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특강 6 - 종말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 (약 5장)
야고보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아멘.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야고보서가 5장까지 있는데, 오늘 여섯 번째 시간으로 종말에 대한 말씀을 끝으로 야고보서는 막을 내립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직면하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또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향을 직설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이며, 믿음의 실천을 강하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마지막은 종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는데, 크게 세 부분입니다. 첫째는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고, 둘째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 대한 말씀, 셋째는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종말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1. 악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
1-1. 시간의 한계를 무시하는 자
5장 말씀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4장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재 31쪽을 보면 '악한 부자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악하다'라는 의미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면 지난 4장을 좀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공부할 때, 악한 사람들은 종말의 시대에서 시간의 한계를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간의 한계를 기억하고 깨닫고 살아가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됩니다. 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시간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니 영원하신 분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나의 유한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그렇게 되면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사니까, 언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는 것이니까, 오늘 하루도 그저 성실하게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시간의 한계를 기억하면 종말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종말의식은 언제 예수님이 땅에 오실지 모르니까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영원히 살 것처럼 교만하게 굴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가 누리는 유익입니다.
그러면 이 연장선에서 5장을 들여다보면, 여기 악한 부자들은 그런 시간의 한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것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들, 즉 영원히 살 것처럼 그냥 마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1-2. 부한 자들의 통곡
첫 번째 질문을 보면, "부한 자들은 무엇 때문에 울고 통곡해야 합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시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부한 자들, 부자들이잖아요. 부자들이 왜 고생해야 되며 왜 울어야 됩니까? 부자들은 고생할 일이 없잖아요. 엄청난 부자들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데 고생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에게 임할 고생 때문에 통곡하라"고 했습니다. 부자들은 항상 웃고 즐겁고 세상의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 있는데, 왜 그들이 통곡해야 됩니까?
성경 말씀은 정말 진리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과 20절을 보시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라고 나옵니다.
잘 보시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한 부자'라고 설명했습니다.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고,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비유인데, 굉장히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인간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엄청나게 부자였던 이 부자는 당연히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다. 그냥 '한 부자'라고 누가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최 씨 어르신이라고 부르든 박 씨 어르신이라고 부르든 이름을 불러가며 존경을 표했겠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는 이름이 있어도 사람들이 불러줬을까요, 안 불러줬을까요? 안 불러주었습니다. "야, 이놈아!" 하고 그냥 엉덩이를 발로 뻥뻥 차고 다녔지, 누가 그 거지의 이름을 공손하게 불러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는, 성경은 이 부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이름은, 거지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다 같이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갈 그 이름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해 두셨고,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통곡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장차 그 모든 고생 때문에 울고 통곡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다. 악한 부자니까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영원히 살 것처럼 그냥 마구 살았는데, 어느 날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내 영혼을 취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지옥 가서 통곡하고 우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저기 저 거지 나사로를 시켜다가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적셔서 내 혀를 좀 적셔 달라고 그렇게 부탁할 만큼 탄식하고, 지옥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악한 부자들,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며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야, 이건 나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야. 왜냐하면 난 부자가 아니니까"라고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종말의식 없이, 시간의 한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여기에 속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1-3. 썩어 없어질 것들
또 2절을 보면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재물, 옷, 금과 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재물은 먹는 양식입니다. 먹는 양식이니까 썩습니다. 옷은 좀 먹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금과 은이 녹이 습니까? 순금이 녹이 슬지 않습니다. 은도 녹슬지 않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불순물이 잔뜩 끼어든 금과 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것을 진짜인 줄 알고, 이렇게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여기에 녹이 슬어서 그 녹이 어떻게 됩니까?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즉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양식도 모으고 옷도 많이 사 모으고 은과 금, 패물도 갖다 다 쌓아 왔는데, 결국 그것이 너희를 찌를 것입니다. 너희들 살을 먹을 것입니다. 결국 너희들은 그것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죄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 중에서 아주 큰 죄가 됩니다. 그것을 그냥 부자라는 표현으로 말한 것입니다. 진짜 부자들 중에도 괜찮은 부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입니다.
1-4. 말세의 의미
그런데 여기서 말세에 대해서 우리가 좀 살펴봐야 합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말세가 언제입니까? 언제가 말세입니까? 어른들이 말세라고, 이제 말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세라는 말은 옛날 옛적부터 있었던 말이고, 지금도 우리는 말세를 얘기하고 있고, 그 옛날 예수님 시절에도 말세라는 표현이 성경에 계속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정확하게 말세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그때가 말세입니다. 그러면 엄청나게 범위가 넓습니다. 그 범위가 지금 벌써 2000년 동안 계속 말세인데, 앞으로도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계속 말세입니다.
