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 전체녹취

옥중서신 (1)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엡 1장)

오늘부터 15주 동안 옥중서신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옥중서신이라고 하면 답답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감옥이니까요. 그런데 제목은 답답하지만 내용은 자유롭고, 내용은 행복하고 복됩니다. 그리고 이 15주간의 기간을 공부하다 보면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이야기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옥중서신에는 네 편의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마다 주제가 다릅니다. 그래서 각각의 주제, 네 가지의 주제를 보면서 우리 인생을 네 가지 방향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도우시는구나 하는 것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처음 에베소서, 옥중서신의 첫 번째 책인 에베소서는 어렵습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이 어렵습니다. 보면 그 말의 껍질을 벗기고 벗기고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서 꼬이고 꼬이다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다가 그냥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설명하는 것은 저의 몫이니까 그냥 잘 들어주시면 아마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이 첫 번째 시간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가지고 함께 나눌 텐데, 오늘의 제목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1. 바울과 옥중서신

1-1. 옥중서신의 배경

바울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어디에서 기록했습니까? 사도행전 28장 30-31절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 온 이태는 만 2년이라는 뜻입니다 —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 때문에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본인이 개척한 교회들이 많은데, 이 교회들을 돌면서 연보를 받습니다. "우리 모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다. 너희들이 다 도와라" 해서 연보를 거두어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에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사자굴에 그냥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 들어가서 그대로 체포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딱히 바울을 잡기는 했는데 재판할 명분이 별로 없습니다. 뭘 가지고 재판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로마 시민권자이고 뭘 딱히 재판할 것이 없어서 계속해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바울이 "내가 가이사 앞에서 상소하노라. 로마에 가서 제대로 재판받겠다. 나는 로마 시민권자니까" 해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됩니다. 배를 타고요.

그런데 로마에 와서도 2년 동안 재판이 지연됩니다. 미결수 상태로 있습니다. 그 2년 동안 로마에서 정해준 자기 셋집, 거기에 가택연금 상태로 있습니다. 구류된 상태입니다. 군인들이 집을 둘러싸며 지킵니다. 함부로 마음대로 외출할 수는 없고, 꼭 외출을 하려면 군인을 달고 다녀야 하고, 들어오는 사람 이름 적고 들어오고 나가고, 이런 상태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그 2년 동안 기록한 서신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 장 마지막 두 절에 그 이야기를 써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베소서·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 이 옥중서신은 바울의 사역 초기입니까, 중기입니까, 말기입니까? 뒤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옥중서신은 바울의 원숙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숙하고 원숙한 모습입니다.

바울 서신이 13권인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 서신이 디모데후서입니다. 바로 순교하기 직전에 쓴 편지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서신이지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니까요. 제일 먼저 보낸 서신은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그것은 복음 사역의 가장 초창기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옥중서신은 디모데후서보다는 앞에, 데살로니가전후서보다는 훨씬 뒤에 있습니다. 원숙한 바울의 신학의 깊이와 그의 철학과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아주 절절하게 잘 묻어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바울의 완성되어 가는 모습, 그리고 성숙한 모습을 여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1-2. 각 서신서의 주제

에베소서의 주제는 4장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머리라고 했는데 그리스도는 어디의 머리입니까?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서는 다른 것보다 교회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교회 이야기를 할 텐데, 건물로서의 교회는 물론 아닙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는 예배당입니다. 그냥 벽돌로 지은, 콘크리트로 지은 집, 예배당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주제는 4장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이지요. 바울이 옥중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자주 나오는 것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빌립보서는 진짜 옥중에 갇혀 있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나는 자유로운데, 나는 갇힌 것이 없는데, 나는 지금 괜찮은데" 그런데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어떻게 그 기쁨의 비결을 배울 수 있을까, 이것이 잘 나타납니다.

