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 오네시모 / 전체녹취

옥중서신 15 - 오네시모 (빌레몬서)

오늘은 옥중서신 마지막 시간입니다. 열다섯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별로 따로 떨어져 있으니 고린도전서나 사무엘하처럼 수십 장씩 이어지는 것보다 속도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옥중서신의 배경

옥중서신을 바울이 쓰게 된 과정을 우리가 다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기근이 들어서 교회와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미리 편지를 써서 보내놓고, 그 교회들에게 연보를 요청합니다. 연보라는 것은 그 당시 구제에 가까운 것인데, 이런 일이 있으니 거두어 주십시오 해서 그것을 거두어 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바울에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바울에게 이미 고지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갑니다.

1-1. 바울의 체포와 호송

예루살렘에서 결국 체포되고, 거기에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시간이 지체됩니다. 총독이 바뀔 때마다 바울을 불러서 신문은 하는데 결론을 내려 주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총독들이 바울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계속 불러다가 묻기는 하는데 결론을 내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월만 가니까 바울이 그때 말합니다. "내가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 이 말은 로마에 가서 직접 재판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태운 배가 바울을 압송해 로마로 데리고 갑니다.

그 로마에 입성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8장에 나오고, 사도행전 28장 제일 마지막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무르며 자기에게 오는 자를 다 영접하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온 이태라는 것은 만 2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아직 재판받기 전 미결수 상태로 그곳에서 구류 상태로 있으면서 거기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열심히 전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바울은 옥중서신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합니다.

1-2. 오네시모와의 만남

그런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이니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2년 동안 로마에서 셋집에서 구류 상태로 있는 동안 한 사람을 전도하는데, 그냥 전도만 한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을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바꿔 놓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바울에게 흘러 들어온 도망간 종이 하나 있었는데, 이 종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바울이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다 보니까, 이 사람이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와서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손해를 입힌 주인을 바울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사람인데, 이분은 골로새 교회의 장로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이제 나와 함께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가서 네 옛 주인에게 가서 잘못을 고하고 다시 돌아와라.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그래서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이 섬기고 있었던 교회가 골로새 교회이니까,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고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개척했지만 그 교회에도 하나의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빌레몬서는 굉장히 특별한 서신이고, 바울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한 장짜리 편지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 중에는 사람 이름이 서신의 제목인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 그리고 디도서. 디모데와 디도는 바울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이 직접 정말 사랑해서 "내 아들"이라고 얘기했던 만큼 바울이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길렀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는, 빌레몬은 바울의 제자도 아닙니다. 바울이 오로지 오네시모 한 사람을 위해서 그의 옛 주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빌레몬서라는 말입니다.

2. 빌레몬서의 수신자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이 아닌 한 영혼을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그 정도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이라고 나옵니다. 바울이 왜 갇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지금 로마에 구류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하다가 억울하게 여기 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아니면, 복음 아니면, 주의 일 하는 것 아니면 바울이 여기에 들어와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 아닙니까?

2-1. 고난과 고생의 구별

우리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고난이라고 합니까, 고생이라고 합니까? 고난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바울은 지금 고난받고 있는 중입니다. 고난과 고생을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고생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생이라고 말합니까?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고생하셨다." 어색하지요. 굉장히 불편하지요. 듣는 것조차 불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왜 고난이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또 욥의 고생이라고 말합니까, 욥의 고난이라고 말합니까? 욥의 고난이라고 말하지요. 왜 그러냐면 그것은 자기 죄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도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옥에 갇혔기 때문에 그는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내가 어려운 일 겪고 있을 때 그것을 열이면 열 가지 다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쉽게, 말하기 편한 말로 "목사님, 요즘 저에게 고난이 왜 이렇게 오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왜 이렇게 고난이 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자, 한번 앉아 보세요. 이게 고난인지 고생인지 한번 따져 봅시다"라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분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이것을 감히 고난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아니면 이것을 고생이라고 말해야 되는지. "목사님, 제가 요즘 고생이 좀 돼요." 그러면 분별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나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은 그것은 다 고생이지, 감히 그것을 어디다가 고난에 갖다 붙입니까? 고난하고 고생하고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잘 구별하고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바울은 고난받고 있는 중입니다.

2-2. 빌레몬과 그의 가정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빌레몬을 소개하지요. 우리의 사랑을 받고 동역자, 그러면 바울과 빌레몬은 원래 아는 사이라고 되지요.