왜 이것을 말세라고 할 수밖에 없느냐?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 때와 그 시는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공중재림하실 그때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그 다음 날 예수님이 오실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안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오실까 하고 기다렸는데 2000년이 지나 아직까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오실지, 10초 뒤에 오실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항상 말세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계속 말세입니다.
"야, 옛날도 말세인데 지금도 무슨 말세냐? 그 되지도 않는 소리 집어쳐라."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세라고 말하는 근거가 우리 예수님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과 그 때와 그 시는 아버지만 아신다." 그 말씀입니다.
1-5. 독수리 같은 재물
이제 잠언 말씀을 한번 봅시다. 23장 4절과 5절입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재물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허무한 것입니다. 허무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잠언 기자는 굉장히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하늘을 나는 독수리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사람이 잡을 수 있습니까? 독수리가 얼마나 빠른데, 얼마나 사나운데, 사람이 못 잡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재물을 쫓아 삽니다.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재물을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쫓아가고 쫓아가고, 열심히 따라잡으려고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잡힙니까? 열심히 따라가 봅니다. 그런데 그것 잡으려고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나무에 부딪치고 야단법석입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재물을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라고 표현한 것은 재물을 너희가 따라잡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물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질은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존재가 있고, 그 다음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라는 것은 전적인 목회자로서의 사명도 있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들이 있습니다. 일터에서의 사명도 있고, 가정에서의 사명도 있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인 성도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그냥 쭉 가는 것입니다. 돈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 따라가고 사명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명의 길과 말씀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들을 그때마다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안전합니다.
그런데 돈 따라가려고 "나는 돈 버는 게 목적이에요"라고 하는 사람치고 돈 버는 사람 없고, 그런 사람치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물은 독수리같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있고 그 거룩하고 복된 사명을 따라가고, 열심히 그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은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것 믿고 매 순간 매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거기서 우리는 하늘의 만나도 맛보고 거기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도 마시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종말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6. 물질의 두 가지 죄
그런데 3절 끝에 보니까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쌓았을까요? 어떤 식으로 쌓았길래 이렇게 책망받고 욕을 먹는 것일까요?
여러분, 물질 자체가 악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쓰는 사람이 악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데요, 공간이나 돈이나 모든 것은 다 가치 중립적입니다. 칼도 유명한 셰프에게 들려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되고, 도둑놈이 들고 있으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가 됩니다. 돈도 그런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 물질 자체는 가치 중립적입니다.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으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모아야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모으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이것은 무조건 틀린 말입니다. 정말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두 가지를 다 얘기합니다. 4절을 보니까요,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이런 식으로 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부를 쌓았습니다. 악덕 기업주가 되어 가지고 노동자들이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정당한 임금을 즉시 지불해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모았습니다. 밭을 가지고 있을 정도가 되면 이 사람은 살 만큼 사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품꾼을 들여 가지고 자기 밭을 추수하라고 일을 줄 만한 사람이면 그 사람은 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 삯을 떼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레위기 말씀을 보시면요, 레위기 19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아침부터 밤새도록 내게 두지 말라, 즉각 지불하라는 뜻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사람들은 왜 이런 행동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요? 살 만한데 자기는 자족하지 못하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빌립보서 4장 1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독수리를 따라가는 것처럼 물질을 쫓아 살고 따라가기 시작하면, 이만하면 만족한 게 없습니다. 왜냐면 독수리보다 더 빨리 뛰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의 길을 따라서 이렇게 가다 보면 이만하면 만족합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만하면 좋고,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고 사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니까 정말 그 푼돈까지 삯꾼의 품삯까지 떼먹는 악한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한번 보십시오. 사용하는 것입니다. 5절,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이것은 돈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아까 물질의 두 가지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모았느냐,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아까 품꾼의 삯을 주지 않은 것은 어떻게 모았느냐이고, 이것은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땅에서"라고 했습니다. 이 땅이 중요합니다. 천국이 아니고 땅에 쌓아 놓는 것입니다. 땅에서 어떻게 합니까? 사치하고, 밑에 나옵니다. 트루파오(τρυφάω), 편안하고 부드럽게 하다. 자기 몸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만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또 방종하여, 쾌락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자기 몸이 기뻐하는 그 쾌락에 뛰어드는 것, 자기 몸만 위해서입니다. 또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이렇게 살육의 날이라는 것은요, 누구를 칼로 찔러 죽여서 살육이 아닙니다. 품꾼의 삯을 내가 떼먹었습니다. 그것으로 돈 벌었습니다. 그러면 그 집안에 있는 어린아이들부터 그 집안 식구들은 어떻게 됩니까? 일하고 돈을 못 받았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될 임금을 못 받았으니, 그 사람들은 죽고 사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정당한 임금을 못 받았으니까요. 그것이 살육의 날입니다.
