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복음에 합당한 삶 / 전체녹취

옥중서신 (7) 복음에 합당한 삶 (빌1장)

1. 에베소서 회고와 빌립보서 서론

에베소서를 여섯 번에 걸쳐 공부하였습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옥중서신 중에서도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살펴보았는데, 바울이 말하는 교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초적인 교회는 분열된 교회가 아니라 일치된 교회였고,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성장이란 숫자의 성장이나 교회 건물이 커지고 넓어지는 종류의 성장이 아니라 성도의 성장이었습니다. 성도의 성장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성장하는 사람을 빛의 자녀라고 했고, 빛의 자녀는 한 번 빛의 자녀로 이루어진 것으로 영원히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를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전체의 흐름이자 주제입니다. 앞으로 에베소서를 말할 때 단순히 "에베소서가 있었다"라고 하지 말고, 이러한 흐름을 설명하고 풀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빌립보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첫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쁨의 서신입니다. 그런데 왜 기쁜가, 이것을 빌립보서 네 장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것입니다.

2. 바울과 빌립보 교회

2-1. 편지를 읽는 재미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를 전제로 보아야 합니다. 서신서가 열세 권인데, 서신서는 편지입니다. 쓴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릴 때 가족 중에 누군가가 연애를 하면 연애 편지가 집에 오고, 언니가 연애 편지 받아서 몰래 서랍 속에 숨겨놓은 것을 끄집어내어 읽고, 비밀 일기에 열쇠 걸어 놓은 것을 클립으로 따서 열어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의 연애 편지를 읽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쓴 사람도 알고 받은 사람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 가다가 누가 흘리고 간 편지를 읽어보면, 내용이 아무리 재미있고 감미로워도 쓴 사람도 모르고 받는 사람도 모르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읽어봐야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신서를 재미없게 느끼는 이유는 쓴 사람 바울도 모르고 받는 빌립보 교회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알고 바울도 알면 이것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고, 빌립보 교회에 대한 공부도 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2-2. 성령의 인도하심

바울이 원래 2차 선교여행 때는 에베소로 가려고 했습니다. 소아시아의 핵심 되는 도시로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시아란 에베소를 말합니다. 성령이 못하게 하셨고, 7절에는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에베소가 있는 서아시아에서 보면 에게해 바다 건너 유럽의 북쪽에 있는 큰 지역을 말합니다. 그 마게도냐, 즉 유럽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이 꿈의 환상에 보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럽에서 첫 번째 만난 성이 빌립보 성이었습니다. 12절에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빌립보와 바울의 첫 만남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계획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인도하셨습니까? 성령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셨고 나는 계획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계획한 것은 없어졌습니다. 일단 좌절감이 있고,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셨으니까 기대감이 있습니다. 좌절과 기대가 동시에 있는 자리가 빌립보였습니다.

2-3. 루디아의 회심

바울이 항상 복음을 전했던 패턴이 있는데, 바울은 자세히 보면 복음 전하는 곳곳마다 가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패턴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세 사람만 모이면 자기들의 회당을 만들었는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유대인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이 없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로마 사람들이 살기에 좋았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흩어져 있는 난민들과 비슷한 처지였는데, 이 사람들이 여기에 없었습니다. 빌립보는 계획도시였습니다. 막 세워진 신도시, 계획도시로서 로마에서 은퇴한 퇴역 장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있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바울을 이쪽으로 인도했는데, 항상 하던 패턴이 없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가에 나가서 여인들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14절에 "두아디라 시에서 온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었는데"라고 했습니다. 자색 옷감, 그 당시에 자색은 굉장히 비싼 옷감이었습니다. 그 비싼 옷감을 파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지체 높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옷감은 비싸니까 이 여인은 기본적으로 큰 손입니다.

루디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바울이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셔서 15절에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루디아는 하나님을 믿긴 믿었는데 세례받기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는 오늘 우리의 세례와 다릅니다. 그 당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공중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했다가 고발당해서 잡혀가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죄목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 당시 왕은 로마 황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었으니, 예수께서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는 모두 반역자로 인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내가 목숨을 내놓겠다는 결단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고 나서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이 여인은 목숨을 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첫 열매가 루디아입니다.