그다음 골로새서 1장 28-29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제가 이것을 왜 읽었느냐 하면, 제가 우리 교회 올 때 목사가 교회에 이력서를 내고 지원을 합니다. 그때 자기 이력서도 내고 목회 계획서라는 것도 냅니다. 그런데 이 목회 계획서라는 것이 참 의미가 없는 것이, 뭘 알아야 계획을 하지요. 이 교회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지역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데 내라니까 내야 했습니다. 고민이 됩니다. 목회 계획서를 써야 되는데 뭐 거창하게 쓸 수는 있지요. 거창하게 대단히 거창하게 대단하게 쓸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공수표 날리는 것이고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기도하다가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우리 장로님들 아마 기억 못 하실 텐데, 제 목회 계획서에 이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대로 그대로 썼고 이 말씀대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골로새서 1장 할 때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1장 28-29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28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누구를 세웁니까?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핵심은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양육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과연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가, 이것이 가능할까? 이것이 골로새서의 핵심입니다.

그다음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잘 아시지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인데 사실은 누구를 위한 편지입니까? 오네시모를 위한 편지입니다. 10절에 보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구류되어 있는데, 흘러 흘러 흘러 들어온 사람 중에,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온 사람 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종이었고, 빌레몬이라는 주인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 온 종입니다. 로마에 별별 사람들이 다 모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바울에게까지 왔습니다. 바울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말씀을 가르칩니다. 회심했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너 가서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바울이 편지를 써주는 것이지요.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과와 용서는 —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과해야 되잖아요. 그것은 어떻게 해야 되고,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가 짧은 한 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리하면, 에베소서는 교회, 빌립보서는 기쁨, 골로새서는 양육 곧 성도가 세워지는 것, 빌레몬서는 사과와 용서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과정을 함께 볼 것입니다.

2. 바울의 자기 소개

이제 본격적으로 1장을 보면,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이 맨날 자기 서신서에서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는 것마다 특징이 있는데, 항상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했지요. 자기 뜻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내가 "저요, 저요" 하고 손들어서 "저 사도 되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사도 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세움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자기 뜻으로 자기 마음대로 내가 사도가 되었다면 내가 하기 싫으면 집어치면 됩니다.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세움 받았으면 하나님이 "너 그만해" 하기 전까지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하지 마라"고 하기 전까지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수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굉장히 능동적이고 굉장히 하나님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도 이야기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은 주권이 있습니까? 종의 주권이 어디 있습니까? 종의 주권은 주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인이시니까 주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종의 주권이지, 종은 그 자체로 자기 주권도 없고 자기 주장도 없고 자기 힘이 없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주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소개를 보면, 그러면 우리는 내가 원해서 여기 와 있고 내가 원해서 직분 받았습니까? 내가 원해서 내가 성도 되었고, 내가 원해서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되었습니까?

내가 원해서 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를 보면 내가 원해서 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교회에서 중직선거할 때 내가 원해서 돈도 뿌리고 전화도 하고 "나 좀 뽑아 달라"고 하고 자기가 원해서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하기 싫으면 집어치워 버립니다. 그냥 자기가 하기 싫으면 자기가 원해서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세우셨으면, 그만하라 할 때까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정한 기간까지 하고, 생명을 다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이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소속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도"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사도가 무엇입니까? 보내심을 입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도 수동적입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보냈으니까 온 것입니다. 그러면 "너 다시 와" 하면 다시 가야 됩니다. 바울은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3. 성도의 정체성

3-1. 세속도시의 거룩한 무리

이제 바울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울은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1장 1절에 보니까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표현이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가 세속도시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도시입니까? 에베소라는 도시가, 미국의 뉴욕이 세속도시입니까, 거룩한 도시입니까? 서울은요? 다 세속도시입니다. 로마도 그렇고 바벨론도 그렇고요.

