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특강 5 - 세상에 대한 경고(약4장)
본문: 야고보서 4장 7-8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오늘은 야고보서 공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경고인데, 이는 세상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신앙 공동체를 오가며 사는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생인지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은 사실 직면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고, 읽고 있기가 거북스럽기도 하며, 두렵기까지 합니다. 말씀이 때로는 칼날처럼 우리 마음을 후벼파기 때문이며, "지금 잘하고 있다, 괜찮다,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위로보다 지적하는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런 부분도 직면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무 위로하는 말씀, 괜찮다는 말씀만 듣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종말의 때를 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1. 공동체 다툼의 원인
1-1. 통제되지 않은 욕구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싸움 혹은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편지를 받는 열두 지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 안에 싸움도 있고 다툼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도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이것이 다툼이 되고 싸움이 되어 통제가 되지 않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분열되고 나누어지면 심각해집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옛날 과거 이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이것을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다툼이 어디로부터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그 싸움이 나는 이유를, 교회 공동체가 다투는 이유를 아주 적나라하게 설명합니다. 1절 그다음을 보시면,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첫째는 정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정욕을 헬라어로 보면 헤도네(ἡδονή)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통제되지 않은 욕구를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쾌락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통제되지 않은 욕구가 있을까요?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통제되지 않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이 굉장히 의아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의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좋은 의미에서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찬양도 하고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찬양만 있어서 되는 곳은 아닙니다. 말씀도 있어야 되고 기도도 있어야 되고 다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데, 마치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찬양대를 하려고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통제되지 않은 욕구입니다. 세상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교회에 와서도 이것만 계속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예배, 우리가 주일에 말씀을 드리는데 찬송가를 서너 장 부릅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열 장 정도 부릅시다. 오늘 찬송 목이 쉴 때까지, 목 터져라 한번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자체로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닌데, 찬양하다가 집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절제되고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산을 아주 잘하는 은사를 가진 분이 계시다고 합시다. 모든 것이 계산이 완벽합니다. 이 사람은 숫자에 아주 민감하고 계산도 잘해서, 보면 착착착 A부터 Z까지 딱 견적이 나오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재능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그것을 힘들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숫자에 좀 약한 분들도 계시고, 그렇게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통제되고 절제되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독서 좋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도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 시간에 방언 기도를 한 삼십 분씩 하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주장하다 보면 교회에 다툼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것이 뭐가 나쁘냐? 당연히 교회는 찬양도 있어야 되고 기도도 있어야 되고 정확한 계산도 있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개인의 욕구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 통제는 누구에 의해서 되어야 합니까? 말씀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합니다. 성령에 의해서 정도껏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범위에서 통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은 욕구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스스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이것은 굉장히 기형적인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1-2. 자기 영광의 추구
두 번째로 공동체에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2절을 보시면,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또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얻지 못하고 능히 취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욕심을 내어도,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얻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적어가 빠졌습니다. 무엇을 얻지 못하고 무엇을 취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개인의 영광과 자기가 원하는 목적입니다. 교회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아무리 욕심내고 아무리 살인하고 아무리 시기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취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말은 진짜 형제를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죽일 만큼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취하지 못합니다. 자기 영광을 취하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시도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압살롬을 보십시오. 압살롬이 왕권을 차지하려고 얼마나 오랜 세월 공을 들였습니까? 왕궁 앞에 서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쿠데타가 성공해서 팔부 능선까지 넘었는데 마지막에 미끄러집니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지고 일부는 감추고 얼마만 가지고 왔는데, 성령께서 딱 보고 아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자기 일을 위하는 것은 아무리 욕심내고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해도 절대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다툼이 나고 그것 때문에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그 분열시키는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자기 영광을 취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잘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은 자기를 통제시켜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어느 정도껏, "아 여기까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범위 안에서" 통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끊임없이 분열입니다. 다투게 됩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이 어디를 가든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빼고 다 그렇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면 타인도 살필 수 있고 공동체도 살필 수 있고, 멈출 수도 있고 말을 삼킬 수도 있습니다.
