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삶 / 전체녹취

옥중서신 (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삶 (골로새서 3장)

오늘은 옥중서신 열세 번째 시간이며, 골로새서로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닌데도 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매번 반복하지만, 골로새 교회에는 빌레몬이라는 분이 장로로 사역하고 계셨고,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로마로 도망갔다가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와 말씀 공부를 하며 복음을 전했고, 그가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회심한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것을 가서 돌이키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가서 돌려주고,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하여 오네시모는 골로새를 향해 떠났습니다.

골로새로 떠나는데 바울이 오네시모를 혼자 보내지 않고 두기고라는 사람과 함께 짝을 지어 보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한 통 써서 주고, 빌레몬에게도 편지를 써서 주며, 가는 길에 에베소에도 들러서 에베소서도 함께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1장과 2장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며, 특히 2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도가 조심해야 할 헛된 속임수와 세상 철학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철학의 핵심은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 철학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헛된 속임수는 금욕주의라고 했습니다. 나의 몸을 괴롭게 하고 금욕해서 내 욕망을 억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가 틀린 가짜 복음입니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제 오늘 3장 이야기는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다룹니다. 그런 과정을 다 통과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1. 위의 것을 찾으라

1-1. 천국의 참된 의미

구원받은 백성들의 눈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구원받은 백성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구원받았으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위의 것은 천국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거기가 천국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천국이 어디입니까? 요즘 사람들도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가는 세상입니다.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나가면 거기에 천국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를 벗어나면 은하계가 있으며, 무한하고 광활한 우주가 계속해서 펼쳐집니다. 과연 그곳을 공간적인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면 하늘이라고 말하고 하늘나라라는 말을 붙이는데, 어릴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저 공간적 의미의 천국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요?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계속 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가는 저 피안의 세계, 천국, 하나님 나라는 성경에 있다고 했으니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 말고도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말로 무엇입니까? 천국 아닙니까?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너희들 안에 있다"는 뜻으로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너희 마음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다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1-2. 최상의 선택

구원받은 자는 누구든지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것"이라는 말을 보면 헬라어로 '타 아노'(τὰ ἄνω)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고귀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 최상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앞에 여러 선택들이 있습니다. A, B, C, D, E 여러 가지 선택들이 있는데, 그중에 최상의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찾으라"는 말에는 '제테오'(ζητέω)라는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7절에 기록된 말씀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서 "찾으라"는 말은 어쩌다 보니 발에 차여서 우연하게 찾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추구하라, 애쓰라, 찾으려고 분투하고 노력하라, 최상의 길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고 달려가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다시 이 말씀을 읽어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구원받았으면 가장 최고의 것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최고의 것을 추구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렇게만 읽으면 관념적인 말씀이 되는데, 성경에 이런 예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을 한번 보십시오. 롯은 소돔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롯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은 소돔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셨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고, 그곳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이었습니다.

사람 앞에는 항상 선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최상의 선택을 하는 그 자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이며, 거기가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갈 것만 자꾸 생각하는데, 이 땅을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힘든 곳이고 살기 싫은 곳이고 빨리 죽어서 천국 가고 싶다고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빨리 가서 하나님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우리를 괴롭히려고 지옥 같은 세상에 살게 하려고 태어나게 하셨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가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 선택 가운데 최상의 선택을 하면 거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선택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궁에 거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를 선택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습니까? 그 선택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셨습니까? 거기가 천국이었습니까? 지옥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죽을 때까지 지옥이었습니다. 그 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속해서 자기 인생에 지옥 같은 삶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좁은 길이었는데, 그 선택 끝에 부활이 있었고, 그 선택 끝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은 삼십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거기에는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고생이 있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 앞에 항상 선택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살면서 선택의 문 앞에 서서, 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 선택마다 어떤 이는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응원합니다. 넓은 길로 가라고, 좋은 길로 가라고, 성공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가 바로 천국이 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것을 선택하고 그 길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반대말이 또 나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하셨는데, 2절에 반대말이 나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의 반대말은 땅의 것입니다. 땅의 것을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이런 것들이 땅의 것들입니다.

1-3. 땅의 것을 죽이라

위의 것과 땅의 것들 가운데 우리는 당연히 위의 것을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동화 중에 멧돼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고픈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다가 사과나무 밑에 왔더니 사과가 몇 개 떨어져 땅 위에 있었습니다. 사과를 먹고 나서, 이 멧돼지가 사과가 땅에 있으니까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보면 거기 사과나무가 있으니까 나무를 들이받으면 사과가 떨어져서 먹을 수 있을 텐데, 땅을 파기 시작한 것입니다.

