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영적 전투 / 전체녹취

옥중서신 (6) 영적 전투 (엡 6장)

에베소서가 오늘로써 끝이 납니다. 에베소서의 핵심 주제가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우리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하는가. 1장부터 쭉 상승해 오다가 4장에 가서 교회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거기서 교회의 일치를 이야기했고, 4장은 교회 성장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교회의 성장은 숫자가 늘어나고 건물이 커지는 성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고 닮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성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장성한 믿음의 백성들을 5장에서는 빛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5장 말미부터 6장 절반 정도까지는 그런 빛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가정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또 그런 빛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일터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제일 마지막은 이제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할 영적 전투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을 알면 에베소서가 머릿속에 쭉 그려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교회, 가정, 일터입니다. 교회는 이제까지 계속해서 우리가 공부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과 일터가 교회와 분리됩니까? 분리된다고 생각하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꽤 괜찮은 성도였는데 가정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만한 빛의 자녀는 가정에서도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일터에서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회와 가정과 일터는 하나의 일직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가정, 일터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가정과 일터에서 열매를 만들고 열매를 빚어 가는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가정

이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난 빛의 자녀들이 이룬 가정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1-1. 부부 관계

먼저 부부 관계부터 설명합니다. 5장 28절을 보시면 바울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내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먼저 아내들에게 부탁하고, 그다음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아내들과 남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빛의 자녀들인 남편들, 빛의 자녀들인 아내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성장하고, 그 성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믿음 있는 가정의 부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 말만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복종하라고 하니까 딱 보기 싫은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주례를 서면서 이 본문을 넣어 가지고 미리 신랑 신부에게 설명했습니다.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 그 당시 그 신부의 신앙으로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서 본문을 바꿔 주었습니다. 그 정도로 복종이라는 말은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고 불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관계,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성도들 간의 관계를 성경은 일방적인 관계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상호적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에게는 부인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겠느냐, 이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그냥 굴종하고 복종하는 이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단 복종하라는 말을 받고 기분 나쁘지만, 불쾌하지만 우선 받고 그다음을 보셔야 합니다.

25절, 이제 남편들한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남편들 너희 남편들아, 아내를 위해서 죽어 버려라. 자,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남편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남편이 있다면 복종 못 하겠습니까? 그런 남편이라면 얼마든지 복종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다 내어 주고,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건네주고 목숨까지 바쳐 준다고 하는데, 그거 뭐 복종 못 하겠습니까? 복종하면 되죠.

그런데 아내를 위해서 추운데 겉옷 하나 못 벗어 주는 남편이라면, 그런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까?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부 관계는 서로 일방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항상 상호적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성장한 부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한 부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부부는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해야 됩니다. "아 나 피곤해서 안 돼, 나 힘들어서 안 돼, 나 이거 못해서 안 돼, 난 추워서 안 돼, 난 더워서 안 돼" 이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한 사람은 아내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내어 주심같이 사랑해야 됩니다. 이게 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부 관계는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지금 바울이 부부 관계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 상호적인 것을 이렇게 또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일방적으로 남편에게만, 일방적으로 아내에게만 말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 바로 된 가정,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두 사람이 믿음 생활을 잘해서 성장한 남편과 성장한 아내가 이루는 가정은 천국 같은 가정 아니겠습니까?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줄 만큼 사랑하고, 그래서 가정의 모든 문제는 신앙생활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해결됩니다. 그냥 종교 생활 말고요. 그냥 가방만 들고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 말고, 교회에서 직분 받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 말고, 성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 말고 내가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되면, 그러면 그 가정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평안한 것입니다.

