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10) - 주 안에 있는 성도의 삶 (빌립보서 4장)
오늘이 옥중서신 열 번째 시간입니다. 여섯 번째 시간까지는 에베소서 말씀을 공부했고, 이제 네 번에 걸쳐서 빌립보서 말씀을 공부하여 오늘이 빌립보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고, 빌립보서는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어떤 상황에 좌우되는 기쁨이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기쁨,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기쁨을 가지고 끝까지 관통하며 좌우로 흔들리지 않는 기쁨, 그런 기쁨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쁨이 가능할까요? 돌아보면 우리는 상황에 많이 좌우됩니다. 좋은 일이 있어야 하고, 행복한 일이 있어야 웃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 말씀에서 늘, 자주, 아주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주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사실 빌립보서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이라는 상황을 말하지 않고 "주 안에 있다"는 본질을 말합니다.
빌립보서는 성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칭의 이후에 성화, 성화 이후에 영화, 이것이 구원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칭의라는 것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유혹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유혹들, 때로는 정욕적인 유혹들이 있고, 가난의 유혹도 있고,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 안에 있음으로 극복하면 본질적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 4장 이야기도 성화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본질적 기쁨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권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 1절에서 3절까지 보시면 바울이 세 가지 명령어를 사용합니다.
1-1. 주 안에 서라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첫 번째 명령이 "주 안에 서라"입니다.
여기 좋은 말은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 사모, 기쁨, 면류관. 성도들을 표현할 때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표현할 때 이런 수식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1절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서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스테코(στήκω), 굳건하게 서다, 견디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이제 막 젖을 먹는 아이가, 아직까지 젖을 떼지 못한 아이가 굳건하게 서거나 견딜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굳건하게 설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젖을 먹는데 어떻게 견딥니까? 굳건하게 서고 견디고 힘이 좀 생기고, 어떤 고난이나 환란이나 위기가 닥쳐와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이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그것을 하기가 좀 힘듭니다. 특히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성인이 좀 되어야 유혹이나 환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굳건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버티고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 말씀입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기 보면 "때가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만 먹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성인이 되고 영적으로 단단히 서서 주 안에서 굳게 서서 버티고 견딜 수 있는 힘은 신앙생활의 연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30년, 40년 하고, 믿음이 3대, 4대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래도 작은 시험이 오면 흔들려 버리고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것은 믿음의 연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면 "젖은 어린아이의 것이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4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성인이 되고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세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 지각을 사용한다, 둘째 연단을 받는다, 셋째 선악을 분별하는 자다.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먼저 지각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견디고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룬 사람이면 지각을 사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성, 판단력, 오감, 경험 등등을 다 통합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자꾸 물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는 판단이 안 서니까, 나로서는 도무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 "우리 목사님에게 가보자" 합니다. 목사에게 오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디 기도원 원장님에게 가고, 기도원 원장님까지는 그나마 괜찮은데, 어디 점보러 가버리고, 어디 용하다는 점집에 가버립니다. 교회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 집사님쯤 되어서 자꾸 무엇을 물으러 갑니다. 자기 지각을 사용할 줄 모르고 뭔가 보다 신비해 보이는 사람에게, 신통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꾸 물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환난이 와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각을 사용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이성도 주시고 분별력과 판단력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사용해야 되는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되는데, 지금 이 상황이 내가 견디는 상황인지, 아니면 그냥 놔야 되는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 상황인지를 정확하게 판단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고 계속 물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젖을 먹는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또 "연단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연단은 훈련입니다.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훈련과 영혼의 훈련, 마음의 훈련을 다 포함하는 뜻입니다. 훈련을 받지 않으면 성장이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훈련받지 않고 어떻게 성장하려고 할 수 있습니까? 훈련받지 않고 계속 젖만 빨려고 하면 단단한 음식을 씹어서 소화시키고 넘길 수 있는 소화력과 근력이 생겨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면 어린아이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서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선악을 분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각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각을 사용해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벌어서 내 물질입니다. 