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 / 전체녹취

옥중서신 11 -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 (골로새서 1장)

서론: 골로새서의 배경

옥중서신 중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마치고, 이제 골로새서를 시작합니다. 골로새서는 조금 특별한 책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특별하냐 하면,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닌데 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썼을까요? 그것도 로마 감옥에서 2년 동안 연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왜 골로새서를 써야만 했을까요?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고, 에베소 지역에서 동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와 오네시모에게 거기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골로새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자기가 개척하지도 않은 골로새 교회였을까요? 그 골로새 교회에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였던 것 같습니다. 빌레몬은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오네시모의 주인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었는데, 자기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망가서 흘러흘러 오다가 결국 로마까지 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의 셋집에서 가택 연금당하는 그 집에서 바울을 통해서 성경 공부를 하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 듣고 복음으로 구원받았다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네가 너의 원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쳤으니 돌아가서 사과해라. 그리고 용서를 빌어라." 그렇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이라는 분이 골로새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서만 보낸 것이 아니고, 이분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인 골로새 교회에도 편지를 하나 써준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지고 갔습니까?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니까 "같이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다는 이 말을 보면, 골로새 교회의 개척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그 당시 초대교회 상태에서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사람,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만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의 포커스가 바울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만 교회를 개척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게 아니고, 에바브라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역사를 보면 바울이 처음에는 바나바와 함께 복음전도를 떠납니다. 1차 선교 여행이지요. 그런데 2차 선교 여행 때부터 갈라집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가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성경의 포커스와 렌즈는 바울과 실라를 향해서 2차 선교, 3차 선교 여행을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마가 요한, 바나바는 놀았을까요? 그분들은 복음 전도를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와 교회 개척의 역사를 많이 이루었는데, 성경에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에 에바브라라는 사람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초기 교회가 얼마나 건강합니까? 바울도 개척하고, 에바브라도 개척하고, 바나바도 개척하고, 우리가 또 사도행전에서 본 것처럼 빌립 집사님도 사마리아 성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지 않습니까? 이런 다양한 교회 생태계가 있는 공동체가 아주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과거에 우리나라는 그랬습니다. 동네마다 동네 교회가 있었습니다. 시골마다 교회가 있었고, 조금 큰 도시는 또 거기에 맞는 교회가 있고, 대도시에는 대형 교회가 있고, 그래서 각 지역에 맞는 다양한 교회들이 다양하게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힘든 교회들, 작은 교회들이 계속해서 문을 닫고 사라지고, 교회가 갈수록 대형화되고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이 상황은 별로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4장 7절을 보면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라고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두기고가 이 편지를 너희에게 가져가서 나의 사정을 알려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갑니까? 9절에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네시모에 대한 이미지는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어떻습니까? 별로 좋지 못합니다. 빌레몬 장로님의 종이었는데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편지 써서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라고 하니까 정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보니까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랬습니다. 그것을 보면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다"라는 말은 골로새 교회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서론을 정리합니다.

1. 골로새 교회 성도들

1-1. 사도의 정체성

이제 본격적으로 1장에 들어가면,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봅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바울은 늘 자기를 사도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도성이 인정받았을까요,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도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우리처럼요. 우리도 배타적이지 않습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데, 교회마다 배타성이 좀 있습니다. 교회마다 자기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냥 나는 그런 것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원래 사도라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가지고 사도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정했습니다. 어떻게 정했을까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함께 따라다닌 사람을 사도라 하자고 자기들끼리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개념으로 보면 바울은 사도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함께 계실 때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는 사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줄기차게 자기를 사도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내심을 받았으니까요. 사도라는 말 자체가 무엇입니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 아닙니까? 자기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을 향하여 준비된 내 그릇이다. 가라, 이방으로 가라"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정체성은 사도입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아니라 해도요.

이건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제자라고 하면 지금 우리는 각자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제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것이 그 당시 특수성에 딱 묶여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따라다닌 사람만 제자입니다. 우리는 제자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구경꾼입니다.

