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 빛의 자녀들 / 전체녹취

옥중서신 5강 빛의 자녀들 (엡5장)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함께 살펴본 내용은 교회와 성도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내용, 어렴풋하게 또 대충 알고 있었던 내용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두 가지를 설명했는데, 첫째로 교회는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성령은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간절히 구하면 교회가 일체를 이루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데, 교회 성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 것처럼 건물을 크게 짓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형의 성장은 그다음 이야기이고, 가장 중요한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도 각자의 믿음의 성장이 교회의 성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베드로 식의 언어로 표현하면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다음 내가 노력해서 알아가는 지식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될 때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치와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의 삶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베소서 말씀은 쭉 올라가서 4장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교회를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1. 공동체 안에서의 삶

그래서 오늘은 4장 말미의 이야기와 5장의 빛의 자녀들 된 성도의 삶을 다루겠습니다. 우리 교재 24쪽을 보시면 3번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성도들은 공동체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몇 가지가 나옵니다. 네 가지 정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25절을 보니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1-1. 거짓을 버리라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거짓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거짓을 말할까요? 교회에서 남을 속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을 말할 때는 목적이 있을 때입니다. 남을 이용해 먹으려고 할 때, 이 사람을 통해서 뭔가 목적을 이루고 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고 할 때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목적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지, 왜 굳이 머리 써가면서 거짓을 말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것, 곧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있는 그대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있는 그대로 대우받고,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1-2. 분노를 다스리라

두 번째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다 뒤집고 다 내쫓으셨는데, 거룩한 분노는 품어도 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노해 보셨습니까? 분노하면서도 정신 바짝 차리고, 분노가 거룩의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시작은 거룩하게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이거 바로 잡아야 되겠다'고 해서 분노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말도 거칠게 나가고 행동도 거칠어집니다. 또 분노가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수습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뒤처리 하기가 힘듭니다. 출구 전략이 모호해집니다. 분노했는데 그다음 날 갑자기 웃고 나타나기도 좀 어렵고, 이 뭔가 분노를 마무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나의 컨셉은, 나의 인간성은 계속 환한 얼굴로 있어야 하나, 계속 분노하고 있어야 하나, 이게 참 마무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분을 내더라도 그날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과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끝내야 합니다. 또 분노는 마귀가 틈타기 가장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분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의와 온갖 탐욕이 공동체 안에 차고 넘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분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로 해결됩니까? 시스템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속에는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있되, 이것을 지혜롭게 잘 해소해 나가는 좋은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한번 불 일듯 분노를 확 낸다고 해서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조직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들고, 구조를 만들고, 틀려먹은 것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과 연대해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더 지혜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더 겁납니까? 소리 크게 지르는 사람이 겁납니까? 아니면 조용조용 차근차근 하나둘씩 고치고 개혁하는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까? 후자가 훨씬 더 무섭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 가야 합니다. 분노한다고 달라지는 것,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귀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1-3. 도둑질하지 말라

세 번째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재미있게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질하지 말라' 하면 되는데,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면 이 말은 에베소 교회 안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을 다 알고 있는데, '너희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는 도둑질하지 마'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도둑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지갑 도둑 맞아 보셨습니까? 가방 도둑 맞아 보셨습니까? 있겠지요. 물론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 본 적이 있으니까요. 헌금 도둑도 있고, 가방 도둑, 지갑 도둑, 옷 도둑 다 있는데, 그런 도둑 말고, 그런 큰 도둑, 그런 진짜 경찰서 가야 되는 도둑도 있는데, 또 다른 도둑들도 많습니다.