그런데 그 물질을 사용하는데도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각과 분별력입니다. 시간도 내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로 선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악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는 선과 악을 이야기하면 착한 마음, 나쁜 마음, 검은 마음, 흰 마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악 구분은 항상 시간이나 물질이나 건강이나 등등의 모든 판단의 순간순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그것이 선입니다. 물질을 사용하더라도,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사실 이 지도자에게 하는 말씀인데, 지도자는 독립된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킨 목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그것이 드러나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나가라" 하십니다. 가라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굳건하게 설 수 있으니까 내보내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기어 다니고 젖만 빨고 있으면 어떻게 내보냅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목적은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아서 선악을 분별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내보내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목양하는 목적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해서 굳게 서서 지각을 사용하고 선악을 분별하고 훈련 잘 받아서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못하게 하고 모든 일에 판단을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로 만들게 하면, 그것이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 아닙니까? 계속 목사에게 종속시키고,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하고, 무엇이든지 집을 파는 것도, 자녀들 결혼시키는 것도, 무엇을 하는 것도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하면, 그것이 사이비이고, 그것이 이단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이단의 길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생활은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지각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가, 나는 얼마나 독립되어 있나, 나는 얼마나 잘 분별하고 있나, 이것을 한번 살펴보셔야 됩니다.
1-2. 같은 마음을 품으라
2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 "권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 "권하다"라는 말이 "식사하세요, 고기 드세요" 이런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는 단어는 초청하는 뜻입니다. 위로하는 뜻입니다. 초청하다, 위로하다.
유오디아라는 분과 순두게라는 분은 여성입니다. 지금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빌립보 교회 여성 지도자 두 분이 계신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원래 자색 옷감을 파는 장사인 여성 루디아라는 여인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이니까 여성들이 많습니다. 여성 지도력이 강한 교회인데, 유오디아 권사님과 순두게 권사님이 서로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이고 영향력도 상당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권하노니", 이 말은 초청해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같은 마음 품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좀 상상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 안에 있다"는 말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장자 죽는 그날에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피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죽음의 사자가 오늘 밤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른 그 안에 있습니다. 나 혼자 있기 너무 무서워서 옆집 사람과 우리 같이 있자고, 같이 있자고 하며 함께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른 한 공간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어제까지 싸웠다 할지라도 오늘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은 서로 동지입니다. 오늘은 서로 같이 손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날이니까요. 진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지, 못 본 척하고 지나갈지, 아니면 죽음의 사자가 들어와서 우리 집에 장자를 죽이고 그 영혼을 데리고 갈지 알지 못하는 두려움의 밤이니까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너희가 옛날에 출애굽하고 구원받은 그날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그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그 아래 함께 살리심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왜 싸우냐, 지금 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싸우냐,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유오디아, 순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안에서는 다 동지 아닙니까?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는 서로 갈등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도 있고, 서로가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죽음의 밤에 이 사람과 내가 같이 그 공간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손잡고, 서로 힘내고, "야 우리 같이 한번 잘 살아보자, 만약 여기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면 이제 내일 해가 밝으면 우리 함께 어제 싸웠던 것 다 잊고 같이 한번 해 보자"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 말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그래서 신앙생활하는 믿음의 교회 공동체는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1-3. 서로 도우라
