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4) - 교회와 성도들 (엡4장)
오늘은 옥중서신 에베소서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에베소서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4장이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교회와 성도들'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 하면, 교회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시니 아실 텐데, 교회가 참 힘들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가 너무너무 힘들 때, 교회를 사랑하는데 교회 오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 그것은 바로 교회가 분열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일치를 해야 하는지, 또한 교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표에다 숫자를 써놓고 '몇 명 돌파 대작전'을 펼치며, 한 사람이 몇 명을 데려오면 전체가 몇 명이 된다고 계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진정한 성장일까요?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성장은 과연 그런 것일까요? 오늘은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이 두 가지, 즉 일치와 성장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모름지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도가 나아갈 바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이 중요합니다.
1. 교회의 일치
1-1. 부르심에 합당하게
첫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바울이 부탁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쉽지 않습니다. 만만하게 봤다가는 상당히 어려운 책입니다.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구류 상태에 있으니까 '갇힌 나'라고 표현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이 문맥을 보면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니, 바울이 부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군가 다른 분이 에베소 성도들을 부른 것입니다. 그 누구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개척자일 뿐, 그들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개척 목사가 "내가 너희를 불러서 내가 너희를 키웠으니 너희는 내 종이야"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사이비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악시오스(ἀξίω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어울리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느낌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어울리게 행하라. 어울리게 행하라."
똑같은 단어를 바울이 변주하여 사용합니다. 골로새서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과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에는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는 '주께 합당하게', 데살로니가전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 그리고 여기서는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라고 합니다.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말씀은 "주께 어울리게 행하여",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은 "하나님께 어울리게 행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예수님께 어울리고 하나님께 어울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어울리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어울리고 하나님께 어울린다는 것이 무슨 개념입니까? 내가 예수님 곁에 있을 때, 내가 하나님 곁에 있어서 부자연스러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 곁에 섰을 때 내가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악시오스(ἀξίως), 어울리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죄는 거기에 어울립니까? 내가 죄투성이요, 매일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주께 어울리고 하나님께 어울립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 순결한 신부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울리다', '합당하다'는 말은 내가 그 곁에 섰을 때 과연 자격이 있느냐, 어울리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은혜입니다. 그 감사와 은혜를 진정 감사되게 하려면 그때부터는 정신 차리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어울리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이고,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 가운데 부르셨으니까 대충 살아도 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하며 살면 그것은 구제불능입니다. 성령을 소멸하게 하고, 다시 죄 가운데 빠져드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께 어울리고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려고 계속 애쓰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1절로 돌아오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각자를 부르셨습니다. 일단은 성도 되게 하셨고, 성도 되게 하신 후에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목사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목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어울리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어울리는 것입니까?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목양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심방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어울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목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술자리에 너무 잘 어울리고, 주식 투자에 너무 잘 어울리며, 세상 경제 돌아가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스포츠카 뽑아서 레이싱을 즐기고, 운동광이 되어 옷 핏이 딱딱 맞으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예수에게 어울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각자 직분을 맡겨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어울려야 합니다. 나는 부름받은 일에 어울리는 존재인가? 나의 언행과 능력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사람들이 볼 때 "너는 교회 그만큼 다녀도 우리하고 여기서 술 한잔 하는 게 어울려"라고 하면 신앙생활 잘못한 것입니다. 진짜 잘못한 것입니다. "여기는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라는 말을 들어야 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행해야 합당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남을 높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식이고 성경에 나오는 진정한 겸손입니다. 남을 높이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겸손, 곧 남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는 들떠 있지 않은 사람, 용맹이 없는 사람, 자기 가치관이 없는 사람,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 무기력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힘이 넘치고 에너지가 넘치는데 그리스도에게만 길들여진 야생마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만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오래 참음, 곧 인내도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어울리는 덕목입니다. 그다음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용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너도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입니다.