그런데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세속도시에 살고 있는 거룩한 무리들에게"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도라는 정체성은 세속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배당 문만 나가면 다 세상의 문화입니다. 다 세상의 법칙이 장악하고 있고 주장하고 있고 판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성도로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세속도시 가운데 있는, 거룩하게 부름 받은 자들에게 — 그러면 성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완전히 위험 상태에 있는 자들이 아니고, 세속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힘든 것입니다. 너무너무 힘든 것입니다. 이 힘듦이 느껴지십니까? 느껴져야 됩니다. 안 느껴지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진짜 진짜 잘 살든지, 아니면 완전 타락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느껴져야 됩니다.

3-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세속도시에 있는 거룩한 자들이라 했지요. 그런 사람들을 다시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결합되어 있다, 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묶여 있습니다. 무엇으로 묶여 있습니까? 예수와 내가 묶여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보혈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으려면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묶여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보혈이 아니면, 십자가 보혈이 아니면 나하고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000년 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와 그 보혈로 내가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연결된 신실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을 구원하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누가 믿을 만하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누가 믿을 만합니까? 두 방향입니다. 즉 하나님도 믿을 만하고, 또 세속도시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도 믿을 만하고, 그것이 성도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 아래에 있는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들인데, 신실한 사람들인데, 하나님도 그를 믿을 만해야 되고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사람은 신뢰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됩니까?

우리가 성도로 여기에서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가 판가름이 나는데, 하나님이 믿을 만하면 그 사람은 무조건 세상의 에베소에 있는 세속도시의 사람들도 믿을 만해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성도예요. 가방은 들고 교회는 다녀요. 교회 오래 다녔대요. 교회에서 뭐 직분 받았대요. 그런데 저 사람 못 믿겠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가짜입니다.

이 짧은 인사말 한 절에 성도의 정체성이 딱 드러나 있습니다. 세속도시에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여,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너희를 믿을 만하고, 믿지 않는 자들도 너희를 믿을 만해야 됩니다. 그래야 됩니다. 우리를 한번 보셔야 됩니다. 내가 나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감을 주고 있는가, 얼마나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가, 믿을 만하십니까? "저 사람하고 거래하면 괜찮아. 저 사람하고 교제해도 괜찮아. 저 사람은 틀림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여기서 짧게 말하고 있습니다.

4. 에베소 교회와 바울의 인연

그다음 에베소 교회와 바울의 인연을 말해 보라 했는데요. 이것은 사도행전 19장, 20장을 다 읽어 보면 아는 것인데, 바울이 보통은 선교 여행할 때 1차, 2차, 3차 여행할 때 가서 회당에서 복음 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누군가가 해코지를 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버립니다.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회당에서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막 시기하고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두란노 서원이라는 것을 따로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2년 동안 가르칩니다. 이것이 나옵니다. 9절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매" — 보통 때 같으면 바울이 가버리는데 —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의 목적지가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못 갔습니다. 3차 선교 여행에 에베소를 갔습니다. 3차 선교 여행은 에베소에서 그냥 계속 눌러붙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소아시아의 핵심 도시, 중심 도시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복음이 전해지면 — 항구도시였습니다 — 복음이 배를 타고 전 세계로, 소아시아 전체로 다 퍼져 나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두란노 서원 세우고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쳤느냐? 20장 31절에 헤어지면서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두란노 서원에서 지식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2년 가르쳤다고 했는데 사실은 3년 동안 목양한 것입니다. 성경공부 가르치고, 심방하고, 목양하고, 눈물로 훈계하고, 가르치고, 한 사람 한 사람 세워 나가던 일을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성도들의 면면을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의 이름도 알고 있고, 그 식구들도 알고 있고, 또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 핵심 되는 사람들은 바울이 다 알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이나 거기에서 밤낮으로 눈물로 각 사람들을 다 훈계하고 양육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회할 때 33절을 보세요.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노라." 자비량으로 목회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비친 것이 없다. 깨끗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 당당하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5. 은혜와 평강

