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 마지막 권고 / 전체녹취

옥중서신 (14) 마지막 권고 (골로새서 4장)

오늘이 옥중서신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 시간에 빌레몬서를 다루면 옥중서신 열다섯 번이 모두 끝납니다. 제목만 들으면 옥중서신,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이니 절박하고 답답할 것 같고, 감정이 전이되어 이 편지를 읽는 나도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어떻습니까? 함께 공부해 보니 오히려 답답하지 않고 자유롭지 않습니까? 바울이 옥중서신을 썼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밝으며 또 건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은 그가 복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실로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그중에 특히 골로새서는 바울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를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개척하지 않은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로는 골로새서도 있고 로마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로마서는 읽어보면 상당 부분 느낌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골로새서도 굉장히 힘이 있고 조직적입니다. 1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2장은 구원에 대한 내용이 나오며, 골로새서 3장 지난주에 살펴본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위의 것을 찾으라, 땅의 것을 보지 말고 위의 것을 보라 말씀하셨고, 또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으로 살아가야 하니 죄를 다스리고 죄를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야 하며, 또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으로 띠를 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골로새서 4장 이야기는 마지막 당부에 대한 내용입니다.

1. 기도의 세 원리

그중에 첫 번째 보십시오.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권합니까? 2절을 보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기도를 바라보는 세 가지 핵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계속하는 것이고, 기도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며, 기도는 깨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1-1. 계속하는 기도

기도를 계속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계속한다는 것이 어떤 교회들 보면 표를 하나 만들어서 벽에 붙여놓고 24시간 릴레이 기도라 하며 이름을 적지 않습니까? 그것을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라 말하는 걸까요,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잠도 자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직장 일도 해야 되고 사람도 만나야 되는데 계속 기도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계속 기도하다'라는 뜻을 찾아보면 같은 말이 쓰인 용례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시면 이것과 같은 용례가 나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여기에 '힘쓰더라'라는 말, 이 말이 '계속하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14절 이 말씀, "기도에 오로지 힘쓰더라"가 어떤 맥락에서 쓰인 말입니까?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것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 말씀하시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그 후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사랑하던 분들이 함께 모여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러면 그때 이들의 기도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냥 평상시에 우리가 기도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듯, 혹은 주기도문을 아무 생각 없이 외울 때처럼 기도했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식사 기도할 때 습관적으로 빨리 기도하고 빨리 밥 먹어야지 하듯 기도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때 기도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다니던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다니던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이제 없습니다. 이 땅에 물론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육체로서의 예수님은 이제 곁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간절하게 기도하고 정말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기 '힘썼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기도를 계속하고"라는 말은 절박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에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기도가 어떨 때는 절박하고 어떨 때는 절박하지 않고, 어떨 때는 간절한데 어떨 때는 하는 둥 마는 둥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제목이 이루어지면 절박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장 내일까지 뭔가 되어야 하면 절박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계속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는 힘쓰는 기도, 절박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1-2. 감사하는 기도

두 번째로 기도는 감사로 나아가야 하는데, 기도에 청원만 있으면 곤란합니다. 기도는 감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공부하기 전에 빌립보서 공부할 때 빌립보서 4장에서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방법, 어떻게 하라 그랬습니까?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구한 것도 아니고,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손에 잡은 것도 아닙니다. 아직까지 구하지도 않은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감사는 우리는 주로 사후에 합니다. 손에 뭔가라도 주어져야 그때 고맙습니다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도는 이미 구할 것까지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기도와 감사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서신서가 항상 일관됩니다. 우리 기도하는 습관이나 기도의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가운데 감사가 얼마나 내포되어 있는가.