2-4. 여성 성도가 많은 교회

빌립보 교회는 큰 손을 가진 큰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이 첫 열매였기 때문에, 그 주변의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부터 시작해서 빌립보 교회의 초기 멤버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성 성도들이 많은 것이 빌립보 교회의 특징입니다.

여성 성도들이 많은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일단 분위기가 좋습니다. 따뜻합니다. 밥은 굶지 않습니다. 모이면 무조건 먹습니다. 그런데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말이 많습니다. 모여서 말이 많은데 집에 가서 삼삼오오 모여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 뒷담화하고 말이 많습니다. 또 손이 좀 많이 갑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하노니"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런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씁니다. 왜 바울이 하필 본인이 개척한 수많은 교회 중에 로마에서 구류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는가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에게 쓸 것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바울 선생님이 우리 교회 개척 목회자인데 복음 전하다가 로마에 갇혀서 고생하고 계신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쓸 것과 돈을 모아서 헌금도 만들고 입을 옷도 짓고 이런 것들을 다 모아서 사람을 시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가 먼 길에 병이 났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2장, 3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사람을 지성으로 간호하고 치료해서 돌려보내는 편에 이 편지를 써서 같이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도움을 입고, 요즘 말로 하면 영치금을 받고 그 영치금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이외에는 그렇게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다녀도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건 말건, 매를 맞건 말건, 죽건 말건 아무도 도운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서 굉장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집사의 본질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첫 인사를 보면,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데, 디모데가 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는데, 감독은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장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집사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인데, 시중 드는 사람, 교회의 필요에 따라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어원이 봉사를 뜻하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사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서 집사라는 말 속에 '교회의 필요에 따라 섬기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중 드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집사님들은 어떻습니까?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섬깁니까, 아니면 내 필요에 따라서 섬깁니까? 교회가 자아실현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내가 노래하고 싶으면 찬양대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합니다. 필요한 것은 잘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이 진짜 필요한데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시중 든다고 했는데 누구를 시중 드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시중 드는 것이고, 교회 직분자들인 집사들은 하나님을 시중 드는 것입니다. 시중 드는 사람이 자기 임의로 "나 여기 가서 시중 들래요, 나 저기 가서 일할래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시중 드는 사람은 주인이 "너 여기서 일해, 너 이것 해야 돼"라고 하면 거기 가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 집사의 의미입니다. 원래 집사 직분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교회가 자기의 자아실현에 하나의 장이 되어 있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진짜 집사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필요해서 "집사님 오늘 이것 좀 해주셔야 됩니다. 올해는 여기에 일꾼이 많이 부족하고, 보아하니 집사님이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고 환경도 되니 이것 좀 부탁합니다"라고 하면 진지하게 기도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집사입니다.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모두가 해야 되는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교회를 예로 들어보면, 제가 지지난 주에 광고할 때 "위기입니다. 11월에 밥을 못 먹을 수 있는 우리가 지금 위기에 빠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밥 먹는 것은 모두의 일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 상당수가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식당에 청소 봉사자, 설거지 봉사자 방을 붙였는데 이름을 쓰신 분이 몇 명 없었습니다. 모두의 일인데 누구의 일도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몇몇 사람만 거기에 의무감을 가지고 쓰셨는데, 처음에 쓰신 분들은 이전에 여러 번 쓰신 분들이 또 쓰신 것입니다. 목사가 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11월에 밥을 굶을 생각을 하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입니다. 그것은 그냥 위기가 아니라 진짜 교회의 위기입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한 것에서부터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자아실현을 하려면 세상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문화센터 같은 데 가면 내가 하고 싶은 노래도 마음대로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춤도 배우고,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우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될 자리입니다. 적어도 직분자라면 그런 마음 없이 그런 의식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취미생활입니다. 그것이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헌신도 없고 희생도 없고 자기 부인도 없고 자기 십자가도 없고, 그것이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그래서 집사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시중 드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시중 들고 하나님을 시중 들며,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너 여기 가서 일 좀 해"라고 하시면 거기에 두말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가 진짜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4. 복음을 위한 동역

4-1. 감사와 기쁨의 이유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보면, 3절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칩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넘칩니다. 생각만 하면 감사가 되고, 기도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뒤에 나옵니다. 5절에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2. 코이노니아의 참된 의미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다'라는 말에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코이노니아를 우리는 교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교제합시다, 코이노니아 합시다"라고 하면 어떤 느낌입니까? 같이 놀자는 느낌입니다. 같이 밥도 먹고, 떡을 떼고, 차 마시고 노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면 코이노니아는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입니다.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하는 것.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해준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말입니다.