5-1. 은혜 공동체

2절 첫 인사말, 아까 성도들을 불렀고, 성도의 정체성을 이야기했고, 이제 인사말에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 자주 쓰시지요. 우리도 "은혜 받으세요" 합니다. 평강은 평화라는 말로 대체도 가능하고,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기를", "여호와 샬롬(יְהוָה שָׁלוֹם)" 이런 이야기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첫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를 바울이 받았습니다. 놀라우신 은혜를 받았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나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지요. 이것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돈 받고 했습니까? 자기 노동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혜 공동체가 되어야 됩니다. 성도들에게 말할 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 말은 너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은혜받으면 이 은혜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어떻게 보답할까, 어떻게 내가 할까, 자꾸 하나님께 보답할 것을 찾아다닌다고 눈이 시뻘게져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으면 그때부터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은혜 없는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돈 주면 됩니다. 돈 주면 은혜 없는 사람이 움직입니다. 돈 때문에, 돈 받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 공동체입니다. 돈으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물질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커서 바울이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자발적 봉사, 자발적 충성은 은혜가 있은 다음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여기 앉혀 놔도 봉사가 안 되고 일이 안 됩니다. 더 시끄러워지기만 하지요. 그래서 교회는 은혜가 계속 충만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있도록 계속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은혜의 통로를 자꾸 만들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5-2. 평강의 근원

그다음 평강입니다. 평강은 언제 평강해집니까? 무엇이 생겨서 평강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 요한복음 20장 19-20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문 닫고 있는데,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세요.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포위망이 뚫려서입니까? 아니면 체포령이 해제되서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고 진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고 기쁨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평강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평강은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평강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말씀대로 고난받으셨고 말씀대로 부활하셨구나, 나도 이 예수님을 따르면 이 힘든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살다가 부활할 수 있겠구나 — 그러면 내 마음에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평강이지, 돈이 주는 평강은 가짜 평강이고, 일시적인 건강이 주는 평강도 가짜 평강입니다. 진짜 평강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이 진짜 평강입니다. 그것을 축복했습니다.

6.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

6-1. 선택의 복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신령한 복에 대해 나오는데요, 이것이 좀 말이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저하고 정리하고 이것을 읽으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헷갈려서 안 됩니다.

성도가 받은 최고의 신령한 복이 무엇이냐? 선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택,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3절부터 5절까지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이것이 4절에 나옵니다 —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 핵심이 무엇입니까?

다시 3절 한번 가볼까요? 3절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 여기에 주어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는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4절 가보세요. "우리를 택하사" — 누구를 택하셨다고요? 우리를 택하사. 5절 가보세요. 끝에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복입니다. 우리가 얻은,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받은 복 중에 가장 신령한 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령한 복이라고 믿습니까? 별로 안 믿어지지요. 왜냐하면 나는 신령한 복이 지금 당장에 내 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 그것이 신령한 복인데 — 그런데 진짜 복 중의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아들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한번 볼게요.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보세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했지요. 누가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령한 복입니다.

6-2. 선택과 구원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선택이 다 구원으로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사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 예수님의 선택이 다 구원으로 연결됩니까? 헷갈리지요.

예를 들어 볼게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 어느 민족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이것 다 알고 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 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선택이 구원으로 연결된다, 안 된다? 안 됩니다. 예수님이 12제자 선택했습니다. 불렀지요. 12제자 다 구원받았습니까? 그중에 한 놈이 — 한 분이라고 하기도 아까운 — 그중에 한 놈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은 30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선택이 구원으로 연결된다, 안 된다? 안 됩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모든 이를 다 선택하고 다 부르신 것입니다. 다 초대하신 것입니다. 초대장을 다 보낸 것입니다. 초대장을 보냈는데 그것이 응답이 되어야지요. 응답이요. 잔치상에 다 오라고 불렀습니다. 전부 잔치에 불렀는데 전부 이유가 많습니다. 장가가야 하고, 시집가야 하고, 소도 팔아야 되고, 논매러 가야 되고, 밭매야 되고 —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화가 나가지고 "그럼 다 집어쳐라. 길에서 노는 이들, 걸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 힘든 사람 다 데려와라" 해서 그래 가지고 주인의 잔치상을 채웁니다. 초대장은 다 발송됩니다. 초대장, 이것이 선택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선택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 부르신 것처럼 누구를 다 불렀는데,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그다음은 좀 이따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6-3. 선택받은 공동체

