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구원과 화평 / 전체녹취

옥중서신 (2) 구원과 화평 (엡2장)

오늘은 '구원과 화평'이라는 주제로 에베소서 2장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1장 말씀에서는 신령한 복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었습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신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완벽하게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구속이 있고 죄 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구원이란 무엇인지,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화평, 그리고 그 이후의 은총과 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구원에 대하여

1-1. 구원받기 전의 상태

구원받기 전 에베소 사람들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사실 이것은 구원받기 전 에베소 교회 성도들 상태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상태를 보면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나는 어떠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기 전에 내 마음의 상태, 내 육신의 상태, 내가 행동했던 행동거지들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너무 명확하게 잘 나타납니다.

1절을 보시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습니다. 허물과 죄라는 말이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둘 다 결국 하나로 '죄'라고 묶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허물과 죄를 나눠서 구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허물은 조금 소극적인 의미인데,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가 부모로서, 성도로서, 교인으로서, 자녀로서, 사회인으로서, 또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을 허물이라고 합니다. 비겁해서 하지 않고, 하기 싫어서 하지 않고, 귀찮아서 하지 않고, 무서워서 하지 않고, 그렇게 묻어버리고 지나가는 것들이 다 허물입니다. 이 허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쌓이게 됩니다. 하루에도 허물이 얼마나 많이 쌓이겠습니까?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좀 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죄 짓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죄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조금 더 적극적인 것이고 허물은 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허물이나 죄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었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이것은 과거 완료입니다. 이미 죽어버린 것입니다. 죄는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지었는데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죄 짓고 세상에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흙과 하나님께서 주신 생기의 결합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육체, 즉 흙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이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영이 죽은 것인데, 그냥 멀쩡하게 밥 먹고 출근하고 가정생활하고 걸어 다니니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예민하게 보면 영이 죽어 있는지 영이 살아 있는지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육체의 소욕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사는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내 영이 육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내 영이 육체의 욕망을 통제하고 육체의 욕망을 다스려 나갑니다.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육체가 계속해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육이 살아 있고 영이 죽은 사람은 그냥 속절없이 끌려 다니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 있는 사람, 허물과 죄에서 건짐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를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큰 차이입니다. 우리 상태를 우리가 압니다. 내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우리가 이 믿음의 눈으로 가족을 보고 사람을 보고 가까운 분들을 보면 저분이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 하는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신령해 보이고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해서 그것이 신령한 사람이 아니고, 내 영이 육을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1-2.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특징

이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를 설명합니다. 2절에 "그때에 너희는" 즉 죽어 있었을 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첫째,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이 세상 풍조를 따릅니다. 이 세상 풍조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행을 따르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볼일 다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풍조는 항상 일정합니까, 바뀝니까? 바뀝니다. 계속해서 바뀝니다. 그런데 그 바뀌는 것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따라다니다가 정신 못 차리다가 그냥 죽어버립니다. 나중에 힘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이 세상 풍조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이 없으니까, 자기 말씀의 기준이 없으니까 세상이 좋다는 것을 다 따라다닙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니까요.

둘째,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제가 옛날에 소년부 교육 전도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들과 함께 이 본문을 읽었는데, 우리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저에게 "이건 공군이에요"라고 했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아, 성경은 공군을 이렇게 표현하는군요"라고 하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아이의 시각으로는 이것을 공군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아, 이건 공군이 아니고 사탄이란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꼬여서 혼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는 공군이 아니고 사탄입니다. 사탄, 성경은 이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특징이 나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두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살인자요, 진리가 없는 자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특징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의 특징, 살인자. 칼로 사람을 찔러서 살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편 가르기를 해서 사람을 고립시켜서도 살인을 할 수 있습니다. 외롭게 만들어서, 그리고 그 사람을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서도 살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그 분열의 끝은 무엇입니까. 그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인격을 죽이고,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의 마지막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탄이 이 공동체에서 역사한다, 사탄이 우리 가정에 혹은 내가 있는 어디에 역사한다면 그것에는 반드시 분열이 있습니다. 누구 하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사람을 죽일 때까지 몰아갑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사건 사고가 벌어지면, 문제가 생기면 이 마녀사냥이 끝까지 이어집니다. 어느 정도까지 하고 그냥 거기서 그쳐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을 때까지 몰아버립니다. 그것이 사탄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살인한 자라 했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행동하고 좋은 일을 하고 그 공동체를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부터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또 사탄은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제, 오늘, 내일, 10년 전, 20년 뒤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은 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똑같은 것, 동일한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중심이 없으니까 세상 풍조를 따르게 됩니다. 사탄은 진리가 없이 계속 사람을 정신없이 쫓아다니게 만듭니다. 다른 일을 그래서 바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들은 바쁩니다. 세상에 속하면 너무너무 바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계속해서 조장해서 우리를 진리인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탄의 정체입니다.