교회 안의 그중에 한 도둑이 시간 도둑입니다. 시간 도둑질 당해 보셨습니까? 시간 도둑질. 지금 제가 여러분들을 여기 묶어 놓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 예배드리려고 왔는데, 목사가 성도들을 불러서 이 자리에 앉혀 놓고 엉뚱한 소리, 딴 소리, 딴 나라 소리, 이 나라 소리, 저 나라 소리, 자기 신변잡기 이야기 다 하면 그것이 시간 도둑질입니다. 그것이 도둑놈입니다. 말씀 준비 제대로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하고 이상한 이야기하면 그것이 시간 도둑 아닙니까? 아까운 시간, 그 시간에 잠이나 자지, 밥도 못 먹고 이 자리에 와 있는데, 그것이 시간 도둑입니다.

또 약속 시간 정해 놓고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그것도 도둑놈입니다. 시간 정확하게 안 지키면 시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칼같이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도둑질이거든요.

또 교인들이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을 하면 그 헌금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보기에 아름답고 귀하게 쓰여져야 하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결정권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써 버리면 속상해 죽겠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도둑입니다. 도둑입니다. 훔쳐서 자기 주머니에만 넣어야 도둑이 아니고, 그것도 도둑입니다. 그런 유형의 도둑들이 에베소 교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라. 남의 시간을 훔치지 말고, 하나님 교회에 드려진 헌금을 귀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1-4. 말을 조심하라

네 번째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말이 더러운 말입니까? 뒤에 나옵니다. 그것은 오늘 5장에서 다룹니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치의 교회, 성장하는 교회, 믿는 것이나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성장하는 교회 성도들이 되려면 말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되는 말, 서로를 세워주고 덕이 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위의 네 가지 행동들은 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곳인데, 거짓을 말하거나, 도둑질하거나, 분노를 일삼거나, 말을 함부로 하면 교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기쁘게 하고 성령을 복되게 해야지,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 되겠습니까?

32절을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이 '서로'라는 말을 굉장히 자주 씁니다. 저는 이 말씀 중에 '불쌍히'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 성도들을 보면 좀 불쌍하게 생각해 줘야 합니다. 이 목사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좀 하셔야 합니다. 또 옆에 우리 집사님들, 권사님들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좀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고 불쌍한 마음으로, 주일날 교회 이렇게 차 끌고 올라오다 보면 그 땡볕에 주차 봉사하시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좀 있어야 합니다. 고생한다, 애쓴다, 불쌍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오늘 왜 이렇게 짜? 이따위로 밥해 가지고"라고 하면 이것은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노동력을 가지고 이렇게 수고하는 것을 가지고, 바깥에서 식당에서 일하면 돈이라도 벌 텐데, 교회 와서 저렇게 땀 흘리고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불쌍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입니다.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항상 상호적입니다. 서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 주고,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라는 것,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2. 빛의 자녀들

이제 5장으로 들어갑니다. 빛의 자녀들,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안에 거하는 자녀들,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다 빛의 자녀들 아닙니까? 빛의 자녀들은 어떠해야 하는가?

2-1. 하나님을 본받으라

1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가끔씩 바울이 쓴 편지글을 보면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우리 지난주에도 봤지 않습니까? '자라라, 어디까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지라.'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누구를 본받으라고요?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 본받는 것이요. 바울이 가끔 그랬거든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지, 바울처럼 열심히 복음 전하고, 바울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이것은 가능하다 칩시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받으라니요?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우리에게 원형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형상이라는 말이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우리가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본받는다', '본 뜬다'고.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틀이었고, 하나님을 틀로 해서 찍어낸 존재입니다. 그 틀이 있었습니다. 모형틀, 하나님의 외모대로 찍어낸 존재인데, 죄가 그것을 가려 놓은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 형상이 온데간데없어졌는데, 이제는 죄가 극복되고 나면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찍어낸 그것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너희는 회복하는 자가 되라, 원래 그 은혜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원래 그 하나님의 원형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출애굽기 3장 7절과 8절입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보고 계십니다.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듣고 계십니다.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나타나고, 8절에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고, 알고 계셨고, 이제는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 내시겠다고 행동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요.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한번 적용시켜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에, 교회 공동체 안에 고통받고 힘겨워하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 그런 분들을 우리도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또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들의 고통을 내가 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 내가 귀를 좀 기울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내가 알아줘야 합니다. 알아주고 수고한다고 격려하고 위로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그 자리에 뛰어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고, 그것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 빛의 자녀들은.