제자를 예수께서 이렇게 정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과 2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것을 반대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면, 그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읽으면,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면 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내 가족, 내 형제자매보다 예수 더 사랑하고 십자가 지고 예수 따라가면 제자입니까, 아닙니까? 제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그 당시의 특수성도 있고,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특수성에 매몰됩니다. 이건 굉장히 편협한 것입니다. 그냥 특수성, 그 특수성이라는 것이 세력을 만들고, 그 특수성이라는 것이 사람을 배타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것. 그 보편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 같은 형제요, 다 같은 형제자매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물어버리면, 이 교회 다른 교회, 내 교회 남의 교회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보편성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면, 옛날에 예수님의 제자들 같은 이 사도성이라는 특수성의 함정에 빠집니다.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확장성을 가지고 보편성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자기를 이야기했습니다.

1-2. 기도할 때마다 감사

3절을 보시겠습니다. 바울이 기도했는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골로새 교회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를 했나 봅니다.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교회만 아니고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는데, 기도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자꾸 솟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마음이 좋은 사람, 기도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그냥 행복하고, 막 웃음이 나오고, 즐겁고 기쁘고, 축복이 막 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하려고 하면 "아, 오늘도 이 인간 기도하다가 빨리 끝내야지"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이 사람 위해서 기도하려면 아침 든든히 먹고, 고기 먹고, 영적 전쟁하려고 마음먹고 그렇게 기도해야 되겠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그냥 감사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말 에바브라가 이 교회를 잘 양육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 서신을 읽을 때는 키워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시그니처, 바울이 항상 쓰는 말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이 보이십니까? 4절과 5절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이유가, 이 교회 안에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믿음, 소망은 2등, 3등이다. 믿음을 제일 먼저 이야기했으니까 믿음이 2등일 것이고, 소망은 아마 3등쯤 될 것이다. 이렇게 초등학생처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공부했습니다.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봤습니다. 바울이 여기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서술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은 그냥 하나님의 명사가 아니고, 믿음은 역사를 이룹니다. 그렇게 말했고요. 사랑은 수고로워야 하며, 소망은 인내해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항상 갖고 있는 일관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그중에 제일을 사랑이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수렴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나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여기에 다 녹아 있기 때문에 바울은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1-3. 듣고 깨닫고 열매 맺고

이제 그 뒤에 보겠습니다. 6절을 보니까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누구를 통해서 이 복음이 왔습니까? 에바브라를 통해서 왔습니다. "너희가 듣고." 듣고에 동그라미 치십시오. 복음은 먼저 오면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듣고, 그다음에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듣고 그다음 깨닫는 것입니다. 듣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데, 지속적으로 듣다 보면 깨달아집니다.

자, 깨달음 다음에 그다음 보십시오.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순서가 무엇입니까? 듣고, 깨닫고, 열매가 있고. 그런데 여러분, 여기 뭐 하나 빠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자, 생각해 보십시오. 듣고 깨달았는데, 그다음 자랍니까? 듣고 깨닫고 그냥 자랍니까? 그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한테 적용시켜 보십시오. 내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하!" 하고 깨달았습니다. 머리로 깨달았습니다. 가슴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다음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들어가야, 그래야 열매를 맺고 자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순서가 듣고, 깨닫고, 수고로워야 하고, 그래야 자랍니다. 그것이 빠지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빠지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듣고 깨닫는 것까지는 잘하는데, 믿음을 가지고 역사를 이루고, 사랑으로 수고롭게 일하고, 인내를 가지고 소망을 붙들고, 계속해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가고 있는가, 이 부분이 우리에게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어 자랍니다. 열매는 우리 모두 원합니다. 좋은 열매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말하고 골로새 교회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이 없으면 성장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겨자씨 갖다 심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여기도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풀보다 작은데, 심었습니다. 그리고 자라 버렸습니다. 심고 자랐는데, 그 가운데 자람을 위해서 농부의 수고가 빠져 있습니다. 농부의 수고는 왜 뺐을까요? 예수님이 이것을 기본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는요, 농부는 심고 그다음에 수고하는 것입니다. 자라도록. 그래야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 같다." 상상해 보십시오. 가루 서 말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아시지요. 저는 사실 잘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지. 그냥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누룩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만 있고 서 말만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겨자씨만 있고 땅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겨자씨를 갖다 심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수고해야 합니다. 잡초 뽑아 줘야 합니다. 물 줘야 합니다. 관리해 줘야 합니다. 누군가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부풀어 오릅니다. 그것을 누가 합니까? 여자가.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누군가입니다. 그 누군가. 그 여자는 내가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수고를 하지 않고 가루 서 말이 부풀 수 있겠습니까? 그 수고를 생략하고 열매를 얻겠다고 하면, 우리가 늘 잘하는 말로 그것은 도둑입니다. 도둑이 따로 있습니까? 수고하지 않고 열매는 얻고 싶고, 일하지 않고 먹고 싶고, 투자하지 않고 누리고 싶고, 그것은 도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가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 수고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2. 바울의 기도 내용