셋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의 특징이 3절에 나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다고 했습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런데 여기 "마음의 원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마음, 머리에서 나오는 것, 그것을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진화론이고 하나는 공산주의입니다. 진화론과 공산주의는 거의 쌍둥이 형제 같은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나온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내고 공산당 선언을 선포한 것이 1848년입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합니다. 진화론입니다. 19세기에 공산주의와 진화론이 동시에 탄생합니다.

그런데 이 진화론이 공산주의를 떠받쳐 올려서 공산주의가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볼셰비키 혁명인데,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며 그것이 1917년입니다. 20세기 초, 그때부터 소련으로 시작해서 동구권 전체가 공산주의로 다 물들었고 지금도 우리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사상입니다. 우리 마음의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공산주의와 진화론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적자생존입니다. 적자생존이 무엇입니까.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적응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다윈이 가만히 관찰하니까 이 세상 자연계의 모든 법칙이 강한 놈만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놈은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자연을 한번 보십시오. 식물 가꾸기 좋아하시고 동물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는 분들, 자연을 보십시오. 자연이 얼마나 조화롭습니까. 거기에는 풀도 있고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약한 동물도 살아가고 강한 동물도 살아가고 그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인간의 탐욕이어서 그렇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는 강한 놈만 살아남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사상을 집어넣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강한 자만 살아남게 혁명하는 것입니다. 무기를 가진 자, 힘을 가진 자, 그리고 그들이 지주들과 공장 주인들과 생산자를 다 쫓아내고 강한 자가 정권을 가지고 돈과 권력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 아닙니까. 나눠주지 않습니다. 수령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인생들의 비참한 결론입니다.

결국 그렇게 가면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데올로기가 지금도 우리나라가 자유 대한민국 속에 있지만 결국 정치권이 이 논쟁으로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결국 그것이 우리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고, 이 시대에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학교에도 들어가 있고, 다 계속해서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쓴 뿌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 끝에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기 전 우리의 상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진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닙니까.

1-3. 구원의 은혜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4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긍휼과 큰 사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 가엾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사는 우리를 하나님이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셨는데 보통 사랑이 아니라 어떤 사랑입니까.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거대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함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함께"가 누구와 함께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입니다.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라고 하여 또 "안에서"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큰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는 비결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 종 치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말을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리시고, 함께 건지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심판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거한다"는 말을 쓰고 있는데, 금요 기도회 시간에 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거하다"는 헬라어로 메노(μένω)인데, 이 메노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상주하다", "그 안에 살다"라는 뜻이 있고, 두 번째는 "견디다", "버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그 안에 살면서 버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난이 있어도 버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좋을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질 때는 예수 안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이 그 안에서 성취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고,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버립니다. 떠나고 싶어 합니다. 지루해하고 재미없어하고 힘겨워하고, 그리고 희생하고 헌신하기를 싫어합니다.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티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함께" 버티는 것을 잘해야 됩니다.