3절을 보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와 멍에를 같이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구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 저 여인들이 누굽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분들이 빌립보 교회 초기에 같이 힘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저 여인들을 돕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돕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도와야 됩니까?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저렇게 다투고 저렇게 싸우니 저들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도록 너희가 도와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보통 교회가 어떻습니까? 사람들 모이는 공동체가 유오디아 파, 순두게 파, 파가 모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파가 형성되어서 이 파가 저 파를 헐뜯고, 이 공동체 사람들이 저 공동체를 헐뜯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돕라"는 말은 점잖게 바울이 말해서 그런 것인데, 서로 간의 비방을 중지하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것을 중지하고, 서로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도록 너희가 서로 도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간질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동체에서 정말 힘든 것은, 두 사람은 갈등할 수 있는데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있습니다. 여기 가서 이 말하고, 저기 가서 저 말하고, 이 말 옮기고 저 말 옮기고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그 이간질의 영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나쁘다는 말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기 어려울 것 같은 마음이 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쪽 사람들의 영혼을 다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이간질하면 재미있습니다. "내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이간질하면 재미있습니다. 확 열받고, "내가 어떻게 해버릴까" 하면 "아우 참아라, 참으라고" 이런 식으로 서로가 이간질해서 서로를 괴롭게 하고 힘겹게 하는 것, 이런 것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자, 명령어가 세 개 나왔습니다. 주 안에서 서라, 같은 마음을 품어라, 도우라. 이것은 공동체 지도자들이 해야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방법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권면합니까? 먼저 7절을 봅시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구절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도 많이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어디 쉬웠던가요?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 내 마음을 지키는 것, 내 생각을 지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자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 준 것입니다. 사실 이 빌립보 교회는 여성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 여성 성도들의 특징이 있는데,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제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걱정들이 많으십니다. 근심과 걱정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조금 일반적으로 단순한 경향이 있고, 여성들은 복잡한 경향이 있으니까요. 아직까지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들이 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2-1. 주 안에서 기뻐하라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상황적 기쁨이 보통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상황적 기쁨이 아닙니다. 감옥에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 말은 주 안에 있으니까 생명을 얻었습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주 안에 있으므로 죽을 내가 살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본질적 기쁨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감옥에 있지만 나는 기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을 믿으니까, 나는 구원받은 백성임을 믿으니까, 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기쁨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본질적인 기쁨을 잘 잊어버립니다. 그냥 상황이 슬프니까 슬퍼하고, 상황이 괴로우니까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적 기쁨을 가지고 이것을 항상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처방입니다.
2-2. 관용을 베풀라
두 번째는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 무엇입니까? 법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헬라어로 에피에이게스(ἐπιεικής)라는 말인데, 관용은 법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가 있고, 누려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고위 공직자가 관용이 있다면, 법적 권리가 있습니다. 또 예산을 자기가 쓸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검소하게 살고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 아닙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특권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관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지키려고 합니다. 다 챙기려고 합니다. 다 가져가려고 합니다. 예산이 배정되어 있으면 나에게 책정된 예산을 끝까지 단돈 10원까지 다 끌어가려고 합니다. 공무원들 보십시오. 시에서 보십시오. 나라에서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소고기 먹어가며 회식하고, 배 터져 가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있는 예산, 배당된 것, 그 부서에서 배당된 것을 다 써 버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관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쓰니까 마음과 생각을 못 지키는 것입니다. 화가 나니까요. 나에게 배당된 권리를 못 쓰니까요.
사람들은 천부적인 권리도 있고, 가질 권리도 있고, 누릴 권리도 있습니다.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좀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을 못 다스리는 것입니다. 회사가 어려우면, 그 회사의 사장님이 참 사람이 훌륭하고 인품이 좋고 자기 근로자들을 사랑하는 사장님이라고 한다면, 급여 지연되면 본인이 더 힘들 것 아닙니까? 하루 지연되는 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치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생각을 못 지킵니다.
관용은 마땅히 내가 누릴 권리를 내려놓고, 넘겨 주고, 가지지 않고, 주장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그래야 마음을 지킵니다. 약이 올라서 못 견디고, 누리고 싶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못 다스립니다.
2-3. 기도하며 감사하라
6절을 봅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기 반대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염려와 기도, 간구입니다. 바울이 왜 이것을 같은 선상에 놓았을까요? 왜냐하면 이것이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이쪽 페이지에 있으면 염려이고, 한 장만 딱 넘기면 이것이 기도와 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이고 죽겠네" 하면 이것이 염려입니다. "아버지, 아이고 죽겠습니다" 하면 이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앞에 "아버지" 한 번만 부르면 그것이 기도가 되고 그것이 간구가 됩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이고 죽겠네" 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염려입니다. 그런데 기도와 간구는 "아버지" 이름 한 번만 딱 놓으면 그것이 기도가 되고 간구가 됩니다.