서로가 그런데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가정에 여러 가지 불화가 있고 삐걱거리고 문제가 있다면, 그러면 거꾸로 들어와 보면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참 잘하는데 가정생활이 엉망이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서로 연동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1-2. 자녀와 부모

이제 6장 1절을 보시면 자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 안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즉 너희 부모가 예수님을 믿으면, 너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안에서는 부모님께 순종하라. 그러나 예수 믿지 않은 부모가 하는 말은 순종할 필요가 없다. 우린 이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여기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법 안에서, 말씀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의 반대말은 세상의 법 안에서, 상황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상황에 맞춰서 부모 섬기려고 합니다. 돈이 좀 있으면, 내가 형편이 되면, 상황이 되면 그렇게 되면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냥 자식이기 때문에, 내가 자녀고 내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자식의 도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나오미와 룻의 관계를 보십시오. 나오미와 룻의 관계를 보면, 상황을 보면 룻도 자기 동서를 따라서 떠나야 됩니다. 그냥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상황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룻은 주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시어머니가 혼자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어떻게 먹고 살까 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 안에서 순종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 된 입장에서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내 기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건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옳다고 이야기했습니다. 2절을 보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우상숭배 금지 명령입니다. 그런데 여기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 두 번째 돌판은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입니다. 그 두 번째 돌판의 첫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공경하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그 아래 보면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십계명, 아주 오래된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 공경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공경하다 '카바드'(כָּבֵד)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쓰는데, 이것은 무겁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무겁게 여기다를 공경하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이 말은 부모를 부담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라 이런 뜻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마라. 부모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을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지 말고, 그 말씀을 무겁게 받아라. 무겁게 자녀에게 하시는 말씀이든, 믿음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자라나는 자라면 부모가 하는 말은 무겁게 받으라, 그것이 공경입니다.

부모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고, 부모가 하는 말을 무시하고, 흘려듣고, 오히려 화를 내 버리고 이러면 무겁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생신 때 맛있는 것 해 드리고 고기 구워 드리고, 그것이 공경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무겁게 수용하는 것, 그것이 공경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로써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영양제 많이 먹고 보약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병원 열심히 다녀서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면 땅에서 장수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 없어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 잘 되고 건강하게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게다가 장수까지 할 것이다. 이것이 복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복입니다.

그런데 항상 상호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그다음 부모에게 하실 말씀이 또 있겠죠.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인 부모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자라나는 부모들에게 4절에서 말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노엽게 하다, 원어를 찾아보면 '파로르기조'(παροργίζω)라는 단어를 썼는데, 분노하게 하다, 지속적으로 분노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 부모가 자식을 분노하게 합니까? 노엽게 합니까? 이성을 잃게 합니까? 일단 인격적인 모독을 할 때, 아이들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입힐 때, 말로 행동으로 등등 그러기 쉽습니다. 부모가. 또 두 번째 공정하게 대하지 않을 때 공정하게 대하지 않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또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했던 말이 다를 때, 그런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를 분노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모든 가정에서 다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이것은 특별한 가정, 특수한 가정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분노하게 하고 노엽게 하는 일은 한두 번씩 혹은 여러 번씩 혹은 지속적으로 계속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그 대안을 이야기했는데,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양육하다 '에크트레포'(ἐκτρέφω), 소중하게 기르다는 뜻입니다. 에크트레포, 양육하다, 소중하게 기르다. 자녀는 소중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자녀를 어떻게 기르라고 그러냐 하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 뭔가 하나가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교훈과 훈계입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자식을 소중하게 여겨서 기르고 양육하려면 그 사이에 말씀이 있어야 양육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사이에 말씀이 없으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말씀이 없으면 결국 마지막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기릅니까? 주의 교훈과 훈계가 없다면 부모는 세상 풍조를 따라서 기릅니다. 사람들이 다 하는 말을 따라서 기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면 잘하는 것인 줄 알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책상에 그냥 하루에 12시간씩 앉혀 놓고, 그냥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면 그것이 자녀 잘 기르는 것인 줄 알고 돈 쓰고 시간 쓰고 합니다. 그렇게 길렀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는데 아이가 됩니까? 그것이 그랬더니 또 이제 부모가 하는 말이 "넌 머리에 뭐가 들어 있어 가지고, 내가 돈을 이만큼 써서, 내가 너한테 집을 몇 채 날렸는데, 그런데 넌 그 모양 그 꼴이냐" 이제 이렇게 해서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고,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서 양육하면 그렇게 됩니다.