내가 나를 편안하게 하고 나를 쾌락에 뛰어들게 하기 위해서 그 가정을 죽이고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악덕 기업주들입니다.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살찌게 하다, 트레포(τρέφω), 배의 영양분을 공급하다. 이것이 전부 생략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몸을 사치하고, 자기 몸을 방종하고, 자기 마음을 살찌게 하고,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물질은 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물질을 어떻게 모았느냐가 문제고, 물질을 누구를 위해서 쓰느냐가 문제인데, 나만 위해서 쓰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
1-7.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
그런데 이것이 이상합니다. 왜 이상하냐면,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많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네가 왜 참견이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이 죄가 됩니다. 자본주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틀 안에서는 이것이 죄가 되지 않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만 위해서 쓰고, 너의 쾌락을 위해서만 쓰고, 너의 몸을 배불리고 살찌우기 위해서만 쓰는 것은 심각한 죄가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과 2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1절을 잘 보십시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까?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죄가 아닙니다. 아니, 내 밭에서 난 소출을 가지고 나를 위하여 재물 쌓아두는데 이것이 왜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눠야 합니다. 나눠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어떻게 합니까? 질투와 분노에 겨워 가지고 빼앗아 버립니다. 빼앗아 버립니다. 계급 투쟁을 통해서 빼앗으라고 합니다. 지주를 타파하고 부수고 불지르고, 공장 빼앗고 저항하면 죽이고,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자기들이 말하는 혁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은혜받은 자가 자발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것이 복음인데, 은혜받은 자가 나누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베풀고 나누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려면 자기 창고 열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네 영혼을 내가 오늘 밤에 도로 찾겠다." 가장 강력한 경고 아닙니까?
시간의 한계를 무시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소출이 그렇게 많은데 창고를 짓고 또 짓고 또 짓고 하려고 하는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돈 쓸 때도 복음적으로 돈을 써야 합니다. "나는 부자도 아닌데 내가 내 맘대로 좀 쓰자." 그런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인가, 이것이 정말 나만 위해서 배를 불리고, 나만 위해서 방탕하고, 나만 위해서 방종하고 그렇게 사는 건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셔야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천년만년 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1-8. 부자를 지도하라
물론 성경은 부자 자체를 악하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과 18절입니다. 디모데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목회하다 보면 부자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지도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을 좀 음미하며 읽어보십시오.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에 아주 부자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제가 목사입니다. 그분에게 가서 이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마세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시고, 선을 행하시고 선한 사업도 많이 하시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시고, 부디 베풀고 너그러운 자가 되세요." 제가 이렇게 심방에서 얘기했다고 합시다. 그분의 표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일반적으로 만약 여러분이 부자라면, 여러분이 진짜 엄청난 부자인데 이 교회 등록했는데, 목사가 등록 심방하러 가서, 새 가족 심방하러 가서 그렇게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아, 어떻게 해서 이만한 부를 모으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앞으로 하나님 복에 복을 더하여 주사 이 집 창고가 더 커지고, 헐고 더 짓고, 온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 좋아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얘기한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지도하라. 무엇입니까? 모으는 데 죄 짓지 말고, 쓰는 데 죄 짓지 마라. 두 가지입니다. 부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돈 자체는 가치 중립적인데, 어떻게 축적했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2. 성도에게 주는 인내의 교훈
2-1. 인내하라
그 다음 두 번째 테마, 성도에게 주는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들 각 개인은 인내하라고 얘기합니다. 인내, 이 테마 딱 한 가지입니다. 인내하나 인내할 것이 워낙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자를 다 잡아다가 옥에 넘기고, 때로는 죽이기도 했으니까, 기독교가 공인받기 전이었으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했겠습니까? 피해 다녀야 되니까요.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이고요.