이 선택에서 또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옆사람만 보세요. 옆 사람, 앞 사람, 뒷사람, 다 마음에 듭니까? "아, 저 사람 오늘 왜 내 옆에 있지? 몰랐네. 기분 안 좋은데." 그런데 나만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우리 교회에 내가 진짜 기분 나쁜 사람, "나 저 사람 보기 싫어서 나는 딴 예배. 저 사람 2부 예배면 난 3부 예배."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선택 안 했냐고요. 하나님이 그 사람 선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나는 꼴보기 싫어도 하나님이 선택했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했으니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나는 싫어도 하나님이 선택했으니까 와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내가 쫓아냅니까? 내가 그 사람 긁어서 밖으로 쫓아냅니까? 그런 짓 하면 벌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 내가 볼 때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선택했으니까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 주권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주권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공부했는데, 8장에 바울이 우상의 제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1절을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 말이 뼈아픈 말입니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아예 안 먹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기 때문에, 별나게 그것 가지고 계속 따지는 사람은 그 사람하고 내가 붙어서 같이 논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니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예수 믿는 방식이 다르고, 말하는 모양새가 다르고, 다 달라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라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받아들여야지요. 그것 안 받아들이면 내가 나가야 되는데, 그러면 나는 나가기 싫고 나가면 안 되고요. 그래서 선택은 이런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 자체가 100%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선택은 나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 싫은 사람도 다 선택받았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계속 중요한 하나의 큰 맥락입니다.

7. 십자가 보혈의 복

7-1. 선택에서 구원으로

두 번째, 7절을 보세요. 에베소서 1장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택해서 불렀지요. 그런데 선택이 다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면 선택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피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1장 7절은 선택받은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결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피를 내가 영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요.

출애굽할 때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요. "야, 오늘 밤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 양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다 발라라.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돼. 그것 안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너희 집에 장남이 죽어. 무조건 그것 해야 된다." 안 믿겨져도 그것 믿고 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서 벌벌 떨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안 믿고 피 안 바른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날 곡소리 났습니다. 그날 밤에요.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런데 피 바르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내가 영접하지 않으면 그것이 신령한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신령한 복은 첫째는 선택이요, 두 번째는 십자가 보혈입니다. 이 보혈은 내가 영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영접해야 됩니다. 그 보혈을요.

7-2. 보혈을 영접하라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지요. "하나님, 저희의 마음을 좀 열어 주셔서 보혈을 영접하게 해 달라"고, "안 믿겨져도 영접하게 해 달라"고, "요만한 믿음을 가지고라도 영접하게 해 달라"고요. 제가 믿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요. 순도 100%의 믿음이 구원을 주는 믿음이 아닙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에베소 교회 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신령한 복 두 가지는, 하나는 선택이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이 보혈을 영접해야 그것이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8.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은총

8-1. 지혜와 총명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플러스 알파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8절입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이것이 진짜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 중요하냐? 지혜와 총명입니다. 지혜로우십니까? 총명하십니까? 어릴 때 총명탕 — 저도 어릴 때 총명탕 좀 먹었는데요. 그런데 총명탕 먹어서 총명해지는 것이 아니고, 박사님 되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 받으면 죄 사함의 결과가 지혜와 총명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지금 7절에 죄 사함 이야기했지요. 그리고 8절에 이어지는 순서가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한다" 했습니다. 이런 경험해 보셨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영이 부어져 가지고 뜨겁게 회개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면 영이 맑아집니다. 영이 맑아져서 깨끗해져서 분별력이 생깁니다. 판단력이 막 생깁니다. 판단이 흐리다가 회개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간절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고 나면, 그러고 나면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지혜의 영을 주셔서 선택이 틀리지가 않습니다.