2-2.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으라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달콤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피비린내 나는 사랑입니까? 후자입니다. 피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온몸의 피가 다 흘렀으니까요. 피비린내 맡아 보셨지요? 우리 코피 흐르면 피비린내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 피가 아니고 피가 다 흘러내렸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를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달콤하거나 감미롭거나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고, 남녀 간의 그런 로맨스가 아니고, 아주 처절하고 뜨거운 사랑입니다. 빛의 자녀는 그 사랑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던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2-3. 음행과 탐욕을 경계하라

3절을 보니까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음행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누군가가 음행의 죄를 짓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 스스로 "나는 요즘 음행의 죄를 짓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신 나간 사람 아니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어. 나는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만났네. 내가 이제서야, 나이 50이 되어서야 내가 이제서야 진정한 사랑을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음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는 그 사랑과 지금 여기서 말하는 음행, 이것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중심적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랑이 잘못된 사랑으로 변질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음행입니다.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사랑의 끝이 탐욕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채우려고 하는 것, 그것이 탐욕입니다.

앞의 사람과 너무 비교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고, 듣고, 알아주는 사랑,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피비린내 나면서 자기를 버리는 사랑인데, 지금 이 사랑은 자기 중심적 사랑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사랑,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사랑, 자기 욕망을 채우는 사랑,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4. 말에 대하여

그다음 말에 대해서입니다. 4절을 보면 "누추함과"라고 했는데, 이 '누추함'이 좀 그렇습니다. '이 집이 누추하다'할 때의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추하다는 말은 음설을 말합니다. 음담패설 좋아하는 분들 있지요? 앉기만 하면 그것을 말하는 분들,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빛의 자녀는 그것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입 밖으로 더러운 것은 내뱉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거든요. 자기 마음에 그것이 들어 있으니까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음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말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말은 허무한 말을 말합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를 만나서 떠들었는데, 공허하고 허무하고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고, 힘만 빠지고 그냥 에너지가 확 소실될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사람과 만나서 믿음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고, 서로 교제하면 막 충전되고 채워지는 경험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성도는 그런 말을 해야지, 허무한 말 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로 희롱의 말이 있습니다. 희롱의 말은 날카로운 말입니다. 날카롭다는 뜻입니다. 남을 찌르고, 남을 쏘는 말, 남의 약점을 잡아서 집요하게 공격하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을 말의 도마에 올려놓고 계속해서 던지는 사람, 불편하지요? 그런 분들,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될 말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를 보니까, 음담패설 하지 말고, 빛의 자녀는 또 허무한 말 하지 말고, 또 남을 공격하는 말 하지 말고, 어떤 말 하라고요?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하다'라는 말이요, 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라는 헬라어를 썼는데요, 그냥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아니고,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표현할 때 유카리스티아라는 말을 씁니다. 즉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를 자주 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 하지 말고, 모든 것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도 훈련입니다. 그런 말 절대로 내뱉지 말라고 했습니다.

2-5. 기업을 얻지 못하는 자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음행하는 자, 자기는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음행인 자, 더러운 자, '더럽다'는 말은 아까 앞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식의 말이 말이 뭐가 대수라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냐가 내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의 표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 조심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 조심하라고 계속 핀잔 주고, 혼내고, 뭐라 하고, 달래고, 어르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평생 말 조심 안 되고 말 가려 못 하는 사람은 마음의 주인이 안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주인이 평생 동안 음담패설과 나쁜 말을 입에 달고 살고, 남을 상처 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음행하는 자, 말 함부로 하는 자, 탐하는 자,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여기 없지요. 그런데 바울은 이랬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즉 돈을 사랑하는 것이 만악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들이 여기에서부터 다 시작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는 것,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심각하지요?