2-1.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함

그다음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무엇을 기도합니까?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감사만 한다고 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감사는 기본으로 가고, 그다음에 바울이 진짜 기도하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9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구하노니가 무엇입니까? 기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것도 순서가 중요합니다. 골로새서를 보니까 아주 순서가 정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첫째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 이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 목사님한테 가면 됩니까? 목사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도 여러분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허리가 아픈데 병원에서 수술하라는데, 재활 치료할까요? 수술할까요?" 그런 엄청난 질문을 제게 하시면, 제가 만약 수술하라 그랬다가 잘못되면, 만약 재활치료 하라 그랬다가 더 아프면?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의사하고 상의해서 본인이요. 그것을 왜 물어봅니까, 목사한테?

그런 것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째는 기도하고, 둘째는 말씀 봐야 합니다.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십니다. 일치의 영을 통해서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은 너희가 기도에 힘쓰고 말씀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은요, 방향을 잘 잡게 해 달라는 뜻과 같습니다. 방향이 북쪽인지 남쪽인지 알아야 달려갈 것 아닙니까? 동서남북도 분간 못하고 자기 가고 싶은 대로 막 달려갔다가 "어, 여기가 아니네" 그러면 그때 어떻게 합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뜻을 알아야 그 뜻대로 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이 기도하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 뜻 분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2-2. 뜻을 알고 행동하라

두 번째 무엇입니까? 10절 보니까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행동입니다. 뜻을 알아야 행동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앞에 것 건너뛰고 막 행동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냥요. 그런데 이 행동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동, 사회에서 하는 모든 행동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로부터 인한 것입니까? 내가 하고 싶으니까요? 세상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너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지금 너의 감정이 원하는 대로 해." 아이들한테 그렇게 시키면, 그것은 큰일 날 짓입니다. 그렇게 시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더니? 기도해보고, 정말 주께서 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이것을 물어봐야 합니다. "지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그게 정답이야." 망합니다. 그러다가요. 마음 가는 대로 하다가요. 그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사탄이 주장하고 있는지, 성령께서 주장하고 계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그 마음을 사탄이 주장하고 있어도 부모가 들어가 가지고 "마음 가는 대로 해봐."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일 날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녀들 가르칩니다. 좋은 부모라고요, 열린 교육이라고요. 아닙니다. 절대로요.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그 뜻하신 바대로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 건너가고 그냥 행동부터 하는데, 큰일납니다. 바울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뜻 알고, 그다음에 행동.

2-3. 세 가지 결과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결과가 나옵니다. 자, 주의 뜻 알고 행동하면 첫째 결과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놀랍습니다. 그렇게 되면 열매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랍니다." 성장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고, 성장이 있고.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11절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됩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요. 주의 뜻 알고 그대로 행한다고 고난이 오지 않습니까? 고난 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의 뜻이 확실하고 분명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 부모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 원망하고, 자기 원망하고, 자기 인생 원망하고, "내 인생 망했다" 그러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 잘 읽어야 합니다. 그냥 읽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서를 아주 정교하게 순서대로 썼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뜻, 주의 뜻 알고, 그리고 행동하면 세 가지 결과가 오는데, 첫째 열매가 있고, 두 번째 성장이 있고, 세 번째 견딜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또 우리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3.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

3-1.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

그다음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도, 또 그리스도와 교회, 이 관계에 대해서 바울이 하나하나 설명하는데요. 사실 그냥 읽으면 진짜 어렵습니다. 무슨 말인지 그 말이 그 말 같고, 이 말이 저 말 같고요.