8-2. 매일 발 씻는 회개

이것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셔야 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요. 우리는 매일같이 발 씻는 회개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 씻어 주실 때 베드로가 목욕시켜 달라고 그러니까, "한번 목욕한 사람은 두 번 다시 목욕할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회개는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발은 매일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매일 발 씻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밤에 하루 지나고 나면 매일 회개해야 됩니다. 그래야 똑똑해집니다. 그래야 멍청해지지 않고 머리가 맑아져 가지고, 그다음 날 사람 만날 때 엉뚱한 소리 하지 않고 이상한 데로 끌려다니지 않고 사기당하지 않고 제대로 정신 차리고 이 악한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회개하라" 해야 합니다. 매일 밤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의 영을 넘치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한번 해 보라니까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지혜가 됩니다.

8-3. 기도하는 공동체

그래서 교회는, 교회 공동체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 이것을 정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선택받아서, 우리가 선택받았습니다.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회개 기도 하고, 금요일 날 우리가 모여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기도 시간을 통해서 내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영접하고, 나는 지혜로워지고 총명해지고, 그래서 선택을 세상에서 잘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뭐 다른 것이 있습니까? 공동체가. 그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다른 복이 아닙니다.

에베소가 얼마나 타락한 도시입니까? 아데미 여신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마술책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도행전 19장, 20장 보시면요. 그리고 거기는 항구도시이고 무역이 넘쳐나는 도시라서 거기는 돈이 잘 도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성도로 산다는 것, 그런데 거기에서 신령한 복을 말한다는 것 — 진짜 사람들이 말하는 세속적인 복은 "이 도시에서 제가 가장 큰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 제목 가진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은 선택받은 복이요, 진짜 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받아들이는 복이요, 그 보혈을 받고 지혜와 총명이 넘쳐서 분별력이 있고 흐리지 않는 영으로, 맑은 영으로 사는 것이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어렵게 설명하는데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정리하면 딱 이것입니다.

9. 바울의 기도

9-1. 감사의 기도

그다음 바울의 기도 한번 보세요.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의 시작을 어떻게 합니까? 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 이 교회가 믿음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바울이 듣고 있습니다 — "내가 기도할 때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감사가 넘친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 행복한 것입니다. 바울이요. 왜냐하면 내가 개척한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맨날 싸운다고 하면, 맨날 이것들 지지고 볶는다고 하면 — 감사가 넘치지 않고 열 받아 가지고 "내가 지금 당장 쫓아가서 이것들을 한번 사단을 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갈라디아서 쓸 때 그랬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속히 돌이켜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 다른 복음을요.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사랑 안에 거했고 바울이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

9-2. 지혜와 계시의 영

기도하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무엇을 구하느냐? 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첫째,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 — 이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 이것이 두 번째 기도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모든 것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다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 누구입니까? 있으시지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지금 딱 떠오른 사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맞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이렇게 기도합니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3년 동안 밤낮 눈물로 기도하고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돈 벌게 해 주세요. 아무개가 제가 알고 있는데, 이 아무개가 너무 힘들어요. 먹고 살기 힘들대요. 그것 기도해 주세요." 이런 것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 두 번째 마음의 눈을 밝게 해 달라, 두 가지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딱 수직적인 관계가 딱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머지는 그냥 되는 것입니다.