그런데 사실 기도에 감사가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태도인데, 청원하다 보면 감사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감사부터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할 때는 감사를 한번 세어보고 감사부터 먼저 하고, 그다음 감사가 끝나면 청원하고 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습관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3. 깨어 있는 기도

그다음 여기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깨어 있다'라는 말을 원어에 보면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라는 말을 썼습니다. 깨어 있다, 정신 차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면 마태복음 24장 42절과 26장 38절에 나오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면 그레고레오라는 말을 살려서 읽어보면 "그러므로 정신 차려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정신 차리고 있어라, 나와 함께 정신 차리고 있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분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중보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시니 정신 차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정신 차릴 이유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니까, 별로 지금 제자들에게는 와닿지 않으니까 정신 차릴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깨어 있어라, 정신 차려라.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소통인데 그것을 사탄이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싫어합니다. 싫어하면 사탄은 어떻게 합니까? 방해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방해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탄은 우리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할 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정신 차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반쯤 깬 상태로 반은 별로 정신 못 차린 상태로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인 동시에, 이 세상에서 기도하면서 다른 일, 다른 것에 신경 쓰거나 관심 가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기도의 세 가지 원리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비슷한 이야기인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러분 사장님의 뜻을 직원들이 알고 싶습니까, 별로 상관없습니까? 대통령의 뜻을 여당 대표가 알아야 됩니까, 몰라야 됩니까, 몰라도 됩니까? 알아야 됩니다. 당연히 알아야 됩니다. 대통령의 뜻을 총리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엇박자가 나서 국정이 엉망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장님의 뜻을 직원들이 알면 그 뜻대로 행하려고 노력할 것 아닙니까?

아니, 그것이 밥줄인데, 그 회사가 내 밥줄인데, 내 뜻하고 좀 달라도 따를 것 아닙니까? 어쨌든 일단은 하고 봐야 됩니다. 그다음 문제는 그다음에, 책임은 사장님이 지시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에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다 공부했습니다. 우리 교리학교 할 때도 공부했고 기도학교 할 때도 했고 다 보았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밝혀두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밝히셨는데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데 이 뜻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별로 기쁘지 않고 하루에도 항상 인상 쓰고 항상 화내고, 그리고 힘써서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고. 그런데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나를 하나님이 예뻐하시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예쁨 받고 하나님께 사랑받으려면 하나님 뜻이 여기 적혀 있으니 그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하면 당연히 사랑받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 말은 어떤 것을 얻어서 기뻐하라가 아니고 근원적인 기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지옥 불쏘시개가 되는데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기뻐해야 되는 것이니 의무에 속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좀 전에 말씀드렸고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속하는 것이라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하는 것입니다. 따지지 않고 그냥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중보기도의 부탁

자 그다음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 3절을 보니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골로새 교회는 자기가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당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곧 본인이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또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 여기 '우리'는 지금 로마 감옥에 연금되어 있는 바울의 동역자들, 바울을 포함한 바울의 동역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중보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 부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도 부탁 잘 하십니까? 어린아이들이 초등학생들인데, 초등학생들 알 것 다 아는 아이들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6학년, 고학년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다 알고 정치도 잘 알고 애들이 잘 압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부모의 기도 부탁을 건네고 있는가? 또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있는가? 장로님이 우리 평신도 성도님들 이제 막 교회 오신 분들에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 부탁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런 것이 굉장히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 1부 예배부터 4부 예배까지 예배를 위해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기도정병단이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사탄의 방해가 없도록 지하의 옛날 제가 살던 목양실에서 예배 시간 1시간 내내 우리 기도정병단 성도님들이 그 자리에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기도대 기도 책자가 나가지 않습니까. 그 기도 책자에 보면 담임 목사를 위한 기도가 거기 다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매달 저를 위해서 이런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서로 기도가 오고 가고 주고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 부탁을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부탁의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 합니까?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전도할 문을 열어 달라. 내가 전도하게 해 달라. 하나님이 문을 열어 달라. 그래서 내가 가서 말하게 해 달라. 그런데 놀라운 것이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잡혀 있습니다. 기약이 없습니다. 언제 끌려가서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바울이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기도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기도 부탁을 한다면 좀 석방되게 해달라거나, 아니면 매 맞지 않게 해달라거나, 춥지 않게 해달라거나,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거나, 좀 마음이 따뜻한 간수 만나게 해달라거나 할 텐데, 바울은 그런 것 뛰어넘어서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부탁이 굉장히 진취적입니다. 기도 부탁이 굉장히 파격적이고 진취적입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는데 바울의 기도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비밀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 그러면 나는 이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3. 외인을 대하는 지혜

