 우리는 한 입에서 저주와 찬양을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성령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것.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대로 살아가면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나서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산 이후부터는 한 번도 베드로가 한 입으로 두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에 누가 주인으로 좌정하고 계시느냐, 이것을 내 혀가 입증합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내가 듣잖아요, 내 귀로. 그때 한번 느껴보세요. 아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한 상태인가, 성령이 다 방전되고 사라진 상태인가,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을 지금 야고보가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18절을 보면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매에 집중을 합니다. 열매, 즉 나무에게서 열매는 사람에게서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말, 드러나는 말. 그런데 나무에게서 열매에 집중하는데, 사실은 그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은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 뿌리가 튼튼하고 뿌리가 좋으면 좋은 열매는 당연히 나오게 돼 있는 것이죠. 이 말은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마음을 봐라, 좋은 말을 하기를 원하느냐, 너의 마음에 누가 계시는지를 봐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께서 계시고 성령께서 계시면 당연히 예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 행위들이 다 나오게 돼 있는 것이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아닙니까?
사람들이 말하다가 말 실수 같은 것을 하잖아요. "야 내가 정말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 미안해"라고 할 때, '나도 모르게'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말이 나오는 것이죠. 욕설을 내뱉는 것도 마음속에 욕이 충만하니까 욕설이 나오는 것이죠. 마음속에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나도 모르게'라는 말은, 이미 마음속에 다 품고 있으니까 그것이 나오는 것이죠. 내 마음에 누가 좌정하고 계시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은 천양지차로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좋은 말은 결국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5.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
5-1. 참된 지혜의 증명
이제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지혜는 '소피아'(σοφία)로 보편적인 앎, 총명은 '에피스테몬'(ἐπιστήμων)으로 전문적인 지식, 이런 것을 얘기했는데,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있고 총명이 있다 한들 이것이 밖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지금 그 얘기입니다.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너의 지혜와 총명을 보여라, 행동으로 보여라 했습니다. "나 수학 실력이 좋아" 그러면 "성적표 갖고 와." 이런 말입니다. "나는 뭐가 있어" 그러면 "그거 눈으로 보자, 가지고 와."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그리스도 앞에서 정말 가치 있는 믿음이 되려면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5-2. 거짓된 지혜
그 다음, 거짓된 지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14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기는 시기인데 독한 시기는 또 무엇일까요? 지독한 시기 이런 것이겠죠.
성경에 독한 시기를 가지고 자랑한 사람이 있을까요? 자랑하려고 거짓말한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런 사람은 시기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 바나바라고 이름하는 사람, 사울을 데려다가 바울로 만든 사람, 이 사람이 자기 전 재산을 다 들여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니까 이름이 높아지고 유명하게 되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런 명예는 갖고 싶고, 시기심은 나고, 우리도 저 사람처럼 교회에서 사람들이 좀 알아주는 사람이면 좋겠고. 그래서 재산을 팔았습니다. 팔고 나니까 아까워 죽겠는 것입니다. "이거 다 갖다 바칠 순 없고." 일부만 가지고 왔는데 그 일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했죠.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속였죠. 독한 시기로 거짓말한 사람이죠.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독한 시기로 거짓말한 결과 죽음입니다. 베드로가 얘기하잖아요.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였느냐, 왜 이것을 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느냐, 왜 거짓말했느냐." 독한 시기와 거짓말은 공동체를 어지럽게 하고, 그의 말에 믿음이 없는 것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왜요? "야 너 그렇다고 해서 그거 다 팔아 가지고 주면 어떻게 해, 조금만 주고 전부라고 하지, 감춰놓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지혜롭다고 할 것 아닙니까? 다 갖다 주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그러지. 그런데 그것을 거짓된 지혜라고 야고보 사도는 표현했습니다.
5-3. 고라의 반역
그리고 구약에 보면요, 민수기 16장에 보면 또 그런 사건이 하나 있죠. 1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서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레위 자손들입니다. 고라 일당 사람들이 250명의 지휘관들을 포섭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에게 딱 정면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그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이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합니다. "하나님이 각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너희가 왜 총회 위에 너희를 더 세우려고 하느냐." 이들이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요,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직무와 레위인의 직무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직접 집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해 백성들에게 알리고. 그런데 레위인은 성전에서 그릇 닦는 일도 하고, 또 성막 옮길 때는 어깨에 메고 가는 일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니 쟤들은 항상 하나님과 소통한다고, 저기 기도한다고 저기 앉아 있고, 우리는 힘든 일만 하네, 허드렛일만 하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독한 시기와 분냄과 다툼 때문에 당을 지어서 250명을 포섭해 가지고 모세와 아론에게 정면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귀하게 여기시고 직분에 따라서 다 자기 일을 나누어 주시고, 그 일에 따라서 감사하고 자기 일을 하면 되는데, 레위 자손 고라 일당이 그것을 자기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16장 32-33절, 35절을 보면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킴에, 그들과 그의 모든 소유가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분향하는 250명을 불살랐더라."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이라는 것이 차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직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아주 엄하게 다루는 것 보세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정말 우리가 이름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성가대 이름까지 다 기록해 두셨습니다. 역대기에 보면 발음하기도 어려운 사람들 이름 다 기록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 직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맡겨주신 직분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 훨씬 더 큰 것 같고, 군림하는 것 같고, 높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땅의 일입니다. 땅의 일은 사람을 계급으로 봅니다.