또 중간에 말씀이 없으면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려고 합니다. 내가 해 온 방식, 내가 해 온 방식으로 자그마한 성공을 이룬 부모가 그 성공을 자녀에게 주입시키려 합니다. 그러면 자녀 입장에서는 시대가 바뀌었고, 세상이 바뀌었기에 듣기 싫어합니다. 불편해하고 그래서 노엽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도 부모 연습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알아야죠. 내가 말씀을 알아야지, 내가 말씀을 알고 말씀으로 먼저 은혜받고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그래야 자녀들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소중하게 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유니게 엄마 학교도 하고, 고넬료 아빠 학교도 하고, 하여튼 부모들을 잘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이렇게 먹이세요, 이렇게 먹이세요, 가정 예배는 이렇게 드리세요 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배워 본 적이 없으니까 시행착오도 겪었고 문제도 겪었고 그런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2천 년 전에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쳤는데 우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상호적인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양육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일터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어떻게 권면합니다. 요즘은 종이 없습니다. 요즘은 상전도 없고, 이것을 오늘날의 논리로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직장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자 그럼 봅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라고 그랬습니다. 직장생활하는 너희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직장생활하면서 두려워하고 떨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일터에서 언제 두려움이 있고 언제 떨림이 있었습니까?

첫 출근할 때, 처음에 그 직장에 갈 때,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고 떨림이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초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좀 익숙해지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이거 내가 잘 아는데" 하며 그냥 대충대충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두려워하고 떨며, 즉 처음에 그 초심을 가지고 열심히 해라. 처음에 그 초심을 가지고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해라. 목회자가 말씀 준비하는 것도 처음에 그 초심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하면 함부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직분 받을 때 그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분 받은 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니까 두려움과 떨림은 사라지고 목만 곧아지고 뻣뻣해지고,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두려움과 떨림 그 초심은 직장 생활에서나 우리 인생에서나 신앙생활에서나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다음 성실한 마음으로 그랬습니다. 성실은 직장 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라고요?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순종하기를. 성실은 사람에게 성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논리를 보면, 종교개혁가들이 직업을 콜링(cal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콜링이라고. 우리는 영어 단어에서 보면 직업을 잡(job)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콜링은 누가 불렀다는 것입니다. 소명입니다. 즉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자리에서 일하든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으니까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그리스도께 하듯 성실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 크리스천의 직업 윤리입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그다음 나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눈가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라.

7절 보시면 또 어떻게 하라고요?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얼굴에 죽상 쓰고 앉아 가지고 퇴근만 기다리고 막 그런 것 하지 말고, 기쁘게 하라. 기쁘게 즐겁고 행복하게 그렇게 감당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인 즉 예수 믿는 사람,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다다른 그리스도인은 이런 직장생활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상호적인 것입니다. 일꾼들 이렇게 일하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용인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 사장님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랬냐, 9절에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이와 같이'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했던 것 모든 것 다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초심으로 하고, 성실하게 하고, 눈가림만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고, 상전들 여기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전부 다. 우린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죠. 좀 있다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플러스 시킵니다. 상전이 더 할 것이 많습니다. 그것 다 하고 플러스 "위협을 그치라." 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위협을 그치라. 상전이라는 이유로, 내가 주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이 회사의 주권자라는 이유로 협박하지 마라, 갑질하지 마라, 괴롭히지 마라. 왜냐하면 뒤에 나옵니다.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내 상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를 고용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회사의 경영주지만 내 상전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 초심으로 하라, 하나님 아버지께 성실하게 하라, 하나님 아버지께 주께 하듯 하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 거기에다가 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무슨 말입니까? 주인 되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말단 사원이나 사장인 너나 외모로 취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돈 많이 벌고 이 회사를 경영하는 세운 창업자라고 해서 너를 특별하게 대하거나, 아니면 여기 저 말단 사원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무시하거나 그런 법이 없습니다. 외모로 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 윤리에 성실하게 하는 자를 하나님은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굉장히 정교한 책인데, 신앙 성장을 이룬 사람의 가정과 그들의 일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델을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3. 영적 전투