우리 탄식 속에, 우리 한숨 속에 있는 그 행간의 의미를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전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다 알고 계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왜 한숨 쉬는지, 내가 왜 "아버지" 부르는지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 한숨과 그 의미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안 부릅니다. 그러면 그것이 염려인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 한 번만 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정신 차리면 마지막에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것만 해 주시면 기도입니다. 그것이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이 한결 편해집니다. 얼마나 편해지는지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이 "아뢰다"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아뢰다 하니까 올린다, 열심히 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노리조(γνωρίζω)라는 원어는 선언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선언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언합니까?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선언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시제입니다. "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할 것은 구한 것입니까?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직 구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직 구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우리 감사는 손에 무엇이라도 누가 줘야 감사합니다. 무엇이라도, 사과 한 쪽이라도 줘야 감사합니다. 무엇이라도 받아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반대 거래입니다. 구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감사합니까? 그래서 "아뢰라"고 한 것입니다. 선언하라고요. 아직까지 구하지도 않은 것을 그냥 선포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포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구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선포합니까? 하나님, 내 인생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줄로 믿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냥 선포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인생 문제, 내 인생 문제,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 그것을 하나님께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구하지도 않은 것까지도 선포해서 하나님께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해 보십시오.
한번 정리하면,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방법은 첫째, 상황에 따른 기쁨이 아니고 구원받은 기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구원받은 기쁨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옥불에 떨어져 가지고 영원토록 거기서 지옥에 불 소시개 노릇을 하고 살아야 될 텐데,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기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관용입니다. 관용은 법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태도입니다. 셋째가 염려 대신의 기도, 그리고 미래적인 감사를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 보시면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군대가 지키심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될 단어가 7절에 나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지키다"라는 헬라어가 프루레오(φρουρέω)입니다. 군대가 주둔하여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군대가 지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 드리면, 구약 시대에 엘리사 선지자가 계셨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너무너무 아람 군대의 동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람 왕이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쳤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군인들을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가 살고 있는 성을 에워싸 버렸습니다. 그냥 에워싸서 그 성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중에 엘리사도 그냥 같이 죽을 것 같으니까요.
하루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나가 보니까 아람 군대가 빼곡하게 구름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군대가 이렇게 우리를 다 둘러 진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군대가 보이지 않느냐?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더 큰 군대, 천군 천사들이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엘리사가 기도해서 보게 합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 말씀입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심에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루레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염려 대신에 기도하고, 미래적으로 감사하면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지키셨던 그 불말과 불병거,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지키는데 우리가 불안할 것이 있습니까? 걱정할 것이 없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짝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2-5. 무엇에든지 선하게 살라
8절을 보십시오. 공동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무엇에든지"입니다. 이 "무엇에든지"라는 말을 좀 바꾸면 "모든 일에"라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 참되며, 모든 일에 경건하며, 모든 일에 옳으며, 모든 일에 정결하며, 모든 일에 사랑받을 만하며, 모든 일에 칭찬받을 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할까요? 우리는 모든 일에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눈이 있으면 경건하고, 사람들 눈이 없으면 불경건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옳지 않습니다. 남의 일에는, 제삼자의 일에는 굉장히 정의롭습니다. 판단을 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내 일이 되어버리면, 내 손해가 단돈 10원이라도 손해되는 일이 되면 사람들은 옳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10원짜리 이득까지 다 따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절대적인 선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 "무엇에든지"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건 안 보건 경건해야 되고, 나에게 이익이 되건 이익이 되지 않건 옳아야 됩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짓을 하고,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면 미움받을 만한 짓을 하고, 얄미운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모든 일에 사랑받을 만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칭찬받을 만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좌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계속 맥락을 흐르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라, 상황에 따라 슬퍼하고 상황에 따라 울고 하지 말고, 항상 주 안에 있으면 근원적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은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 말씀입니다. 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의 인내입니다. 욥이 어떠했습니까?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하루아침에 열 명의 아들딸을 다 잃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깨뜨려서 그 조각으로 자기 몸을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긁고 있고, 그래도 인내합니다. 그래도 견디고 버티고 하나님을 향해서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고 그러고 있습니다. "욥의 인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런 상황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어떤 일이든지 일관된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일관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 성실과 일관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천지 창조 이후부터 하나님이 단 하루도 해를 띄우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단 하루도 천지 창조 이후에 단 하루만이라도 하나님이 해를 감춰 버렸다면, 24시간 해를 띄우지 않고 하나님이 해를 감춰 버렸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성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미운 짓을 하건, 인간이 고운 짓을 하건,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지속적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과 하나님의 지속성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3. 자족하는 비결
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쓸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을 통해서요. 그것을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내가 궁핍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떠한 형편에든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스스로 만족할까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70장에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땅 근심 있으랴." 주 안에 있으니까 자족하는 것입니다.