그래서 빛의 자녀들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정리하면, 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의 자녀들은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하지 말아야 될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 음행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아서 말이 함부로 나오는 것, 그런 것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2-6. 헛된 말에 속지 말라

이제 이런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6절에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야, 너 맨날 성경만 보고, 예수 믿어서 뭐가 좋으냐? 너 위해서도 좀 살아야지. 너처럼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 사람들이 막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친구 잘 사귀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곁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민수기 16장 1절과 2절을 보면 모세에게 반역한 일당들이 나오는데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 고라 나오지요? 유명한 고라입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당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 명이 당을 지어서 몇 명을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서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250명을 포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세를 거스르면서 이 250명을 포섭한 데에는 명분이 있습니다. 아까 고라가 레위 자손입니다. 그런데 아론도 레위 자손 아닙니까? 레위 지파입니다. 모세도 레위 지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론의 아들들도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나머지 레위 자손들은 성막에서 수종 드는 사람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볼 때는 우리는 아론과 모세와 그 아들들을 그냥 심부름하는 심부름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 가져오라 하면 이것 가져오고, 저것 가져오라 하면 저것 가져오고, 기분 나쁜 것입니다. '나는 쟤보다 나은데' 이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생기고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당을 지어 가지고 말하기를 "우리도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과 대화하시는데, 모세가 그랬습니다. "너희가 지금 선을 넘었다." "지나치다"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계속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250명에게 향로를 다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불이 담겨 있는 향로를 다 들고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250명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고라, 특히 그중에 핵심이 되는 고라는 자녀들, 아이들, 가족들과 다 함께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16장 32절, 33절, 35절을 보시면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상상해 보십시오. 가만히 있는데 땅이 쩍 벌어져 가지고 눈앞에 있던 고라와 그의 가족들이 다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250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에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250명을 불살랐더라." 다 불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250명이 죽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친구 잘못 사귄 것입니다. 여기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 내가 누구와 함께,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말을 섞고,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신앙생활하고, 내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일궈 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냥 친하고 친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식구들 전체의 운명이 다 걸린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 정도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이 사람들이 자기 친한 사람 세 명이 250명을 포섭했습니다. 이 친한 사람들한테 이래라 했으니까, 그래도 이 사람에게 힘을 좀 실어줘야 되니까, 들어보니까 모세가 좀 너무했네, 아론이 너무했네, 이런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가지고 같이 이렇게 있어 준 것입니다. 그 대가로 다 죽었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남이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내 영혼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까? 내 영혼의 문제가 중요합니까? 지금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사느냐, 나는 곁에 누구를 두어야 하느냐 하는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자기 주장 없이, 평생 동안 자기 독립된 신앙 없이, 그냥 끌면 끄는 대로 끌려가고, 오라면 오는 대로 달려가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지옥 가면 따라가시겠습니까? 이 사람들처럼요. 내가 하나님 앞에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믿음의 심지를 딱 가지고 서야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다 틀린데 그냥 따라가 주면 같이 죽습니다.