이제 마지막 파트입니다. 영적 전투. 이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한 사람들은 끝입니까? 이제 그렇게 성장했으면 끝난 것입니까? 가정과 일터에서 이렇게 살면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서 그 성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적 전투를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싸우고 끊임없는 영적 투쟁을 해야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영적 전투를 멈추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은 직분 받으면 끝나 버리는 줄 압니다. 직분 받으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나이가 들고 그러면 다 끝나는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숨 넘어가기 직전까지 끊임없는 영적 전투를 해야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1. 영적 전투의 대상

이유가 나옵니다. 10절,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강건하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영양제 많이 먹고 고기 많이 먹고 운동 많이 하고 병원 잘 가면 강건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이 있어야 강건해집니다. 주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여러분, 십자가가 힘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는 무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그냥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의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희생이고 헌신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자녀를 키웁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고 누군가가 대신 희생하면 그 힘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강건함입니다. 영적 전투를 하려면 주 안에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 안에, 내가 희생하겠다 하는 결단이 있어야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영적 전투를 위해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됩니다. 바울이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즉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배후 세력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배후 세력들, 보이지 않는 것과 어떻게 싸웁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보여야 싸우지. 보이지 않는 악의 영들, 마귀의 세력, 사탄의 세력과 싸우려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눈이 열려야죠. 그것이 보여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과거에 공산주의가 득세했는데 그 이면에 사탄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 동성애가 세상을 휩쓸고 교회까지 들어와 있는데, 그 이면에 악의 세력, 사탄의 세력이 있는 것을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아 이건 그냥 다 하는 거야, 그냥 세상에 그래서 그냥 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건 심각한 것입니다. 곤란한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들,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일들, 이것도 영의 눈으로 마귀의 간계가 그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라고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 분별력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전신갑주 그냥 있으면 뭐 합니까? 그것 취해서 입어야지, 놔두면 뭐 합니까? 입어야지.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배후 세력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3-2. 전신갑주의 내용

이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서서'라는 말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여러분 집에 손님 오면 뭐라고 말합니까? "서 계세요"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굉장히 기분 나쁜 사람 오면 서 계세요 하겠지만, 좀 적당히 기분 나쁘면 그래도 좀 앉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앉으시라고 합니다. 서 있다는 말은 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긴급하다, 긴박하다, 그만큼 굉장히 지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1절 말씀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애굽할 때 유월절, 죽음의 사자가 건너간 유월절 절기를 지킬 때 급히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지팡이 들고, 허리띠 띠고, 무교병과 양고기를 급히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급히. 그러면 급히 먹는데 앉아서 먹을 수 있습니까? 보통 우리가 어른들이 손자들한테 먹을 때 "자 앉아서 편안히 천천히 허리띠 풀고" 하는데, 지금 여기는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급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전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허리띠를 띤다는 말, 하나님의 전신갑주 입습니다. 무장을 할 때 다른 것 다 위아래 옷을 입었는데 띠를 띠지 않으면 전쟁하러 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옷을 입을 때 남자분들 바지 입을 때 허리띠 띠지 않으면 바지가 흘러내립니다. 뭐 일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 할머니들 한복 입고 일하실 때, 부엌에 들어가서 불 때고 군불 때고 밥할 때 한복 그냥 그대로 쫙 늘어뜨린 채로 그 아름다운 자태 그대로 가서 일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옷 다 탭니다. 뭐 띠고 그렇게 일합니다.

다 진리로 너의 허리띠를 띠라. 이 말은 영적 전투에 나가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준비하라. 그런데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그랬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변치 않는 것,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 변치 않는 것. 2천 년 전이나 4천 년 전이나 앞으로 4천 년 후나 종말 때까지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즉 말씀으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 서서 급하게 긴박하게, 그 말입니다. 즉 영적 전투에 나가는 사람은 항상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우리 인생에 한번 가지고 와 보면, 시작하는 첫 시간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 우리가 그냥 자다가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터에도 가고, 가정생활도 하고, 사람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 하루가 전부 다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중간에 어떤 시한폭탄이 있을지 몰라요. 중간에 어떤 악의 무리가 우리에게 어떤 일로 걸려 넘어지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것 하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 경건의 시간이요, 새벽 기도 시간이요, 큐티 시간이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 아닙니까?