또 그렇게 하다 보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을 못하면, 그러면 가난도 견뎌야 합니다. 그 인내, 믿음에 있어서 인내와 실생활에 있어서 인내, 이 두 가지 인내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인데요.
언제까지 인내해야 됩니까?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아, 절망적입니다. 내년까지만 인내해라,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참으라, 길이 참으라. 그런데 이 성경을 읽다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얘기를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 내년까지만 인내하라 해도 좀 참겠는데,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이 답이 없는 얘기 아닙니까? 너 늙어 죽을 때까지 참아라는 얘기입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예를 들어 성도님이 목사한테 상담하러 왔는데 "아휴, 참으세요. 죽을 때까지." 그런 목사한테 다시 찾아오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입니다. 다른 답이 있습니까? 때와 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그 때와 시를 초월해서 누가 감히 그 시와 때를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참으십시오. 인내하라.
2-2. 농부의 인내
그런데 뒤에 단서를 좀 붙여줍니다. 인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길이 참을 수 있는 힌트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여기 보면 '땅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것은 어디에서 올라옵니까? 하늘에서 뚝뚝 떨어집니까? 땅에서 나옵니다. 땅에서.
그런데 땅에서 나오는데, 지금 이 농부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이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것이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힌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을 선택하시고 여기 사는 분들을 선민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 비는 농사짓기 전에 비가 와야 농사를 짓기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파종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늦은 비는 농사 마지막에 늦은 비가 한번 내려 줘야 추수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안 내리면 그만입니다. 내릴까 말까, 안 내릴까 말까, 이것이 매년 반복됩니다. 매년 땅을 보고 농사 짓지만, 항상 하늘을 봐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다릅니다. 이집트는 풍부한 수원이 있습니다. 나일강이라는 물이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거대한 큰 강입니다. 그래서 그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 사니까, 이른 비 늦은 비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거기에서 물 대 가지고 다 살면 됩니다. 농사 짓고.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와야 살 수 있고 농사 지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농부는 땅을 바라보고 열매를 취하는 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을 보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인내하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든 줄 내가 다 안다. 길이 참는 것,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거의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바라봐라. 그러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라. 때마다 넘치도록 하늘을 보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고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견디기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땅만 보니까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땅을 본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만큼 빨리 가고, 저 사람은 땅이 저렇게 넓고, 저 사람의 소출은 저렇게 많고, 그런데 나는...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땅을 보는 신앙을 우리는 바알 신앙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앙은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땅만 봅니다. 바알에게 맨날 무릎 꿇고 절하고 거기 갖다 바치고. 그런데 하나님 신앙은, 여호와의 신앙은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출애굽하여 광야 여정을 걸을 때, 하나님이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식일만 빼고 매일같이 훈련시킨 것이 무엇입니까? 만나 훈련 아닙니까? 만나가 하늘에서 내립니다. 맨날 하늘을 바라보라고, 그것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너희 땅에서 농사 지어서 땅의 소산으로 먹고 사는 존재지만, 하늘을 보라고. 그래야 우리가 인내하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냥 물리적으로 맨날 파란 하늘을 보고 가을 하늘이 막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하늘을 보라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라는 얘기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책에 기록된 이 말씀, 그것 붙들고 살아야지, 땅의 논리대로 살기 시작하면 가랑이 찢어집니다. 독수리 따라가다가 큰일 납니다. 그 말씀을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표어가 여기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아버지가 농부이시니까 우리는 농부의 아들딸입니다. 농부는 땅에서 소산을 먹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자,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을 쫓아가는 자, 그 정체성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아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2-3. 공동체의 덕목
또 인내할 때 공동체의 덕목을 얘기했습니다. 8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망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로 격려해주고 도와줘야 합니다. 서로,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길이 참고 오래 견디며, 굳건하게 하라. 이것이 헬라어로 스테리조(στηρίζω)입니다. 일어서게 하다, 지탱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땅에서 인내할 때는 서로 원망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가정이 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는데, 서로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기 시작하면 그 가정이 온전할 수 있습니까? 서로 문제가 생겨서 갈라지고 깨어지고, 상처만 주고받다가 볼일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보니까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땅을 보니까 비교의식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보면 원망보다는 내가 해야 될 일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사명 따라가고 그 사명을 위해서 일하고, 그러면 원망은 사라집니다.