1-3. 이기적인 욕구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 이것이 이기적인 욕구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은 자기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하나님 중심이어야 되는데, 그리스도 말씀 중심이어야 되는데, 자기 중심으로 나가니까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에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너희는 이것을 주의하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2. 세상과 벗된 자의 특징
2-1. 혼합주의의 위험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세상과 벗 되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4절을 보시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들이라는 표현에 기분 나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냥 관용적인 표현인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마음에 두는 사람들을 다 그냥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를 보니까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세상과 벗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세상에 한 발을 좀 두고 교회도 한 발 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혼합주의를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혼합주의,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것을 출애굽기 말씀에서 표현하셨는데,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혼합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과 6절을 보시면, 금송아지 만든 사건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번제와 화목제는 누구에게 드리는 제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섞여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섬기던, 자기 조상 적부터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섬기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송아지 우상 앞에 놓고, 자기들이 하는 행동은 우상숭배인데 예배 형식은 번제와 화목제입니다. 이것이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굉장히 싫어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섞어 버리는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뒤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아예 우상숭배자로 그냥 살든지 아니면 순수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든지 해야 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합주의 우상숭배자로 사는 것을 하나님은 정말 싫어하십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예 세상으로 가든지 아니면 그냥 제대로 섬기든지 해야 합니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세상 생활을 단절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살 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면 쓰고 살면 안 됩니다. 한 가지 얼굴을 가지고, 교회에서 그 얼굴이면 직장에서도 그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헷갈리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교회 가면 둘도 없는 천하의 천사들인데 집에 오면 사람이 이상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그 이중성에 염증을 느낍니다.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우리 부모가 똑같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똑같아야 그래야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그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합주의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2-2. 말씀을 무시함
혼합주의로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어떤 특징이 있는가? 5절을 보니까,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주어가 성령입니다. 성령을 꾸미는 말이 그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에 넣어 두신 성령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어떻게 한다고요? 시기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왜 시기할까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왜 시기합니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내가 하나님과 세상을 벗하고 있으니까, 혼합주의 가운데 사니까, 내 속에 하나님만 있어야 되는데, 내 영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만 살아야 되는데, 내 속에 세상을 좋아하는 욕망이 또 들어와 있으니까, 성령이 그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자꾸 사인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그러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계속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너 그렇게 살다가 큰일 난다"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 찔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찔림과 성령의 울림과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냥 제쳐놓고 삽니다.
세상과 벗하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무시한다는 것은 성령의 외침을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4장 7절과 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인이 살인 충동을 느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마음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려라"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가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 두 가지가 막 싸우는데,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세상과 벗하는 자의 특징은 말씀을 무시합니다. 성령을 무시합니다. 마음속에 계속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가 두 가지 세 가지 얼굴을 하고 살면 안 되는데, 한 가지 얼굴만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되는데"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무시하고 삽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도 우리를 무시하십니다.
2-3. 교만한 자의 결말
그런 자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 자들은 또 교만한 자들입니다. 왜 교만합니까? 마음속에 찔림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교만한 자 아닙니까?
교만의 뜻을 여기에 적어 두었습니다. 헬라어로 휘페레파노스(ὑπερήφανος)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합성어입니다. 휘페르(ὑπέρ)는 "어디어디 위에"라는 뜻이고, 파이노마이(φαίνομαι)는 "나타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결합되어서 교만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아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 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다른 사람 머리 꼭대기에,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 앉기 시작하면 하나님 말씀 꼭대기에 앉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말씀이 들어와도 무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누가 말씀하신 것인데, 이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위에 나타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즉결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굉장히 싫어하시고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주셨는데, 교만할 거리들을 만들어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교만할 때 언제 교만합니까? 내 편이 있을 때 교만합니다. 숫자가 좀 많을 때 그때 교만합니다. 돈이 좀 있으면 교만하고, 또 건강하면 교만합니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삼만 이천 명 군대가 딱 모였을 때 "두려워 떠는 자 돌아가라" 하셔서 이만 이천 명이 집에 가고, 물 마시게 해서 무릎 꿇은 자, 우상에게 무릎 꿇어 본 자 같은 사람들을 다 돌아가게 하시고 딱 삼백 명만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큰일 난 것입니다. "아이 이 삼백 명 가지고 어떻게 전쟁하나" 겁이 납니다. 그러니까 기도합니다. 겸손해집니다. 겸손하게 기도하고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훌륭하고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숫자가 많아도 그 숫자에 별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물질이 있어도 그 물질에 별로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숫자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건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안 써야 합니다. 그냥 나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통해 계속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교만이 딱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끝입니다. 큰일 납니다.