1-2. 성령의 일치
그다음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성령의 가장 고유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령은 분열의 영이 아닙니다. "저 사람 죽어도 안 봐"라고 하는 것은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그래도 봐야지, 그래도 같이 얼굴 보고 오라고 해야지"라고 합니다. 사탄은 분열시키고 떠나가게 하며 자꾸 쪼갭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꾸 붙이고, 서로 하나 되게 하며, 서로 통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0장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고넬료도 나오고 베드로도 나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데리러 올 테니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것이 세 번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왔습니다. 고넬료에게도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욥바에 있는 피장이 시몬의 집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일치의 영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시고 고넬료에게도 말씀하셔서 서로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고넬료에게만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베드로가 "넌 누군데, 내가 널 왜 믿고 가느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양쪽에 똑같이 말씀하셨으니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일치는 목소리 큰 사람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나오지 않습니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힘써 지키라. 성령은 원래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인데, 이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힘써 지키라, 기도를 힘써 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동전 던지기로 결정합니까? 가위바위보로 결정합니까? 돈 많이 벌어오는 사람 마음대로 합니까? 성질 급한 사람 뜻대로 합니까? 주로 일반적으로 성질 급한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힘써 지키라"고 했기 때문에 힘써 기도하면 성령이 일치되게 하십니다.
힘써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시간이라도 힘써 길게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 해보는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이기 때문에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나쁜 공동체는 기도하지 않고 목소리 큰 사람이 끌고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으니 힘써 지키면서 기도하고 함께 결정해서 나가면 거기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류도 없고 문제도 없습니다.
1-3. 일치의 이유
그다음, 교회가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일치라고 했는데, 이 일치를 힘써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 보니까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5절에 보니까 "주도 한 분이시요"라고 했습니다. 6절에 보니까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4절, 5절, 6절에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성령도 한 분, 예수님도 한 분,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분열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지는 것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피차 다투고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섰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갔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둘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한 길로 갔을 텐데, 싸워서 두 팀으로 나뉘어 복음의 역사가 두 배가 되었으니 싸우는 것이 성령의 역사 아닙니까?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논리가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면, 어떤 지역에 가면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하나의 교회였는데 서로 싸웠습니다.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나갑니다.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옆에 교회를 또 따로 세웁니다. 하나의 교회가 두 개가 됩니다. 그런데 또 남은 사람들끼리 또 싸웁니다. "나간 사람 데리고 오자" 하면 "나갔는데 왜 데리고 오느냐"며 또 싸웁니다. 있는 교회가 또 갈라집니다. 그래서 하나의 교회가 두 개가 되고, 두 개의 교회가 네 개가 됩니다.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경쟁적으로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해서 네 개의 교회가 다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싸운 것이 성령의 은혜입니까? 역사입니까? 잘한 것입니까? 잘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가 안 싸웠으면 그만그만한 하나의 교회였을 텐데, 그때 싸우고 피 터지게 갈라져서 지금 복음의 역사가 네 배가 되었으니, 이 싸움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잊어버리고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실족한 영혼들은 누가 책임집니까? 교회가 싸우고 심하게 갈등하는 가운데 떨어져 간 영혼들은 누가 책임집니까? 그때 그 순간 교회에서 장로들이 멱살잡이하며 싸우는 것을 보고 실망한 젊은 청년들이 "다시는 교회에 발 들이지 않겠다"고 결단한 그 영혼들은 누가 돌아오게 합니까? 그 죄는 누가 책임집니까? 그렇게 해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결과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각한 결과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치되어야 합니다. 싸우면 제일 나쁜 것입니다. 분열하고 다투는 것은 최악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라고 했기 때문에, 서로 힘써 기도하고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여 힘써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7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받으라'는 말이 나오는데, 받으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용납하라,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면 그릇이 좀 커지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저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기도하고 나면 품이 커져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수용하게 됩니다.