그다음에 바울이 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을 성도들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5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외인에 대해서는." 외인이 누구냐 하면 교회 밖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 곧 이방인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선교의 대상이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외인이라 함은 복음을 전했으나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지금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자주 쓰는 말 '불신자'. 그런데 저는 이 '아닐 불' 자를 쓰는 것이 좀 불편합니다. 불신자, '아닐 불' 자를 딱 써버리면 낙인 찍는 것입니다. 좀 어떻게 바꿀까요? 어떻게 바꾸었으면 좋겠습니까?

불신자 말고 '예비 성도'.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고 예비 성도, 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그런데 불신자라고 하면 아예 안 된다고 아예 괄호 밖에 내놓고 낙인 찍은 사람들인데, 예비 성도라고 하면 좀 말하는 사람도 좀 편하고 듣는 사람도 좋고 또 전도에 열의도 좀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는데 복음 전하는데 골로새 지역의 이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전하는데 아직까지 올까 말까 할까 말까 복음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그런 사람들, 그것을 외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3-1. 세월을 아끼라

외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고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세월을 아끼라. 세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도 말한 바 있습니다. 카이로스를 아끼라, 사다라는 뜻입니다. 엑사고라조(ἐξαγοράζω). 그때 우리 에베소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세월을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외인에 대해서 복음 전하는데 약이 오릅니다. 저 사람 올 것 같은데, 할 것 같은데, 받아들일 것 같은데, 고백할 것 같은데, 요만큼 온 것 같은데 다시 제자리, 이만큼 된 것 같은데 다시 밑바닥. 열받아서 막 죽을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에이 집어치워라" 이런 마음이 막 생기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지혜롭게 행하라.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이 말은 거기에 너무 너의 정열과 시간을 투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왜 이런 맥락의 말씀을 하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을 보시면 우리가 고린도전서 공부할 때 배운 내용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심은 자가 바울입니다. 물 준 사람은 누굽니까? 아볼로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누구세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외인에 대해서 골로새 교회가 열심히 복음 전하고 전도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안 됩니다. 그런데 심었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심고 물도 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맡기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금 우리는 느껴지지 않으나, 체감되지 않으나, 너는 열심히 복음 전하고 심고 뿌리고 물 주었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셔서 성장케 하고 자라게 하실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에 너무 집착하고 거기에 매여 있는데, 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누가 한 것입니까?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가 한 거라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나는 뿌리고 나는 심고 나는 물 주었으면 그다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월도 아끼고 그래야 자기 공로의식에서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잘 되어도 하나님 영광 아닙니까? 하나님 영광이고 못 되어도 내 탓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 교회가 막 부흥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누가 한 것입니까? 교회가 부흥하면 여러분 누가 한 것입니까? 자신 있게 대답해야지, 누가 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목사가 한 것입니까? 장로님이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방식은 회사가 잘 됩니다. 회사가 막 또 다른 회사를 창업하고 회사가 실적이 좋고 이러면 연말에 가면 무엇을 합니까? 성과급이 나옵니다. 자, 교회가 머릿수대로 성과급 한번 받아볼까요?

