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 그 안에서 행하라 / 전체녹취

옥중서신 (12) 그 안에서 행하라 (골로새서 2장)

오늘은 옥중서신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골로새서 두 번째 시간으로 2장을 함께 나눕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옥중서신을 쓰면서 왜 골로새서를 써야만 했는가 하면, 그 교회에 빌레몬이라는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레몬과 바울은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을 때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로마로 흘러흘러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빌레몬에게 큰 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에게 보내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준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주고 보내는 길에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에도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에베소서를 같이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가 바울의 옥중서신에 함께 나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1장을 살펴보았고, 오늘 2장의 이야기는 이단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특정한 큰 이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2장의 핵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할 이유입니다. 이단 사상들이 워낙 많고, 세상의 헛된 속임수가 우리를 속이고 힘들게 하며 자꾸 다른 데로 끌고 가기 때문에, 그 안에 뿌리를 박고 굳게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목회 철학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라고 합니다. 너희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고, 라오디게아가 갑자기 나오는데, 나중에 지도를 한번 찾아보시면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굉장히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도 본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본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두 교회가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즉 본인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개척하고 목회했던 교회뿐만 아니라 보편적 교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위해서 섬기고 돌볼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골로새서는 "너희와 라오디게아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과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함께 돌려봤던 회람 서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이는 그들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이 본인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위로도 주고 연합도 주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입니다.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이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이유,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교회든 개척하지 아니한 교회든 그가 사역하고 일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명확한 목적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울의 목회 철학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보편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1-1. 그리스도를 아는 자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 지금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요 선생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제대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면, 그분이 누군지 제대로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앙 고백 위에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성경을 선생이라고 하며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면, 그러면 그들이 인도하는 양 떼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대로 모르는 선생이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어렵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든 교회 중직이든 교회학교 선생님이든 말씀을 들고 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식으로도 알고 경험적으로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아야 그래야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옵니다. 엉망진창이 됩니다. 바울은 그런 부분에서 본인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회 철학과 방향을 정확하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지혜와 지식

3절에 "그 안에는", 즉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지혜와 지식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지식은 헬라어로 그노시스(γνῶσις)입니다. 정보라는 뜻입니다. 지식은 그 말 그대로 정보입니다. 정보는 외우면 됩니다. 공부하면 됩니다. 학교에서 배우면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식도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구약 때부터 예언된 메시아요, 이분은 어떤 분이시고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바울이 계속 가르쳐 준 것입니다. 에바브라가 그것을 계속 가르쳐줬고, 성경 선생들은 그것을 계속 지식으로 먹이고 가르쳐주고 돌봐주고 지식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가 나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소피아(σοφία)입니다. 소피아는 지식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이 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적용해 봐야 합니다. 살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내가 아는 지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려면 그 말씀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살아보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시는지 더해 주지 않는지 알려면 그 성경 말씀만 계속 암송하면 무엇합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붙들고 살아서 삶에 적용해서 '진짜구나, 그렇게 살았더니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셨구나' 하고 고백되는 순간,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어디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드러나 있습니까?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보물찾기처럼 찾아야 합니다. 술래잡기처럼 잡아야 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으면 찾아야 합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노력해서 애쓰고 추구하고 즐겨 듣고 힘을 다해서 그것을 뒤집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찾아내야 합니다. 거기에는 수고가 따르고 노력이 따릅니다.

1-3. 감추인 보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비유에서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감추인 보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이 말은 대가 지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추인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면, 그것을 내가 알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들추어서 만들려면 대가 지불이 필요합니다. 그 지불이 무엇일까요.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살아봐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 말씀을 가지고 나는 대가 지불을 하고 살아가는가. 시간의 대가 지불, 물질의 대가 지불, 내 자존심이라는 대가 지불 등등의 대가 지불을 하고 살아내서 그것을 지혜로 만들어야 합니다.