3.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
3-1. 말씀을 가까이함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하라고 하셨는데요,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때야 합니까? 본문 없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때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잘 믿어야 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7절을 보니까,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임하십니다. 나 하나님께 복종하고 싶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께 복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영이 충만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상태가 안 좋아지면, 말씀을 조금 멀리하고 말씀을 조금 가까이하지 않으면 상태가 좀 나빠집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려고 하다가 혼이 납니다. 그때는 도망가야 합니다. 그때는 빨리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내 상태를 내가 잘 알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마귀를 대적해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이 말은 다른 말로 말씀을 가까이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하시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하면 됩니다.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고, 그러면 됩니다. 너무 쉽지 않습니까? 말씀은 항상 여기에 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안에 다 있습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첫 번째는 말씀을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과 4절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습니다. 마귀가 무려 세 번이나 시험을 했습니다. 그 대단한 마귀가 시험을 했는데,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칼로 마귀의 목을 쳐 버리셨습니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여기 4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첫 번째 시험에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다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습니다. 샘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고 말씀을 가까이하시는 분이니까 마귀를 이렇게 말씀으로 대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하면 내 안에 말씀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충만하니까 그 말씀으로 사탄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당연히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이기겠습니까? 적용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개인 영적 생활, 말씀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을 보니까,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 마귀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니까 떠난 것입니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까이하라,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3-2. 성결과 회개
두 번째는 성결입니다. 출애굽기 30장 2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안 씻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21절,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역시 죽기를 면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날 때, 회막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뵈올 때는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백성들에게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상당히 큰데, 성결하라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에게도 성결하라,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성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성결할 수 있습니까? 완벽하게는 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완벽하게 성결할 수 있습니까? 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났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결하라는 말은 매일같이 손발을 씻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말로 하면 회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 첫째는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회개 생활입니다. 성결하라는 말은, 우리는 하루를 살고 나면 먼지가 묻고 때가 묻고 죄를 뒤집어쓰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잡니다. 그러면 자는 순간 죄가 잘 자라납니다. 집에 오면은 손발 씻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뭐 손발도 안 씻고 그런 사람들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러면 집에서 쫓겨납니다. 요즘 남편들이 그러면 큰일 납니다.
집에 와서 손발 씻듯이 우리는 하루를 다 정리하기 전에, 하루를 마치기 전에 우리 영혼의 더러운 죄를 다 이렇게 씻어내야 합니다. 다 씻어내고 잠들어야 그래야 죄가 자라지 않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자는 동안, 내가 단잠을 자는 동안 죄가 뿌리내리고 자라고 열매 맺고 그 열매가 또 다른 열매를 맺고 있다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무섭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막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돌아보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하루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잠들면 됩니다. 그렇게 잠자다가 하나님이 나를 불러가시면 깨끗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생활이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3-3. 겸손과 높아짐
회개하는 자의 모습과 회개한 자의 모습을 말해 보라고 했는데요, 회개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9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 말씀만 딱 떼어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즐거우라고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쁨과 환희로 우리를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슬퍼하라고 얘기하고 왜 애통하라고 말씀하고 왜 근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회개할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십시오. 근심이라고 다 같은 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입니다. 즉, 회개가 없는 근심은 사망입니다. 그냥 돈 걱정, 자식 걱정, 답도 없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함에 대한 걱정, "아 오늘도 내가 이런 죄를 지었구나. 내가 오늘 이 말을 해서 저 사람에게 상처를 줬겠구나. 내가 그래도 명색이 교회 집사인데 내가 이런 행동을 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보기 싫으셨을까?" 이것이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걱정이 되고 이것이 근심이 되고 염려가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다가 나의 이 완악함을 보고 울기도 하고 애통하기도 합니다. 어제 지었던 죄를 오늘 똑같이 지으니까 "나라는 인간은 제대로 되먹은 인간인가"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느냐?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회개하는 자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막 들어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이 워낙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면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높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때야 합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성결을 위해서 회개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우리가 1절 2절에서 본 것처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시기도 하고 마음으로 살인도 하고 욕심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다음 성결하게 회개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싸울 일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그 비결을 잘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과 19절의 탕자 이야기입니다. 탕자가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가서 일용직 품꾼 중에 하나로 살아도 좋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기가 성결함을 더럽혔으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2절에서 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습니다. 가락지를 끼워주셨습니다. 신발을 신겨주셨습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했습니다. 다 회복입니다. 회개하니까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니까 이렇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말씀한 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대로 하지 않고 내가 높아지려고 스스로 교만하고 높아지면, 하나님이 그를 저 밑바닥 지하실까지 그냥 처박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결하게 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4. 형제들과의 관계
4-1. 비방과 판단의 금지
세 번째 질문입니다. 신앙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관계에서 주의해야 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여기 비방하다는 헬라어로 카탈랄레오(καταλαλέω)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주의하게 말을 늘어놓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없는 말을 지어내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사실도 아닌데 "그런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들은 것 같아" 이 말이 한 달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확실히 그랬어" 이렇게 됩니다.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 신앙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제삼자에 대해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혹은 공동체가 모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판단하다입니다. 헬라어로 크리노(κρίνω)입니다. 이것은 결정하다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형제를 그렇게 낙인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많이 합니다. "야 저 사람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야. 저 사람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야." 이것이 낙인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감정적으로 하는 사람인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인지 살아 보셨습니까? 같이 부부가 되어 가지고 십 년 이십 년 살아 보셨습니까? 한두 가지만 가지고 그렇게 낙인찍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결정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진짜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입 밖으로 내어 버리면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아 버리니까, 그러면 그분이 신앙 공동체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겠습니까? 살 수가 없습니다. 떠나든지 아니면 그런 줄 알고 그냥 살든지 해야 합니다.