작년 대비 올해 성도들 기준으로 따져서, 작년 기준 올해 예산이 얼마나 증가했나, 헌금이 얼마나 늘었나? 자 그중에 목사의 지분이 몇 퍼센트다? 그래서 성과급 받으면 그것이 교회입니까, 회사입니까? 그렇습니다. 왜 자신이 없으십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심고 우리는 물 주고 우리는 씨 뿌리고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될 때 괜찮습니다. 그래야 열심히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열심히 복음 전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끄러울 것이 없이 기도하고 목회하고 전도하고 열심히 했는데, 안 됩니다. 누가 안 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 사람은 후회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습니다. 최선 다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잘 되어도 하나님 영광, 못 되어도 내 탓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3-2. 은혜로 말하라

6절, 이제 외인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지혜를 더 주십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말 예쁘게 하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너희 말을, 곧 외인들에 대해서 이제 믿지 않는 예비 성도들에 대해서 할 때 말을 은혜 가운데서 하라. 여러분 여기 '은혜'를 원어에 찾아보면 카리스(χάρι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카리스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카리스는 아주 중요한 원래 뜻이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선물. 자, 교회에서 복음에서 성경에서 선물, 근원적인 선물은 무엇을 뜻합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곧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의 선물은 복음입니다. 죄로 죽을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이것이 선물이고 이것이 카리스이고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도님들이 예배 마치고 돌아가실 때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말은 그대로 해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선물을 제가 받고 갑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성도님들 가정을 심방하거나 면담을 하거나 만나면 저도 은혜를 받습니다. 복음의 선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분을 통해서 저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분이 복음 안에서 사는 삶을 제가 들으면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었다, 성공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복음 안에서 투쟁하며 사는 것을 제가 들으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외인들을 대할 때 혹은 교회 안팎의 누군가를 대할 때도 너희가 말을 할 때는 은혜 가운데서 곧 복음 안에서 어떻게 말하라고요?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러면 말할 때 성도의 말의 기본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의 선물, 그것이 우리 대화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위에 어떻게 합니까?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하라. 과하지 않게. 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짭니다. 또 너무 적으면 싱겁습니다. 그 말은 상대방에게 맞게 간을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간은 다 자기마다 다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굉장히 싱겁게 느껴지는데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어떤 사람은 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설렁탕 같은 것 간하지 않고 그냥 내면 자기 입맛에 맞게 소금 넣어서 먹지 않습니까.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물로 전할 때 그 사람에게 맞춤의 복음을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전하라는 뜻입니다. 이것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소금을 왕창 들이부어서 복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게, MSG를 갖다 부어서 그것 먹고 나면 물만 계속 들이키게, 그것이 복음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복음으로 둔갑시켜서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돈 많이 번 이야기 해서 부자 된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들 다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복음이 아닙니다. 은혜, 선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선물, 그것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사람의 형편에 맞게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이렇게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북하게 전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도 자기 방식으로 계속 자기 언어를 고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답답해 죽겠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싸우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그럴 거면 왜 갑니까? 왜 가느냐고. 왜. 답답해 죽겠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싸우고 전도하러 가서 분쟁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잠언 25장 11절 말씀을 보시면 잠언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잘 아는 말씀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말도 이렇게 예쁘게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 아로새긴 은쟁반. 보셨습니까? 꽃무늬로 막 아로새겨진 은쟁반 보셨습니까? 거기에 금사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금사과가. 그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어떤 말일까요? 여러분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연말연시에 명절이 다가오면 명절에 조카들 만나지 않습니까. "너 시집 언제 가니? 너 장가 언제 가? 너 취업 준비하더니 취직했어? 연봉 얼만데?" 그것이 얼마나 재수 없습니까. 그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까, 아닙니까? 경우에 합당합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경우에 합당한 언어는 그 자리에서 경우에 합당한 언어는 비언어적 행동입니다. 지갑을 열고 5만 원짜리 2개를 주면 그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 묻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리고 이렇게 어깨 딱 두드려주고 그러면 끝입니다. 그러면 되지, 거기다가 앉아봐라 해서 성경책 펴서 삼촌이 이것 가르쳐 줄게 하면 얼마나 재수 없겠습니까? 다시는 안 갈 것입니다. 다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자, 누군가가 남편 전도를 한 20년 동안 계속 위해서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올가을에 총동원주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분한테 누군가가 "올해도 남편 못 데리고 왔네. 올해도 실패했어. 아이고 질기네. 도대체 어떻게 살아서 남편도 하나 못 데리고 오냐고." 이것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까? 똥바가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가 아닙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중에 따져 물으면 "내가 당신하고 친하니까." 친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친하면. 제가 얼마 전에 신문을 읽으니까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할 때 자식처럼 대하지 말라 그러더군요. 딸 같아서. 딸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등도 두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잡혀갑니다. 요새. 아들 같아서. 아들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잔소리하지 않습니까. 불러 앉혀놓고. 그러면 다 도망갑니다. 그렇게 하지 말랍니다. 선이 있어야 됩니다. 서로 간에 경우에 합당한 말.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제가 목회하면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의 99%는 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런 말 때문에 상처받습니다. 이런 말 때문에. 그래서 복음에서 멀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렇게 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되고, 거기에 자신이 없다 그러면 벙어리로 지내시는 것이,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그냥 찬송만 부르시고 성경만 읽으시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나는 입만 열면 주책이다 하면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말 안 하면 됩니다. 교회 와서 왜 말합니까?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죄 안 짓고 상대방에게 실족시키지 않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점잖게 표현한 것입니다. 점잖게. 이런 문제가 교회 안마다 너무 많으니까.