사람들이 그러죠. 신앙 없는 사람들이 교회 오래 다니는 분들한테 묻잖아요. "넌 장로 언제 따냐?" 그러잖아요. "넌 장로 언제 따냐고, 교회 그렇게 다녔는데 넌 권사도 못 따고." 딴다 그러잖아요. 자꾸 뭘 따요? 그것을 '장로 따고 권사 따고' 뭘 따고 그런 인식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직분을 보고, 그런 인식을 가지고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독한 시기가 생기고, 나도 모르게 그것 때문에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이 생깁니다. 그것이 땅의 일입니다.
그 땅의 일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이 땅을 벌려서 다 삼켜 버리죠. 그냥 땅의 일을 좋아하니까. 하늘의 일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로 인도하실 텐데, 땅의 일을 좋아하니 땅이 입을 벌려서 그대로 삼키는 것이죠.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고 무서운 사건입니다. 민수기 16장 사건,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짓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에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섭죠. 인간의 것, 교회 직분을 계급으로 따지고, 독한 시기로 사람들끼리 분쟁하게 하고 나누게 하고, 그것 때문에 갈등하게 하고. 교회가 직분자 세우고 나면 갈등하고 나뉘어지고 시험 드는 사람 생기고. 이런 것들이 결국 땅의 일이고, 정욕의 것이고, 귀신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5-4. 실용주의의 위험
그 다음 많이 중요합니다. 16절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악한 일'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어떻게 표현했냐면, '일'을 '프라그마'(πρᾶγμα)라고 얘기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영어에 보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실용주의라는 뜻입니다.
철학사에 보면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가 먼저 제창했다고 말하는데, 미국의 철학을 실용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실용주의, 좋은 말이죠. 지금 여기 악한 일을 '프라그마', 즉 실용주의의 어원이 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지혜는 실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 실용주의가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실용주의로 된다는 것은 이것은 세속화되고 타락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실용적으로 가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성막을 한번 보십시오. 성막을 보면 그것이 실용적입니까? 전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막을 이동할 때는 어떻게 이동합니까? 메고 가야 됩니다. 레위 자손들이 수레에 실어 가지고 밀고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편하게. 그런데 다윗이 거짓됐다고 어떻게 됐습니까? 수레가 놀라서 뛰고 사람 죽고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비실용적입니다. 하나도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성막 안에 하루 종일 불이 밝혀져 있어야 됩니다. 등잔대요. 불이 실용적입니까? 사람 없으면 불 꺼야지요. 요즘 같으면 전기라도 흔한데, 과거에 등잔대요. 그것 불 밝히려면 그 기름값을 누가 대나요? 그것을 사람 없으면 꺼야죠. 비실용적이고 소모적인 일입니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것 불 꺼트리면 큰일 납니다. 미련한 짓입니다. 그러니까 엘리가 자기는 자기 처소에서 주무시고, 그 꼬마 어린아이 사무엘을 거기다 보초 세워 가지고 "너 불 꺼지나 안 꺼지나 그것 잘 지켜봐라." 실용적이죠. 자기는 실용적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한번 해 볼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지, 예수님이 "내 아버지의 집은 커피 파는 집이라" 한 적이 없잖아요. 각 교회마다 건물을 새로 지으면 카페가 교회 1층에 들어와 있는데, 기도실은 없습니다. 가장 좋은 곳에, 건물이 새로 지어진 교회 가장 접근하기 좋은 곳에 기도실을 다 뒀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실용적입니까? 그것이 무슨 실용적입니까? 설계하는 순간부터 야단법석 날 텐데. "우리 교회 카페 없다"고 난리가 날 텐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거 성막 시절부터 교회 공동체는 정말 미련하고 비실용적이었습니다. 예산 사용을 한번 보세요. 교회에서 예산이 실용적으로 쓰인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가게에서, 가정에서요, 각 가정에서 급여를 받아와서 그것을 실용적으로 쓴다는 말은 투자한 만큼 아웃풋이 나와야 되잖아요. 교회에서 예산을 실용적으로 쓴다는 말은 투자 대비 효과가 확실해야 실용적인 것입니다.