복음 전하러 멀리 갈 때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우리 바울 선생님이 자비량으로 천막 기워가면서 자기가 돈 벌어가면서 저기 가서 복음 전하고 또 저기 가서 복음 전하는데, 우리가 선교비라도 좀 드려야지"라고 하면서 복음을 위한 일에 동참했습니다. 선교비도 보내고, 지금 로마 감옥에 구류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서 쓸 것을 보냈습니다. 또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했더니, 이 교회 성도들이 헌금해서 바울에게 줘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게끔 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헌신적으로 동역자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이 일을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 외에는. 그래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이토록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계십니까? 이 일이 진짜 하나님의 일이고,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지 참여해야 합니다. 동역자가 되어서 동참하고 함께 일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일이고, 몸으로 함께 뛰는 것도 일이고, 내 물질을 드리는 것도 일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위한 일은 제쳐두고 나를 위한 일에만 열심히 일하면 어찌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5. 사랑과 지식의 풍성함

5-1. 바울의 기도

이제 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이 기도합니다. 바울의 기도가 절절합니다. 저는 이 기도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상당히 일관적입니다.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장과 빌립보서 1장은 연결되어 있고, 베드로후서 3장과도 연결됩니다.

9절에 "내가 기도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줄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줄기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 사랑이 지금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풍성한데, 앞으로 더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더 풍성해지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지식과 총명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리스도를 더 풍성히 더 많이 더 제대로 사랑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결혼하고 40년, 50년이 지나면 그만큼 세월이 쌓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내가 내 남편을 알았던 것, 내 아내를 알았던 것, 그때도 사랑하니까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년이라는 세월이 쌓였으면 40년 동안 사람이 그대로 있습니까? 변합니다. 변하는 만큼 이 사람에 대한 지식이 쌓여야 합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저 사람의 지금 심리 상태가 어떤지, 저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짜장면 좋아했는데 이제는 위염이 있어서 밀가루 음식 못 먹는데, 지금도 짜장면 좋아하는 줄 알고 맨날 짜장면만 시켜주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짜장면 남기면 "요즘 다이어트 하나 봐"라는 소리나 하고. 그런 남편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고 무슨 생각을 같이 나누고 싶겠습니까? 나에 대해서 이만큼 모르는데.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더 깊어지려면 그를 아는 지식이 계속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 처음 세례 받을 때, 세례 문답한다고 문답 책 달달 외우고 "세례 받으려면 성경 읽어야 한다"고 해서 그때 속성으로 한 번 읽었을 때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때도 물론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러 있으면 사랑이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그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내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풍성함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메마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하려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고. 알면 알수록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그 불이 지속적으로 계속 타려면 장작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장작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입니다. 성경 말씀이라는 지식의 장작을 계속 집어넣어야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바울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여성 성도들이 많습니다. 여성 성도들의 특징이 사랑은 많습니다. 사랑이 많은데 그 뜨거운 사랑에 지식이 좀 있으면 좋겠다, 성경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성경을 조금 더 이성적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공부한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쭉 성장하고 자라려면 이것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식으로 표현하면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위에서부터 내리는 것이고, 지식은 내가 배워가는 것입니다. 여기는 사랑과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풍성해지려면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입니다.

5-2. 지극히 선한 것의 분별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면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 유익을 위해서도 기도했는데, 10절에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랑이 지식으로 풍성하게 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다'라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의 분별은 1차원적이고 단순하고 쉽습니다. 쉽게 생각해 봅시다. 교회 오는 것과 교회 오지 않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선한 것입니까? 교회 나오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주일날 그런 분별은 어린아이라도 다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신앙이 있으면 교회 오는 것과 집에서 누워 자는 것, 이런 분별은 다 합니다.

그러면 교회 왔습니다. 교회 마당에만 있는 것과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것, 이 분별도 당연히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선한 것임을 압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고 그냥 집에 가는 것과 한 가지의 섬김과 봉사를 하는 것, 이 사이의 분별도 당연히 한 가지 봉사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를 하려면 어떤 것을 해야 되느냐.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원하고 나의 자아실현을 원하는 것을 해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교회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내가 찾아가서 해야 되느냐. 이것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차원에까지 올라가야 그것이 믿음이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분별력입니다.