그러면 위로는 할 수 있지요. 위로도 하고, 권면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 등도 두드려 주고, 그럴 수 있지요. "고라, 네가 속이 많이 상했구나. 많이 힘들었겠네. 내가 모세 할아버지한테 같이 가 줄 테니까, 가서 기도 한번 받자. 그리고 한 3개월 쉬어라." 뭐 이렇게 친구가 이야기해 줘야지, 그것이 뭡니까? 같이 다 죽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다. 함께 딸려 들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2-7. 빛의 열매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빛의 자녀들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이제는' 이렇게 구분이 되어 있지요? 어둠, 빛, 이것이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창세기 1장 3절 생각나야 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창조 이전은 흑암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후에 첫째 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탁 생겼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를 우리 인생에 대입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우리는 창조 이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흑암이었으니까요. 캄캄한 어둠이었으나, 태어났으나 거듭나지 않은 그냥 어둠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이 사는 것입니까? 돈 좋아하고, 내 육신의 쾌락을 따라 살고, 그러다가 어디 쓰러져 죽거나 말거나, 그렇게 그냥 살다가 끝나는 인생입니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빛이 왔으니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거듭났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가 있습니다. '빛의 자녀'를 헬라어로 테크나 포토스(τέκνα φωτός)라고 이야기하는데, 빛의 자녀들처럼 행동하면, 즉 빛을 계속 받아가며 살면 열매가 맺히는데,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느니라." 이 세 가지가 빛의 자녀가 가지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어둠 속에 살면 얼룩이 안 보이지요?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머리 모양이 어떤지, 캄캄한데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냥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딱 들어오면 다 보이니까 옷매무새를 만지고, 고치고, 자기를 살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쭉 살면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가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선함, 의로움, 진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선함이라는 것은요, 이 세 가지 다 관계입니다. 선함을 보십시오. 아가토시네(ἀγαθωσύνη)라고 되어 있지요? 착함, 모든 착함, 어질고 관대한 모든 행실, 행동입니다. 여러분, 그냥 이것은 태어나기를 착하게 태어났다, 선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빛의 자녀로서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행동이 그 사람이 볼 때 착하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인정할 때 착하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을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다음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나는 의롭지 못한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의로워졌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의로운 자입니다.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또 진실함은 내가 나를 볼 때,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이 나에게 부끄러움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열매는 타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시험하다, 이것은 '조사하다', '면밀하게 살핀다'는 뜻인데요, 해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해보라는 말입니다. 빛 가운데서 해 봐라. 어둠 가운데 들어가지 말고 빛 가운데서 살아보고, 말씀대로 한번 행동해 봐라. 그러면 너의 인생에 주변 사람들이 너를 착하다고 이야기하는지 안 하는지 그렇게 한번 살아봐라.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 그렇게 한번 살아봐라. 너 스스로 진실함으로 뿌듯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렇게 해보라는 말입니다.

진짜 그렇게 해 보면 이 세 가지 열매가 우리 인생에 맺히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보셨습니까? 아마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다 보면,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평가의 기준이 아주 호의적이고, "아, 저 사람 참 착하다. 저 사람 참 사람이 좋다. 저 사람 참 괜찮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요. 하나님도 그렇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느껴질 것입니다.

2-8. 어둠과 거리를 두라

이제 11절을 보시면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참여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 말은 거리를 두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에 거리를 두라고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즉 우리가 거듭나기 전 상태, 아직까지 흑암의 상태, 거기에는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우리를 그쪽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자꾸만 그쪽으로요. 아까 말했지요? 허무한 말, 그런 말 자꾸 하게 하고,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 악한 영이 자꾸 거하게 하여 음담패설이 입으로 나오게 하고, 남을 찌르고 쏘는 말을 자꾸 하게끔 합니다. 그런 것 하지 말고 거리를 두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3. 세월을 아끼라