3-1. 비천과 풍부에 처하는 법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비천에 처하는 것은 잘합니다. 잘 견딥니다. 가난할 때는, 돈이 없고 가난하고 힘들 때는, 정신이 번쩍 나서 그런지 잘 견딥니다. 그것은 잘 견딥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대끼고 살려고 하고, 애를 쓰고,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잘 견딥니다.
그런데 진짜 잘 견디지 못하고 넘어질 때가 풍부에 처할 때입니다. 풍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은 물질의 풍부만 생각하는데요, 시간의 풍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 없이 막 살 때, 쫓겨 다니면서 시간에 쫓겨 살 때, 그때는 "시간이 조금만 나에게 있으면, 나에게 여유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갑자기 나에게 한정 없이 딱 주어지면 어떻게 되던가요? 그 시간으로 정말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그 시간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선한 용도로 시간을 사용하던가요? 아니면 그 시간에 치어서 삽니까? 잘 안 됩니다. 시간의 풍부에 처하면 시간 관리가 안 됩니다. 시간의 풍부에 처할 때도 그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자기 관리를 해야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물질의 풍부에 처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질의 풍부에 처하면 투자처를 찾아다닙니다. 투자처, 돈이 돈을 낳기 위해서요. 그것이 성경적입니까? 돈이 돈을 낳는 것, 돈으로 또 다른 돈을 낳고, 그 돈이 또 다른 불로소득을 낳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왜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은 교회에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 잉여의 자산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믿을 만한 투자처에 왜 투자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만약 그랬다 합시다. 우리 교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제직회 때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니까요.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나는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풍부가 있으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바울이 말했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은 없으니까 그냥 사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 먹다가 한 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에 열 끼 먹을 수 있는 물질이 생기면 그 일곱 끼를 가지고 투자처를 찾습니다. 자손 만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데를 찾아다닙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까?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이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눠야 합니다. 그냥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고 베풀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을 가지고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면 나누고 베풀고 쓰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짧은 세상 살면서 그것을 움켜쥐고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가 다 썩어 빠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하면 그것을 가지고 나누고 베풀고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것이 풍부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풍부에 처하면 그것이 안 됩니다. 그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3-2. 훈련을 통한 자족
바울이 말했습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배웠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훈련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훈련받아야 됩니다. 돈 쓰는 것도 훈련받아야 됩니다.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쓸 수 있어야 됩니다. 나누고 베풀고 밥 사 주고 쓸 수 있어야 됩니다. 조금 있으면, 내가 두 개 있으면 한 개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아까워 죽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미쳤지, 내가 왜"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막 남들이 그만하라고 해도 자꾸 자꾸 베풀고 나누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감옥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랬습니다. 자기는 감옥에 있지만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주 안에 있으니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상은 일관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도 일관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서 8절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입니다. 후배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이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나그네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9절과 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부하려 하는 자들, 풍부에 처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부를 계속 쌓아가려고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떨어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밑바닥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경험해 보셨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아무도 자기를 찌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하면 그것이 자기를 찌르는 고통이 되고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 여타의 가치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질환 중에 가장 무서운 질환이 자가 면역 질환입니다. 자기 면역 세포가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가 면역 질환은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어떻게 터질지 모릅니다. 내 장기 속에서, 이것은 우리 편인데, 아군을 적군으로 인식하고 세포가 세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면역세포가요. 여기 나옵니다. "자기를 찔렀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고, 이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줄 줄 알았는데, 이것이 결국 나를 찌르고 나를 공격합니다. 안 됩니다.