4-2. 오직 한 분의 재판관
12절,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즉, 판단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한 분, 그 하나님도 언제 판단하십니까? 심판 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내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도 길이 참고 오래 기다려 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때그때 판단하셨다면 우리 중에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여기 멀쩡하게 앉아 있겠습니까? 그때그때 하나님이 판단하셨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때그때 판단하셨더라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을 낳을 백 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팔십육 세 때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그때 이미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끝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고 판단을 유보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변화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판단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합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또 기도하고 기다려 보지 뭐,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그런 마음을 좀 가지면 여유가 좀 생기지 않겠습니까? 여유가 생기고 또 좀 용서가 되고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크게 당해도 그 사람은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 안 당해 봐서 그런 말씀 하시지, 같은 사람한테 한 서너 번 당하고 나면 아휴 꼴도 보기 싫어요." 그러면 그냥 슬슬 피해 다니시고, 판단하지 말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그렇습니다.
4-3.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복음 22장 36절에서 40절,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을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는데 오늘은 이 두 번째를 가지고 얘기를 좀 해야 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데 그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무엇과 같이입니까? 내 몸과 같이입니다. 그러면 이 전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자기 비하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자기 비하에 빠져가지고, 자기 열등감에 빠져가지고 평생 동안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내 부모는 왜 나를 낳았을까?" 이러고 앉아 있는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불가능합니다. 먼저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내 존재를 긍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존재를 긍정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하셨던 말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보기에 좋았더라" 그러셨습니다. 이렇게 생겨 먹어도 하나님이 나를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 먹어도, 내 꼴이 이래도 하나님은 나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긍정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자기 사랑이 생깁니다. 그런데 내 꼴이 이렇다고 나를 부정하고 나를 미워하고, 스스로 나를 핍박하고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계속 살고 있는데 어떻게 거기서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내가 태어난 곳, 내 힘으로 안 된 것입니다. 무능한 부모를 만난 것, 내 힘으로 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잘 살았습니다.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긍정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부터 자기 사랑이 시작됩니다. 나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라는 말을 요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요즘 젊은 아이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나한테 상 준다고 명품백 나한테 사 줬다." 사실 자기가 산 것입니다. 나한테 사 주기는 뭘 사 줍니까? 좋은 옷을 입고 자기한테 뭐 하고 막 두르고 입고 신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의 정말 작은 빙산의 일각 같은 것이고, 본질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키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없습니다. 높은 데 물건 꺼낼 때는 뭐 받치고 올라가서 하면 되고, 전구 못 갈면 집사람이 하면 되고, 그러면 되지,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키 커 봐야 어디 간판에 머리나 부딪치고 다니지 뭐 쓸모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보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인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 비하를 해 가지고 "우리 부모님은 날 이렇게 낳으셔 가지고 맨날 일 번을 면하게 하시고" 뭐가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인데, 그런 것으로 자기 비하하지 말고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나를 긍정하면 나를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렇게 보입니다. 상대방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이고, 약한 모습도 사랑하게 되고, 없는 것은 없는 것대로 귀하게 보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존귀해 보이고, 그런 것입니다. 자기 사랑부터 타인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5-1. 시간의 한계를 인식함
그다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자,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13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사실 이런 사람들이 저에게 뭐가 나쁩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떤 도시에 가서 장사를 일 년 동안 하면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쁘다고 했습니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즉, 주의 뜻대로 이것을 계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을 줄 알고, 언제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갈 줄 알고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장사해서 몇 프로의 이익을 남기자고 이런 계획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죽을 줄 알고 그렇게 합니까?