멧돼지 주둥이로 땅을 아무리 파도 사과가 나옵니까? 열심히 파고 또 파고, 죽을 만큼 파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서 계속 땅을 파 재끼는데 사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단하고 딱딱한 땅만 있는데, 죽을 힘을 다해서 파다가 과다출혈이 되었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죽어가면서 뒤집어졌습니다. 뒤집어지니까 자기 눈 위에 사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힘이 없습니다. 죽어가니까 눈앞에서 사과가 왔다 갔다 하는데 저걸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멧돼지가 죽어갔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 동화인데 그 동화가 꼭 우리 같지 않습니까? 하늘 못 보고 땅만 보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만 죽어라고 파고 또 파서, 죽을 때까지 계속 땅의 것만 파 재끼니까 나중에 죽을 때쯤 돼서 철들 때쯤 돼서 보니까 천국도 있고 삶과 죽음도 갈리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의 영이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두렵기 시작하고 못 가겠다고 하니, 얼마나 미련한 인생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은 항상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최상의 선택은 나의 입장에서 최고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선택입니다. 선과 악의 선택은 쉽습니다. 어쩌면 가나안 땅이냐 소돔 땅이냐는 당연히 가나안 땅이지요. 그런데 가나안 땅 중에서도 어디에 머물러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최고의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택,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하셨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숨이 끊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2장에 나오는 것처럼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네크로오'(νεκρόω)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진압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진압하라, 다스려라. 지금 여기 나오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이런 것들을 진압하고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받은 백성, 칭의의 구원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 없는 말씀을 왜 해놓았겠습니까? 성경은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다스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자리가 창세기 4장 6-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이 확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불러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이미 네 마음속에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선택을 가인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네 마음속에 일어나는 살인의 충동이 너에게 일어나는 것을 내가 안다. 그런데 너는 죄를 다스려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고 방향입니다. 가인은 이 경고를 받았습니다. 자기에게 그 능력이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스리면 됩니다. 그런데 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못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지금 여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라, 제압하라, 다스려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제압하고 다스릴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칭의의 구원을 받은 사람,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성령과 함께 이것을 다스려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별다른 것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다 안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선택도 그렇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나오는 중에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선택을 잘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최상의 선택을 하라. 그리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1-4. 탐심과 우상숭배

또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왜 탐심이 우상숭배입니까? 왜 이것을 콕 찍어서 우상숭배라고 했을까요?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탐내는 자들은 믿음에서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에서 떠나면 무엇이 됩니까?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절대 가치의 믿음에서 떠나면 바로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돈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돈에 대한 탐심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의 탐심, 젊음의 탐심, 이것들이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됩니다.

젊음의 탐심을 말씀드리면,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어지고, 나이가 들면 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탐심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벗어나서 분수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는 것, 그것이 탐심입니다. 물질도 내 수입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면 그것이 탐심입니다. 권력도 내 능력에 지나친 것을 가지고 싶으면 그것이 탐심입니다.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해 주신 건강의 한계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이의 한계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또 다른 젊음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 그것이 탐심이며 곧 우상숭배입니다. 백발이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얼굴에 주름지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끊임없는 탐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라고 말했습니다. 내 분수와 처지를 넘어서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나를 죽이지 못해서 생기는 일들입니다.

6절에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선택을 잘못하고, 최상의 선택을 하지 않고, 내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2.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2-1. 벗어야 할 것