돈을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을 쓸 때도 나쁜 데 돈 쓰는 것과 좋은 데 돈 쓰는 것, 밖에 가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막 써버리는 것과 교회 헌금하는 것, 당연히 교회 헌금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그런 분별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교회 당회에서 결정할 때, 여러 부서에서 청원을 합니다. "우리 부서 이것 필요합니다. 이것 필요합니다." 다 올라옵니다. 그러면 당회 장로님들이 그것을 가지고 결정을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긴급하고 가장 시급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해야 될 것,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진짜 분별입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분별력도 수준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분별이 있고, 3차원, 4차원, 고차원적인 분별이 있는데, 사랑이 지식으로 풍성하게 되면 고차원적인 분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짜 분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 분별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선과 악의 분별은 쉽습니다. 선한 것 중에 최고로 선한 것. 돈을 쓰는데 어디에 써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인가? 내 시간을 쓰는데 어디에 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인가?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가장 선한 것,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고,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했습니다.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지식으로 풍성하게 되면 죄 지을 여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11절에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맺힙니다. 이렇게 살면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인생을 원하는데, 결국 이렇게 사는 인생이야말로 진짜 열매 맺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 성도들, 바울이 다 압니다. 성도들 이름도 압니다. 워낙 친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들 가정의 형편과 그분들 가정이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기를, 그런 것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지식으로 풍성하게 되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죄짓지 않고 살고, 의의 열매 가득하기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어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렇게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좋은 기도입니다.

6. 상황을 초월한 믿음

6-1. 복음 전파의 진전

그다음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합니다.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 갇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상황을 보는 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이것이 처음 당하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까지 오기까지를 우리가 봐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돌면서 연보를 모았습니다. 돈을 모았습니다. 그것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전달하러 갔다가 거기서 체포됩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재판도 못 받고 계속해서 몇 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갇혀 있다가 "내가 로마에서 재판받겠다" 해서 배 타고 로마로 온 것입니다. 지금 몇 년째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서만 2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바울은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황이라는 것이 생기면 이 상황에 확 압도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귀신 들린 여종 하나 쫓아냈다가 그 주인이 고발해서 감옥에 들어가서 바울과 실라가 발에 족쇄를 차고 지하 감옥 캄캄한 데 있습니다. 그 상황이 어떻습니까? "나는 선한 일 했는데, 나는 귀신 쫓아내 줬는데 감옥에 들어갔다." 견딜 수 없이 괴롭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송했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그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오히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됐다."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매여 있는 것,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다 소문날 것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을 얻어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감옥에 들어가도 낙심하지 않네. 저 사람 감옥에 들어가도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복음 전하네." 그러니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돈이 없다는 상황에 압도되기도 하고, 누구는 건강의 문제 때문에 그 상황에 압도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관계 문제가 잘못되어서 실의에 빠져서 상황에 압도되기도 합니다. 여러 상황 때문에 믿음을 잃고 신앙이 눌려지는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상황과 복음 전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이 상황에 있어도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결의와 이런 열의와 이런 방향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압도되기 시작하면 맨날 치이다가 볼일 다 봅니다. 이번에는 이래서 못하고, 저번에는 저래서 못하고, 아이 때문에 못하고, 돈 없어서 못하고, 그러다 보면 늙어 죽습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상황은 상황이고 복음 전파는 복음 전파인 것입니다.

6-2.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자들

15절을 보니까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나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울이 사도였는데 바울의 사도 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을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공생애의 삶을 사실 때.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사도라 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 됨을 인정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바울이 감옥에서 나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더 열심히 복음 전해서 바울보다 더 많이 교회 개척하고 더 큰 교회 세우겠다" 하고 다툼과 시기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 괜찮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1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가서 "옳다구나 잘 되었다" 하고 복음을 전해도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쁘고 또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상황과 상관없이 그냥 복음만 전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복음만. 이런 마음이 좀 있어야 합니다. 옆 교회가 잘 되면 진짜 기뻐해야 합니다. 옆 교회가 교인이 막 몰려가지고 미어터지고 성도가 모이고 부흥하고, 거기 성도 수가 많아져서 교회 새로 지었다 그러면 박수 쳐주고, 우리도 거기에 건축 공부 좀 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이 괜히 기분 나쁘고 괜히 화나고 괜히 배 아프고, 흠잡을 데 없나 그런 것 보고 "저 목사 설교가 이단성이 있는 것 같은데"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냥 복음 전파만 되면 되는 것입니다.