지금 바울이 말했습니다. 함께 있는 것. 그런데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 진짜 좋습니까? 좋습니까, 별로 안 좋습니까? 예수와 함께 있으면 십자가를 보라고 하고, 고난받으라고 하고, 오른뺨 맞으면 왼뺨 대라고 하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라고 하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습니까? 진짜 안 좋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붙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떠나면 우리가 손해니까요. 이것은 명확합니다. 떠나면 손해입니다. 떠나면 손해가 막심합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을 잃어버리니까요. 구원을 잃어버리니까요. 그래서 붙어 있어야 됩니다. 등을 들이밀더라도 어쨌든 붙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1-4.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구원받은 우리는 함께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 8절, 이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전도 폭발 주제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 구원을 받았다고 했는데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앞에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먼저 "그 은혜"라 했습니다. 은혜는 누가 주는 것입니까? 내가 만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선택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선택 후에 죄 사함 아래 내가 머무는 것, 그것이 신령한 복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조금 애매합니다. 도대체 이 믿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내 공로입니까? 여기서 이제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여기를 풀 수 있는 열쇠가 그 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선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값 없이, 돈 없이 너에게 은총을 주고 구원을 주노라. 십자가로 들어와라." 그러면 "네" 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물인데, 그 선물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선물을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겨울에 저 사람이 일하는 것을 보니까 손이 시려워 보입니다. 너무 시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서 장갑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이거 얼마예요? 2만 원이면 돼요? 3만 원이면 돼요?" 봉투에 돈을 넣어서 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그 선물은 진심으로 받으면 됩니다. "고맙다" 하고 그대로 수용하고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꼭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면 누군가가 무엇을 주면 그에 대한 등가의 가치를 그 다음 날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많이 받아 먹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그것도 염치없는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그대로 받아야 됩니다. 선물인데 하나님,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은혜를 주시고 무엇인가를 해서 구원을 주시고, 이것 자체가 행위 구원입니다.

선물입니다. 구원은 그냥 선물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대로 그냥 받는 것입니다. 아멘하고 감사하고 받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진노의 상태를 내가 압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지, 내가 얼마나 썩어 없어지고 죽어 없어진 상태였는지를 아는데, 거기서 나를 건져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은총을 감사하고 받으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선물을 선물로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말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행위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5. 구원받은 자의 선한 일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비참한 상태도 봤고, 구원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함께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은혜로 주신 것이고 그것은 선물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제 구원받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선한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구원의 은혜가 느껴지면, 가만히 놔둬도 구원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은총이 있고, 구원의 은혜가 있고, 그 감격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뒤집히면 무엇이 됩니까. 불교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신앙생활하는데 불교인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교회 안에 성도인데 절에 다니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상합니다. 행위 구원론자들,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구원받고 무엇인가를 해서 은혜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헌금 많이 해서 구원받고 봉사 많이 해서 은혜받고 무엇인가를 많이 들여서 은혜받고, 부족하다 싶으니까 안 되니까 뭔가를 갖고 와서 더해서 받고 받고 채우고 채우고 하려는 사람,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은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이 있고, 그리고 선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우리는 타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에베소서에서, 복음서에서, 바울 서신 전체에서,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 그 다음 깨달은 자가 드리는 선한 일. 이것이 바뀌면 곤란합니다. 큰일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선한 일은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선한 일을 하는데 그 앞에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한 말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묵상을 계속하셔야 됩니다.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그리스도 밖에서 하는 선한 일도 있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등장인물이 여럿 나오는데, 거기 나사로가 나오고, 예수님이 나오고, 마리아가 나옵니다. 가룟 유다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 집에 또 가셨습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르다는 일하고 있고,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 발 아래에 앉아서 말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을 예수님 발에 갖다 부어 버립니다. 갖고 오더니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뻥한 것입니다. 다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곁에서 있던 유다가 한마디 합니다. "이 순전한 나드 한 근은 삼백 데나리온치의 나드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는 어찌하여 그것을 허비하느냐." 객관적으로 보면 그 말이 백번 옳습니다. 유다가 말하는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유다가 말하는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했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은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유다에게 줘서 그 손에 들어가면 자기가 아까 먹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갈취하려고 한 것입니다. 유다가 말한 선한 일은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합니다. "가만히 두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두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마리아는 별명이 '예수님 발 아래 여인'입니다. 예수님 발 아래서 항상 말씀 들었습니다. 말씀 듣다 보니까 예수께서 오늘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 마지막인 것을 안 것입니다. 마지막이니까 자기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부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다 쏟아 부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이 낭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분별되어야 됩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이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해야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예산을 쓸 때도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보면 "야, 이 정도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줘 가지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도우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역할 때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청년들이 단기 선교를 갑니다. 청년들이 해외 선교지에 다녀왔습니다. 돈이 엄청 들었습니다. 청년들도 비행기 값 개인들이 부담하고, 교회에서도 아이들 후원하고 해서 몇천만 원 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직접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거 애들 보내지 말고 그 돈 선교지에 주지. 그냥 선교지 주지. 그러면 그것이 가난한 아이들, 거기 필요한 선교사들한테 쓰게 하지." 옳습니까? 그 말이 옳습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 말이 선한 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청년들 갔다 와서 간증하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그냥 한 번에 다 갖다 쏟아부었는데,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이 낭비인 것처럼 보이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그것을 구별해낼 수 있어야 됩니다. 선한 일이라고 해서 다 선한 일이 아닙니다. 유다처럼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느냐. 구원받은 사람,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있는 사람, 진리 안에 있는 사람,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분별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합력해서 함께 선을 이루고 한 방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일인데 가만히 묵상해 봐야 됩니다.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인가. 그러면 돈이 얼마나 들어도 해야 되는 일입니다.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그냥 다 쏟아 부어서 갖다 부어서 해야 되는 일은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 가치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인 것입니다.