그다음 2절,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여러분, 빌레몬 그리고 자매 압비아,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 이렇게 나옵니다. 이 세 명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 것 같습니까? 빌레몬, 압비아, 빌레몬은 남자지요. 물론 압비아는 여성이지요. 아킵보는 여기 나오지요. "우리와 함께 병사 된" 그랬으니까 아킵보는 남성이라고 추정합니다.

자, 그러면 많은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이렇게 말하는 분도 많습니다. 빌레몬과 압비아가 부부 관계고 그리고 아킵보가 그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볼 때 빌레몬은 연장자요, 장로라고 말씀드렸지요. 신앙의 연륜이 있고 연세가 있어서 어른들 그룹을 대표하는 교회의 지도자요, 리더급에 속하는 대표자. 그리고 또 자매 압비아는 여성 그룹을 대표하는 리더가 되고, 아킵보는 청년 그룹을 대표하는 리더가 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됐건 그것은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분들이 부부요, 또 부부의 아들이건, 아니면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를 말하는 것이건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3. 가정이 곧 교회

중요한 것은 "네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볼 때 눔바라는 여성의 집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가정교회라고 그랬지요. 제가 그때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는데, 과거에 우리가 집마다 구역 예배를 다 집에서 드렸잖아요. 그러면 그 집은 곧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있는 공간은 다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교회와 가정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을 분리해서, 가정은 생활하는 곳이고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이고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는 초대교회, 우리 맨날 입만 열면 "초대교회 영광을 회복하게 해 달라, 초대교회로 돌아가게 해 달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우리 가정을 교회로 한번 해봅시다. 가정을 여십시오. 가정에서 예배드리고, 옛날 우리 한국교회 초창기처럼 가정을 오픈해서 성도들 불러다가 예배드리자" 하면 이것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단 가정에서 아이들부터 반대할 것입니다. 남편하고도 하나가 안 되고,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초대교회와 멀리 와도 너무 멀리 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네 집에 있는 교회", 이것은 원형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28장 16절,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여러분, 이 창세기 28장의 고백이 어디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벧엘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부모님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잠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지요. 그리고 나서 깨어서 하는 고백이 이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가는 곳마다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하나님, 여기도 하나님이 계셨군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 집에만 하나님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는 이곳에도, 이 벌판에도 하나님이 계셨군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자기가 베었던 돌을 가져다가 거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지요. 원래 벧엘(בֵּית־אֵל)은 베트엘이라는 뜻입니다. 베트(בֵּית)는 집이고 엘(אֵל)은 하나님, 그래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표현, "하늘의 문이로다"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원어 그대로 하면 "하늘들의 문"입니다. 하늘들. 우리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데 사실은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냥 하늘은 하나의 하늘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개념 속에 하늘은 자기가 가는 곳마다 머리 꼭대기에 하늘이 있으니까 그냥 가는 곳마다 하늘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야곱이 "제가 앞으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집, 즉 예배 처소를 삼을 테니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문,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열린 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려고 하는 복이 내려오겠지요. 하나님이 그 하늘의 문을 닫으시면 누가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벧엘, 하나님의 집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고 그냥 벌판이거든요. 우리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한번 만들어 보십시오. 이 사람들처럼.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처럼. 지난주에 살펴봤던 눔바라는 여성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우리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는다는 말은 우리 가정에서 예배가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가정에서 예배가 있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 와서 함부로 하는 사람 없잖아요. 교회 와서 여기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 공간에서 감히. 그것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기를 쓰면서 삼가지요.

그래서 가정이 교회가 된다는 말은 가정에서도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하고, 항상 그곳이 예배 처소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집 하늘 위에 하늘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정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 생각이 별로 없어요. "가정 예배 드리십시오. 가정 예배 드립시다." 우리 교회에서 젊은 분들하고 유초등부 어머니학교에서, 고넬료 아버지학교에서 "가정 예배 드리는 가정을 세웁시다" 맨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가정은 예배드리는 곳이 아니에요. 이제는 쉬는 곳이고, 그냥 가족들이 있는 곳이고. 그것만 해도 다행인데, 가정에서 맨날 싸우는 전쟁터가 되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집이 되겠어요.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었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래서 그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빌레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 은혜도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고, 평강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요.