뒤에 가면 나오는데, 소피아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어디서 들었느냐 하면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말에서 들었습니다. 필로소피가 무엇입니까? 철학입니다. 필리아(φιλία)라는 말과 소피아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필리아는 사랑, 소피아는 지혜입니다. 철학은 지혜 사랑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철학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철학을 잘 몰라도 세상의 철학이 한 가지만 있습니까? 역사상 수십 가지, 수백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만 있었습니까? 수십, 수백 가지가 세상에 있었습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쭉 현대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는 진짜 지혜입니까, 가짜 지혜입니까? 지혜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가짜입니다. 이 철학자가 말하는 지혜가 다르고 저 철학자가 말하는 지혜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혜가 왜 가짜입니까? 그리스도라는 지식에 기반하지 않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살아내야 그래야 지혜가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철학은 가짜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근본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근본이 자기 생각입니다. 뒤에 가면 또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그때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2. 속임에 빠지지 말라

4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죽어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단들이 아무나 데려다가 전도하는 것 보셨습니까?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교인들을 데려갑니다. 교인들을 들쑤셔서 교인들을 끌고 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교묘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럴듯한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헷갈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와서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려 드립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조건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계시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는 보여주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바까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미지의 영역도 많고 깨닫고 묵상하고 배워가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이단이 어떻게 그것을 다 압니까? 자기가 보혜사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묘한 말로 우리가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단 사상, 세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단은 이단 간판 걸고 하니까 구별됩니다. 그런데 멀쩡한 교회에서 멀쩡한 신학 교육 받고 멀쩡한 목사가 잘못된 길을 가르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 같이 죽습니다. 자기도 죽고 교인도 죽이고 다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골로새 교회의 강점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때문에 굉장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3-1. 질서 있는 교회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 너희와 함께 있어", 첫 번째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질서입니다. 그 교회에 질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앉아 있는 줄이 삐뚤삐뚤한 것을 기준 잡아서 일렬로 쭉쭉 앉아서 전부 다 같은 유니폼 맞춰 입고 줄 제대로 세우는 것이 그 질서입니까? 또 목사가 한 마디 하면 저 어린아이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예' 하고 딱 각을 맞춰서 움직이는 것, 절대로 다른 소리 내면 안 되는 것, 그것이 질서입니까? 그 질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산당이 하는 것입니다. 박수를 쳐도 딱 각 맞춰서 치고, 걸어도 그렇게 하고, 한마디 하면 수령님이 한 마디 하면 다 따라하고 하는 것은 북쪽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질서가 무엇입니까? 말씀 안에서의 질서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가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창조가 무엇입니까? 혼돈에서 질서로, 흑암에서 빛으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가는 것이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그러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혼돈이 질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질서가 생긴 것입니다. 공동체가 질서가 없고 엉망진창이면 무엇입니까?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전부 다 제각각 다른 소리하고, 전부 다 제각각 자기 목소리 내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소리 지르고, 각자 자기 갈 길로 가고, 지멋대로 행동합니다. 그것은 말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말씀이라는 것을 내가 접하기 전에, 내 인생은 혼돈입니다. 무엇이 어디가 출구인지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혼돈의 상태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도 채워도, 돈을 벌어도 벌어도 공허한 상태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개걸스럽게 먹어도, 돈을 아무리 벌어도 충만하지 못합니다. 항상 어둡습니다. 고대광실 커다란 집에 살아도 어둡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임하면, 주의 진리의 말씀이 임하면 질서가 딱 생기는 것입니다. 이 골로새 교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교회를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 가정이 혼돈이면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돈을 못 벌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못 배워서 말의 권위가 없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을 잡으면 질서가 생기고 충만이 생기고 빛이 생깁니다. 이 교회를 바울이 그래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2. 굳건한 믿음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입니다. 믿음이 굳건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어디 위에 있습니까? 말씀 위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있으니까 이런 교회는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말씀이 굳게 서 있고 질서가 잡혀 있습니다.

4. 그 안에서 행하라

바울이 이제 또 주문합니다. 6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주로 받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받았다, 수용했다, 모셨다는 뜻입니다. 주가 무엇입니까? 주인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하셨습니다. 내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면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큰 대가 집에 종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주인, 대장 주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 집에 주인은 누가 됩니까? 장남이 됩니다. 그 집에 장남이 종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이렇게 집안을 운영하셨습니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련다"라고 합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이 하시는 말씀대로 제대로 듣고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 주인이 "저 재 넘어 논은 판다. 팔아치우고 저기는 너무 일하러 가기 힘들어서 저 옆동네 누구에게 판다"고 했는데, 이 종놈이 머리 나쁜 종놈이 맨날 그 논에 가서 일하고 있으면 그 종을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팔아 치워버립니다. 땅하고 같이 파는 것입니다. 무엇하러 그 종을 거기다가 두겠습니까?