4. 바울의 동역자들

4-1. 두기고

이제 바울의 동역자들. 7절 보시면 골로새서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두기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골로새서를 가지고 갔습니다. 제가 골로새서 처음 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기고를 정의하는 세 수식어가 있습니다. 나옵니다. 사랑받는 형제. 누구에게 사랑받을까요?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말을 썼습니다. 아가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받다' 수동입니다. 곧 신적 사랑을 받는 자다. 이 말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바울이 어떻게 압니까? 보면 압니다. 저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구나. 주변 사람들이 다 압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또 신실한 일꾼이라 그랬습니다. 신실하다, 피스토스(πιστός), 충성되다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사람에게? 바울에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그래서 두기고는 하나님의 사랑받고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 함께 종이 된 자, 신둘로스(σύνδουλος)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신'(σύν)이라는 말이 '함께'라는 뜻입니다. 신둘로스,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두기고는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들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바울도 자기를 정체성을 종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두기고도 종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두기고는 수직관계,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라는 뜻입니다. 같은 종들끼리, 또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같은 주인이니 하나님 말씀에는 철저하게 같이 순종하는 종들입니다.

교회 안에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도 있고 교회 안에 다 직분자들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가 나뉘어서 싸운다. 그러면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 주인은 지금도 살아계신데, 살아계신 주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오해했거나 문제가 생겼거나.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서로 합력하지,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주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거기 순종하지 다투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기고를 바울이 볼 때 이렇게 본 것입니다. 나를 정말 잘 아는 누군가가 나를 세 단어로 정의해보라 하면 어떻게 정의될 것 같으세요? 말이 많고 먹는 거 좋아하고 놀러 다니는 거 좋아하고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하나님께 충성되고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이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두기고에 대해서.

그 두기고에게 바울이 골로새서를 써서 전해주라 했습니다. 그 두기고가 에베소서도 가지고 갔습니다.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주리라." 오네시모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빌레몬서 할 때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4-2. 아리스다고

자 바울이 언급하는 사람들, 바울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보시면 이제 바울이 사람 이름을 쭉 열거합니다. 10절에 보니까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고 나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의 연금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셋집에, 로마의 연금 상태 이 셋집에 같이 갇힌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다고가 어떤 인물인가? 사도행전 19장 29절에 보니까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에베소 교회가 바울이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크게 부흥시킨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크게 부흥해서 에베소 온 지역이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제 소요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때 아리스다고가 잡혀 들어가서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때 아리스다고가 나옵니다.

그다음 사도행전 20장 4절에 보니까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나옵니다. 아리스다고가 예루살렘까지 같이 갔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왜 갔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이 들어서 그것 연보 걷어서 전해주러 갔습니다. 그때 아리스다고가 같이 갔습니다. 거기서 같이 로마까지 온 것입니다.