그러면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됩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가 하는 말은, 우리는 시간의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시간의 한계 아래에 있는 우리 존재의 약함을 깨닫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의 한계 아래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좋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성실하게 됩니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까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셋째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종말 의식, 성실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5-2. 허탄한 자랑의 악함
그런데 반대로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한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 맥락에 의하면 시간의 한계를 모르고, 네 멋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하나님과의 기도 없이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네 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자들, 부풀려 가지고 자랑을 막 하는 자들을 다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토록 살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 중에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40대에는 뭐 하고, 50대에는 뭐 하고, 60대에는 뭐 하고, 70에는 뭐 하고, 내가 80에 죽기 일 년 전에 교회 가야지"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고 무시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냥 교회 일만 하시니까, 저 지하에만 계시니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데,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성도들이. 그래서 저는 지금 젊을 때는 열심히 세상에서 돈 벌고, 제가 은퇴하고 65세부터 교회를 하겠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습니다. 64세에 돌아가시면 어떡하려고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정말 그 말 중에 너무너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이것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27장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3장 5절과 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다 지혜자의 말씀입니다.
여기 16절 다시 보면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했는데요, 악한 것을 헬라어로 포네로스(πονηρός)라는 말을 썼습니다. 포네로스라는 말은 사탄이라는 뜻입니다. 무섭습니다. 사탄의 일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8절을 보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여기에 포네로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같은 단어가 야고보서에도 있습니다.
즉, 무슨 말입니까? 시간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사탄의 일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영원히 살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지금 내가 건강하니까 영원히 건강할 것처럼 착각을 줍니다. 지금 내가 돈을 잘 버니까 지금의 경제가 계속 갈 것처럼 착각을 줍니다. 우리가 시간의 한계 아래에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사탄이 잠시 잠깐 까먹게 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그것이 악한 일입니다.
5-3. 오늘 하루를 최선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간을 함부로 씁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뭐" 그런데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우리 인생의 진짜 마지막, 종말인 것처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일터에서 일을 성실하게,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간구하고, 하나님 말씀 읽고 그리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이 세상의 종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에게 맡겨준 사명이 있으면 그 사명을 내가 오늘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중에 내가 은퇴하면 하지" 큰일 날 얘기입니다. 사탄은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를 자꾸만 꾀고 거짓말합니다.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시고 1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렇게 우리가 맥락을 통해서 보니까, 여기 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 이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하나만 딱 떼어 가지고 생각하면 "선을 행한다"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도덕적인 선을 얘기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돈 주고 도와주고, 몸으로 봉사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맥락상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시간을 통제하고,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못 하는 것은 다 죄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월은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χρόνος)를 많이 얘기해서 아실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아끼라"는 건져내라, 살려라 이런 뜻입니다. 이 시대가 악하니까 하나님의 시간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가장 밀도 있게 살아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딱 삼 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삼 년 안에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을 많이 주면 인류를 구원할 때가 있겠습니까? 죄만 짓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기도하고 전심전력하면 얼마든지 하나님 기뻐하시는 세월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과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한다는 것이 그냥 알코올에 취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흘러가는 시간, 세상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닥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긴 왜 없습니까? 시간이 없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자기 놀 것 다 놉니다. 자기 잠자는 것 다 잠자고, 자기 할 것 다 하고, 본인 오락 다 하고,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목사들이 시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할 것 다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을 시간 배려한다고 뭐 얘기 안 하고 부탁 안 하고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할 것 다 하고 삽니다. 그래도 세월을 아끼고 카이로스의 시간 가운데서 시간을 건져내고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5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의 뜻, 시간 안에서 시간을 지키며 사는 것,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세상과의 관계 가운데서 살아야 할지, 야고보 사도가 주신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잘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분열과 불화를 일으키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지혜로운 자들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 되도록 도우시고, 언제나 성결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한 인생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스스로 자기 욕망으로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낮추신다고 하셨는데, 회개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하셨사오니, 하나님이 높이시는 그 높임을 진실로 경험하기를 원하오니 아버지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도록 도우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긍정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진실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 안에 사는 존재로서 시간의 한계 아래 거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임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