2. 화평에 대하여

2-1. 이전의 상태

이제 구원을 지나서 화평입니다. 그때 너희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11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즉 복음이 전해지기 전, 복음을 받기 전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물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이고 무할례자라고 욕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12절을 보면 "그때에 너희는" 구원받기 전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즉 구원의 은혜가 없을 때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다." 이것은 헬라어로 아테오이(ἄθεοι)입니다. 이 아테오이에서 접두어 아(ἀ)는 반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의 접두어입니다. 그래서 아테오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구원의 구주로 받아들이기 전, 구원받기 전 이들의 상태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방인들이었으니까 하나님을 반대했다고 치고,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을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 잡아다 옥에 넘겼던 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 반대하는 사람 없습니까. 중직자 중에는 없습니까. 목사 중에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다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반대하고 하나님 얼굴에 먹칠하는 사람들, 직분자라고 중직자라고 다 깨끗한 것 아니고 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아닙니다.

2-2.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짐

이제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멀리 있던 곳, 어디에서 멀리였습니까. 은혜에서 멀리,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가까워졌는데, 가까워지게 한 동기, 계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바울은 화평을 이야기합니다. 화평이 무엇입니까? 화평, 평화로운 상태를 화평이라 합니다. 평화나 화평이나 같은 말인데, 평화로운 상태를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서로가 싸우지 않으면 화평한 것입니다. 서로가 갈등이 없으면 화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평을 이루는 것에는 무력에 의한 화평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신문지상에서 듣는 '핵억지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핵을 왜 보유해야 되느냐, 핵을 왜 가져야 되느냐, 상대방보다 월등한 핵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가 핵을 가지고 있어도 핵 억지력을 가지기 때문에 핵을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무력에 의한 평화입니다. 무력에 의한 것, 내가 월등하게 힘이 세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힘없는 자가 "그래, 어차피 나 죽을 거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덤벼 보자" 이러면 그것이 화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무력에 의한 화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을 말합니다.

2-3. 막힌 담을 허무심

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은 우리가 이해해야 될 것이 좀 있습니다. 성전,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이방인의 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는 성막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생기면서 생겨난 것인데, 이방인들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딱 그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들어오면 죽을 수도 있다, 조심해라, 들어오지 마라, 유대인들만 출입 가능"이란 표지판을 붙여 두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거기까지입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과 그 뜰을 넘어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그 벽이 '중간에 막힌 담'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서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8절에서 29절, 제가 읽겠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바울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지금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오해한 것입니다. 헬라인을 데리고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에 들어갔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라는 이방인을 데리고 예루살렘 시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지어낸 것입니다.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보니까 이 이방인을 데리고 이방인의 뜰을 건너 성전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이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 없게 하셨습니다. 즉 화평은 무엇입니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화평은 막힌 담을 다 무너뜨리고 허물어내는 것, 그것이 화평입니다.