그런 것 없이 하루 시작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탄이 끄는 대로 그냥 끌려다닙니다. 하루 종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여기 패대기 치면 저리 쓰러지고, 저기서 한 대 맞고 정신없고, 저기서 또 한 대 맞고 저녁이 되면 정신없습니다. 만신창이, 그냥 상처투성이. 분별력도 사라지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허리띠 자체를 띠지 못했으니까요.

범위를 조금 넓혀서 하루 말고, 어떤 일터로 우리 자녀가 처음 나간다면, 그 일터에 갈 때 말씀을 딱 붙잡고 가야 됩니다. 취직을 했다, 군대를 간다, 결혼을 한다, 이사를 했다, 뭐 등등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서 이사 예배를 드리고, 뭐 취업 감사 예배를 드리고 뭐 등등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은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행위입니다. 처음 시작을 할 때 신년 첫 예배, 송구영신 예배 드리는 이유도 한 해를 진리로 허리띠 띠는 행위입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러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두 번째,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호심경, 한자 합니다. 무엇입니까? 보호하다, 심장을, 거울 경. 심장을 보호하는 거울입니다. 그런데 과거 바울 시대 때 거울은 요즘처럼 이런 거울이 아니고 쇠로 됐습니다. 놋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에다, 갑옷 안에 심장에다 동그랗게 만든 놋으로 된 얇은 판, 이것을 심장에다 넣었습니다. 누가 화살을 쏘면 저것이 화살을 쏘면 심장을 관통하지 않도록 막고 튕겨 나가게. 그런데 그 호심경을 뭐라고 이름 붙였습니까? 의의 호심경. 의가 무엇입니까? 이 의가 누구입니까? 자기 의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입니다.

영적 전투에 나가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무장하라. 그 십자가 의에 반대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자기 공로, 자기 공로로 무장해 있으면 거기에 사탄이 틈 타면 다 넘어집니다. 전부 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시험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하다가 별로 열심히 안 한 사람은 절대 시험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분이 없으니까요. 내가 이 교회에서 열심히 한 지분이 없는데, 뭐 주장할 것이 없는데, 공로가 없는데 뭘 주장합니까? 시험 들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냥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식당에서 밥 주면 감사하고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한 사람이 시험에 듭니다. 열심히 한 사람이 열심히 한 사람이 시험에 들고 넘어지는 이유는 의의 호심경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의로 충만하기 때문에 이 의에 대한 보상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칭찬이라는 보상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나를 직분자로 세워 주는 보상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 주는 보상이 필요하고, 내 감정을 누군가가 위로해 주는 보상이 필요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기 시작하면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파고들 것입니다. 화살을 쏘는데 자기 공로의 화살을 사탄이 계속해서 쏘는데 심장이 뻥뻥 뚫리는데 어떻게 이깁니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아무 공로 없습니다. 오직 공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과 그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그저 여기서 열심히 섬기고 일했을 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목회자도 평생을 교회에서 섬기고, 평생을 설교하고, 평생을 일하고 했습니다. 은퇴할 때 다 챙겨 가려고 하면 그것이 자기 의입니다. 뭐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설교하고 말씀 전할 때는 다 그렇게 해놓고는 그것 뭐 안 해 준다고, 대우 안 해 준다고 막 시험에 들고 막 나사 빠지고 힘들고 교회 힘들어지고,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시험들게 하는 아주 중요한 통로입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했는데, 내가 여기서 어떤 공로를 세웠는데, 그것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쓸데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내 의의 호심경 치고 살아야 됩니다.

또 한 가지 의의 호심경은 심장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심장, 강인한 심장을 가져야 됩니다. 심장을 보호하면, 심장이 작으면 어떻게 됩니까? 옛날 우리 어른들은 저 간이 작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우리 식 표현이고, 서양식 표현 히브리식 표현은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 그러거든요. 말 많이 들어보셨죠? 큰 심장을 가져라. 큰 심장, 큰 심장을 가져라. 심장이 작아지면 일을 못합니다. 졸렬해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40일을 골리앗이 조석으로 자기 몸을 나타내면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사울 왕부터 군사들, 말단 병사들까지 한 사람도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장이 작아서, 의의 호심경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윗이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강한 심장을 가지고 돌격하지 않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아 그렇게 말하고 나갑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나가면, 큰 심장을 가지고 나가면 그것 승리합니다.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15절, 세 번째.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신발 안에 돌멩이 하나 들어가 있으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신발은 편해야 됩니다. 신은 평안의 복음이라 그랬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평안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 언제 평안이 찾아옵니까?