2-4. 선지자들의 인내
자, 그 다음 또 이제 답을 알려줍니다. 인내할 수 있는 길을 말입니다. 길이 참으라 그래놓고 야고보가 그냥 입 싹 닦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아까 농부를 보라 그랬습니다. 두 번째는 10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먼저 앞서간 사람들이 너희에게 본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 사람들을 보고 한번 따라가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중에 예를 들어주는 분이 욥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에 있네, 욥의 인내를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욥기 1장 20절부터 22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즉 범죄를 원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당한 고난을 한번 우리가 순차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첫째, 재산을 하나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 둘째, 자녀들. 셋째, 건강. 넷째, 가까운 사람들. 부인까지 떠나고요. 정말 친한 친구들이 와서 자기를 위로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이 보니까 욥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집요하게 정죄했습니다.
건강 잃고, 첫 번째 재산 잃고, 자녀 잃고, 건강 잃고, 주변 사람 다 떠나면 원망이 그냥 나오지 않겠습니까? 재산만 잃어도 원망이 나오는데. 그런데 욥은 끝까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한 가지를 붙잡은 것입니다. 딱 한 가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함없는 한 가지 사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 하나 붙잡은 것입니다. 그것 하나 붙잡으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혜롭지 않고 미련하고 잘 몰라서 자꾸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아니,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이렇게 하시지?" 이런 의문은 들지언정, 그것을 자꾸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을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기도해야지, 덮어놓고 무턱대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것을 굉장히 잘한 인물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의 강림 때까지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인내할 수 있는 두 가지 모델을 줬는데, 하나는 농부 모델입니다. 농부 모델은 무엇입니까? 땅에서 농사 짓지만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지자들입니다. 예로 욥을 들어줬습니다. 원망하지 마라, 그 말씀입니다.
2-5. 맹세하지 말라
자,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는데요, 네 번째 질문입니다. 인내하는 성도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인내하는 성도에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맹세하지 말라. 그런데 너무 황당합니다. 인내하는 성도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왜 맹세를 하지 마라고 했을까요?
왜 이런지 이제 묵상이 필요합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이 필요한데, 우리는 언제 맹세합니까? 언제 내가 맹세할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급하게 저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싶을 때 맹세하지 않습니까?
식당 같은 데, 어디 유원지 식당에 가보면 "원조집", "진짜 원조집", "참 진짜 원조집", "4대째 운영하는 진짜 진짜 할머니 원조집" 뭐 이렇게 막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 간판으로 자기를 맹세하는 것입니다. 왜? 짧은 시간에 신뢰를 줘야 되니까. 보는 순간 사람들이 가게가 10개가 있는데, 한번 눈으로 쓱 훑을 동안 "아, 이 집이야말로 진짜 원조구나" 하고 들어갈 만큼. 그래서 사람들이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신뢰는 언제 생깁니까? 신뢰는 그런 간판 하나도 없어도, 신뢰는 언제 생깁니까? 오랫동안 똑같은 맛으로 똑같은 패턴으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면 먹어본 사람들이 소문을 냅니다. 간판 하나도 없어도, "원조집" 이런 거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아주 허름하고 좁은 식당에 줄 서고, 불편해도 맛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오는 것 아닙니까?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내가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크리스천인데 굳이 맹세까지 해가면서 내가 크리스천임을 나타내야 되겠습니까? 굳이 내가 맹세까지 해가면서 저 사람에게 이것을 팔고 싶으세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팔아가며, 우리 부모님 이름까지 팔아가며, 내 건강까지 팔아가며 그렇게 맹세까지 하면서. 그런 거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내하면서 너의 존재를 걸고, 너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자녀이니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너다움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자는 맹세하면 안 됩니다. 맹세하는 사람은 자기가 쫓기니까 급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나 이거 걸고 맹세한다"고 막 그러는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맹세까지 해가면서까지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야고보 사도도 얘기했고 예수님도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을 한번 보십시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다른 것 맹세하지 마라. 그것 더 지나치면 그것은 악이다. 그 말씀입니다. 이제 이렇게 되니까 인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 맹세하면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3. 종말을 살아가는 교회
3-1. 기도하는 공동체
이제 세 번째 테마로, 종말을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종말의 때, 야고보 사도가 종말을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에게 부탁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난 당하면 원망하고, 즐거워하면 자기 자랑하고, 그런 교회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랑질 듣기 싫습니다. 우리끼리 이렇게 모여 있는데 누가 막 자랑하는 것, 한두 번이지 계속 자랑하는 것 듣기 싫습니다. 정말 자랑할 것이 있으면, 너무너무 기쁘고 자랑할 것이 있으면 찬송하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 그것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원망하지 말고.