주를 구주로 받았으면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았으면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내가 참된 크리스천인지, 그리스도의 자녀인지는 그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4-1. 함께 걷는 삶

여기서 '행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입니다. 함께 걷다라는 말입니다. 혼자 걷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받으면, 주로 모시면 우리 주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성령님을 선물로 주셔서 함께 걷게 하십니다. 혼자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혼자 가다가 길 잃어버릴까 봐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함께 걸어가게 하십니다.

다윗의 시편 23편 4절을 보면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니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때리시네이다'가 아닙니다. 안위하심이니이다. 안위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나함(נָחַ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나함이라는 말은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위로가 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데 혼자 있으면 위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내 목자가 되셔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같이 내려오셔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방향을 보여주시니까 그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걷게 해주십니다. 고난의 길도 어려운 길도 행복한 길도 함께 걸어서 인도해 주십니다. 혼자 가면 힘든데 함께 걸어가 주시니까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인만 제대로 모시면 그다음은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4-2. 뿌리를 박으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7절에 보니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뿌리를 박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뿌리 박는 것 좋아하십니까? 뿌리 박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무가 뿌리 한번 박으면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못 움직입니다. 뿌리 박으면 그것이 겁나는 사람들은 뿌리 박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을 보면 1편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편 기자가 나무라고 표현했는데,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냇가에 뿌리박은 나무입니다. 뿌리를 박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혜택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과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것이 혜택입니다. 내가 조금 부자연스럽더라도 열매가 마르지 않고 잎이 청청한 이 혜택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이 나오고 악인이 나옵니다. 반대말로 악인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우리가 아는 악인처럼 칼을 들고 찌르고 돈 달라고 하고 남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이 악인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악인은 뿌리가 없는 것이 악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은 뿌리가 없습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항상 한 발은 저기에 있습니다. 항상 반쪽은 저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 한다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 있습니다. 그것이 악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다면 그 안에서 행하고 뿌리 박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전 존재를 걸고 그 안에 뿌리를 박고 "내가 여기 뿌리 박았으니 책임지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뿌리 박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뿌리 박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내 인생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책임집니까? 내가 내 인생을 내일 일도 모르는 내가, 1분 뒤에 일어날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내 인생을 책임집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면 그가 책임지시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돈 걱정, 자식 걱정, 무슨 걱정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이야기를 계속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정신입니다. 성경은 항상 흐름을 보셔야 하는데 신구약을 쭉 통틀어서 보셔도 사람을 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나무의 핵심은 뿌리입니다. 뿌리가 그리스도에게 내려가 있어야 합니다.

5. 철학과 헛된 속임수

다음 페이지 넘기시면 바울이 8절을 보시면 무엇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까? 그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세움을 받고 그 안에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8절에서 설명하는데,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뿌리가 깊게 내려가 있지 않으면, 반쯤 걸쳐져 있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거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5-1. 인본주의 철학

철학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당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는 이 당시의 철학의 핵심은 인본주의입니다. 사람 중심, 인간 중심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중심입니다. 소피스트든 소크라테스나 다 인간 중심입니다. 그중에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소피스트 철학자가 계셨는데, 그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입니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 사람입니다. 프로타고라스가 그 소피스트입니다. 그 이후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사람을 제대로 알라고 했고,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많은 철학자들은 대개 전부 다 거의 다 인간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이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왜 기독교 신앙과 배치됩니까? 기독교 신앙의 척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X축과 Y축을 딱 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만물의 척도가 됩니까?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사람이 표준화되어 있습니까? 제가 키가 정상이 아닙니다. 남들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저보다 좀 큰 사람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만물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남들이 보기에는 병원 좀 가서 얼굴에 손을 좀 보셔야 될 분들이 자기는 너무 예쁘고 멋있다고 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시는데 그런데 자기 얼굴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본인이 하는 모든 일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면 혼란이 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혼돈입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철학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철학이 다 자기 중심입니다. 요즘 교회, 성도들을 한번 보십시오. 무너지는 교회, 어려움을 겪는 교회 보십시오. 전부 다 자기가 척도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목소리 높이고 전부 자기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 철학인 인본주의가 들어오니까 자기 기준입니다. 전부 다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 기준을 막 목소리를 높입니다. 동성애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동성애도 자기 기준입니다. 그렇게 자기 기준을 막 주장하고 외치면서 그것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기준으로 목소리 높이는 사람은 또 그 기준을 다 또 받아들여서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끌어가고 인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바울처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자기도 그 기준에 맞춰 살고 성도들도 그 기준에 맞춰 살게 해야 합니다.