13절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여기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주어가 누구입니까? "그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이 13절과 14절 말씀은요, 구원의 주체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구원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건지고, 옮기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여기에 약간 간을 칩니다. 손을 댑니다. 그 구원에 인간의 능력이, 인간이 구원에 관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단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건지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 이것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요. 모든 것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요.

3-2.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5절, "그는." 예수님은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단순한 말 같은데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들어오셔서 33년을 계셨습니다. 인간의 시간 안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33년을 못 봤습니다. 바울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의 33년의 기록이, 특히 공생애 3년의 기록이 아주 상세하게 잘 기록되어 있고, 그 증인들의 기록이 서신서에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보려면 예수님을 보면 되는데, 그 예수님을 보려면, 만나려면 복음서와 서신서를 읽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형상이라 그랬으니까요. 이미지입니다요. 이게 똑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아는 예수님, 여러 가지 다양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수백 가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까지냐 하면, 사랑해라 아니고, 사랑을 실천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냥 죽어 버리신 사랑입니다.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나도 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면,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인데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누군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발 씻어 줄 수 있는 겸손도 있어야 되고요.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고, 나병 환자의 몸에 손도 얹으시고, 그를 위해서 기도도 해 주셨는데, 우리도 그런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좀 있어야 되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꼭 그분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8절과 9절에 나오는데요,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 따라다닌 빌립이 하나님 만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맞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앙생활 한 60년 했는데, 하나님 좀 보고 싶습니다. 보여 주세요." 그러면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성경을 60년 읽어도 어찌하여 나를 보이라 하느냐? 성경 속에 내 아들이 있고, 그것이 곧 나다." 아마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열심히 읽고 그 안에서 예수님 만나면, 그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빌립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요.

3-3.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자, 그리고 18절 한번 보시지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 자, 여기서 교회의, 몸 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그가 근본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의 근본이라는 말입니까? 교회의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욕 중에 제일 심한 욕이 무엇입니까? "이 근본 없는 뭐 어쩌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부모님을 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성도들 중에도 진짜 신앙에 근본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의 근본 없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갓 믿어서 근본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로 두지 않는 분들입니다.

목회자 중에도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가 교회의 머리인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합니다. 교회 중직이라고 자기 멋대로 교회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면 근본 없는 사람입니다. 제일 심한 욕을 들어도 쌉니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근본이라" 그랬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본입니다. 그가 머리인데, 감히 머리를 두고 내가 또 다른 머리 노릇을 하면, 그것이 이단 아닙니까?

이단이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그리스도인데, 왜 내가 머리 노릇을 합니까? 그런 머리는 하나님이 처벌하십니다. 그냥 가차 없습니다.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심판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그 심판은 예수님 자리에 동격으로 오르려고 하는 자는 가차 없이 하나님 심판하십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근본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가 근본이고 그가 머리이니, 교회 지체가 순종해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에, 말씀 잘 보고 따라가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3-4.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화평

그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봅니다. 19절, "아버지께서는"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즉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제 20절이 중요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 그런데 여러분, 화평을 이루는데 왜 피가 필요할까요? 화목하게 하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했을까요? 화목하게 하는데 왜 피가 필요한가? 그냥 친하게 지내면 되지요.

그런데 그냥 인간들끼리 사람들끼리 "우리 친하게 지내자" 하는 것, 그것은 그냥 하나의 얼굴 표정 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요, 진정한 화평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요. 그런데 우리가, 죄가 있는 인간은, 죄 있는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진정한 화평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다투고 분쟁하고, "내가 너보다 낫다" 그러고, 그러면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항상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요. 그 죄 때문에 모든 일, 모든 문제들, 분쟁들이 다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다 덮어 버린 것입니다. 그냥 십자가의 피로요. 죄를 다 덮어 버리니까, 죄가 없으니까, 분쟁의 원인이 사라지니까, 화평이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가정에서 화평한 가정이다, 화평이 그냥 이루어집니까? 가정의 화평이 누군가가 죽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요. 아내가 죽건, 남편이 죽건, 아이들이 죽건, 누군가가 다 자기 자아를 죽이니까 가정의 화평이 일어나는 것이고, 교회가 화목하고, 교회가 화평하고, 교회가 안 싸운다, 그러면 누군가가 죽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 성질 내고 죽지 않으면, 십자가에 내가 나를 복종시키고 죽지 않으면 맨날 싸웁니다.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있는 데를 가만히 보면, 자기 주장이 있고,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는 것을 보면 죽음이 없습니다. 거기에 자기 십자가,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없습니다. 예수 닮은 제자가 아닙니다.