물질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그냥 자족하고 있으란 말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 보면 필요한 물질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처럼 이상한 집단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산을 세웁니다. 교회가 예산을 세우는데 그 예산이 들어올 헌금을 가지고 가상의 예산을 세우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랫동안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가지고 그 헌금을 가지고 그다음 해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창립될 때 "한 해 동안 우리는 하지 말자, 밥도 먹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한 해 동안 돈 다 모으자, 그 모은 것을 가지고 그 이듬해에 쓰고, 또 그 모은 것을 가지고 그 이듬해에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가상의 예산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년에 이 정도로 헌금이 될 줄로 알고 믿고 예산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달성 못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저기 펑크나는 것입니다. 전부 다요. 그런데 그것을 먼저 생각해 버리면 이 예산을 위해서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되겠다, 성도들을 어떻게든 협박해야 되겠다, 겁을 줘야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헌금을 많이 하라고 해야 되겠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뻔한 것 아닙니까? 다 도망가지 누가 거기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사이비 집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명자로서 열심히 주의 일 하고 열심히 사명 감당하고, 주 안에서 자족한 줄로 알고, 하나님이 더 부어 주시면 나눠 버리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희한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신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재정이 채워지고, 그래서 사역이 먼저 가고, 사명이 먼저 가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이 먼저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재정 생각하고 교회 물질 생각하면 교회를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하자고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못 합니다. 그런데 그냥 사명 생각하고 일 생각하고 하다 보면 그다음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면 스스로 찌르고 서로 괴로워서 못 견딥니다.
4. 빌립보 교회의 후원과 마무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어떻게 도왔습니까? 이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14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이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물질도 없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도와줬습니다.
15절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복음의 시초"라는 말은 2차 선교여행 시초입니다. 2차 선교여행 때 마게도냐에 세 교회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입니다. 그때 이 세 교회를 전도하고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립보 교회는 여성 성도들이 많으니까, 또 자색 옷감 파는 장사 루디아가 또 제법 재산이 있었으니까 많이 도왔습니다.
16절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절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풍성한 열매를 구합니다.
18절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받았고 또 풍부하도다."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는데 "에바브로디도에게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에바브로디도가 쓸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동사가 무엇입니까? "채우시리라"입니다. 내가 채우려고 하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되는데,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요. 바울은 주의 일을 했고 하나님이 그를 채우셨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가지고 사명자로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그런 경험을 충분히 하실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이 "각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고, 성도들을 집단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여러 사람 모아놓고 그냥 한 번에 툭 치고 이렇게 하지 않고 각각,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렇게 해서 빌립보서 마무리가 됩니다. 옥중서신 두 번째 책 빌립보서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른 기쁨이 아니고 절대적 기쁨, 구원받은 기쁨,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죽음의 날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그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우리가 그 말씀을 잘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젖 먹는 어린 성도로서 그치지 않도록 도우시고, 성장하여 지각을 가진 자로 연단을 받고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하옵시고 서로를 돕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군대가 우리를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우리를 지키기를 원하옵나니, 주 안에서 기뻐하게 하옵시고, 관용하는 자 되게 하시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체의 비결,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사오니, 우리가 비천에 처할 때도 풍부에 처할 때도 주 안에서 함께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사랑을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기쁨이 우리 삶에 차고 넘치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지옥 백성이 아니라 천국 백성 된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값지고 영광된 일인지 매순간 기억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