5-2. 금욕주의

헛된 속임수는 뒤에 또 나오는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헛된 속임수는 금욕주의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헛된 속임수가 2장 말미에 나오는데, 금욕주의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금욕주의는 공로주의와 같기 때문입니다. 금욕이 무엇입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막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안 하고 굶고 또 견디고 그래서 남들에게 옳게 보이고 좋게 보이고 공로를 쌓아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헛된 속임수입니다. 그래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금욕, 그 금욕이 공로가 되어서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참 이것이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 제가 교회학교 다닐 때 우리도 다 해 본 것입니다. 성경학교 하면 큰 포도송이 종이 하나를 나눠줍니다. 빈 종이인데 옛날 성경학교는 3박 4일이었습니다. 새벽기도도 있고 예배도 있고 저녁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올 때마다 스티커를 붙여줍니다. 포도 송이에 그것 다 채우면 공책 열 권을 주셨습니다. 미친 듯이 가는 것입니다. 새벽에 엄마가 안 깨우면 난리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암송 구절 6절을 나눠드리고 새벽마다 매일 한 장씩 드렸습니다. 새벽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새벽에 꽉 차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그것 받는다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루 빠져 가지고 막 나중에 그것 5천 원 받고 팔았는데, 돈 5천 원 내고 사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 5천 원 내고 사는 것보다 제가 새벽기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이것 받는 것이 훨씬 더 기뻐하십니다. 아, 피곤하면 자야지 뭐 새벽에 무엇을 하느냐고 하시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 금욕주의가 있고 공로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이것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이단들이 그래서 막 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집 팔고 빨리빨리 땅 팔고 빨리빨리 무엇해서 14만 4천 명에 들어와야지 막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그 헛된 속임수에 속아서 40일 금식 기도하면 천국 갈 줄 압니다. 당뇨 있는 분이 40일 금식 기도 하면 진짜 천국 갑니다. 진짜 40일 되기 전에 천국 가십니다. 빨리 가시고 싶으면, 예수님 빨리 만나고 싶으면 그러셔도 되는데 큰일 납니다.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욕주의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 타락한 본성과 뿌리가 다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 철학은 인본주의라 했습니다. 헛된 속임수는 금욕주의라 했습니다. 이것이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앞의 말과 연결시키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여기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 했습니다. 인본주의와 금욕주의는 아주 수준 낮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수준 낮은 것, 초등학문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거할 곳이 어디입니까?

6. 신성의 충만

이제 할례 이야기를 바울이 하는데, 9절이 잘 읽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인데,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안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신성이라 하면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무엇으로 육체로 거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누가 계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초대교회 신학자들은 굉장한 신비로 보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무슨 논쟁이냐 하면,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유한한 인간 안에 하나님의 무한함이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여러분, 자연수가 큽니까 실수가 큽니까? 실수가 훨씬 큰 개념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말하면 실수 안에 자연수가 포함되는 것이지 자연수 안에 실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신학자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 안에 신성이 거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거나, 그 안에 하나님이 거했다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신비입니다. 유한한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다음 보십시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말입니다. 즉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아까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 안에서 행한다, 함께 거한다, 함께 걷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함께합니까? 성령께서 함께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내 속에 누가 오십니까? 성령이 오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나도 유한한 존재인데 내 속에 무한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어려운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철학과 세상의 초등학문,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7. 그리스도의 할례

"그러므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난 지 8일 만에 성전에 가시고 할례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할례가 그리스도가 받은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할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진짜 할례입니다.

진짜 할례가 무엇일까요? 과거에 구약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인체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 결단하는 것, 우리 몸을 끊어내는 것처럼 죄를 끊어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할례는 그렇지만 신약의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진짜 할례는 훨씬 더 과격합니다. 왜 과격합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육의 몸을 벗는 것이 무엇일까요? 육의 몸을 벗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할례,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할례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버려야 합니다. 구약에 아브라함부터 받았던 할례는 육체 끝을 끊어내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진짜 할례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7-1. 세례의 의미

그것을 세례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12절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핵심이 두 가지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켜짐, 즉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가 곧 할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례 교육, 세례 교육할 때도 성도들에게 말씀드리고 세례식 할 때도 말씀드리는 것인데, 과거 예수님 시대 때 세례는 지금처럼 대야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세례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세례를 베푸는 사람과 세례를 받는 사람이 물속에 함께 들어갑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세례 베푸는 사람이 머리에 손을 얹고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서 꾹 눌러서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꺼내 올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그 속에 나의 옛 자아, 육체는 죽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과거에 나를 흘려보내고 이제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단, 그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그것이 세례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내 옛 자아가 안 죽습니다.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아예 그 안에 뿌리를 박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7-2. 십자가의 승리

13절에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 했고, 14절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망 권세를 이기신 유일한 무기는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가 유일한 승리의 무기가 됩니까? 십자가에는 예수 그리스도, 죄 없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사실 거기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죽으셨습니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죄 없는 분이 대신 죽어야 죄 많은 우리가 그 십자가 피의 공로 아래 칭의의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공의는 죄를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하는데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고 인간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받습니다.