거듭난 성도가 벗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구원받은 백성의 삶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도 전에" 하셨는데, 전에는 언제입니까? 거듭나기 전에, 죄와 탐욕 가운데 살 때, 땅의 것을 추구하고 어리석은 멧돼지처럼 땅 파고 살 때는 "그 가운데에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벗어버리라"는 말에 '아페크뒤오마이'(ἀπεκδύομαι)라는 헬라어를 썼는데, 무력화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벗어버리라 하셨습니까?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여러 가지 것들을 벗어버리라 하셨는데, 이것들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분함, 왜 분합니까? 우리 속에 분노가 왜 일어납니까? 누군가가 나를 자극하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화가 나고,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노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에 대한 내 감정이 노여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악의는 무엇입니까? 악한 생각입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저 사람을 비난하고 밀어 넘어뜨리면 내가 뭔가 이득이 있겠거니 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남을 비방하면 내가 높아지거나 남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은 음담패설을 말하는 것으로, 정욕으로 내뱉는 말들입니다. 거짓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거짓말해서 내가 높아지거나 남을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구원받기 전에, 땅의 것을 추구하고 살 때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입니다. 분노와 노여움과 더러운 말과 거짓말과 악한 말과 비방,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자기중심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무력화하라, 벗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2-2. 새 사람의 형상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는데, 10절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하심을 입었는데, 무엇을 따라 새롭게 하심입니까?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라고 말하는 그 우리는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성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함께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공동 창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형상 속에, 우리의 내적 이미지 속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죄짓기 전에는 그것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최고치였는데, 인간이 죄 짓고 나서 타락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 다 소멸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았습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창조 시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이 나타나고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누구나 다 창조적인 인간입니다. 그런데 창조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사람들이 창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어린아이를 낳아 기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이 집에서 아이와 엄마 둘이만 있어야 할 때, 말 안 통하는 아기와 엄마 둘이만 있어야 합니다. 정말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기와 어떻게 놀아줍니까? 창조적으로 놀아줍니다. 너무너무 창조적입니다. 하루 종일 정말 창의적으로 놀아줍니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아기 재울 때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저 남자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창조적입니다. 사랑하면 우리 속에 창조성이 올라옵니다. 사랑하면 자녀를 키울 때 창의적이 됩니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들 노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그 아이들이 블록 하나만 가지고, 아니면 모래만 있어도 하루 종일 창조적으로 놉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성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면 어떻습니까? 교회 일을 하는데 심지어 목회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창의성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시키는 대로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부서에서 일을 맡아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면 새로워져야 합니다. 창의성이 막 샘솟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지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실 것 같고, 이렇게 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것 같고, 창조성이 우리 안에 막 샘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존재는 항상 새롭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습니다. 오늘은 내가 어떤 일을 해서 창조적으로 살아볼까, 아이디어가 막 샘솟고 막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 잘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많이 배운 것과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느냐,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요리하시는 분들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어도 요리를 사랑하면 거기에서 오늘은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하다가 가끔 망하기도 하지만, 창조성이 막 생깁니다. 악기 연주하시는 분들도 이렇게 변주해보고 저렇게 변주해보고,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면 딱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이요 희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데, 순종도 없고 희생도 없고 헌신도 없고 입만 살아 있고 목이 뻣뻣하면, 우리는 이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어떤 영입니까? 보혜사, 위로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위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새벽에 욥기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딱 한마디로 정의했습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고. 입만 살아서 계속 정죄하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라면 진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를 어떻게 할지는 자기 몫입니다. 가만히 손잡아주어도 위로가 되고, 밥 한 그릇 대접해도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위로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형상이 다 있는 것입니다. 다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새 사람을 입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365일, 10년을 가도 똑같고, 재미없고,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형상도 없고, 순종도 없고, 위로도 없으면 진짜 반성해야 합니다. 다시 돌이켜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새 사람을 입으면 누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창의적이 되고, 헌신적이 되고, 위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2-3. 새 사람의 옷

그리스도인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합니까?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즉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옷을 입으라 하셨습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 덕목을 한번 보십시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이것은 다 어떤 덕목입니까? 기준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까, 타인에게 있습니까?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타인에게 온유하고, 타인을 오래 참아주고, 타인에게 겸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타자 중심입니다.

그런데 아까 8절을 다시 보십시오.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이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입니다.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구원받기 전의 상태, 새 사람을 입기 전의 상태는 항상 자기중심입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것 조금 손해 보는 것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로에서 추격전 벌이고, 내 차에 경적 울렸다고 쫓아가고, 가서 길 막고 보복 운전하고, 그것이 제정신입니까?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전부 다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 믿음의 백성들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산다고 했는데, 이것은 다 타자 중심입니다. 명확한 것입니다. 딱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잘 알까요, 내 가족이 나를 잘 알까요? 기분 나빠하지 말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집에 가서 "당신, 나는 좀 자기중심인 것 같아? 타자 중심인 것 같아?" 진실을 말하면 삐질까 봐 진실을 말 못 합니다. 그런데 삐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한번 물어보고 대답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성장합니다. 마음 상하는 것은 좀 사실입니다만, 그렇게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옷 입다"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엔뒤오'(ἐνδύω)라는 말을 썼는데, 입다라는 뜻도 있고 무장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입다라는 뜻입니다. 옷은 왜 입습니까? 아주 원초적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입는 것이고, 조금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달하면 옷은 남들에게 보이려고 입는 것입니다. 자기만족도 있습니다. 옷을 입으면 남들이 보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가식이나 허례허식이 아니고, 이런 것을 옷 입어서 사람들이 보게끔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그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산 아래 사람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 사람들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산 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다 드러납니다. 산 아래 사람들은 산 위에 동네가 있으면 저 동네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압니다. 저 동네에서 오늘 잔치가 열렸네, 고기 구워 먹네, 저녁에 불을 환하게 밝혔네, 어느 집에서 싸우네. 소리가 너무 멀리멀리 퍼져나가니까 산 아래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 압니다.