7.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

7-1. 바울의 간절한 소망

자기 상황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바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언제 그를 불러다가 형장의 이슬로 목을 베어버릴지 모릅니다. 로마에서 지금 황제의 권력이 최고의 권력인데 그를 콜로세움에 불러다가 짐승의 밥이 되게 할지, 그날이 오늘일지 그날이 내일일지 어떻게 압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결국 그의 목적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상황에 절대로 압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는 믿음의 선진들 이야기입니다. 그 끝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11장 36절, 37절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입니다.

그런데 38절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을 히브리서 기자가 정의하기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 아닙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우리 목표가 이런 원대한 목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감당이 됩니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유일한 생각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 그것 한 가지밖에 없다."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말을 바꾸면,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굽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누굽니까? 마귀 아닙니까? 마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를 어디 속에 가둡니까? 상황 속에 가둡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가두는 것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사탄 마귀가 욥에게 여러 시험도 주고 환난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환경과 상황 속에 딱 들어가 버리면 그 안에서 딱 갇혀가지고 "나는 이것 때문에 이것 못해. 나는 이것 때문에 복음 못해. 나는 이것 때문에 예수 못 믿어. 나는 이것 때문에 교회 못 가. 나는 이것 때문에 봉사 못 해. 나는 이것 때문에 성경 공부 못 해." 이렇게 되면 그 상황 안에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가 통제 가능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마귀의 통제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까? 적어도 우리 믿음의 소망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제목이 옥중서신이지만 바울은 옥에 있지만 지극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매우 자유로운 사람이고, 감옥에 그를 매어두었지만 그의 영혼은 전 세계로 복음 전하고 다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 얼마나 멋집니까? 이 정도 기백과 이 정도 패기와 이 정도 기도 제목 정도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신앙생활에 포부가 있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하나님, 저 이번에 뭐 좀 주세요" 이런 것 말고, 그런 것은 그냥 주시니까 그런 것 말고 좀 크게 기도하고, 폭넓게 기도하고, 크게 가셔야 됩니다.

7-2. 부활의 확신

바울이 어떻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21절을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부활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여러 번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라고 했습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의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 만났습니다. 다메섹 체험에서. 그런데 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 얘기할 때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왜 부활을 믿지 못합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죽는 것이 겁이 나고,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상황에 압도되고,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먹고 사는 것이 걱정되고,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이 상황 때문에 자꾸 모든 것을 못 하게 되고 이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부활에 대한 확신만 정확하게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 죽는 것이 겁나지 않는데 세상이 어떻게 감당합니까? 사탄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사탄은 죽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죽음 너머의 영역은 자기 영역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영역입니다. 죽음 이후의 3일간의 그 영역은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고 앞까지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탄이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죽으나 사나 거기에 대해서 별로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겁날 것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열심히 하고,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외치고 전하고, 눈치 보지 않고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한번 사는 세상인데 복음대로 한번 제대로 살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8. 삶의 진정한 의미

8-1. 살아야 할 이유

바울이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23절을 보시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둘이 무엇입니까? 사는 것과 죽는 것.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나는 부활을 확신하니 세상 떠나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나로 생각하면, 나 혼자 생각하면 지금 당장 빨리 천국 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너희 때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 내가 살므로써, 25절에 나옵니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입니다. 바울이 살아감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그들 삶의 기쁨이 있으니까 내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목사님, 죽지 못해 살죠." 세상에, 권사님 입에서 그런 말이나 하고, 정말 믿음 없는 소리입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 절대로 그런 말 하시면 안 됩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처럼 허무한 말이 없고, 그 말처럼 불신앙적인 말이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말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가 사는 이유는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되니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이유입니다. 그것이 내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서 내 자식의 믿음의 진보와 그의 기쁨이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살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믿음 생활 잘해서 나의 믿음을 보고 내 자식들이 그 믿음을 본받아서 그의 믿음의 진보가 되고 기쁨이 되니까 사는 것이고, 내가 교회 직분자로 살면서 나를 보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되니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이유입니다. 벌어 먹자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입에 풀칠하자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사명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신하고 부활을 확신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천국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바울처럼.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후회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가 되는가,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8-2. 진정한 삶의 의미