로마서 6장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진짜 세례받고 진짜 할례받은 자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0절을 보면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라 했고,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7-3. 죄에 죽고 하나님께 살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세례 받으면서 구원받으면서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서 반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욕을 해도 불러도 덩이를 걷어 차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를 충동질하고 죄가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펌프질할 때, 그때 나도 따라서 가슴이 막 뛰고, 죄짓고 싶고, 죄짓는 곳으로 발걸음이 가고 마음이 가고 눈동자가 가고 하면 죄에 대해서 아직 안 죽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반응이 없어야 하는데, 진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례 받고 죽은 자는 죄에 대해서 반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 있는 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르시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반응하고 힘쓰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못 들은 척이요, 죽은 척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막 외쳐도 그것은 못 들은 척하고 잠자고 있고 죽은 척하고,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나 아니면 어떤 놈이 하겠지 뭐' 이런 생각하고 안 합니다. 그것이 진짜 크리스천입니까? 나중에 천국에서 눈 뜰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 우리는 교회 오면 6개월이 지나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받고 그 교회가 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리 집사가 됩니다. 집사 되고 조금 성실하게 신앙생활 잘하면 중직이 됩니다. 중직 되고 조금 더 지나면 존경받는 원로가 됩니다. 그런데 나는 죄에 대하여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죽은 자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왔을 때 그때 두렵지 않으시겠습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반추해 보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춰 보셔야 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진실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만큼은 정직하게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인가 자신에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매일같이 죄성이 올라오니까 그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말씀으로 죄에 대하여 계속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 봐야 합니다. 말씀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반응하고, 잘 안 되어도 반응하고 하려고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8. 금욕주의를 경계하라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할례 받은 성도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여기서부터는 금욕주의자들을 위한 경계입니다. 즉 우리가 금욕주의에 물들어 있으면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 안식일 이런 것들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으면 이런 것들에게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구원받은 자라면,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성도들을 실족시킬 것이라면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상관없는데 성도들을 실족시키는 것이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따위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정말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런 기본적인 것은 다 지킵니다.

8-1. 천사숭배 사상

또 18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천사숭배 사상이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천사숭배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마다 수호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가 그를 이끌어서 건져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기도하는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문을 지키던 여종 로데가 "베드로가 살아왔습니다"하니까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짜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사람마다 그를 수호하는 수호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숭고한 존재로 여기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잘못된 사상들, 천사숭배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이단들, 천사숭배 이단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9절을 보니까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머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으니까 이런 이단 사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8-2. 초등학문의 규례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례에 순종하느냐"고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세상에 초등학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철학과 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1절에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붙잡을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금욕주의자들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금욕주의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지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않고 맛보지도 못하면 괴롭습니다.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이런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금욕주의가 뿌리가 깊습니다. 왜 뿌리가 깊으냐 하면 창세기 말씀에서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뱀이 이야기합니다. 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뱀이 이렇게 말을 비틀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말합니다. 3절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금지령을 먼저 내리셨습니까, 허락령을 먼저 하셨습니까?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허락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금욕주의로 접근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것이 매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안 해야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내 몸을 괴롭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허락하셨습니다. 전부 다 허락하시고 한 가지만 딱 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 가지 금한 것을 전부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허락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 가지만 금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가며

그래서 오늘 골로새서 2장은 철학과 초등학문, 또 철학과 금욕주의, 이것을 초등학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고, 여기에 매여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와 함께 뿌리를 박고 걸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았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야 이단 사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꺼내어 보는 지혜가 있게 하시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깨닫고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하셨고, 말씀 안에서 질서 있게 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주여 우리의 무질서와 혼돈은 말씀이 떠난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말씀을 다시 허락하시고 그 말씀을 붙들고 지키는 능력과 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세상의 철학, 인본주의 철학에서 떠나게 하여 주시고, 금욕주의에서 건져 빠져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살아 숨쉬는 영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