이제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여러분, 이제 성도로서 이런 삶을 살려면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분별력은 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잘 살펴서 분별이 있어야 하는데, 주의하여 지혜를 가져라고 했습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 많이 들어보셨지요? 16절,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 '세월' 많이 들었지요. 크로노스(χρόνος)가 있고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있는데, 크로노스는 연월일시분초에 쓰입니다. 크로노스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월은 그런 분초의 시간이 아니고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즉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언제 경험합니까? 예배드릴 때입니다. 은혜를 푹 받을 때,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나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시간은 시간이 금방 갑니다. 방언 기도하시는 분들, 기도 얼마 한 것 같지 않은데 한두세 시간 훌쩍 지나갑니다. 그 시간이 은혜받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맥락 없이 그냥 똑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세월을 아끼라", 이 말은 '세월을 사라'라는 뜻입니다. 사다, '사다'입니다. 여기 '아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엑사고라조(ἐξαγοράζω)인데, '아고라조(ἀγοράζω)'가 '사다'라는 뜻이지요. 사다, 선점하다, 먼저 점령하다, 사다. 그러면 이 말을 바꾸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먼저 차지하라'는 뜻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즉 신적인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을 네가 먼저 차지해 버려라,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자,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사는 것은요, 뭔가를 줘야 이것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사다'는 말은 흘러가면 그냥 다 흘러가 버릴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베드로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평생을 그물 던지며 어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 베드로는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지고, 새벽이 되어서야 그물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고, 자고, 또 오후에 나오고, 그런 세월을 계속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아버지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예수님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앞으로 올 크로노스의 시간을 판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행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 것입니다. 그 시간을요. 자기에게 있을 수많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다 정리하고 예수님과의 동행의 시간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었지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지요? 영원히 하나님의 시간 안에 머무르게 되었지요? 그것이 베드로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그렇게 초대받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 유대인의 관원이요, 젊고 부자이기도 합니다. 다 갖췄습니다. 이 부자 청년도 예수님께 초대받았습니다. "네가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기회를 사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의 제자가 될 기회를 내가 주니 너는 나를 따르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라고 하셨는데, 이 청년이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다시 크로노스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왜요? 그것이 아깝습니다. 시간이고 돈이니까요. 그 시간 안에 있기만 하면 더 부자가 되니까요. 그 시간 안에 있기만 하면 그는 더 큰 권력을 가지니까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혜롭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하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앞으로 우리 인생에 몇 년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백세까지라고 보면, 뭐 요즘 백수(百壽)하면 진짜 장수하는 것이니까, 보험도 백세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치매 안 걸리고요, 맑은 정신으로, 건강한 육체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살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얼마 남았을까요?

얼마입니까? 앉고 일어설 때 "아이고" 소리 나지 않습니까? 막 무릎이 두두둑두두둑 하고요. 그렇지요? 식당도 어디 바닥에 앉는 식당 못 가지요? 의자에 앉아야 하고요. 그런 것을 보면 이제 다 된 것입니다. 이제 다 된 것입니다. 다 돼 가는 것입니다. 다 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살 때요,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품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사람들이 꼭 자기 수준에 따라서 삽니다.

하나님의 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어떤 일이 가장 귀할 것 같습니까? 가장 진짜 내가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데,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사야 될 것 아닙니까? 기왕이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을 살리는, 그 생명을 키우고, 생명을 양육하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시간을 팔아서요.

그런데 갈수록, 교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워낙 바쁘니까요. 구역장 하는 것 힘들어합니다. 힘들어요, 진짜 힘듭니다. 워낙 종의 분들이 바쁘시니까요. 일대일로 성경 공부하는 것도 힘들고, 말씀을 먹이는 것 힘들고, 교회학교 교사하는 것 다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귀한 것입니다. 기왕의 크로노스를 팔 거면, 카이로스를 살 거면, 예수께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으니까, 그것을 사셔야 합니다. 거기에 대한 욕심이 좀 있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욕심, 전도하는 것, 복음 전하는 것, 어린아이들 먹이는 것, 돌보는 것, 그 일에 전념해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시기는 우리에게 진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크로노스의 시간 팔아서 사고 싶어도 아무도 내 크로노스를 안 삽니다. "야, 너는 이제 뼈에서 소리 나는데 네 시간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3-1. 주의 뜻을 분별하라

17절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진짜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주의 뜻이고,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진짜 카이로스를 선택했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또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데, "술 취하지 말라 그랬지, 뭐 마시지 말라는 말은 없으니까 취하기 전까지만 마시면 되지요"라고 합니다. 저 그런 말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체질적으로 안 취해요. 목사님, 막소주를 먹어도, 3일 내내 먹어도 저는, 저희 아버지부터 할아버지부터 그래서 저는 안 취해요"라고 합니다. 안 취하면 더 걱정입니다. 그것이 안 취해서 걱정이지, 한 잔 먹고 그냥 확 골아떨어져야 하는데요.