3-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움

그다음 바울이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바울이요,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이 왜 괴로움을 기뻐할까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룬 것처럼, 나도 내 육체가 교회와 공동체 화평을 위해서 괴로움을 견디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부활 승천하셨으니까, 그 남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감당하겠다. 그 말은 너희도 감당해 달라는 뜻입니다.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육체, 몸에 채우노라, 이 말은 내 몸이 고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래요. "아유, 마음으로만 하면 되지 뭐." 내 마음만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마음만 하고 몸이 안 가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몸도 함께 움직입니다. 마음과 몸이 분리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내 영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만 보낼게요? 안 됩니다. 몸이 함께 가야 합니다. 몸이 조금 힘들더라도, 수고라고요, 같이 수고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교회에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자, 바울이 교회에 일꾼 된 것, 직분을 받은 것, 무엇 때문에 받았다 그랬습니까? 말씀을 이루려고요. 말씀을 이루려고요.

그 직분론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았다는 것, 목사의 직분,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은 것은 말씀을 이루려고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받은 것도 아니고, 말씀을 이루려고요. 그러면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는 말씀, 고생하고 받은 것, 그것이 진짜 직분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바울이 그 말씀을 했습니다.

3-6. 공공연한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 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비밀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입니다. 다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비밀이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합니다. 드러난 비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지식인, 지성인, 초등학교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 압니다. 예수님을요.

그런데 예수가 비밀인 이유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경험하지 않으면요. 예수를 경험하고, 예수를 내가 직접 내 몸에 직접 채우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고, 그러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따라가 본 자만이 "아, 이것이 정말 구원의 길이구나" 그렇게 깨닫기 때문에 예수가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 좋은 것 누가 모릅니까? 압니다. 관념적으로요. 그런데 진짜 사랑해 보지 않으면 "사랑이 이렇게 달콤한 것이구나"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안 해 봤는데요. 사랑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비밀인 것입니다.

4. 바울의 목회 철학

4-1. 함께 동역하는 목회

자, 저는 이 28절 29절을 무척 좋아하는데, 제가 옥중서신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말씀에서 제가 이 말씀을 인용하고 읽었는데, 이 말씀은 바울의 목회 철학입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 교회에 청빙하기 전에 교회에 뭘 내지 않습니까? 그때 목회 계획서 내라 그래서, 저는 여기 양산도 모르고 이 교회도 모르는데, 가서 몇 천 명으로 부흥 시키겠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합니까? 알지도 못하는데요. 그런 것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쓰긴 써라 그러니까 써야 되는데, 그래서 바울의 목회 철학을 가지고 제 목회 계획서에 그대로 쓴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이 28절 29절, 골로새서 1장 28절 29절, 이것을 붙들고 목회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 주신 우리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 방향이기도 하고, 동시에 바울의 목회 철학이기도 합니다.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28절에 보니까 "우리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목회를 혼자 한 적이 없습니다. 동역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인데 자기 가정에서 대대로 계속 히브리어 썼다 그랬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굉장히 학벌도 있고 괜찮은 사람입니다. 굉장히 탁월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혼자 목회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데, 동역했습니다. 바울과 아굴라 등등의 수많은 사람들과 바울이 동역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로 혼자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동역하는 것입니다. 동역하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속상한 일도 있지요. 속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하고 생각이 다르니까요. 나하고 마음이 안 맞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워낙 탁월하고 뛰어나니까 그냥 끌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냥 동역한 것입니다. 같이요.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식이니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식, 교회 공동체가 그런 것인데, 혼자 탁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조금 모자라고 못난 사람들이 함께 가서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같이요. 성도들은 같이 한 공동체에서 어울러서 서로 깎이고 서로 훈련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나 이거 혼자 하는 것이 훨씬 편해요." 편합니다. 혼자 하는 것이요. 왜요? 스트레스 안 받으니까요. 그 사람 유능하고 뛰어나니까 혼자 목사가 다 당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 별난 사람, 별 희한한 사람, 그런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냥 속상해 가면서요. 그것이 동역입니다.