전도 백날 해보세요. 한 사람 오기 쉬운가요? 전도비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도 한 사람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전도 안 해도 가만히 있어도 새 가족이 이만큼 오는데 왜 전도하냐, 하지 마." 그것이 실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됩니까? 전도 안 하는 교회, 기도 안 하는 교회, 망하는 것이죠.
교회는 비실용적이어야 됩니다.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말씀적으로 가면 실용적일 수가 없습니다. 본당 문 열어놓고 교인들이 와가지고 기도하면, 교인들만 옵니까? 떠내기 사람들도 오고 가고, 불량배들도 오고, 물건 훔쳐가고. 비실용적이죠. 문 걸어 다 잠그는 것이 실용적이죠. 그런데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는데, 그 말씀은 어떻게 하고. 세상의 지혜, 땅의 지혜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도 모르게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교회 생활하면서, 정말 우리는 실용적인 데 물들어 있구나, 그것이 타락이고 그것이 세속화인데, 우리도 너무 실용적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좀 미련해야 됩니다. 좀 불편해야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자들 세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우리 목사님들, 특히 연말 되면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용적으로 사니까요. 주일날 가족들이 예배 싹 드리고 와서, 아이들은 교회학교 맡기고, 부부는 예배드리고, 아이들 찾아서 딱 하고. 그런데 봉사 한 가지 해보죠, 다 꼬이지,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날 온전히 교회에 매이는 것이죠. 예배 1시간 딱 드리고 야외 놀러 가고 보내고, 얼마나 좋아요. 실용적이죠.
그렇게 실용적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좋은 것만 뽑아 먹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안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그러면서 내 신앙은 병들어 가고, 공동체는 사람 세우기 힘들어져 갑니다.
교회에서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분들 세우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밥을 안 먹어야지, 그러면. 그러면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교회 식당을 용역을 줍시다." 기가 찬 일 아닙니까? 성도가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한 번씩 가서 설거지하고 일하면 되는데. 웃기는 일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비실용적으로 사는 것이 복음적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 어떻게 실용적입니까? 그것은 땅의 지혜이지요.
5-5. 위로부터 난 지혜
하늘의 지혜를 한번 봅시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 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런 것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첫째가 제일 중요합니다.
첫째, 위로부터 난 지혜가 무엇입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이라 했습니다. 진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입니까? 성결한 자입니다. 진짜 지혜로운 자는 성결합니다. 성결이 무엇입니까? 죄를 떠나는 것이 성결 아닙니까? 회개하면 내가 성결해집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요,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요단강을 건널 때 그때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아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요단강 건널 때 뗏목 만들지 않았습니다. 배 만들지 않았습니다. 상류로 올라가서 강의 폭이 좁은 데를 헤엄쳐서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냥 성결입니다. 죄 회개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그러니까 강이 멈추는 것입니다.
성결하니까요, 죄짓지 않고 성결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땅의 지혜는 실용적인 것인데, 하늘의 지혜는 성결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성결해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실 것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의 도구인데, 깨끗한 도구여야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일을 하실 것 아닙니까? 놀라운 역사를 성결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위로부터 난 지혜 첫 번째가 성결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뭐 총명하고 지혜롭고 똑똑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결하지 않은데. 성결해야 그 다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성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시니까, 성결하면 내 마음에 성령께서 자리 잡고, 성령께서 자리 잡으면 말도 온화한 말이 나오고, 행동도 당연히 그렇게 따라갑니다.
5-6. 의의 열매
3장의 결론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열매가 있습니다. 그랬죠. 의의 열매. 나의 의로움으로 맺는 열매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움으로 맺는 열매, 그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과 행동, 우리의 혀와 믿음,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주여, 우리의 혀가 온 세상을 불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셔서, 내가 하는 말과 나의 모든 언어 행실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듭난 자의 행실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말이 잘못된 방향이 되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불태운 적이 있다면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시고, 내 마음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셔서 그 말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말과 행실이 되게 하옵소서. 땅의 지혜를 사모하고 살았습니다. 거짓되고 위선되고 독한 시기와 분냄으로 거짓말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직분을 계급처럼 생각하고 살 때도 있었고,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고 불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실용적인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교회도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지혜에 속지 않도록 도우시고, 사탄의 권세에 매이지 않도록 도우시며, 미련하고 어리석고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로 성결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로부터 떠나고, 죄졌다 하더라도 즉시 회개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셔서 그 일에 열매가 의의 열매 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