2-4. 율법의 완성

15절에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폐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율법을 진짜 없애려고 오신 분입니까,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입니까? 완성입니다. 여기서 폐했다는 말은 예수께서 율법을 무시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예수께서 왜 폐하셨을까요. 여기서 폐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본 율법 중에 율법, 성경에 나오는 율법 중에 제일 먼저 제시된 율법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돌판이 두 개 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 사랑, 두 번째 돌판은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고.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을 그토록 좋아하고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했습니까? 이웃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여 구별해 놓고 성전에도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웃 사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사랑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니까 예수께서 실천하지 않는 율법은 이미 화석화된 율법이다, 그것을 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율법을 진짜 실천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라." "네, 알겠습니다." 십자가 진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무엇입니까? 죄 가운데 죽어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집대성, 가장 결정판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자기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화평이라는 것은, 진짜 화평은 율법을 실천으로 옮겨가는 것이 화평입니다. 거짓된 율법을 폐하고 진짜 말씀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화평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평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화평하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화평하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야 되고 우리가 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 말씀대로 행하는 자, 사랑하라 그러면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했으니 말씀대로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수 된 것,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가 미워하고 다투며 살다 보면 서로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그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없애 버리셨습니다. 다 태우셨다는 말입니다.

2-5. 수직과 수평의 화목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먼 데 있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이방인입니다.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똑같이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똑같이 전하셨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우리 둘은 누구입니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 성령"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을 한번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인, 유대인, 종, 자유인 다 한 성령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서로 벽을 쌓아 놓고, 서로 담 쌓아 놓고, 서로 이방인이라고 유대인이라고 종이라고 자유인이라고 서로 차별하고 구별하고 살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다 하나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지난주에 우리가 배웠습니다. 나도 하나님께 선택받았지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저 사람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다 하나라는 말입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면 화평을 이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수직과 수평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과도 화목이 되고, 그리고 형제들과도 화목이 됩니다. 그런데 형제와 화목이 안 되는 사람은 구원이 의심되는 사람입니다. 구원이 정말 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했나 만났나.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구주로 영접하고 만나면 형제와 화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옛날 과거를 내가 다 압니다.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면 당연히 수평적으로도 서로 화목이 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갈등이 있고, 형제자매 간에 다툼이 있고, 싸움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 교회 공동체 안에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아직까지 교회 공동체 안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될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밖에서만 전할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안에서도 전해야 됩니다.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내 구원 자체가 의심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흠뻑 있으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용납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받아주고 용납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2-6. 하나님의 권속

서로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인들은 외인, 나그네로 취급받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권속,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 다음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여러분, 모퉁이돌, 고대 건축에서 모퉁이돌은 정말 중요합니다.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모퉁이돌이 위에서 내려오는 건축물의 하중을 다 받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튼튼해야 됩니다. 두 번째, 정확하게 귀퉁이에 자리 딱 잡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퉁이돌로부터 시작해서 벽돌을 요렇게 쌓아 가니까, 돌을 쌓아 가니까, 기준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이 돌은 튼튼해야 되고 정확하게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튼튼하고 모든 것을 다 받아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 짐을 다 지셨지 않습니까. 또 예수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우리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 그분의 행동이 우리 삶의 기준과 근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돌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오해하시기도 합니다. 제가 그렇게 오해하는 분도 봤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저 구석퉁이에 계시는구나.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나서지 않고 저 구석퉁이에 계시고 드러내지 않고." 성경을 오해해도 제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모퉁이돌은 하중을 다 견디고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모퉁이돌이다, 나의 죄 짐과 나의 고통과 나의 허물까지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다 던져 놨으니까요. 미안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준에 맞춰 살아야지요. 그 기준에 삐쭉삐쭉 튀어나오면 안 됩니다. 삐뚤삐뚤 튀어나오면 그러면 건물 망칩니다. 그대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이사야 28장 16절 말씀,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이것이 모퉁이돌입니다.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시험한 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시험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다급하지 않습니다. 왜요? 내가 진 모든 짐을 그 모든 것들이 다 가져갔으니까요.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나 죽을 것 같아" 다급해서 이것을 막 내려놓을 데 찾지 않아도 됩니다. 또 기준이 있으니까요. 삶의 기준이 있는 사람 얼마나 편합니까. 이 기준대로 살면 되니까요.