3.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

바울이 빌레몬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4절에서 7절까지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평가하는데요. 굉장히 중요해요.

4절을 보면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를 말함은" 항상. 바울이 빌레몬을 생각만 해도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항상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말입니다.

3-1. 수직과 수평의 신앙

왜 그런가, 세 가지 이유가 나오는데요. 6절과 7절에 세 가지 이유가 있고, 우선 5절을 보면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라."

여러분, 이것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다시 보세요. 주 예수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만 있습니까? 아니지요.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습니까? 아니지요. 주 예수와 성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그분에게 있었습니다.

즉 주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지요. 성도들은 사랑의 대상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뜨겁고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분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탁월하고 특별했고, 동시에 좌우에 대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특별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중에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지요. 한 가지만. 혹은 한 가지도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믿음 생활은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성도들에게 차가워요. 성도들에게, 즉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분들을 우리가 좋아합니까? 존경합니까? 좋아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자기는 몰라요.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는 몰라요. 왜? 관심 없으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분은 주 예수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성도에 대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랑은 수고로 와야 된다고 했잖아요. 믿음은 역사를 이루고, 사랑은 수고로 와야 되고, 소망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잖아요.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다시 풀면 주 예수에 대해서는 그 믿음이 역사를 이루었고, 이분은 성도에 대해서는 사랑이 수고로 왔다는 말이에요. 빌레몬이라는 사람. 그것을 이제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3-2. 빌레몬의 세 가지 유익

자,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자, 이것이 좀 해석을 잘해야 되는데요. "네 믿음의 교제"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너와 믿음의 교제를 한 결과, 이런 뜻입니다. 빌레몬, 너와 우리가 믿음의 교제를 한 결과, 혹은 빌레몬, 너와 다른 성도들이 믿음의 교제를 한 결과 세 가지 유익이 생겼는데,

첫째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아,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사귀어 보니까 모든 사람이 평가를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고 사귀니 내 속에 있는 선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 만나 본 적 있어요? 누군가를 만나는데, 아 나도 몰랐어요. 내 속에 이런 선한 부분이 나에게 있는지. 그런데 반대의 사람은 아마 많이 만나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물들어 가지고 막말을 하고 욕을 하고, 막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이런 악함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 사람을 만나니,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내 속에 선함이 발현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고, 내 속에 악함이 발현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빌레몬은 모든 사람, 그 주변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선함을 끌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사람. 너와 믿음의 교제를 나누어보니 이것은 특별한 칭찬 아닙니까? 사실 아담과 하와 보세요. 하와가 선악과 먼저 먹고 아담에게 주잖아요. 선함을 끌어냈습니까? 악함을 전달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부부가 공모해서 둘이 같은 날에 죽지요. 악함을 전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 속에 선함이 일어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간에. 바울과 디모데, 다윗과 요나단, 이런 관계들이지요. 예수님과 세례 요한. 만나면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선함의 시너지가 발현되고 나타나야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만나면 나를 통해서 그 사람이 선해지고 착해지고 주의 일에 힘쓰게 되고, 그 사람의 분노가 누그러지는 사람. 그런데 펌프질하는 사람 있어요. 누군가를 만나서 "야, 왜 참아. 그럼 다음에 더 한다. 사람이 한번 지를 때는 확 지르고 한번 더 본때를 보여주고 성질 보여주고, 그래야 된다." 그러면 또 사람들이 "그래야 되나 보다" 하고. "그 자리에서 너 내 앞에서 전화해라. 내가 보는 앞에서 해라. 너 집에 가면 또 못 하니까. 내가 너 할 말 다 일러 줄게."

그러면 어때요? 속에 있는 악함을 나타나게 하는 사람이, 속에 있는 악함을. 절대로 그런 짓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그 속에 있는 선함이 나타나도록 해야지.

또 두 번째, 이분의 장점이요.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한다." 누군가를 이 사람과 믿음의 교제를 해보니 그 사람을 데리고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있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 있고. 빌레몬이 그리스도께로. 사람을 만나면 인도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빌레몬이 너무너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장로님 되셔야 되거든요. 골로새 교회는 행복한 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장로님이 계시니까.