"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자, 이렇게 되려면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한다. 이 장로는 뭐 목회자, 또 어른, 교회 영적 지도자를 다 포함한 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병을 드러내야 됩니다. "제가 이만큼 아픕니다" 하는 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병은 몸의 병과 영혼의 병과 정신의 병을 다 포함하는 말인데, 이것을 표현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정말 아픈 것을 다 표현하고 삽니까? 우리 가정이 다 곪아가고 썩어 가는데 그것을 다 표현하고 삽니까?
이것은 상호적입니다. 왜 상호적이냐면, 그것을 한번 드러냈더니 사람들 입방아 도마 위에 올라가 가지고 난도질 당하는 것을 내가 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러니까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정말 누군가가 순전한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에 "저희 가정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가 아픕니다"라고 했다면, 그러면 두말 말고 그냥 기도해 주면 됩니다. 소문내지 말고 두말 말고. 그런데 그것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거기에 크게 데인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상처를 받아 봤든지, 누군가가 그렇게 상처받는 것을 본 적이 있든지, 그래서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상호적인 것입니다.
지금 종말의 때에 병든 자는 교회 어른들을 청하고 기도해 주라고 했습니다.
3-2. 기도의 능력
15절, 기도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교회 장로들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로들, 교회 어른들, 목회자들에게만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가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믿음의 기도라는 것은 누군가가 기도 제목을 던지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이분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분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중보기도를 집중적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가정의 상처도 치유되고, 우리 내적 문제도 해결되고, 그리고 내 몸의 상처도 해결되고. 우리가 그런 기도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지금 신앙생활 왜 합니까?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사람들이 그냥 혼자 속앓이하고 혼자 기도합니다. 혼자 기도하니까 사탄이 혼자 기도하는 그 사람의 기도 줄을 막아 버립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기도 못하게. 그래서 진짜 교회는 임무가 뭐냐 하면, 진심으로 그 공동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살아있는 공동체,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3-3. 죄를 고백하라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죄를 왜 고백하라 할까요? 시편 66편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죄는 기도 응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자기 죄 회개 기도부터 먼저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 응답이 빨리 됩니다.
자, 그리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 이 의인은 어떤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날 때부터 의인입니까? 이마에다가 '의인'이라고 딱 써 붙이고 나옵니까? 그게 아닙니다. 회개한 사람은 다 의인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말은요, 회개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그렇게 하려면 내 죄부터 먼저 털어놓고 회개하고, 그리고 나서 나를 살피고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간구하는 힘이,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3-4. 엘리야의 기도
엘리야 예를 적어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이 사람이 의인인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자기 죄를 잘 회개하고 해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도가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3-5. 떠난 자를 돌이키라
자, 그 다음 진리에서 떠난 자를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제 마지막 말씀인데요. 19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미혹되다. 거짓 선지자들, 이단들, 옛날 초대교회 공동체에 뭐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미혹되어서 교회 공동체를 떠난 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시험 들어서 교회를 나간 자, 이런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면, 즉 회개하게 하면 그런 말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즉 이 말은 교회는 상처받고 혹은 이단에게 미혹되어서 떠난 사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그런 사람을 돌아오게 하게끔 교회가 노력하고, 성도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맺음말
야고보서는요,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마무리를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첫 시작은 아주 강하게 시작했습니다. 아주 강하게 직설적으로. 그런데 마지막은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 양면성이 다 있는 사람입니다.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면서 열정적인 사람이고,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다 본 사람이고,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읽고 읽고 또 읽어도 굉장히 재미있고 우리에게 유익한 책입니다. 이제 오늘 여기까지 하고 야고보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종말의 때에 악한 부자들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모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 기억하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종말의 성도의 삶은 인내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땅을 보고 농사 지으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그 말씀 붙잡고 걸어가고, 그 말씀 안에서 승리하며 답을 찾게 하옵소서. 욥의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고 원망하지 않도록 축복하여 주시며, 신뢰를 얻기 위해서 거짓 맹세하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종말의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도록 교회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어떤 기도 제목이라도 서로 받고 서로 함께 기도해 주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간구하는 진실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 되도록 하나님 우리 교회를 복 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 마음에 찔림으로 받았습니다. 그저 찔림을 받고 눈물 흘리고 그치지 않도록 도우시고, 야고보 사도가 주신 말씀처럼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가 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는 행하는 믿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