기준이 없으니까 문제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눈이 보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내 눈이 좋아 보이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가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 돌, 모퉁이 될 돌 되는 것을 알게 되면 다급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기준이 있고 짐을 맡길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7. 성전이 되어감

그 다음, "그의 안에서" 즉 모퉁이돌 되신 예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했습니다. 이 "성전이 되어간다"는 말에서, 본문에서는 나오스(ναός)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나오스는 성전의 내부 건물입니다. 성전 내부 건물이지 바깥이 아닙니다. 참고로 히에론(ἱερόν)이라는 단어를 쓰면 이방인의 뜰을 비롯한 성전 건물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전의 내부 건물입니다.

그런데 왜 히에론을 안 썼을까요? 이방인과 유대인, 이방인의 뜰이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육체로 그 벽을 다 허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성전이 되어간다, 성전의 내부 건물로, 안으로 들어와서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렇게 나오스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서 중요한 것은 21절에 "되어 간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22절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영광됩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고 합니다. 나 같은 것, 나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또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지어져 간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완성됐다는 말입니까, 완성을 향해서 간다는 말입니까? 성장이 끝났다는 말입니까, 성장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성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정신입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됩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옵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지어져 가고, 성장하고, 자랐는데 그 목표가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비전센터를 입당했습니다. 그런데 비전센터 입당하고 나니까 예쁘고 좋습니다. 거기서 막 계속 살고 싶고, 오랫동안 머물고 싶고 그렇습니다. 지을 때 와보셨습니까? 지을 때, 공사할 때 그때는 들어가면 물웅덩이도 있고 시멘트도 있고 철근도 있고, 들어갈 때 안전모 쓰고 들어가야 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태에서 시공업체가 부도가 났다고 합시다. 공사가 딱 스톱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 1년 지났다고 하면 그 건물이 어떤 건물이 됩니까. 가장 보기 싫은 흉물입니다. 그런 건물 많이 보셨습니다. 짓다가 만 건물처럼 흉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이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멀었습니다. 그런데 부단히 노력하고 부단히 애써서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내 속에 거하실 성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어져 가기 위해서, 내가 성전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노력해 가는 것입니다. 하다가 말면 짓다 만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초라하고 그것만큼 흉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런 흉물로 살겠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그날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지어져 가서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발전해야 됩니다. 멈추는 것은 없습니다. 되었다고 멈추면 안 됩니다. "이제 이쯤 하면 나는 이제 나이도 많아서, 권사 은퇴하고 장로 은퇴하고 다 은퇴했으니 나는 끝났다."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냥 교회에서 주는 직분이 은퇴한 것이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계속해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내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인 성전을 내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만한 자신 있습니까? 자신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면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속해서 그 안에서 자기를 비워가는 훈련하는 것입니다.

2-8. 함께 지어져 감

그 말씀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이 또 중요합니다. 혼자는 힘듭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보면 "아 저 집사님은 저 권사님은 지금 벌써 많이 지었네, 나는 보니까 아직까지 땅 파네" 하면 열심히 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그래서 함께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면 가끔씩 좀 우월감도 느끼고, "하나는 이만큼 올렸는데 저 사람은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쓰러져 있는 사람 힘이 없는 사람 불러다가 "같이 짓자" 하고 이렇게 세워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됩니까. 정말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만들어 가는 교회, 그런 성도들이 다 모인 교회, 분쟁이 있겠습니까? 다툼이 있겠습니까? 싸움이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가정도 그래야 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부모가 먼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야 되고, 자녀들을 그런 자녀로 길러 가야 됩니다. 그것이 분명히 역할입니다. 그것이 우리 어른들의 역할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17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본문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맺는말

정리 한번 해 보겠습니다. 구원받기 전 상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기 전은 비참했는데,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해야 됩니다. 선한 일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화평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 화평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는 성전이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오늘 그 말씀을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은총과 사랑으로 오늘도 교회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세상의 마음을 두고 세상의 사상에 물들어서 살았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건져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한 일을 행하는 우리, 하나님께서 값 주고 사신 한 사람 한 사람을 화평케 하셨사오니, 화평한 가운데 모퉁이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분이시고 우리의 기준이 되시오니, 그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에 부족함 없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어져 간다 하셨사오니 완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게 하시고, 짓다 만 건물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가게 하시고,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열심히 부단히 그 나라를 위해서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멈추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