3-3. 평안함을 주는 사람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평안하지요. 이런 분이 있으면. 그런데 아닌 사람, 막상 사람이 있어요. 보면 하 불안하고, 막 사고칠 것 같고,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겁나고. 저 사람이 오늘 누구를 만난다 했는데 밤 저녁이 될 때까지 오늘 무슨 사건이 안 일어났을까 걱정되고. 그런 사람이 되면 그 세상 헛산 것입니다. 그냥 평안해야 돼요. 그 사람 생각만 해도 "아, 누군가가 오늘 저분을 만난다고 하니까 분노가 잘 다스려지고 해결되겠지"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여호수아 14장 12절, 13절 한번 볼게요.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여러분, 이 말씀의 맥락이 중요한데요. 지금 여호수아가 갈렙을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땅 분배가 다 끝났습니다. 12지파에 나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땅 분배가 12지파별로 다 됐는데, 문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의 잔당들이 아직까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산지에 숨어 있고, 또 광야에 숨어 있고, 곳곳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땅 분배받은 각 지파들이 자기가 분배받은 땅에 숨어 있는 가나안 잔당들을 쫓아내야 되잖아요. 몰아내야 되잖아요.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안 할까요. 이때까지 전쟁했는데, 이때까지 싸우고 지금까지 싸우고 이거 점령했는데, 쟤들은 저기 숨어 가지고 나오지도 않는데 우리가 뭐 하려고 또 힘들게 싸워서 쫓아냅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갈렙이 본을 보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무릎을 탁 꿇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갈렙이 유다 지파 아닙니까? 이때 갈렙의 나이가 85세. 할아버지예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적들을 쫓아내고 제가 가서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이 할아버지인 제가 가면 그다음 따라서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갈렙이 어떤 사람이에요? 갈렙이 실제로 그렇게 하고 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가 일어납니다. 유다 지파에서. 갈렙은 사람들 마음에 선함을 끌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선함을 끌어내고,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갈렙을 보면 마음에 평안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계가 어떤 관계예요?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뽑아라. 정탐꾼을 보내라" 하잖아요. 그때 유다 지파에서는 갈렙,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여호수아가 뽑혔어요. 12명이 정탐 갔다가 와서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나머지 열 명은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여호수아와 갈렙 딱 두 사람만 긍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세가 죽고 나서 모세의 뒤를 이어서 후계자가 될 사람, 후보가 두 명 아닙니까? 한 사람은 여호수아, 한 사람은 갈렙. 둘 중 하나예요. 나머지는 될 사람이, 후보가 없어요. 그런데 둘 중 하나였는데 하나님의 선택은 여호수아였어요.

그 갈렙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갈렙의 마음이. 사람 마음 다 똑같거든요. 열 명 중에 한 사람이면, 떨어진 사람이 아홉 명이면 괜찮아요. 자기들끼리 위로하고. 괜찮아요. 그런데 둘 중에 하나인데 나 혼자 떨어졌으니까 누구한테 위로받습니까? 그것도 사람이 선택했으면 원망이라도 나지, 하나님이 선택했는데 어디다 대고 원망합니까?

그것이 갈렙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무릎을 탁 꿇고 "제가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이 할아버지, 85세 갈렙은 안 가도 돼요. 이제 출애굽 때부터 이렇게 고생한 할아버지가. 이 사람이야말로 타인들의 선을 이끌어내는 사람이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분이고, 평안함을 주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빌레몬이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우리 그런 사람들이 돼야 돼요. 반대로 누군가에게 악을 전하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보면 불안하기만 하고,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빌레몬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4. 바울의 간청

자, 그다음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니까.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명할 수도 있다 그랬어요. 그러면 여기서 엿볼 수 있는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굉장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9절.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사랑으로 간구한다 그랬어요. 그런데 이 간구한다는 표현이 한 번 더 나와요. 10절에 보니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간구한다, 또 간구한다 그랬거든요. "간구하다",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는 말인데, 부르짖다, 구하다, 간청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단어가 어디에서 쓰냐면 마태복음 14장 36절.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했던 그 간구함입니다. 이것이 그 간구함.

4-1. 명령이 아닌 간청

그런데 바울이 명령할 수도 있어요. 빌레몬에게. 그런데 바울이 간청합니다. 간청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가 그 당시 세상의 로마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로마의 사회는 주종 관계잖아요. 수직 관계. 그 당시 고대 사회는.