교회는 우리끼리끼리 해서 속닥속닥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1분 뒤에 다 압니다. 희한하게 압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안다는 것을 모르니까 사람들이 교회의 공적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교회가 조금 규모가 있고 이 지역에서 알려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그런데 자기들끼리는 좋다고 합니다. 우리끼리 다 결의하고 모여 가지고 재직회하고 공동의회하고 통과시켰으니까 남들이 뭐라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은 악입니다. 그러면 해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 위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보여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말이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아니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나 큰 교회가 한번 사고 치면 기침하면 전도가 안 됩니다. 세습 문제 때문에 한국 교회가 시끄럽고, 목회자 성 비위 때문에 시끄러우면 교회가 끝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항상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보여지는 것이니까 옷을 잘 입어야 합니다. 좋은 옷을,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둘째, "옷 입다"의 두 번째 뜻은 무장하다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왜 무장합니까? 악한 사탄과 대적하고 싸우려고 전신갑주를 입고 무장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와 "피차"가 중요합니다. 왜 중요합니까? 용납은 일방적인 것이 없습니다. 용서도 일방적인 것이 없습니다.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입니까?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용서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만큼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옷 입고 그 위에 마지막에 띠를 두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띠가 무슨 띠입니까? 사랑의 띠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유대인들이 옷 입을 때 어떤 형식의 옷을 입습니까? 그냥 구멍 난 데 머리부터 뒤집어쓰는 원피스 형식의 옷을 입습니다. 축 늘어진 것을 그 나라가 더우니까 그냥 그렇게 입고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일할 때는 띠를 두릅니다. 허리에.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한복 입고 부엌에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가면 안 됩니다. 부엌에서 밥도 해야 하고 불도 피워야 하면 허리를 딱 동입니다. 띠를.

그래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 말은 일할 때는 사랑의 띠를 띤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각자가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옷 입고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모일 때, 일을 하려면 항상 분쟁이 생깁니다. 일할 때 사탄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일하면 사탄이 공격받으니까 사탄이 거기에 분열의 영을 주고 역사합니다. 그런데 그때 사랑으로 띠를 딱 띠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하고 헌신하고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말 한번 하고 싶어도 좀 참고, 인상 쓰고 싶어도 고개 돌리고 웃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공동체가 돌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3. 공동체의 삶

3-1. 그리스도의 평강

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것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의 정의가 중요합니다. 평강이라는 것이 그냥 편안한 상태, 서로서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태, 좋은 게 좋은 상태가 평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의 상태가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첫 번째 말씀, 두려워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평강은 죽음을 통과하고 난 이후의 평강입니다. 주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나는 이만큼 고난받았다, 못 박혔다, 옆구리에 창이 들어갔다. 그것이 평강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하는 이 말은 무엇입니까?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라는 뜻입니다. 영적 투쟁을 하라는 뜻입니다.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손에 못 자국이 박히고 허리에 창이 들어갈 때까지 영적 투쟁을 하라. 그리고 나서 평강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닮아서, 예수 따라서, 십자가 지고 그 십자가 골고다 언덕길을 함께 걸어가라. 그리고 나면 너의 마음에 내적 평강이 올 것이다. 그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한창 사울을 피해 다니다가 부인이 몇 생기고, 자기를 따르던 아둘람 굴에서 400명이었던 사람들이 6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600명이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고 거기에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해버렸습니다. 외적으로는 굉장히 평안한 상태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거기서 편안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도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하니까 편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의 마음에 내적 평강이 있었을까요? 그 마음이 평강했을까요? 찝찝했습니다. 불편하고 불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사명, 말씀 증거하는 사명, 중직들은 중직으로서 교회를 섬기는 사명, 사명의 자리에 있어야 그것이 평강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몸은 편한데, 이것이 평강입니까? 이것이 진짜 평강입니까? 그 마음이 진짜 내게 강 같은 평화가 강물같이 흘러넘칩니까?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지고 고난의 언덕을 올라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그래야 마음이 평화로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런데 이 평강이 진짜 평강인지 가짜 평강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일 끝에 나옵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가 넘치면 그것이 진짜 평강입니다.