곧 한마디로 말하면,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은 바울과 어려울 때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함께하는 사람. 에베소 교회에 소요가 있었을 때 그 중심에 온몸으로 그것을 막았던 사람이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사로잡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동행했던 사람이고, 동시에 지금 로마의 연금 상태에 같이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좋을 때는 같이 할 수 있는데, 어려울 때 같이 하는 것이 힘듭니다. 아니 가족도 다 떠나버리는데. 욥기 안에 보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이러고 하고 가버렸는데. 그런데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어려운 시기, 고난의 시기에 동행했던 동역자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충성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충성한 것입니까? 바울에게 충성하면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함께하는 것입니다.

4-3. 마가

그다음. 바나바의 생질 마가. 지금 마가도 같이 있습니다. 여기에 로마에. 여러분 마가는 저는 둘째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비유에 나옵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주인이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네" 하고 안 갔고 둘째는 "아니오" 하고 갔습니다. 물론 "네" 하고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아니오" 하고 간 사람입니다. 마가는 1차 선교 여행 때 마가가 어떻게 합니까?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서 야반도주해버리고 도주해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2차 선교 여행 초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싸우고 피차 갈라서지 않습니까?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 사이를 갈라놓았던 마가 요한이 이제는 돌이켜서 바울이 가장 힘들 때 어려울 때 그 옆자리를 지키는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킨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눈물로 통곡했습니다. 그래서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은 30에 예수님 팔고 자기가 책임지고 죽어버렸습니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냥. 그런데 지금 이 사람 마가는 돌이킨 사람입니다.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예수 이름 나오면 다 예수님인 줄 알고 그러면 안 됩니다. 같은 이름입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곧 할례받은 유대인들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바울의 동역자들은 바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물론 궁극적인 위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감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동역자들을 나도 얻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하시곤 합니다. 나도 평생 함께 갈 만한 동역자를 얻기를 원한다. 그런다면 우선 자격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해야 됩니까? 내가 우선 그 일에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 자, 기도 동역자를 얻기를 원한다. 나는 기도 안 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동역자, 그런 사람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우선 기도에 열심이어야 되고 내가 우선 주의 일에 열심이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일에 열심인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런데 주의 일에 열심인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또 모입니다. 바울이 주의 일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옆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4-4. 에바브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에바브라가 누구입니까? 골로새 교회의 개척 목회자.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며."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 성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에바브라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증거합니다.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곧 이것을 보면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만 개척한 것이 아니고, 또 어디, 라오디게아도 히에라볼리 여기를 다 목회를 한 목회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여기 '수고'라는 말을 썼는데 헬라어 포노스(πόνος)라는 말입니다. 포노스가 고통입니다. 고통. 여러분 고통이라는 말을 들으면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이 생각나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말씀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유명한 말씀이니까. 스티그마(στίγμα). 스티그마, 예수의 흔적을 내가 지니고 있다. 스티그마가 명사인데 이 동사 스티조(στίζω)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거기서 비롯된 명사인데 스티조는 '찌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찌르다'라는 것이 바늘로 찌르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옆구리에 창이 찔렸습니다. 창이 창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손에 못이 들어왔습니다. 못과 창으로 찌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옆구리의 창자국 같은 흔적, 예수님 손에 못자국 같은 흔적.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내가 지니고 있다. 지금 여기 에바브라를 바울이 평가할 때도 수고한다. 포노스, 고통받고 있다. 이것이 수고롭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힘들면 이것 때문에 못하겠다가 아니라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니까 에바브라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거룩한 상처입니다. 거룩한 상처. 거룩한 흔적. 그래서 스티그마를 보통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성흔이라고 합니다. 성흔. 거룩한 흔적이라고.