이것은 그냥 마시는 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중독적인 증세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카이로스를 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크로노스의 시간에 술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락에 취해 있고, 자기 취미에 취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취해 있고, 자기가 즐기고 있는 일에 다 취해 있습니다.

사람들은요, 모두가 다 바쁘다고 합니다. 전부 다 바쁘다고 합니다. 전부 30대 초반, 20대 후반 청년들이 얼마나 바쁩니까? 너무너무 바쁘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연애하면 안 바빠요. 연애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굉장히 많아요. 그 우선순위가 전부 거기에 가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운동 하나에 꽂혀 보세요.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크로노스의 시간은 다 거기에 가 있습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 가지고 신적인 시간, 하나님의 시간을 사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다 시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나오지요? '방탕'이라는 단어를 정의해 줍니다. 아소티아(ἀσωτία), 행동의 결과에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입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데 결과가 어찌 될지 아무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다가 크로노스의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신적 시간 카이로스를 사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신경을 안 쓰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요. 그것이 무절제, 그것이 방탕입니다.

3-2. 성령 충만을 받으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성령 충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입어야 될 이유가 마태복음 12장 43절에서 4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이것은 귀신이 하는 말입니다. 귀신을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거든요. 귀신이 가지 돌아다니다가 갈 곳이 없어 가지고 "내가 나온 내 집"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 다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까지 되어 있거든요.

예수께서 쫓아내셨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빈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성령이 계셔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말씀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귀신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비우는 것입니다. 도 닦아 가지고, 면벽 참선해 가지고 계속 비우라고 합니다. 욕심도 비우고 뭐도 비우고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비우면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옵니다. 비는 순간 들어옵니다.

비는 순간 우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채우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령이 들어오면 귀신이 떠나가고, 악한 것이 떠나가고, 내 자아가 떠나가고 죽고, 성령이 충만해지면 어떤 귀신도, 어떤 악한 영도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사람의 특징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카이로스의 신적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중에 가장 존귀하고 중요한 시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빛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 가방만 들고 다니면 뭐 합니까? 자기 취미에 취하고, 그 방탕함에 취해서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무절제하게 살아가는데, 천년만년 살 줄 아는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시간 동안 정말 중요한 영혼 하나 살리는 일에, 그 사람 하나 붙들고 말씀 전하고 먹이고 돌보는 일에,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삽니다. 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의 증거가 여기 나오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니, 뭐 나는 노래도 못 하고", 음치는 성령 충만하면 노래도 갑자기 잘해지는 건가요? 그런데 그 말이 아닙니다.

자, 성령 충만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은요, 이 신적 언어로 노래를 하게 됩니다. 대화를 하게 됩니다. 자, 부부가 예를 들어 부부가 있는데, 이 부부 둘 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들이, 그런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가 이런 노래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화가 이런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그런 교회 공동체가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 아닙니까?

그러면 "사사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며

빛의 자녀들은, 그래서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성령의 사람은, 빛의 자녀는 흘러가는 시간을 팔아야 합니다. 그것을 팔아서 신적인 시간을 사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 있는 인생을 성령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이 5장에서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가정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나오고,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 이야기가 나오고, 영적 전투 이야기를 끝으로 에베소서는 마무리가 됩니다. 다음 시간에 부부 이야기부터 다시 이어서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빛의 자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니 너희가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고 살아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의 말씀을 그대로 듣습니다. 세월이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팔아 하나님의 신적인 시간 카이로스를 사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처럼 갈릴리 호숫가에서 의미 없는 고기잡이에 정리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신적 시간으로 뛰어들어간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런 기회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리석게 기회를 놓치고 방탕하며 나를 방임하여 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술 취하는 것처럼 취미에 취하고 오락에 취하고 자기 생각에 취하고 이 세상 안락에 취해서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시간의 귀한 청지기가 되어서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영혼 살리는 일에 전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