지금 우리가 평화의 시기입니다. 한국 전쟁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이 땅에 전쟁이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평화를 누리는 이유는 전쟁에서 희생한 사람의 그 피해 공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지금 영적인 평화를 누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덕택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무서워서 문을 다 닫고, 창문까지 다 닫고, 불 끄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손과 그 발은 못 자국으로 형편없습니다. 그 허리에는 창이 들어간 자국으로 형편없고, 등에는 채찍에 맞은 자국으로 온몸이 만신창이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평안은 무엇입니까? 처절한 피흘림 이후에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당할 고통 내가 먼저 당해서,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평안을 준다,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신발로 신고 가는 것입니다. 그 신발을 신고. 신발 신었으면 그것 가지고 어디로 가야죠. 옛날에 새 신발 신으면 막 뛰어가서 놀고 싶습니다. 가서 해야죠. 전달하고, 평안의 복음으로 복음 전하고 가르치고 해야죠.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가짜 평화가 아닙니다. 진짜 평화는 피흘림 이후에 있는 평화가 진짜 평화입니다. 평안의 복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방패가 무엇입니까? 방패. 방패는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막느냐.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원수가 저기 멀리서 불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방패를 가지고 이 불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그랬죠. 원수가 나를 향하여 불화살을 쏘는데 이 불화살이 다 언젠가는 다 바닥날 것 아닙니까? 그때까지 이 방패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이것 굉장히 답답하죠.

그러면 방패 뒤에 숨어 있는 나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원수가 계속 화살을 쏘는데 머리 한번 내밀어 보고 하다가 머리 팍 맞고 죽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수가 불화살을 다 소멸할 때까지 그 믿음 안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방패가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이 불화살이 다 소멸될 것이라는 믿음. 그런데 그 믿음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도 그랬거든요. 시편 13편을 보면 "어느 때까지입니까?" 어느 때까지입니다.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 자기는 모르니까요. 우리는 다윗이 십 년만 고생하면 사울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는 것이고, 그 고통 가운데 있는 다윗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욥도 자기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필요합니다. 방패가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언젠가는 원수의 불화살이 다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이 크고 작은 문제들,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 자꾸 어려움이 닥치고, 왜 이렇게 이런 어려움이 닥치고, 우리 가정에는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할 때, 끝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못 견딥니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방패 던지고 나갔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지. 원수에게 포로로 잡히고.

17절, "구원의 투구." 구원의 투구. 투구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를 구원의 투구라는 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 영적 전투를 하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면 영적 전투 못합니다. 사탄은 이것을 우리에게 자꾸 던지거든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던집니다. "언제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에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이야기도 하고, "구원받았는데 죄 짓습니까? 어 죄 좀 짓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뭐 이런 희한한 소리도 하고 막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라도 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서 구원받았다는 믿음, 그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그 안에 있으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머리에 구원받았다는 영적 확신, 이것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지금까지는 다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하나 유일한 공격 무기가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이라고 하니까 뭔가 신비로운 제다이가 들고 있는 엑스칼리버 같은 뭐 그런 칼, 성령의 불로 칼춤 추는 뭐 그런 것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검.