왜 이것이 성경의 정신인데요. 하나님도 나같이 하잖아요. 하나님이 성질 급하면 혼자 하시지, 인간들하고 왜 같이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하고 같이 일하십니다. 때로는 더딘 것 같고, 때로는 망한 것 같고, 저 인간하고 일하다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4-2. 그를 전파함

그다음 "그를 전파하며"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전파하며요. 바울은 자기 이름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의 목회 철학은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사람들에게 널리널리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그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지면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만물에 찌꺼기같이 되어도 괜찮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당해도 그만 전파되면."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우리 교회 방향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요. 그래서 이제 별것 아닌데요, 정말 별것 아닌 것인데,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면 전면 메인 화면에 목사 얼굴이 없습니다. 목사 얼굴이요. 목사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려면 유튜브 영상이라도 열어 봐야 되고, 그 안에 들어가서 목사들 개인개인들 소개하는 것도 좀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것 아닌 것이지만 그냥 이 정신입니다. 그냥 그를 전파하기 위한 것. 그것은 별것 아닌 것인데 그런 것입니다.

4-3. 각 사람을 권함

그다음 그를 전파하는 방식들이 나오는데요,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세 가지 중에 마지막 세 가지가 제일 중요한데, 각 사람, 각 사람, 각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다" 그랬습니다.

각 사람이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성도들을 집단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 말씀을 보시면, 이것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질 때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밀레도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3년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에베소 교회를 섬겼던 것,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누구를"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에베소 지역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큰 교회를 만들고 나서도 각 사람, 각 사람입니다.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

그래서 여기 나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권한다는 말은 위로하다, 격려하다,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보는 것은 오늘날 목회로 번역하면 무엇입니까? 심방하는 것입니다. 심방하고, 상담하고, 챙기고, 돕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목회 계획서 쓸 때 그랬습니다. "각 사람을 권한다." 각 사람을 다 심방하겠다고 쓴 것입니다. 그래서 괜히 그렇게 해 가지고 지금 힘들게 각 사람, 새 가족 심방도 매 가정 하고, 각 사람 심방하는 것입니다. 그냥 되든지 안 되든지 그냥 닥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 만나고, 심방하고, 돌보고요.

왜냐하면 바울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렇게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는 중에도, 이분은 각 사람을 권했습니다. 각 사람을요. 그냥 다 모아 놓고 귀찮으니까 "다 모여, 해, 끝" 이것이 아니고, 각 사람, 각 사람을 직접 직접 만났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구역장이요, 또 교회학교 교사요,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가 해봐야 열 명인데, 각 사람 만나고 각 사람 권하는 것이 그렇게 안 됩니다. 왜 안 될까요?

돈 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열 명한테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각 사람 만나야 합니다. 돈 떼었다고요. 나는 저 사람한테 돈 떼었다고요. 제가 이것 빈말이 아니고, 사탄이 저 영혼을 데려갑니다. 그러면 사탄에게 저 영혼을 떼인 것 아닙니까? 찾아와야지요. 데려와서 만나고, 데려오고, 권하고요. 어떻게 해서든지요.

우리가 돈 떼이면 가만히 있습니까? 문자 놓고, 전화하고, 카톡 놓고, 찾아가고, 밤이고 낮이고 하지 않습니까? 다 안 해 보셨어요? 그것 떼일 돈이 없어서요. 돈 떼인 심정으로 각 사람을 권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합니다.

4-4. 각 사람을 가르침

그다음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지혜, 그리스도께 받은 모든 충만한 지혜를 가지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입니다.

어디에서요? 에베소 교회에서는 두란노 서원 세 내어 놓고 매일 거기서 강론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가르쳤고, 로마 감옥에서는 2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매일 매 순간 강론하고 가르쳤다고요.

그래서 저도 이 말씀 붙잡고 열심히 가르쳐 보자, 열심히. 수요 사경회를 지금 시작한 때부터 계속 진행해 왔습니다. 오래 계신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학기까지 하면 15과목째입니다. 15과목이요. 세월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 날 한두 시간, 그것이 뭐 얼마 된다고요. 그런데 세월이 여러 해째 되니까 이제 15과목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이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요.