옛날에 시집살이 심하게 하고, 남편에게도 애먹이며 고생했던 며느리가 예배당에 와서 금요일 밤 눈물로 밤을 새우고 철야기도를 하면, 집에 돌아가서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 남편 건사하고 아이들 돌보고 시어머니 잘 섬기며 살게 됩니다. 그것이 지지리 복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하니까 마음이 넓어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받으라'는 말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일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용납하고 수용하며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성장
2-1. 은사의 목적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합니다. '은혜'가 신약성경에서는 다양하게 쓰이는데, 여기서는 카리스(χάρις), 곧 은사라고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읽으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나니"라고 읽어야 합니다.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은사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각양 다른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배웠습니다. 12장 7절에서 11절에 나오는데,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또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11절에 보니까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은사는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이야기했고,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은사는 좀 특별한 은사를 이야기했습니다.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복음 전하는 자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 은사를 특별한 은사로 여기에 적어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은사를 가진 자들을 열거해 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 즉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라고 합니다. 첫째,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에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사, 사도, 복음 전하는 자, 교사, 전도자 등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데, 그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헬라어로 카탈티스모스(καταρτισμός)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공급'이라는 의미입니다. 완벽한 공급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사는 성도들이 배고프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이제 좀 그만하세요, 우리가 배 터질 것 같아요, 이제 좀 그만 가르쳐 주세요"라고 할 만큼 완벽한 공급을 계속해서 부어줘야 합니다. 넘치게 부어줘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목사이든 교사이든, 교회학교 교사이든, 말씀을 맡은 자이든,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완벽한 공급, 완전한 공급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준비가 된다는 말은 나도 공급받고 나도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어린 학생들 앞에 말씀을 들고 서는데, 전도사가 말씀을 들고 서는데, 목사가 말씀을 들고 서야 하는데, 내가 채워지지 않고 준비되지 않고 말씀에 대해 확신이 없고 말씀을 모르면 설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내가 공급받고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자격입니다. 그것이 귀중하고 소중한 작업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완벽하게 공급해줘야 하니까요.
공급은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앉아서 여러분이 다수이고 저는 혼자입니다. 일방적으로 제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막 쏟아붓는 자리입니다. 어떤 분은 이해가 전혀 안 되고 그냥 앉아 계신 분, 어떤 분은 반쯤 이해되는 분, 어떤 분은 지금 마음이 오늘 저녁에 할 일에 가 있는 분 등 다 다른데, 그냥 막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식의 공급이 있느냐 하면, 자기가 채워야 할 것을 들고 나와서 물어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은 어때요? 목사님, 이것 제가 잘 모르겠는데 좀 알려주세요." 그러면 그때도 알려달라고 할 때마다 그때그때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맡은 자, 말씀을 맡고 가르치는 자는 자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카탈티스모스(καταρτισμός)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많이 준비시키고 많이 길러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망을 좀 가져야 합니다. 내가 성도로서 나도 완벽한 공급을 할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이고 넣어주고 가르쳐주고 싶다. 교회 성도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라도, 부모라면 모름지기 이것은 넣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 된 역할 아닙니까? 자녀들에게 입에 밥 넣어주는 것만이 부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가 온전하게 되면 그다음 무엇을 할까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봉사의 일은 순서상 온전하게 된 다음입니다. 충만해지고, 그다음 일하는 것입니다. 충만해지지도 않았는데 일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곧 시험에 듭니다. 금방 시험에 들고 금방 지치고 금방 못하게 되고 금방 그 공동체가 엉망이 됩니다. 그래서 더디더라도 성도에게 공급하는 것이 먼저가 되고, 그 공급이 채워진 분들을 보내고 또 보내야 합니다. 현실과 잘 맞지 않아도 그래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이니까 더디더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입니까? 곧 교회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내 평생에 교회를 하나 세운다, 건축헌금을 몇 억 해보겠다, 그것이 교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당 짓는 것입니다. 벽돌 건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당 짓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는 교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고, 구역장이 되고, 말씀을 전하는 정원지기가 되고, 교회학교 어린아이들을 품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면 온전하게 된 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은혜받은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든지 가서 봉사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지금까지 몇 명의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몇 개의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3천만 원만 있으면 저기 선교지에 당신 이름으로 교회 하나 세울 수 있습니다. 칠순잔치, 팔순잔치 하지 말고 그 돈 자녀들에게 달라고 해서 당신 이름으로 선교지에 교회 하나 세웁시다." 좋은 일입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했다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평생 한 사람 붙들고 성도를 온전하게 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어떤 것이 더 어려운 일 같습니까? 사람 하나 붙들고 그 사람을 온전한 성도로 만들어 보셨습니까? 그분에게 말씀 넣어보셨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튈지 어떻게 알고, 사탄 마귀가 갑자기 어떻게 역사할지 어떻게 압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해야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2-2. 성장의 목표