예수께서 이 말씀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신 것이 마태복음 4장인데 잘 아십니다. 사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습니다.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세 가지. 그때 예수께서 이 시험을 물리친 방식이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마귀가 떠나가고 천사가 수종들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면 마귀가 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듣는 설교 말씀으로, 읽는 기록된 말씀으로 다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외우셔야 됩니다. 많이 암송하시고, 말씀을 많이 읽고 이해하시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계속해서 가지고 계셔야 됩니다. 그래야 위기 상황에서 꺼낼 칼이 있지. 위기 상황에 칼을 꺼내 보니까 칼이 없네요, 칼이 다 녹슬었네요, 다 부러졌네 한번 휘두르려고 하니까 칼이 녹슬어서 휘두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검이. 이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매일같이 이순신 장군이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그때 앉아서 검을 매일같이 닦았습니다. 영화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그런 것처럼 우린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검을 계속 벼리다 라는 말을 합니다. 나를 곧게 세워야 됩니다. 날카롭게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그것을 날카롭게 갈고 닦고 세워야. 그래야 사탄에게 휘둘러 볼 수 있습니다. 맨날 믿음의 방패만 갖고 그 안에 어떻게 숨어 있습니까? 이제 원수의 불화살이 소멸되는데 그러면 일어나서 칼 들고 한번 휘둘러야지. 방패까지 잘 막았는데 휘두르려고 보니까 칼이 없습니다. 아이고 참 한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 12절 보십시오. 거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향하여 휘두르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나를 찔러 쪼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면 그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그랬습니다.

무슨 말이냐. 지금 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들이 이것이 맞는지, 이것이 옳은지, 이것이 틀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면 그 말씀이 판단을 해 줍니다. "그 생각은 옳아, 그 생각은 틀렸어, 그렇게 가면 큰일 나."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말씀을 가까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말씀이 나를 찔러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아니하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생각대로 그냥 가는 것, 그것이 죽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면, 성령의 검을 가지면 그 말씀이 나를 판단해 줍니다. "이건 하면 안 돼, 그건 사탄의 생각이야. 그래 그건 참 좋은 생각이네, 그건 해도 되겠다." 그렇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3-3. 기도의 당부

영적 전투를 위해 바울이 무엇을 부탁했습니까?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가 당연한 말씀이고, 여러 성도를 위해서 구하라는 말은 기도의 지경을 좀 넓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넓게 하라는 뜻입니다. 폭넓게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중보기도 해 주라는 뜻입니다.

19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바울이.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며." 바울은 평생 복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또 구합니다. 내게 말씀을 달라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달라고,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고. 그런데 지금 바울은 어떤 상태입니까? 로마에 구류된 상태 아닙니까? 전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20절, "이 일을 위하여" 즉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이것이라." 그래요. 이런 것을 가지고 사신은 무엇입니까? 보냄 받은 신하, 사명을 가지고 보냄 받은 신하. 중국에 사신을 보냅니다. 일본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 사신입니다. 그런데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역적 표현입니다. 쇠사슬에 매인 사신. 자기는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받아서. 그런데 지금 자기가 로마에 구류되어 가지고 2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냥 거의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가택 연금 상태니까 오고 가는 사람들 다 불러서 말씀 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누가 가지고 갑니까?

결국은 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핑계합니다. 이거 못한다고, 이런 상황에 무슨 말씀 전하고, 이런 상황에 뭐. 그런데 뜻만 있으면,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쇠사슬에 매인 자도 하나님의 사신 역할을 할 수 있는데요. 왜 못합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죠.

21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두기고. 나중에 우리가 골로새서 볼 때 다시 볼 텐데, 두기고라는 사람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세 권의 편지를 가지고 오네시모와 함께 로마를 떠나서 골로새 교회로 갑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가 멀지 않은 자리에 있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갈 때 에베소서를 "내가 써 줄 테니까 이 편지를 가지고 에베소 교회에도 전해 주렴" 하고 같이 써 준 것입니다. 나중에 골로새서 할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맺음말

마지막 인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이렇게 에베소서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쉽지 않은 책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책인데 교회를 위한 책, 또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들이 빛의 자녀고, 빛의 자녀들이 이루는 가정, 일터, 상호적인 관계를 설명했고, 빛의 자녀들, 장성한 분량에 성장한 사람은 영적 전투를 성실하게 행하는 자라는 내용까지 설명드렸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옥중서신 에베소서를 마쳤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교회 성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숫자나 건물 짓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성장이라고 하셨고, 그런 자를 빛의 자녀라고 하셨으며, 빛의 자녀는 교회와 가정과 일터가 똑같이 진실해야 함을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의 영적 전투라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 자세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 않게 하시고 이면을 보게 하시고, 영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악한 사탄 마귀와 대적하게 하시며, 내 마음의 뜻과 생각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많이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