그런데 교회는 서로 수평 관계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바울 서신을 많이 봤지만 자주 나오는 단어가 "서로"라는 말이었습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봉사하고, 서로 문안하다. 서로, 쌍방. 인사받는 사람 따로 있고 인사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봉사받는 사람 따로 있고 봉사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여기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왜? 그 당시 노예는 재산이에요. 빌레몬의 재산이에요. 오네시모는. 그런데 이 사람이 빌레몬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갔다고 그러니 간청할 수밖에요.

명령할 수도 있으나 간청하는, 서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여러분, 교회에서 제가 목사라고 성도에게 하대하거나, 혹은 말을 그냥 툭툭 놓거나, 또 혹은 장로님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말을 그냥 던지거나 말을 놓거나 하면 기분이 어떠세요? 요즘 말로 불쾌하지요. 그러면 안 돼요. 서로 간에 존중이 있어야 되고, 서로 간에 상호 높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간에. 그래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4-2. 해산의 수고

그런데 진짜 간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에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입니다." 여기 "낳다"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낳다(γεννάω), 이 말. "낳다"라는 말 나오지요. 생명을 낳다, 아기를 낳다. 저는 출산의 경험이 없습니다. 아쉽게도. 그런데 사실은 다행스럽게도. 그런데 출산의 경험을 하신 분들은 "아, 이것이 참 뼈가 다 나뉘어지는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바울이, 본인은 장가도 안 간 사람이 "낳은 아들", 해산한다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갈라디아서 4장 19절을 보시면 거기서도 바울이 해산 얘기를 해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맥락은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첫사랑이거든요.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이것이 갈라디아 벨트입니다. 거기를 가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 지역 벨트 교회가 유대교의 거짓 교사들에게 물들어서 넘어가 버렸어요. 그 사람들, 즉 할례가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한 것을 바울이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파서 편지 써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 내가 똑같이 다시 너희에게 가서 너희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가르치겠다"는 말이거든요.

그렇게 해산하는 수고를 오네시모에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골로새 교회의 장로님인 빌레몬에게 원래 종이었는데,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와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로마에 숨어들면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바울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미결수 상태에서 가택 연금, 셋집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오가는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에 한 사람 만난 사람이 오네시모.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네시모를 한 번에 회심시켰겠습니까?

바울이 말하잖아요. 여기 나오잖아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 그랬어요. 낳았다는 말은 해산했다는 말인데, 완전히 밑바닥 인생입니다. 진짜 도망 온 사람이에요. 노예입니다. 거칩니다.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앉혀 놓고 복음을 먹이고, 가르치고, 회심시켜서 완전히 새롭게 될 때까지 바울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을까요.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지금까지 바울이 얼마나 많은 전도를 했습니까? 큰 사도 아닙니까? 이 정도는 바울이 "야, 네가 해. 디모데에게 던져 줘도 돼요." 디모데가 같이 있으니까. 지금 여기 아리스다고도 같이 있고, 누가도 같이 있고, 물론 나중에 도망갔지만 데마도 같이 있거든요. "던져서 하면 돼. 네가 가르쳐라."

그런데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자기가 붙들고 2년 내내 먹이고 가르치고 돌보고,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서 수고한 것이거든요. 이것이 가치 있고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4-3. 한 영혼의 가치

한 영혼에 대한 가치.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서 말씀하시지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떼들을 먹이라, 내 양떼들을 치라" 한 적이 있습니까? 양이에요. 양. 한 마리 양을 먹이라 그랬어요. 양을.

그런데 베드로가 이것을 꼭 기억을 했어요. 마음속에 다 새겼다고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한번 딱 설교하니까 3천 명이 그날 회개하고 세례받았거든요. 한 방에 설교했는데 교회에 3천 명이 왔다고요. 예루살렘 교회가. 그러면 순간에 대형교회 목회자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세요.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요. 성전 미문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놀라운 것이 베드로가 거기서 이 사람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은과 금은 줄 것이 없다."

이것도 참 놀라운 것이, 요즘 한국교회에서 3천 명 교회 목회자 하면 은과 금이 좀 있겠지요. 많겠지요. 너무 많겠지요. 그런데 이분은 은과 금이 없대요. 줄 것이 없대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랬어요.