우리가 말하는 교회 성장의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이것이 핵심이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합니다. 바울식의 표현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 믿는 것은 무엇이고 아는 일은 무엇입니까? 믿는 것은 가슴입니다. 믿어져야 하니까요. 아는 것은 머리입니다. 즉 가슴과 머리가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성숙했다, 장성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냉철한 지성으로만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냥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만 성경을 많이 압니다. 많이 읽어서 많이 알아요. 그런데 머리에서 아는 앎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 알고, 용서해야 된다는 것 압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아직 분노가 펄펄 끓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막 뜨겁게 타오릅니다. 그런데 지식이 좀 부족합니다. 성경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열심으로만 막 일을 합니다. 자기 열심으로만 공동체를 휘젓고 일하다 보면 자기만의 방식, 자기만의 복음이 생깁니다.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두 가지가 다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어떻습니까? 과거에 한국 교회가 어땠습니까? 옛날에 1세대, 처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때는 성경을 잘 모릅니다. 글을 읽는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병 고침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역사가 막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거기에 말씀의 지식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이 있습니다. 그래야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말씀을 보시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자라가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성장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장의 두 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은혜와 지식입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은혜와 지식이 성장의 두 가지 조건입니다.
성장하려면 은혜는 방향이 어떻게 됩니까? 아래에서 위입니까, 위에서 아래입니까?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은 무엇입니까?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입니다. 내가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고 내가 배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은 은혜만으로도 부족하고 지식만으로도 안 됩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가 있고, 아래로부터 내가 추구하고 노력하는 지식에 대한 갈구와 지식에 대한 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될 때 성장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바울은 성장한 사람입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은혜에서 시작했습니까, 지식에서 시작했습니까? 바울은 지식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좋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부잣집 아버지를 만나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서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자랐습니다. 또한 로마 시민권자로 자랐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최고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유대인의 율법에 정통하고 능통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뜨거운 지식,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머리를 가득 채웠는데 잘못된 방향을 만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준 사람이 바울 아닙니까? 사울 시절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잡아서 옥에 넘기려고 가다가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가 내려온 것입니다. 지식이 가득 있는데 은혜가 하늘에서 불같이 내려오니까 확 활활 타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식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간 사람입니다. 지식에서 은혜로.
반면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은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배 두 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딱 나옵니다. 배 두 척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베드로의 배라고 했습니다. 하필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왜 오르셨습니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예수님의 선택입니까, 오르다 보니 그것이 베드로의 배였습니까?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두 배 가운데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른 것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베드로에게 먼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니 그물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먼저 받은 것입니다. 한량없는 은혜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만으로는 베드로가 좌충우돌합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번 신앙고백했다가, "주여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귀사탄 소리 듣고 혼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식이 없으니까요. 지식이 없으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고 거기에 지식이 더해지니까 성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장성한 사람, 온전한 사람에게 이르고 성장하라'고 이야기했고, 이것을 똑같은 표현으로 베드로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시작하셨습니까? 어떤 분은 은혜로부터 시작하신 분이 계십니다. 주로 모태신앙이 아닌 분들, 부모 대부터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 모태신앙인 분들은 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건 성장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이 했습니다.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만 있으면 요동합니다. 지식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베드로처럼요. 바울처럼요. 또 감정만 있어도 베드로처럼 요동하고 막 흔들립니다.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합니다. 이것을 제가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사랑은 누굽니까? 사랑의 대명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사랑은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남녀 간의 감미롭고 달콤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때야 합니까? 수고로워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직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오직 예수 안에서 수고롭게 일하라'는 뜻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처절하게 일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로 헌신하고 수고하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합니다. 참된 것이 무엇입니까? 한자어로 말하면 참된 것, 진리입니다. 진리는 어제 이랬다가 오늘 이랬다가 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참된 것을 하여'라고 했으니 진리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행하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대로 행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쉽습니까? 진리대로 사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세상은 진리대로 살지 않게 합니다. 세상은 그때그때 풍조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뀝니다. 세상은 돈 되는 것 쫓아가고, 인기 되는 것 쫓아갑니다. 그런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말씀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수고 안에서, 진리 안에서 살아가면 자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어디까지 성장합니까?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왜 성장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치우쳐 있거나 지식에 치우쳐 있습니다. 치우쳐 있으면 성장이 안 됩니다. 노 저어 보셨습니까? 배의 노 하나만 가지고 저으면 제자리에서 계속 뱅글뱅글 돕니다. 양쪽 노를 같이 저어야 앞으로 갑니다. 성장하려면 은혜와 지식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만 있어서입니다.