3-2. 말씀이 풍성히 거함

공동체에 주시는 두 번째 권면이 16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에 거하는데 어떻게 거합니까? 풍성히 거합니다. 이 풍성히라는 말은 흘러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이 막 흘러넘치는 상태입니다. 말씀이 찔끔찔끔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고, 여기도 말씀, 저기도 말씀, 주일날도 말씀, 수요일도 말씀, 새벽도 말씀, 금요일도 말씀, 정원에 가도 말씀, 구역에 가도 말씀, 모여 가지고 여전도회에서 모여도 말씀, 이래야지 이것이 풍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부동산 이야기, 주식 이야기, 돈 이야기, 너희 속에 돈이 풍성히 넘치게 하시고, 이런 말이 아닙니다. 세상 정보가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풍성히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내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나누는 것입니다. 만나서 딴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깨달은 말씀을 나누면 됩니다. 그냥 나는 이 말씀 붙잡고 이렇게 살았더니 이런 은혜가 있더라 하고 나누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듣다가 재수 없네, 아는 척하네, 자기가 날 가르치려고 하네, 그러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면 됩니다. 그것을 나눌 수준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함께 나누고 함께 은혜 받고, 피차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또 권면하고, 여기 피차가 생략된 것입니다. 피차 가르치고 피차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또 마지막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강이 진짜 평강인가? 이것도 감사로 입증되고, 말씀이 풍성히 거했는가? 이것도 감사로 입증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진짜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교회 공동체인가는 성도들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3-3. 감사의 삶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가 세 번 반복됩니다. 15절, 16절, 17절에 감사. 성도의 삶의 마지막 시금석, 리트머스 종이는 감사입니다. 그냥 감사한 것입니다. 그냥 닥치고 감사합니다. 다 돌아보면 감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냥 감사한다는데 누가 시비 걸겠습니까? 감사한다는데 사탄이 왔다가 열 길로 도망갑니다. 감사한다는데요. 지금 내 꼴이 이래도 그냥 감사한다는데, 나 가난해도 감사한다는데 어떡할 것입니까? 그냥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4. 가정의 권면

4-1.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인의 가정 구성원을 위한 권면을 말씀하셨습니다. 비슷한 것들이 계속 반복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도, 빌립보서에도 가정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 좀 독특한 것이 나옵니다. 남편들에게 하는 것이 19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주 들었는데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피크라이노'(πικραίνω)라는 헬라어를 썼는데, 이 말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쓰라리게 하다, 또 비참하게 하다. 쓰라리게 하다라는 말은 육체적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육체적 고통으로 내몰지 마라. 두 번째 비참하게 하다, 심적 고통으로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두 가지입니다. 괴롭게 하지 마라.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남편들에게 괴롭게 하지 마라, 육적으로 심적으로 비참하게 하지 말고, 마음이 막 무너져서 비참하게도 하지 말고, 또 몸을 괴롭게 하지도 마라. 두 가지 말씀을 한꺼번에 주신 것입니다.

4-2. 종과 상전

22절을 보면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바울이 노예 제도를 인정했나 볼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 독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반드시 바울은 종들 이야기를 하면 상전 이야기도 또 합니다. 4장 1절이 나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부리는 사람,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 누군가를 수하에 두는 사람은 이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상전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의 상전은 그것을 기억하라. 네가 네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면, 그를 정의롭지 않게 대하면, 하늘에 있는 너의 상전인 아버지께서 너도 그렇게 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경고의 성격이 진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3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이렇게 상세하게 잘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고, 또 한 주간 이 말씀 가지고 한 번 더 살펴보시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세,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칭의의 구원을 받은 자, 선택의 순간에 설 때마다 위의 것을 찾기를 원합니다. 최상의 선택하게 하옵소서. 내가 좋아서 하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택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따라, 그리스도를 따라, 성령을 따라, 창조의 하나님을 따라, 헌신과 순종의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따라, 위로의 성령님을 따라, 새 사람 입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는 또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옷 입는 것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 드러나는 것이오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옷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이 주 앞에서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