저는 소망하기를 제가 목회 그만둘 때까지 성경 66권을 각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을 기도하고 소망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될 때까지 그냥 하는 것입니다. 될 때까지요.

그런데 각 사람을 가르친다 그랬으니까 일대일로도 가르쳐야 되지 않습니까? 속회 모임에서도 가르쳐야 되지 않습니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냥요. 우리가요. 그런데 여러분들 가정에서 우리 이렇게 공부하는 것, 배우는 것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도 가르치고, 가르쳐야 합니다. 계속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성경 공부해 볼래? 한번 해 볼까?" 해서 또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저는 가르침에 재능이 없어요." 그런 변명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한번 해보십시오. 통하나요? 그때 가서요. 제가 목사요 예배당에서 가르치고 먹이고, 하나라도 하나님 말씀을 먹이고 가르치려고 해야지요. 그것 안 하고 맨날 왜 삽니까? 그러면요. 우리가 사명 받은 사람인데, 내가 교회 중직이고 사명 받은 사람인데요.

4-5. 온전한 자로 세움

적어도 목회자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하는 것.

그를 전파하는데, 각 사람을 권했고, 각 사람을 가르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각 사람을요.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맥락에서 어떤 것이냐 하면, 에베소서 4장 13절에 바울이 이미 말씀해 놨습니다. 우리가 배웠지요, 에베소서 할 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 이것이 온전한 사람, 완전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어떻게 해야 완전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요.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권하다 보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머리와 가슴이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요.

그래서 바울의 목회 철학은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의 목회 철학은 각 사람입니다.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권해서 가르쳐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건물 타령 하지 않습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필요하니까, 물론 사람이 모여서 생활하면 교회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건물은 필요에 따라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박하게요. 우리가 비전센터 지으면서 작정금 한번 했습니까?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그냥 우리 필요한 대로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뭘 그렇게 교회, 교회 하면서, 넘어갈 만큼 막 무리해 가지고 짓고 난리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것. 그것이 교회니까요, 이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한 사람이 건물로서의 교회 수백 개 수천 개 짓습니다. 그 한 사람이요. 그런데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엉뚱한 인간을 세워 놓으면, 그런 사람이 사고 치면 건물로서의 교회 수백 개 무너집니다.

목회자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서지 못하면, 그 사람이 대형 교회를 맡아서 사고 한번 치면, 그러면 교회 무너지는 것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는 사람입니다. 사람. 내가 서는 것. 사람이 서는 것.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 "내가 교회다"라는 정체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교회가 되고, 내가 바로 서야 합니다. 내가 자꾸 헌금해 가지고 건물 지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고 잘 섭취하고 열심히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열매를 맺어서 내가 교회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제일 기뻐하십니다.

4-6. 성령의 능력으로 일함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데 바울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습니까? 29절, "이를 위하여" 즉 앞에 28절에서 말한 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요. 바울이 이렇게 꼬아서 말해서 그렇지요.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면 피곤할까요, 안 피곤할까요?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저는 감히 말하는데,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일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오락과 자기 할 것에 너무 충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 그를 전하되,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모든 지혜가 다 동원되고, 거기에 모든 것이 다 포커스가 맞춰지면 왜 피곤합니까? 그것이 성령께서 힘 주시는데요. 하나님이 자기 일 하라고 우리에게 힘 주시지요. 이것이 왜 피곤합니까? 피곤한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건강 주시고, 회복하게 하시고, 피곤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는 것, 바울의 목회이기도 하고, 또 성령과 함께 목회하는 목회 철학이기도 하고, 또 골로새서 1장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결론: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감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고, 또 그 교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울이 말한 당신의 목회 철학처럼 동역하게 하시고,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옵시고, 또한 그가 준 방향대로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게 하시고, 그리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로 세워가기 부족함 없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돈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임으로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이고 교회이니, 주의 말씀을 잘 먹고 섭취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에게까지 열심히 성장하고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피곤치 않은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게 하옵시고, 피곤치 않게 하시고, 성령에 매여 한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