자, 3천 명 교회 목사. 예배당에서 한 사람을. 예수님이 그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한 사람을. 그것도 거지를. 교회에 전도해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거지를. 베드로가 그 사람을 주목해서 이렇게 세웁니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그러니까 그다음에 또 어떤 역사가 일어나요? 또 한번 설교하니까 5천 명이. 그래서 복음의 역사는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지난 시간에 봤지요. 우리 누가가 데오빌로, 단 한 사람에게 누가복음 쓰고 사도행전 썼잖아요.

그런데 지금 바울도 오네시모 한 사람을 낳았어요. 해산했다는 말이에요. 이 말 속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번 섬겨 보셨어요? 제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섬겨 보셨어요? 한 사람 붙들고 그 사람 변화될 때까지 같이 투쟁하고 같이 울고, 그 사람 좀 좋아지면 나도 막 좋아졌다가, 그 사람 갑자기 침체되면 나도 막 실망했다가, 이 세월을 수십 년간 해보셨어요?

바울이 이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이분은 세워서 자신 있게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4-4. 유익한 자가 되다

자,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더니" 전에는, 즉 오네시모가 복음을 만나기 전에는 무익, 손해만 끼쳤지요.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여러분, "유익하다"는 말은요, 쓸모가 있다 뭐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유익합니까? 내 사업상 도움이 되는 사람. 나에게 돈 몇 푼이라도 줄 사람. 누군가를 연결시켜 줄 사람. 그런 사람이 유익한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유익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유익하다는 말이에요. 복음에. 즉 "너와 나에게 유익하다"는 말은, 빌레몬도 복음에 헌신된 사람이고, 바울도 복음에 헌신된 사람이니까, 오네시모도 역시 복음에 헌신된 사람이다, 그 말입니다.

"내가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σπλάγχνα). 스플랑크나라는 말인데요. 심장,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내 심장이다." 이 말은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뜻이에요.

자, 이런 표현 잘 안 쓰거든요. 우리는 심복 이러면 그냥 아바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내 졸병,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기 이 심복은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 같은 심장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심장이 뛰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심장이 행복한 사람. 그래서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 그것을 심복이라고 했어요.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너를 대신하여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데리고 있으면 바울에게 유익하다는 말이지요. 이 사람을 데리고 있으면 복음 사역에 유익한데.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왜 그렇습니까? 일단은 빌레몬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 당시 법에 의하면 노예였다가, 오네시모가 가서 빌레몬에게 사과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와야 되지요.

"이는 네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 때문에 보내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가서 빌레몬의 허락을 받고 돌아와라. 나와 함께 일하자. 그 말이지요.

5. 종에서 형제로

자,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어떤 부탁을 합니까?

15절.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그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가 떠나게 된 것, 도망갔지만, 너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것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영원히 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나와 동역자가 되면 너와 영원히 있지 않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대하라." 여러분, 이것이 복음 아니에요?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 이제 종에서 형제가 되는 것이 그것이 복음이요. 교회는 종을 형제로 맞이하는 것이고, 세상의 신분과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지위 고하와 빈부귀천이 의미 없는 곳이 교회 공동체에요. 그냥 형제예요. 그 안에서. 그래서 서로 섬긴다 그랬잖아요.

바울이 명할 수 있으나 어떻게 해요? 간구한다 그랬지 않습니까?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우리도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 아닙니까? 종이. 죄의 종 노릇 하다가. 사실은 그리스도의 종도 아니었어요. 우리는 죄의 종 노릇 했던 인간들인데, 죄의 종 노릇 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고 말하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그랬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지요. 예수님과 서로 형제가 되어버린 것이에요. 예수님과 서로. 촌수가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5-1. 탕자를 영접하듯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영접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가 탕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받아들였습니까?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일단 손에 가락지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 잡아서 잔치했다. "그냥 난 부끄러우니까 조용히 살아라. 저기 건넛방 하나 줄 테니까 너 형 눈치 좀 보고, 그리고 동네 어른들 보면 인사 잘하고, 뭐 그렇게 잘 살아라. 쥐죽은 듯이 살아라" 그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했습니다.

지금 똑같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예수님 탕자 비유에 나오는 그 아버지처럼 영접하라 그랬습니다. 황송할 정도로.

그래서요, 우리가 이 신앙생활 하다 보면 잠깐 교회 떠났다 오시는 분들 있잖아요. 세상에 잠깐 갔다가 오시는 분들. 세상에 가서 잠깐 좀 놀다가 오시는 분들도 있고. 잠깐. 그렇잖아요. 영접하세요. 영접해야 돼요. 영접.