또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지 않아서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고 진리 안에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때그때 자기 욕망대로, 자기 돈 되는 대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 성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성장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성장은 무엇입니까? 천 명 돌파, 2천 명 돌파, 3천 명 돌파, 숫자가 몇 명 되면 예배당 더 크게 넓히고 더 크게 짓고, 사람 숫자에 따라서 헌금 계산하고, 그 헌금에 따라서 교회는 어떻게 하겠다. 이것은 세상 기업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외형적인 성장은 하나님이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성장을 주시면 거기에 맞춰서 교회가 옷을 갈아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 성장은 성도의 성장입니다. 내가 곧 교회이기 때문에, 당신이 곧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지식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서 열심히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냥 예배당 크게 지어서 좋은 좌석에서 편안하게 예배드리려고 몇 천 명이 모인 그런 교회와, 이렇게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한 열 명의 교회와, 어떤 교회가 더 강력한 교회겠습니까? 일당백, 일당천입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장을 추구하고 그런 성장을 갈망해야 합니다. 나도 그렇게 성장해야 하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교회 성장을 이야기할 때 수적 성장을 이야기하면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수적 성장은 따라오는 것이고, 안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성장되면 숫자가 늘어나는 대로 옷만 바꿔 입으면 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성도들이 많이 모이면 헌금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고, 헌금이 늘어나면 그것으로 우리가 불편하게 예배드릴 수 없으니 예배당 새로 짓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진짜 자랑해야 할 것은 이런 성장이 우리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느냐, 나는 그런 성장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길러내고 있는가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건강도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2-3. 균형 있는 성장
"자랄지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헬라어 단어를 한번 보겠습니다. 아욱사노(αὐξάνω)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주 쓰는 단어입니다. '균형을 이루어 성장하다'라는 뜻입니다. 아욱사노(αὐξάνω),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울 신학에서는요. 그런데 신약성경 곳곳에 이렇게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라고 할 때, 보통 우리는 아기가 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아기는 그냥 몸집이 자라면 자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을 아욱사노(αὐξάνω)라고 했습니다. 균형을 갖추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균형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지식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3장 19절을 보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라'도 아욱사노(αὐξάνω)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겨자씨 한 알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라나려면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은혜와 지식 안에서 같이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자라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왕성하여'도 아욱사노(αὐξάνω)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균형을 갖춘 말씀입니다. 은혜도 있고 그 안에 지식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균형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2-4. 성장의 요소
그다음, 성장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장의 요소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회를 망친 주범 중 하나가 교회 성장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회에서부터 198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학문 중에 교회 성장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성장학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그것을 가르칩니다.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3P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가 Pastor, 목사입니다. 두 번째가 Prayer, 기도입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동의한다고 합시다. 세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Parking, 넓은 주차장입니다.
그것이 참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칩니다. 신학교에서요. 넓은 주차장이 있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진짜 넓은 주차장이 있으면 교회가 성장할까?"라고 물으면 그것은 주객이 뒤바뀐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보면 성장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이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에게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몸이" 온몸의 지체가 우리입니다. "각 마디를 통하여" 각 마디가 중요합니다. "도움을 받으며" 마디가 무엇입니까? 관절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입니다. 사람 몸의 머리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인데 각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며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무릎 관절을 통해서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무릎 관절이 없으면 종아리 따로 놀고 허벅지 따로 놀면 그것이 사람입니까? 이상합니다. 괴기스럽습니다. 무릎 관절이 있으니까 연합되고 결합되는 것입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마디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디가 무엇일까요?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디는 몸의 지체와 지체를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 아닙니까? 교회의 그런 존재들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교회의 관절 같은 존재인가? 나이 들어가면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관절 아픈 것 아닙니까? 앉을 때마다 "아이고" 소리 내는 것이 관절 때문입니다. 고관절 아프고, 무릎 관절 아프고, 손가락 관절 아프고, 다 관절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교회도 관절에 문제가 생기면 각 마디가 지체를 통해서 도움을 못 받는 것입니다.