우리는 진짜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가 됩니까? 내가 누구로 인해서 믿음이 성장하고 있습니까? 누가 나로 인해서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밥 먹을 이유가 있고 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다른 데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잘 되고 자식들이 다 좋은 데서 직장 생활해서 돈 벌어주고 해외여행 보내주고, 그런 것, 천국이 더 좋은데 나중에 그런 것은 별로 의미 없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서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이것이 사명자의 이유입니다.

9. 복음에 합당한 생활

9-1. 시민답게 생활하라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이 '생활하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폴리튜오마이(πολιτεύομαι)라고 합니다. 시민답게 생활하다, 시민권이라는 폴리튜마(πολίτευμα)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합당하다'는 '어울리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어울리게 생활하라. 여자분들이 그렇더라고요. 이 코트에 어울리는 가방이 있고, 이 코트에 어울리는 구두가 있고, 이 치마에 어울리는 신발이 있다고. 진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두가 그렇게 많아도 구두가 없다는 이유는, 이 코트를 새로 샀기 때문에 이 코트에 어울리는 구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여, 제발 귀를 열고 제대로 알아들어라. 여기 구두가 없다는 말은 이 코트에 어울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식한 남자들이 코트만 사주지 말고 구두도 사주고 다 사주라. 그런 말을 제가 어디서 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가 막힌 얘기가 여기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걸치면, 복음이라는 옷을 우리가 입으면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라는 옷을 입으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복음은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와 희생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너희는 복음을 입은 자로 십자가와 희생의 옷을 입고 합당하게 생활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라는 말 좋아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산다는 말은 십자가와 희생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희생하기 싫습니다. 십자가 지기 싫습니다. 남들 다 안 하는데 나는 왜?

그런데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신발이고 거기에 어울리는 옷입니다. 옷은 그렇게 깔맞춤으로 입으려고 하면서, 옷은 그렇게 어울리는 것 다 찾으면서 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않습니까?

9-2. 두려움을 넘어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신앙, 또 나옵니다. 복음의 신앙.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희생. 이것을 위해서 협력하라. 희생하라, 십자가 지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십자가 지고 희생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요? 아무도 그렇게 안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는 삶의 자리, 빌립보는 어떤 곳입니까? 로마에서 은퇴한 장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 사람들은 훈장을 막 달고 있습니다. 어깨에, 가슴에. 자색 옷감 옷을 입고 다닙니다. 로마의 황제를 위해서 저 식민지 개척을 하고, 그 사람들은 계급장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 호의호식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도시가 빌립보라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에서 희생하고 십자가 지고 살아가라. 이것이 말이 맞습니까? 이 말이 안 맞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청년들이 취직하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청년들이 결혼하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청년들에게 "너 십자가 져. 너 희생해. 너 고난받아." 이것이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대 청년들이 십자가 지려고 하니까, 뭔가 좀 갖추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제대로 살면서 십자가 지라면 하겠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십자가 지라고 하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될 의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사는 동네 모든 사람들이 로마 제국의 훈장을 자랑하고 훈장에 합당하게 생활한다 할지라도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라.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9-3. 믿음과 고난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는 믿음과 고난을 함께 주는 것입니다. 은혜만 오지 않습니다. 믿음도 고난도 함께 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잘 견디면 믿음이 확증됩니다.

10. 결론

빌립보서 1장 말씀은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의 자기 간증, 바울의 자기 상황에 압도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매여 있는 것이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었다고 했고, 바울은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은 그래서 자기가 살아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진보가 되고 본이 되고 기쁨이 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번 돌이켜 보시고 살펴보시고 다음 주에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바울의 자기 고백, 이 고백에 숨어 있는 위대한 비밀과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사랑이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죄짓지 않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며, 의의 열매 풍성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존귀하게 되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믿음의 진보가 되고 그의 기쁨이 된다는 사명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복음의 옷을 입은 자로 복음에 합당하게 어울리게 살아가게 하시고, 십자가 지고 희생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