그런데 우리의 이 방정맞은 입이,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시커먼 데 잘 놀다 왔냐" 뭐 이런 거. "어디 갔다 왔냐" 이런 거. 왜 그런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영접해야지. 영접. 정말 불러다가 "우리 같이 식사 한번 하자"고 해서 좋은 데 가서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때 살진 송아지 대접했으니 스테이크 대접하고. 그것이 복음이요.

그것이 어디 가서 뭐 그냥 국수 사 주고 된장찌개 사 주지 말고. 그렇게 대접하고 "잘 왔다"고 그래야 돼요. 손에 가락지는 못 끼워줘도 소고기 한 그릇 사 줄 수 있잖아요.

5-2. 바울의 유머

바울이 빌레몬에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부탁을 합니까? 여기서부터 이제 바울의, 요즘 말로 TMI라고 하지요. 조금 더 많은 얘기, 이제 좀 안 해도 될 얘긴데. 자기 나름의 유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유머예요.

"그가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불의했잖아요. 사실 불의라는 말이, 사실 의미 없는 말이거든요. 종이 도망간 것이면 그 자체가 불의지요.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이 무슨 말이에요? 이것이 계산하라는 말이에요,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리라." 갚겠습니다. 바울이 갚을 수 있는 능력 있어요? 바울이 돈도 한 푼 없고 지금 로마 감옥에 구류되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갚아요? 안 갚겠다는 얘기니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이 바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그것을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너 다 탕감해라. 바울 식의 유머.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네가 이 아이를 영접하면 내가 좀 평안하다. 나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힘든데 너 나를 좀 평안하게 해주면 안 되겠냐, 이 말이에요.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아, 빌레몬이 받으면 미치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이것이. 빌레몬이 이런 편지 받으면, 영접하라 그랬지, 더 행하라 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더 행해야지 뭐. 더. 그래서 막 소문내야지요. 바울 귀에 들어가게. 바울 식의 유머입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참 바울이 참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데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우리 지난주에 봤던 골로새서 마지막 장의 인물들과 동일하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6. 복음 안에서의 자유

이렇게 우리 옥중서신 15주 공부가 끝났습니다.

이 옥중서신을 제가 준비하고 또 함께 말씀 나누면서 저는 자유를 느꼈습니다. 자유. 마지막에 나누고 싶은 말씀이 그것인데, 옥이라는 말은 갇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갇혀 있잖아요. 학생들은 입시에 매여 있고, 취업에 매여 있고. 또 어른들은 돈에 매여 있고, 물질에 갇혀 있고, 인간관계에 매여 있고. 사실 우리가 다 옥중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다. 자식 문제에도 매여 있고. 그런데 사실 우리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옥중에 다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이 안에서도 여유가 있어요. 바울이 그 안에서 오는 사람 영접하고, 성경 공부하고, 가르치고, 편지 쓰고.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유머러스하게 끝나잖아요. 유머. 재밌게. "내 앞으로 계산하라" 갚을 것도 아니면서. "숙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가기를 바란다. 가고 싶다." 뭐 이런 여유가 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분에게.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서 항상 갇힌 자처럼 쫓기고 답답하고 그렇게 살지 말고, 돈이 좀 없어도 마음에 여유가 좀 있고, 시간이 없어도 남을 좀 돕고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좀 있고, 그리고 웃어줄 수 있는 여유도 있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옥중서신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쳐 줍니다. 절대로 막 처절하고 피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옥중서신은 굉장히 재밌고 여유롭고 또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항상 좀 바울처럼 이렇게 복음 안에서 자유하고, 그래서 여유로운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15주 동안 바울이 로마의 구류 상태에 있으면서 본인이 겪었던 이야기와, 하나님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성도들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2천 년 전 바울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되고, 2천 년 전 바울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되고, 2천 년 전 바울의 능력과 역사가 나를 통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 인생 항상 우리도 갇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물질에 갇히고, 입시에 갇히고, 취업에 갇히고, 인간관계와 자식 문제에 갇혀서 여유 없이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주위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복음 안에서 순종하고 섬기지도 못하고 살았던 우리의 삶을 주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비록 이런 상황에 살지만 주 안에서 자유케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셨사오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복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