9-3. 영의 눈이 밝아지기를

요즘은 어떻습니까? 육의 눈이 막 밝아져 있습니다. 사람들이요. 육의 눈이요. 마음의 눈이, 영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 됩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도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요만큼이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착각할 뿐이지요. 모르는 것은 계속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10. 하나님에 대한 고백

바울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그의 능력이,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쭉쭉 가다가 22절 끝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즉 다시 정리해서 읽어 볼게요.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지금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 머리로 세웠으니까 하나님이 교회 주인이시지요. 그러면 우리는 —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 몸의 지체입니다.

이것이 딱 떨어지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하셨습니다. 포도원의 농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고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이 관계랑 이 관계랑 똑같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또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체 된 우리는 — 머리가 명령을 내립니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는데 지체가 하지 않으면 고장 난 것입니다. 큰일 난 것입니다. 지금 제가 손 이렇게 하는 것도 머리가 명령을 내리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도 머리가 명령을 내리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니까 그리스도가 명령하는 대로 우리는 행하고 따르고 순종해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가 사람이 되는 경우는 큰일납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 해 전에 어떤 남자분이 — 신앙생활을 얼마 안 하신 분이 —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 자기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목사는 목 정도 되겠다고요. 목이요, 여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인 머리를 떠받쳐야 되고, 성도인 몸하고 연결해야 되고, 성대를 울려서 목소리가 나와야 되고, 그리고 그 닭목뼈 잘 안 먹습니다. 다 쓰고 나면 별 쓸모없고요.

제가 "와, 이분의 통찰력이 대단하시다" 했습니다. 닭이 그렇습니다. 닭이 목청을 막 높여서 꼬끼오 꼬끼오 해서 사람을 깨웁니다. 그런데 닭 잡아 놓으면 제일 쓸모없는 것이 목입니다. 그렇구나, 평생 외치고 평생 부르짖고 외치고, 그리고 별 쓸모없구나. 하나님 앞에 쓸모 있으면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연결하는 몫이구나. 그렇구나, 앞으로 저는 목으로 살아야 되겠구나.

그런데 이 성경에서 또 그랬습니다. "목이 뻣뻣한 자"는 어떻게 한다고요? 벌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목이 뻣뻣해지면 안 되니까 항상 목을 숙이고 인사 열심히 하고요. 이것이 참 목이 피곤하더라고요.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목이 뻣뻣합니다. 이 무거운 머리 달고 하루 종일 있느라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어디쯤 위치하는 것 같습니까? 어디쯤 있는 것 같습니까? 각자가 다 다르지요. 나는 손가락인지 눈인지, 다 지체가 다 다릅니다. 그렇게 바울이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11. 교회란 무엇인가

이 맥락에서 교회는 어떤 곳인가? 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대로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제가 교회를 건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입니다. 즉 성도들은 — 이렇게 읽어도 됩니다 — 성도들은,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 말이 어려운데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를 하나님으로 바꿔서 볼게요. 즉 "교회는 그의 몸이다" 했습니다. 즉 나는 — 내가 교회입니다 — 나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내 이름을 넣어 보세요. 나는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여러분 무엇으로, 내 마음이 지금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내 마음이 세상 걱정과 근심과 욕망과 욕심, 여러 가지 것들로 충만하면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기대, 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것으로 충만해져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 곳이 교회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다." 이것이 1장의 결론입니다. 나는 선택받았습니다. 신령한 복입니다. 선택받은 나는 — 선택받음이 다 구원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넘치는 선물은 지혜와 총명입니다. 지혜와 총명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세상을 잘 살아가면 나는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1장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이것 잘 기억하시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계속 반복해서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잘 깨닫고 또 다음 한 주간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회는 신령한 복을 주신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선택이 모두 구원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다 받고 믿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아 지혜와 총명을 얻은 자 되었사오니, 매일매일 회개하여 회개의 영이 충만하여 영이 맑아져서 지혜와 총명이 충만한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영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상 욕망으로 충만하지 않게 주께서 도우시고, 세상의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충만해져서 예수로 충만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복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