새 가족과 오래된 분들을 연결하는 관절, 누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까? 교회 장로들이 하는 것 아닙니까? 권사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 안수집사들, 중직들, 교회 목사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권사들이 교회 오면 자기 친한 사람들하고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낯선 사람하고는 한마디도 안 하고 집에 가면 그것이 무슨 관절 역할입니까? 권사들은 낯선 사람 찾아다니면서 "나는 관절이니까, 나는 관절이니까" 하고 다녀야 합니다.
관절이 각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못 주면 교회가 관절염에 걸린 교회, 류머티즘에 걸린 교회가 되고, 교회가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맨날 삐걱 소리 나고, 그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그래서 교회가 정말 성장하기 위해서 중요한 요소는 관절들입니다. 우리 관절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약간 밀려나 있는 사람, 상처 입은 사람, 그런 사람을 살펴서 다시 안으로 끌어오는 역할, 그 관절의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렇게 열 발 나와 있으면 나중에 턱 빠져서 죽겠다"라며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그 관절 역할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관절의 역할을 잘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관절은 서로 동역자입니다. 몸을 정말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동역자입니다. 지금까지 관절 역할을 잘 감당하고 살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삶
3-1. 영적 감각
자, 이제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결합된 성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이방인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19절만 보시면 됩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합니다. '감각 없는 자'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제일 중요합니다.
몸에 감각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뜨거운 것이 손에 부어져도 뜨겁지 않으면, 손이 익어가도 모르면, 칼에 베어도 아프지 않으면, 큰 병 아닙니까? 내 마음에 성령님이 계신다, 계시지 않는다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방언을 한다, 못 한다가 아닙니다. 성령이 계신다, 계시지 않는다는 분별은 찔림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제가 방금 관절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팍 찔려야 합니다. "내가 관절염의 주범이었구나, 내가 우리 교회 소통을 막는 주범이었구나" 하고 찔려야 합니다. 찔림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성령께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각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을 방탕에 방임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감각이 없으니까 아무리 성경 공부하고 아무리 설교 들어도 감각이 없으면 그냥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적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감각은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찔림이 없으면 그때부터 금식하셔야 합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작정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진짜 심각한 것입니다. 너무너무 심각한 것입니다.
3-2. 벗고 입는 삶
자,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감각 없는 자같이 배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절 끝에 보면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반대말이 나옵니다. 벗고 입으라. 벗고 입으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앞에 말과 연결하면, 영적 감각이 살아있으면 벗고 입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찔림이 있으면 즉시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즉시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찔림이 있으면, 영적 감각이 살아있으면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돌이킴입니다. 찔림이 있는데 실컷 울었는데 벗지도 않고 입지도 않으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알고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이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성도들은 감각을 가지고 벗고 입기를 잘해야 합니다.
그 뒤에 3번은 제가 할 말이 좀 많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가르쳐 주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으니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힘써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습니까? 얼마나 많이 울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애통해 했습니까?
주여, 우리가 힘써 지키기 위하여, 일치를 위해서 더 많이, 더 깊이, 더 오래, 더 뜨겁게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성장은 우리는 숫자만 성장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은혜와 지식 안에 자라가기를 원하오니 아버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우게 하시고,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씀하셨사오니 그렇게 성장하고 자라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각 마디가 되어서 서로가 소통하는 데 원활한 관절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관절에 소통이 일어나지 않아서 관절염 있는 교회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소통에 능한 좋은 마디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도로서 영적 찔림 있게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정말 좋은 성도가 되어서 벗고 입는 생활을 성실히, 충실히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