그런데 요즘 우리 많은 분들은 상처받기를 너무너무 싫어합니다. 상처받기를. 사랑받기를 좋아합니다. 당연합니다. 사랑받는 것은 좋습니다. 누구나. 그런데 상처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상처받는 것이 싫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컷 일하고 죽도록 일하고 엉뚱한 소리 들으니까. 아까 말했습니다.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똥바가지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왜? 예수님도 흔적을 가지셨고 바울도 스티그마를 가졌고 또 여기 에바브라도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평생 믿었는데 너무 깨끗합니다. 내 몸이. 예수 평생 믿었는데 멀쩡합니다. 너무 내 가슴이 생채기 난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하지 않으면 상처가 없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일하면 당연히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피하고 도망가면 영광도 없고 면류관도 없습니다. 당연히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여기고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처는 훈장 같은 것입니다.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셔야 됩니다. "아 오늘도 내가 상처를 좀 받았네. 그래서 이 상처가 나에게 훈장이 되고 영광이 되겠네."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죽겠다, 못 살겠다, 때려치운다" 이런 이야기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상처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4-5. 누가와 데마

바울이 전하는 마지막 인사가 어떠합니까? 이제 바울의 사람들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 그랬습니다. 누가가 성경에 신약성경에 두 권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몇 장까지 있는지 아세요? 24장. 사도행전은 28장. 그러면 총 52장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가 누굽니까? 누구를 위해서 누가가, 말이 좀 웃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것입니까? 우리를 위해서요? 처음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장에도 나오고 사도행전 1장에도 나옵니다. 데오빌로 각하입니다. 데오빌로 각하, 아까 말했던 예비 성도, 외인. 이 데오빌로 각하 한 사람을 위한 복음서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가 누가복음이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사도행전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복음서를 장장 이 사람이 52장에 걸쳐서 기록했습니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행적을 조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 쫓아다니면서 성령의 행전을 기록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위한 그 편지가 오늘 모든 인류를 위한 누가복음이 되고 사도행전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데마. 유명한 사람인데 데마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데마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구류되어 있을 상태에는 같이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 누가, 마가 요한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데마가 어떻게 됩니까? 디모데후서 4장 9절 보면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세상을 사랑했다. 이 말은 복음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는 실패한 제자 아닙니까? 바울에게도 데마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행적을 우리가 봅니다.

4-6. 마지막 인사들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눔바 처음 들어보셨습니까? 눔바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뒤에 나옵니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눔바의 집에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 눔바의 집에. 옛날에 우리도 구역 예배 가정에서 다 드렸습니다. 옛날에 우리 부모님 세대 때 가정에서 발도 못 닦고 발도 못 신고 퇴근해서 막 구역 식구들 다 모이면 발 냄새가 막 겨울에 험한 발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거기서 그냥 떡국 1그릇 끓여 먹고 가정 예배, 구역 예배 드리고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같이 기도하고 했던 그런 가정교회가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칭찬합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이루다. 플레로오(πληρόω). 완성하다, 성취하다. 아마 아킵보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떤 여러 가지 이유로 여타의 이유로 직분을 그만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끝까지 해. 끝까지 해." 이것을 이제 마지막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끝까지 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완주하는 것, 끝까지 충성하는 것. 하다 마는 것 말고 끝까지 안주하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동역자들과 이런 교제를 나누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가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합니다. 골로새서를 또 읽고 또 읽어보시면 이 안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진수가 있고, 또 이 안에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단계적인 복음의 역사들이 아주 정수가 잘 녹아있습니다. 다음에 또 한번 살펴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 권면, 당부, 부탁을 합니다. 기도에 대한 부탁과 중보기도를 부탁하며, 또 자신의 모든 부분들을 함께 나누고 대화합니다. 외인들에 대해서도 부탁하고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부탁하며 그의 동역자 된 자들을 칭찬합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예수를 평생 믿었는데 40년, 50년, 모태신앙으로 예수를 믿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주여 우리에게 있는 상처, 사람에게 받은 상처이나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랑할 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가 그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거나 힘겨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나도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고 내 가슴에 지니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도 바울의 동역자처럼 끝까지 함께 주의 나라를 위해서 동역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도 주님 복음 사역에 열심을 내기를 원합니다. 데마처럼 믿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지 않도록 도우시고, 아리스다고처럼 고난받고 고통받는 바울과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하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